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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눅20:19~26)
20:19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가 자기네들을 겨냥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신 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그 때에 예수께 손을 대어 잡으려고 하였으나, 백성을 두려워하였다.
20:20 그리하여 그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정탐꾼들을 보내서, 이들이 거짓으로 의로운 사람들인 체 행세하면서 예수께로 접근하게 하여, 그의 말씀을 책잡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예수를 총독의 치리권과 사법권에 넘겨주려고 하였다.
20:21 그들은 예수께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바르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또 사람을 겉모양으로 가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고 계시는 줄 압니다.
20:22 우리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20:23 예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알아채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24 "데나리온 한 닢을 나에게 보여다오. 이 돈에 누구의 얼굴상과 글자가 새겨져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황제의 것입니다."
20: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20:26 그들은 백성 앞에서 예수의 말씀을 책잡지 못하고, 그의 답변에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지금부터 제가 BC1280년에 쓰인 이집트의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에 나오는 내용을 몇 가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집트의 ‘사자의 서’는 죽은 자(死者)를 위한 사후 세계에 대한 안내서로, 그 안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당대 이집트인의 생각과 내세관(來世觀)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며 이집트의 신화, 풍속, 사회 현상, 역사 등이 녹아있는 문서들입니다. 주로 파피루스나 가죽 등에 성각문자(聖刻文字:히에로글리프) 신관문자(神官文字:히에라틱문자) 민중문자(民衆文字:데모틱문자) 등으로 적어서, 죽은 자와 함께 매장되었던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것이 BC1240년 경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이 BC1,400년경이므로 제가 지금 소개해 드리려고 하는 ‘사자의 서’가 쓰인 시기는 아마도 이스라엘의 사사시대 정도 될 듯싶습니다.
거기에는 이집트의 메시아라 불리는 호러스라는 신에 대한 기록이 적혀있는데 성경과 아주 흡사한 내용이 많습니다. 그 호러스라는 신은 사후 세계의 왕인 오시리스라는 신의 아들입니다. 그 신의 아들이 인간 세상에 메시아로 내려왔는데 그 때 그 호러스라는 신을 낳은 인간 어머니가 동정녀였습니다.
그리고 그 신의 아들 호러스는 강에서 세례를 주던 세례인 아넙(anup)에 의해 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의 아들 호러스에게 세례를 준 아넙은 후에 목이 잘려 죽는 참수를 당했습니다. 신의 아들 호러스는 사막에 있을 때 시험을 받았고, 병자들을 치유했으며, 소경의 눈을 뜨게 했고, 죽은 자인 아사르(asar)를 살렸으며,(아사르의 헬라어 표기는 Lazarus)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의 제자는 열두 명이쟈을 결국에는 예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리고 삼일 후에 두 명의 여자에 의해 인류의 구원자 호러스가 부활했다는 소식이 이집트 전역에 전해졌습니다.
사후 세계의 왕인 이시리스라는 신의 아들 호러스의 일생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일생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사자의 서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심판에 대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어서 사후 세계의 왕인 이시리스에게 가서 살아생전의 행위를 바탕으로 해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그 심판에서 악인으로 판결을 받은 자들은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가게 되고 의인으로 판결을 받은 자들은 영원한 부활의 몸으로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이시리스의 심판 후의 부활에 대비하여 죽은 육신을 매장하지 않고 미이라로 만들어 보관했던 것입니다.
어떠세요?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시면 혹시 기독교가 동방의 여러 종교나 신화들을 표절하여 만들어진 허구일거라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무려 1,300년 전에 예수님의 삶을 마치 비디오로 미리 본 것과 같은 내용이 적힌 문서들이 있다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이해가 되세요? 뿐만 아니지요? 노아의 홍수 사건이나 바벨탑 사건등도 모두 고대 신화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들입니다. 이쯤 되면 누구나 ‘기독교가 혹시 허구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번쯤은 하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저는 어떤지 한번 물어봐 주세요. 저는 그런 이야기들을 접할 때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다 사실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모두 다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더욱 더 확실하게 붙들게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여러분, 왜 이렇게 사람들이 수시로 흔들릴 수밖에 없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기독교 복음의 총론을 공부하기 전에 너무 앞서서 성경의 각론으로 들어가 실천신학의 범주에 머물러 버렸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성경의 가르침을 좇아 인간답게, 깨끗하게, 착하게 사는 것이라는 기독교에 대한 일천한 이해가 그렇게 수시로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성경은 그저 도덕적 공리나 윤리적 교훈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너무 많단 말입니다.
그들이 흔히 쓰는 단어가 역사적 예수라는 말입니다.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의 책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Von Reimarus zu Wrede)가 ‘역사적 예수의 탐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1910년)라는 제목으로 영역이 되면서부터 신학자들이 ‘역사적 예수’라는 말을 많이들 쓰는데, 역사적 예수라는 말은 순전히 현대의 비평적, 역사적 연구의 결과로 재구성된 예수의 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용어는 실제의 예수를 가리킬 수도 있고, 현재 실제의 예수로 알려진 것, 즉 만들어진 예수를 가리킬 수도 있는 애매한 용어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실제의 예수와 재구성된 예수가 꼭 같을 필요는 없는데,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무샇적 관하여 현재 알려져 있는 것이 반드시 사실로 존재했었던 것일 필요는 없다는 실용주의적 사고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교훈만 얻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 실재했던 것이든, 실재하지 않았던 것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적 관한 실재하역사적 사건들이 다 사실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과의 신학적 견해와 성경의 해석이 점점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 탐구적 있어서 이러한 차이는 지난 수십 년 간 매우 크게 확대되어 나타났것이든, 이는 슈바이처를 비롯한 많는 것유주의 신학자들이, 예수가 실재했었고, 그의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제자들이 남긴 예수적 대한 것이, 혹은 그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예수는 다분히 작위적 없것이라는 주장을 한 차이 왜냐하면 성경이 예수의 행적적 관하여 그렇게 많는 신빙성 있는 자료를 제공 그주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이, 그러한 논증으로 역사적 예수는 역사가 한 차이재구성한 예수라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하이데거나 야스퍼스에서 출발한 실존주의가 키에르케고르나 포이에르 바흐를 거쳐 사르트르, 까뮈, 불트만을 거치면서 지독한 인본주의로 변화하여 기독교 안으로까지 파고 들어와 기독교가 신론보다는 인간론에 더 관심을 갖고 집중하며 인간의 유익과 가치만을 챙기려고 하는 이상한 비빔밥 종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간디나 슈바이처나 법정 같은 사람이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조차 롤 모델이 될 수 있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선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요? 성경은 오직 예수만이 진리이며 오직 예수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건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고 예수를 믿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행위도 우리의 구원에 전혀 기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 롤 모델이 웬말입니까?
아프리카의 성자라 불리는 슈바이처는 그의 논문인 ‘역사적 예수의 탐구’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묻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라 말했습니다. 예수는 메시아로 이 땅에 와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렸는데 그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자, 자기가 십자가를 지고 죽게 되면 그 순간에는 오려나, 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졌는데 그래도 오지 않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고 죽어 버린 실패자 메시아라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 가서 평생을 선교사로 살았던 그의 행위가 인간들의 선악구조에 의해 판단된 착한 행위라는 것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그를 롤 모델 삼아 사는 것이 맞습니까? 그는 기독교 선교사로서 평생 어떤 예수를 전하다 갔을까요? 그가 정말 선교를 한 것이 맞습니까? 저는 슈바이처나 간디나 법정의 삶이 나쁜 삶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그러한 삶은 성경에서도 성도들에게 강조하고 요구하는 삶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의 총론이 아니라 복음의 각론에 불과한 것이란 말입니다. 간디가 아무리 매일 아침마다 산상수훈을 읽고 하루 종일 그 산상수훈의 삶을 살기 위해 애를 썼다고 해도 복음의 총론을 모르고 그렇게 산 삶은 다 자기 영광 챙기기, 자기만족 챙기기의 죄란 말입니다. 그게 성경이 말씀하는 바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기독교의 버림과 세상 사람들의 버림이 어떻게 다른 지를 설명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무소유의 삶의 대표자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법정 스님에 대해 언급을 했었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추구하는 버림이란,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며 자기의 죽은 흙 됨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는, 옛 사람의 버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처음자리는 죽은 먼지였다는 것을 아는 자는 절대 자신의 자 행위 결율법지킴과 착한 삶으로 자기 존재의 처를 챙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진짜 버림이며 그렇게 버림의 삶을 살게 되는 자들을 성도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반해 예수를 알지 못하고, 은혜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처음 자리도 알지 못 것채 자신의 평안과 자신의 만족과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소유를 버리고, 남을 위해 봉사를 하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은 자아실현의 다른 모습일 뿐 절대 자기부인의 버림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슈바이처나 간디나 법정 같은 타 자인들이 기독교의 버림을 실천한 사람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세상이 합심하여 들고 일어섰습니다. 지금 세상은 예수의 공로 결예수의 은혜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힘과 노력과 깨끗함으로 열심히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고 있고, 그렇게 살다가 간 이들을 롤 모델 삼아 인간 자체의 처 있음을 입증하고 있는데 그 롤 모델들의 처 있음을 부셔버리t 왜냐이라는 존재 자체가 무시되고 부정되는 것이고 아울러 자신들의 기특한 행위 또한 부정 것이는 것이기 때문에 대한 집자들들의갠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왜 법정의 착한 행위|기독왜 간디의 선한 행위|기독왜 슈바이처의 훌륭한 행위| 무시 하냐는 것입니다. 우리 왜냐하면최고 롤 모델들을 네가 뭔데 죄인 취급 하냐는 것이다.. 설교가 나가자마자 득달같이 라디오 논설위원들이 라디오 논평에서 저의 실명 버림론다. 무식하고 배타적이며 광신적인 목사라고 질타| 했고 불자 협회에서는 어떤 젊은 임원 버통해 협박 전화 죽은해 왔습니다. 그런 것은 얼마든죽은참을 수 있습니다. 당연한 결과이니까.. 그런데 제가 정말 가슴이 아팠던 것은 기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그 세상사람 들과 부화뇌동하여 ‘왜 착하고 선하게 이 땅을 살다간 사람들을 폄훼 하느냐’는 전화| 해 오더한 집자들들의갠디끝 죽은왜냐하면자존 버림챙겨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기독교 복음의 총론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맞습니까?
기독교 복음의 총론은 언제나 영광의 하나님에서부터 시작을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 스데반의 설교, 사도 바울의 설교 들을 잘 읽어 보세요. 그들이 언제나 그들의 설교를 ‘영광의 하나님이’로 시작을 한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복음의 주인공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광의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영광을 챙기기 위해 하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자로 들통이 납니다. 그러한 자들이 영광의 하나님 앞에서 내어 놓을 수 있는 게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회개입니다. 회개란, 내가 악한 일을 그만두고 선한 일 몇 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 저희는 죽은 흙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인데 저희들이 그동안 너무 기고만장했습니다. 하나님, 저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 순간이라도 부어지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자들입니다. 저희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라는 고백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 상태에서 하나님이 죽은 흙들에게 당신의 생명력을 부어 당신과 연합시키시는 것이 천국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자기들의 신 됨을 챙기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무력한 존재로 폭로가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아라는 건축물을 쌓는 데에 여념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생명나무에로의 접근을 불허하십니다. 화염검과 그룹들로 막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불러 세상에 보내시면서 세상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아 버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고 자아숭배에 빠져 있는 자들과는 절대 하늘나라를 공유하실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가치만을 챙기고 자기만족만을 챙기는 데에 여념이 없는 자들은 자신들이 철저한 죄인이며, 하나님께서 언제 지옥에 보내도 아무 할 말 없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수시로 유사 메시아를 보내십니다. 돈이라는 메시아를 보내시기도 하고, 명예라는 메시아를 보내시기도 하고, 자식이라는 메시아를 보내시기도 하십니다. 인간들은 그러한 가짜 메시아에 목숨을 겁니다. 애초에 하나님의 영광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은 죄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사망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으며, 지옥에 관해서도 무관심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조금 전에 말씀드린 ‘사자의 서’같은 글을 읽었다고 해 보세요.
분명 호러스라는 신에 관한 이집트의 신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와 닮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호러스는 죽은 자를 살리고, 물 위를 걷고, 병자를 낫게 하는 기적을 일으켰지만 인간의 죄를 속하는 힘이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돈이라는 메시아도 기적을 일으킵니다. 인간은 돈으로 사랑도 사고, 인기도 사고, 병도 고칩니다. 그런데 돈이라는 메시아에게는 죄를 속하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한 유사 메시아의 등장은 모두 다 하나님의 생명나무 가리기의 일환으로 보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당신백성 갈라내기 작업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경에도, 노자의 도덕경에도 성경과 흡사한 것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메시아들이 이렇게 많은데 세상아, 너희들은 어떻게 진짜 메시아를 붙들 수 있겠느냐?’ 그게 하나님의 생명나무 가리기입니다. 그 때 은혜를 입은 성도들만 믿음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유일한 메시아 예수를 붙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타락한 인간세상의 유일한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가 신이 되고 싶다고 하는 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은혜로 덮어서 당신과 연합된 자들을 새롭게 창조해 내시는 방법으로 메시아를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만 메시아일 수 있습니다. 그 분이 행한 선한 행위나 병자의 치유나 죽은 자를 살린 일이나 물 위를 걸은 그런 기적들은 복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은 다 전 인류가 빠지게 되어 있는 사망이라는 무서운 저주의 작은 증상들의 상징이며, 그것들을 해결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내가 바로 생과 사와 우주를 주관하는 진짜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주인확인 작업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집트의 신인 호러스에 관한 기사를 읽으셨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이렇게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 여기 두 종류의 메시아가 있다. 둘 다 기적을 일으켰고, 둘 다 죽은 자를 살렸고, 둘 다 십자가를 졌다. 그런데 한 쪽은 너희들의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을 하다가 간 것이고 한 쪽은 너희들의 영생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고 갔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똑같은 메시아다. 그러나 메시아라는 존재는 기적이나 일으키고 죽은 자나 살리고 물 위나 걷는 자가 아니라 너희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기 위해 너희들에게 보내어진 존재다. 너희들이 정말 너희들이 처한 죄의 문제를 처절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아무리 비슷한 모습을 하고 온 존재라 할지라도 그가 무엇을 위해 그러한 행위를 했는지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넌 지금도 호러스와 예수 사이에서 어떤 게 진짜 메시아인가를 고민하고 있니?’
여러분, 하나님은 끊임없이 이 땅에 걸림돌을 던지십니다. 진짜 자기 백성들을 가려내시기 위함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처음자리를 올바로 인식한 자들이고 그 처음자리에서 하늘 왕 노릇을 하는 자리로 값없이 옮겨진, 자신들의 신분을 자각한 자들이며, 그 처음자리와 하늘의 자리 사이에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열심이 은혜의 선물로 오롯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비슷한 메시아, 아무리 매력적인 메시아가 다가온다 할지라도 절대 십자가의 피가 빠진 메시아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복음의 핵심은 착한 일, 선한 일, 열심 있는 종교행위가 아니라 예수, 십자가, 피, 은혜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덮칠 때 우리 측에서는 자기부인, 옛 사람의 죽음, 새사람으로의 부활이 격발이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나’라는 자의 권세 앞에 하나님을 복종시키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 앞에 ‘나’라는 자가 죽은 핏덩이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 속에 나타나야 하는 복음의 현실인 것입니다.
세상이 착각하는 것이 움직이는 모든 것은 살아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 모든 것은 죽은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렇게 죽어 있는 피조물들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가입이 되어야 합니다. 그 자들만 산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진짜 이 세상에서 해야 하는 가치 있는 일, 선한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전하고 자랑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게 될 때 그 일만이 가치 있는 일이며 선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내가 영향력을 미쳐서 죽어 있는 세상과 죽어있는 존재들에게 공평한 세상, 깨끗한 세상, 누구다 대접받는 세상을 제공하겠다고 하는 것이 본받을 만한 일이 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시체들에게, 죽은 흙들에게 밥 지어 먹이고, 라면 끓여 먹이고,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살게 해 주고, 병 고쳐 주고 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볼 때 정말 가치 있는 일이며 선한 일입니까? 그건 성도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본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이해가 없는 그러한 모든 시도 자체가 지난주에 말씀드린 세상 건축자들의 잘못된 자아건축입니다. 그렇게 인간이라는 존재의 자아건축의 현장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들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인들의 자아 건축의 현장에 감리사가 되어 그들의 부실 공사를 폭로하는 역할을 했던 이들이 선지자들입니다. 지난주에 공부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에서 농부들에게 맞아 죽는 주인의 종들이 바로 선지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선지자들이 어떤 열매를 요구했기에 악한 농부들이 그 선지자들을 다 때려죽인 것인지 누가복음으로 가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기다리다가 예수를 만나고 사라지는 두 명의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시므온이라는 남자이고 하나는 안나라는 여자입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아기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본 것일까요? 그게 하늘의 눈을 가진 선지자입니다.
(눅2:36~37)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 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이 안나라는 선지자는 과부입니다. 고대시대의 과부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버림받은 자, 낮은 자, 연약한 자, 부정한 자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어떤 과부냐 하면 결혼한 지 7년 만에 과부가 되어 84년을 홀로 산 과부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할머니 선지자의 나이가 100세가 넘은 것입니다. 100세가 넘은 할머니 과부가 주야로 금식을 하며 성전에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조금 다르지만 고대시대에는 여자가 남자의 부속물 취급을 받았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위상에 따라 자신의 위상이 결정이 되는 남자 의존적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여자는 남편이 죽으면 존재의 가치를 상실했다하여 남편의 무덤에 산채로 함께 묻히기도 했습니다. 그걸 순장이라 하지요? 그 정도로 여자는 남자에게 귀속이 된 존재였습니다. 일찍이 남편을 잃고 그러한 가치 없는 존재로 100년 이상을 살았다고 해 보세요. 그녀의 삶이 어땠을까요? 아마 죽음과 같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녀가 진짜 남편인 어린양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삶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적 힘과 가치를 남편 삼아 살고 있는 이 세상 모든 인간들 사이에서 보잘것없고 가치 없는 자로, 세상 힘과 결별한 과부로 살다가 진짜 남편 예수를 만나는 어린양의 신부의 삶, 그것이 바로 선지자의 삶,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시면 안나라는 과부 선지자가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있는 이들에게 예수에 대해 증거를 합니다. 그건 율법의 옛 성전에서 은혜의 참 성전에 대해 설명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구원은 율법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아기로 말미암게 되는 은혜로 오게 된다는 것을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남편으로, 자신들의 힘으로 여기고 있는 바리새인 들 앞에서 율법과 사별한 과부가 진짜 남편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나라는 선지자가 어느 때에 예수의 구원을 설명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결례 예식이 진행 될 때에 와서 예수의 구원을 설명합니다.
(눅2:38)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 하니라
그렇지요? 마침, 바로 그 시간에 예수를 찾아와 예수의 구원을 설명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의 결례 예식과 안나의 행위가 어떤 연관이 있다는 말일 텐데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레위기 12장에 보면 여인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남자아이일 경우 7일간 부정한 여인이라는 혐의를 받게 되고, 33일간을 부정한 자로 격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아기가 여자일 경우에는 그 두 배입니다. 14일간 부정한 여인으로 혐의를 받게 되고 66일간을 부정한 여인으로 격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성전에 가서 비둘기들로 속죄제를 드려야 비로소 부정의 혐의를 벗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여자가 아기를 낳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바로 그 정결예식을 행하러 온 것입니다.
그러한 정결예식의 현장에 과부인 여자 선지자가 등장하여 구원의 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에서 여자가 아이를 낳았을 때 부정한 것으로 규정을 한 것은 여자로 대표되는 모든 인간들 속에서 나오는 것 중에 그 어떤 것도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막7:15~23)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특히 타락한 여자가 여자를 낳는 것, 자기 챙기기와 자아 실현의 건축으로 점철이 되는 모든 인간들의 노력과 열심은 부정함의 극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여자가 여자를 낳았을 경우에는 부정함의 혐의가 두 배로 늘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여자는 늘, 남자로 상징이 되는 하나님의 대척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피조물을 상징하는 것이라 했지요? 그런 면에서 여자, 즉 죄인들은 예수라는 남편으로부터 예수라는 아들을 낳아야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자는 예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남편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또 다시 여자가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배제한 율법지킴은 여자가 여자를 낳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정한 일이 정결케 되는 정결예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세상 남편을 오래 전에 잃은 과부가 예수라는 남편을 찾아와서 여자가 여자를 낳는 일을 부정해 버리고, 여자는 이 세상과 헤어져, 율법지킴이라는 인간의 자아 챙기기와 결별하고 과부가 되어 어린양 남편을 맞아들여야 비로소 살 수 있다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선지자입니다.
그리고는 그 과부는 사라집니다. 자, 지난주에 공부한 포도원 농부의 이야기 속의 그 악한 농부들에게 이 과부가 갔다고 생각해 보세요. 열심히 자기들이 원하는 율법의 열매, 제사의 열매, 도덕의 열매, 양심의 열매를 맺고 있는 자신들에게 ‘너희들은 부정한 여자야, 너희들이 낳는 것은 또 다른 여자일 뿐이야, 다른 열매 내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을 의지하겠다는 회개의 열매 내놔’라고 했다고 해 보자고요. 악한 농부들이 그 연약한 과부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죽이겠지요. 없는 열매를 자꾸 달라고 하니까요.
두 번째로 예수님의 정결예식 현장에 나타난 이가 시므온이라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안나와 시므온의 이야기에 안나라는 선지자는 아셀 지파 사람이라는 것이 기록이 되어 있는데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어떤 지파인지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므온이라는 이름 속에 지파에 관한 비밀이 담겨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굳이 안나의 지파를 밝혀 놓은 것입니다. 시므온 지파의 시조인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레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시므온이 레위와 함께 큰 사고를 저지르지요? 누이 디나가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자 그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후 칼을 들고 찾아가 다 죽여 버립니다. 그 일로 그 두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되는데 그것이 야곱의 유언에 나옵니다.
(창49:5-7)
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 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 이로다
7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지금 시므온과 레위는 선악과를 따먹고 신이 되어버린 자기들의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향해 아무 때나 칼을 들 수 있는 세상 모든 죄인들의 모형으로서 저주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저주를 받아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레위 지파를 부르셔서 당신을 섬기게 하시고 시므온 지파도 살려내십니다. 어떻게 살려내는지 보세요.
(수19:1)
1둘째로 시므온 곧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
분명 그들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져야 합니다. 야곱 자손들 중에서 분산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기업이 돌아갑니다. 누구의 기업이 나누어집니까? 유다지파의 기업이 나누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시므온 지파는 살아남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죽어야 할 시므온이 유다지파의 후손인 예수에 의해 살아나는 것을 시므온 지파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시므온 지파가 어떻게 지리멸렬하게 되는지 보세요.
(민1:23)
23 시므온 지파의 계수함을 입은 자가 오만 구천 삼백 명이었더라
(민26:14)
14 이는 시므온 종족들이니 계수함을 입은 자가 이만 이천 이백 명이었더라
이스라엘의 일 세대 60만 명이 광야에서 다 죽고 새로운 세대 60만 명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데 유독 시므온 지파만 반 이상으로 줄어들지요? 하나님의 저주가 실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대상4:24,27)
24 시므온의 아들들은 느무엘과 야민과 야립과 세라와 사울이요
27 그 온 족속이 유다 자손처럼 번성하지 못 하였더라
더욱 선명하게 시므온 지파의 저주가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들어 가고 쇠하여져 가는 시므온 지파의 시므온이 유다 지파의 후손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눅2:28~32)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 이니이다 하니
하나님의 저주로 쇠하여 지고 있는 자 시므온이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시는 어린양 예수에 의해 그의 공허를 해결하고 평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시므온은 시므온 지파에게 떨어진 저주로 인해 커다란 공허와 불안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평안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앞에 그 공허를 채워줄 유일한 분, 유다 지파의 후손이신 예수가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가 그의 공허한 마음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의 공허가 평안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시므온이 이제 죽어도 좋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제야 하나님이 나를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가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구원을 설명하는 선지자로서, 시므온과 유다 지파의 역사를 한 몸에 품고 와서, 구원이란 이렇게 마땅히 흩어지고 분산되어 죽어야 할 자들에게 유다지파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의 은혜가 부어져 평안이 허락되는 것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선지자입니다.
역시 은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시므온과 안나라는 선지자들이 옛 성전에서 새 성전으로 오시는 은혜의 예수를 만나고 처절한 쇠함과 약함과 부정과 저주의 상태에서 어린양의 신부로 엮어지는 그림이 누가복음 2장입니다. 그러한 시므온과 안나의 삶을 예수가 그대로 살다가 가시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1장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모든 선지자들의 총합이시라고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므온이 되고 안나가 되십니다. 과부 안나처럼 시므온 지파처럼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쇠하여지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여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 참 승리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렇게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시므온처럼 쇠하여지고 안나처럼 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선지자의 눈에 비로소 진짜 유다지파의 후손, 진짜 남편인 예수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함과 가난함과 무력함을 저주라고 생각하는 이 세상 악한 농부들이 이렇게 나약한 선지자들, 메시아 예수를 좋아할 리가 있겠습니까?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왜 자기들의 노력과 열심을 전부 부정하냐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세상과 결별하고 과부로 시므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의 현실이 자랑도 될 수 없고, 부끄러움도 될 수 없습니다. 성도는 모두 과부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자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물으십니까? ‘너를 정죄하던 자들이 다 어디 있느냐?’ 그러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음을을 하십니다. 그 음은 예수가 고소하지 않으면 이 세상의 정죄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간음을인 것입니다. 무효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 자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너를 간음한 자라고 고소를 한다 해도 내가 고소하지 않는 한 너는 무죄라는 것입니다. 그게 용서이며, 그게 은혜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하여 율법을 기각하시고 은혜의 복음을 이야기하시는데 율법주의의 상징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절대 그 은혜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자들이 예수님께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셋돈으로 내는 데나리온을 하나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데나리온은 유대 뿐 아니라 로마제국의 모든 영역에서 쓰였던 은 동전입니다. 그 동전의 앞면에는 ‘신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시저 아우구스투스’라는 글이 있고, 뒷면에는 ‘최고 신관(Pontifex Maximus)’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로마의 돈에는 로마의 황제가 신이라는 말이 적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돈을 가리켜 ’맘모나스‘신이라 한 것과 맥이 통하지요?
이 세상의 힘이 진짜 힘이며, 그것이 바로 신이라는 세상 힘의 원리 속의 신관이 그 동전 하나에 완전하게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동전을 가리키시면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은 세금은 가이사의 것이니까 떼어먹지 말고 가이사에게 꼬박꼬박 내고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까 떼어먹지 말고 하나님께 내라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가이사의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심지어 가이사의 황제자리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롬13:1)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럴진대 이 세상에 가이사의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에도 우매한 인간들은 가이사로 대표되는 세상의 힘을 실존하는 신으로 여기며 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가이사의 힘을 얻어내기 위해 가이사에게 언제든지 복종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이사는 허구의 신인 것입니다. 그런 허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따라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는 말씀은, 가이사, 즉 세상 권세에 속해 있는 자들은 세상일에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에게 집중하여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가이사의 돈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가이사의 권세 아래에 이미 속해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것에 의해 그들의 삶이 움직여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그렇게 가이사의 것인 세상의 힘과 가치 아래에서 속박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그게 타락한 모든 인간들의 실존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소유를 찾아 가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원래 성전에서는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져 있지 않은 갈릴리, 두로의 동전만을 사용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 돈 바꾸어 주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건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구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안에서 유대인들이 가이사의 동전을 소유하고 그것으로 세금을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물음으로 해서 자기들이 이미 그 가이사의 권세에 복속되어 있음을 폭로 당한 것입니다. 가이사라는 신을 실체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세상의 힘으로 자신들의 가치와 영광과 만족을 챙기려 하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의 자기들의 행위에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로마의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행위와 안 내는 행위에 의해 가이사의 소유됨과 하나님의 소유됨의 갈림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던 하나님에게 십일조를 바치던 그러한 인간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소유됨이라는 사건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벧전2:9~10)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보세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됨은 그들이 무엇을 행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측에서 일방적으로 ‘넌 내거야’라고 선언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유를 그렇게 은혜와 긍휼로만 택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덕을 선전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라는 말은, 가이사라는 세상의 힘에 착념하여 가이사화 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소수의 선택된 하나님의 것들이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것이 된 것이므로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고 자기를 부인하며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하나님의 것으로 드려지는 삶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표현을 했지요?
(롬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것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삶은 하나님의 백성이 매일같이 제물로 죽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시므온 지파의 삶이었고, 과부 안나의 삶이었으며, 선지자들의 삶이었고, 예수의 삶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것이라는 단어 ‘타 투 떼우’라는 단어가 복음서에도 등장하는데 그 유명한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대화에서입니다.
(마16:22-24)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 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 이니라
23절의 ‘하나님의 일’이 ‘타 투 떼우’입니다.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의 일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것을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립니까? 따라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의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다른 말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되는 것임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그게 산상수훈의 하나님 대접인 것이고요.
그렇게 하나님의 것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공로,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자로 하나님 앞에 죽은 흙으로, 제물로, 연약한 자로 내려가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를 믿는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일을 이렇게도 표현을 하십니다.
(요6:28~29)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께 드려지는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것은 예수의 행함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릴 하나님의 것 또한 예수님의 행하심을 믿는 믿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헌금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의 것이 됩니까? 하나님이 정말 그 돈을 받으시는 걸까요? 아니지요? 그럼 무엇을 받으시는 것입니까? 그 헌금을 드리는 여러분의 마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헌금을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먼저 우리를 위한 헌금, 우리를 위한 제물로 바쳐짐으로 우리가 살아났으므로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전부 드립니다.’라는 고백으로 드리는 것이 헌금이잖아요? 그 마음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그것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성도 이외의 이 세상 가이사의 것들은 가이사에게 바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상징이 되는 가이사에 속해 가이사의 행사를 하여 자기의 영광과 가치를 열심히 챙기다가 영원한 사망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인 여러분은 열심히 하나님의 소유된 자로서의 낮아짐을 경험하며 예수를 믿는 자, 예수만을 의지하는 자로 지어져 가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 바쳐지는 일 보다는 가이사의 것으로 가이사에게 바쳐지는 경우가 훨씬 많지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러한 우리를 위해 홀로 모퉁이 돌이 되심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를 기억하십시오. 그 예수의 일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가이사의 것으로 영원한 멸망에 던져질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그 복된 현실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더러움을 몇 가지 선한 일과 착한 일로 뽀샵을 하며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뽀샵 인생들의 삶에 찾아오셔서 엑스레이를 쏴 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성도들은 원래의 생얼로 폭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추악한 생얼에 하나님의 은혜의 옷이 덮여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겸손의 자리,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참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첫댓글 이걸 다 정리하셨네요!
쉽지않은 일인데!
참 감사해요! 이렇게 말씀들을 사모하는 열정들을 나눌 수 있어서.........,
제가 정리 한게 아니고요
서머나교회에 올라 있는걸
편집만했어요
편집의 과정도 읽어보고, 이해하고, 정리해야하니
그런과정도 은혜가운데 있는 일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