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롯데월드의 건축 허가를 놓고 논란이 많다. 남산의 높이가 해발 243m, 남산타워의 높이가 236m, 도합 479.7m인데 롯데월드의 높이는 112층 555m에 이른다. 남산타워 꼭대기 피뢰침보다 더 높게 짓겠다는 것이다. 하늘에 더 가까이 가려는 인간의 노력이 건축사에서는 고딕양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면, 롯데월드는 하늘을 향한 신앙심의 극치라고나 해야 할까? 높고 좋은 건물을 짓겠다는 것을 내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겠으나 도대체 왜 그런 건물을 짓는지, 짓고 난 후에는 어떻게 그것을 유지하려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건물의 내용에 하등의 새로운 창조적 문명의 패러다임이 없는 것이다. 기존 상권을 빨아 잡술 뿐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쉽게 망각하는 것은 20층만 넘어가도 화재 시 소방서가 할 일이 별로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칼릴 지브란이 태어난 브샤레 마을을 바라보면서 인류문명의 21세기적 패러다임은 이런 모습에 있지 않을까,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영험스러운 인간의 삶이 생동치는 새로운 커뮤니티의 모습을 나는 목도하고 있었다. 임진권 기자 |
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너희에게 여태 눈이 보지 못한 것, 귀가 듣지 못한 것, 손이 만지지 못한 것,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아니 한 것을 주리라.”
1 Jesus said, “I shall give you what no eye has seen, what no ear has heard, what no hand has touched, what has not arisen in the human mind.”
우리는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며, 헬레니즘 문명권의 사람이며, 페니키아 문명의 전통 속에서 활동한 사람이며, 아시아 대륙의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망각해 버린다.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그린 이탈리아 미남형의 구레나룻 털보 남자로 생각하거나 서구라파 전통 속에 갇혀 버린 전형적 서양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장의 예수 말씀도 그 본래적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서구적 신비주의(mysticism)의 맥락에서 오묘하게 해석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서양 주석가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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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 ,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惚恍.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希)라 하고,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미(微)라 한다. 이·희·미, 이 셋은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다. 그러므로 뭉뚱그려 하나로 삼는다. 그 위는 밝지 아니 하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아니 하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데 이름할 수 없도다. 다시 물체 없는 데로 돌아가니, 이를 일컬어 모습 없는 모습이요, 물체 없는 형상이라 한다. 이를 일컬어 홀황(惚恍)하다 하도다.
놀랍게도 예수의 말과 노자의 말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처음의 삼자, 볼 수 없는 것(the invisible), 들을 수 없는 것(the inaudible), 만질 수 없는 것(the intangible)이 순서도 틀리지 않고 일치한다. 이 이·희·미 삼자는 논리적으로 꼬치꼬치 따져 규명할 수 없다는 노자의 말은 예수에게서는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아니 한 것”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하고 있다. 즉 인간의 개념적 언어인식의 한계를 초월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일자 즉 하나(the One)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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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함과 같으니라.
바울이 “기록된 바”라고 하여 인용한 이 구절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울은 4복음서가 쓰이기 이전에 죽은 사람이다. 따라서 바울의 메시지는 4복음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이사야 64:3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으나 그 의미맥락이 전혀 다르다. 바울이 도마복음서를 인용하였다고는 생각하기는 어려우나 최소한 도마복음서의 자료가 된 어떤 전승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도마복음서의 출현은 성서 이해에 새로운 차원을 도입하고 있다.
큐복음서 제33장(마 13:16~17, 눅 10:23~24)에 나오는 “너희가 지금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라는 예수의 말씀도 본 장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본 장을 이해하는 핵심은 “황홀”의 해석에 있다. 마태 13:17이 말하듯이 “볼 수 없는 것”은 결코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수에 의하여 선사되는 그 무엇이다. 여태까지 최고 권력자들인, 선지자나 왕들이 볼 수 없었던 것을 보는 그 눈이야말로 복된 것이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만드는 데 바로 예수나 노자의 말씀의 위력이 존하는 것이다.
볼 수 없는 것, 들을 수 없는 것, 만질 수 없는 것은 결국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객관적 사유 속에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이라는 것도 개념적 인식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황홀이란 결코 신비로운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명(有名)의 세계에 대하여 무명(無名)을 말할 뿐이다. 노자에게 있어서 유명이란 유욕(有欲)의 다른 말이요, 무명이란 무욕(無欲)의 다른 말이다. 인간은 결코 개념적 인식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개념적 인식에서 문제되는 것은 그 고착성이다. 고착적 개념은 그릇된 욕망을 자아낸다. 인간의 과도한 분별지(分別智)는 항상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욕망 그 자체가 죄악은 아니지만, 고착된 개념을 향한 집착은 인간을 독선과 오만과 번뇌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만다. 집착이나 욕심·욕정이 사라지면 분별지는 무분별지로 전식(轉識)하게 되고, 무명의 경지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보이는 것에 집착하기만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예수에게서 선물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당만 짓고 세속적 축복만을 갈망하고 물리적 번영만을 기구(祈求)한다. 초기 예수운동의 모습은 이와 정반대였다. 보이는 것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며, 들을 수 있는 것을 버리고 들리지 않는 것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추구의 핵심은 나 존재의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다. 욕망의 부정은 욕망의 근절이 아니라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만져지는 것, 마음속에 통상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것들에 대한 집념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만져지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다. 어찌 세속의 형상에 집착하는 자들을 예수를 믿는 자라 말할 수 있으리오?
[도올의 도마복음] 종말은 끝에 있지 않고 시작에 있나니라
구약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찬란한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할 때, 반드시 떠오르는 단어가 ‘레바논의 백향목(柏香木)’이다. 어려서부터 ‘레바논의 백향목’이라는 말은 나에게 ‘백향’이라는 음성학적 울림과 함께 매우 로맨틱한 상상력을 자아냈다. 나의 체험이 미칠 수 없는 어떤 신비로운 물건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나무 중에 왕이요, 레바논의 영광이며(이 35:2, 60:13), 그 강인함과(시 29:5), 장대한 높이와(왕하 19:23), 위엄(왕상 4:33, 왕하 14:9)으로 천하를 제패하는 생명의 나무였다. 그런데 그 백향목을 직접 바라보는 나의 가슴속에서는 로맨스가 역사로 변하고 있었다. 그 숲에서 진동하는 형언키 어려운 향기는 나의 영혼을 씻어주는 힘이 있었다. 우리나라 금강산의 미인송 비슷한 소나무과(family Pinaceae)에 속하는 상록교목인데 더 굵고 단단하다. 솔로몬은 두로 왕과 상업동맹을 맺고 레바논 산에서 자른 백향목을 욥바까지 뗏목으로 내려보내, 거기에서 예루살렘까지 육로로 40㎞를 갔다. 솔로몬은 백향목의 대가로 갈릴리 지방의 성읍 20개를 두로 왕에게 주어야 했다. 백향목은 해발 1500m 이상에서만 자라고, 나이테가 1~2㎝가 되는 보통 나무들과 달리 1~2㎜밖에는 되지 않는 단단하고 곧은 나무이다. 불행하게도 수천 년 동안 벌목만 하고 심지 않아 지브란의 동네 카디샤에 400여 그루가 남아있을 뿐이다. 임진권 기자 |
제18장
1 제자들이 예수께 가로되, “우리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옵소서.” 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시작을 발견하였느뇨?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종말을 구하고 있느뇨? 보아라!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을지니라. 3 시작에 서있는 자여, 복되도다. 그이야말로 종말을 알 것이니,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라.”
1 The followers said to Jesus, “Tell us how our end will be.” 2 Jesus said, “Have you discovered the beginning, then, so that you are seeking the end? You see, where the beginning is the end will be. 3 Blessed is the one who stands at the beginning: That one will know the end and will not taste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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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종말’을 이야기하면 곧 그것을 초대 교회의 종말론(eschatology)과 연결시킬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의 본래적 모습에는 종말론적 윤색이 없다. 예수는 결코 종말론적 사상가가 아니었다. 따라서 도마복음은 종말론과 무관하다. 도마복음의 비종말론적 성격을 두고, 도마복음의 연대를 내려 잡는 사람들은, 초대 교회 종말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는 식으로 주해를 가한다. 그러나 도마복음의 로기온 자료는 대부분이 초대 교회 이전의 오리지널한 예수운동의 성격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당하다. 그 정당성은 텍스트 그 자체가 말해주고 있다.
이집트 사막의 거대한 피라미드나 돌 건축도 레바논의 백향목 없이는 불가능했다. 비계, 운반 굴림목, 지붕, 문, 창틀 곳곳에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 동쪽 지하에 묻힌 태양의 배. 쿠푸의 영혼이 하늘로 가기 위해 타는 43.5m 길이의 이 배도 물론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거대한 태양의 배도 종말과 시작이 끊임없는 순환임을 말해주고 있다. |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從容)히 묻자오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막 13:3~4).
도마복음의 “제자들”은 여기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로 구체화되었다. 도마복음의 제자들은 구체적 지칭성을 지니지 않는다. 말씀의 해석을 발견하기 위하여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다(도1). 그리고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한다”는 구체적 상황성이 맥락적으로 전제되어 있지 않다. 이미 마가는 도마복음의 추상적 주제들을 예수 생애의 드라마적 장면 속에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마복음의 “우리의 종말”이 “어느 때에 이런 일”로 변형되고 있다.
“이런 일”이란 이미 그 앞에서 이루어진 예루살렘 성전 멸망에 대한 예언(막 13:1~2)을 지칭하고 있다. 도마의 추상적 질문이 철저히 종말론적 맥락 속에서 변형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 멸망에 대한 예수의 예언은 당연히 실제적 역사 상황 속에서 일어난 예언일 수 없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은 티투스의 4개 군단이 예루살렘 성전을 멸망시킨 사건(AD 70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서 작가들은 이와 같이 이미 일어난 역사적 사태들을 놓고 마치 사전에 이루어진 예언의 성취인 것처럼 드라마타이즈시키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문학적 상상력은 구약의 다양한 기술 속에 내재하는 오랜 전통이다. 그리고 예언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며, 현실에 대한 도덕적 징계에 있는 것이다.
점쟁이 스타일의 예측에 있지 아니 한 것이다. 그런데 마태의 기술은 한 발짝 더 나갔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사건과 예수의 재림은 인과적으로 필연적 관계가 없다. 여기 “임하심”이라는 말로서 선택된 “파루시아”라는 말은 예수의 임박한 재림을 나타내는 전문용어이다. 마가는 예루살렘 성전 멸망이라는 사건만을 이야기했는데, 마태는 거기에 “주의 임하심”(재림)과 “세상 끝”(종말)이라는 두 사태를 첨가시켜 놓았다. 초대 교회의 문제의식을 더욱 명료하게 노출시킨 것이다. 즉 마가의 숨겨진 의도를 마태는 명백하게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그 뒤로 ‘공관복음서의 계시록’이라고 말하는 종말에 대한 경고가 이어지고 있다. 마가는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라고 표현한 것을, 마태는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라고 하여 그 표현을 기독론적 맥락에서 구체화시키고 있다.
여기 도마복음을 살펴보면 그 본래적 맥락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는” 외재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종말”이라는 실존적 사태였다는 것이 드
러난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묻고 있는 “우리의 종말”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의 종말”은 제자들의 개체적 사태이며, 그것은 개체의 죽음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죽음은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일어날 것인가?
공자의 사랑하는 제자 안회(顔回)가 죽었다. 아마도 안회의 장례를 치르고 난 직후였을 것이다. 자로가 공자에게 불쑥 묻는다: “죽음에 관하여 감히 여쭙고자 하옵니다.”(敢問死). 이에 공자는 무어라 대답했던가?: “아직 삶도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未知生, 焉知死).
전통적으로 이러한 공자의 대답은 기독교의 사상과는 아주 대조적인 현실주의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종말을 캐는 제자들의 물음에 관한 예수의 답변은 공자의 대답방식과 크게 차이가 없다. 공자는 죽음에 대한 물음을 삶에 대한 물음으로, 그 관심을 근원적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예수도 마찬가지다! 종말에 대한 물음을 근원적으로 시원·시작에 대한 물음으로 전이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너희들이 나에게 너희들의 종말에 관해 묻는가? 그렇다면 너희들이 이미 너희들의 시작을 발견하였느뇨? 시작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종말을 구하고 있느뇨?” 공자가 죽음을 삶으로 이동시켰다면 예수 또한 종말을 시작으로 이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의 사고의 근원적 혁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과연 예수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도올의 도마복음] 나 예수는 종말론의 종말을 선포하노라, 시작에 서라
91. 페르시아적 사유와 초기기독교
감람산(The Mount of Olives) 전경. 인서트 사진은 감람산 중턱 겟세마네 동산에 세워진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 감람산은 예루살렘과 기드론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동편에 있는 동산으로 베다니와 여리고 방면으로 쭈욱 뻗쳐 있다. 감람산은 해발 850m.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250m 낮다. 감람산이라는 명칭은 구약에는 두 번밖에 나타나지 않는다(삼하 15:30, 슥 14:4). 그러나 신약에는 예수가 예루살렘 부근에 있을 때는 기도나 휴식할 때 항상 찾는 곳으로 등장한다(마 24:3, 26:30, 눅 21:37, 요 8:1).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도 감람산 방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마 21:9). 본 장의 종말론적 언급도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임진권 기자 |
1 제자들이 예수께 가로되, “우리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옵소서.” 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시작을 발견하였느뇨?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종말을 구하고 있느뇨? 보아라!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을지니라. 3 시작에 서있는 자여, 복되도다. 그이야말로 종말을 알 것이니,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라.”
도마복음서의 발견과 큐복음서의 재발견은 초대교회에 대한 전통적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20세기의 신학사조는 아무리 과격한 사조라 할지라도 최소한 1세기의 초대교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그 오리지널리티를 인정하고, 그것이 기독교의 진정한 출발이라고 암암리 전제하여 왔다. 그것이 어떠한 모습을 지니든간에 숙명적으로 그것은 기독교의 원점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의 출현은 이러한 가설에 새로운 차원들을 도입하게 만들었다. 원점을 거슬러 또 새로운 원점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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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본래적 성격이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는, 현재의 보수적 교권의 압력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매우 미묘한 문제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기독교(Christianity)’라 할 때에는 이미 기독론(Christology)의 전제가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운동(Jesus Movement)’은 기독교 이전의 사태이며, 기독교의 전제들에 물들지 않은 어떠한 원초적 성격의 사회운동이었다. 예수운동에서 기독교로의 전환에는 불과 30, 40년의 시간의 개입이 있을 뿐이지만 크게 두 가지 왜곡된 설정이 있다. 그 하나가 기독론이고 또 하나가 종말론이다.
(왼쪽 사진)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 있는 2000여 년의 수명을 지닌 올리브나무. 이 나무는 예수의 기도와 설교와 체포를 직접 목격했다. 지금도 그 진실을 간직한 채 묵묵히 세월을 견디어내고 있다. (오른쪽 사진)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었던 페르세폴리스의 부조 아후라 마즈다상. 상반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손에는 원반을 쥐고 있으며, 허리 아래 양옆으로 날개가 펼쳐져 있다. 날개는 사유의 순결과 말과 행동을 상징한다. 아후라 마즈다를 최고 신으로 섬기며 페르시아 종교를 개창한 조로아스터는 공자와 동시대이며, 바로 니체가 말하는 차라투스트라이다. 베들레헴의 마구간 아기 예수를 방문한 동방박사 3인도 조로아스터교의 3마기(magi)로 간주되고 있다. |
‘왜곡’이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린다면 예루살렘 멸망 이후의 절박한 시대적 요구와 복음서 작가들의 탁월한 문학적 상상력에 의한 정당한 트랜스포메이션이라고 말해도 좋다. 기독론이란 역사적 예수가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아들, 즉 독생자이며 이 세상을 침략자들의 억압에서 구원할 구세주라고 하는 신념을 표방하는 메시아사상(Messianism)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메시아는 매우 구체적인 정치사적 함의를 지니는 사건이며 다윗 왕가의 혈통에서 나올 때만 그 정통성이 확보된다. 이 메시아 사상은 명백히 유대인 자체의 전통에 속하는 것이다. “시작에 선다”는 말에서 “선다”의 중요성은 이미 제16장에서 해설되었고,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라”는 구절은 제1장에서 충분히 논의되었다
그러나 종말론은 유대인의 사상이 아니다. 마태 24:3에 나오는 “세상 끝”이라는 표현도, 구약성서에서 “아하리트 야밈(aharit yamim, end of days)”이라고 표현되는 것인데, “아하리트(끝)”는 적당히 먼 미래의 시점을 나타내는 것이며 우주적 종말이나 시간의 종료를 나타내는 말은 아니다. 중동세계의 종말론이란 거개가 모두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에 근원하고 있다. 빛의 세력인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와 어둠의 세력인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 간의 우주적 대결로서 설정된 코스믹 드라마에서 어둠의 세력의 종국적 멸망을 의미하는 시점을 종말로서 인지하는 사유는 구약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생소한 것이다.
예언자들을 통한 끊임없는 하나님의 심판은 오히려 현재적인 것이며 현세적인 것이다. BC 587/586년의 솔로몬 성전의 멸망과 바빌론 유치는 현세적 정치지도자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절망감과 더불어 그 반사적인 희망을 종말론적으로 표현하게 만들었다. 페르시아 문명의 사상이 유대인들의 사유 속으로 깊게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 하스몬왕조(the Hasmonian kings)의 문란한 통치에 대한 실망감, 로마제국의 지배, 그리고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으로 종말론의 분위기는 가중되어만 갔다. 예수시대에 이미 기존해 있었던 쿰란공동체의 극심한 종말론적 성향을 고찰할 줄 안다면 초대교회가 이러한 종말론적 분위기를 계승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시대적 요청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종말론이란 근원적으로 허구적인 망상이다. 우리나라의 졸렬한 종말론자들이 신봉하는 요한계시록도 결국 종말을 말하지 않는다. 천년왕국을 말하고 사탄의 패망을 말하고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말할 뿐이다. 종말이란 희망 없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천박한 종말론자들이 생각하는 종말이란 기껏해야 ‘지구의 재앙’ 같은 것인데, 지구가 설령 거대한 혜성과의 충돌로 파멸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은하수의 한 먼지가 사라지는 수준밖에는 되지 않는다. 시간의 종말을 의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라는 개체의 종말이 억울하다고 지구의 재앙을 소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종말’이란 전 우주가 다시 거대한 블랙홀로 빨려들어가지 않는 한 어떠한 경우에도 시간의 종료를 의미할 수는 없다. ‘종말(end)’이란 시간의 종료가 아니라, 나의 삶의 완성(consummation)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어적 표현에서도 끝(end)이라는 뜻은 항상 목적(end)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나의 죽음은 나의 삶의 완성이며, 나의 존재가치의 목적이 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어떻게 잘 죽느냐 하는 것이 나의 삶의 보람일 수 있는 것이다.
제17장 주해에서 인용한, 노자가 ‘홀황(惚恍)’을 말하는 대목에서 ‘복귀어무물(復歸於無物)’이라는 구절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물(物)이 없는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뜻인데, ‘다시’라는 말은 끊임없는 회귀(回歸)를 의미하며, ‘무물(無物)’이란 분별된 사물의 세계가 아닌 그 이전의 원초적 무차별의 혼융(混融)한 상태를 의미한다. 즉 코스모스 이전의 카오스(Chaos)적인 일체감을 나타내는 말이다. 재미있게도, 역사적 예수의 사상에는 이러한 카오스적 세계에 대한 예찬이 있다. 남녀의 문제도 그는 남녀로 분화되기 이전의 ‘아담’을 예찬한다(도 114).
종말을 묻는 제자의 질문에 종말은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작에 있다고 설파하는 예수의 역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제 독자들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후대에 형성된 서구적 사유의 틀 속에서 단순하게 해석될 수 있는 그런 직선적 시간론의 사상가가 아니다. 예수의 당대에 이미 천박한 종말론이 성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는 그러한 종말론의 종말을 선포하는 역설적 사상가였다.
[도올의 도마복음] 돌이 떡이 되어 너를 섬길 때 진실로 너는 영적이 되리라
92. 존재와 존재-전(前)-존재
제19장
내가 지금 들여다보고 있는 안티옥 산 중턱의 석굴이 바로 초대 교인들의 주거지인 동시에 교회였고 수행 동굴이었고 무덤이었다. 이 동굴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모습이 바로 안티옥 전경이다. 도시 뒤로 뿌옇게 보이는 산이 타우루스(Taurus) 산맥의 줄기이고 도시 한복판으로 오론테스(Orontes) 강이 흘러 지중해로 들어간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티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티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유래된 곳인데, 이곳에서 비로소 비유대인인 헬라인에게도 그리스도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안티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가는 국제도시였기 때문에 유대인의 독주가 허용될 수 없었다.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은 외부인들이 예수 신앙인들을 비하시키는 명칭이었을 것이다. 임진권 기자
1 예수께서 가라사대, “존재하기 전에 존재한 자여, 복되도다. 2 너희가 나의 제자가 되어 내 말을 듣는다면, 이 돌들도 너희를 섬기게 되리라. 3 왜냐하면 너희를 위하여 파라다이스에 다섯 그루의 나무가 준비되어 있나니, 그 나무는 여름과 겨울에 따라 변하지도 아니하며, 그 잎사귀는 떨어지지도 아니하기 때문이다. 4 그 나무를 아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1 Jesus said, “Blessed is the one who came into being before coming into being. 2 If you become my disciples and listen to my words, these stones will minister to you. 3 For there are five trees in Paradise for you; they do not change, summer or winter, and their leaves do not fall. 4 Whoever knows them will not taste death.”
도마복음이 일시에 한 사람에 의하여 집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도마복음의 로기온 자료들도 다양한 전승의 예수 말씀들이 누군가에 의하여 수집된 결과물일 것이다. 그 수집 과정이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을 수도 있고,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수집의 주체가 개인일 수도 있고, 집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도마복음의 내용들은 최소한 마가복음에 선행하는 것으로, 복음서라는 드라마적 양식을 규정짓고 있는 사상적 틀에 오염되지 않은 어떤 오리지널한 예수 운동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사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1930년대 발굴을 통해 드러난 안티옥 지역의 모자이크. 소테리아(soteria·salvation)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니 이 여인이야말로 인간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구원의 여신일 것이다. 기독교 이전의 헬라인들의 구세주관을 엿볼 수 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놓고(偏袒右肩·싯달타의 습관) 월계관을 쓰고 화려한 목걸이를 한 이 여인의 모습은 헬레니즘 시대의 관세음보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도마복음을 복음서로서 이름 짓는 것은 원 텍스트의 말미에 “유앙겔리온(복음)”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기 때문인데, 도마복음의 복음의 의미와 공관복음서의 복음의 의미는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다른 함의를 지닐 수 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good news)”이다. 마 11:5에는 종말에 대한 기쁜 소식이 전파되며, 눅 16:16에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이 전파되고 있다. 그러나 도마의 기쁜 소식은 종말론이나 기독론적 함의를 지니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이 신화적 담론에서 벗어나 있다. 따라서 도마복음은 결코 영지주의적 담론의 소산으로 보기 어렵다. 영지주의라는 것 자체가 일괄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대부분 유치한 신화적 코스몰로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도마는 그러한 신화적 코스몰로지를 전제로 하기보다는 매우 견고한 우리의 상식에 호소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장의 성격은 그러한 방식으로 도마를 규정하는 상식적 담론의 틀을 깨버린다. 도마도 역시 중층적으로 담론의 틀들이 엇갈려 있는 것이다.
우선 “존재하는 것들”이라는 세속적·현상적 존재와, 그 세속적 존재 이전의 존재, 즉 “존재하기 전에 존재한 자(a pre-existent existence)”라는 어떤 신화적 존재의 이원적 틀이 본 장의 담론에 전제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히 시간상의 전후를 말하는 존재의 하이어라키에 그치지 않는다. 요한복음 1장에 깔려 있는 로고스기독론의 틀을 연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요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든가 요 9:58의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와 같은 언어에 깔려 있는 세계관을 연상시키는 발언이다.
이 안티옥 외곽 동굴교회의 전면은 12~13세기 십자군 시기의 작품이지만 그 내부의 석굴은 사도 바울의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의 본부였다. 베드로도 여기에서 한때 머물렀다. 이 석굴교회야말로 이방 기독교의 산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최고(最古)의 성지이다.
이러한 사상의 배경에는 영지주의가 깔려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고전 15:44~49에는 바울이 이러한 세계관을, 희랍적 영육 이원론의 틀 속에서 철저히 부활을 정당화하는 논리로서 사용하고 있다.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대비시키고 있는데 첫 사람 아담은 육의 인간이며 땅의 사람이고, 마지막 아담, 즉 부활한 인간은 영의 인간이며 하늘의 사람이다. 도마의 존재-전-존재는 바울의 마지막 아담과 상통한다. 요한은 로고스를 예수에게만 국한시키고 있지만 도마는 그러한 가능성을 모든 인간에게 허용한다. 그래서 존재하기 전에 존재한 자들이야말로 복되도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한 로고스적 가능성을 소유한 인간이 “나의 제자가 되어 내 말을 듣는다면, 이 돌들도 너희를 섬기게 되리라.”
“내 말을 듣는다”는 것은 제1장에서 말한 바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진지한 과정이다. 인간과 돌 사이에는 또다시 존재의 하이어라키가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도마는 암암리에 인간의 차원과 돌의 차원을 대적적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큐 자료에 속하는 마 3:9(눅 3:8)에는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식의 표현이 있고, 예수의 광야 시험 장면에서도 사탄은 예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유혹한다(마 4:3, 눅 4:3). 마 7:9에는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겠는가”라는 식의 표현이 나온다.
이러한 표현은 모두 돌과 떡을 대비시키며, 또 영에 대하여 육의 욕구인 떡을 비하시키고 있다. 그러나 도마는 돌이야말로 떡이라고 하는 생명의 일체감을 암시하고 있다. 돌과 같은 존재조차도 나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데 필요불가결의 것이다. 사람은 광물을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말씀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돌과 같은 저차원의 물질과도 생명적 일체감을 형성하게 된다.
파라다이스의 다섯 그루 나무라는 표현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창 2:9에는 “야훼 하나님께서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에덴의 땅에 돋아나게 하셨다”는 표현이 있다. “파라다이스”라는 표현은 원래 페르시아말로서 “정원”이라는 뜻이다. 그 페르시아말이 셉츄아진트 번역자들을 통하여 에덴의 동산을 가리키는 말로서 유대문화권에 들어왔다. 신약에서는 지상의 정원이 아닌, 지상의 모든 죄악이 말소된 새로운 차원의 낙원을 의미한다. 예수는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파라다이스에 있으리라”고 말한다(눅 23:43). 묵시문학에서는 파라다이스의 상실은 인간의 체험 속에서의 신의 존재의 상실을 의미하며 구원을 파라다이스의 복원으로 생각한다. 실낙원(失樂園)과 복낙원(復樂園)이라는 드라마가 생겨나는 것이다.
나는 본 장의 “파라다이스 다섯 그루의 나무”를 인간의 오관(五官·five senses)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색·성·향·미·촉에 상응하는 오관이 세속적 죄악에 물들지 않는 상태를 “계절에 따라 변하지도 않으며 그 잎사귀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 불멸성·불변성을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다”고 다시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불멸을 말한 것이 아니라, 맛본다고 하는 삶의 행위 속에 죽음의 요소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장, 18장, 19장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라는 표현을 마지막에 공유함으로써 그 상관성을 과시하고 있다. 관련된 표현이 요 8:52에도 있다.
[도올의 도마복음] 겨자는 풀, 그것이 어떻게 백향목같이 거대한 나무가 될까?
93. 겨자씨와 백향목
왼쪽이 복음서에 나오는 갈릴리 지역 겨자의 씨주머니(seedpods)인데, 하나의 씨방에 8개 정도의 까만 씨가 들어 있다. 그 꽃은 꼭 제주도의 평원에 만발하는 유채꽃처럼 노랗다. 지중해 연안의 겨자는 흑겨자이며 학명이 브라씨카 니그라(Brassica nigra)이다. 희랍·로마 문헌에 자주 언급되며 히포크라테스도 이것을 의학적으로 사용하였다. 동방에서 쓰인 겨자는 백개자(Sinapis alba, Semen sinapis)인데『예기』『의례』속에 개장(芥醬)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난다. 십자화과의 일년생 혹은 월년생 초본이다. 오른쪽은 레바논의 백향목(Cedrus libani), 전술하였다. 임진권 기자 |
1 제자들이 예수께 가로되, “하늘 나라가 어떠한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소서.” 2 예수께서 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그것은 한 알의 겨자씨와 같도다. 3 겨자씨는 모든 씨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로되, 4 그것이 잘 갈아놓은 땅에 떨어지면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식물을 내니, 하늘의 새들을 위한 보금자리가 되나니라.”
1 The disciples said to Jesus, “Tell us what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2 He said to them, “It is like a mustard seed. 3 It is the smallest of all seeds, 4 but when it falls on tilled soil, it produces a great plant and becomes a shelter for birds of heaven.”
목사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겨자씨의 비유를 도마복음에서 접하게 되는 것은 하나의 행운이며 감격이다. 그리고 신약성서라는 기존 텍스트에 관한 새로운 정보와 시각을 얻게 된다. 겨자씨의 비유는 3개의 공관복음서에 다 나오고 있는데, 도마복음서의 텍스트가 3복음서의 텍스트보다 더 오리지날한 원형을 제공하고 있다.
물론 추론자에 따라서는 도마복음의 텍스트가 3복음서를 보고 그것을 단순화시켜 축약해 놓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도마복음의 초기 연구자들은 도마복음의 성립 연대에 관하여 전체적 그림을 그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편협한 주장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크로쌍(J. D. Crossan)을 위시한 최근의 연구자들은 도마의 텍스트가 가장 초기의 것이며 가필이나 조작이 없는 프로토텍스트라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In Parables 44~51).
헤르몬산 설원에서 녹아 내리는 물이 갈릴리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요단강. 요단강은 폭이 넓은 강이 아니다. 가버나움 북쪽 지역의 이 요단강 주변으로 겨자풀이 깔려 있다. |
Ⅰ. 마태 13:31~32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Ⅱ. 누가 13:18~19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Ⅲ. 마가 4:30~32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이 세 개의 문장을 잘 비교해 보면 누가가 가장 담박하며 오리지날하다는 느낌을 확실히 던져준다. 마가에서 유래하지 않은 큐복음자료의 경우, 항상 마태보다는 누가가 더 큐복음의 원형에 가깝다는 것은 정설이다. 이 경우, 누가에는 마가에 있는 최상급적 표현이 없다.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the smallest of all the seeds on earth)으로부터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the greatest of all shrubs)라는 표현, 즉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가장 큰 것”으로의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이 누가에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의 “자기 채전”(his garden)이 마태에는 “자기 밭”(his field)으로 되어 있으며, 누가에 없는 “나물”(shrub)이라는 중간 단계가 마태에는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마태 저자가 큐 원형인 누가 자료에다가 마가 자료를 첨가하여 마태 자료를 구성하였다는 매우 명백한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마가에는 “땅에 심겨짐→자람→나물→큰 가지”라고 표현됨으로써 트랜스포메이션의 과정이 상세히 적혀 있다. 여기 중간 단계인 “나물”은 시금치 무침과 같은 나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뿌리에서 분명한 주간(主幹)이 없이 여러 가지가 다발로 나는 관목(灌木)을 의미한다. 그런데 관목도 어디까지나 목본(木本)이며 초본(草本)이 아니다. 즉 풀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겨자는 일년생 혹은 이년생의 초본이다. 아주 연약한 풀이며, 보통 1m 정도, 아무리 높게 자라봤자 1.5m 정도에서 성장이 그치는 풀이다. 더구나 겨자씨가, 과연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일까? 겨자씨는 보통 2~3㎜ 정도 되는 것으로서 풀씨치고는 큰 씨에 속한다. 민들레라 불리는 포공영(蒲公英·Herba taraxaci)의 씨나, 질경이의 씨인 차전자(車前子·Semen plantaginis)에 비하면 턱없이 커다란 씨다. 그런데 더구나 겨자씨의 성장이 초본에서 관목으로, 그리고 관목에서 큰 가지가 달린, 소나무·전나무와 같은 교목(喬木)으로 변화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당시 예수의 비유를 듣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농부 출신이었을 텐데, 이런 비상식적 이야기가 그들의 상식체계 속에 수용되었을까?
초본→관목→교목으로의 트랜스포메이션을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구약에 나타나고 있는 유대인의 전통적 관념을 인용할 필요가 있다. 다니엘이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몽하는 장면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왕의 보신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열매는 많아서 만민(萬民)의 식물(食物)이 될 만하고, 들짐승은 그 아래 거하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더라 하시오니,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昌大)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단 4:20~22).
에스겔(Ezekiel)에게 나타난 야훼의 예언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나 주 야훼가 말하노라. 내가 또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몸소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빼어난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지라(겔 17:22~23).
결국 겨자씨의 트랜스포메이션이 지향하는 종국은 레바논의 백향목 이미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겨자씨의 비유가 왜 갑자기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둔갑되었을까?
[도올의 도마복음] 하늘의 나라여, 들판의 잡초처럼 퍼져라
94. 수평적 확산과 수직적 확대
바울의 이방선교센터였던 안티옥이라는 도시의 이름은 사실 그레코-로망 세계에 16개나 존재한다. 그중 다섯 개가 시리아에 있다. 사도행전 13:14에도 피시디아 안티옥(Antioch of Pisidia)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것은 별개의 도시이다. 바울의 안티옥은 오론테스강이 흐르기 때문에 오론테스 안티옥(Antioch on the Orontes)이라고도 불린다. 알렉산더대왕의 장수 셀루쿠스1세(SeleucusⅠ Nicator)가 셀루시드왕조를 세우면서, 그의 아버지 안티오쿠스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 도시는 그의 제국의 서쪽 수도였다. 폼페이우스가 BC 64년에 이 도시를 정복하면서 로마제국의 자유도시가 되는데, 그것을 계기로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된다.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곳이 지중해로 유입되는 오론테스강의 안티옥항구였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멋드러진 배를 타고 여기까지 온 적이 있다. 임진권 기자 |
1 제자들이 예수께 가로되, “하늘 나라가 어떠한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소서.” 2 예수께서 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그것은 한 알의 겨자씨와 같도다. 3 겨자씨는 모든 씨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로되, 4 그것이 잘 갈아놓은 땅에 떨어지면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식물을 내니, 하늘의 새들을 위한 보금자리가 되나니라.”
유대인들의 관념 속에서 백향목의 이미지는 절대적이고 신성한 그 무엇이다. 사막지대에는 높은 것이 없다.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라는 높고 영원한 석축물을 만드는 그 마음에도 고딕 건물을 짓는 사람들의 향상심(向上心)과 비슷한 그 무엇이 있다. 피라미드도 그들에게는 하늘을 찌르는 듯한 백향목의 다른 표현이었다. 에스겔 31장에 나오는 야훼의 예언을 보라. “너 사람아! 이집트 왕 파라오와 그 무리에게 일러라! 네 큰 위엄(威嚴)을 무엇에 비교할까? 가지가 멋지게 우거져 그늘이 좋고 키가 우뚝 솟아 꼭대기 가지는 구름을 뚫고 뻗은 레바논의 백향목만큼이나 크다고 할까?”(겔 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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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재미있는 사실은, 도마자료와 마태·누가의 공통자료인 큐자료와 마가자료, 이 셋을 비교하여 보면, 도마자료는 큐자료보다 마가자료에 오히려 더 가깝게 간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누가에 없고 마가에 나타나는 “가장 작은-가장 큰”의 최상급 대비(superlative contrast)가 드러나 있으며, 정원이나 채마밭의 원예가 아닌 야생의 상황도 마가에 더 접근한다.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 선행의 가르침인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연속선상에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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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쌍의 말대로 마가의 최상급 대비는 예수의 오리지널한 언급 속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복음서기자들의 문학적 상상력 속에서는 예수의 원래 의도가 어떠했든지간에 그러한 대비를 통하여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다.
이 대붕의 등 길이가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날개를 한번 퍼득여 수면을 치고 날면 3천리, 한번 떴다 하면 9만리(九萬里)를 간다. 그런데 『이아』나 『설문』에 “곤”을 해설하기를 “물고기로 태어나기 이전의 어란을 가리킨다(魚子未生者曰鯤, 鯤卽魚卵)”라고 했다. 명태 알주머니에 들어 있는 알갱이 하나가 곧 곤이다. 곤이야말로 겨자씨보다 훨씬 작은 것이다. 그런데 이 곤이 하늘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도 같은 대붕으로 화(化)하는 것이다. 마이크로 코스모스와 매크로 코스모스가, 고양된 인간의 정신세계 속에서는 하나로 융합되는 것이다. 명태알 하나가 천지를 소요할 수 있다. 이것은 전 우주를 호령할 수 있는 육척단구 인간의 정신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장자의 메타포이다. 물론 예수의 겨자씨 비유도 이러한 장자적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보통 겨자씨의 비유는 천국운동이라는 사회적 맥락에서만 해석되어 왔다. 천국운동의 작은 씨라도 뿌려만 놓으면 결국 레바논의 백향목이 우거지듯 거대한 결실을 맺고야 만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도마텍스트에 있는 “그것이 잘 갈아놓은 땅에 떨어지면”이라는 구문은 이 비유가 사회적 맥락에서 발설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정신 내면에 관한 것일 수 있다는 심증을 굳게 해준다. 예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정신적 토양을 지닌 사람이라면 결국 그 내면의 세계는 하늘의 새가 깃들 수 있는 백향목과도 같이 웅장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붕의 소요와도 같은 정신의 고양(高揚)을 상징하는 것이다. “공중의 새”가 아닌 “하늘의 새”라는 표현도, 하늘적 인간정신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씨의 썩음”을 씨의 트랜스포메이션의 결정적 계기로 규정한다(고전 15:35~44).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한다 …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바울은 부활을 육과 영의 희랍철학적 사유로 정당화시키고 있다. 육의 썩음이 곧 영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겨자씨의 썩음이 곧 백향목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겨자씨 초본→관목→교목에로의 질적 비약은 “썩음” 혹은 “죽음”이라는 계기로써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과연 이러한 바울의 논리를 선포한 사람이었을까? 나는 팔레스타인에 가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겨자씨를 연구해 보았다. 예수가 비유에서 활용한 겨자는 야생식물로서 학명이 브라씨카 니그라(Brassica nigra)라고 하는 흑겨자이다. 우리가 현재 흔히 먹는 황갈색의 겨자는 브라씨카 준케아(Brassica juncea)라는 것으로 히말라야 원산인데 미국·캐나다·헝가리·영국 등지에서 재배되고 있다. 동양에서 약재로 쓴 것은 백개자(白芥子, Sinapis alba)이다. 흑겨자는 근원적으로 재배의 대상이 아닌 잡초에 불과하다. AD 200년경에 편찬된 유대인 랍비의 계율서, 『미쉬나』에도 겨자씨는 정원이나 밭에는 뿌려서는 안 되는 금지종에 속해 있다. 흑겨자는 벌레나 이파리 병을 타지 않으며 악조건의 기후에도 자유롭게 번식하며, 타 식물의 영역을 마구 침범하기 때문에 밭을 금방 망쳐버린다. 거대한 평원에서 잡초로서 자유롭게 자라지 않으면 아니 되는 운명의 종자인 것이다.
이러한 팔레스타인 야생 겨자의 특성을 생각할 때 예수의 비유는 본시 매우 상식적인 의미맥락에서 이루어진 메타포였을 것이다. 자기가 선포하는 천국운동의 잡초적 성격, 즉 아무 데나 씨를 던지기만 해도 무성하게 자라 평원을 휘덮고 만다는 대중운동적 신념을 말한 것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수평적 확산을 말했는데 복음서기자들은 이것을 수직적 확대로 변형시킨 것이다. 그러한 변형태에 도마는 인간 정신의 고양이라는 내면적 성격을 추가하였는데, 결국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은 바울의 부활론과 함께 종말론적 맥락을 첨가했을 것이다
[도올의 도마복음] 옷을 벗어라! 과연 이것은 무슨 뜻일까?
95. 아해들과 주인들
안티옥에서 지중해로 나가기 위해 사도 바울이 이용한 바닷가 항구 실루기아(Seleucia)에는 그 도시를 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판 거대한 터널이 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멸망시킨 장본인인 티투스 황제 때 완성되었기 때문에 티투스-베스파시아누스 터널(Titus and Vespasian Tunnel)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가보면 위로부터 바위산을 깎아 내려간 공사인데 장쾌한 모습이 1380m나 뻗쳐 있다. 물길을 돌리기 위하여 이토록 거대한 공사가 행하여졌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다. 항구 뒷산의 이름이 모세산(Mose’s Mountain)이다. 임진권 기자 |
1 마리아가 예수께 여쭈어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떠하오니이까?” 2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들은 그들의 것이 아닌 밭에서 사는 아해들과 같도다. 3 그 밭의 주인들이 올 때에, 그 주인들은 ‘우리의 밭을 우리에게 돌려다오’라고 말할 것이다. 4 아해들은 주인들 앞에서 그들의 옷을, 주인들에게 밭을 돌려주기 위하여, 벗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아해들은 그들의 밭을 주인들에게 돌려줄 것이다. 5 이러한 연유로 내가 이르노니, 한 집의 주인이 한 도적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주인은 그 도적이 도착하기 이전에 방비 태세에 있을 것이요, 그 도적이 그의 소유인 집을 뚫고 들어와 그의 물건을 훔쳐 내가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6 그렇다면 너희 제자들이야말로 이 세상에 대하여 방비 태세에 있으라. 7 너희 자신들을 강건한 힘으로 무장하여, 도둑들이 너희에게 도달하는 길을 발견할 수 없도록 할 것이다. 8 왜냐하면 너희가 기대하는 환난이 결국 닥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라. 9 너희들 가운데 내 말을 이해하는 한 사람이 있기를 바라노라. 10 곡식이 익었을 때가 되면, 곧 사람이 손에 낫을 들고 와서 그것을 추수하였나니라. 11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이여! 누구든지 들어라.”
1 Mary said to Jesus, “What are your disciples like?” 2 He said, “They are like children living in a field that is not theirs. 3 When the owners of the field come, they will say, ‘Give our field back to us.’ 4 They take off their clothes in front of them in order to give it back to them, and they return their field to them. 5 For this reason I say, if the owner of a house knows that a thief is coming, he will be on guard before the thief arrives and will not let the thief break into the house of his estate and steal his goods. 6 As for you, then, be on guard against the world. 7 Arm yourselves with great strength lest the robbers find a way to get to you, 8 for the trouble you expect will surely come. 9 Let there be among you a person who understands. 10 When the crop ripened, the person came quickly with sickle in hand and harvested it. 11 Whoever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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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에서는 주어가 모두 복수로 되어 있는데(아해들, 주인들), Ⅱ에서는 주어가 단수로 되어 있는 것도(주인, 도적), 그 나름대로 합당한 해석의 여지는 있을 수 있겠지만 일차적으로 텍스트의 전승이 다른 데서 오는 문제일 수도 있다. 해석에 있어서도 Ⅱ의 내용을 예수 메시지의 주간(主幹)으로 간주하는 데 모든 주석가들이 일치하고 있지만, Ⅰ의 내용을 긍정적인 맥락에서 볼 것인가, 부정적인 맥락에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국민의 사랑을 받던 한 빛줄기의 선종(善終). 그의 삶은 하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시는 과정 그 자체였다. 김수환 추기경의 세례명인 스테파노는 사도행전 6~7장에 나오는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의 이름에서 왔다. 스테판은 초기 예루살렘교회에 있어서 헬라화된 개명한 그룹을 대변한다. 죽음을 앞둔 그의 연설은 당시의 초기헬라기독교(early Hellenistic Christianity)의 매니페스토라 할 수 있다. 스테판은 예루살렘성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2001년 KBSⅠ 도올의 논어이야기에 출연하셔서 당신의 해박한 유교경전 지식을 말씀하시었다. 그리고 모든 종교의 화합과 상통을 피력하시고 교회 밖에서도 인간의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명료하게 말씀하시었다. |
Ⅰ의 내용을 부정적인 맥락에서 해석하면 “아해들”은 자기의 것이 아닌 곳에서 살고 있는, 즉 비본래적 자아 속에서 살고 있는 거짓 제자들이다. “아해들”(children)이란 번역은 콥트어 “세레 셈”(sere sem)에서 왔는데, 이 말은 희랍어의 “파이스”(pais)에 해당된다. 파이스는 아이, 아들, 또는 종, 노예, 하인(눅 7:7, 15:26, 마 14:2)의 뜻이다. “그들은 그들의 것이 아닌 밭을 위탁받은 종들과도 같도다”의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조차도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인들이 오면 옷과 밭을 다 빼앗기고 만다.
그러나 Ⅰ의 내용을 긍정적인 맥락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 “옷을 벗는다”는 표현은 도마복음 37장에도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 부끄럼 없이 옷을 벗을 때만이 진정으로 예수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해탈”과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말하고 있는 “육신의 집 위에 하늘의 집을 덧입는다”(고후 5:4)는 메타포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것이 아닌 밭”은 “육신의 집”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 육신의 주인이 왔을 때, 그들에게 옷을 벗어던진다는 의미는 “해탈”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본래적 자아의 회복이라 말할 수 있다.
5~9절의 내용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세상과의 대적적 관계가 암시되고 있다. 예수의 제자됨은 필연적으로 세속적 가치로부터의 소외를 동반한다. 코스모스는 방비되어야 할 위협으로 나타난다. 그만큼 예수운동이 실제로도 험난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동시에 세속적 가치로 함몰되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자기수양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도마의 5~9절 내용은 마 24:43과 눅 12:39에도 나타나고 있다(Q55). 그러나 도마자료와 비교해 보면 큐자료는 이미 내면적 수양에 관한 도마의 맥락을 철저히 인자담론의 종말론적 협박으로 변형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눅 12:40). 도마에는 그런 종말론적 맥락이 배제되고 있다.
10절은 또다시 막 4:29에로 변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가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도마나 도마와 유사한 텍스트를 놓고 마가의 편집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마에는 앞에 있는 겨자씨 비유가 마가에서는 뒤로 붙어 있다. 그 내용도 마가에는 하늘나라의 성숙과 임재에 관한 종말론적 맥락이 암시되어 있으나 도마에는 그런 암시가 없다.
10절의 과거형도 좀 어색하나 강조형일 수도 있다. “낫을 들고 와서 추수한다”는 이미지는 마가에서는 종말의 도래를 암시하고 있는데 반하여, 도마에서는 진정한 제자그룹으로 편입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내면이 성숙한 인간들의 유대감 속에서 예수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표현한 말일 것이다. 11절은 정구(定句)이지만, 제자됨의 비의성(秘儀性)이 암시되고 있다.
[도올의 도마복음] 네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 될 때 너는 천국에 들리라
96. 아기와 천국
안티옥의 외항으로서 바울이 최초의 전도 여행을 떠난 곳인 실루기아 항구(Seleucia Pieria)의 뒷산, 모세산 중턱에 있는 무덤군. 이렇게 바위를 깎아 붙박이식 석관을 촘촘히 만들어 놓은 집단 무덤을 베시클리(Besikli)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요람석굴(Cradle Cave)이라고 한다. 이 베시클리 안에 93기의 시신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내가 서 있는 곳 발밑으로 석관의 구덩이들이 보인다. 실루기아 항구도시는 원래 BC 305년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로서 개발된 도시였다. 이 무덤군은 AD 1세기부터 개발되어 7세기까지 지속되었는데, 526년과 528년, 두 차례의 지진에 무너지기도 하였다. 근세에 발견되었을 때는 완벽하게 도굴된 후였다. 임진권 기자 |
1 예수께서 몇 아기들이 젖을 빨고 있는 것을 보시었다. 2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젖을 빨고 있는 아기들이야말로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과 같나니라.” 3 제자들이 예수께 가로되, “그리하면 우리는 아기로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삽나이까?”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들이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들이 속을 겉과 같이 만들고, 또 겉을 속과 같이 만들고, 또 위를 아래와 같이 만들 때, 5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 된 자로 만들어 남자가 남자 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여자 되지 아니할 때, 6 그리고 너희가 눈 있는 자리에 눈을 만들고, 손 있는 자리에 손을 만들고, 발 있는 자리에 발을 만들고, 모습 있는 자리에 모습을 만들 때, 7 비로소 너희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리라.”
1 Jesus saw some babies being suckled. 2 He said to his disciples, “These babies being suckled are like those who enter the kingdom.” 3 They said to him, “Shall we then, as babies, enter the kingdom?” 4 Jesus said to them, “When you make the two into one, and when you make the inner like the outer and the outer like the inner, and the upper like the lower, 5 and when you make male and female into a single one, so that the male will not be male nor the female be female, 6 and when you make eyes in place of an eye, a hand in place of a hand, a foot in place of a foot, and an image in place of an image, 7 then you will enter the kingdom.”
천국과 아기들의 관계를 논한 구절은 공관복음서에도 있다. 마가 10:13~16을 보라.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이 마가의 기사는 마태 19:13~15, 누가 18:15~17에도 나오고 있다. 누가는 마가를 보다 충실히 베꼈고, 마태는 간결하게 축약하였다. 마가자료 중 15절은 원자료에 없는 것을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누가에는 마지막 안수와 축복의 기술이 없다. 그리고 이 기사의 병행구가 막 9:36~37(마 18:2~5, 눅 9:47~48)에 나오고 있다.
현재 터키에 속해 있는 이 실루기아 항구를 한 여인이 당나귀를 몰고 지나가고 있다. 당나귀는 먹는 것에 비해 힘이 좋아 지역 민중들의 사랑을 받는 동물이다. 바울도 이러한 모습으로 이곳을 지나갔을 것이다. 뒤의 산이 모세산, 길가의 석축이 동서 문명을 융합시켜 찬란한 헬레니즘 문명을 만든 셀레우코스 왕조 최초의 수도 성곽의 유일한 잔해다. 문명의 영고성쇠를 실감케 한다. |
제3절의 질문은 요 3:4에 나오는 니고데모(Nicodemus)의 질문, 거듭나라고 하는 말에 대하여 엄마 자궁 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되느냐고 묻는 그러한 순진한 질문을 연상시킨다. 추상적 함의를 어리석은 듯, 문자 그대로 해석함으로써 그 추상적 함의의 본면(本面)을 더욱 강조시키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의 문학적 기법이다.
“젖을 빤다”는 것도 단순히 어린 아기의 생존 상태의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획득하는 변화(transformation)의 과정일 수도 있다. 그것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몸의 재건(reconstruction)이며 궁극적으로 해탈(解脫)의 과정이다.
이 “새로운 몸”은 모든 둘을 하나로 만드는 몸이어야 한다. 양은 양으로서 실체화될 수 없으며, 음은 음으로서 실체화될 수 없다. 도(道)의 경지에서는, 음과 양은 끊임없이 분화와 융합의 과정을 거친다. 음이 곧 양이며, 양이 곧 음이다. 일음(一陰), 일양(一陽)하는 순환의 과정이 곧 도일 뿐이다(一陰一陽之謂道). 왕필(王弼, 226~249)에 의하면 도(道)란 무(無)의 다른 이름이다. 무불통(無不通), 무불유(無不由)의 무차별 경지인 것이다. 주렴계(周濂溪, 1017~1073)가 음과 양을 말하기 이전에 태극(太極)을 말하고, 무극(無極)을 말하는 것도 음과 양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무(無)를 가치의 지향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도마도 “속과 겉이 하나 되고, 위와 아래가 하나 되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 됨”을 말한다. “남자와 여자를 하나 된 자로 만들어”라는 표현에 있어서 “하나 된 자”(a single one)는 자웅동체의 신화적 아담을 말한다기보다는, 남자와 여자의 분별이 사라진 새로운 주체(subjectivity)의 탄생을 지칭한다고 보아야 한다.
남자가 남자로서만 대상화되고, 여자가 여자로서만 대상화될 때, 그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는 끊임없는 욕망이 분출하게 마련이다. “하나 된 자”라는 표현은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새로운 성(a new gender), 새로운 몸, 새로운 인격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리적으로 제3의 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남녀의 욕정이 극복되는 금욕과 고행의 수련 과정을 암시하고 있다. 음식남녀(飮食男女)에 사람의 대욕(大欲)이 존(存)한다는 『예기』「예운」편의 명언을 상기시킨다.
“눈 있는 자리에 눈을 만들고”라는 표현은 “눈 대신에 눈을 만들고”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눈 대신에 눈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금욕적 수행의 과정을 통하여 기존의 눈이 사라지고 새로운 눈이 생겨나는 신체의 혁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새로운 눈, 새로운 손, 새로운 발을 거쳐, 최후에는 “새로운 모습”에 이르게 된다. 즉 나의 내면적 세계가 혁명된 새로운 자아상을 확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바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본 장의 내용은 제4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제6절의 “모습”은 83·84장에도 나온다. 남녀의 하나 됨에 관하여 갈 3:28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그 의미 맥락은 다르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차등이 없다는 것을 말했을 뿐, 남녀의 원초적 융합을 말하지는 않았다.
[도올의 도마복음] 천 명 중 하나뿐인 자여! 단독자로 서라
97. 천 명과 한 명
초기기독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고행승들의 행적에 관한 것이다. 여러 방식의 고행이 있는데, 뾰족한 꼭대기 위에서 고행하는 특이한 방식이 있다. 세속을 멀리하고 무한자에게로 가까이 간다는 뜻이 있다. 이들을 스타일라이트(stylite)라고 하는데 희랍어 스틸로스(stylos, 기둥)에서 왔다. 우리말로 주행승(柱行僧)이라고 번역한다. 안티옥에서 18㎞ 떨어진, 사만다그(Samandag)로 가는 도중, 높은 산에 위치하고 있는 이 교회는 그 정가운데에 주행승이 앉았던 높은 기둥의 그루터기가 남아 있다. 이 주행승의 이름은 어린 성 시므온(St. Simeon the Younger, 521~592)인데 안티옥 태생이다. 5살 때 대지진(526년)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7살 때부터 놀라운 고행과 이적과 치유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 산속에서 541년부터 고행하였는데 그의 이름이 전파되어 많은 추앙자들이 몰리자 551년 그를 위한 성전이 건축되었다. 그는 돌기둥 꼭대기에서 설교를 하였고 592년 죽을 때까지 41년 동안 그 꼭대기에 머물렀다. 종교사적으로 이슬람 모스크의 첨탑 미나렛(minaret)은 이 주행승의 전통이 변형된 것이다. 마호메트가 시리아로 왔을 때 주행승들을 만나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슬람에서도 초기기독교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임진권 기자 |
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택하리라. 천 명 가운데서 하나를, 만 명 가운데서 둘을. 2 그리고 그들은 하나된 자로서 서있게 되리라.”
1 Jesus said, “I shall choose you, one out of a thousand, and two out of ten thousand, 2 and they will stand as a single one.”
도마복음서에서 나타나는 각자(覺者)들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고독한 실존이다. 깨달음이란 내면적 사태이기 때문에 집단적일 수 없다. 도마복음 속의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은 해석의 대상이며 발견의 대상이며 추구의 대상이다. 그것은 개인의 고독한 주체(the solitary subjectivity of an individual)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극히 소수만이 선택되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사상은 모든 종교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정서이다. 지극한 경지를 말하면 필연적으로 비의성(秘儀性)을 배제할 수 없고, 비의성을 강조하는 것은 오의(奧義)를 깨닫는 자가 소수라는 전제가 있다. 마태 22:14을 보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플라톤의 『파에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실상 용기와 자기절제와 정직함, 그러니까 진실한 도덕성을 확립하게 만드는 것은 지혜이다. 쾌락이나 공포와 같은, 그따위 느낌이 있고 없고는 도덕과는 별 상관이 없다. 상대적인 감정적 가치에 기초한 도덕성의 체계라는 것은 단순히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그 자체로서 진실성이나 건전성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철저히 세속적인 관념일 뿐이다. 진실한 도덕적 이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자기절제이든 정직이든 용기이든, 결국은 모든 세속적 감정으로부터의 정화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지혜라는 것 자체가 결국은 정화(purification)인 것이다.
이 어린 성 시므온 교회는 세 개의 교회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기적의 언덕”(Hill of Wonders)이라고 불렀는데 주행승의 기둥 꼭대기를 쳐다보기만 해도 치유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건축양식도 독특한데 주두(柱頭)가 당시 보편적이었던 코린트 양식이 아니고 대바구니 모양으로 되어 있다. 시므온이 죽은 후에도 이곳에는 계속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636년 이슬람 정복으로 쇠퇴하여 13세기에 폐허가 되었다(왼쪽 사진). 기적의 언덕을 향해 동리 사람들 달구지를 타고 가고 있는 필자. 뒤에 바울의 고향 다소로부터 뻗쳐 내려오는 타우루스 산맥의 웅장한 모습이 보인다(오른쪽 사진). |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린 이러한 플라톤의 기술 속에서 우리는 헬레니즘 시대 종교적 성향의 일반적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감정과 도덕의 대립, 정화와 해탈, 철학적 삶과 저승의 관계, 이 모든 주제들이 매우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바쿠스의 지팡이(나르테쿠스)를 휘두르는 자는 많으나 진정으로 바쿠스신에게 헌신하는 자는 소수이다”라는 말은, 곧 본 장의 주제를 말해주는 동시에 도마복음서의 예수운동가들의 삶의 목표나 양태에 관해 많은 구체적 내용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천 명 가운데서 하나를, 만 명 가운데서 둘을”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언어에도 나타나는데 다자와 소수의 대비를 강조하는 데 쓰이는 일종의 정형구일 것이다. 신명기 32:30에 “어떻게 혼자서 천 명을 몰아내고, 둘이서 만 명을 쫓아낼 수 있었으랴”라는 표현이 있고, 전도서 7:28~29에는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1785년 영국박물관에 의하여 구매된 아스큐 코우덱스(The Askew Codex) 콥틱문헌인 『피스티스 소피아』(Pistis Sophia)에도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 속에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여! 누가 과연 이 세상에서 살면서 죄를 안 지을 수 있겠나이까? 모든 죄악으로부터 완벽하게 순결할 수 있겠나이까? 한 가지에 순결해도 다른 것에 순결치 못할 수 있지 않겠사옵나이까?”
구세주께서 대답하여 마리아에게 가로되,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제1의 신비의 신비를 달성한 자로서, 천 명 가운데서 하나를, 만 명 가운데서 둘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Ch.134).
『피스티스 소피아』는 여성명사로 의인화된 “피스티스 소피아”(믿음의 지혜)의 타락과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회개와 구원을 이야기하는 경전이다. 2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한 초기기독교 사상가 발렌티누스(Valentinus)학파 계열의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매우 체계적인 우주론이 전제되어 있고 빛의 세계로 진입하는 열쇠인 그노시스가 설파되며, 예수 이전에는 빛으로 진입한 인간의 영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선포된다. 도마복음서의 출현은 이러한 문헌에 관해서도 새롭게 연구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본 장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은 하나된 자로서 서있게 되리라”라는 제2절의 표현인데, 발란타시스(Richard Valantasis)와 같은 주석가는 선택받은 소수들이 하나의 동일한 집단적 아이덴티티(unity to the corporate subjectivity)를 갖게 된다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그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그들-하나”의 관계를 복수적 집단의 단수화로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공통의 지향점을 가질 수는 있겠으나, 역시 “하나된 자”는 모든 대립이 초월된 무분별심의 원융한 존재(4·22·106장)이며, 이 세상의 가치와 타협하지 않는 고독한 실존(16·49·75장)으로서 “그들” 개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독립개념적 술어로서 풀어야 마땅하다. 도마복음은 역시 집단보다는 개체의 내면에 강조점이 있다. 그리고 “서다”(to stand)는 16·18·28장에서도 예시(例示)되고 있듯이 어떤 “신적인 당당함”을 나타내는 “섬”이다. 세속에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실존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도올의 도마복음] 평범한 너 자신 속의 빛이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지난주에 주행승의 고행(stylism)을 소개했지만 그 원조에 해당되는 인물이 성 시므온(Saint Simeon)이다. 안티옥 근교 사만다그에서 수행한 사람은 후대의 인물이므로 “어린 성 시므온”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시므온은 AD 392년 시골 양치기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수도원의 생활이 고행이 부족하다고 느껴 자꾸 고독한 동굴로, 숲 속으로 들어갔다가 결국 산꼭대기에 3m 정도의 바위 기둥을 세우고 그곳에서 쇠사슬을 감고 고행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가 용한 것을 알고 자꾸 모여 드니까 방해받는 것이 싫어 점점 기둥을 높였는데 결국 18m 정도로 높아졌다. 40년 고행 끝에 그 기둥 꼭대기에서 티베트 승려가 좌탈하듯이 숨을 거두었다(459년 7월 24일). 죽었을 때 시므온은 전 로마제국의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로마의 황제 제노(Zeno, AD 474~91 재위)는 그가 죽은 바로 그 기둥을 중심으로 십자가형의 대성당을 지었는데 그 규모가 콘스탄티노플의 소피아성당보다도 크다. 십자가형의 사방에 네 개의 바실리카(교회)가 있다. 우리나라 대형 교회의 원조에 해당되는 모습을 여기서 본다. 대형 교회의 창립 목사처럼 시므온은 “용하다”고 소문났고 매일 기둥 꼭대기 위에서 영적 설교를 하였다. 먼 섬나라 영국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곳은 지금 시리아 알렙포 부근이지만 크게 보면 안티옥 근교이다. 시므온의 기둥은 전 세계 광신도들이 부처님 코 갉아먹듯이 쪼아가서 그루터기만 남았다. 임진권 기자 |
1 그의 제자들이 가로되, “당신이 계신 곳을 우리에게 보여주소서. 우리가 그곳을 찾아야 하겠나이다.” 2 예수께서 저희에게 가라사대, “귀가 있는 자들이여! 누구든지 들어라. 3 빛의 사람 속에는 반드시 빛이 있나니, 그 빛은 온 세상을 비추나니라. 그것이 빛나지 아니하면 그것은 곧 어둠이니라.”
1 His disciples said, “Show us the place where you are, for we must seek it.” 2 He said to them, “Whoever has ears, let him hear. 3 There is light within a person of light, and it shines on the whole world. If it does not shine, it is dark.”
제1절의 제자 질문과 제2~3절의 예수 대답 사이에 표면적으로는 정확한 논리적 연결이 없는 듯이 보인다. 제자들은 예수가 있는 장소, 즉 물리적 공간을 물었고, 예수의 대답은 그러한 로칼리티(locality)와 무관하게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빛과 그 기능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면 제자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 사이에는 참으로 절묘한 인과성이 성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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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기독교는 성악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기독교가 원죄론(Original Sin)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예수는 원죄를 말한 적이 없다. 예수는 인간의 본성을 도덕적으로 규정하려는 생각이 근원적으로 없다. 기독교를 원죄론과 관련시키는 것은 대체적으로 바울의 신학적 틀에서 유래한 것이며, 예수의 원래사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바울은 아담의 원죄와 그 죄의 삯으로서의 사망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전제로 사용하고 있다. 죄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영생을 획득한다는 것이다(로마서 5~7장 참조).
성 시므온 교회 본당 정문의 거대한 모습(왼쪽 사진). 기둥이 코린트 양식인데 이 지역의 특성대로 대추야자잎(acanthus leaf)이 바람 방향으로 휘어져 있다. 지중해에서 내륙 쪽으로 항상 같은 방향으로 바람이 분다(오른쪽 사진).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얹어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현행 공관복음서에도 인간 존재가 빛으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제1장은 예수를 태초부터 존재한 말씀(로고스)으로 규정하고, 그 말씀을 다시 빛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빛을 어둠인 세상(코스모스)과 대비시킨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이러한 논리의 문제점은 빛을 빛으로서만, 어둠을 어둠으로서만 실체화시키고 있다는 데 있다. 빛은 빛일 뿐이며, 어둠은 어둠일 뿐이다. 예수는 전적으로 빛이며, 세상은 전적으로 어둠이다. 이 어두운 세상에 갇혀 사는 인간은 오직 자그마한 빛의 파편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 작은 빛의 파편을 어둠의 세계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자는 오직 전적인 빛인 예수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 도마의 예수는 자기만을 빛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 자기와 주변의 예수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빛일 뿐이다. 그런데 빛이란 반드시 이 세상을 비추어야 한다. 온 세상을 다 비추어야 한다. 어둠이란 세상에 대한 고정적 규정이 아니라, 바로 나의 내면으로부터 발하는 빛이 빛나기를 멈추는 상태일 뿐이다. 마지막 문장, “그것은 곧 어둠이니라”의 주어인 “그것”은 “빛의 사람”이다. 세상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두운 것이다. 빛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곧 빛나는 세상이고, 어두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곧 어두운 세상이다. 신약에 쓰인 죄에 해당되는 단어는 “하마르티아”(hamartia, )인데 그것은 궁술에서 쓰이는 스포츠용어이며, 과녁을 빗나간다는 뜻이다. 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신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하여 스스로 세운 도덕적 목적에 미달하거나 어긋나는 상태일 뿐이다.
이제 마태 6:22~23의 언어가 새롭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뇨!
상기의 마태 두 자료는 누가 11:33~36과 함께 큐복음서에 속한다. 큐와 도마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우리는 여기서 재인식하게 된다.
제1절의 제자 질문은 요한복음 14장의 도마의 질문을 연상시킨다. 예수는 자기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말한다. 아버지 집에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해 놓고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도마가 질문한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우리가 알겠삽나이까?” 예수가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빌립이 또 아버지를 직접 보여 달라고 요청한다. 예수가 말한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피스티스 소피아』는 요한복음의 상호내주(相互內住)와 같은 애매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예수는 말한다: “내가 곧 너희 사람이며, 너희가 곧 나다. 너희가 곧 천사며, 대천사며, 신이며, 주이며, 왕이다.”
예수의 원래사상은 예수 자신만을 인간의 길, 진리, 생명으로서 소외시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길, 진리, 생명이 바로 우리 인간 개개인에게 내재하는 빛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 선포가 로고스기독론적으로 왜곡된 것이 요한복음의 언어다.
그 원형은 이러한 것이다: “너 자신에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나니라.” 다석 유영모 선생(1890~1981)은 말씀하신다: “예수의 ‘나’는 개별적 나일 수 없다. 하나님의 ‘나’이며 온 인류의 ‘나’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의 ‘참 나’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도올의 도마복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 이웃은 누구일까?
99. 형제와 이웃
현재 사마리아인은 700여 명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대부분 그리심산(Mt. Gerizim·881m) 주변의 피난촌에 모여 살고 있다. 사마리아인이 과연 유대인이냐 하는 것도 개념에 따라 복잡한 논의가 될 수 있다. 사마리아인은 좁은 개념의 유대교 속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 이들은 우선 예루살렘성전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세5경 이외로는 구약성경도 인정하지 않는다. 모세5경에 야훼가 성소로서 “택하신 곳”이라는 구절이 21번이나 나오지만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출애굽 후 약속의 땅에 들어와 최초로 증거돌을 세운 곳이 바로 그리심산이므로, 성소는 그리심산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친 곳이며, 요셉의 유골이 유언대로(창 50:24) 묻힌 곳이며, 신명기 11:29에 나오는 “축복의 산”이다. 기드온의 아들 요담이 복수의 저주를 외친 곳도 그리심산이다(사사기 9:7).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 이후에나 등장하는 것이다. 나는 분쟁지역이라서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그리심산을 어렵게 찾아갔다. 그들은 고대 히브리어로 기도를 하지만 아랍어를 쓴다. 혈통이 섞이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한번 유전병이 생기면 종족이 멸망할 수도 있다. 그들은 사진 찍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 소녀가 내 요청에 응해주었다. 야곱의 우물(Jacob’s Well) 곁에서 예수가 만난 저돌적인 사마리아 여인이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요한복음 4장의 일화는 예수시대에 이미 유대교를 거부하는 사마리아인들의 고립촌락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언한다. 예수가 사마리아인을 사랑스러운 이웃으로 대한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공포스러운 파격이었다. 임진권 기자 |
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형제를 네 영혼과 같이 사랑하라. 2 그 사람을 네 눈의 동자처럼 보호하라.”
1 Jesus said, “Love your(sg.) brother like your soul, guard that person like the pupil of your eye.”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앙 속에서 자라난 우리의 뇌리에 박힌 많은 성구 중에서 가장 강렬하게 믿음의 정당성을 유지시켜 주는 말씀이 있다면 이러한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만약 이러한 명제가 기독교의 가장 큰 계명으로써 자리잡고 있지 않다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한 종국적인 신앙심을 견지하는 데 어려움을 감지할 것이다. 신이라는 추상명사와의 관계 속에서 아무리 절대적 복종의 계율을 성실하게 지킨다 하더라도 인간과의 관계가 배제된다면, 즉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신의 역사(役事)가 실증되는 고통스러운 계기들이 배제된다면, 그것은 공허한 신앙일 뿐이요 무서운 독선의 강요일 뿐이다. 많은 예수의 말씀 중에서도 이토록 가장 핵심적인 파편을 도마복음서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하나의 감격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한번 도마복음의 원초적 성격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도마복음의 말씀은 외면적으로는 공관복음의 말씀과 매우 유사하게 들리지만 실제로 원시 기독교 사상의 발전 과정과 관련하여 매우 엄중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먼저 공관복음서 중 제일 먼저 성립한 마가 자료 전체를 훑어볼 필요가 있다.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 하시는 것을 보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그리심산의 꼭대기 전경. 뒤로 보이는 산은 “저주의 산” 에발(Mt. Ebal·940m)이다. 그 사이 골짜기에 세겜(Shechem) 지역의 수가(Sychar) 동네가 있다(왼쪽 사진). 이스라엘민족 최초의 제사장 아론의 135대 직손인 아셰르(Asher) 제사장이 사마리아 5경의 신명기 부분(6:4~9)을 나에게 보여주고 있다. 사마리아 5경은 유대인 토라와도 다른 또 하나의 판본이다. 최초의 판본은 고대 페니키아어로 쓰여졌다(오른쪽 사진). |
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통째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막 12:28~34, 마 22:34~40, 눅 10:25~37).
유대교의 율법주의자들과 예수와의 변론적 마당이 설정되어 있는 이 단화(短話)는 기존의 신학계에서도 어떤 핵심적 예수의 로기온 자료가 선행하였고, 그것이 확대되어 나간 것으로 분석되어 왔다. 우리는 도마복음서의 출현으로 그 프로토 자료의 성격을 규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선 첫째·둘째 계명이 다 예수 본인의 말씀이 아니고 구약의 인용이라는 사실이 묵과될 수 없다. 첫째는 신명기 6:4~5에서 왔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야훼는 오직 하나인 야훼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야훼를 사랑하라.” 둘째는 레위기 19:18에서 왔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야훼니라.”
이 단화를 구약의 율법에 대한 유대교 율법사와 예수와의 이성적 합의로 해석한다면 기독교는 설 자리가 없다. 신약이 결국 구약화되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신명기는 야훼의 유일신임을 강조하고 율법의 근본정신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레위기의 자료는 바빌론 유치 이후에 예루살렘의 권위를 확립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단합을 과시하기 위하여 편찬한 사제문서(P)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레위기에서 말하는 “이웃”은 유대인 동포에 한정된 말이다. 야훼의 유일성도 궁극적으로 유대인의 종족 신앙의 합리화일 뿐이다. “이웃사랑”이 이스라엘 동족만을 보호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개나 쥐새끼보다도 더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기독교정신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대교의 문제는 보편주의의 결여에 있다.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을 구약의 출전과 무관한 단절적인 맥락에서 해석할 수도 있으나 율법사와의 논쟁적 성격이 깔려 있으므로(마태 자료), 구약의 출전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누가는 아예 이 두 계명을 예수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사가 스스로 토라를 인용하여 토로하고 그것에 대해 예수가 인정하는 것으로 드라마의 구성을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이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한 율법사의 반문이 이어진다. 여기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예수의 대답으로서 진술된다. 이 단화에서 “이웃”의 개념을 종족적 한계로부터 탈출시켜야 한다는 누가복음서 저자의 신념이 그 편집에 드러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도마에는 이웃의 사랑에 앞선 신에 대한 사랑의 전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도 “형제”라는 말로 그 외연이 더 축소되어 있다. 즉 예수운동에 참가하는 “형제”들 간의 단합을 호소하는 당파적 성격(sectarian unity)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다. 2세기 전반에 성립한 희랍어문화권의 유대인들의 복음서인 『히브리복음서』(The Gospel of the Hebrews)에도 이런 예수의 말씀이 있다: “너의 형제를 사랑으로 돌볼 때만이 너는 기뻐할 자격이 있다.”
“네 영혼과 같이”라는 표현은 “네 몸과 같이”와 크게 차이가 없다. 아람어나 시리아어에서는 “자기자신”을 “영혼”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도마복음은 예수 말씀의 소박한 원형을 담지하고 있다. 누구를 내 몸과 같이, 내 눈동자처럼 사랑하고 보호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판단이 개재되지 않는다. 눈동자에 위험물이 닥칠 때 본능적으로, 자동적으로 눈꺼풀은 닫힌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이와 같이 절대적일 때만이 의미를 갖는다. 논리적 판단에 의한 감정의 축적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운동의 당파적 성격을 초대 교회의 유대인 커뮤니티의 공동체적 성격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신명기와 레위기의 율법적 명제의 도입이 이루어졌고, 또다시 유대인 커뮤니티의 당파적 성격을 타파하기 위하여 사마리아인의 무조건적 베풂이 이웃사랑의 전범으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이 계명이 이방선교의 보편주의적 명제로 해석되면서, 이웃사랑이 신에 대한 사랑과 동일한 정언명령으로서 재해석된 것이다. 사랑은 용서이며 베풂이다. 그것은 이기적인 형량이나 특수한 감정적 사태가 아니다. 그리고 이웃은 이 사람 저 사람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서 보편주의적 함의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확대 과정은 기독교 발전사의 가장 긍정적인 한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신적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서는 인간 그 자체에 신성을 부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점진적 확대가 그 유일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공관복음서의 한 원형인 도마의 명제는 뜻을 같이 하는 가까운 형제에 대한 소박한 사랑을 말했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유가적일 수도 있다. 본 연재는 다음 주 100회로써 종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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