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콩나물 시루교실
요즘은 콩나물시루란 표현을 안 쓴다. 꽉 들어차 숨 막히는 현상임에 도심에선 용도가 제법일 텐데 시대 뒤떨어진 표현으로 여기는지 쓰임은 아예 거덜이 났다. 승객이 꽉 들어찬 버스는 그냥 만원버스라 하고 지하철의 경우는 ‘지옥철’이란 표현을 쓴다. 웬만하지 않고서는 사람들 시선을 사로잡지 못하는 강렬한 세상이다.
그만큼 세상은 강하고 억세져 버렸다. 나는 그 표현이 뒷방 차지임에도 친근감이 있어 그냥 좋다. 콩나물시루는 이제는 한 시대의 유물이다. 슈퍼 냉장실에 진열된 콩나물을 보고 누구도 콩나물시루를 연상하지는 않는다. 안 쓰고 소원해지면 다다미 소리 같은 여문 느낌도 자연 멀어진다. 지금 내 추억도 어느 참 뒷방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은 아닐까. 사실 콩나물시루는 원래부터 뒷방 차지였다.
방앗간에서 쌀을 빻아오면 팥을 으깬 고명을 만들어서 반죽 위에 흩뿌려 훈김을 내어 직접 시루떡을 해 먹고 콩나물도 직접 키워서 상에 올렸었다. 콩나물 키우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벌레가 먹은 것이나 썩은 콩은 골라내고 물에 하루정도 불려서는 콩나물시루에 불린 콩을 겹쳐지지 않게 펴놓는다. 널빤지를 두 개 준비해서는 물 받을 그릇위에 올려놓고 시루를 받친다. 평상시는 검은 천에 가려놓아 햇볕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고서는 세끼 밥 먹을 때 때맞춰 물을 준다. 그러면 콩나물은 이틀도 채 안돼서 서로를 위로 밀치며 비집고 솟는다.
어느 참 콩나물대가리들이 빽빽한 좁은 공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앞으로 나란히 하듯 자연 머리는 위로 뿌리는 아래로 향하고는 쑥쑥 자라나 불과 일주일 만에 시루를 꽉 채운다. 이를 걸맞게 쓴 비유가 그 시절의 학교교실이 아니었던가. 작은 놈 큰 놈 못생긴 놈 하다못해 반쯤 썩은 놈 까지 온갖 애송이 종자들을 학교운동장에 줄 세우듯 불려서 시루에 담았더니 쑥쑥 자라나 시루가 비좁은 공간이 되어 버린 현상과 그 시절의 빽빽한 교실의 풍경은 너무도 닮았다.
그 시절의 한 학급의 학생 수는 무려 70명이 넘었다. 그야말로 고만고만한 친구들의 콩나물시루 교실이다. 옆줄은 꽉 차고 뒤에도 공간 여분이 없어서 선생님은 뒤에까지 살펴 볼 처지가 못 되었으며 화장실 갈 때도 책상을 넘어서 갔다. 자연히 저학년들은 2부제 수업을 했으며 학급 수는 10반이 훨씬 넘었다. 그것으로도 교실 충당이 안돼서 해마다 교실들을 달아냈는데 당시 서울에 숭덕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그 수효를 가히 짐작 할만하다. 그 시절 반 등수 20등이면 중상 정도이지만 요즘은 거의 꼴찌수준이다. 격세지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는 평생 통 털어 결석을 딱 한 번 했다. 사실 결석을 한 것도 아닌데 억울하게 결석한 것으로 되어 버렸다. 아무리 아파도 조퇴 한 번 안했는데 어이없게도 오전반을 오후반으로 착각하여 오후에 등교하는 바람에 결국 6년 개근상을 못 탔다. 한 반에 스무 명도 채 안 되는 아이들을 돌보는 지금은 참으로 좋은 환경조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단순히 미어터지도록 수가 많다고 해서 교실을 콩나물시루에 비유한 것만은 아닌 듯싶다.
알다시피 콩나물을 키우는 데는 특별한 방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물만 때 맞춰서 부어주면 그만이다. 그때 우리들 또한 밥만 제 때 챙겨 먹으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었다. 그런데 참 묘한 게 콩나물이다. 물을 주면 그냥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 같아도 그 다음 날 검은 천을 들춰보면 어느 참 물을 머금었는지 노란 빛깔은 진하여져 있으며 하얀 뿌리는 쑥쑥 올라 매초롬하다. 우리 어린 시절도 그와 흡사했다.
뭣 모르고 들어와 어느 새 하늘을 향하는 반듯해진 콩나물과 이것 아는 사람 하였더니 저마다 저요! 저요 ! 하는 코흘리개 올챙이들의 변모 또한 콩나물의 생태와 꼭 닮았다. 요즘은 화초 가꾸듯 너무들 집착하고 꾸민다. 중국에 갔을 때 아이들을 대하는 어른들을 보고 꽤 놀랐다. 체육관에 모여든 아이들의 집단 발표회가 끝날 무렵 그 주변은 아이들을 싣고 갈 차들로 북새통을 이루어 거의 교통이 마비상태였다. 아이는 하나인데 가족은 할아버지까지 해서 다섯 명도 넘었다.
산아제한이 엄격하다고는 하지만 애지중지가 지나쳐 저러다가 오히려 아이들을 망치지 않을까 내심 염려되었다. 콩나물은 지나치게 물을 많이 주면 썩어 버린다. 갑갑할 것이라고 콩나물 씌운 천을 벗겨버리면 빛이 스며들어 이내 초록색 새싹으로 변하여 채소가 된다. 그리 되면 콩나물로서는 쓸모가 없다. 아이들도 과욕과 무관심의 사이 그 정도가 제일 적당하지 싶다. 사실 나는 그 시기를 산 우리 또래가 그렇게 많은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요즘 말로 나는 베이비부머(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부터 가족계획정책이 시행된 1963년까지 태어난 세대) 다. 우린 스스로 꽃인 줄 모르고 자라났다. 그렇게 한 청춘 다 바쳐 그냥 앞만 내다보고 열심히 산 사람들이다. 백과사전을 들춰보면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에 사회생활을 시작하였고 베이비부머들은 경제성장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한국 경제발전의 주역들이다" 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런 우리는 요즘 '벼랑 끝 칠백만 은퇴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다. ' 라고 하는 서글픈 영화제목 같은 현실 속의 주인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준비 없는 퇴직과 창업, 그리고 실패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 자식과 부모를 챙기느라 정작 자신의 노후준비를 못한 베이비붐 세대는 뻔히 개미지옥인 줄 알면서도 자영업에 뛰어들고 있으며 때 아닌 농사를 짓겠다고 산골로 밀려가고 있다. 그 한 때 '어머니 왜 나를 나셨나요.' 를 부른 맹인가수 이용복의 노래가 갑갑한 현실 속에서도 삶의 위로가 되기도 하였는데 정말 기구하게 사는 한 세월만 같다.
그래도 우리는 고난의 젋은 시절을 아무 탈 없이 보냈기에 어쩌든 참을 만은 하다. 정작 도저히 못 참겠는 것은 축 처진 어깨의 우리들 자식들 때문이다. 우리 인구 비중만큼이나 많은 수를 차지하는 아이들. 무슨 업보라도 되는지 우리 아이들은 고난을 되물림 받고 극심한 취업난에 발을 동동 구른다. 비록 휴대폰 하나 끼고 차 키를 들고 다니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콩나물시루처럼 좁은 터에서 바글바글 아등바등 살 때가 더 좋았다. 다 같이 힘들고 다 같이 가난했으니 별 불평이 없었다. 숨 쉴 틈 없이 모여들어서는 뻥이요 뻥! 소리와 동시에 일시에 우르르 쏟아진 강냉이처럼 저마다 저요! 저요 !하며 창피를 모르고 살던 그 시절, 나는 강냉이 빵을 점심으로 때우던 그 시절의 가난이 그렇게 그리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