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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군이 운용하던 미국제 M-48 패튼 탱크. 6일 전쟁 당시 대부분의 아랍국가들이
애용했던 탱크는 당시 소련의 최신 탱크 T-54/55 였지만 요르단군은 특이하게 미국제 M-48이나
영국제 센츄리언 탱크들을 사용하였습니다.)
지난 번 글에서 6일 전쟁 시작 후 나흘만에 이집트를 굴복시키고 시나이 반도를 삼켜버린 이스라엘군의 활약상을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 북쪽에서 사실상 6일 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나라 시리아, 그리고 요르단과 이라크를 상대로 이스라엘이 어떻게 전쟁을 전개해나갔고 불과 며칠만에 이들을 동시에 어떻게 격퇴시켰는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요르단과의 전쟁
6일 전쟁 첫날인 6월 5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그날 아침 시나이 반도로 침공을 시작한 이스라엘 군은 동시에 동쪽에 위치한 요르단과도 전쟁을 시작합니다. 자! 우선 오늘 이야기의 중심이 될 지역에 대하여 지도로 한번 들여다보고 시작하도록 하지요!
(이스라엘 동쪽과 북쪽 지역을 붉은 색 원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원 안에 북쪽으로 골란 고원이 보이고, 동쪽으로 웨스트 뱅크라는
지명이 보일 것입니다. 골란 고원 위쪽에는 레바논과 시리아가 위치
해있고, 웨스트 뱅크 동쪽은 요르단이 위치해있습니다.)
요르단이라는 나라는 이집트와는 외교 노선이 좀 틀린 미국과 영국등 민주주의 국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오는 온건파 아랍 국가였습니다. 미국,영국,프랑스가 소련의 시선을 의식하긴 했지만 어쨌든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후견인과 같은 국가들이었던 탓에 그들과 친밀히고 서구적인 감각을 가진 후세인 국왕이 통치하는 요르단에 대해서 이스라엘도 애초 시리아나 이집트와 같은 강경파 국가들과는 달리 덜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아랍의 두 맹주,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좌측)과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우측), 후세인
국왕은 1952년에서 1999년까지 45년간 재위하면서 이스라엘과 아랍의 중재에 큰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6일 전쟁에서는 웨스트 뱅크(요르단 서안)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에게 빼앗기는 치욕을 겪습니다.)
실제 1956년 제2차 중동전쟁 당시에 여-프-이스라엘군과 이집트 간에 수에즈 운하를 놓고 벌인 쟁탈전에서 요르단은 전혀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관망했었기에 이스라엘은 내심 이번 전쟁에서도 요르단은 마찬가지의 태도를 견지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습니다. 이집트와 북쪽에 시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요르단까지 건드려서 전쟁을 해야 한다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너무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후세인 요르단 국왕(좌측)은 다른 아랍 국가들과는 달리 일찍부터
친미 외교로 유연하고 온건한 외교 정책을 전개하였습니다. 미국을
방문하여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을 만난 후세인 국왕. 그는 영국
왕립군사학교에서 유학을 하여 서구 문명에 개방적인 아랍 국가의
국왕이었습니다.)
실제로 요르단의 군사력은 이나라가 미국과 영국측으로부터 수입한 M-48 패튼과 센츄리언 탱크로 무장하고 있어서 군사력 면에서도 소련 최신 T-54/55로 무장한 이집트과 비교해서 전혀 손색없는 강력한 상대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을 통해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요르단과는 전쟁을 할 의사가 없음을 전달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어차피 "초록은 동색"이란 말이 있듯이 막상 전쟁이 벌어지면 요르단이 같은 아랍 국가들을 위해서 전쟁을 불사할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은 그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었지만....)
하지만 눈 딱 감고 요르단과 전쟁을 하여 승리만 할 수 있다면!
여기서 요르단의 영토 중에서 가장 비옥한 웨스트 뱅크 (요르단 강 서안지구)지역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위에 지도를 한번 다시 보면 "웨스트 뱅크"라는 지역은 6일 전쟁 직전에 이스라엘의 국경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기독교, 유태교, 이슬람교 모두 종교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예루살렘의 일부가 당시 요르단 영토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정말 껄끄러운 상대이긴 하지만 요르단과의 전쟁을 한번 눈 딱 감고 저질러서 승리만 할 수 있다면 비옥한 웨스트 뱅크 지역은 물론 예루살렘이 드디어 온전히 이스라엘의 영토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 유대 왕국에 솔로몬 왕(BC 970년~931년 재위)은 "솔로몬의 지혜"의 일화로
비기독교인들조차 그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부친인 다윗 왕에 이어 즉위한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아름다운 성전을 건설하였습니다. 유태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그들의 나라에 중심의 도시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침공을 결심할 때도 3개 기갑여단, 6개 보병여단, 그리고 2개의 독립 기갑 부대의 적지 않은 규모의 병력을 요르단과의 전쟁을 위해 예비해두고 있긴 했습니다만..... 문제는 요르단의 참전이 이스라엘 지휘부가 예측했던 "시나리오"보다 훨씬 빨랐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전쟁 첫날 요르단은 망설였으나....
6월 5일 드디어 시나이 반도 침공으로 불과 하루 사이에 이집트의 공군력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지상군들은 이스라엘의 파죽지세에 밀려가고 있을 때 시나이 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만 전해들은 요르단 국왕은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온건한 합리주의자인 요르단 후세인 국왕일지라도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으로부터 범 아랍인의 단결과 유태인 격멸에 동참해달라는 요구를 뿌리칠 수 있는 명분은 없었습니다. 여기서 개전 첫날 이집트는 이스라엘에게 연전연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공영방송에서 이집트군이 이스라엘 침략군을 격파하고 있다는 거짓말 뉴스를 방송하고 있었는데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았던 주변 국가들은 전황에 대해서 가장 먼저 의지할 수 있는 소스가 바로 해당 국가의 방송 뿐이었습니다.
요르단 국왕조차 이런 황당한 방송을 진짜로 믿고 어쩌면 이번 기회야말로 중동에서 이스라엘의 세력을 축소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르단 입장에서 이스라엘에게 둘러쌓여있는 웨스트 뱅크 지역이 항상 불안했으므로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이스라엘을 격파한다면 항상 불안했던 이지역의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6월 5일 개전 첫날 이스라엘 기갑부대 포격에 파괴된 이집트 T-55 탱크,
이런 상황에서도 이집트 공영 라디오 방송은 이집트군의 일방적인 승리
라고 거짓 방송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전쟁 개시일 6월 5일 낮 12시 40분에 요르단군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공격 명령이 떨어지고 제일 먼저 미국제 M2 장거리포들에서 일제히 포격이 시작됩니다. 요르단의 선제 공격은 이스라엘의 전쟁 영웅 모셰 다얀(당시 참모총장) 입장에서는 간절히 기다리던 소식이었습니다. 요르단에 대해서 먼저 공격을 한다는 것이 명분이 뚜렷하지 않았고, 이스라엘 내부적으로도 요르단과의 전쟁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들이 많았던 탓에 강경파의 리더였던 다얀에게는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의 요르단 공격 소식에 쾌재를 부르게 됩니다.
(시나이 반도 침공 작전에 투입된 이스라엘군 M48 패튼 탱크)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절반씩 통치하던 예루살렘 역시 요르단의 선제 공격에서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먼저 공격한 쪽은 요르단이지만 곧바로 이스라엘 예루살렘 주둔 보병 여단의 공격으로 전세는 역전되버립니다. 도리어 예루살렘에 요르단 통치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격렬한 예루살렘의 시가전이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애서 벌어진 혈전
이집트가 장비는 우수하면서도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당나라 군대"였다면 요르단군은 현대화된 장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훈련으로 정예화된 군대였으므로 이스라엘군으로써는 절대 방심해서는 안되는 상대였습니다. 유태인들에게 예루살렘이 어떤 의미인가는 앞에 글들에서 충분히 설명드렸고 그러기에 시나이 반도 전체를 얻는 것보다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이 이스라엘에게는 더욱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문제는 아랍 맹주인 요르단의 군인들 역시 예루살렘은 종교적인 성지로써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도시였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빈손으로 예루살렘에 투입된 이스라엘 공수부대
요르단의 전쟁 개시 당일의 선제 공격은 이스라엘이 아무리 요르단의 참전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너무 뜻밖에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방어와 요르단 지역 공격을 위해 급히 투입된 이스라엘 최정예 공수부대 제55여단의 상황만 봐도 그렇습니다. 애초에 계획된 작전이 아니라 요르단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서 서둘러 투입되다보니 공수부대이면서도 수송기에 탑승해서 낙하산으로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급히 징발한 비무장 일반 버스에 탑승하여 예루살렘 전투 지역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중 대부분은 놀랍게도 개인화기조차 소지하지 못한 빈손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시가전에 투입된 제55 공수여단)
그 이유는 애초에 이 정예 공수부대는 시나이 공격을 위한 지상군에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즉 6월 5일 당일 지상군 공격이 개시된 후 몇시간 후에 시나이 반도 지역에 낙하산 강하 예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탓에 그 전날 그들의 개인 화기 및 중화기의 대부분을 그들이 탑승한 수송기가 있는 공군 기지에 미리 운반해놓은 후였습니다. 그런데 요르단의 공격이 시작되자 그들은 급히 예루살렘 공격 작전에 투입되었고 그들 손에 있어야 하는 무기들은 여전히 공군 기지 창고에 쌓여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6월 5일 밤 9시에 공격 명령을 받았지만 무기가 없어서 제55여단은 이튿날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여기 저기에서 끌어온 총기와 탄약을 지급 받고 전투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자! 그들이 지금부터 공격해야 할 목표는 예루살렘에 요르단측 지역이었는데 그곳에서 전투를 하는 병사들은 기관단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현대 병사들이었지만 그들이 전투를 하는 예루살렘은 수천년전 건설된 고대 도시였습니다. 복잡한 미로처럼 만들어진 고대 건축물들은 요르단쪽이 좀더 높은 지대인탓에 자연스럽게 천혜의 요새로써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맞아 요르단 군들이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전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시가전을 표현한 그림, 이렇게 좁은 골목의 미로 속에서 공격해야했던
이스라엘군은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지만 의외로 많은 희생을 치루게 됩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요르단군은 저지대에서 접근하는 이스라엘군들에게 집중 사격을 가했고 용맹한 이스라엘 공수부대지만 순식간에 수많은 병사들이 총격에 쓰러지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비탈길 아래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어쩌면 앞에서 굴러 떨어지는 전우들의 시체들을 보면서 뒤따라 진격해 올라가는 병사들도 자신이 똑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지만 예루살렘 점령은 그들 각자에게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먼 조상들까지 꿈속에서 바라마지 않던 소망이었기 때문에 요르단 군의 비오듯 쏫아지는 총탄 세례에 맞서서 사격을 하면서 앞으로 앞으로 올라갔습니다.
(해외 블로그에 올라온 6일 전쟁 당시 예루살렘 시가전에서
영웅적인 전투를 벌였던 이스라엘 제55 공수여단 병사의 비넷,
병사가 들고 있는 우지 경기관단총은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결정적인 공헌을 한 무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자체 개발하여
1954년부터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명작입니다. )
최초의 장애물인 바리케이드와 지뢰 매설 지점을 통과하는데 무려 2시간이 소요되었고 엄청난 숫자의 전사자가 발생했지만 마침내 표현 그대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서" 요르단군의 진지에 도착하게 된 이스라엘 공수부대원들은 상황을 역전시켜 버립니다.
(예루살렘 시가전에서 이스라엘 공수부대에게 포로가 된 요르단 병사들)
여기서 1차/2차대전 당시에 진격해온 공격군이 마침내 방어군의 참호로 뛰어드는 순간 곧바로 양쪽이 사용하는 소총에 착검을 한 상태로 총검 육박전이 벌어지던 것이 과거의 전투 형태였다면 1967년 현대에서 방어군의 참호로 뛰어든 공격군 이스라엘 공수부대원들은 짧은 총신의 우지 기관단총으로 눈에 보이는대로 요르단군들을 향해 난사를 했고 좁은 참호 속에서 요르단 군이 소지하고 있던 미국제 M1 소총보다는 손쉽게 무차별 사격을 가할 수 있는 이스라엘군의 기관단총이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좁은 구시가지 내리막길 돌길로 이스라엘군의 기관단총 세례에 쓰러진 요르단군 병사 시체들의 몸에서 콸콜 뿜어져 나온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당시 참전했던 이스라엘 공수부대원의 증언)
이당시 치열한 전투에서 요르단군 측에 부대는 이스라엘 제55 공수여단 못지않게 요르단 군에서 최고의 정예 부대로 명성을 얻었던 제1 왕신 근위사단이었습니다. 양국의 최정예 부대가 만나서 벌인 끔찍한 혈전의 결과는 결국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55여단이 확보한 기동로를 통해서 이스라엘 구시가지 골목길을 올라온 이스라엘 기갑부대의 M50 슈퍼 셔먼 탱크들이 잔존 방어 병력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포격을 가하자 결국 예루살렘 요르단 지역은 이스라엘 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6월 6일 아침 9시에 예루살렘 요르단 지역이었던 요르단 경찰학교 연병장에서 이스라엘군이 실시한 피해 상황을 확인하면서 상당수의 M50 탱크 전차장들이 전사를 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유는 대부분의 다른 나라 기갑부대의 경우 전투 중에 적의 저격을 두려워하여 전차장들이 포탑 밖으로 머리를 잘 드러내지 않는 반면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최대의 시야를 확보하고져 전투 중에도 상반신을 포탑 밖으로 드러내고 주위를 보면서 포격 지시를 내리는 탓에 요르단군의 보병들의 소총 사격으로 사살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군의 슈퍼 셔먼 탱크들(M-50 & 51)은 분명히 이집트의 최신형 소련제
T-55나 55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구형 탱크였지만 그것을 조종하는 기갑병들의
뛰어난 기량과 정신력이 이집트 기갑 부대들을 초토화시켜 버렸고, 요르단 기갑
부대 역시 마찬가지로 일방적인 패배를 거듭하였습니다.)
여기서 6월 6일 아침에 예루살렘 점령에 제55 공수여단과 함께 큰 공헌을 한 기갑부대(벤 아리 기갑여단)의 이야기를 좀 더 해야 하겠습니다.
M4 셔먼과 M48 패튼의 대결
앞서 소개했듯이 이스라엘 주력 탱크 슈퍼 셔먼은 2차대전 미육군 주력 탱크 M4 셔먼을 개조한 M50과 M51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2차대전 미육군의 주력 탱크를 개조한 M50/51이 같은 미국에서 생산된 당시로서는 차세대 탱크라 할 수 있는 요르단군의 M48 패튼과 마주치는 희귀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집트나 요르단이 보유한 최신형 소련제 탱크들에 비하면 높이도 훨씬 높고(따라서 그만큼 피탄
가능성도 높고) 야간 전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적외선 조준 장치도 전무한 그야말로 "골동품"
이었지만 아랍의 기갑 부대들은 이 골동품 탱크들에게 철저하게 궤멸 당했습니다.)
6월 6일 새벽에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이스라엘 벤 아리 기갑여단은 요르단군 소속 기갑부대와 마주치게 됩니다. 영국제 센츄리언과 M50/51로 구성된 이스라엘 기갑부대와 신형 M48 패튼 20대로 구성된 요르단 기갑부대는 즉각 전투에 돌입하게 됩니다. 여기서 성능적으로 월등히 앞서는 최신 기종인 패튼 탱크는 분명히 한세대 전에 활약한 노장 셔먼 탱크들이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기갑병들의 포격의 정확도는 요르단 기갑부대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6일 전쟁 기간 중에 요르단이 포획한 이스라엘군의 M48 탱크, 6일 전쟁 중에 이스라엘 군도
미제 M48 최신형 탱크를 운용하기는 했지만 절대적으로 숫자가 부족하여 한세대 이전 탱크들인
AMX-13이나 슈퍼 셔먼 탱크들이 상당수 주력으로 구성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지 않은 숫자의
이스라엘 M48 탱크는 이집트군의 T-55 탱크들을 상대로 뛰어난 전과를 올리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요르단군의 주력탱크였던 M48 탱크들은 이스라엘 구형 탱크들과의 전투에서 철저하게 파괴되고
열세를 면치 못합니다. 과연 탱크의 성능보다 우선하는 것이 누가 조종하느냐인 것 같습니다.
사진은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 군이 운용한 M48 탱크)
20대의 요르단 패튼 탱크 중에서 무려 17대의 탱크가 완파되었고 나머지 3대는 허둥지둥 퇴각해버렸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기갑부대측은 탱크의 손실은 한대도 없었고 3대의 M3 하프트랙 장갑차만 파괴되었을 뿐입니다. 탱크 성능의 우세보다는 기갑병의 기량의 차이가 더 중요한 승리의 요인임을 증명해준 사례입니다.
비록 첫 교전에서는 단 한대의 탱크의 손실도 없이 적을 격퇴한 이스라엘 기갑부대였지만 이어서 몇시간동안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까지 크고 작은 요르단 기갑부대와 지상군들과 교전에서 적지 않은 숫자의 탱크들이 파괴되었고 요르단군이 미리 만들어놓은 장애물과 대전차호를 통과하면서 캐터필더가 잘라지거나 서스펜션 축이 부러지는 비전투 손실로 탱크가 멈춰버리는 일도 발생합니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기갑부대들은 그동안 엄청난 손실을 입으면서도 요르단 지상군들의 방어선을 거의 뚫어버린 공수부대원들에게 뜨거운 환호를 받게 되었고 곧바로 공수부대원들의 안내를 따라 올라간 이스라엘군의 M50/51 탱크들은 감격스러운 예루살렘 탈환의 쾌거를 이룩하게 됩니다.
통곡의 벽
예루살렘 공격에 합세한 기갑 여단은 2개 기갑 중대를 55공수여단에 지원해주고 곧바로 웨스트 뱅크의 라밀라로 이동합니다.
(웨스트 뱅크를 보면 6일 전쟁 이전 이스라엘 영토에 깊숙히 밀고
들어와 있는 요르단 영토였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이곳이 무척
탐이 났을 것은 위치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완전한 점령을 위해서 남겨진 공수여단과 2개 기갑 중대는 구시가지를 향해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런 와중에 한 병사가 시내 요르단 상점들을 수색하던 중에 나팔을 한아름 들고 돌아왔는데 이 물건들은 얼마 후에 구약 성경에 한 사건을 재현하는데 긴요하게 사용되게 됩니다.
이제 공수여단은 자신들을 지원해주는 탱크들을 앞세워 구시가지 공격을 개시하는데 여기서 또 한번 이들에게는 가혹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시가지의 수천년 동안 있어온 수많은 좁은 골목길들이 엉켜있었고 이스라엘 보병들은 이곳 지리를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M50 탱크가 주종을 이루는 2개 기갑중대는 어둠 속을 달려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서 여리고 쪽으로 접어드는 도로로 들어서는 바람에 공수부대와 떨어지게 됩니다. 자신들이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기갑 중대는 서둘러 돌아섰지만 그때는 이미 기갑 지원 없이 요르단 군을 만나게 된 공수부대가 치열한 교전을 시작한 후였습니다. 심지어 잃어버린 기갑 중대를 찾아 나섰던 공수부대 일행은 어둠 속에서 요르단 군의 기습을 받고 전멸하게 됩니다.
이런 뜻밖에 혼란 속에서 공수여단은 현재 교전 장소를 향해 요르단 기갑부대가 40여대의 M-48을 끌고 접근 중이라는 비보를 듣게 됩니다. 현재 연락이 두절된 2개 기갑 중대가 다행히 돌아와준다고 해도 신형 M-48 탱크 40대와 맞닥뜨린다면 그 열세는 명백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다행히 전쟁 개시와 함께 제공권을 장악한 이스라엘 공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공수여단의 지원 요청을 받자 이스라엘 공군의 푸가 매지스터 연습기에 장착된 로켓탄 공격으로 요르단 M-48 탱크들은 치명타를 입고 허둥지둥 여리고 쪽으로 퇴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공군의 푸가 CM-170 매지스터 연습기로 구성된 공격 편대,
연습기 용도로 개발된 이 기종을 가지고 요르단의 최신형 M-48 탱크들
에게 위협을 줄 정도로 공격을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조종사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훈련을 받았는가를 잘 설명해주는 사례입니다.)
(1967년 6일 전쟁 발발 당시에 탱크 파괴 임무에 혁혁한 공을 세운 푸가 매지스터 연습기, 이스라엘 공군에게는
이 허접한 훈련용 항공기가 적 탱크 파괴와 같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가까스로 좁은 골목길 하나 하나를 뒤지면서 요르단 저격병들을 사살하며 진격했던 이스라엘 공수부대원들은 6월 7일 오전 10시경에 드디어 예루살렘 구시가지 중심부 "통곡의 벽" 앞에 도착하게 됩니다. 2,000년 전에 로마 제국에 의해서 유태 왕국이 멸망한 이후로 유태인들에게 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 재입성은 이렇게 이루어졌고 병사들은 모두 철모와 탄띠를 벗어 던지고 성벽에 머리를 기대고 통곡을 했습니다.
(예루살렘 구시가지 점령 순간 "통곡의 벽"에 기대어 감격의 울음을 터뜨리는 이스라엘 병사들)
(이스라엘 출신 사진작가 데이빗 루빈저에게 명성을 안겨준
유명한 사진 - 예루살렘 탈환 직후에 통곡의 벽 앞에서 3명의
공수부대원을 촬영한 이 사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으로
남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뒤 이어 남쪽 웨스트 뱅크에서 이스라엘 기갑 부대와 보병들의 주요 거점 점령들이 이어지자 요르단 후세인 국왕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믿었던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단 하루만에 공군을 전멸당하고, 단 이틀 만에 거의 대부분의 시나이 반도를 이스라엘 지상군에게 빼앗긴 상황에서 넋이 빠져 버렸고 요르단을 지원한다는 것은 기대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 이라크 역시 이스라엘과 교전국 입장은 마찬가지여서 요르단을 지원해줄 여력이 없었습니다.
나블루스 함락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웨스트 뱅크 한가운데 위치한 나블루스까지 진격한 이스라엘 기갑부대가 경험한 일은 요르단이 얼마나 혼란 상황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부터 남쪽으로 진격하여 나블루스 근방에 도착한 AMX-13 경전차로 구성된 이스라엘 기갑여단의 선발대는 먼저 나블루스 시내로 진입하면서 요르단 군과의 격렬한 전투를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가지에 탱크들이 진입하자 시민들이 모두 쏟아져나와 그들을 환영하였고 이스라엘 장교는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군중들 중에 일부 총기를 소지한 자들이 발견되어 일단 무장 해제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스라엘 장교의 말을 못알아들었고 장교는 병사들을 시켜서 그들의 총기를 빼앗은 후에 공중을 향해 발사하면서 지시에 따를 것을 위협하게 됩니다. 그순간 환영의 분위기는 공포로 바뀌어 시민들은 앞다투어 도망을 가버렸는데.....
나중에 상황을 파악한 결과 시민들은 이스라엘 군이 그렇게 빨리 진격해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자신들 눈앞에 나타난 탱크들이 우방인 이라크 군의 탱크들이라 성급하게 판단한 후에 환영을 하러 뛰어나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군이 각오했던 요르단 군들은 이미 퇴각한 후였고 웨스트뱅크 주요 거점인 나블루스는 이렇게 어이없게 함락되었습니다. 함락된 후에 요르단 군의 40여대의 M-48 탱크들이 접근해왔지만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성능적으로도 크게 열세인 AMX-13 경전차들의 신출귀몰한 포위망과 정교한 포격을 구사하여 요르단 기갑부대들을 물리쳤습니다.
(푸가 매지스터 연습기로 구성된 이스라엘 공군의 편대가 이집트와 요르단 탱크들에게 효과적인
타격을 성공했던 것만큼이나 미스데리한 사건은 이집트의 프랑스제 경전차 AMX-13을 가지고
최신형 M-48 탱크로 구성된 요르단 기갑부대를 물리쳤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이스라엘
기갑병들의 기량과 투철한 정신력을 이유로 들더라도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기적과 같은 승리였습니다.)
여리고 城의 나팔소리
구약성경을 보면 이집트를 떠난 후에 여호수아가 이끄는 유대민족들의 정복 전쟁 중에 가나안 족속의 난공불락의 여리고 城을 함락시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유대민족으로 하여금 6일동안 여리고 성 주위를 돌게 한 후에 7일째 되는 날 성 주위를 일곱번 돌고나서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불 때 백성들이 일제히 소리 지르니 여리고 城벽이 무너져 내리고 성안에 가나안 족속들은 유대 군사들에 의해서 몰살을 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에 여리고 城이 무너지는 장면)
하나님이 유대민족들의 정복 전쟁에서 보여주신 커다란 기적이었던 이 이야기의 재현이 6일 전쟁 중에 이스라엘 군에 의해서 재현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루살렘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치루었던 이스라엘군은 이제는 힘없이 퇴각해버리는 요르단군을 추격하며 예루살렘 구시가 지역을 뚫고 예수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을 함락시킨 후에 헤브론과 다히리아를 거쳐 엣사무에 도착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군이 요르단 서안, 즉 웨스트 뱅크라 불리는 지역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셈입니다. 하지만 이지역 전투의 클라이맥스는 벤 아리 대령이 지휘하는 기갑부대에 의해서 연출됩니다.
구약시대에도 그랬고 현대에 와서도 전략적인 거점이었던 여리고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기갑여단은 여리고 입구에 바나나 농장에 진흙 구덩이에 쳐박혀있는 16대의 M47/M48 요르단 탱크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집트 군에 비해서는 훨씬 제대로 훈련되어있던 요르단 기갑병들은 이미 전세가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나타난 이스라엘 탱크들을 향해서 포격을 가했지만 앞에서 벌어졌던 요르단 M48 탱크들의 운명과 동일하게 침착하지만 정확하게 조준하여 포격을 가하는 이스라엘의 구형 탱크들에게 요르단 신형 탱크들은 순식간에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오래 시간을 지체할 수 없던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불타는 요르단 탱크들을 지나쳐서 여리고市 중심부로 진격해들어갔습니다. 시내에서 요르단 보병들의 소총 사격과 곡사포 포격으로 인해서 선봉에 섰던 몇대의 이스라엘 AMX-13 경전차와 슈퍼 셔먼 탱크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특히 고집스럽게 포탑 큐폴라 밖으로 상반신을 내놓고있던 전차장들은 상당수 요르단군의 소총 사격에 희생물이 되었고 곡사포의 포격으로 멈춰버린 탱크들이 시내 도로 한복판에서 멈춰버리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전혀 맞지 않는 의미라 생각되지만 어쨌든 2차대전 중에 루프트바페의 공포의 급강하
전폭기 슈투카의 별명이 "여리고의 나팔"이었습니다. 급강하 폭격시에 들리는 공포스러운
굉음 탓이긴 하였지만....)
하지만 그들의 조상이 그러했듯이 다시 한번 여리고를 점령하게 된다는 기대감에 이스라엘 군들의 대부분은 사기가 충천해 있었습니다. 여기서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예루살렘 시가에 악기 상점에서 이스라엘군이 노획한 나팔들을 불자 갑자기 요르단 군의 사격이 멈췄습니다. 구약에서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고 백성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자 성벽이 무너진 것처럼 요르단 군의 사격이 멈춘지 얼마 안되어 여리고 시의 중앙 광장에서 요르단군들의 항복을 의미하는 백기가 올려졌습니다.
요르단의 사실상 항복
여리고를 점령한 후 이스라엘의 주력부대는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불과 40km 앞에 까지 파죽지세로 접근하였고 요르단 왕 후세인은 부랴 부랴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에게 지원 요청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집트는 이미 이스라엘군에 의해서 시나이 반도 전체를 점령 당한 상황이었고 공군력의 거의 100%가 궤멸당한 상황에서 요르단을 지원해줄 수 있는 능력이 전무했습니다.
나세르는 기껏해야 방송에 나와서 "엄청난 병력의 미군이 이스라엘군으로 위장하여 이 전쟁에 개입하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요르단 국왕은 믿었던 이집트가 이미 패색이 짙어진 상황이라는 제대로 된 정보를 뒤늦게 입수하고는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고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후세인 국왕은 마침 국제연합 UN이 고맙게도 때 맞추어 제의한 휴전 조건에 서둘러 동의하고 전군에 전투 중지 명령을 내립니다. 이상이 이스라엘이 애초에 갖고 있던 영토에 비하면 엄청나게 넓고 비옥한 땅이라 할 수 있는 웨스트 뱅크(요르단 강 서안)를 전쟁 개시 후 약 50시간 만에 자국 영토로 만들어버린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얻은 대신에 이곳에서 요르단과 벌어진 전투로 희생된 이스라엘군은 299명 전사, 1,457명 부상으로 같은 기간에 이집트를 상대로 시나이 반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스라엘군의 피해에 약 3배에 해당하는 결과였습니다. 한편 요르단군의 경우 방어하는 입장에서 예루살렘과 웨스트 뱅크 주요 거점에서 무너진 후에 힘없이 퇴각을 거듭한 결과 전쟁에서는 패배했지만 피해는 예상보다는 적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로 오래 전에 건설된 구시가지의 좁고 미로와 같은 골목들에서 벌어진 시가전은 이집트군이 주력 선봉으로 내세운 탱크들에게 효과적인 장애물이 되주었고 비록 이스라엘 지상군들의 용맹한 공격으로 무너지더라도 방어하는 입장에서 신속하게 철수할 수 있는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공격하기에는 아주 불편한 이런 환경들이 일단 무너진 후에 도망치기에는 아주 편리하였다는 것입니다.
요르단군은 전쟁 후에 무려 15,000명의 손실을 발표했는데 실제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가 파악한 요르단 군의 손실은 그 1/10 수준밖에 안된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손실은 줄이고, 전과는 뻥 튀기를 하는 것이 통상의 행태라면 요르단의 경우 주변 아랍국가들에게 공분을 끌어내고 훗날의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서 손실을 뻥 튀기는 웃지못할 해프닝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1,500명도 전사자의 숫자가 아니라 사상자를 의미하므로 결국 이스라엘군의 피해와 비교해서 압도적으로 많은 수준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 모사드측 추축입니다.)
(6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지상군들은 속전속결의 전설을 만들어냈지만 적지 않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첫댓글 오늘도 중동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한동안 형님께서 올려주신 글들을 못읽어서 이번주에 다시 순서대로 읽어봐야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탱크 이야기도 올려주신 것 같던데요. 훔~ ^^
어쩐지 소식이 뜸하신 것 같더라니......탱크 이야기 엄청 줄 서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에 님 작품 고증도 계획중......
오늘 전쟁사는 그어느 전쟁이야기보다 박진감 넘치네요.
읽는 내내 전쟁영화를 보는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전쟁사 잘 읽었습니다. ^^
캄사합니다!
지금 출장준비 중이라 출장지 가서 읽어 봐야 겠습니다. 너무 궁금 합니다. 김작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아이쿠! 휴머니스트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나팔부니 사격이 멈추었다니! 역사는 반복되는 부분이 있네요. 놀랍습니다.
예전에 이라크후세인대통령이 미국에게 공격받은 다음 주로는 지하벙커로 피신하면서 사로잡혔을때 모습이 짜르지 못한 수염때문인지 짐승같이 보였었는데
이는 후세인대통령의 머나먼 조상, 바빌론의 느부가네살이 통치말기에 미쳐서 짐승처럼 헤매는 모습이 연상이 되더군요.
놀랍네요!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브가네살왕 이야기는 구약 성경 구석에 숨어있어서 왠만한 신자들도 잘 모르는 이야기인데! 기독교인이셨나요? 만약 그러시다면 반갑구요! 어쨌든 jhkimrad님 작품 고증도 조만간에 계획 중입니다.
@따블오남편(김준만) 남편님도 기독교인이셔서 반갑습니다.^^ 요즘 올리시는 글들이 정말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습니다. 책을 내셔도 될듯.^^
@jhkimrad (김진형) 제글 누차 말씀 드리지만 온갖 책들과 인터넷 정보에서 얻은 정보와 지식의 편집물일 뿐입니다. 무슨 논문이 아니므로 편안하게 발췌와 편집 제 마음대로 하고 출처도 밝히지 않은 잡문일 뿐이지요. 그저 회원님들 정보를 보시기 좋게 제공해드리고져 하는 마음뿐입니다.
다윗의 후예들답습니다. 여리고의 나팔..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이 정말 진리인듯 하네요. 항상 재밌는 글 감사히 잘 보고 갑니다^^
레이님도 새해에 건강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올해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김준만님 글도 PDF로 만들어 주세요...김영준님..^^
새해에 가장 중요한 것 건강하세요!!
예.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따블오님, 이차대전사를 pdf파일로 만들어도 괜찮겠죠?
@겨울섬 (김영준) 뭐 저야 감사하지요.^^
따블오님, 이스라엘군의 나블루스 점령부분에서 "함락된 후에 요르단 군의 40여대의 M-48 탱크들이 접근해왔지만 이집트 기갑부대는 성능적으로도 크게 열세인 AMX-13 경전차들의 신출귀몰한 포위망과 정교한 포격을 구사하여 요르단 기갑부대들을 물리쳤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이집트 기갑부대가 아니라 이스라엘 기갑부대 아닌가요?
맞습니다. 오타입니다. 캄사합니다. 정말 관심 가지고 읽어주시는 님같은 분이 계셔서 힘이 납니다! 꾸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