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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端宗]조선 왕 | 단종 요약정보
태어난 때 | 1441(세종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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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때 | 1457(세조 3). |
소속 국가 | 한국 |
소속 국가 부속정보 | 조선 |
직업 | 왕 |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1452~55 재위).
아버지는 제5대 왕 문종이고, 어머니는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이다. 비는 정순왕후(定順王后) 송
씨(宋氏)이다. 1448년(세종 30) 8세 때 왕세손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전에 문종은 자신이 병약하여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에게 나이 어린 세자의 보필을 부탁했고,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박팽년·신숙주 등에게도 좌우에서 힘을 모아 도와주라는 유언을 했
다. 그러나 1453년 숙부 수양대군이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황보인·김종서 등을 제거
하고 군국(軍國)의 모든 권리를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1455년 단종은 한명회·권람 등의 강요에 더이상 견디지 못하여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
이 되었다. 1456년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모두 처형된 뒤, 1
457년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세조찬위). 그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노산군에서 서
인(庶人)으로 강봉되었으며 10월에는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색인 : 단종복위운동).
짧은 재위기간중에도 1453년 양성지(梁誠之)에게 〈조선도도 朝鮮都圖〉·〈팔도각도 八道各圖〉를 편찬하게 하고, 이듬해에는 〈황극치평도 皇極治平圖〉를 간행하게 했다. 1454년 〈고려사〉를 인쇄·반포했으며, 그해 12월 각 도에 둔전(屯田)을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1681년(숙종 7)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복위되어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다.
장릉(莊陵) 6대 단종(端宗)
6대 단종이 홀로 묻히신 단릉으로 서울에서 가장 멀리 있는 왕릉이다.
12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숙부 수양대군에게 쫓겨나 강원도 영월로 귀양 보내져 그곳에서 사사되어 묻혔으니 조선왕릉은 도성 밖 100리를 벗어날수 없다는 규범에 무관하게 오백리 멀리에 있게 되었다.
부인 정순왕후는 사릉(思陵)에 홀로 묻혀있어 남편과 300리 이상 떨어져 있으니 부부가 모두 외로운 고혼들이다.
영월 장릉
홍살문 - 정자각을 지나 능침으로 가는 구조가 아니다. 능선을 올라가 능침을 둘러보고... 다시 능선 아래로 내려와서 제향공간을 둘러보아야한다. 그밖에도 정려각이나 장판옥, 배식단등 다른 왕릉에는 없는 곳들이 포함되어 있다.
ㅇ 단종 애사(哀史)
단종은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외동아들이자 세종의 손자로 조선왕실 최초의 왕세손이다.
세종-문종-단종의 적장(嫡長)으로 이어진 혈통이었으나 결국 그 代가 끊기고 마니 단종은 조선 왕조 임금 중에서 가장 어린나이에 죽은 왕이자 유일하게 국장을 치루지 못한 임금이다.
1450년(세종 32) 세종이 죽고 아버지인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10살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문종이 재위한 지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였으며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나 단종 복위 사건 등으로 말미암아 서인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1457년(세조 3) 10월 유배지인 영월에서 결국 사사되니 그의 나이 17세였다.
실로 피지도 못한 꽃 한송이요, 비바람에 떨어진 추풍낙엽에 불과한 애처로운 삶이었다.
권력투쟁에 희생된 17년 세월을 적어 본다.
- 출생 : 1441년(세종 23)에 세자(문종)과 세자빈(현덕왕후) 사이에서 출생
어머니는 난산으로 3일 만에 죽고, 할머니뻘인 세종 후궁 혜빈 양씨가 양육함
- 8 세 : 1448년(세종 30) 세손에 책봉됨. 조선왕실 최초의 왕세손임
- 10세 : 1450년(세종 32) 세종 승하, 문종 즉위. 단종은 왕세손에서 세자로 책봉됨
- 12세 : 1452년(문종 3) 문종 승하, 단종 즉위.
- 13세 :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장악, 안평대군 사사
- 14세 : 1454년(단종 2)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음 (정순왕후)
- 15세 : 1455년(세조 1) 6월, 수양에게 왕위를 내주고 상왕으로 물러남 (재위 3년2개월)
- 16세 : 1456년(세조 2) 성삼문의 난(상왕 복위사건), 사육신 처형
- 17세 : 1457년(세조 3) 노산군으로 강봉, 6월 22일 청령포로 유배
금성대군 2차 단종 복위사건으로 단종은 서인으로 강봉됨
10월 24일 사사됨, 동강에 버려진 시신을 엄홍도가 거두어 암장.
암장된 60년 후 무덤을 겨우 찾았다. 그로부터 15년 후 그곳에 간단한 석물을 세웠다.
- 180년이나 지난 1698년(숙종24) 비로소 단종이란 묘호와 장릉이란 능호를 받고서 종묘에 들어갈 수 있었다.
ㅇ 계유정난 (癸酉靖難)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이 친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을 말한다.
세종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니 이들이 고명대신(顧命大臣)이다.
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단종은 즉위 당시 12세로 어렸기 때문에 성인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해도 되나 이때는 대비도, 대왕대비도 없는 상황인지라 세종과 문종의 유명을 받든 고명대신들이 정권을 잡고 좌지우지 하게 된다.
이와 대립되는 세력은 왕실 대군들, 특히 그중에서도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과 셋째아들 안평대군 등의 세력이 가장 강성해 조정의 신료와 왕실, 심지어 환관, 나인까지도 이들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자 고명대신들은 가장 세력이 강한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하여 보다 덜 위협적인 안평대군과 손을 잡게 되는데 수양대군은 휘하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한편 그들의 경계심을 무마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된다. 이 사행길에서 그는 신숙주를 완전히 자기세력으로 포섭하게 되며 중국 조정에도 훗날 쿠데타를 대비한 저자세로 외교를 하고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귀국 후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홍윤성 등과 함께 살생부를 작성하고, 쿠데타를 벌인다.
1453년 10월 10일,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를 먼저 죽인 뒤, 김종서가 모반하였므로 죽였는데 일이 절박하여 사전에 임금께 아뢸 여가가 없었다고 상주하였다. 곧 왕명을 빌어 신하들을 소집, 미리 계획했던 대로 영의정 황보인, 우찬성 조극관, 좌찬성 이양 등 반대파 중신을 궐문에서 죽이고, 우의정 정분, 조수량 등을 귀양 보냈다가 이어 죽였다. 한편 김종서 등의 목을 베어 매달고 그 자손을 주살(誅殺)하였으며 이어서 안평대군이 김종서 등과 내통했다 하여 그를 강화도에 귀양 보낸 뒤 사사(賜死)하였다.
계유정난으로 실권을 얻게 된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조·형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직함으로써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고, 자신과 정인지, 한확을 정난공신 1등에 책록하여 정인지를 좌의정에, 자신의 맏아들 도원군의 장인이자 사돈인 한확을 우의정에 임명하였으며 나머지 신하들을 2등, 3등으로 책록하여 주요 관직들을 독점하므로써 사실상 재위(在位)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수양대군과 정인지 등은 단종을 압박하여 살해된 조정 중신의 처첩, 자녀들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는 한편 집현전으로 하여금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는 등 집권태세를 굳혀갔다. 이렇게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후 1455년 마침내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ㅇ 세조 찬위 (簒位)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이 1455년(세조 1)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일을 말한다. 단종 폐위 사건으로 부르기도 한다.
계유정난으로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1455년 윤6월에 단종의 측근역할을 하던 금성대군을 비롯한 종친, 내시 엄자치와 같은 궁인 및 그들과 가까운 관인들을 제거했다. 이에 고립되어 불안을 느낀 단종은 사태가 어쩔 수 없는 처지에 달했음을 깨닫고 명목상 상왕(上王)으로 추대 된 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세조이다.
세조의 즉위는 선양(禪讓)을 빙자했지만 실질적으로 왕위를 찬탈(簒奪)한 것에 불과하다.
ㅇ 1차 단종 복위 운동 (성삼문의 난)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성삼문, 형조참판 박팽년, 직제학 이개, ·예조참판 하위지, 사예(司藝) 유성원 등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무인 유응부 등은 상왕 단종의 복위와 반역파의 숙청을 꾀하고자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세조 2)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향응하는 기회를 타서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계획은 어긋나고, 김질과 그 장인 정창손 등은 사태가 불리해지자 거사계획을 밀고함으로써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세조는 성삼문을 직접 문초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으며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등도 체포되어 수양대군에 의해 직접 심문당한 뒤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에 처해졌다. 유성원은 아내와 술 한 잔을 나눈 뒤 조상의 사당 앞에서 자살해 버렸다. 이어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도 체포되어 극형에 처해졌으며, 성삼문의 세 동생(성삼빙, 성삼고, 성삼성)과 네 아들(성맹첨, 성맹년, 성맹종, 그리고 갓난아기)등도 모두 살해되었다.
이외에도 반역의 혐의를 받은 권자신, 김문기 등 70여 명도 모두 살해되었다.
이렇게 역신으로 기록된 이들의 처첩과 딸, 누이들은 모두 공신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이듬해인 1457년에, 수양대군은 상왕(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시켜 50여명의 군졸들 감시 아래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내버렸으며, 이미 죽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를 추폐시켜 서인으로 만들었고, 금성대군(수양대군의 넷째 아우)도 단종을 가까이 한 일이 있다 하여 경상도 순흥으로 귀양을 보내 버렸다.
이때 숨진 충신들을 사육신이라 하는바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유성원을 말하며 최근들어 김문기를 사육신에 추봉함으로써 현재 사육신묘에는 7기의 묘소가 있고 이와 관련 김문기 측과 반대하는 측의 설전이 팽팽하다.
ㅇ 단종 유배
1452년 문종이 죽자 단종은 왕이 되었으나 1453년 숙부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모든 권력을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었으며 1455년에는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밀려나 사실상 감금 되었다. 다음해인 145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노산군으로 강봉 되었다가 1457년에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귀양행렬은 1457년 6월 22일 한여름 따가운 햇살을 받으면서 첨지중추부사(僉智中樞府事) 어득해(魚得海)와 군자정 (軍資 正), 김자행,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홍득경 등이 군졸 50여명을 거느리고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하여 7일 만인 6월 28일에 청령포에 도착하였다.
ㅇ 2차 단종 복위 운동 (금성대군)
순흥으로 귀양 보내진 세조의 아우 금성대군은 그 후 9월에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영남 일대에 격문을 돌려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런데 관노가 그 격문을 갖다 바치며 밀고해버리는 바람에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으며, 금성대군은 안동에 하옥되고, 부사 이보흠과 기타 영남의 인사들도 많이 주살되었다.
(관노가 밀고했다고도 하고, 그렇게 되자 겁이 난 이보흠도 따라서 밀고했다고도 하며, 풍기현감이 관노의 밀서를 빼앗아 직접 밀고했다는 說이 있다.) (실록상 밀고자는 이보흠)
밀고자의 경우 김질은 승승장구하고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이보흠은 유배후 죽임을 당한다.
금성대군의 격문에 서명을 한 죄를 물었기 때문이겠으나 또한 그 때문에 숙종, 영조때 단종과 금성대군이 복위되고, 정조 때 장릉 배식단에 모셔질 때 이보흠도 함께 모셔져 이제는 충신으로 배향되고 있는 것도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ㅇ 단종 사사(賜死)
한편 세종의 아들 한남군, 영풍군 등도 멀리 귀양 가고 노산군에 대하여는 군(君)을 폐하여 서인으로 하였는데 영의정 정인지, 좌의정 정창손, 이조판서 한명상, 좌찬성 신숙주 등은 계속 노산군(단종)과 금성대군을 치죄할 것을 주장하여, 세조는 마침내 금성대군을 사사(賜死)하고 불과 이때 나이 17세였던 단종에게도 사약을 내리게 된다.
단종이 유배지 청룡포에 도착 한 것은, 무더위가 한창인 6월 28일, 청령포에 홍수가 나자 영월시내
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겨졌다가 10월 24일 사약을 받고 17세의 어린나이에 승하하였으니 영월 땅에 머문 시간은 채 넉 달도 되지 않는다.
실록은 '영월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었다'고 적었으나 믿기 어려우며 다른 기록을 보면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 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연려실기술>
단종은 동강에 버려졌으나, 역적의 시신에 손을 대면 삼족을 멸한다는 위협 때문에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고 있을 때 영월 호장 엄홍도가 아들 3형제와 미리 준비한 관을 지게에 지고 단종의 시신을 염습하여 영월 엄씨의 선산인 동을지산(冬乙支山)에 암매장하니 지금의 장릉이다.
염습 [殮襲,染習] 1)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긴 뒤 옷을 입히고 염포로 싸는 일 2) 씻겨 옷을 입히고 염포로 싸다
ㅇ 장릉 (莊陵)
장릉은 조선왕릉 중 한양에서 가장 먼 곳이며, 또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엄흥도가 암매장 한지 59년이나 지난 1516년(중종 11)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묘를 찾아 12월 15일 봉분을 갖추었다.
이후 조정에선 단종의 복위 이야기가 이따금 나왔으나 정통성 문제와 얽혀있어 실행하지 못하다가 1580년(선조 13)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으며 1698년(숙종 24) 단종의 신위를 종묘에 모심과 동시에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다.
상석2[
표석2[
장명등1[
망주석[
약어 망석 2 (望石) , 망주 2 (望柱) , 망주석표 (望柱石表)
유의어 망두석 (望頭石) , 화표 (華表) (2) , 화표주 (華表柱
신위1[
추봉된 정릉과 경릉의 예에 따라 난간석과 병풍석, 무석인은 생략되었고, 석물 역시 후대에 만들어져서 왜소하면서도 간단하다. 장명등은 사각옥형(四角屋形)이다.
애초부터 왕릉으로 조성된 곳이 아닌지라 능침공간과 제향공간이 각기 따로 떨어져 있다.
능침공간을 둘러보려면 능선 위로 올라가야 하고, 제향공간을 둘러보려면 능선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영월을 접어드는 첫 고개가 소나기재이다. 단종이 귀양올때 무더위를 식혀주는 소나기가 내렸다해서 지어진 이름. 장릉 입구가 아니라 영월 입구에 대형 홍살문을 세웠다. 영월 전체가 단종을 기린다는 의미인듯...
<능침으로 올라가려면 입구에서 능선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길을 잘 닦아 놓았다.>
정령송(精靈松)
단종 비 정순왕후의 사릉(思陵) 묘목단지에서 옮겨와 심었다는 소나무... 정령송(精靈松)이라 부른다. 생각보다 나무가 부실(?)해 보인다. 처음 약도에서 A 지점쯤에 심어져 있다.
장릉 원경
장릉 근경
병풍석이나 난간석없이 간소한 모습이다
문인석과 석마 무인석은 없다
4각형의 장명등과 곡장 앞의 망주석에는 세호가 없는것이 다른다
혼유석
석호
석호와 석양을 보통 2쌍, 각 4마리씩 조성하나 장릉에는 각 1쌍씩만 있다. 석호가 곡장을 향해 앉아있다
장릉의 후면의 곡장
홍살문과 참도, 정자각, 비각등 제향공간은 오른쪽 언덕 아래에 있어 능침 옆구리에 절을 하는 격이다.
능침 측면에서 본 정자각과 ㄱ 자형의 참도가 특이하다. 정자가 오른 쪽의 예감이 보인다. 홍살문에서 시작되는 참도는 정자각까지 크게 한번 꺾어져 연결되니 아버지 문종의 현릉(顯陵)이 두번 꺾어졌던 모습이 생각나 부자의 능묘가 어찌 이리 닮았을꼬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능침을 둘러보고 능선을 내려왔다. 홍살문을 들어서기 전에 정문부터 홍살문까지 다른 능에서는 볼수 없는 것들이 많다. 정리를 쉽게 하기 위하여 먼저 홍살문 안쪽, 제향공간부터 설명하기로 한다.
홍살문까지 이르는 동안 금천교는 없다. 왼쪽 옆으로 나란히 흐르는 물줄기에 돌다리가 있기는 하나 금천교는 아니다.
장릉 지역을 흐르는 물줄기에 걸쳐진 돌다리
제향공간으로 건너가는 금천교는 아니다.
홍살문
배위와 영천
오른쪽에 배위 그리고 정면의 참도가 꺽어지는 지점에 영천(靈泉) 샘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자 비각과 정자각이 보이고 저 높은 능선위에 능침이 보인다
정자각
정자각이 다른곳보다 다소 작다는 느낌이 들정도로 단정해보인다. 능침 우측 옆구리를 향해 세워졌다
정자각의 동계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가 맘에 걸리는데.... 정자각에 올라가는 동계(東階) 역시 소맷돌도 없이 부실해보인다
정자각 뒷문을 통해 올려다보면 다른 왕릉은 능침이 보이는데, 이곳은 사초지에 탁 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예감
그래도 정자각 왼편의 예감은 다른 어느곳보다 구색을 잘 갖추어 있다
정자각 뒷문을 나와 능침으로 이르는 신도는 놓여져 있으나 바로 급격한 경사도를 올라야한다
비각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이라고 새겨져 있다
수복방
홍살문 옆의 수복방과 그 앞의 비각 그리고 정자각이 멀리 보인다
다른 왕릉이 능침공간, 제향공간, 진입공간으로 이루어져 진입공간에는 재실과 금천교 정도가 있을뿐인데 비하여 장릉은 박충원 군수와 충신 엄홍도의 정려각이 세워져 있으며, 재실과 단종 역사관이 있고, 충정을 다한 신하들을 모신 충신단과 제향장소인 배식단이 있으며, 공간내에 우물격인 영천(靈泉)이 있는데 이 우물은 평시 물이 별로 없다가도 한식날 장릉에 제사를 올릴 때면 물이 많이 고인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정려비, 충신단, 장판옥 등이 있는 곳은 이곳 뿐이다.
<영천(靈泉)... 지금도 맑은 물이 고여 있다.>
<홍살문 바로 밖에는 정조 15년 (1791)에 세운 장판옥(藏版屋이 있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32위, 조사 186위, 환자군노 44위, 여인 6위등 268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안에 들여다보면 3개의 위패에 각인의 이름을 써놓았는데
왼쪽 위패에는 안평대군, 금성대군부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등 세종의 후실 왕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장판옥 맞은편에는 배식단이 있다. 매년 단종 제향후 장판옥에 모셔진 268인에 대한 제사를 모시는 제단이다.>
<장판옥과 배식단을 둘러보고 출입문쪽으로 걸어 나오면 충신 엄홍도의 정려각이 보인다.
사약을 받고 승하후 버려진 단종임금의 옥체를 거두어 암장하므로써 충신으로 추앙받는 엄홍도.
그후 순조에 이르러 공조판서를 추증받았고, 고종13년에는 충의공(忠義公)의 시호를 받았다.
그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운 것이다.>
<엄홍도 정려각을 지나 내려오면 장릉의 재실이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다.
아마도 왕릉중 제일 크지 않을까 싶은데, 충신들 제사도 모시는등 소요가 많기도 하겠으나
단종을 모시려는 영월군민들의 염원이 이렇게 표현된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한반도 지형의 연지
<재실을 지나 더 내려오면 단종의 이모저모를 전시해놓은 역사관이 있고 그 아래쪽으로 박충원 정려각이 있다.
중종 36년(1541)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이 꿈에 현몽한 단종을 만나 그의 묘를 찾아내어 봉축하고 제대로 조성하였다.
그의 충신됨을 기리기 위하여 비교적 최근인 1973년에 세운것이다.>
<단종이 승하하자 그를 모시던 시녀들이 동강 절벽 낙화암에서 뛰어내려 순절하였으며, 그녀들의 넋이 두견새가 되어 찾아와 임 금을 배알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사육신의 유일한 혈손인 박팽년의 후손으로 영월부사·승지·대사간·병조참판을 지낸 박기정(朴基正 1748~?)이 1792년(정조 16)에 건립하고 배견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장릉 입구 초입 오른쪽 깊숙히... 자칫 못본채 지나칠만한 자리에 있다.>
영월은 슬픈 도시이다.
장릉이 있고 단종이 잠들어 있어 더욱 그러하다.
열일곱 소년, 어린 임금이 왕위를 빼앗기고 쫓겨나 머나먼 이곳에서 흉사(凶死)한 곳이다.
영월군민들은 그를 애통한 임금으로서가 아니라 토착신앙으로... 태백산 신령님으로 모시고 있었다.
주민들 모두가 神으로 섬기고 있었다.
단종의 장릉 - 恨과 눈물 서린 단종애사 세자 묘 형식의 능침
조선 왕릉은 현재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도성인 한양을 중심으로 반경 4~40km에 조영됐다. 그러나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1441~1457)이 잠든 장릉(莊陵)은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33-1번지에 있다. 이곳은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오지로 면적이 356만3000㎡(107여 만 평)이며, 완충지역까지 포함하면 437만4000㎡에 이르는 광활한 땅이다. 단종이 왜 이처럼 먼 곳까지 와서 묻혔는지는 ‘단종애사(端宗哀史)’라고 불리는 역사가 말해준다.
세종 23년(1441) 7월 23일 왕세자빈 권씨(현덕왕후)가 동궁(창덕궁) 자선당에서 원손(단종)을 낳자, 세종대왕은 “세자(문종)가 장년(28세)이 돼도 후사가 없어 염려했는데 적손이 생겨 기쁘기 이를 데 없다”라며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튿날 세자빈의 산후 통증이 심하다는 소식에 시아버지인 세종이 친히 동궁으로 병문안을 갔으나 세자빈은 사망하고 말았다. 왕궁인 경복궁과 세자궁인 창덕궁 모두 슬픔에 잠겼다. 세종은 세자빈의 장례 격식에 대해 자신의 어머니 원경왕후(태종비)보다는 내리고, 직전 사망한 큰딸 정소공주보다는 높여 동궁 안에서 모시라고 명했다. 이는 세자빈에 대한 최고 예우였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장손으로 태어난 원손 이홍위는 친어머니 품에 안겨보지도 못한 채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작은할머니)의 젖을 먹으며 자랐다. 할머니인 소헌왕후는 이런 손자를 애틋하게 여겨 더욱 정성껏 돌봤다. 8세가 되던 해 4월 3일, 세종은 원손에 대해 “천자(天姿·타고난 용모)가 숙성하고 품성이 영특하고 밝으며, 지금 나의 스승에 나아갈 만큼 됐다”고 칭찬한 뒤 왕세손으로 명했다.
청령포로 귀양 간 노산군 사약 받고 사망
1450년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손에서 왕세자가 됐다. 그러나 1452년 5월 18일 문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단종은 제6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그의 나이 12세였다.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한 단종은 3년 2개월의 재위 동안 수렴청정을 할 만한 배경조차 없었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단종은 방대한 양의 교서를 발표했다. 이는 아버지 문종이 어린 아들을 염려해 종친과 대신들에게 부탁한 고명(顧命)정치의 내용이었다.
문종의 유명을 받든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은 ‘황표정사(黃標政事)’를 했다. 황표정사란 일부 공신이 관료 후보자 명단 가운데 의중에 둔 사람을 노란색으로 표시해 임금에게 올린 것을 가리킨다. 관료 인사는 임금의 고유 권한이었으나 단종이 어린 탓에 공신들이 대신 인사권을 행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정국이 혼란에 빠지고 종사가 위태로워지자, 문종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실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종친과 궁인 신하들을 유배시키고 대신들을 죽였다. 겁을 먹은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단종을 키운 혜빈 양씨마저 청풍으로 귀양 보내, 이제 궁 안에는 단종을 가까이에서 보살펴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① 월중도(越中圖). 18세기 장릉을 중심으로 영월의 모습을 그린 그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 ② 단종 장릉 능침 전경. 사각장명등은 조선시대 최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③ 숲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장릉의 모습. ④ 단종 장릉 제향공간. 곡선형 신로와 어로, 영천, 배식단이 보인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 출신들과 단종의 여섯째 숙부인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도모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후 단종은 서인(노산군)으로 강봉돼 영월 청령포로 귀양 갔다. 청령포는 동강이 삼면으로 휘돌아 흐르고, 험악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감옥이다. 1457년 9월 경상도 영주로 유배 가 있던 금성대군이 다시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돼 사사됐고, 단종은 폐서인으로 강등됐다가 그해 10월 24일 사약을 받았다.
단종이 죽자(‘세조실록’에는 자결했다고 기록돼 있다) 시신은 영월의 아전 엄흥도가 동을지산(冬乙旨山)에 몰래 묻었다. 사람들은 “후한이 두렵다”며 말렸으나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다 화를 당하더라도 달게 받겠다”며 야밤에 관을 준비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고 산지를 찾아갔다. 그때 소나무 밑에 있던 사슴 한 마리가 자리를 비켜주어 잠시 쉬었다 가려는데 지게가 움직이지 않자 그 자리에 급히 암장했다. 이곳이 현재의 장릉이다. 그래서인지 장릉의 능침은 양지바르고, 눈이 와도 쉽게 녹고 따뜻하다. 장릉 터에 대해 풍수가들은 갈룡음수형, 비룡승천형이라 한다. 한편 단종을 장례 지낸 뒤 엄흥도는 식솔을 데리고 충청도 동학사로 잠적했다. 지금도 동학사에는 단종과 정순왕후, 엄흥도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
단종은 죽어서 두견새로 환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유배지까지 단종을 따라온 시녀들은 청령포 건너 동강 절벽의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후 이들 영혼은 단종의 유택이 있는 장릉 능선 끝자락에 와서 단종의 영혼에 절하고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정조 때 영월부사로 부임한 박기정(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은 이 이야기를 듣고 그 뜻을 기려 배견정(拜鵑亭)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뒤편 바위에 친히 배견암이라는 글자를 썼다.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문화유산감”
80여 년 동안 노산군의 묘는 제사도 봉양도 받지 못하고, 찾는 이도 없이 버려졌다. 중종 33년(1538) 영월부사로 부임한 박충헌이 꿈을 꾼 뒤 노산묘를 찾아 봉분을 정비하면서 알려졌다. 박충헌은 영월에 부임하는 부사마다 임기 중에 죽는다는 이야기를 듣던 어느 날 꿈에서 단종을 만나 그의 억울함을 들었다 한다. 단종은 숙종 7년(1681)에 대군으로 추봉되고 숙종 24년(1698) 추복해 묘호를 단종(端宗),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다. 241년 만에 왕실의 정례를 찾았다.
단종제의 제향 모습
그리고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32인, 조사 186인, 환자군노 44인, 여인 6인 등 총 268명의 위패를 모셨다. 이 건물이 장판옥이다. 장판옥 맞은편 배식단에서는 매년 4월 한식날 단종제를 올린 뒤 이들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장릉의 능침공간과 제향공간의 배치는 여느 능과는 다른 점이 많다. 장유형의 능선 중간에 능침이 있고, 능침 서측 수십m 아래에 평지를 이용해 L자형 참도를 만들고 정자각을 배치했다. 이는 단종이 암매장된 능침의 앞이 좁아 자연친화적인 조영원리에 따른 것으로 본다.
장릉의 능침공간은 후릉(厚陵)과 경릉(敬陵)의 예에 따라 난간석과 병풍석, 무인석은 생략하고 세자의 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단종은 능이 조영된 숙종 때 노산군으로 복위됐다가 영조 때 다시 단종으로 복위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릉의 능원은 중종 때 능지를 확인한 후 숙종대에 혼유석과 장명등, 석호, 석양, 망주석 등 석물을 정비했으며, 영조 연간에 제향공간을 만들고 정자각과 수복, 수라간, 산신석, 예감 등을 배치했다. 그리고 정조대에 정려각과 배식단, 장판옥을 만드는 등 능이 수세기에 걸쳐 조영됐다. 이곳의 산신석은 다른 곳과 달리 위쪽에 예감, 아래쪽에 산신석이 있어 왕과 산신의 위계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능침의 석물은 세자의 예에 따라서인지 작고 간단하다. 사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은 숙종 때 조영된 것으로 명릉보다 앞선 조선시대 최초의 사각장명등으로 추정된다. 장릉의 능침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아름답고 장엄하다. 17세기 장릉의 능역을 상세히 그린 ‘월중도(越中圖)’는 능원을 연구하고 복원하는 데 문헌적 가치가 높다. 이곳에 나타난 경석지(景淅池)는 아름다운 경관이 물에 비친다는 뜻으로, 인도의 타지마할 전면부에 수로(Canal)를 만들어 능묘를 투영한 예와 비슷하다. 경석지의 발굴과 복원이 아쉽기만 하다.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여러 신하를 배향하기 위해 1791년 정조의 명으로 장릉 아래에 배식단(配食壇)을 설치했고, 능역 안에 배식단사(配食壇祠)와 영천(靈泉), 엄흥도정려각(嚴興道旌閭閣) 등을 세웠다. 제향공간 곡선의 참도 옆에 설치된 영천은 일반 능역의 제정(어정·왕실 우물)을 가리키는데, 가뭄과 홍수에도 마르지 않는 것이 알려져 박기정이 이 사실을 조정에 이르자 정조가 친히 ‘영천(靈泉)’이라 했다고 전한다.
이 밖에 장릉은 보호구역 안에 원찰인 보덕사, 금몽암 등 단종애사와 관련된 많은 이야깃거리와 문화유적이 있다. 세계문화유산 실사자로 왔던 왕리준(王力軍)은 “전 세계에 수많은 왕의 이야기가 있지만 ‘단종애사’ 같은 역사는 이곳이 유일하지 않느냐”며 “이것이야말로 세계문화유산감”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세계문화유산의 의미를 단편적으로 설명해주는 내용이다.
장릉의 제례는 매년 한식을 전후해 영월의 큰 문화행사인 단종제가 열린다. 단종비 정순왕후는 단종 즉위 2년째인 1454년 1월 결혼했으나 다음 해 단종이 폐위되고 영월로 유배되자 남편과 생이별해 자식을 얻지 못했다. 이후 82세에 사가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순왕후의 능은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가 출가한 해주 정씨의 묘역인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산65-1번지에 있으며 능호는 사릉(思陵)이다
[출처]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 신의 정원 조선 왕릉⑧] / 주간동아
조선왕릉 답사기 (9) 장릉(莊陵) ... 6대 단종 [2편]
ㅇ 단종 유배길 답사
1452년 문종이 죽자 단종은 왕위에 올랐으나 1453년 숙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모든 권력을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었으며 1455년에는 왕위마저 빼앗기고 상왕으로 밀려나 사실상 감금생활을 하게 된다.
다음해인 145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 되었다가 이듬해인 1457년에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가게 된다.
단종이 17살이던 1457년 음력 6월 22일 한여름 따가운 햇살을 받으면서 첨지중추부사(僉智中樞府事) 어득해(魚得海)와 군자정 (軍資正) 김자행,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홍득경 등이 군졸 50명과 함께 유배행렬을 호위하여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한지 7일 만인 6월 28일에 청령포에 도착하였다.
유배를 떠나던 첫날밤은 부인 송씨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들어가있는 '정업원'에서 묵었다고 하는 말은 정사인지, 야사인지 모르지만 귀양가는 죄인(?)의 입장에서 가능했겠는가 생각해보면 아마도 안타까움에서 만들어낸 야사인듯 하다.
아무튼 지금으로부터 553년전 삼복더위가 한참인 여름날 단종의 유배행열은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하였다.
대략의 코스를 살펴보면 창덕궁 - (야사에서는 정업원에 들려 부인과 하루 묵어 감) - 청계천 영도교에서 영영 이별하고 - 살곶이 다리로 한강의 지류를 건너 화양정에서 잠시 쉬었다가 광나루에 도착, 배를 타고 이포나루까지 내려갔다.
한강을 따라 배를 타고 이포까지 간 후에는 다시 육로를 따라 여주 - 신림 - 주천 - 영월까지 산길을 따라 이동하였다.
수십, 수백년이 흘러 산천도 간곳 없을테지만 왕릉답사에 충실한다는 의미에서 귀양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 한양내에서의 유배코스.... A는 창덕궁, B는 정업원, C는 영도교, D는 살곶이다리, E는 화양정, F는 광나루....>
<대동여지도에서 그려보면 아래와 같지 않을까? 살곶이 다리부터는 한양이 아니라 경기도 땅이었을듯~>
<창덕궁 돈화문.... 정궁의 대문이다.>
<창덕궁을 나와 동대문으로 도성을 빠져 나갔을듯~>
<단종이 한살 연상의 부인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을 하고 건너간 다리... 영도교(永度僑)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라는 이름으로 흥인지문(동대문)을 거쳐 왕십리·뚝섬·광나루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다리였다고 한다. 지금의 청계천에서 동대문 지나 청계 7가와 8가 사이에 다리가 복구 되어 있다.
원래 돌다리였으나 대원군이 경복궁 중수때 헐어다 썼다하며 그후 나무다리를 놓았으나 큰물이 나면 떠내려갔다
하나 그뒤 시멘트 다리를 놓았다가 청계천 복개때 없어진후 지금은 전혀다른 모습의 다리로 다시 세워져 있다.>
<정순왕후 송씨와 생이별하고 갔다하여 영이별 다리, 또는 영영 건너가 버린 다리라는 뜻으로 전해 오다가
성종이 친히 영도교라 명명하였다고 전해온다.>
<영도교에서 단종과 정순왕후의 생이별을 재현하는 행사가 벌어지곤 한다.>
행렬이 광나루로 가기 위해서는 한강 지류를 건너야한다. 지금의 한양대학교 앞 살곶이다리.
태종이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맞이할 때 화살이 기둥에 박혔다해서 이름 지어진 다리... 전곶교(箭串橋)라고도 한다.
<살곶이 다리.... 조선시대 가장 긴 돌다리였다.>
그렇게 한양을 벗어난 행렬은 저녁노을이 물들 무렵... 지금의 화양동 화양정(華陽亭)에 도착하였다.
화양정은 할아버지인 세종께서 지으시고 편액까지 내려주신 정자... 당신이 가장 아끼던 세손이 임금에서 쫓겨나 귀양가면서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한숨으로 눈물을 지을줄이야???
귀양보낸 세조는 내시 안로를 시켜 이곳에서 간소한 잔치를 베풀어 송별하려 했으나 어린 단종은 눈물로 상을 물리친다.
하기야 음식이 넘어 가겠는가? 어린조카를 쫓아보내는데 대한 백성들의 이목(耳目)이 두려워 준비했다고도 한다.
<지금은 화양정은 남아 있지 않다. 화양동 느티나무만이 말없이 지키고 서 있다. 근처에 종마목장도 있었다고 한다.>
걸음을 재촉한 귀양행렬은 마침내 지금의 광나루에 도착한다.
광나루는 마포나루, 이포나루, 여주조포나루와 더불어 한강의 4대 나루터로 손꼽힌다.
한자로는 나루 진(津)을 주로 썼고, 강폭이 좁으면 도(渡)를 붙였다. 초소가 설치됐으면 진(鎭)을 썼다.
이곳에서부터는 뱃길을 이용하여 광주와 양평을 지나 여주군 금사면 이포나루까지 갈것이다.
지금 광나루터는 흔적도 없다.
너븐나루라 하여 광나루인데 1936년 광진교가 생기므로써 없어지고 말았다.
<광진교 앞에 서 있는 광나루 표석....>
<실제 나루터는 흔적도 없다... 한강호텔을 지나 광진정보도서관쪽으로 가면 표지석만이 있을뿐이다....>
<여기서 배를 타고 멀리 보이는 구리, 팔당, 양평 방향으로 노저어 갔을것이다.....>
이곳부터는 뱃길을 이용하여 광주(廣州)와 양평(陽平)을 지나 여주 이포나루까지 가야한다.
<광나루에서 팔당 - 양수리 - 양평 - 이포나루까지 한강을 따라 내려갔을것이다.>
이렇게 단종이 귀양 가는 길에는 소문을 듣고 몰려 나온 백성들로 넘쳐났다.
양주(楊州) 고을에 머물렀을 때는 양성(陽城)에 사는 차성복이란 백성이 백설기 한 시루를 쪄서 임금께 바치며 안위(安危)를 걱정 했다. 유배 행렬이 광주 땅을 지날 때는 백성들이 어린 왕을 배알하고자 모여들었으나 군졸들의 제지로 유배행렬이 지나간 후에야 뒷모습을 바라보고 눈물로 배알(拜謁) 했으므로 이곳을 '배알미리(拜謁尾里)'라 부르고 있다.
<배알미리... 지금은 하남시 배알미동이다. 팔당댐 옆에 있으며 도로가 이어진 곳은 배알미교라 부른다.>
이포나루에서 배를 내린 귀양행렬은 대신면 상구리(어수정)-북내면-강천면-부론면 단강리(단정지)-귀래면-백운면-신림-싸리치-주천면을 지나 군등치를 넘으니 드디어 영월땅, 배일치와 소나기재를 지나 청령포에 도착하게 된다.
<이포나루에서 영월까지의 경로중 신림까지...
여주군 대신면에서 물을 마시니 어수정(御水井)이다. 고달사를 지나 부론면 흥원창, 법천사, 거돈사를 지나
단강초등학교 자리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쉬어가니 단정지이다. 계속 산길을 넘어 신림으로 나아갔다.>
<이포나루.... 단종은 이곳에서 배를 내려 다시 가마로 갈아타고 가면서 한양이 그리워 통곡을 했다고 표석에 적혀있다.
또한 고종비 명성왕후가 임오군란때 몸을 피하여 이곳에서 3일간 머물기도 했다 한다.>
<이포나루 자리에는 이포대교가 놓여 있다. 건너마을이 유명한 천서리 막국수이며 정면의 산 정상은 파사산성이다....>
<이포나루에서 멀지 않은곳에 단종이 마셨다는 우물, 어수정(御水井)이 있다.
지금은 블루헤런 골프장 영내 서측6코스 바로 옆에 있어서 임의로 들어가볼수가 없다.
골프장에 부탁해서 들어가볼수는 있으나 한두명이면 모를까 우르르 몰려가기는 어렵다.>
< 어수정 조금 지난 곳에 고달사지가 있다. 그 당시는 매우 대규모의 절집이었으리라~>
<고달사지(高達寺址)에는 석불좌와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으나 엄청난 규모의 대작임을 알수 있다.
원종대사혜진탑과 부도 역시 각각 국보와 보물이며 쌍사자 석등은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아래 사진은 보물 8호 석불좌, 보물 6호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이다.>
단종의 귀양행렬은 여주 남한강변을 따라 내려가다가 원주 문막에서 내려오는 섬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을 통과한다.
이곳은 '흥원창(興元倉)'이 있던 곳으로 흥원창은 고려 이래 강원도의 세곡을 한양으로 수송하는데 중요한 조창이었다.
나는 왜 한양 광나루부터 이곳까지, 또는 보다 더 멀리 배편으로 이동하지 않고 이포나루까지만 왔었는지 궁금했다.
<흥원청 자리 ... 양수리처럼 2개의 강이 합쳐져 한양으로 흘러가는 그 옛날 水路교통의 요충지였다.>
<남한강쪽에서 바라보니 오른쪽이 원주 문막에서 내려오는 섬강줄기, 오른쪽이 한양으로 흘러가는 남한강 줄기이다.>
이곳은 현재 원주시 부론면으로 당시 흥원창이 있어 각지에서 사람들과 물류가 집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복잡한 동네였으며 그에따라 각지의 소식(言論)이 모여들고 넘친다해서 富論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바로 옆에는 법천사지(法泉寺址)가 있고 조금 아래에 거돈사지(居頓寺址)가 있는것으로 보아 당시는 이곳이 매우 발달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흥원창옆 법천사지 당간지주.... 법천사는 아직 발굴정리가 안된 곳이다.>
<거돈사지 삼층석탑.... 보물 750호이다. 정림사지 석탑이나 불국사 석가탑과 비견될만큼 아름답다.>
부론면에는 단강초등학교가 있다.
학생수 감소로 얼마전 폐교되어 지금은 대안학교로 운영중인 곳인데 당시 단종이 귀양길에 쉬어갔던 곳이라해서 단강정이라 불리우는 느티나무 쉼터가 있어 찾아보았다. 마침 단강마을 운동회가 한참이었다.
<단강초등학교 校木으로 지정된 느티나무.... 이곳에서 단종임금이 쉬어 갔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수령 약 600년으로 강원도내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라 하여 강원나무 2호로 지정되었다.>
<마침 단강마을 운동회가 한참이다. 그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티나무 아래에 차일을 쳤다.>
단강을 지나면 귀래를 지나 배째고개를 넘어 신남에 이른다. 신남부터 영월까지를 정리해본다.
<신남에서 싸리치 고개를 넘고 솔치재를 지나면 주천... 이내 군등치와 배일치를 넘으면 영월땅이다.
선돌이 있는 소나기재를 내려서면 바로 장릉... 읍내의 관풍헌을 지나 외곽으로 내달으니 청령포에 닫는다.>
<싸리치 고개.... 옛길을 따라 넘어보았다. 지금은 신림터널로 통과한다.>
<고개를 내려서면 황둔찐빵으로 유명한 황둔리가 나타난다.>
<공순희 찐빵집... 안흥찐빵과 무엇이 다른지 물었더니 밀가루로 하는 안흥과 쌀가루를 섞은 황둔의 차이... 앙꼬도 다르단다.>
솔치재를 넘어 주천면을 지나고... 단종임금이 넘었다는 군등치를 넘으면 서면인데, 한반도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반도 지형이 있어 이를 관광자원화하려고 그러는듯한데 그래도 한반도를 面이름으로 하는것은 어쩐지 부자연스럽다.
<한반도 지형... 국내에 비슷한 지형이 제법 여럿이나 영월군에서는 面이름을 바꾸면서까지 정책적으로 밀고 있다.>
이렇게 서면(現 한반도면)을 지나면 영월땅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고개가 배일치(拜日峙)고개이다.
귀양지는 가까워 오고 불안한 마음은 커져가니 이 고개에서 서산에 지는 해를 보고 절을 하며 장차의 운명을 기원하였다하여 배일치고개가 되었다.
군등치나 배일치는 고개를 말하는데 우리말로는 고개, 재로 부르지만 한자어로는 령(嶺),현(峴),치(峙)등으로 부른다.
<배일치재에 절하는 단종으로 기념조형물을 만들어놓았다.>
<옛고개길.... 옛길을 고스란히 걸어보고 싶다.>
<배일치에서 내려다본 영월 방향... 첩첩산중을 바라볼때 마음이 어땠을까?>
<배일치 고개를 넘어서면 영월땅... 영월 초입이 소나기재이다.
삼복 더위에 일주일을 시달린 귀양길이 얼마나 힘들고 지쳤을까? 여기 이르러 시원하게 소나기가 내리니 소나기재...
선돌이 있어 고갯마루에서 잠시 차를 세우고 들러본다. 선돌 아래로 무심한 서강이 흐른다.>
<소나기재를 내려서자 커다란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장릉이나 청령포 앞에 세운 국지적인 홍살문이 아니다.
영월읍 전체가 신성시되고 단종임금을 섬기는 마음이라는 표시인듯~>
한양을 떠난지 일주일만에 귀양지 청령포에 단종이 도착하자 몰려온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군졸들이 막으면 막을수록 더욱 더 몰려들어 눈물로 통곡하면서 더러는 맛난 음식을 만들어 바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청령포 전경....>
그러나 날이 저물자 백성들도 이내 사라지고 어둠과 적막만이 감싸는 청령포...
동, 남, 북 삼면이 서강물이 감싸 흐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 암벽이 험준하여 마치 절해고도와 같은 곳이다.
이 적막한곳에서 열일곱 어린 단종은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얼마나 무서웠을꼬?
단종애사
김남식
두고 온 임 그리워서
청령포 관음송에 걸터앉아
눈을 감아 보니
흐르는 눈물은 주체 할 수 없어
망향탑에 돌하나를 얹는다
영도교 난간에서
임을 두고 천리 먼 길
떠나 올 때
무거운 발 걸음
멀어지는 한양 길을
돌아 보고 또 돌아 보고
엔젠가는 돌아 갈 줄
알았는데
다시 꼭 만날 줄 알았는데
잠깐의 이별이
오백년의 한이 될 줄을
어디에다 목 놓을까?
사릉의 두견은 슬피 우는데
장릉에 홀로 누워서 내 무엇하리오
견우와 직녀도
일년에 한번은 만나는데
우리가 만날날은 그 언제련가....
[출처] : 김신묵의 해피투어 (Happy-tour) blog.chosun.com/ksmm2000
비운의 왕, 제6대 단종의 장릉莊陵
6대 단종(端宗)
(1441-1457, 재위 : 1452-1455, 부인 1, 자녀없음)
영월의 지방관이 머루를 따서 단종 임금에게 바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단종 애사(哀史)
단종은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외동아들이자 세종의 손자로 조선왕실 최초의 왕세손이다.
세종은 어렸을 때부터 명석하였던 홍위(단종의 아명) 무척 아꼈다고 한다. 세손책봉후 성삼문,박팽년,
이개 등 집현전 소장학자들을 불러 은밀히 세손의 앞날을 부탁하였다. 세종은 자신의 건강도 위중하였고 아들(문종) 역시 오래 못살 것이라는 안타까움과 그리고 혈기왕성한 아들들(특히 수양대군) 틈에 부대끼며 살아갈 세손에 대한 근심때문이었다.
1450년(세종 32) 세종이 죽고 아버지인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10살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문종이 재위한 지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고립무원이었다.
수렴청정 해줄 대왕대비는 물론 부모,처가(당시 미혼) 모두 없는 기막힌 현실...............
결국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였으며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나 단종 복위 사건 등으로 말미암아 서인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1457년(세조 3) 10월 유배지인 영월에서 결국 사사되니 그의 나이 17세였다.
세종-문종-단종의 적장(嫡長)으로 이어진 혈통이었으나 결국 그 代가 끊기고 마니 단종은 조선 왕조
임금 중에서 가장 어린나이에 죽은 왕이자 유일하게 국장을 치루지 못한 임금이다.
실로 피지도 못한 꽃 한송이요, 비바람에 떨어진 추풍낙엽에 불과한 애처로운 삶이었다.
권력투쟁에 희생된 17년 세월을 적어 본다.
- 출생 : 1441년(세종 23)에 세자(문종)과 세자빈(현덕왕후) 사이에서 출생
어머니는 난산으로 3일 만에 죽고, 할머니뻘인 세종 후궁 혜빈 양씨가 양육함
- 8 세 : 1448년(세종 30) 세손에 책봉됨. 조선왕실 최초의 왕세손임
- 10세 : 1450년(세종 32) 세종 승하, 문종 즉위. 단종은 왕세손에서 세자로 책봉됨
- 12세 : 1452년(문종 3) 문종 승하, 단종 즉위.
- 13세 :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장악, 안평대군 사사
- 14세 : 1454년(단종 2)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음 (정순왕후)
- 15세 : 1455년(세조 1) 6월, 수양에게 왕위를 내주고 상왕으로 물러남 (재위 3년2개월)
- 16세 : 1456년(세조 2) 성삼문의 난(상왕 복위사건), 사육신 처형
- 17세 : 1457년(세조 3) 노산군으로 강봉, 6월 22일 청령포로 유배
금성대군 2차 단종 복위사건으로 단종은 서인으로 강봉됨
10월 24일 사사됨, 동강에 버려진 시신을 엄홍도가 거두어 암장.
암장된 60년 후 무덤을 겨우 찾았다. 그로부터 15년 후 그곳에 간단한 석물을 세웠다.
- 180년이나 지난 1698년(숙종24) 비로소 단종이란 묘호와 장릉이란 능호를 받고서 종묘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계유정난 (癸酉靖難)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이 친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을 말한다. 세종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니 이들이 고명대신(顧命大臣)이다.
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단종은 즉위 당시 12세로 어렸기 때문에 성인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해도 되나 이때는 대비도, 대왕대비도 없는 상황인지라 세종과 문종의 유명을 받든 고명대신들이 정권을 잡고 좌지우지 하게 된다. 이와 대립되는 세력은 왕실 대군들, 특히 그중에서도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과 셋째아들 안평대군 등의 세력이 가장 강성해 조정의 신료와 왕실, 심지어 환관, 나인까지도 이들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자 고명대신들은 가장 세력이 강한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하여 보다 덜 위협적인 안평대군과 손을 잡게 되는데 수양대군은 휘하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한편 그들의 경계심을 무마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된다. 이 사행길에서 그는 신숙주를 완전히 자기세력으로 포섭하게 되며 중국 조정에도 훗날 쿠데타를 대비한 저자세로 외교를 하고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귀국 후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홍윤성 등과 함께 살생부를 작성하고, 쿠데타를 벌인다.
1453년 10월 10일,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를 먼저 죽인 뒤, 김종서가 모반하였므로 죽였는데 일이 절박하여 사전에 임금께 아뢸 여가가 없었다고 상주하였다. 곧 왕명을 빌어 신하들을 소집, 미리 계획했던 대로 영의정 황보인, 우찬성 조극관, 좌찬성 이양 등 반대파 중신을 궐문에서 죽이고, 우의정 정분, 조수량 등을 귀양 보냈다가 이어 죽였다. 이어서 안평대군이 김종서 등과 내통했다 하여 그를 강화도에 귀양 보낸 뒤 사사(賜死)하였다.
계유정난으로 실권을 얻게 된 수양대군은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고, 고립되어 불안을 느낀 단종은 사태가 어쩔 수 없는 처지에 달했음을 깨닫고 1455년 명목상 상왕(上王)으로 추대 된 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세조이다. 세조의 즉위는 선양(禪讓)을 빙자했지만 실질적으로 왕위를 찬탈(簒奪)한 것에 불과하다.
1차 단종 복위 운동 (성삼문의 난) 과 단종유배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성삼문, 형조참판 박팽년, 직제학 이개, ·예조참판 하위지, 사예(司藝) 유성원 등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무인 유응부 등은 상왕 단종의 복위와 반역파의 숙청을 꾀하고자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세조 2)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향응하는 기회를 타서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계획은 어긋나고, 김질과 그 장인 정창손 등은 사태가 불리해지자 거사계획을 밀고함으로써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숨진 충신들을 사육신이라 하는바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유성원을 말한다.
이렇게 상왕복위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상왕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 되었다가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귀양행렬은 1457년 6월 22일 한여름 따가운 햇살을 받으면서 첨지중추부사(僉智中樞府事) 어득해(魚得海)와 군자정 (軍資 正), 김자행,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홍득경 등이 군졸 50여명을 거느리고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하여 7일 만인 6월 28일에 청령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미 죽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를 추폐시켜 서인으로 만들었고, 금성대군(수양대군의 넷째 아우)도 단종을 가까이 한 일이 있다 하여 경상도 순흥으로 귀양을 보내 버렸다.
2차 단종 복위 운동 (금성대군)
순흥으로 귀양 보내진 세조의 아우 금성대군은 그 후 9월에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영남 일대에 격문을 돌려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런데 관노가 그 격문을 갖다 바치며 밀고해버리는 바람에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으며, 금성대군은 안동에 하옥되고, 부사 이보흠과 기타 영남의 인사들도 많이 주살되었다.
밀고자의 경우 김질은 승승장구하고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이보흠은 유배후 죽임을 당한다.
금성대군의 격문에 서명을 한 죄를 물었기 때문이겠으나 또한 그 때문에 숙종, 영조때 단종과 금성대군이 복위되고, 정조 때 장릉 배식단에 모셔질 때 이보흠도 함께 모셔져 이제는 충신으로 배향되고 있는 것도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금성대군신단(錦城大君神壇) 사적 제491호, 경북영주 (문화재청사진)
단종 사사(賜死)
한편 세종의 아들 한남군, 영풍군 등도 멀리 귀양 가고 노산군에 대하여는 군(君)을 폐하여 서인으로 하였는데 영의정 정인지, 좌의정 정창손, 이조판서 한명상, 좌찬성 신숙주 등은 계속 노산군(단종)과 금성대군을 치죄할 것을 주장하여, 세조는 마침내 금성대군을 사사(賜死)하고 불과 이때 나이 17세였던 단종에게도 사약을 내리게 된다. 단종이 유배지 청룡포에 도착 한 것은, 무더위가 한창인 6월 28일, 청령포에 홍수가 나자 영월시내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겨졌다가 10월 24일 사약을 받고 17세의 어린나이에 승하하였으니 영월 땅에 머문 시간은 채 넉 달도 되지 않는다.
단종은 동강에 버려졌으나, 역적의 시신에 손을 대면 삼족을 멸한다는 위협 때문에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고 있을 때 영월 호장 엄홍도가 아들 3형제와 미리 준비한 관을 지게에 지고 단종의 시신을 염습하여 영월 엄씨의 선산인 동을지산(冬乙支山)에 암매장하니 지금의 장릉이다.
장릉(莊陵) 6대 단종(端宗)의 단릉
6대 단종이 홀로 묻히신 단릉으로 서울에서 가장 멀리 있는 왕릉이다.
12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숙부 수양대군에게 쫓겨나 강원도 영월로 귀양 보내져 그곳에서 사사되어 묻혔으니 조선왕릉은 도성 밖 100리를 벗어날수 없다는 규범에 무관하게 오백리 멀리에 있게 되었다. (부인 정순왕후는 사릉(思陵)에 홀로 묻혀있어 남편과 300리 이상 떨어져 있으니 부부가 모두 외로운 고혼들이다. 그들 사이엔 후사도 없었다. : 다음편에서 소개함)
엄흥도가 암매장 한지 59년이나 지난 1516년(중종 11)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묘를 찾아 12월 15일 봉분을 갖추었다. 이후 조정에선 단종의 복위 이야기가 이따금 나왔으나 정통성 문제와 얽혀있어 실행하지 못하다가 1580년(선조 13)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으며 1698년(숙종 24) 단종의 신위를 종묘에 모심과 동시에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다.
추봉된 정릉과 경릉의 예에 따라 난간석과 병풍석, 무석인은 생략되었고, 석물 역시 후대에 만들어져서 왜소하면서도 간단하다. 장명등은 사각옥형(四角屋形)이다.
애초부터 왕릉으로 조성된 곳이 아닌지라 능침공간과 제향공간이 각기 따로 떨어져 있다.
능침공간을 둘러보려면 능선 위로 올라가야 하고, 제향공간을 둘러보려면 능선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그밖에도 정려각이나 장판옥, 배식단등 다른 왕릉에는 없는 곳들이 포함되어 있다.
영월을 접어드는 첫고개가 소나기재이다. 단종이 귀양올때 무더위를 식혀주는 소나기가 내렸다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장릉입구가 아닌 영월입구에 대형 홍살문을 세웠다.
영월군민 전체가 단종을 기린다는 의미이리라. 영월에서 단종의 의미는 神이다.
2007년 4월 27일 영월에서는 이색적인 행사가 열렸다. 바로 단종의 국장(國葬)이었다.
민초 엄흥도가 시신을 암매장한 지 550년만에 거행된 국장이자 천도제였다. 인산인해를 이룬 인파는
역사의 숙연함을 느꼈으리라.
아래 사진들은 작년(2010년) 단종제 행사시의 모습들이다.
홍살문에서 시작되는 참도는 정자각까지 크게 한번 꺾어져 연결되니 아버지 문종의 현릉(顯陵)이 두번 꺾어졌던 모습이 생각나 부자의 능묘가 어찌 이리 닮았을꼬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높은 능선위에 능침이 보인다.
정자각에서는 능침의 옆구리에 대고 절하는 모양이 된다.
초라한 능침. 석호와 석양을 보통 2쌍, 각 4마리씩 조성하나 장릉에는 각 1쌍씩만 세웠다.
병풍석, 난간석도 없는 봉분이 안스럽다.
무인석은 없고, 그나마 문인석은 이끼가 끼고 시커멓게 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망주석에는 왕릉 중 유일하게 아무런 조각(세호)이 없다.
그나마 사각장명등은 아담하게 예쁜 모양이다. 사각장명등은 숙종이전 초기에는 정릉에서만 볼 수 있다.
장릉은 이렇게 좁은 공간에 겨우 조성되어 있다.
국장행사에서는 죽안마를 태워 승천을 기원한다.
다른 왕릉이 능침공간, 제향공간, 진입공간으로 이루어져 진입공간에는 재실과 금천교 정도가 있을뿐인데 비하여 장릉은 박충원 군수와 충신 엄홍도의 정려각이 세워져 있으며, 재실과 단종 역사관이 있고,
충정을 다한 신하들을 모신 충신단과 제향장소인 배식단이 있으며, 공간내에 우물격인 영천(靈泉)이
있는데 이 우물은 평시 물이 별로 없다가도 한식날 장릉에 제사를 올릴 때면 물이 많이 고인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정려비, 충신단, 장판옥 등이 있는 곳은 이곳 뿐이다.
영월은 슬픈 도시이다.
장릉이 있고 단종이 잠들어 있어 더욱 그러하다.
열일곱 소년, 어린 임금이 왕위를 빼앗기고 쫓겨나 머나먼 이곳에서 흉사(凶死)한 곳이다.
영월군민들은 그를 애통한 임금으로서가 아니라 토착신앙으로...
장릉(莊陵)과 사릉(思陵)
(전북도민일보, 2009. 12. 11)
세종 23년(1441) 7월 23일 임금은 “신(神)과 사람이 다 같이 기뻐할 바이요,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기뻐할 것이다. 오늘 새벽 이전에 저지른 대역모반죄(大逆謀反罪), 부모를 죽였거나 때리고 욕한 죄, 남편을 죽인 죄, 노비가 상전을 죽인 죄, 독약이나 저주로 죽인 죄, 강도를 범한 죄 외에는 이유를 불문하고 모두 용서하라!”며 사면령을 내렸다. 왕실에 왕세손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단종(端宗)은 이와 같이 임금과 신하 그리고 온 백성의 축복 속에 태어났다.
하지만 다음 날 단종의 어머니인 세자 빈 권(權)씨가 산후병으로 갑자기 승하하여 경기도 안산에서 장지(葬地)를 조성하는 중에 “내룡(來龍)이 길로 10여 군데가 끊어진데다가 묘의 방향이 잘못되어 낳은 아이가 녹아버리고, 가족 모두가 절멸(絶滅)하고, 사내와 어른을 죽일 자리다.”는 노비 목효지(睦孝智)가 올린 상소문 한 장이 파문을 일으키지만 묘의 방향만을 바꾼 뒤 장사를 지냈다.
11년 후인 1452년에 문종(文宗)이 지병으로 승하하자 뒤를 이어 태어 난지 채 11년도 되지 않은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당시에 수렴청정 제도가 없었던 터라 어린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의지를 하게 되었고, 결국은 왕위를 넘보던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김종서(金宗瑞)는 제거 당하고, 단종은 1455년 윤6월 11일에 왕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세조 3년(1457) 6월 21일에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寧越) 청령포(淸令浦)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0월 24일에 관풍헌(觀風軒)에서 사약(賜藥)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그 누구도 장사를 지낼 엄두를 내지 못해 단종의 시신이 동강을 떠다니자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가 관(棺)을 준비하여 시신을 수습 영월 엄씨 선산인 동을지산(冬乙只山)에 장사(辛坐乙向)를 지냈다. 그 후 자신과 가족은 충북 괴산군 등에 숨어 살았다. 결국 목효지의 상소문 내용과 같은 결과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단종이 승하한지 241년 후인 숙종 24년(1698) 11월 6일에서야 시호(諡號)를 대왕(大王)으로, 묘호(廟號)를 단종으로, 능호(陵號)는 장릉(莊陵)으로 추상되었으며, 단종 비 송(宋)씨는 시호를 정순(貞順)으로 능호는 사릉(思陵)으로 추상되었다.
한편 단종과 헤어진 정순왕후 송씨는 남편의 유배지인 영월을 바라볼 수 있는 사대문 밖 동쪽에 기거하면서 흰옷과 채소 반찬으로 평생을 지내다가 중종 16년(1521) 6월 4일에 82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정순왕후는 후사를 해평부원군 정미수(鄭眉壽)에게 부탁을 하였는데 정미수는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정미수는 외숙모인 정순왕후를 경기도 남양주 진접읍 사능리에 있는 자신들의 선산에 안장(癸坐丁向)하고 제사를 지내왔다.
숙종 24년에 정순왕후의 무덤이 사릉으로 추상되자 능 가까이에 있던 정씨 일가의 무덤을 옮기는 일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대신들이 “정순왕후가 혈손이 아님에도 후사를 맡겼었고, 무덤 또한 그 선산에 의탁하였던 은의와 정리 또한 중요하니 그 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상언하자 숙종은 이를 받아들여 정씨 일가의 무덤을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 그래서 여느 능과는 달리 사릉의 주변에는 개인 무덤들이 있다.
사릉은 용이 가로로 달리다가 방향을 90도로 바꾸어 만든 횡룡입수(橫龍入首)이며, 횡룡입수의 증험인 귀성(鬼星)과 안산(案山)의 일직선상에 능침이 조성되어 있어 질서 정연하면서 좌우 균형이 이루어진 능이다. 마치 이 무덤의 주인이 자신의 중심성과 굳은 의지, 정의로움을 표현하고 있는 듯 하여 보기에 참 아름답다.
장릉은 어린용이 산속에서 기어 나오면서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듯, 자신의 위세를 자랑하지 않고 몸을 낮추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보호하려는 듯 겸손한 맛을 풍기는 자리로 단종 임금의 성정에 딱 맞는 것 같아 더없이 편안해 보인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출처] : 최낙기 풍수지리연구소 http://www.cnk-fs.com/6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