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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모신 증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하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사명, 곧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이루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제사는 죄에 대한 영 단번의 영원한 제사로 다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드릴 짐승의 희생 제사가 필요 없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불완전한 것을 완전케 하시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원한 길이 되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서 드리심으로 영구한 효력을 주는 것으로 완성하셨습니다(히 10:14).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예수님 자신의 구속사역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완성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받아들이는 그 자체로, 즉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 다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약속, 즉 소망가운데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어갑니다. 영구한 말씀과 성령을 통한 역사로 말미암아 구원의 씨앗이 움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일련의 과정과 순서가 있습니다(막 4:26-32).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과거나 현재 미래의 죄까지 다 없앴다고, 십자가로 죄의 값을 다 지불했다고 선포되었지만 그 선물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만 주어지고 또 실제적인 죄 씻음과 더불어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늘 예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에 의해서 주어졌고 또한 주어지고 있습니다. 현재에 예수님과 관계하여 살고 있다면 과거의 구원이 현재완료 상태로 유지된다고 볼 수 있지만 과거에 의롭다 함을 받아도 현재 예수님을 떠나 습관적인 죄악가운데 산다면, 예수님과 형식적인 관계만을 유지한 채 죄악을 행한다면 그는 구원에서 떠나 사망에 속한 자가 됩니다(겔 3:18-20, 요일 3:14). 그는 지금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고 회개치 않음으로 계속 진노를 쌓아가는 것입니다. 죄성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한 우리가 죄를 짓는바 실제적인 사죄의 은총은 주님 안에서 성령님의 깨우치심과 함께 삶의 변화를 수반하는 진실한 회개(믿음)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늘 깨어 근신하며 회개함으로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할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의 열심, 스스로의 노력, 스스로의 힘으로 지킬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하려고 하니까 말씀이 무거운 짐이 되고 수고가 되어서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하려는 것 자체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스스로 하나님께 떳떳하게 할 말 있는 자로 서려고 하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아 하나님의 지시대로 할 일을 한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 일한 것을 내세우므로 칭찬받으려는 생각은 아예 없습니다. 하나님이 성령님을 보내 주셨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했는데 무엇을 자랑하며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할 일을 했는데 우리에게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행함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구원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이 시키시지도 않는 일, 기도를 해도 형식에 지나지 않고 인간의 생각이나 계획에서 하는 일들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은 언제나 자기의 이름을 높이는 것으로 나가게 되고 누군가 알아주지 않으면 추진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에도 문자적으로 행하는 것이 있고 그 속뜻, 정신까지 이루는 행함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하나님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무거운 짐이 되지 않습니까? 성령님의 인도를 받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문자적인 것만을 준행하는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세밀한 성령의 법에 따라 그 정신을 이루게 됩니다. 성령님의 보증이 있고 성령님의 인도가 있기에 힘들다고 생각되지도 않고 기쁨으로 모든 일을 감당하게 되는 차이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문자적인 준행에서 머물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사람은 성령님으로 행하기에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준행하는 자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마음의 은밀한 것까지를 행합니다. 사람들이 사람의 눈앞에서는 행하는 척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데 서는 온갖 궤사를 행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시인하면서 다른 사람 앞에서는 딴 말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늘 하나님을 의식하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죄들을 순간순간 처리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미움, 불평, 원망, 분노 등을 말씀에 비추며 늘 회개하기에 그 중심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후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17-18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고 이어서 19-20절에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고 말씀을 무시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 외식자입니다.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받고자 사람 앞에서 행하는 사람이 외식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늘 자기의 들보를 보며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셨다면 적어도 문자적이나마 지키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 그 단계를 뛰어넘어서 그 말씀의 본뜻을 헤아리고 마음으로 지키려하게 됩니다. 늘 말씀에 다가가지 못하는 부족과 연약함을 절감하고 긍휼히 여겨달라고, 용서해 달라고 애통하며 자복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아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만 날마다 회개하고 변치 않는 주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에 의롭다 함,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극히 작은 죄라도 크게 생각하지 않고 방비하지 않으면 작은 구멍이 큰 방축을 무너뜨림같이, 한 군사의 부정한 행동이 만리장성을 소용없게 만드는 것 같이 됩니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작은 것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내 속에 있는 작은 죄들을 처리해 갈 때 교묘한 사단의 술수와 간계를 파하고 믿음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작은 것에서부터 유혹합니다. 처음부터 생명을 빼앗고자 하지 않습니다. 작은 유혹들, 내 기쁨과 즐거움을 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도록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말씀 중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어쩔 수 없이 범죄할 때는 하나님께 긍휼을 호소할 수밖에 없지만 노력도 하지 않고 고의로 죄를 짓는 사람이 하나님께 습관적으로 긍휼을 호소한다면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주시겠습니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이 습관적으로 긍휼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하나님은 듣지 않으시고 그같이 행동하는 자에게 화를 내리신다고 말라기 1장 9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열 가지 계명 중 한 가지라도 어기면 율법 전체를 다 어기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노출되기에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지키도록 성령을 주셨건만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해 버리면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며 성령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성령님은 하게 하시고 이루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붙드시고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일에 순종만한다면,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기만 한다면 구원은 완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은혜에 의한 변화를 기대하지도 않고 스스로 한계를 그어버린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잘 못 믿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소망을 가지게 하십니다. 변화에 대한 소망, 죄에 대한 구원의 소망을 결코 버리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 따라 말씀대로 지극히 작은 것 하나까지 지키며 살려는 사람의 노력을 격려하고 사모할지언정,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사람의 노력을 무시하고 훼방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성령님을 훼방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는 드러나는 죄를 짓고서 긍휼을 받기를 바라면서 다른 사람의 숨은 선한 노력에 대해서 긍휼을 베풀기 보다는 비판하고 정죄한다면 얼마나 모순이 되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긍휼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할 수 없다고 성경의 말씀을 끌어내려서는 안 됩니다. 내가 못한다고 하나님도 못할 분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의롭지 못하다고 하나님도 의롭지 못한 분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모신 내가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을 포기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자신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거룩한 삶을 결코 포기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일관된 중심으로 인내하며 낙심하지 말고 거룩한 삶에 날마다 도전할 것을 격려하고 권면합니다. 인내하며 선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한 행실을 더럽히는 어떠한 교훈에도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새 계명)을 멸시하는 자들의 교훈에 속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님의 교훈을 따르지 않고 순종치 않는 본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말씀에 대한 순종과 적용을 강조하지 않는 교훈은 거짓된 가르침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변적인 가르침, 궤변에 지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지식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지식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말씀이라도 순종함으로 양식을 삼아야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가르치는 자가 자기 지식을 드러내는 것은 교만에서 나오는 것으로 영혼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기 보다는 악한 것, 지식적인 교만과 함께 삶과 동떨어진 외식을 주입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기도와 함께 말씀 순종에서 생겨나는 영적으로 구별되는 삶을 강조하고 가르칠 때 성령님이 역사하사 영혼들을 온전하게 세우게 됩니다.
말씀 순종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생명이신 예수님과 연결되고 그가 주시는 은혜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 순종은 자기의 생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마음을 관리하고 입술을 관리하는 것은 곧 자기 생명을 간직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 말씀이 생명임과 동시에 말씀 순종은 생명을 공급받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순종이 끊어지면 생명도 고갈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을 공급받아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말씀 순종하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이 도와주십니다. 성령님은 말씀 순종으로 이끄십니다. 말씀을 무효화하고 폐기하는 자는 은혜에서 떨어진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말씀으로 인도하고 말씀을 통해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다시금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지만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습니다.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5:19-20)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구원사역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이루셨고 그 은혜와 축복을 믿는 자들이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죄인들에 대한 구원을 무한정 예비하셨고 선포하셨지만 어디까지나 그 축복의 대상은 믿는 자들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축복이 임합니다. 뿐만 아니라 믿는다고 할 때도 마음과 입술만의 고백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하는 것 같지만 성경 전체를 볼 때 문자에 국한되지 않고 그 말씀의 이면에 담겨있는 심오한 의미를 우리는 전체를 통해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한 입술과 마음으로의 고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말씀에 순종하는 진실한 삶과 연결된 것임을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죽어가는 한편 행악자의 경우, 십자가상에서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그의 마음의 변화와 죽어가면서도 비방하는 다른 행악자에게서 주님을 옹호하고 주님께 자신의 미래를 의탁한 고백은 단순한 말만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현실의 삶)속에서 이루어진 진실한 신앙고백이었기에 주님이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비방하는 다른 행악자를 향하여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욕하는 것을 책망하며 우리는 행한 일에 보응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예수님은 죄없이 십자가에 달렸다고 하면서 자신을 의탁한 것은 진실로 예수님을 천국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내세 소망을 가졌으며 그를 의지한 증거가 됩니다(눅 23:39-43).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예수님을 욕했었습니다(마 27:44).
성경은 진정한 회개에 기초한 믿음을 항상 강조합니다. 진실한 고백은 진실한 회개를 낳습니다.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심령, 상한 마음을 멸시치 않고 기쁘게 받으십니다. 마음과 입술로 시인하는 고백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된 것이어야 합니다. 성령님으로 회개하고 거듭난 자만이 진실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성령의 인도를 따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입술과 마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말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을 포기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모신다는 일은 자신을 부인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늘 죄에 속한 자신을 부인해야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실 수 있고 그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그의 통치를 받는 실제적인 증거는 그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입니다. 주님을 모셨다는 증거는 바로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우리가 지킬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완성은 이웃사랑입니다(롬 13:10). 이웃사랑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말씀을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며 그 말씀에 순종하여 늘 죄를 회개하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보면서 애통하고 탄식할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영혼을 섬기고 사랑하는 진정한 방법은 기도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성령님만이 영혼들을 죄에서 자유케 하고 천국으로 데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인 신앙고백이나 인간적인 방법이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하여 온전케 하는 일은 성령에 속한 일입니다.
단순히 영접기도를 하게하고 새신자 프로그램을 이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것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요 영생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 구원이요 영생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강조하지 않는 믿음은 헛된 것이고 예수님을 강조하지 않는 구원의 확신은 자기도취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일에 집중하고 강조할 때 자연히 강조되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자기부인을 통해서만 내 안에 주님을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자 자기를 부인하는 자만이 성령님의 간섭 안에서 진정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요 그것이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일시적이고 단회성에 머무는 구원의 확신을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행함과 분리된 믿음에서의 구원을 말하는 것 자체가 성경적인 온전한 구원을 배제시키는 것입니다. 구원의 실체인 예수님을 무시한 채 추상적인 구원을 붙들고 살게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구원을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자체가 구원인데, 예수님을 강조하지 않고 구원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지식적이요 인간이 지어낸 교리요 가르침입니다. 그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범한 우를 같이 범하는 것입니다.
한 쪽의 진리를 강조하고자 다른 진리를 배제해 버리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이것도 가르치고 저것도 가르치되 통합하여 한 가지로 가르쳐야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성경은 이것도 말하고 저것도 말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것이요 하나인 것입니다. 믿음의 초보가 있다면 장성한 믿음의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초기와 믿음의 장성함은 결국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따로 분리해서는 안 되고 신앙상태에 따라 강조의 유연성을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믿음의 초보자를 언제나 초보자로 둘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말씀 그대로를 가르치면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성령의 역사함을 믿는다면 성경이 말하는 자체를 가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옛것도 새 것도 가르치면 되는 것입니다. 도의 초보만 가르치면 초보에 머물게 되겠지만 장성한 믿음을 가르치면 결국 그 목표로 나아가게 됩니다. 히브리서는 나아가는 신앙을 강조합니다. 뒤로 물러서는 자는 자가 아니라 의인은 믿음으로 인내하며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만 모시고 그 다음부터는 여전히 자기 삶의 주인은 자기가 되어서는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구원과 성숙을 따로 분리하여 말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신행분리가 생겨납니다. 구원은 성숙을 포함합니다. 구원은 성화를 포함합니다. 구원은 영화를 포함합니다. 구원이라는 큰 틀 안에 그 모든 요소와 과정이 필수적인 것으로 자리 잡습니다. 좁은 문은 좁은 길을 포함한 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구원사역(전도, 말씀사역)에 있어 인간이 주장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성령의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성경의 한 부분만을 떼어서 인간적인 쉬운 구원을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형식적인 순서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게 되면 사람들이 믿음을 가졌다면서 오히려 더 타락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원을 확보해 놓았기 때문에 염려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과 행위로 죄를 쌓아가면서도 회개를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믿고 난 다음에는 죄를 짓더라도 구원에 영향을 못 미친다는 잘못된 가르침은 성경이 중요하고도 급박하게 다루는 회개를 등한시하게 만들었습니다. 구원에 윤리적인 삶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원죄에서 생겨나는 자범죄를 회개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순종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되고 맙니다. 그런 순종과 그런 회개라는 것은 형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형식적인 관계는 깨어진 관계입니다. 성경은 형식적인 관계, 외식에 대해서는 지옥에 갈 죄로 규정합니다. 실제적인 관계를 그처럼 강조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회개는 처음 믿을 때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회개를 외치고 있습니다. 구원받았노라고 하면서 죄 가운데 거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회개할 것과 동시에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와 상관하여 언제나 생명 얻는 회개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죄의 본성이 남아 있고 죄를 범하기에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강조는 결코 지나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윤리적인 삶과 분리하지 않습니다.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요 죽은 것이기 때문에 영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믿지 않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 술객들, 우상 숭배자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둘째 사망에 참예한다고 했습니다(계 21:8). 예수님은 아름다운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7:21-23). 또 날마다 주님을 통해 발 씻지 않으면 주님과 상관이 없는 자가 되고, 회개치 않으면 망하리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서는 자기 영혼이 진리의 지식을 가질 수도, 진정한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죄에서 그 백성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한 번만 아니라 날마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시 68:19)고 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거룩한 백성, 정결한 신부로 단장시키고 계십니다. 구원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의 일이요 순간순간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죄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원함을 받으려면 늘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믿음의 길로 달려가야 합니다. ‘주기도문’에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회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함과 함께 회개를 통해 주어지는 사죄의 은총을 간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설사 죄를 짓더라도 주님의 가르침 자체를 나의 상황에 맞게 고치려는 것은 너무나 잘못된 것입니다. 두려워 떨면서 주님께로 피하는 자가 은혜를 구하는 자인데 그것마저 포기한다면 하나님이 베풀 은혜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주님을 붙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된다고 내 선에서 포기한 채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내 수준으로 끌어 내리는 것은 진리의 복음에서 이탈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잘못되고 부정한 인간 교리와 가르침 때문에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인자하심을 역이용하여 죄를 범하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을 따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에 임할 진노를 쌓고 있는 것을 볼 때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롬 2:4-5).
주님이 택한 백성,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는 어느 기간 타락했다고 해도 징계하시고 회개시키셔서 끝까지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속했습니다. 인간이 계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택한 자라도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워버리실 수 있습니다. 구원하고 유기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속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에 죄를 범하고 회개의 기회를 주었는데도 회개치 않고 죄를 쌓아간 자들에게는 영원한 형벌로 다스렸다는 사실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6) 단순한 징계가 아니라 멸망에 이른 사람들을 구약에서와 신약에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거듭났고 신령한 은혜를 맛본 자들도 버림받은 사실을 히브리서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친 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부자관계는 세상 법에 매여서 사사로이 어떻게 못하기에 법적인 관계가 유지되면 아버지의 사망 후 재산을 상속받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모든 법에 초월하여 존재하시고 법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법도 지키지 않으면 감옥에 가두거나 심한 경우는 사형으로 다스리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법을 어긴 자에게 징계도 하지만 심할 경우 영벌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총회에서 제해 버리신다 그 말입니다. 민수기 16장 33절에 모세를 대적하며 백성을 선동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에게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만 생각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교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가 그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성경의 전체를 보고 전체에서 구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구원을 즉각적인 것으로 말하지만 또한 미래적인 것으로도 말씀합니다. 일시적인 믿음의 차원에서만 말하지 않습니다. 단 한 번의 믿음, 내 한 번의 믿음이 일평생을 구원할 만큼의 효력을 지닌 것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단 한번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이루신 구원의 완전성과 영원한 효력을 우리가 이루어가야 할 구원과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약속과 실제사이에서 하나님은 날마다 은혜를 간직하며 믿음으로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의 족한 은혜 가운데서 날마다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을 간직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만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라 되리라”(히 4:14)
성경은 하루하루 믿음을 간구하며 인내하는 믿음의 사람이 그 영혼을 구원할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여 말합니다. 생명의 길은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들어가려는 사람은 많고 힘쓰고 애쓰는 사람도 많지만 다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눅 13:24). 오직 하나님이 함께하고 은혜 베푸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데 그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을 가진 자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진실로 주님을 모시고 죄를 회개하며 사는 자인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실제적인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중요하고 이것이 늘 강조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실행하려고 자신을 부인하고 말씀의 고난을 담당하는 자가 예수님을 모신자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순종하여 살려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살려고 하는데 왜 성령을 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왜 성령님께서 도와주시지 않겠어요? 막연히 성령을 간구하지 마시고 말씀대로 하루하루 행하며 살도록 성령을 간구하십시오. 죄를 회개하도록 성령을 간구하십시오. 이미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십시오. 말씀 순종으로 이끄시는 진리의 성령님을 모시십시오. 이미 역사적으로 오순절에 임한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성령님을 모시고 사십시오. 성령님의 작은 인도라도 거절치 않고 순종하다보면 어느새 성령님이 우리 삶을 주장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구원과 관련된 구절은 앞세우고 강조하면서도 요한일서에서 강조하는 구원과 관련된 구절들은 강조하지 않고 그 구원의 논의에서 배제시키는 것 자체가 불완전한 가르침입니다. 한 예를 들어봅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3장 14-1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하고 다른 가르침을 배제시키고 자기 생각대로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일시적인 위로와 평강을 얻고자, 사람들에게 쉬운 구원을 스스로 주고자 임의로 성경의 진리를 왜곡되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성령님을 훼방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단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그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적인 삶에 관련될 때에는 간단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 곧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은 좁은 문, 좁은 길인 것입니다. 온전히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요 영생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자나 깨나, 살아도 죽어도,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을 의식하고 예수 안에 거하며 성령님의 인도를 좇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1절과 12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