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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너무 흔해빠진 게 귤이지만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귀하디 귀한게 귤이었다.
최상류층이 아니면 맛 볼 수도 없는, 시장에서 유통되지도 않고 오직 국가의 하사품으로 임금의 은전을 받아야만
맛 볼 수 있었던 그런 것이었다.
그런 상류층의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했던 제주사람들의 고충은 어떠했을까.
濟州太守崔安以洞庭橘見寄 以許詞之
-제주 태수(濟州太守) 최안(崔安)이 동정귤(洞庭橘)을 보내왔기에 시로 사례하다.
除却耽羅見尙難 탐라가 아니면 보기조차 어려운 것
遠來何況水程艱 더구나 먼 바닷길로 어렵게 보내왔으니
貴人門閥猶稀得 귀인의 집에서도 얻기 어려운 것
最感年年及老殘 해마다 늙은 사람 생각해 줌이 고맙네.
圓於金彈粲堪珍 황금탄알보다 둥글고 찬란한 보매는
猶似霜林始摘新 서리 내린 숲에서 새로 따낸 듯
呼作洞庭尤可喜 동정귤이라 부름이 더욱 기꺼운 것은
飮筵宜伴洞庭春 술자리엔 동정호의 봄빛과 같이 있기 때문일세.
<이규보의 東國李相國集 5권 >
고려 무신집권기의 재상이자 명문장가인 이규보(1168-1241)는 당시 제주부사 崔滋(최자)가 보내온 동정귤에
고마워 하며 시로 사례를 하고 있다. 당시 귤은 귀인의 집에서도 얻기 어려운 아주 귀중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실력자인 이규보에게 이 귤선물이 효과가 있었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곧이어 최자는 서울로 돌아가게 된다
▲ 진귤이라는 재래종 귤(애월읍 상가리)
黃柑製
조선시대의 과거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식년시(소과,문과, 대과)가 실시되었지만, 그외로 증광시, 별시, 알성시, 절일제, 황감제 등 부정기시들이 많았다.
그 중에 황감제는 제주도에서 감귤(황감)이 진상된 것을 기념하여 치르는 과거다.
明宗19년(1564년)에 처음 시행된 것으로 매년 제주도의 특산물인 감귤이 진상되어 오면 먼저 종묘에 올리고 나서
신하들, 성균관과 4학의 유생들에게 나누어 준뒤 시제(詩題)를 내려 시험을 보게 했다.
숙종26년(1700)에는
"유생에게 급제를 주는 길이 너무 넓으니, 다시 변통하여 요행을 바라는 일을 막아야겠다. 오늘부터 제도를
정하여 황감제이외에는 급제를 주지 말 것이며...." 『숙종실록 권 34, 숙종 26년 3월 병신조』 라고 하여
당시 많은 과거시험으로 급제자가 많아지자 황감제를 제외한 과거 시험을 줄일 것을 명하고 있다.
황감제를 다른 과거시험보다 중히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즉위년(1776) 11월 24일 반궁(泮宮:성균관)에서 감귤을 나누어주고 황감제를 실시하면서 승지에게 "황감을 나누어줄 때 다투어 뺏어가는 난잡한 일이 있으면 유생을 정거(停擧)하고, 만약 단속하지 않으면 대사성도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교할 정도로 황감 쟁탈전이 치열했다.
제주도에서 감귤이 올라오는 날은 한판 축제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관리등 상류계층에는
감귤을 하사하여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 공물을 가지고 온 사람들에도 옷과 먹을 것을 주어 위로하였다.
이렇듯 귤은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굉장히 귀한 과일로 여겨져 왔다.
이는 재배의 기후적 조건의 한계로 인하여 수요에 비해 공급이 이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감귤재배의 확대 및 증산을 위해 제주도 외 지역으로의 이식을 시도 하였지만.
여전히 귤의 최대 진상지는 제주도였다.
▲ 애월읍 상가리 수령 350년된 귤나무. 아마 가장오래된 귤나무일 듯 14대를 내려왔다
그럼 언제부터 제주도에 귤이 재배되었을까?
문헌 기록상으로는 제주도가 아직 탐라국인 시절, 고려 문종 6년(1052) 3월 임신조에 '탐라국이 해마다
바치는 귤의 양을 고쳐 100포로 정하고 앞으로 정해진 제도로 삼는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이미 이
이전부터 귤을 재배하여 상공(常貢)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탐라국이 고려에 복속이 된 후에는 별공과 진상의 형태로 18세기 이후까지도 귤을 중앙에 바쳐야 했다.
진상은 지방관들이 각 지방의 토산품을 예물로 임금에게 바치는 독특한 제도로서 이념적으로는 조세적인
성격이 매우 약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진상은 조선중기이후(광해군 원년 1608)에 대동법으로 공납제가
크게 개편되는 과정에서도 본질적인 변화가 거의 없이 여전히 현물납을 기본으로 하였다.
이런 진헌을 위하여 국초부터 관영과원제를 실시하였다. 세종 8년(1426년) 2월에 '각 관은 과수원을 설치하여
알맞은 시기에 나무를 심어 관용에 대비하고 민간의 과실이나 대나무에 값을 주지 않고 공연히 가져다
쓰지 말라. 위반자는 장물죄로 다스린다'고 하였다.
국초부터 운영하던 과원을 본격적으로 조성한 것은 중종 21년 (1526)에 제주목사 이수동이 5군데
방호소(서귀, 별방,수산, 동해, 명월)에 과원을 설치하면서 이루어졌다. 방호소가 외적을 방어하기
설치한 방어시설인 고로 과원도 군사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였다. 과원을 지키는 과원직은 제주
'6苦役'중의 하나로서 매우 힘든 일이었다.
'6苦役' 이라함은 미역을 따던 잠녀(潛女), 전복을 잡던 포작(鮑作), 말을 기르던 목자(牧子),
귤을 재배하던 과원(果員), 진상품을 운반하던 뱃사람 곁군(格軍), 그리고 관청의 땅을 경작해주던
답한(畓漢)을 말한다. 모두 중앙에 진상을 위하여 종사하던 사람들이었으니, 제주사람들이 진상을 위하여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지 알 수 있다.
과원직은 민호에서 징발된 定役으로서 과원 관리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항상 규정된 상납량 이상으로
감귤을 징수 당하고 가산을 탕진하기에 이른다. 이에 죽을 각오를 하고 섬 밖으로 도망하는 이도 부지기수 였다.
그럼 책임은 남은 과직에게 돌아갔고, 피역의 악순환이 되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후에
관영과원의 쇠퇴와 함께 私과원에 대한 수탈로 이어지는 한 원인이 되었다.
▲ 관아의 망경루, 연희각 감귤봉진 준비가 이루어진 장소
柑橘封進(감귤봉진)
이형상 목사가 제주에 재임당시(1702) 제주도를 순력하면서 그 내용을 화공 김남길에게 그리게 한 기록화첩인
탐라순력도의 한 장면이다. 망경루 앞뜰에서 진상할 귤을 선별, 검사, 포장하는 과정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수집되어 온 귤을 선별하고, 이 선별한 귤은 목사의 입회하에 검사를 거친 다음 나무상자에 봉하고 있다.
또한 감귤을 봉진하는 과정에서 짓눌려서 훼손되거나 썩어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짚단을 이용하여 싸고
나무통에 다른 물건과 함께 넣도록 했다. 감귤은 종묘제향의 薦新(천신)과 빈객접대용으로서 그 쓰임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이원진(1651-1653 제주목사재임)의 '탐라지'에 따르면 귤의 진상은 9월부터 시작해 다음해 2월까지 10일 간격으로
1운(運)에서 20운(運)까지 있었다고 한다. 1601년 제주도 안어무사로 왔던 김상헌의 '남사록'에 의하면 감귤봉진은 한해에
24運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회 봉진양은 탐라순력도에 의하면,
당금귤 687개, 감자 25,843개, 금귤 900개, 유감 2,644개, 동정귤 2,804개, 산귤 828개, 청귤 876개,
유자 1,460개, 당유자 4,010개, 치자 112근, 지피 48근, 청피 30근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실로 많은 양이 아닐 수 없었다.
▲ 망경루의 후원인 귤림당
橘林風樂 (귤림풍악)
제주읍성내에는 동, 서,남,북,중, 별과원의 7개의 과원이 있었다. 그중에서 관아와 가까운 곳의 북과원이
가장 풍치가 빼어난 과원중 하나였다. 이곳에서 목사일행은 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귤림의 풍치를 감상하면서 즐기고 있다.
과원이 어느 누구에게는 가장 힘든 노동의 장소이었던 반면 어떤 이에게는 감상하며 즐기는 곳이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제주인들의 비참했던 삶을 더 부각하는 듯 하다
▲ 관아에 재현된 북과원
▲귤림당과 북과원
▲ 서귀포시 농업기술센터내에 있는 금물과원자리
과원은 중앙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16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9세기에는 54개소에 이르게 된다.
羔園訪古(고원방고)
1702년(숙종 28년) 11월 6일, 서귀진을 떠나 이형상 목사는 정의현감 박상하, 대정현감 최동제와
함께 고둔과원(羔屯果園)에 도착, 샛노란 귤을 보며 술과 노래를 즐겼다.
대정현성에서 동쪽으로 55리에 위치한 고둔과원은 현재 서귀포시 용흥동 속칭 염돈마을 운랑천
부근의 염돈과원을 가리킨다. 과원의 방풍림으로 대나무가 심어져 있고, 과원 밖에는 참나무와
매화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목사는 '풍치로 이를 말하면 가을 겨울에 낙엽할 때 홀로 과원은 봄철 녹음으로 단장해
하늘을 가리우고 누런 열매는 햇빛에 비치니 나무마다 영롱하고 잎마다 찬란하다'고 적었다.
순력후에 목사는 이과원을 평가하기를 '제주의 북원, 정의의 성산과 함께 제주의 과원 중
가장 뛰어나다'라고 했다.
청음 김상헌도 '남사록'에서 '洞庭(동정)에는 귤이 있되 매화는 없고, 서호(西湖)에는 매화는
있으되 귤은 없는데 이곳은 동정과 서호가 함께 눈 앞에 펼쳐져 있다'고 하여 그 풍치를 찬양했다.
▲애월읍 상가리의 수령 350년된 귤나무
국초의 관영과원제의 취지와는 달리 현실은 제주인들에 너무 가혹했다.
관영과원의 운영은 개인과원(私果園)의 그것 보다 몇배 공이 들지만 결과물은 이에 훨씬 못미쳤다.
이로 인하여 진상물량을 채우지 못하여 민호에 부과하여 공물을 채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관에서는 민간에 희귀한 감귤나무를 심도록 장려하기 위하여 이를 심는 자에게
역을 면해주거나(復戶), 면포 30필을 상으로 내리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만약 태만하여 귤나무가 죽거나 손상되면 상포를 반납하거나 본래의 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려의 이면에는 가혹한 수탈이 숨어 있었다.
귤나무를 심은 집에는 나무의 수를 세어 장부에 올리고 겨우 열매를 맺으면 열매의 수를 세어 표지하였다가
수확기에 숫자가 다르면 주인을 절용죄로 논하였다. 까마귀나 참새들로 인해 과일이 손상되거나
떨어지게 되어도 모두 나무주인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렇기 때문에 감귤나무를 키우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었고, 그래서 민가에서는 관가의 징수 독촉을 피하기 위하여 몰래 감귤나무의 뿌리를
태워버리도 하였다. 그리고 공적인 진상에 더하여 목사가 사사로이 서울의 유력자에게 공여하는 것이
있어서 이 또한 제주인들의 몫이 되었다.
감귤생산이 풍작이 되고 품질이 좋아도 수송이 문제였다.
바람의 때를 기다려야 했으며, 때를 만나지 못하면 썩어서 문책을 받기도 하였으며, 감귤진상을 위하여
출항하였다가 표류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아들을 낳으면 '물고기밥이 될 자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 일은 제주사람들에게 큰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이래저래 제주사람들에게 있어서 제주사람들에게 감귤나무는 고통을 주는 나무였던 것이다.
이에 제주사람들은 감귤재배를 더욱더 기피하게 되고 재배수가 감소하게 되고,고종 31년(1894년)
진상제도가 없어진 이후는 과수원이 황폐화 되어갔다.
▲ 광령귤나무, 수령 250년, 제주기념물 제26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나무'였던 귤나무가 현재 살아 남아 있는 100년이상된 재래귤 나무가
180여 그루정도가 있다. 제주사람들의 고통을 함께해온 세월의 연륜을 느끼게 해준다.
주인에 의해 뿌리가 타버렸을 지도 모르는 위기를 넘기고, 4.3사건의 화마도 다 견뎌낸 귤나무들이다.
▲ 광령귤나무, 수령 250년, 제주기념물 제26호
▲ 광령귤나무, 수령 250년, 제주기념물 제26호
유실수가 오래 살아남기란 쉽지 않은데 아직도 열매를 맺는다.
▲ 광령귤나무, 수령 250년, 제주기념물 제26호
▲ 광령귤나무, 수령 250년, 제주기념물 제26호
▲ 제주시 도련동 귤나무, 제주도기념물 제20호, 수령 250년정도
병귤이라는 품종인데, 세계적으로 제주가 원산으로 기록되고 있다.
▲ 제주시 도련동 귤나무, 제주도기념물 제20호, 수령 250년정도
▲ 제주시 도련동 귤나무, 이나무는 고사하고 말았다.
▲ 제주시 도련동 귤나무, 제주도기념물 제20호, 수령 250년정도
병귤이라는 품종인데, 세계적으로 제주가 원산으로 기록되고 있다.
▲ 상가리의 귤나무, 수령 350년 정도. 아마 제일 오랜된 귤나무일 듯.
제주5현 중 한 명인 중종 15년(1520)에 유배된 충암 김정의 '제주풍토록'에 의하면
귤나무가 무더기로 자라기를 좋아하며 줄기와 가지가 많아 용처럼 얽혀서 꿈틀거리고 울퉁불퉁해 아주 진기한 광경이라고 적고 있다.
▲ 상가리 귤나무, 수령 350년.
재래귤은 향기는 더 진하고, 맛도 톡쏘는 듯하다. 크기는 작은데 씨가 많아서 오늘날 귤에 익숙한 사람은 먹기가 힘들다.
주로 현재는 청귤일때 말려서 약재로 쓰거나 껍질을 약재로 쓴다.
▲ 상가리 귤나무, 수령 350년.
▲ 상가리 귤나무, 수령 350년.
▲ 상가리 귤나무, 수령 350년.
귤의 비교.. 큰 것 부터 붕깡이라는 어린아이 머리통 만큼 한 귤, 하귤로 7,8월에 먹는 귤, 오늘날 귤, 진귤이라는 재래종 귤..
붕깡... 크기가 정말 어린아이 크기만하다. 예전에 과수원 한 구석에 있었는데,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희귀종이 되었다.
맛은 자몽맛이랑 비슷하다고나 할까.
▲ 하가리, 하귤나무
▲ 하가리, 진귤나무, 보호수
▲ 하가리, 진귤나무, 보호수
▲ 하가리, 진귤나무, 보호수
橘林秋色
黃橘家家自作林 누런 귤 집집마다 절로 숲 이룬
楊州秋色洞庭深 양주 땅에 가을 빛 깊어지는데
千頭掛月層層玉 달빛 걸린 가지마다 층층 옥덩이
萬顆含霜箇箇金 서리 내린 알알이는 낱낱 황금알
畵裏仙人乘鶴意 학을 탄 그림 속의 신선이 되고
酒中遊客聽鶯心 꾀꼬리 소리 만난 나그네 되니
世間欲致掛侯富 세상사람 제후의 부귀 이루려
底事朱門桃李尋 어찌하여 권세가만 찾아 헤매나
-제주출신 문인인 매계 이한우의 '영주십경'중에서
▲ 하가리, 진귤나무, 보호수
▲ 하가리, 진귤나무, 보호수
제주의 감귤재배의 역사는 오직 진상만을 위한 것이어서 결국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단절의 역사를 맞는다. 그럼 현재 많은 귤의 재배는 언제부터 이루어지게 된 것일까.
1902년 프랑스인 엄택기(嚴宅基 Taguet 1873-1952) 신부가 현재 서귀포시 서홍동 소재 '면형의 집'에서
선교사업을 착수하였다 .엄신부는 원래 식물학자였으므로 제주도의 식물을 연구하여 벚나무가 제주도 원산임을
밝혀내었는데,1911년에 이 왕벚나무을 일본에 보내고 그 답례로 미장온주 14그루를 받았다.
이 곳에 심어서 재배하였는데 이가 현재 널리 재배되고 있는 온주 밀감의 효시가 되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탐스런 열매를 맺고 있다.
나무의 굵기로 100년이라는 세월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첫댓글 와아! 잘 봤습니다.^^ 처음에는 과일 하나에 뭐 이리 무게를 싣는가? 했는데 그것이 제주인의 오랜 아픔임을 알았습니다.^^
뿡깡도 재미있었고 , 매화와 귤이 같이 있다는 은근한 자부심도 멋있습니다.^^ 오래된 나무에서 제주인의 끈질긴 생명력 같은 걸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제주의 역사에까지 관심을 두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레아님 블로그의 자료를 이렇게 챙겨주니 고맙기 그지 없네요.
찾아 줬으면 감지덕지 하렵니다.^^*
엊그제 제주 밀감 탐방길에
함께 거들지 못하여
뒤늦게 미안함을 금치 못하겠군요.
자료가 너무 멋지니 그대로 둘 수 없어
제주향토사방으로 자리를 옮기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