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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
12.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함
7)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함
[롬9:11~13]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
[롬9:19~21]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냐“
[롬9:30~33]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1. 하나님의 선택
9장부터 11장까지는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항목이다. 여기까지오기 전에 로마서를 시작할 때 구제불능의 죄인인 인간, 이 사람은 우리가 볼 때 다 멀쩡한 사람들이다.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하나님에게는 쓸모가 없으니까 그것이 구제불능이라는 말이다. 그런 사람을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 자체가 아주 큰 문제다. 의로운 사람을 의롭다고 하는 것은 옳은 일이고 좋은 일이고 쉬운 일이지만 불의한 자를 의롭다고 하려면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법(法)이다. 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죄인을 의롭다고 할 수 있느냐 하는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대단히 어렵고도 쉬운 문제이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고 남이 생각해도 그런 문제가 굉장히 많이 있다. 내가 보기에도 분명히 불의하고 악한데 그 사람은 왜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가. 이런 것은 수용이 안 된다. 저 사람은 정말 의롭다함을 받을만해 하는 이런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당연히 박수를 치게 되어있지만 의롭다함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닌데도 의롭다고 한다는 것은 이치에 안 맞는 것이다. 지식이라는 것은 이치다. 논리에 안 맞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는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는 불의한 자를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러니까 이것이 바로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다. 어디에도 이런 가르침은 없다.
만약 이렇게 되려면 법을 폐지해야 가능하게 된다. 법이 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교통법규를 위반한 사람을 범법자로 만들지 않으려면 교통법규를 없애야 한다. 교통법규는 꼭 필요한 것인데 그것을 없애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교통법규를 없애버리게 되었을 때 모든 사람이 교통법규를 위반하면 엉망이 되고 말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니 이 법의 문제가 심각하다.
이 법을 폐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을 죽음에 넘겨주었다는 이것이 로마서에서 처음 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왜 죽었는가 하면 정해진 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죽었다. 왜 법을 위반했는가? 자기가 악을 행하려고 위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니까 법을 위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다보니까 안식일을 위반하게 되었다. 그런데 법을 주장하는 유태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네가 법을 위반해서 되냐? 이것은 참람한 짓이다.”했다.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법률이 있다. 그렇게 엄한 법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고, 또 범하지 않으려고 한 사람들도 많이 죽었다. 왜냐하면 강대국에서 침략해 들어오면 옛날에는 황제를 숭배해야 하는데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그것이 안 된다. 내가 속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겉으로 안식일날 안 나오면 표가 나게 된다. 그래서 그 황제에게 숭배를 하냐 안하냐 하는 시험으로 안식일날 일을 시켜본다. 그러면 안식일날 어떤 사람은 ‘나는 그래도 일을 안 하겠다.’하면 죽이는 것이었다. 일제때도 그와 비슷한 문제로 신사참배가 있었다.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니까 그것을 트집 잡아서 박해를 가한 예가 있었다. 그래서 끝까지 신사참배 거부를 한 사람들이 지금 우리나라의 고신측교단을 만들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들이 주동이 되어서 만든 교단이다. 그러니까 어느 나라에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법이 있으면 지켜야 된다는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법을 위반했다. 그래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안식일을 ‘이것은 내 안식일이니까 너희는 범하면 안 된다.’했는데 자기 아들이 죽었다. 그러니까 아버지 마음으로는 그 법을 폐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라고 해서 무조건 폐지할 수 없어서 아들을 내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유를 들었다. 아주 못된 남편이 있는데 나는 그 남편을 떠나면 쫓아와서 잡아가니까 떠날 수도 없고 내가 남편을 죽일 수도 없으니까 결국은 내가 죽는 것밖에는 해방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런 예를 들었었다. 결국 내가 죽음으로써 법에서 벗어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죽음을 통해서 법에서 벗어나면 법이 없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에 대해서 새 생명의 법을 주었다는 것이다. 새 생명의 법으로 과거의 율법을 대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 생명 안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 생명의 영의 법을 주었다는 말을 했다. 그러니까 사람이 무슨 법을 지켜도 지켜야 한다. 율법을 지키든지 아니면 생명의 영의 법을 지키든지 지켜야 된다. 안 지키고 자기 마음대로 해버리면 그 사람은 불법자가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법은 지키는데 법의 종류가 달라졌다.
하나는 생명의 영의 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율법이고 이렇게 달라졌다. 이 율법을 폐하고 새 생명의 법을 주기 위해서 죽고 다시 사는 것이 필요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았다. 율법 안에서는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인정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거기서 살아난 사람이 새 생명이다. 이 새 생명 안에서 살아난 사람은 그 생명의 법으로 살아야 한다. 그 생명의 법으로 옛 법을 대체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법안에는 정죄함이 없다고 로마서 8장에는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죄와 사말의 법에서 해방하였음이라”했다. 이것은 다른 법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는 말이다. 다른 법이 내 안에 있으면 그 법으로 인해서 외부에서 가해지는 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내 생명 안에서 법을 지키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살아낼 수 있으면 율법의 조항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마음을 살아내지 못하면 율법의 조항을 지키더라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있다는 말이다. 결국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이다.
구약시대에 율법이 실패했다는 것은 겉으로 있는 표면적인 법을 안 지켰다는 말이 아니고 그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지켜도 만족이 안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관이 부하에게 명령을 했다. 그러면 지키는데 돌아가면서 속으로 욕하면서 지킨다. 분명히 지키기는 지키는데 상관의 마음에는 흡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저 놈이 나한테 욕을 하면서 지키는구나 하는 것을 다 안다. 그러니까 상관은 부하에게 또 시키고 또 시키고 또 시키는 것이다. 더 힘든 것을 시키고 더 힘든 것을 시키고 그 놈이 굴복할 때까지 시킨다. 꼭 같은 이치다. 그러니까 그렇게 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 내율이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사람이 되면 밖에 법을 안 줘도 된다는 말이다.
요즘 소위 주인의식(主人意識)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주인의식이 있는 직원이라면 사장이 뭐라고 명령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다. 그런데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따라다니면서 말을 해도 안 된다. 그래서 생명의 영의 법은 주인의식을 갖는 법이다. 왜냐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를 내가 시인하면 나는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은 내 안에 있게 된다. 내가 그분을 시인하니까 ‘아~ 저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했구나! 저것이 진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구나!’라고 내가 시인하게 되면 내 안에도 그 마음이 들어온다. 그래서 생명의 영의 법으로 대치했다. 그러니까 정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 앞에는 실수를 하더라도 정죄가 없다. 왜냐하면 그 돌아서서 욕하면서 지키는 사람은 실수를 전혀 안하더라도 항상 불만이지만 주인의 마음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은 혹시 실수를 하더라도 주인이 눈감아주고 봐준다. 왜냐하면 자기 주인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 사람은 하다가도 잘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주인도 잘 알고 있다. 사장이라고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까 아~ 저 사람이 하다가 어쩌다 잘못해서 저렇게 되었구나 아니면 일부러 저러는구나 하는 것을 주인은 다 안다. 하나님이 모르시겠냐는 것이다. 주인이 되면 누구든지 다 안다. 주인이 되면 알게 된다. 그러니까 주인의 생각을 무시할 수 없다. 주인이 되면 그런 안목이 생긴다. 진심으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형식적으로 하는 것인지가 알아진다.
그래서 정죄가 없게 되는데 그래도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 뭔가 하면 이것은 우리와 의논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니냐는 불만이 생기게 된다. ‘나는 뭐냐?’는 이런 문제가 생긴다. 여기에 대해서 오늘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이 하고자 원하시는 것을 한다는 것이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를 가지고 이런 그릇도 만들고 저런 그릇도 만들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릇이 왜 나를 이런 그릇으로 만들었냐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되어진 일이라는 말이다.
요즘 사람은 이것을 참 듣기 어려운 말이다. 요즘은 완전 자유주의 시대, 개인시대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른들 말도 잘 안 듣고 그렇게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주권이라는 말을 하면 닭살 돋는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것을 가르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누구도 절대자가 없다는 것이 민주사회다. 그러니까 민주사회가 되면 될수록 절대주권이라는 말이 없어지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주권자다.’는 것을 가르치려면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미국 사람에게 가르치려면 되겠냐는 것이다. 안 된다. 그래서 꼭 군대(軍隊)가 필요하다. 군대는 절대주권이 있다. 군대는 전쟁을 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자기 멋대로 해서는 안 되는 그런 곳이다. 개인주의 안 된다. 군대에서는 명령이 떨어지면 해야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군대가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주권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주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한가? 아니면 그 힘이 방해가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인간사회에서는 누군가 절대주권을 가지고 있으면 폭군이 되니까 권력을 분산시켰다. 그래서 삼권분립을 한 것도 옛날에는 왕이 3권을 다 가지고 있어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 폭군이 된다. 이것을 분리시켜 놓은 것이 민주주의 법다. 3권분립을 해 놓으면 그만이 아니고 그 안에서 또 혼자서 권력을 갖지 못하도록 분리를 해 놓았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해방이후 지금까지 해온 것이 계속해서 민주화운동이었다. 민주화 운동이라는 말은 혼자 해먹지 말라는 말이다. 나눠서 하자는 말이다. 그러니 대통령이 여러 명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꼭 혼자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 싸우는 것이다. 5년을 못 참아서 내려와라 올라간다하고 계속 싸우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중임제였다. 그래서 이승만박사 때 3선을 했었다. 그때 민주화 운동의 깃발은 ‘못살겠다. 갈아보자’였다. 그러니까 정치를 안 하는 사람은 ‘못살겠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자기도 한 번 해보려는 사람은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것이다. 5년을 어떻게 기다리나 매일 한 사람씩 선출해보든지 아니면 한달에 한 사람씩을 선출하든지 도저히 길이 없다. 이것은 주권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주권자다. 이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사람이 주권자인데 누가 나를 절대주권으로 지배하냐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봐도 참 이상하다. 중국에서부터 가다보면 중국쪽은 절대주권자라는 것이 없어서 황제가 절대주권자다. 신적인 존재는 없다. 그런데 중동은 절대주권자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유일신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더 가면 희랍세계인데 그곳에는 절대주권자가 관념적으로만 있지 실제적으로는 없는 곳이다. 이상하게 되어있다. 지구의 어느 곳을 중심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의 중심은 중동이다. 거기서는 그런데 중국쪽으로 가면 완전히 신이 없다는 것이 되고 또 반대쪽으로 가면 추상적인 신이 생겼는지 참 이상하다. 우연한 일은 아닌 것같다.
좌우간 오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말이 로마서 9장에 나와 있는데 왜 주권을 말하고 있는가 하면 선택(選擇) 때문이다. “선택은 주권에 의한 것이다”는 말이다. 이 선택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불필요한 것인지, 세상에서의 선택은 기분 나쁘고 불필요한 것이다. 다 자기를 위해서 선택하니까 상대적으로 나는 피해자가 된다. 내가 선택을 할 때는 좋지만 내가 선택을 당할 때는 피해자가 된다. 그래서 할 것도 남이 선택하면 사람은 안 하려고 한다. 남이 하라고 하면 안한다. 자기 스스로는 하지만 남이 하라고 하면 안 하는 것이 개인주의 정신이다. 남이 하라고 하면 안 하겠다. 그래서 “내 맘이지”하는 말이 있다. 아이들도 ‘엄마 마음이야 내 마음이지’한다. 애기 때는 잘 듣는데 조금 크면 ‘내 마음이지’가 나온다.
그래서 아까 중등부에 후원금이 들어왔는데 선생님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굉장히 어려운 세대가 중학생세대라고 한다. 그 중에서 중학교 2학년이 제일 어렵다고 한다. 제일 말도 안 듣고 말도 못 알아듣고 자기들 멋대로 한다. 지난번에 중등부 RT한다고 해서 옛날 생각만 하고 갔는데 아이고 말 몇 마디 하는데 내가 억장이 무너져서 앞뒤가 콱 막혔었다. 완전히 벽을 보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처음에는 쳐다보고 있었는데 내가 말을 두세 마디 하니까 다 자기들대로 뭔가를 했다. 나는 그렇게 답답한 것은 처음 봤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 선생님들이 수고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이들 둘에 선생하나 이런 식으로 멘토가 되어서 진행되고 있다. 그러니까 선생이 많이 필요하다. 어쩌면 학생 수보다 더 많이 필요하다.
옛날 아이들은 그렇게 못했다. 선생님이 말을 하면 싫든지 좋든지 보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이고 목사님이 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만 이리저리하는데 우리시대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개인주의 시대가 되어서 그렇다. 이 주권을 이야기 하려 한다. 주권은 우리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다.
1) 운명을 바꿈
성경은 계시의 말씀이다. 창조는 “빛이 있으라.”는 말씀으로 시작 된다. 이 빛은 하나님 자신과 자신의 일을 계시하시는 말씀이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창조자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 빛이 있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요한은 이 빛이 세상에 왔다고 했다(요1:9). 이 빛은 우리의 운명을 자연인에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으로 바꾼다.
성경은 계시의 말이다. 역사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과학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 우리가 못 보는 것을 열어주는 말이다. 계시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열어주는 말이다. 창조를 보면 ‘빛이 있으라.’ 이렇게 시작한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이 말씀으로 시작하는 데 이 빛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하나님 자신의 일을 계시하는 말씀이다. 햇빛이 아니다. 창세기 뒤에 가면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이 나온다. 그러기 전에 ‘빛이 있으라.’ 한다. 이 빛은 그런 물질적인 빛이 아니고 물질을 반사하는 빛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는 빛이다. 그래서 이 빛은 사람이 볼 수도 있고 못 볼 수도 있다. 햇빛은 누구나 볼 수 있는데 이 빛은 보는 사람은 보고 못 보는 사람은 못보고 그렇다.
피조물로서 인간은 창조자가 무엇을 하는 지,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피조물은 알 수가 없다. 어린 아이들만 하더라도 어른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데 하물며 인간이 하나님이 무엇을 하는 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 빛이 있어야만 알 수 있다. 이것이 예수의 빛이다. 요한은 이 빛이 세상에 왔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 창세기에는 ‘빛이 있으라.’ 하니까 빛이 있었다고 했고, 요한복음에는 ‘이 빛이 세상에 왔다.’고 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는데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어진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더라.’ 그러니까 그 말씀이 곧 빛이고 그 빛이 왔으니까 이 빛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이 말이다. 이 빛은 우리의 운명을 자연 세계에서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바꾸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빛 때문이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빛 안에서 살고 있다. 가시광선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해도 우리는 항상 가시광선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눈으로 보이지 않는 다른 빛도 물질의 세계에 있다. X광선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보면 사람의 뼈가 다 나온다. 그래서 사람의 뼈를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다른 세계가 보이지 않겠는가? 우리는 지금 몸뚱이 밖에 안 보이는 데 사람의 뼈가 환하게 보인다고 하면 의학의 발달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저 눈으로 보고 해야 했던 세계에서 눈은 그 눈이지만 다른 빛이 왔기 때문에 속에 있는 내장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의학 발전에 획기적인 변화가 오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만일 ‘빛이 있으라.’고 하는 이 빛이 들어온다면 우리 인간의 변화도 극적인 변화가 올 게 아닌가? 보는 게 달라지니까. 보는 게 달라지면 세상도 달라진다.
사람을 바꾼다, 언약의 사람으로 바꾼다. 빛이 없을 때 우리는 언약의 사람이 아니고 자연인이다. 다른 동물들과 똑 같이 생겼는데 단지 IQ가 좀 높다든지 이런 종류에 불과하다. 인간이라는 동물의 한 종류, 우리 입장에서 보면 고등동물, 영장류, 원숭이과에 속하는 동물, 이런 것이다. 원숭이를 인간과라고 하는가, 인간을 원숭이과라고 하는가? 그걸 잘 모르겠다. 인간은 원숭이과다. 왜 그렇게 말하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렇게 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아주 기계적이다. 날 때는 이렇게 나고 죽을 때는 이렇게 죽는다. 몇 살을 살고 죽는다. 병이 들면 죽는다. 이런 것이 다 정해져 있다. 무슨 병이 들면 죽는다. 다 정해져 있다. 과학이 그것을 밝혀내서 병을 치료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자연인이다. 누구도 이 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몸은 똑 같은 데, 자연인은 똑 같은 자연인인데, 언약이 하나 더 붙었다. 그와 같이 세상에서도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용도가 달라진 사람이 있다.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되는 사람이 있다. 똑 같은 사람인데 판사는 피고를 놓고 판결을 한다. 똑 같은 사람인데 판결을 한단 말이다. 내가 판결하면 안 되는가? 나는 판결하면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자격이 없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고 같은 차원의 세계에서도 어떤 사람은 이런 데 쓰이고 있고 어떤 사람은 저런 데 쓰이고 있다. 하물며 우리가 만일 운명이 바꿔진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데 사용되는 사람이 된다.
절망적 상태라는 말은 아까 말한 대로 ‘하나님을 위해서 지어진 존재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다.’ 이것을 절망적 상태라고 하였다. 이 절망적 상태라는 운명을 벗어나려면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언약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인데 자기들은 언약이 있는 백성이라고 믿고 있다. 그게 다른 점이다. 언약이 있는 ‘우리는 약속이 있는 백성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문제다.
이 빛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하신 일을 열어보여 주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셨으며 이스라엘을 부르셨다는 것이다. 우연히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준 것이다.
이 빛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하신 일을 열어 보여 주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셨으며 이스라엘을 부르셨다.’ 이것을 알려 준 것이다. 성경의 내용은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택을 해서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시고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이렇게 했다는 내용이다. 요한 계시록까지 계속해서 그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앞으로 이스라엘은 이렇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데 이것은 계시의 말이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없는 말이다.
우리가 만일 세상의 주도권, 인류의 주도권을 말한다면 인종학적으로라든지 여러 가지를 연구해서 이런 인종이 가장 강한 인종이니까 이런 인종이 역사를 주도하고 인류의 운명을 주도할 것이다. 이렇게 결론이 나올 것이다. 그것이 서양일지 동양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나올 것인데 이스라엘이라는 정말 보잘 것 없는 백성이고 옛날부터 지금까지 골칫거리인 나라가 BC 1000년 때부터 골칫거리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곳에 있는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거기다 나라를 세웠는데 그것이 보통 일이겠는가? 그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원주민은 팔레스타인이다. 지금도 그 사람을 몰아내고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을 세상에서 본다면 깡패다. 자기들 마음대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백성도 아니고 별 것도 아닌 사람들이 그러니까 아주 골칫거리고 문제 거리다. 유엔에서도 어떻게 하지 못한다. 거기서 전쟁을 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 한 방을 치면 10방을 때려 대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모든 것을 하셨다. 창조도 선택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연히 있는 일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 속에 있는 세계다. 이것을 알려 준 것인데 이스라엘이 이것을 알아들었다. ‘너희는 우연히 있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에 따른 존재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자부심이다. 2000년 동안을 나라를 잃고 돌아다녔지만 끝까지 그들의 존재를 잃지 않았던 이유는 이 선택 때문에 그랬다. 선택의 정신,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 ‘결코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 때문에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욕도 무지하게 얻어먹고 학살을 당하고 했음에도 끝까지 살아남아서 민족을 지키고 있는 나라가 이 나라다.
우연히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은 ‘내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우연한 존재가 아니다.’ 이것이다. 바다가 출렁거리다가 생겼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연한 존재가 아니다. 내가 대구교회에 와서 앉아 있는 것은 우연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돌아보면 그렇다. 그때는 몰랐는데 옛날 일을 돌아보니까 ‘그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었구나.’ 하게 된다. 우리 동이 우리 면 전체인데 어떻게 꼭 우리 집 바로 옆에서 교회가 시작되었는가? 내가 멀리 살았으면 나를 부르겠는가? 바로 옆집에 살고 사람이 없으니까 학생이라도 부른 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참석한 것이 지금까지 내가 예수를 믿게 된 동기가 된 것이다. ‘우연한 일이 아니었네.’ 이런 생각이 든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하나 생각하면 다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 때는 ‘왜 내가 재수 없이 이러나?’ 이런 문제가 많았는데 지금 보니까 다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여러분도 깊이 생각해 보라. 여기까지 와 있는 과정 안에서 여러분의 인생이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우연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있어서 내가 여기를 왔는지. ‘나는 모르겠다.’ 이러면 내 인생은 모르는 것이고, ‘우연이다.’하면 가다가 어찌되어도 상관이 없다. ‘우연히 있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니까 뭔가 중심이 생기고 뭔가 기대가 생기게 되며 뭔가 희망이 생기게 되고 그렇지 않은가? 여러분 혹시 소망이 없고 ‘인생이 허망하다.’ 이런 생각이 들거든, 집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라. 기억력이 퇴화되었으면 노트에 적어가면서 생각해 보라. ‘나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가?’ 잘 생각해 보라.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우연을 일으키게 되는 어떤 표면적인 존재가 있을 게 아닌가? 그렇게 되면 내 인생을 보는 게 달라지게 될게 아닌가? ‘나는 우연한 존재가 아니다.’
내가 대구에 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충주에 간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충주에 가기 전에 의정부로 갈 줄 알았다. 돌아가신 이 목사님이 하필이면 그 전날 와서 의정부로 가기로 로비를 해 놓고 갔다. 그래서 나는 의정부로 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침에 발령장을 읽는 데 충주라는 것이다. 그때 대학원에 다니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학교를 다녀야 하니까 자기가 급해서 아침에 가서 사정을 했는가 보다. 그래서 나와 바꿔치기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충주로 내려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의정부로 갔더라면 거기서 끝날 뻔 했다. 너무나도 넓고 광활해서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런데 충주는 내게 딱 맞는 지역이었다. 또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엑스폴로 74에 사람을 동원하는 일이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었는데 정말 나는 노력하지 않고 얻었다. 충주 감리교회라고 지금으로부터 140-150년 된 오래되고 역사적인 교회인데 그 교회에서 목사님이 나를 보고 오자마자 6개월 동안 자기 강단을 맡아달라고 했다. 이런 행운이 어디에 있는가? 누가 이것을 준비해 주겠는가? 어림도 없다. 그런 큰 교회에서 CCC 간사에게 맡기겠는가? 어림도 없다. 그런데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거기서 6개월 동안 설교를 했다. 그 지역이 전부 감리교 지역이다. 내가 맡았던 충주, 중원, 제천, 단양, 이 네 지역이 전부 다 감리교 판이다. 그 지역이 감리교 목사들이 다 나를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가 그 지역의 중심교회이고 모 교회다. 그래서 내가 모 교회 목사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사람이 저절로 동원되었다. 내가 돌아다니지 못했다. 세 군데를 가보니까 도저히 못할 일이었다. 그 더운 여름에 구인사가 있는 단양 영춘에 갔다고 갔는데 지금은 도로가 있지만 그때는 도로도 없어서 논길로 버스로 하루 종일 가는 데 하루 갔다가 그날 돌아오기 바빴다. 그러니 무슨 수로 내가 그 광활한 지역을 다 돌아다니겠는가? 그래서 포기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내 힘으로 할 일이 못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구름 떼처럼 사람들이 몰려와서 내가 3000명을 동원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가만히 앉아서 3000명이 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충주로 가라는 것도 우연이 아니고 대구로 가라는 것도 또 우연이 아닌 것이다. 대구로 가라고 하지 않았으면 나는 청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대구로 가라 했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들과 함께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대구 사람이 나에게 딱 맞다. 다른 사람들은 대구 사람들이 무뚝뚝하다, 불친절하다고 하는 게 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아주 불친절하고 무뚝뚝하다. 그런데 나는 너무 친절한 것도 안 좋아한다. 그래서 내 기질에 딱 맞다.
그럴 뿐만 아니고 여기서 나가라고 해서 나오게 되었는데 나가라는 일도 우연이 아니다. 나는 계속 있을 생각만 했다. 나갈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다. 그런데 나가라 했으니까 오늘날 우리는 교회가 된 게 아닌가? 그러니까 하나도 우연히 된 게 없는 것 같다. 우연한 존재가 아니다. ‘나는 우연한 존재가 아니다.’ 너희는 바다가 출렁거리다가 왔든지 간에 하여간 ‘나는 우연한 존재가 아니다.’ 나는 강한 확신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택으로 모든 일은 시작하시고 목적에 따라서 성취하신다. 물을 가르시고, 궁창이 있게 하시고, 뭍이 들어나게 하시고... 마지막에 사람을 지으심에서 최종 목적을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정밀하게선택 된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서 사람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택으로 모든 일을 취하시고 목적에 따라 그것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는 분이 아니고 시작하실 뿐만 아니라 목적에 맞춰 성취하시는 분이다. ‘물을 가르라.’ ‘궁창이 있으라.’ ‘뭍이 드러나라.’ 한다. 마지막에는 ‘사람을 지으셨다.’ 그러니까 이것은 목적이 사람이었다. 그래서 최종 목적을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정밀하게 선택된 존재다.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에서 정밀하게 선택된 존재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려고 모든 것을 지었다. 결국 창세기는 사람 창조에 관한 이야기다. 자연과학적인 창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서 사람을 선택하셨다. 그러니까 내가 사람으로 지어진 것 자체가 엄청난 축복인 것이다.
중국에서는 오유삼락(吾有三樂)이라는 것이 있다. 공자에게 물으니 내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즐겁고,) 남자로 태어나서 즐겁고, 일찍 안 죽어서 즐겁고(아흔을 살아서 즐겁다.) 이런 식으로 있다. 그런데 그것은 허망한 말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서 선택했다. 이게 들을 만한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가 들을 만한 이야기가 되겠는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서 사람이 선택되었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만 들으면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행복하다.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 안에 있으니까.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였음으로 그중에서 어떤 소수의 사람들을 특별히 구별하여 선택하신 것이다. 셋은 아담의 계보를 이어가게 하기 위하여, 노아는 네피림의 멸망에서 인류를 보존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은 약속의 후손(이삭)을 주시기 위하여 각각 선택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으니까 그 중에서 소수의 사람들을 특별하게 구별해서 선택하신 것이다. 우리가 선택이라고 하면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런 사람들을 생각한다. 왜 이런 사람들이 선택되는가 하면 인류가 거기서 이탈하기 때문에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을 구별해 낸 것이다.
아벨 대신에 셋을 주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아무 것도 한 게 없다. 아담의 계보를 이어가게 하기 위해서 셋을 주었다. 다음 성경을 보면 아담은 셋을 낳고 이렇게 나온다. 가인과 아벨은 빼 버리고 셋은 또 에녹을 낳고 이런 식으로 아담의 계보를 이어가기 위해서 셋을 주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이다. 노아는 또 어떤 사람인가? 네피림이 멸망하는 자리에서 인류를 보존하려면 씨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노아를 선택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후손을 주기 위해서 선택한 사람이다. 아브라함이 한 것도 아무 것이 없다. 이삭을 낳은 것 밖에 없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 이 사실과 함께“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고 알려 주었다.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육신의 자녀(자연 세계의)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라는 것이다(9:8)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약속이 있다. 아들의 자격, 하나님의 영광, 언약이 있는 율법, 하나님을 섬김, 그리고 그리스도까지, 이 모든 것들은 약속의 자녀들에게 주신 특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 이 사실과 함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했다. 우리를 선택했다. 이것을 알려줬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정말 위대한 자들이다. 우리 조상들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없다. 이것이 슬픈 일이다. 학자도 많았고 유명한 사람들도 많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제멋대로 할 게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뭔가 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라는 것이다. 왜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을 했는가 하면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으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이 약속한 그 약속이 우리의 육신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약속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당시의 현실은 정 반대였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육신의 자녀가 아니고 약속의 자녀다.’ 이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 세계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약속이 있다. 사람은 세상에서 잘 나가고 하면 ‘하나님이 너를 선택했다, 안 했다.’ 하는 말도 귀찮고 그럴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길이 막혔다고 가정하면 이 말은 얼마나 복음이 되겠는가! 길이 막혔는데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가 ‘나는 너를 선택했다.’ 시집갈 곳이 없어서 처녀가 노처녀로 늙어 죽게 생겼는데 어디서 ‘너를 간택하러 왔다.’ 이러면 완전히 대박 나는 것이다. 간택령이 내려져서 시집 장가 못 가게 막아 놓고 누가 찾아 왔는데 ‘너를 간택하기로 선택했다.’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복음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약속이 있는 백성이다. 아들의 자격, 하나님의 영광, 언약이 있는 율법,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까지 이 모든 것은 약속의 자녀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없다. 세상에는 없고 약속 안에서만 이것이 가능하다. 어느 민족에게도 이것이 없는 것은 약속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것이 없다. 그런데 이것은 약속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자연 세계 내에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딱 정해져 있다. 가는 길이 딱 정해져 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것은 약속의 세계기 때문에 약속 안에 있는 다른 세계가 있다. 약속의 세계라는 말은 그 말이다.
내가 돈을 버는 것은 하루에 만 원씩 번다. 그런데 만 원씩 벌어서는 평생을 벌어도 빚을 다 갚지 못한다. 이럴 경우가 생긴다. 만 원씩 버는 사람이 무슨 수로 갚겠는가? 자기 먹기도 바쁘다. 그런데 어디선가 약속이 하나 왔다. ‘내가 네 빚을 다 갚는다.’ 이런 약속이 하나 왔다. 요즘에 개인회생이라는 게 있다. 도저히 빚을 다 갚을 수가 없다. 국가에서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개인회생 법을 만들어서 ‘월급을 받는 사람은 얼마를 받든지 간에 자기 먹을 만큼의 최소한도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내라. 얼마가 되었든 5년간만 내면 부채를 다 탕감해 주마.’ 이렇게 약속을 했다. 이것은 약속이지 자연 법으로는 있을 수가 없다. 은행의 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돈을 가지고 갔으면 이자를 내야 되고 원금을 갚아야지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데 정부에서 돈을 대서 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다른 법을 만들었다. 개인회생 법이다. 혹시 지금도 빚에 쪼달리고 있는 분이 계시면 개인회생 법을 찾아서 짐을 벗도록 한 번 해 보시기 바란다. 다른 법이 있다. 다른 법이 또 있단 말이다.
이 선택은 법리적인 자연세계에 속한 것도 아니고 인간의 행위에 따른 것도 아니다. 자연은 법리대로 돌아간다. 선택이란 없다. 그리고 인간세계는 선악과의 원칙에 따라 자기가 행한 대로 얻는다. 상선벌악 이며 자업자득이다.
이 선택은 자연적인 법리적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행위에 따른 것도 아니다. 자연 세계라는 것은 법칙이다. 지금 어김없이 가을이 온다. 그렇게 덥더니 어김없이 가을이 오고 있다. 우리가 이것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조금 있으면 추워서 모두 파카 입고 들어올 것이다. 바꿀 수가 없다. 여기서는 이런 약속이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라고 해서 자연법이니까 가을을 가을이 안 되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가을이 오면 가을을 대비하고 겨울이 오면 파카를 입어야 하는 것이지 옷을 대비하지 않고 하나님께 ‘겨울이 물러가게 해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니다. 안 된다.
시험을 보는 것은 법에 의한 것인데 이것을 공부는 하지 않고 앉아서 신학교 학생이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밤새도록 기도를 했다. 다음날 시험을 보는데 시험지는 잘 보이는데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나온 말이 시험에는 성령도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성령이 어찌하겠는가? 성령이 만든 법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만든 법인데 그 법을 성령이 와서 치우라고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자연세계의 법은 바꿀 수 없다. 내가 거기에 적응해서 살아야 한다. 또 인간의 행위에 따른 것도 아니다. 인간의 행위로서는 이런 약속을 받을 수 없다. 아무리 봐도 이런 약속을 받을 수 없다. 또 인간 행위로서는 이런 약속을 내가 감당할 수도 없다. 자연은 법리대로 돌아간다. 선택이라는 것이 없다.
그리고 인간세계는 선악과의 원칙에 따라서 행한 대로 얻는다. 상선벌악이라는 말이 그 말이다. 행한 대로 얻는다. 그러니까 행하지 않고 얻으려고 하면 도둑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최소한도의 노동을 통해 많은 것을 얻겠다는 것은 도둑질하는 것이다. 도둑질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잘 못하면 잡히니까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행한 대로 얻는 것이 세상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많이 얻는데 나는 왜 적느냐고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내가 한 대로 얻는 것이다.
이 세상은 내가 한 대로 얻는다. 내가 공부한 것만큼 점수가 나오고 그런 것이지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도 점수가 나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니까 우연이라는 것은 거기에 없고 거기는 반드시 법칙을 지켜야 한다.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킬 때도 공부하는 법칙 안에 넣어놓아야 한다. 지 멋대로 놔두면 공부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보고 ‘너 이거 공부하지 않아도 기도만 열심히 하면 성적이 잘나온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세상은 자연법칙 안에서는 바꿀 수 없고 인간의 법칙 안에서는 상선벌악이다. 사람이 무슨 법을 만들어도 그 원칙에서 만든다. 이 원칙을 벗어나서 법을 만들 수 없다. 우리가 법을 어떻게 다 알겠는가. 그 엄청나게 많은 법을 우리가 다 모른다.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데 제일 간단하게 법을 아는 방법은 ‘법은 상식이다.’ 이렇게 알면 된다. ‘법은 상식이다.’상식을 벗어난 법은 없다.
우리 교회도 처음에 건축허가를 내 줄때도 안 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연녹지 안에서는 삼천평 이상은 개발할 수가 없는데 이미 삼천평 이상이 개발이 되었기 때문에 허가를 내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아보니까 그 법이 생기기 전에 건물을 지은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치에 벗어나는 것이다. 결국 법을 바꿨다. 94년도에 법이 발효가 되었는데 그 법 이전에 개발된 것은 면적 합산에 포함하지 않는다. 하고 한 줄을 바꿨다. 그러니까 건축허가를 내 준 것이다. 그러니까 누가 했다고 하기는 곤란하고 상식이니까 상식에 맞지 않는 법은 없다. 상식에 벗어난 법은 없다. 상식에 벗어나지만 않으면 법에 걸릴 것이 없다. 상식에 벗어나니까 법에 걸리는 것이다. 세상은 사람이 행하는 대로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을 상식적 인간으로 키워놓아야 하지 비상식적 인간으로 키워놓으면 안 된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이 신앙만 강조를 하다가보니까 사람이 비상식적이 된다. 그래서 기독교인들 중에 자기가 비상식적으로 행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너무 많다. 아주 문제가 크다.
우리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은 상식적이고 상식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비상식적인 얘기를 하지 않으니까 신비라든지 이런 얘기를 하면 비상식적이 된다. 신비 같은 생각을 하면 상식에 벗어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그래서 너무 상식적이다 보니 신비를 한 번도 못 봤다. 인간세계는 자연 법칙과 자기 행위의 법칙대로 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선택의 세계는 다르다. 리브가가 잉태하였을 때에 아이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큰 자는 작은 자를 섬기리라.” 하였고(9:12) 또 아브라함에게 맏아들 이스마엘이 있었으나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후손)라 할 것이다.” 하셨다.(히11:18,갈3:29,창21:12 인) 하나님의 선택이 새로운 운명이 된 것이다.
그러나 선택의 세계는 다르다. 리브가가 잉태했을 때 아이들이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인데 “큰 자는 작은 자를 섬기리라.” 하는 예언을 받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연 세계 안에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약속의 세계다. 선택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아브라함에게 맏아들 이스마엘이 있었다. 그런데 이삭으로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이다. 이것도 자연세계 안에는 없는 법이다. 이것은 선택이다. 이 선택은 자연법칙이 있고 사람의 행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
만약 사람세계 안에서 사람이 이런 짓을 하면 이것은 독재자이다. 사람이 법을 떠나서 자기가 대통령이 되든지 임금이 되든지 하여 법 위에 집권하면 폭군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다 법치주의이고 민주주의인 나라가 있고 입헌군주제들이다. 그 군주도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절대로 법 밖에서는 살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법 밖에 있는 얘기이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 이삭으로 난 자라야 네 후손이라 할 것이다.”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택이 새로운 운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것이 창조도 하나님의 선택으로 한 것이다. 내가 태어난 것도 선택으로 된 것이니까 할 수 있지만 사람은 할 수가 없다. 사람이 무조건 자기가 기도를 해서 와서 자기가 선택을 했다고 찍는다고 해서 자기 아내가 되겠는가? 그것은 이상한 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택이 새로운 운명이 된다. 하나님은 새로운 운명을 창조할 수도 있다. 인간은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다.
자연의 법은 기계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지으신 이의 주권으로서 택함 받은 자들에게 지극히 복되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그의 모양대로 지으셨다는 것, 새로운 인류를 위한 씨로서 이삭을 택했다는 것, 영광의 통치를 위해 야곱을 택했다는 것......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죄인들을 택하시고 부르셨다는 것.... 생각만 해도 이 얼마나 벅찬 축복인가!
자연의 법은 기계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지으신 이의 주권으로서 택함받은 자들에게 지극히 복되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만일 인간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저주가 되지만 하나님이 선택을 하시면 그것은 축복이다. 자연으로도 해결되지 않고 인간의 행위로도 해결되지 않은 그 위에서 하나님이 선택한 선택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축복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그의 모양대로 지으셨다. 새로운 인류의 씨로 이삭을 택했다. 영광의 통치를 위해서 야곱을 택했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죄인들을 택했다. 이것은 자연세계도 아니고 인간의 행위의 세계가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어떤 계획을 위해서, 새로운 계획을 위해서 선택한 일이다.
그러니까 공장이 하나가 있는데 그 공장에는 무엇을 생산해 낸다는 물건의 내용이 있다. 그 공장에서는 그 물건밖에는 생산할 수가 없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을 생산할 수가 없다. 그러면 다른 물건을 생산하려면 다른 공장을 지어야 한다. 공장을 지을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지금 새로운 공장을 지으시는 것이다.
들으니까 지금 삼성에서는 이번에 계산을 해보니까 40-60%의 매출이 떨어져서 상당히 어렵게 됐다고 한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스마트폰이 싸게 나와 버리니까 스마트폰 시장을 엄청나게 빼앗겨버렸다. 그래서 이번에 국내에 수십조원의 돈을 들여서 반도체 공장을 세운다는 것이다. 다시 반도체로 승부를 걸겠다는 것이다. 스마트 폰 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중국서 마구 쏟아져 나오니까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반도체기술을 우리나라가 최고로 가지고 있으니까 그것을 다시 더 설립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빨리 따라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러니까 어떤 시스템 하나가 안 되면 다른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것만 붙잡고 하다가는 중국이 더 싼 것으로 백만 원짜리가 오십 만원이 되고 오십 만원이 30만원이 되고 다음에는 공짜로 주고 하면 못 당한다. 중국은 능히 그렇게 싸게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새로운 인류를 위한 씨로서 이삭을 택했다. 이것은 새로운 일이다. 영광의 통치를 위해서 야곱을 택했다는 이것도 새로운 일이다. 그러니까 야곱의 후손으로서 요셉이 가서 애굽을 다스린다. 이것은 통치의 형상인데 세상의 방식은 임금인 바로가 다스린다. 그런데 요셉은 가서 임금이 아니데 다스렸다. 그러니까 새로운 질서이다.
임금이 아닌데 다스리는 것, 우리도 이것을 실험할 수 있다. 여러분이 직장에 가면 최고 상사는 몇 명이 없고 다 직원들인데 직원이 사장노릇을 할 수 있다. 그 회사의 법안에서는 직원은 사장이 될 수 없지만 만약 직원이 요셉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 회사를 실제적으로 통치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다른 세계이다. 우리가 만일 어디에 가서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요셉 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 주인은 아닌데 실제적으로 주인이 된다. 어쩌면 주인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다른 세계이다. 생각만 해도 이 얼마나 벅찬 축복이냐!! 거기서 비비고 남을 눌러서 기어코 올라가려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계급이 올라가지 않아도 주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을 모두 하나님의 주권으로 한 것이다.
2) 하나님의 주권으로
무슨 조건으로 이 축복을 받아 누리는 것인가? 하나님의 선택에는 조건이 없다. 있다고 해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선택은 선택한 자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9:15,16) 라 하셨고,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부르리라.”(호2:23) 하셨다.
이스라엘은 약속이 있는 백성인데 왜 버려졌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의 절대적은 주권으로 선택을 하셨고 일을 하셨는데 그러면 지금 현재의 이스라엘은 왜 예수를 죽이고 저렇게 버려져 있는가? 이런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육신의 자녀가 자녀가 아니고 약속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다. 라고 말한 것이다. 분명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을 받았으니까 이삭으로 난 후손들이 받았으니까 이스라엘로부터 난 후손들은 당연히 잘 되어야 되고 당연히 지금 형통해야 되는데 왜 나라는 빼앗겼고, 왜 예수는 죽였고 왜 이런 식이 되었는가? 는 것이다. 그래서‘육신으로 난 것이 후손이 아니고 약속으로 난 것이 후손이다.’ 이 말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면 약속의 자녀라는 말이 이해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약속의 자녀가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하는 것이 9장의 결론이다. 이스라엘은 왜 실패했는가? 율법으로 난 자기 의를 자랑하려다 실패했다. 믿음에서 난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해야 하는데 율법으로 난 자기 의를 가지고 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행위를 의지하게 되면 부딪힐 돌에 부딪히게 된다. 내가 시온에 거친 반석을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다.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저들이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으로 부딪칠 돌에 부딪혔느니라. 그러니까 자기 행위를 가지고 서려는 사람은 어디에서 부딪히는가 하면 예수에게 와서 부딪힌다. 그 것이 이상한 일이다.
자기 행위를 가지고 오면 예수에게서 부딪힌다. 유대인들도 그렇게 예수의 제자들도 그렇고 자기 행위를 가지고 오면 예수가 자기들의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법칙은 내 행위대로 받는 것이니까 내 행위대로 받는 것이 당연한데 예수 앞에 오면 이것이 다른 세계가 있다. 행위대로 받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가 있다. 약속에 의한 세계가 따로 있다. 그러니까 내가 행위대로 모든 것을 다 받을 알았다가 거기에 오면 부딪혀서 자기가 바위에 부딪힌 처럼 아무것도 안되고 만다.
이스라엘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율법을 잘 지켰는가. 잘 켜서 나는 안식일을 너무너무 잘 지켰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는 아버지와 하나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니 내가 지금까지 율법을 지킨 것이 헛일이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해버리니까 나는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데 율법을 지켰냐? 나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까 나도 일한다고 하면 누가 위에 있는가? 그러니까 허망해져버린다. 물이 와서 돌에 부딪혀 부서진 것처럼 부딪힐 돌에 와서 부딪힌다. 참으로 이상하다. 여기서 아주 묘한 것이 있다. 잘 들으셔야 한다.
무슨 조건으로 이 축복을 받아 누리는 것이냐? 도대체 행위로도 아니고 자연법칙으로도 아니고 그러면 도대체 무슨 조건으로 이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냐? 하나님의 선택에는 조건이 없다. 조건이 없다는 말은 자연법칙의 조건이랄지 행위의 조건이랄지 이런 조건이 없다는 말이다. 있다고 해도 우리는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시험관이 어떤 의도로 시험을 낸 지를 알면 누구든지 백점을 맞는다. 그런데 어떤 의도로 이 시험을 냈는지 모르니까 떨어지는 것이다.
선택은 선택한 자의 주권을 따른 것이다. 내가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고 라고 말했다. 내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고 내가 불쌍히 여기지 않을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부른다. 내 백성이라고 불렀으니까 계속 부를 줄 알았는데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으로 부를 것이다. 하는 것은 주권이라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내 맘대로 라는 것이다.
토기장이가 어떤 그릇을 만들든지 그것은 토기장이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 선택은 일방적 주권이다. 또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선택하셔야 한다. 만일 나에게 “내가 너를 내 형상을 다라 내 모양대로 만들겠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분명하게 “싫습니다. 나는 남의 형상대로 빚어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고 거절할 것이다.
토기장이가 어떤 그릇을 만들든지 그것은 토기장이의 주권에 달린 것이다. 선택은 일방적 주권이다. 또 하나님은 일방적 선택을 하셔야 한다. 인간의 왕이랄지 이런 사람은 일방적 선택을 하게 되면 폭군이 되니까 그것을 막으려고 인류가 싸운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선택을 해야만 맞는다. 일방적으로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만일 나에게 내가 너를 내 형상을 따라 내 모양대로 만들겠다고 너는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고 물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을 하겠는가? ‘싫어요.’ 한다. 어린 아이부터 다 싫어한다. 왜? 다 자기대로 살고 싶으니까 나는 남의 형상대로 빚어지기 원치 않습니다. 왜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는가 하면 남이 하라는 대로 하기 싫기 때문이다. 옳다 그르다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남이 하라는 대로 하기 싫고 나는 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형상대로 빚어주겠다고 해도 나는 싫다는 것이다. 나는 거지꼴이라고 해도 내 꼴이 좋지.
토기장이가 먼저 진흙에게 물어본다. 내가 너를 그릇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어떤 그릇으로 만들면 좋겠느냐고 물으면 흙이 뭐라고 대답을 하겠는가? 이 덩어리는 이렇게 말하고 저 덩어리는 저렇게 말하고 ‘나는 접시를 만들어주시오, 뚝배기를 만들어주시오, 나는 항아리를 만들어주시오.’ 하고 다 따로따로 할 것이다. 왜 그런 말을 하겠는가? 그렇게 빚어지기 싫기 때문이다. 뜨거운 불가마에 들어가서 구워지고 싶은 흙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니까 아마 우리에게 선택을 예고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싫어한다. 도자기가 나오려면 불이 뜨거울수록 좋은 도자기이다. 슬쩍 구우면 도자기인지 흙인지도 모르고 살짝 건들어도 깨져버린다. 보통 싸구려는 700도에서 굽는데 좋은 것들은 1300-500도까지 올라간다. 그러니까 좋은 그릇이 되려고 할수록 더 뜨거운 곳에 들어가야 하는데 누가 거기를 들어갔다가 나오겠다고 하겠는가. 다 안 된다. 그러니까 이것도 못 만들고 저것도 못 만들고 그렇게 된다.
하나님의 선택은 나의 생각과 다르지만 완전하다. 선택은 선택한 자의 주권에 속한 것이므로 그 선택한 자의 어떠함이 그 목적과 내용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은 완전한 축복인 것이다. 인간은 그분의 형상을 따라서 그분의 모양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어떠한 영광의 축복인가!
하나님의 선택은 나의 생각과 다르지만 완전하다. 선택은 선택한 자의 주권에 속한 것이므로 그 선택한 자의 어떠함이 그 목적과 내용이 된다. 그러니까 누가 선택하느냐 이것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은 완전한 축복이다. 인간은 그분의 형상을 따라서 그분의 모양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어떠한 영광이냐는 것이다. 이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가짜 영광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가 선택하느냐가 중요하지 선택 자체가 옳으냐, 그르냐 할 일이 아니다. 누가 선택하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동물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운명으로 바뀐 것이다. 누가 자기 힘으로 타고난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는 자연법칙 안에 우리는 태어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으로 이것을 바꿔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운명으로 바뀐다. 선택으로 바뀐 것이다. 내가 스스로는 바꿔질 수가 없다. 자연법칙으로도 바꿔질 수 없고 내 행위로도 바꿔질 수가 없다. 누가 자기 힘으로 타고난 운명을 바꿀 수가 있냐는 것이다. 바꿀 수 없다. 결코 그럴 수 없는 자연법칙 안에 우리는 태어났다. 내가 나를 바꿀 수 없는 법칙 안에 내가 태어났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것을 자신의 주권으로 바꿔주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꼭 적합한 예는 아닌데 내가 27세쯤에 어떤 관상쟁이를 만났다. 그 사람이 30살 전에 복부 수술을 할 것이라고 해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이름이 나빠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름을 바꾸라고 했다. 요즘에는 법원에서 이름을 바꿔주는데 그때는 함부로 이름을 바꾸지 못할 때였다. 그때 법원에 가서 신청하면 된다고 했으면 모르겠는데 안 되니까 못 바꿨다. 그러다가 어찌해서 스물일곱에 집을 떠나게 되었는데 출가를 하게 되었는데 언제 그 생각이 났는가 하면 서른넷인가 다섯인가에 문득 그 생각이 났다. 서른이 넘기 전에 복부 수술을 한다고 했는데 어느 사이에 넘어가 버렸다. 내가 생각하지 않은 시간에 넘어가 버렸다. ‘서른이 넘어가 버렸네, 아 내 운명을 벗어났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운명인지 아닌지 하여간 모르겠지만 기가 막히게 알아맞히는 사람이었는데 맥을 짚어본 것도 아니고 내 얼굴을 보더니 이름을 대라고 해서 댔더니 서른 살 전에 복부수술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곤란했다. 안 들은 것만 못했다.
그런데 그냥 하나님이 확 바꿔주신 것같다. 내가 다른 길에서 생각지도 않았다. 완전히 잊어 먹고 몇 년을 지냈다. 옛날 조선시대에 그런 일이 있었다. 구한말 시대에 어느 선교사가 차를 탔는데 어떤 부인이 같이 탔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기구한 팔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전도하는 사람이 ‘당신 예수를 믿으면 팔자를 고칠 수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것을 믿고 예수를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팔자를 고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예화가 많이 나온다. 그런 사람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자연의 법칙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또 다른 의도로 인간을 선택하셨는가? 하나님의 창조에는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계적인 일차적 창조 만으로서는 온전하지 못하다. 그래서 인간을 선택하여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연의 법칙으로 모든 것을 창조 해놓고 또 다른 의도로 인간을 선택하셨냐는 것이다. 또 그런 문제가 생기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 에는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계적인 일차적 창조만으로는 온전하기가 못하다. 그래서 또 다른 것을 한 것이다. 인간을 선택하여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택으로 창조하신 것이니까! 또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차적인 창조에 속한 것들은 기계적이기 때문에 표현에 한계가 있다. 영이신 하나님, 변화하는 하나님, 살아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따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선택하신 것이다.
일차적인 창조 속에 속한 것들은 기계적이다. 때문에 표현의 한계가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 때 자기를 표현하게 하려고 만들었는데 기계적인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영이신 하나님, 변화하는 하나님,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을 따를 수가 없다. 그 하나님을 정의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교리(敎理)다. 하나님이 그냥 죽은 분 같으면 교리로 정해 놓은 데로 있을 텐데 살아 계신 분이니까 교리로 정해 놓아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언제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니까 그렇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나는 저놈을 절대로 안 볼 것이다. 했는데 뒤로 어느 날 가면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 그것을 법으로 정해 놓을 수 없다. 언제 내 마음이 변할지 모르니까! 나는 내 고향에는 절대로 안 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배척을 받고 나와씨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고향에 가고 있더라는 것이다. 형님이 나를 꼭 한번 도와 줬으면 할 때 안 도와줬다. 그래서 내가 나올 때 하늘이 노란 경험을 했다. 완전히 망해서 그래도 형님이 한번은 도와 줄 것이라고 생각해서 찾아갔는데 딱 거절했다. 지금도 꿈을 꾸면 그 꿈을 꾼다. 거기서 나와서 집으로 가야 되는데, 노화도에서 보성까지 교통도 안 좋을 때였는데 이틀을 걸려서 가는 곳이었다. 꿈에 나는 차를 타서 집으로 간다고 가는데 항상 중간에서 끝이 난다. 왜 그러느냐 하면 항상 그 중간에서 헤매던 생각을 한다. ‘어디로 가나? 내가 지금 빈손으로 집으로 어떻게 들어가나?’하는 이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몸에 이상이 있으면 꿈을 꾸는데 어떤 이상이 있으면 그 꿈을 꾼다. 항상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 만큼 한이 맺힌 곳인데도 묘 한다고 하면 도와주기도 하고, 거기 그 형님 손자들이 있어서 저거는 전화 안하지만 내가 전화하면 반가워한다. 내가 일부러 전화를 한다. 설이나 추석 때 일부러 전화를 한다. 전화해서 못 가서 미안하다고 하고 그렇게 한다. 사람 마음도 언제 변할지 모른다. 이것을 교리로 딱 정해 놓았다면 하겠냐는 것이다. 못한다. ‘나는 우리친척 특별히 큰집에는 절대로 안 간다.’ 이렇게 딱 정해 놓으면 못 간다.
그러니까 영이신 하나님, 변화하는 하나님,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을 기계적인 것으로는 따를 수 없다. 우리 생각도 기계적으로 고정되면 하나님을 따를 수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형제들과 연합해 사는 생활에는 내가 기계적인 생각으로는 같이 연합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움직이니까 그렇다. 사람을 볼 때 ‘아이고 저건 안 돼! 다 되도 저 인간은 안 될 거야!’ 이런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변할 수 있다. 내가 딱 고정 시켜 놓고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항상 고정되지 않아야, 그때그때 성령의 움직이심이 흘러가는 대로 내가 따라 갈 수가 있게 된다. 그러면 이것이 참된 자유다. 자유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성령이 움직이시는 대로 내가 흘러갈 수가 있다. 형제들이 흘러가는 대로 나도 흘러갈 수가 있다. 그런데 고집이라고 하는 자기의 어떤 것이 있는 사람은 흘러가는 대로 못 흘러간다. 동쪽으로 흘러갈 때는 잘 갔다. 그런데 물길이라는 것이 동쪽으로만 흘러가는가? 굽이쳐서 다른 쪽으로도 흘러갈 수 있다. 굽이쳐서 돌아가면 못 따라간다. 자기는 동쪽으로만 가야 된다.
하회마을이라는 곳이 물이 돌아가는 곳이다. 하회는 물이 돌아간다는 뜻이다. 류성용 고향이다. 물이 돌아가면 못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 한쪽으로 갈 때는 갔는데 다른 쪽으로 돌아가면 못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내 생각을 따로 가지고 있으면 그렇다. 내 생각을 없애버려야 다른 사람과 같이 흘러가게 된다. 깡패가 되더라도 같이 흘러가야 된다. 교회 안에서 흘러가는 것이 깡패로 흘러가겠는가? 하나님의 몸된 교회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것은 이상하게 생명의 흐름이 있어서 흘러간다. 그런 것을 많이 보고 있다. 인위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데도 그 속에서 흘러간다. 바다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물이 계속 돌고 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물길이 늘 돌고 있다.
일차적인 창조로서는 그것이 안 된다. 우리가 일차적인 창조의 존재로서 있으면 안 된다. 우리는 약속의 존재로 있어야 된다. 선택의 존재로 있어야 된다. 선택이 세계 안에 살아야지 내가 일차적인 세계 안에 살면 동물과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자동차는 아무리 잘 만들어져 있어도 주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는 없다. 주인의 뜻대로 운전 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서 언제나 그와 함께 할 자로 선택 창조 되었다. 할렐루야!
예를 들면 자동차는 아무리 잘 만들어져 있어도 주인이 원하는 대로 스스로는 움직일 수는 없다. 주인의 뜻대로 운전 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유능한 운전사를 두어야 차가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앞으로만 가고 뒤로는 못가는 운전사를 데리고 있으면 곤란하다. 나에게 집사람이 항상 하는 말이 앞으로만 잘 가고 뒤로는 잘 못 간다고 한다. 내가 뒤로 잘 못 간다. 뒤로 갈 일이 없다. 제주에서 운전을 배워서 길이 좋다. 제주에서는 뒤로 갈 일이 없다. 일차적인 인간이 되면 안 된다. 일차적인 인간은 이차적인 다른 세계로 가야 된다. 하나님의 선택의 세계로 가야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서 언제나 그와 함께 할 자로 선택되었다. 그래서 인간 세계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다. 특수한 목적을 갖고 선택이 되었기 때문이다.
3) 믿음이 필요함(9:30~10:3)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받은 백성이다. 그런데 이것을 알면서도 자기 의를 세우려고 율법을 내세우고 자랑했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에는 오직 믿음이 필요할 뿐이다.
그래서 여기서 무엇인 필요한가? 믿음이 필요하다. 율법의 의는 왜 필요하지 않은가? 율법의 의는 자기 의가 된다. 자기 의로는 하나님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내 의를 세우려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안식일을 어긴 자를 그냥 두면 안 된다. 왜냐하면 내 평생을 들여 안식일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느부가네살이 와서 핍박을 할 때도 목숨을 걸고 지켰는데, 일제가 와서 핍박을 할 때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는데, 신사참배 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융화가 안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폐지시켜야 한다. 그냥 폐지시키면 안 되니까 죽음으로 폐지시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받은 백성이다. 그런데 이것을 알면서도 자기 의를 세우려고 율법을 내세우고 자랑했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앞에서 말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에는 오직 믿음이 필요할 뿐이다.
자기 의는 선이나 악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은 선이나 악과 상관없이 자신의 목적을 두고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의 목적은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형상으로서 그를 표현하게 하는 것이다.
자기 의는 선이나 악에 속한 것이다. 선이든 악이든 어느 쪽에 속한다. 하나님은 선이나 악과 상관없이 자신의 목적을 두고 선택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의 형상으로서 그를 표현하기 위해서 선택했지 무슨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만든 것도 아니고, 악을 행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인간은 악하고 하나님은 선하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기준으로 나름 겸손(?)하게 하나님을 정의한 것이다. 그러나 선악을 기준으로 창조자를 정의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선하다 해도 악이고, 악하다 해도 악이다. 그 기준으로는 하나님의 창조도 선택도 시인할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진실이다.
사람들은 인간은 악하고 하나님은 선하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까리라도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기준으로 나름 겸손하게 하나님을 정의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인간은 악하고 하나님은 선하다. 그러나 선악을 기준으로 창조자를 정의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내 기준이니까. 선하다 해도 악이고, 악하다 해도 악이다. 그 기준으로는 하나님의 창조도 선택도 시인할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낫다. 하나님이 선하다는 말을 참 많이 하는데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을 나태내실 형상으로 선택하여 지어 주셨다는 것을 감사하고 믿어야 한다. 이것을 믿는 것이 의요, 선이다. 하나님은 행위를 보지 않고 믿음을 보신다. 주의 말씀이 나타났을 때, 그 아들이 나타났을 때, 즉 그가 형상으로 나타났을 때,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을 나태내실 형상으로 선택하여 지어 주셨다는 것을 감사하고 믿어야 한다. 나는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없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하더라도 이것만도 너무나 감사하다.
이것을 믿는 것이 의요, 선이다. 하나님은 다른 것도 다 필요하겠지만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선택했다는 이 사실을 안 믿으면 잘하면 뭣하겠는가? 자기가 선하면 뭣하겠는가? 하나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혹시 다른 것은 좀 못하더라도 이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은 그를 의로 여긴다. 부족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믿는 것이 선이요 의다. 세상에서 말하는 의나 선의 기준과는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행위를 보지 않고 믿음을 보신다는 말이 이 뜻이다. 왜 행위를 보지 않고 믿음을 보는가? 당연히 행위를 봐야 될 일인데, 왜 하나님은 행위를 무시하고 믿음을 본다고 하는가? 이런 의문이 생긴다. 왜 행위를 무시하겠는가? 무시하지 않는다. 선한 사람을 무시하겠는가? 무시하지 않는다.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의롭다고도 않는다. 왜? 자기와 관계없이 선한 것은 의롭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지금 많은 사람과 관계를 하고 살고 있는데, 그 많은 사람 중에는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이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이라고 해도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어떤 사람이 선한지 악한지가 문제가 있는 것이지 멀리 있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행위를 보지 않고 믿음을 본다.
주의 말씀이 나타났을 때, 그 아들이 나타났을 때, 즉 그가 형상으로 나타났을 때,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고 기뻐하신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는 것도 항상 선으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참 선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니다. 그것과 다르다. 예수님께서 죽음 앞에 섰을 때 무슨 선이나 악이 있었는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하셨다.
우리가 어렵고 곤란한 문제인데, 하나님은 선을 무시하시는가? 선을 무시하고 자기만 믿으면 좋아하시는가? 이런 의문도 또 생긴다. 하나님이 선을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다. 무시하지 않지만 자기와 관계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돈이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가 배고프고 돈이 없는데... 단 돈 얼마라도 내가 배고플 때 밥 먹으라고 주는 그것이 돈이지 어떤 사람이 돈을 많이 쌓아놓은 것은 나와 관계가 없는 돈이다. 마찬가지다. 선하다고 해도 나와 관계가 없는 선이 있고, 별로 선하지 않다고 해도 나와 관계있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허황하게 추상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실리적으로 생각해야 된다.
하나님은 왜 믿는 자를 의롭다하실까? 구체적인 일이다. 하나님이 추상적으로 선이나 악을 본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보시는 분이다. 자기와의 관계에서 보시는 분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것은 선이든지 악이든지 하나님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것이 선이든지 악이든지 하나님과 관계된 것만 하나님은 관계 하신다.
하나님의 선택은 그 무엇에도 좌우되지 않는다. 그러나 선택을 받은 자가 이것을 믿지 않으면 선택의 경륜에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에는 우리의 믿음이 필요하다. 오직 믿음만 필요하다.
하나님의 선택은 그 무엇에도 좌우되지 않는다. 선에도 악에도 좌우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다 선한데 하나님이 왜 안 보십니까, 이렇게 해도 관계되지 않는다. 또 여기는 다 악한데 왜 이렇게 놔두고 있습니까, 해도 관계되지 않는다. 저런 악당들을 왜 하나님이 놔두실까?, 이런 얘기를 많이 한다. 저런 악당들은 불을 질러야 되는데 왜 저것을 그냥 놔두고 보시는가? 하나님이 있다면 저렇게 될 수 있는가? 이런 일들이 많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은 정말 선한 사람인데, 하나님이 왜 돌보지 않을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런 것에 의해서 하나님 선택이 좌우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택은 오로지 유일한 목적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 그 목적 때문에 선택한 것이지 다른 목적 때문에 선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가 이것을 믿지 않으면 선택의 경륜에 방해가 된다.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데는 영원한 목적이 있는데, 다른 것은 다 잘하는데 이것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 선택에 방해가 된다. 선택한 목적에 방해가 된다. 자기 혼자 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에는 우리의 믿음이 필요하다. 그의 주권 앞에는 오직 믿음만 필요하다. 지식적인 기준이 아니다. 지식적인 기준 속에는 선과 악이 있다. 인간의 지식 안에는 선과 악이 지식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는 율법의 기준으로 예수를 핍박한 것이다. 희랍인들은 자기들의 철학적 기준이 있어서 교회를 변질시켰다. 지금 기독교는 희랍화된 기독교이다. 교리, 신학, 제도, 이런 것으로 변질시켰다. 자기들이 기준이 거기에 있으니까.
한국인들은 어떤가? 한국인들은 두 가지 기준이 있다. 이 두 가지 기준으로 그리스도를 변질시키고 있다. 하나는 무엇인가?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이 샤머니즘이다. 무속신앙이 있다. 불교 때도 그랬고 그 전에도 그랬다. 이것이 우리 민족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자극하면 기복신앙이 되고 내세신앙이 된다. 지금 한국 기독교의 전반적인 사상 가운데 그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기복신앙과 내세신앙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원리주의다. 이것은 율법주의와 결합하여 근본주의, 자유주의가 된다. 보수주의라는 것은 근본주의를 말한다. 이것은 퇴계 선생님이 영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원리주의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졌으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된다. 이것은 예수님만 할 수 있는 말인데 퇴계 선생님 계열이 다 그 계열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이 원리를 가지고 보니까 세상이 바로 보이겠는가? 다 잘못됐다. 윗물은 맑았는데 밑에 물은 구정물인 것을 볼 수가 없다. 윗물이 맑았으면 당연히 밑에 물도 맑아야 된다. 그러니까 이조 500년 동안 맨날 싸웠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이단으로 몰렸는가? 윗물은 맑을지라도 밑에 와서 흐려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다 이단으로 몰렸다. 왜냐하면 하늘의 원리라도 사람에게 와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 왜 이단으로 몰렸는가? 그러면 임금도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임금도 내몰 수가 있다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 이단으로 몰아갔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율곡선생이다.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퇴계선생을 선택해야 된다. 윗물은 맑으니까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왕은 절대로 손대면 안 된다. 왕을 손대는 것은 하늘을 손대는 것이다. 애기라고 임금을 세워놓아야 된다. 왜냐하면 왕의 아들이니까. 김정은도 그런 사람이다. 그런 식이니까 애기를 임금을 세워놓으니 나라가 되겠는가? 그래서 결국 망했다.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이상주의다. 현실주의를 부르짖었던 사람들은 다 이단으로 몰렸다. 다산 정약용도 이단으로 몰렸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 두 가지가 사상의 핵심이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는 이 두 가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어떤 데를 가면 지독하게 근본주의적이고, 어떤 데를 가면 지독하게 자유주의적이다. 어떤 데를 가면 아주 기복신앙적이다. 믿는 사람을 만나보면 맨날 그 소리다. 중보기도를 한다느니 요즘 별 것이 다 나오니까 어떤 사람을 위해 여러 사람이 기도를 해준다고 한다. 그것이 끝까지 간다고 한다. 그런 것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종교화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와해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권은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다. 그 선택은 아주 복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믿어야, 그것을 믿으면 하나님은 선택에 따른 경륜을 행하신다. 나를 하나님께서 선택했으면, 내가 그것을 믿는 한,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택의 경륜을 나를 통해서 진행할 것이다. 나를 택해놓고 괜히 택해 놓고 있겠는가? 나를 택했으면 어디에 쓸려고 택하지 않았겠는가? 내가 택함 받았으면 하나님의 용도에 맞도록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다. 요셉을 택했기 때문에 야곱을 택했기 때문에, 야곱도 보통 사람이 아니지만 그 사람을 잘 다루어서 마침내 바로를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경륜이다. 야곱을 선택하신 분의 경륜이다. 야곱은 그냥 놔두었으면 자기 멋대로 살았을 사람이다. 그리고 부자가 되었을지 망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가나안 땅에 와서 흉년이 드니까 다 애굽 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설사 많은 것을 가지고 왔다고 하더라도 가나안 땅에 왔을 때는 다 망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람되게 만들어서 바로 앞에 세울 수 있게끔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애굽을 통치하는 사람이 되게 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후회함이 없다. 어떤 때 후회하시겠는가?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선택을 불신하고 그것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이 후회하실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내가 저 놈을 잘못 선택했구나. 그러면 우리가 곤란하다. 하나님이 나를 볼 때 내가 괜히 선택했다고 하면 참 불행한 일이니까 그런 소리는 전혀 듣지 않도록 해야 된다. 볼수록 내가 선택하기를 잘했어, 생각해보고 생각할수록 그 선택이 정말 잘한 거야. 이것이 축복이다. 내가 어쩌다 저 놈을 선택하여 고생을 하는가하면 안 된다.
주님의 주권적인 선택은 우리의 축복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우리 세계의 영역 외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그 세계에서 선택하여 주시고 선택의 경륜을 우리를 통해서 진행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당신의 선택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상관없이 당신이 하고자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