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재 골짜기에 담겨진 영성(6):영성과 신학 담론
신학이나 어떤 학문적 배경 없이도 영성은 가능하다. 그 예는 기독교 역사를 통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영성가하면 쉽게 떠올려지는 프란체스코나 마담 기욤, 테레사 같은 이를 어느 누구도 신학
자로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성은 오랜 세월동안 신학과 만나왔으며 오늘의 영성신학
이라는 분야를 이루었다. 가락재가 특별히 영성신학을 연구하는 곳으로 뜻을 두지는 않았으나 그동
안 친분 있는 신학자들이 모여 일 년에 한번 신학 심포지움을 열었고 함께 참여한 이들과 다양한 주제
로 토론을 벌였다. 지난 10년 동안 <가락재 심포지움>의 신학 이야기들은 대략 이러했다.
1980년대 프랑스에 온 한국 개신교의 신학도들은 스트라스부르를 중심으로 파리와 몽뻴리에 그리고
엑성 프로방스 등지에서 수학하였다. 개신교가 비교적 활발한 독일이나 스위스에 비해 아주 적은
숫자의 프랑스이기 하지만, 알자스 지역의 도청 소재지인 스트라스부르는 16세기 유럽의 교회 개혁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그 지역적 특성 때문으로 개혁의 중심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곤 하였다. 그 지역
의 개혁자인 뷔쎄르(Bucer, 부쩌로도 알려진)는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개혁의 실패로 곤경에 놓여
있던 깔뱅(Calvin)을 불러 함께 개혁교회를 세우고 신학교에서 개혁신학을 가르쳤다. 또한 유럽의
여러 개혁자들은 주로 이곳 스트라스부르에서 회의를 하곤 하였다. 또한 이곳은 개혁의 좌파인
재침례파들의 회동처소이기도 하였다. 깔뱅은 여기에 머무르는 동안 결혼도 하였는데 그의 아내
뷰렌(Buren)은 본래 재침례파 출신이었다.
프랑스 유학시절부터 세미나를 가져 온 몇몇 신학도들은 유학을 마치고 하나 둘 귀국하면서 다시
모국에서 만날 수 있었고 2-30명이 함께 먹고 잘만한 몇 개의 방과 세미나실을 갖춘 <가락재>는
만만한 모임장소가 되었다. 한 달에 한번 개인적 친분으로 만났던 우리는 작은 학회를 구성하게
되었고 이를 일반에게 공개하자는 취지에서 심포지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처음 작은 동심원을
이룬 이들의 성향 그대로 모임은 보수와 진보, 정통과 자유를 막론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한껏
터놓고 이야기함으로써 이해와 소통을 꾀 하였다. 한국에서 신학이라는 이름 아래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루터와 깔뱅의 개혁신학을 필두로 한 현대의 주요 신학사상을 기본
으로 하고 인문 사회학, 생태학, 문명 비판, 예술론, 동양학, 한국학을 넘나들며 크고 작은 담론에
빠져들곤 하였다. 그러나 역시 우리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한국의 교회 현실과 신학 풍토였다.
때로는 안타까워하며 때로는 분개하기도 하며 때로는 깊은 공감으로 희열을 느끼기도 하면서
모임을 이어갔다.
모임을 주최한 우리는 한 세기를 마감하며 새로운 21 세기를 맞이하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인식을
함께 하고자 하였다. 무엇보다 문명 전환의 시대적 화두를 떠 올리며 새 천년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에 주목했다. 현대 문명의 문제점을 기독교 복음 입장에서 예리하게 비판한 프랑스의 평신도
신학자인 쟈크 엘륄(Jacques Ellul)의 글에 공감 하며 발제하고 논찬하고 토론을 벌였다. 현대 문명에
안주하며 세를 불려온 현실 교회의 기존 패러다임으로는 미래의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없다는 점에서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일에 열기가 뜨거웠다. 한국교회는 과연 무엇을 믿고 있는가? 하나님인가
바알인가? 하나님의 나라인가 물질적 풍요인가? 기독교가 현세적 성공을 지향케 하고, 이를 이루게 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믿음의 변질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대안이 요구되었다.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자 하였고 그 영원한 생명과 새 천년이라는 동
시대의 모든 생명체가 더불어 누려야 할 생명과의 상관관계를 이야기 해 보았다. 신학은 본래 인문
사회학적 소양의 뒷받침과 함께 형성되어 왔다. 그런 점에서 신학의 영원한 주제는 인간으로 초점
맞추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람을 재차 묻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동체
그리고 뒤 따르는 문화를 쟁점으로 다루었다. 이따금씩 영성이 자연스레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영적
존재인 인간이 비본질적 요소들에 의해 휘둘리고 물량적 확장이 성령의 역사로 포장되는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진정한 영적 각성이 요구되었다. 영성이 영적 삶을 지향하는 것이며 영성 수련이
영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일이라면, 이러한 실천의 장으로서 교회가 거듭나지 않으면 기독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인식을 함께하였다.
현대문명의 위기, 자본주의의 위기와 함께 기독교의 위기를 절감하는 영적 민감성만이 교회를
살리고 기독교를 제 자리에 돌아오게 할 것임이 분명해졌다. 구원의 종교이며 해방의 종교이며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는 더 이상 남을 구원한다 하지 말고 저 자신부터 구원시키는 일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선교나 전도에 대한 그 어떤 아름다운 명분도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덩치를 부풀리기
위한 전략으로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수가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초의
제자단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선교적 삶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씨 뿌린 노동의 대가를 그들 자신들의 것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씨를 뿌렸을
따름이고 추수의 열매는 고스란히 타인에게로 넘겼다는 점이다. 노동은 내가 소출은 남이, 고생은
내가 복은 남이, 손해는 자신이 이익은 이웃이, 희생은 우리가 덤은 주위 사람들이... 저들은 어찌
그리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해서 저런 삶이 가능한가? 박해 가운데서도 용서를 빌며 평화롭게 죽어
가는 저런 삶을 가능케 하는 믿음,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을 새롭게 보고 다시 보고 그분 앞에 경건히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초대 교회의 선교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있는 상태에서 자신을 배반한 이, 심문하고 채찍질하고 창으로 찌르고
대못질을 한 이, 조롱하고 피신하고 숨어있는 이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누가 23:34) 예루살렘
교회의 집사 스데반은 격분하여 자기에게 달려들어 큰 소리를 지르며 돌로 치는 군중을 위해 무릎을
꿇고서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복음의 힘, 사랑의
힘은 이런 것이리라. 원시 교회는 이러한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고 실제로 나눈 영성 공동체였다.
사실 어려운 일이다. 타인의 희생을 담보로 나의 삶이, 타인의 불행을 담보로 나의 행복이 그리고
타인의 실패를 담보로 나의 성공이 유지되는, 전 세계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무한 경쟁시대에
이 같은 용서와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이 세상
어디엔가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예수는 오늘도 존재한다. 그를 따르는 예수의 제자단은
현존한다. 예수 공동체는 소멸되지 않고 살아 있다. 혹한의 겨울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작고
연한 꽃망울을 키워가며 “영성이면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새까맣게 덧칠한 캔버스 한
구석에서 시작되는 빛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키워간 17세기 네델란드의 화가 렘브란트처럼 어둔 밤
절망의 한 가운데서 무지개 빛으로 영성적 공동체를 그려가는 사람들도 있다.
<영성>은 신학으로 해결되지 않는 삶의 문제며 사람의 문제다. 그러나 진정한 삶의 영성, 사람의
영성을 위해서는 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신앙의 방향성을 잡아주도록 돕는 것이 신학이라면
신앙과 신학의 이율 배반성(antinomity)을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 영성이다. 다시 말해서 영성은
신앙과 신학 사이에 존재한다. 신학 없는 신앙, 신앙 없는 신학의 양면 부재현상이 오늘의 교회와
신학 교육 아닌가? 그래서 영성은 제 3의 길이며 대안이며 새로움을 추구하는 길이다. 길이 없으면
새로 길을 닦자는 이야기다. 누군가 ‘21세기는 영성의 시대’가 된다고 하더니 그야말로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모아 영성을 말하게 되었다. 별 다른 생각 없이, 별 다른 반성 없이 어제까지의 구태의연한
행태를 반복하기 위한 허울 씌우기라면 정말 부끄러운 일일뿐이다.
<가락재>의 재는 순 우리말의 ‘재’ 곧 언덕 위로 난 길을 뜻한다. 한때는 꽤 많은 사람들이 오고
다니던 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댐이 생기고 물이 차오르면서 언덕너머의 마을이 수몰지역이 되어
사라져버리자 덩달아 죽은 길이 되고 말았다. 죽은 길 그 옆으로 집을 짓고 살게 되면서 재는 집을
뜻하는 재(齋)로 바뀌었다. 길이 집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니 그 집은 길 닦는 집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길 같은 집 또는 집 같은 길! 길집 집길, 이것이 가락재의 사명이며 정체성이기도 하다.
가락재 골짜기에서 심포지움을 열고 떠들어댔던 신학 담론이 <길>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 그저
우연만은 아니리라. 그것은 결국 한국 교회가 가야할 길, 한국 기독교인이 걸어야 할 길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열한 번의 모임을 가지면서 <가락재 심포지움>에 참석한 이들을 떠올려 본다. 여러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던 이들, 강단에서 가르치던 이들 그리고 일반 학문과 정신 또 삶의
분야에서 큰 깨우침을 주고가신 강사들의 얼굴도 떠올려 본다. 우리는 한 자리에 모여 교회를
걱정하고 사회를 안타까워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 했다. 신학도에게는 신학적 통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주신 강사에게는 동질감의 격려가 되었으면 한다. 내게는
이 골짜기에서 말의 잔치가 베풀어진 것 생각만 해도 어느새 마음이 한가득 뿌듯해진다. 이 모임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는지 잘 알 수 없지만 “형제가 연합하며 동거함”(시편 133:1)의 기쁨과
아름다움은 지속되리라. 가락재의 영성은 이런 신학적 논쟁의 뜨거움으로 더욱 알차게 영글어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