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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시제 참여기 정봉채 記 하동시제(경남 하동군 적량면 동리 하곡): 하동정씨 발상지를 우리는 10만분의 1 지도에서 경남 하동군 적량면 동리 하곡(새비골=새우의 사투리)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하동에서 동북쪽으로 5㎞쯤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이다. 하동은 하도 멀어 행사 하루 전 음력 9월 말일에 서울서 출발하여 하동 시내에서 자고 아침에 시제를 지내왔다. 올해도 하루 전에 내려가니 진사공파(5세 밀직공 國龍의 弟 進士公 國橋-高麗 國子監)에서 초대하여 진주시 교외에 있는 진사공 선세묘에서 성묘제를 지내고 사당인 도봉재를 참배하였으며, 붕어탕 식사 대접을 받았다. 다시 사천시로 가서 선진공원과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 묘역 내에 있는 사천현감 충장공 득열의 순국비(사천시에서 세움) 앞에서 머리 숙여 참배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장렬히 전사하였으며 묘는 부여 능산리에 있다. 하동은 조용한 읍이다. 읍내에 있는 모텔에서 숙박을 하고 아침은 섬진강 특식인 재첩국과 삶은 낙지를 먹었다. 행사가 10시 반에 시작한다 하여 늦게 출발하였는데도 다른 파들이 도착하지 않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조 평장사공 휘 도정과 그 이하 4세까지는 묘소가 없어 단비를 세우고 그 앞에 상동을 놓아 제를 지내게 되어 있으며 단비는 가운데가 도정공, 좌측 1번이 석숭祖, 우측 1번이 탁신祖, 좌측 2번 의균祖, 우측 2번 연서祖 순으로 세워져 있다. 5세 밀직공 국룡과 6세 문충공 지연, 6세 좌윤공 난연의 묘소는 뒷산 약 500m 중턱에 있는데 행사 전에 급히 올라가 성묘를 하였다. 문성공 인지께서 삼도순찰사로 하동에 갔을 때 위 묘들을 찾아보고 객관 현판에 5대조 국룡과 고조부 지연의 역사를 적어 놓아 기록이 전해졌다. 묘는 묘단을 여러 겹의 석축(石築)으로 쌓아 전형적 고려 중엽 형태다. 이것 때문에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비는 글자를 알아 볼 수 있어 조선시대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 당시도 풍수가 유행 했던지 좌청룡 우백호가 완연하고 임산배수, 후고전착이다. 다시 그 도선산에는 담장을 쌓았고 그 안에 윗부분에 단비 5組가 있고 그 밑에 하곡재(鰕谷齋), 그 아래 취정재(聚精齋)를 지어 신주를 모시고 있었으며 재실 위쪽 멀리에 저수지를 축조하고 그 저수지의 물은 충분하여 언제든 그 아래에 있는 논에 댈 수 있어 시제 비용을 넉넉히 충당할 수 있다. 음력 10월1일(양력 11월2일 수요일) 오전 10시 반경 하동 도선산 취정재 앞에는 대형 버스가 7대, 서울이 2대, 대전 1대, 충청도 1대, 경상도 1대, 전라도 2대와 자가용이 20대쯤이 정차하였다. 종중원은 근 300여명이 모이니 우리 하동정씨가 조선의 명문대가임을 실감한다. 한편 사람이 많으니 선거철의 정치집회와 같이 떠들썩하였다. 하동의 시제 순은 시조 도정공을 먼저 지내고 1세 이하 6세 까지는 8개 파가 각 파별로 7분을 맡아 돌아가며 모시는데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의 제관들을 미리 정하여 홀기자가 중앙에서 마이크로 명하면 강신 참신 초헌 독축 등을 일제히 행하였다. 시조 도정공의 제사상에는 제물이 풍성하였는데 돼지 머리를 통째로 놓았으며 생선도 큰 것 작은 것 여러 마리였고 상 옆에도 올리지 않은 생선과 떡이 있어 물어보니 제사 지내면서 다시 올린다 한다. 나는 처음 보는 행사라 신기 하였다. 각파란 산원공, 문성공, 현감공, 소윤공, 문헌공, 장령공, 경렬공, 병사공, 진사공파를 말한다. 하동 정씨의 별파 예부공파와 정승공파는 참석치 않았으며 전에 있었던 단비도 캐갔다 한다. 중앙에서는 하동정씨 3파를 합치려 하지만 지방의 향로들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음식은 각 파별로 김밥을 준비하였으며, 막걸리와 돼지고기는 충분하였고 행사 전과 후 아무 때나 먹을 수 있게 입구에 마련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춘향의 고장, 남원을 들리어 문성공이 그 이름을 지었다는 광한루을 구경하고 오니 그 것 또한 의의 있는 일이었다. 남원은 추어탕으로 유명하다. 급히 추어튀김 한 접시와 막걸리를 한 대접 들이 키고 차에 올랐다. 남양주시제(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배양리): 6세 문충공 지연은 아들 두분을 두었으니 첫째가 병판공(兵判公) 익(翊)이고, 둘째는 부사공 유(宥)로 그 자손은 장령공파(希周)와 문헌공파(汝昌)를 이룬다. 병판공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가 을부(乙富)로 산원공파를, 둘째가 찬성공(贊成公) 을귀(乙貴)며 셋째가 을진(乙珍)으로 소윤공파를 형성한다. 따라서 남양주의 병판공 시제에는 종손의 산원공파, 우리의 찬성공파, 소윤공파가 참석한다. 병판공 묘소는 사능 뒤편에 깊숙이 있고 평범하다. 찬성공 묘소는 사능에서 남서쪽 배양리에 있는데 오히려 부친인 병판공 묘보다는 앞이 트이어 좋아 보인다. 두 묘의 거리는 족히 심리는 되어 예전에는 하루에 양쪽을 지낼 수는 없었으나 지금은 차가 있어 하루에도 지낼 수 있다. 찬성공 을귀의 시제에는 우리 문성공파와 몇 안되는 흥도(하성부원군 흥인의 동생)의 손, 현감공파와 한림공파가 참석하였다. 15세기 당시는 양반들은 할 일이 없어 거리가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요즈음은 자손들의 입장에서는 모실 산소도 많고 농본사회가 아닌 산업사회에서 살아감으로 산소들이 먼 경우에는 시간을 낼 여유가 없어 시제를 지내기가 무척 어렵다. 이번에 참석한 인원은 대략 병판공은 100여명, 찬성공은 70여명이었다. 재실이 없어 산소에서 지내니 실감이 있었으며 홀기자의 복잡한 명령어가 없어 좋았다. 남양주에는 그 두 분 말고 문성공 첫째 배위인 정경부인 한양 조씨가 진관리에, 문성공의 5자 찬성공 상조(尙祖)의 2남 효간공(孝簡公) 세호(世虎)의 묘가 배양리에 있다. 효간공은 조선 14대 왕 선조의 외조부다. 그 딸 하동부대부인 정씨(조선시대에는 여자가 출가를 하면 성만 있고 이름은 없음)가 조선 11대왕 중종의 후군 출신의 아홉째 왕자인 덕흥대원군(王后의 아들은 大君, 딸은 公主, 嬪의 아들은 君, 딸은 翁主며 왕이 아닌 王父는 大院君, 그 부인인 府大夫人임)에게 시집가 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셋째가 선조대왕이다. 왕의 외가임으로 남겨준 토지도 많았으나 손들이 다 없애 문제가 되고 있다. 참고로 선조가 왕이 된 이야기를 좀 하자. 중종은 정실을 둘 두었는데 장경왕후에서 인종을, 또 다른 의미로 그 유명한 문정왕후 윤씨(을사사화의 윤원형의 친누나)에게서 명종을 낳았으나, 후사가 없자, 명종의 비 인순왕후는 명종이 죽자 그가 좋아하던 후궁 출신 하성군(후의 선조, 중종의 아홉째 아들인 德興君의 셋째 아들)을 양자로 삼아(이 때 이미 덕흥군은 죽고 없었음) 왕이 되게 하였다. 그래서 선조는 왕이 된 후로는 외척을 멀리하고 신권 정치로 기강을 바로 세우고 정치를 잘하였다. 붕당도 토론의 장을 연 것으로 평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선조의 잘못된 처신은 조선 국력의 한계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다시 이곳 남양주는 묘지기가 없고 제사준비할 곳이 마땅치 않아 파주 밥재(판서동) 문중(감찰공의 孫 起門이 坡州 食峴里에 정착, 후손이 벼슬을 많이 했음)에서 올해도 제사준비를 했지만 나중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밥재파에서 또 재실을 주관해서 건축해 준다하니 기대가 된다. 남양주, 부여, 괴산, 시흥의 땅들은 문성공이나 그 직계손이 얻은 것으로 문성공파 종손들이 관리 하였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가 되자. 토지소유의 증명이 등기문서로 되니 분쟁이 일어나, 명의가 종손이냐 일가 어른이냐를 두고 다툼이 시작되었다. 어느 집안이나 마찬가지로 우리집안도 종손들과 일부 명의자들이 나쁜 마음을 먹고 종토를 처분하여 현재 분쟁중인 것들이 남양주, 부여, 괴산, 시흥에 있다. 우리 죽산파의 문제와 꼭 같다. 이성을 찾아야겠다. 부여시제(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하성부원군 흥인祖의 묘소가 있다. 이 분 까지가 고려조 인물이다. 아들 문성공의 빛이 가려 있지만 벼슬로 현감과 병마단련판관을 하였다. 부여 능산리는 백제 때의 왕들의 고총이 많이 있어 동네이름을 그렇게 지었듯이 북쪽은 산이고 남쪽은 넓은 뜰과 멀리 낮은 산이 있어 풍수지리상으로는 곳곳이 명당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시제를 잡수시는 우리 조상들의 산소들 중에서 제일 좋다. 산소에 오르면 우선 아늑하며 기분이 상쾌하다. 그래서인지 부여에는 참판공파, 찬성공파, 그리고 별제공파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고 묘도 많다. 특히 참판공파의 15세 충장공(忠壯公) 득열(得說)의 묘는 하성부원군 묘 바로 아래에 있다. 그는 경남 사천현감 시절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친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장렬히 전사하니 나이가 28세였으며 그 대 그의 몸종이 수급을 지게에 지고 천리 길을 걸어 부여에 왔다한다. 그는 선모공신에 올랐으며 토지를 하사받아 그 사손이 많이 늘었다. 충장공의 묘소 바로 밑에 작은 산소가 하나 있는데 이것이 우리 집안에서 만들어 주고 지금까지 돌보는 그 몸종의 산소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시대의 모범적인 가신관계를 볼 수 있다. 또 충장공(忠臣), 그 아들 충결공(忠潔公) 택뢰(澤雷, 忠臣), 며느리 동래정씨(烈女), 손자 천세(千世, 孝子)를 위한 정문(旌門=충신 효자 열녀 등을 나라에서 표창하여 세우는 붉은 문)이 부소산 입구에 있다. 부여에는 다른 곳과 달리 사당(三君祠) 재실(崇訓閣)이 따로 있다. 사당에서 신주를 모셔와 재실에서 제를 지낸다. 참석 인원은 대략 160여명쯤이다. 재실에서 하성부원군제를 먼저 지내고 다른 파 자손들이 성묘를 하는 동안 참판공파 손들만 15세 충장공과 16세 충결공제를 지낸다. 그 사당을 삼군사라 하는바 원래는 하동부원군(문성공) 인지祖와 하남군(장정공) 숭조를 모신 사당이었는데 후에 하성부원군 흥인祖를 추가하여 삼대 삼군(三君)을 모시었다 하여 이름이 부쳐진 것이며 이 사당은 불천지위(不遷之位祠堂=옮기지 않고 영원히 모실 수 있는 신위 사당)다. 그 곳 앞에는 물이 늘 흐르는 개울이 있는데 뱀이 개구리를 쫒는다는 蛇追蛙之形이라는바 그 개구리가 쉬는 못이 허물어져서 장손이 일찍 죽는다는 속설이 있어 이번에 각파에서 돈을 추렴하여 다시 개축하고 이름을 와영지(蛙泳池)라 하였다. 못에 큰 기념비가 두 개가 있다. 부여는 관광지라 우리 자손은 기회가 닿으면 반드시 들려 볼 곳이다. 제삿밥과 삶은 돼지고기를 먹는데 젓갈이 맛있어 물어보니 강경 젓갈이라 한다. 돌아오는 길에 강경 젓갈 시장에 들리니 여자들은 좋아라 한다. 아마 밥재 문중에서는 미리 알려준 일인지 여자들이 많이 참석하였고 마침 김장철이라 한 두통씩은 너도 나도 샀다. 괴산시제(충북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 반능): 충북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 밭능 또는 반릉은 우리 중시조 문성공 인지祖가 모셔진 묘이다. 불정면은 중부 내륙 고속국도의 충주IC와 연결되어 있어 전보다는 훨씬 접근하기가 쉽다. 반릉은 묘가 왕릉과 비슷한 모양으로 조성되어 있다 하여 부쳐진 이름이다. 괴산 묘역은 충북 지방 문화재 33호로 지정되어 문성전(文成殿), 담장, 화장실, 진입도로 등을 문화재 시설답게 개축하는데 충청북도와 괴산군에서 도 군 문화예산으로 보조해 준다하니 고마운 일이다. 문성전 안에는 영정과 친 필 글씨가 있고 제사 시설물이 있다. 이 또한 부조묘(不祧廟=신위를 옮기지 않는 사당)다. 밖에는 안내문과 신도비가 새로 세워져 관람객들은 역사를 쉽게 알 수 있다. 신도비는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의 관리만이 세울 수 있었다. 서거정이 쓴 이 신도비에는 공의 집안 내력과 행적이 적혀있다. 우뚝 솟은, 나무 없이 잔디가 깔린 언덕에 커다란 공의 묘가 있고 그 뒤에 정경부인 경주이씨 묘가 있으며 비 앞에 혼유석(魂遊石, 하늘의 혼과 땅의 백이 합치는 돌)과 장명등, 그 좌우에 문인석과 망주석(망두석)이 있다. 작년(2004)에 어떤 못된 사람이 장명등의 윗부분을 무슨 가치가 있다고 떼어가서 새로 만들어 놓으니 기둥만 있는 옛날 등과 하얀 화강암 새 등이 나란히 있어 모양이 어울리지 않는다. 묘에서 앞을 보면 평지가 있고 물도 흐르나 안산이 너무 높고 가까이에 있어 답답함을 느낀다. 말로는 앞에 있는 고양이 바위(猫岩)가 곳간의 곡식을 먹는 쥐를 놀리는 상이라 자손에 그보다 큰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한다. 시제 참석자는 남양, 부여 보다 더 많아 170여명 되었다. 29세 종손인 수용(일명 연승)대신 그 어미가 참석하여 인사말을 통해 종토와 종사협조에 대하여 5년만 참으라 하니 그 동안 무슨 술책을 꾸밀 것인지 참석자들은 그를 좋지 않게 평가 한다. 하동 시제에 버금가게 상 올림도 추가로 하고 형식도 많았다. 반능 마을에는 대사헌공파와 별제공파 일가들이 몇 가구 살고 있어 상차림과 손님대접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내년에 문화재 시설이 완공되면 관광객이 모일 터이고 우리 일가의 자랑이 될 것이다. 괴산 문성전과 묘역 정비 사업에 감찰공파 밥재 종친회, 장정공종회, 별제공진천종회, 남양종회, 대사헌공파 종회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시흥시제(경기 시흥시 광석동 수리골): 시흥의 취곡(鷲谷=수리골)이 소한 수암면은 조선시대에는 안산군(安山郡)에 속하였음으로 우리 집안에서는 보통 안산이라고 하나 지금의 안산시가 아니라 시흥시에 있다. 안산은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고 나뉘어졌으며 취곡의 현재 지명은 경기 시흥시 광석동이다. 묘의 산 앞에 물이 흐르고 얕은 안산(案山)이 포근함을 주어(案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참고로 뒷산은 주산(主山), 멀리 있는 앞산은 조산(朝山)이라 한다. 시흥시청, 옆 연성취수장에서 1㎞ 동쪽에 위치해 있다. 넓은 터에 재실, 삼성재(三省齋)와 신도비(대제학 김안국이 씀), 묘지기 옆 산등성이에 묘가 있다. 여기 신도비는 같은 크기, 같은 내용의 것이 두 개가 년대를 달리하여 새로 세워져 있고 세운 사람의 이름이 달라 집안간의 다툼에서 각각 세운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간다. 조선 11대왕 중종이 셋째인 장정공(숭조)을 문성공 인지祖의 종손으로 명하자 다른 형제들, 첫째 익위공(광조)은 전남 해남읍, 둘째 하성위(현조)는 화성, 넷째 대사헌(경조)은 남양주 별내, 다섯째 찬성공(상조)은 남양주 퇴계원에 묘를 잡았다. 당시 우리 가문은 소위 권문세척으로 하성위는 세조의 외동딸인 의숙공주를 배로 맞았고 대사헌공은 세종의 손녀(世宗의 王子 桂陽君의 女)를 배로 맞이하였다. 찬성공의 아들이 위 남양주의 효간공(선조의 외조부)이다. 장정공과 아들들은 시흥 광석동에 있다. 당시는 연산, 중종 때이므로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사망한 분이 있음으로 그 분들은 신위로만 모신다. 특히 이북에 유배된 분은 찾기가 힘들다. 장정공의 손자들도 이곳 광석동에 있는 분이 있으나 많은 분이 뿔뿔이 일가를 이루어 벼슬한 곳으로 흩어져 있다. 시흥 시제는 장정공을 먼저 지내고 상을 다시 차리어 아들들 별제공, 참판공, 감찰공, 진사공, 참의공의 제사를 함께 지낸다. 그 후손들 12분은 상을 이어받아 잔만 올린다. 이제야 나에게도 차례가 와서 종헌관으로 잔을 올리었다. 여기서도 어려운 홀기를 함으로 3차부터는 쉬운 말로 하자고 하여 명사는 한자로, 동사는 한글로 하였다. 재물은 재실 옆에 있는 묘지기 집에서 준비를 한다. 이곳 위토는 꽤 넓었으나 해방 전에 명의자 5명중 3명이 각 지분을 팔아 2/5만 남았었는데 그 일부 땅(3만여평)을 재판비용과 일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참판공파 28세손 형묵에게 팔았던바 그는 그럴 수 없다하여 그 땅을 종중에 기증하니 집안에서는 그의 공덕비를 세우고 이를 기록하였다. 현재의 남은 땅도 종중 명의가 네 사람으로 되어 있어 종중회 재산으로 환수하려 송사 중에 있다. 여기서도 말을 듣지 않는 종손과의 마찰이 있다. 묘는 큰 산소라 하여 장정공이 있고 그 위에 배 정경부인 평양조씨 묘가 있다. 별제공은 우측 옆 산등성이에 있고 감찰공과 참판공은 좌측 옆 산등성이에 그 밖의 자손들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산은 감찰공파 자손(25세 숙현)들이 최근까지 관리를 잘 하여 보존 상태가 좋다. 그래서 그런지 감찰공파 후대 자손들의 산소가 많이 있다. 족보에서 보면 우리의 직계 조상뿐 아니라 방계 조상도 있음으로 특별히 연구하여 그들을 찾아야 할 것이다. 2006년에 우리 목천공 할아버지도 영덕리가 개발되어 토공에 수용되니 이곳으로 이장할 예정이다. 진천시제(충북 진천군 덕산면 석장리 대화부락): 진천은 원래 여절교위 응규와 그 아들 부사과 이순의 묘가 상하리에 있어 우리가 시제를 담당하고 날짜는 잔다리(영덕리) 목천공의 시제 10월15일 다음날 16일로 잡았었다. 왜냐하면 잔다리를 끝내고 진천 갔다 다시 잔다리 옆인 고인돌로 오자니 힘들어 잔다리에서 자거나 고인들에서 자고 시제를 지내려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 죽산파의 이강이후 조상들의 시제는 10월2일로 정하여 지내오고 있었다. 그러자 세월이 흘러 진천파에서는 그것도 번잡하게 여겼고 여절교위의 부사과를 진천으로 옮기고 보니 고인돌을 찾을 필요가 없어 진천 시제일을 11월 첫 일요일로 잡으니 우리도 첫 주를 포기하고 둘째 일요일로 잡았다. 사실 음력 10월 하순은 추워 시제 지내기기 쉽지 않다. 진천 종친회는 고인돌 땅을 팔고 진천 석장리에 큰 재실(崇慕堂)을 마련하였다. 재실에는 2005년 이장한 통덕랑 호 할아버지도 모시었다. 인지 할아버지의 영정과 글씨, 산소 사진을 비치하고 위패 50위를 봉안하고 있다. 진천은 자손이 많아 종원이 남자만 근 300여명이나 된다. 재실을 짓고 두 번째라 하니 아직 행사가 서툴고 한번에 조상 10분씩을 모시어 다섯 번 씩이나 제사를 지내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직계 조상만 제를 지내고 가버리는 네 번째부터는 몇 사람 안 남고 행사도 약식으로 하니 고칠 점이 많다고 인정하였다. 제사를 두 번으로 줄이면 자손들이 다 참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시골 사람들이라 그런지 우리보다는 시제 행사를 잘 알았다. 메와 갱, 포만 새것으로 갈고 다른 제물은 내려 썼다. 돈 많은 것이 눈에 띄었다. 진천종친회에서 죽산파 재실 건축비용을 준다하니 기대는 하나 영덕리 택지개발 시 보상금 분배회의에 참여치 못하고 실기한 것이 후회된다. 제를 끝내고 음성군 맹동면 봉현 사거리 근처 새로 마련한 여절교위(응규)와 부사과(이순) 묘를 성묘하였다. 넓은 들판 얕은 야산에 넓게 자리를 잡으니 시원하고 깨끗하다. 문제는 통덕랑 호의 묘다. 충북 충주시 산척면 양서리 높은 산중에 이장하니 산소를 잡은 몇몇은 좋다고 하나 종중의 여론을 수렴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아 말들이 많다. 상하리와 영덕리의 뒤처리가 깨끗하지 않으니 일가 간에 앙금이 남아 있고 소송까지 끝나지 않았다니 우리 처지와 같아 동병상련이다. 끝맺음 : 이번에 문중 시제를 참석하면서 하동 정문(정씨 문중)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긍지를 갖고 조상의 명예와 위업을 자손에 이어줄 책임을 느꼈다. 가문의 역사는 보통 족보와 비문에 쓰여 있다. 대개는 조상의 공을 과찬하여 기록하였으나 혹 방계 조상들의 과실이 쓰여 있는 것을 보면 그 엄한 평가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조상이 훌륭하면 자손이 잘되고 또 잘난 자손은 조상을 잘 모시는 것이 눈에 띤다. 또 현장에 가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각 묘소의 특징이 보이고 묘소와 재실의 현재의 꾸밈에 누가 얼마를 기부하였는가가 기록되어 이름을 남기고 참가자는 이를 알고 감사하였으며 기증자나 그 자손은 이를 명예롭게 여겼다. 일반적으로는 묘지기와 위토, 재실과 사당과 묘, 종손과 시제행사 주관자, 참석자의 이동수단, 상차림, 행사의 매끄러움 등이 종합적으로 평가되니 우리 죽산파 일가의 앞날 종사 결정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각오를 갖고 이를 위해 함께 노력해야겠다. 2005년 11월 22일 정 봉 채(문성공 후 별제공파 죽산문중 회장 : 서울대학교 졸업, 서울시 중등학교교장 역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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