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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의 역사
18세기 영국에서 발생한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로 창시자는 웨슬리(John Wesley)다. 영국교회의 사제였던 그는 죽을 때까지 국교회와 분리하여 새로운 교회를 창설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기 믿는 복음을 설교하는 데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의 설교에 대한 국교회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에 ‘순회전도’를 시작하였다.
순회전도 중 웨슬리는 기도서 없이 필요에 따리 기도를 하고 그의 동생(Charles Wesley)이 작곡한 찬미가로 신앙을 고조시켰다. 막강한 힘을 가진 그의 동료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의 설교는 메도디스트회(Methodist Society)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미국 감리회를 위해 신앙 25개조(25 article of Religion)를 채택한 1744년의 제1연회(年會, annual conference) 이후 웨슬리와 화이트필드는 칼빈의 예정설을 둘러싼 문제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서로 분리되었다. 이후 웨슬리파는 감리교로, 화이드필드파는 칼빈감리교로 각각 발전하였다. 한편 영국교회와의 분리는 웨슬리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인 1795년이 이뤄졌다. 이 때 감리회는 오랫동안 문제가 되어 왔던 목사안수를 연회에서 결정함으로써 완전한 분리가 이뤄졌던 것이다. 미국에 전파된 감리교는 이보다 앞선 1784년에 독립교파를 형성하였다.
그 후 영국의 감리교는 웨슬리 감리회(Wesley Methodist), 원시 감리회(Primitive Methodist), 웨슬리 개혁회(Wesleyan Reform Society), 개혁 감리회(Protestant Methodist), 웨슬리회(Wesley Association), 연합 감리회(United Methodist Free Church)로 나눠지고, 미국의 감리교도 남북전쟁의 영향으로 남북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2차 대전 후부터는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웨슬리의 말에 따라 점차 일치를 이뤄 가고 있다.
한국의 감리교는 가장 오래된 개신교회의 하나이며,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시작된 한국 기독교 2교파(장로교, 감리교)의 하나이다. 한국 감리교 선교의 시작은 한국 개신교의 선교의 시작이다. 즉 1884년 6월에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매클레이(Dr. R.S. Maclay) 박사가 서울에 와서 당시 개화당 지도자인 김옥균(金玉均)을 통하여 고종 황제에게 한국에서의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 개시를 요청하였고 고종은 이 요청을 윤허하였는데 이 날인 1884년 7월 3일이었다.
이 윤허는 처음에는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 국한되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시작된 감리교의 선교는 당시의 민족적인 과제였던 개화의 추진력 역할을 하면서 또 일제시대에는 일제통치에 시달리는 이 민족과 동거동락하면서 이 민족의 가슴에 소망의 복음을 뿌리 깊게 심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간단히 한국 감리교의 성장역사 100년을 대략 다음 4단계로 나누어서 살펴보려고 한다.
△ 섬기면서 선교하던 시대(1884~1905년)
△ 애국하며 선교하던 시대(1905~1920년)
△ 고난의 시대(1920~1960년)
△ 하나되어 선교하는 시대(1960~1920년)
1. 섬기며 선교하던 시대(1884~1905년) : 초기 한국감리교회의 선교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또 생활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선교하던 시대였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매클레이 박사가 고종 황제로부터 정식으로 선교 윤허를 받은 이후부터 미국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 계획과 준비는 급진전을 이루어 드디어 1885년 4월 5일 그해 부활절에 27세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가 장로교의 언더우드(H.G. Underwood) 목사와 같이 제물포 땅을 밟음으로써 본격화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 감리교의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튼(W.B. Scranton)이 서울에 들어와서 지금의 정동(배재중고교 근처)에 자리를 잡고 정동감리교병원을 세워 의료선교를 시작하였다. 즉 1885년 9월 10일부터 새로 세운 이 병원에서 주로 가난한 계층의 환자들을 치료하여 주었다. 정부병원격이었던 제중원(지금의 세브란스병원 전신)에는 주로 정부고관과 그 가족 친척들이 와서 치료를 받았으며, 반면 감리교병원에는 한약을 쓸 경제적 능력이 없는 가난한 계층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의료선교를 통하여 감리교의 복음은 일찍부터 서민 대중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병든 자에게 고침을! 고통받는 자에게 평안을!” 이것이 스크랜튼의 선조였다. 그는 1886년 7월 1일부터 1887년 7월 1일 까지 1년간에 혼자서 무려 2,000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한국인들은 서양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의사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한편 감리교병원보다 한 달 앞서서 감리교 교육선교사로 왔던 아펜젤러가 1885년 8월 3일에 정동의 지금 자리에 배재학당을 세워 한국 근대교육을 창시하였다. 그 때까지의 교육은 주로 서당을 중심으로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강독과 암기에 불과했으나 이때부터 본격적인 인문과학교육이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또 이 교육을 잘 운영하여 나아갔던 것이다.
구한말 정부도 근대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배재학당보다 1년 늦게 세우나 결국 8년만에 문을 닫고 그 학생 200년을 배재학당에 맡겨 위탁교육을 시킬 정도로 배재학당은 구한말의 근대교육을 이끌어 나아갔으며 또한 많은 유능한 민족 지도자들을 길러 냈던 것이다. 특히 배재학당 내 협성회(協成會)라는 최초의 학생단체는 1896년에 조직된 독립협회의 전위대가 될 정도로 이 학교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과 개화에 앞장을 섰던 것이다.
또한 스크랜튼 선교사의 모친인 스크랜튼 대부인(Mrs, Mary F. Scranton)은 1886년 5월 31일에 한 명의 여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침으로써 오늘의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을 창립하였다. 이 이화학당은 초기 한국 여성운동의 요람지요 여권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실제로 여기에서 초창기의 유명한 여성운동가들이 훈련되고 배출되었다. 한국 최초의 의사도 이화 출신인 여의사 박 에스터였다(1900년 미국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 졸업).
감리교의 교육목적은 교회 중심적인 교인 양성에 있기보다는 민족 계몽교육에 치중하였던 것이다. 즉 학생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보다.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교양된 참된 한국인을 만드는 데 있었다. 또 그런 목적을 달성하도록 교육시켰다. 이것이 감리교가 한국의 근세사에 공헌한 점이다. 이렇게 감리교는 이 땅에 교회를 세우기 전에 먼저 이 민족의 과제였던 근대교육과 의료사업을 베풀면서 이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였고, 민중 속 깊숙이 그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1888년 여름에 있었던 영아소동(Baby Riot)을 제외하고는 커다란 핍박 없이 순조롭게 선교사업을 전개해 나아갈 수 있었다.
1895년에는 윤치호(尹致昊)의 노력으로 미국 남감리교회의 선교가 북감리교보다 10년 늦게 시작되어 이 교회는 주로 서울과 개성, 강원도 지역에서 교육 및 의료선교를 펼쳤다. 서울의 배화여고, 개성의 한영서원(뒷날의 송도고보)과 호수돈여고 등이 남감리교가 세운 교육기관이다. 이 두 남북감리교회는 1930년에 기구적으로 한국에서 통합하여 하나의 자치하는 민족교회인 조선 감리교회로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1년에는 한국 기독교회사에서 기념할 만한 일이 있었다. 한국 사람으로 최초의 목사가 탄생한 것이다.
이 해 감리교의 선교연회에서 1889년부터 연회에서 정식으로 전도사 임명을 받고 그 후 12년간 목사후보 훈련을 받은 김창식(金昌植), 김기범(金箕範) 두 사람이 목사안수를 받고 한국인 목사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이후로 감리교회는 그 교세가 급증하여 1901년부터는 전국을 세 지방으로 분할 관장하였고, 1904년에는 조선선교연회(Korea Mission Conference)가 조직되고, 1908년에는 조선연회(Korea Conference)가 조직되어 중국연회와 완전히 분리, 독립되었다. 이 시기의 감리교회는 이 민족을 직접 교육과 의료사업으로 섬기며 선교하여 기초를 내린 시기이다.
2. 애국하며 선교하던 시대(1905~1920년) :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감리교회는 그 교세가 증가되고 그 기구와 활동분야가 확대되고 교회조직과 선교기관도 전국적으로 확대됨으로써 이 교회의 민족에 대한 영향력이 커져 갔다. 특히 서재필(徐載弼)이 조직한 독립협회가 1898년에 해산되면서 독립협회의 간부들과 그 중요 회원들이 대거 기독교에 들어옴에 따라 이때부터는 중요도시에 있는 교회들이 민족운동의 중심이 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서울 남대문에 있는 상동(尙洞)감리교회가 그 대표적 교회가 된다.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이 교회의 담임 목사인 전덕기(全德基)를 중심으로 세칭 상동파(尙洞派)가 조직되고 김구(金九), 이준(李儁), 최재학 등이 상동교회에서 구국기도회 및 을사조약 무효화투쟁을 상동교회에서 구국기도회 및 을사조약 무효화투쟁을 전개하여 하나님 사랑과 민족 사랑을 역설하였다. 이 투쟁 이후로 상동교회에는 이회영(李會榮) · 김구 · 이동녕(李東寧) · 이준 · 이갑(李甲) · 안창호(安昌浩) · 이승훈(李承薰) · 최광옥(崔光玉) · 양기탁(梁起鐸) · 이필주(李弼柱) · 최성모(崔聖模) · 이동휘(李東輝) · 김진호(金鎭浩) 등의 기라성 같은 민족독립 운동가들이 모여 들어 독립운동을 밀의 조직하였고, 1907년에는 상동교회에서 유명한 신민회(新民會)가 조직되어 민족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또한 1907년에는 이준 · 이상설(李相卨) · 전덕기(全德基) 등이 헤이그밀사사건을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계획하고 집행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상동교회는 어두운 시대를 비쳤던 민족운동의 요람지가 되었다. 특히 상동교회 내의 상동청년학원에서의 주시경(周時經) · 최남선(崔南善) · 장도빈(張道斌) 등의 한글운동 국학운동은 특히 유명하다.
이런 감리교회의 민족운동 전통이 1919년에 이르러 3.1운동으로 계승된다. 33인 민족대표 중 16명의 기독교측 대표 가운데 9명[이필주 · 오화영(吳華英) · 김창준(金昌俊) · 박희도(朴熙道) · 최성모 · 신석구(申錫九) · 박동완(朴東完) · 신홍식(申洪植) · 정춘수(鄭春洙)]의 참여는 이런 감리교 민족운동의 흐름에서 보아야 한다. 3.1운동으로 일제의 감리교에 대한 핍박은 더욱 가혹하였고 수원지방 제암리 감리교회의 대학살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는 것이다. 이 시기는 이렇게 감리교회가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여 잃어버린 민족의 주권회복에 힘씀으로써 일반 민중의 지지를 크게 받았고, 또 많은 유능한 청년들이 교회에 들어옴으로써 교회는 크게 부흥되어 갔다. 이 시기는 민족독립운동과 선교가 동일시되던 시기였다.
3. 고난시대(1920~1960년) : 이 시기는 일제 말기의 교회 탄압과 8.15 광복, 그리고 6.25동란이라는 민족의 일대시련과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였다. 특히 일제말기의 일제의 음흉한 교회 탄압과 신앙 변질에 교회지도자들이 놀아나서 일본의 어용단체가 되는 수모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망으로 민족의 광복을 맞이하게 되자 감리교회도 일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일제말기에 교권을 장악했던 사람들이 그들의 친일적 행동에 대한 회개도 없이 광복 후에도 계속 그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자 일제하에서 핍박을 받고 있던 재야인사들이 일어나서 교회지도부에 대결하게 됨으로써 처음으로 감리교회의 분열을 체험하게 된다.
세칭 재건파와 복흥파의 분열이었다. 그러나 이 분열도 평신도들의 화해 노력에 의하여 4년 만에 해결되어 6.25동란 1년 전에 극적인 통합을 하게 되어 새로운 면모로 선교에 임하게 되었으나 1950년의 민족상잔의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동란은 우리 민족은 물론이고 감리교회에도 엄청난 비극과 상처를 안겨 주었다. 우선 감리교의 최고지도자였던 김유순(金裕淳) 감독과 전 감독 양주삼(梁柱三) 박사가 납북되어 갔고 기타 많은 목사와 유능한 평신도들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지도부에 다시 공백기가 생기게 되고 피난 중에 있던 교회지도자들은 기아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임시총회가 소집되어 새 감독(유형기 목사)이 선출되면서 교회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고 1953년에 휴전이 성립되고 서울에 정부와 교단본부가 다시 돌아오면서 본격적인 교회복구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파괴된 교회의 복구와 상실한 목사와 교회지도자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고 사회참여에 많은 관심을 보이지 못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1955~1958년의 호헌파 분열이 있었으나 곧 수습되었다.
4. 하나되어 선교하는 시대(1960~1984년) : 4.19는 감리교회에도 혁신의 바람을 일으켰고 젊은 교회지도부에 대한 교회혁신의 바람을 몰고 왔고, 그동안 교회 재건에 열중하던 교회지도부로 하여금 교회영향력과 그 저력을 사회구원에 돌리도록 요구하였다. 1974년 총회에서는 앞으로 10년 후에 맞이할 감리교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양심적인 5,000교회, 100만 신도운동을 전개하여 양적인 성장계획을 세워 이를 추진하고 있고 현재 85만명을 돌파하고 있어 1984년까지는 100만명 돌파는 무난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교회 일각에서는 이러한 교회의 양적 성장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다. 특히 감리교회가 구한말과 일제하에서의 민족의 과제를 선교의 과제로 삼아 민족의 아픔과 함께 했던 감리 교회의 전통을 저버리고 교회의 건축과 교세의 확장에만 전념한다는 것은 한국 민족을 위한 감리교회가 되기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1978년 10월의 제13회 총회에서는 실질적인 다원감독제(多元監督制)를 채택하고 교권의 중앙집권을 연회로 분산시켜 연회 중심의 선교체제를 갖추었고, 1980년 총회에서는 연회의 조직을 현재의 국가 행정구역에 따라서 개편하였다. 현재의 한국 감리교회의 조직과 그 직책은 다음과 같다.
총회(감독회장) ⇒ 연회(감독) ⇒ 지방회(감리사) ⇒ 구역회(당회장) ⇒ 당회(당회장)
총회는 4년에 한 번(현재는 법 개정으로 2년에 한 번) 모여 교회법 개정과 입법 및 선교정책을 입안 통과시키는 최고의결기관이며 동시에 감독을 선거하여 교회행정을 담당하게 한다. 총회 밑에 5개 연회(서울 · 중부 · 동부 · 남부 · 삼남)가 있어 해마다 모여서 연회 산하의 구체적인 선교정책을 결정하고 목사안수권을 감독에게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연회가 실질적인 감리교회의 핵심의회요 강력한 추진력을 보유하고 있다. 1982년 현재 5개 연회 밑에 93개 지방이 있는데 평균 한 지방에 30여개의 교회가 소속되어 있다. 지방 밑에 당회가 있는데 당회는 개체교회(자립할 수 있는 교회) 또는 미자립교회 몇이 합하여 조직되고 감리교 기본 의회가 되는 당회는 개체교회 중심으로 세례교인으로 조직된 의회이며 여기에서 구역회 대표로 선출하고 구역회에서 지방회 대표, 지방회에서 연회 대표, 연회에서 총회대표를 선출하는 민주주의 의회제도를 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