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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은 임금님의 의사
시조 휘(諱: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일컫는 말) 사전(思全)께서는 1067년 태어나셨다. 휘(諱) 사전(思全)은 신기에 가까운 의술(醫術)을 가져 15세에 어의(御醫:임금님의 의사)로 기용되었으며, 그 후 의사로써 소부소감·군기소감(4-5품)에 이르렀다. 이에 당시 선종(1083-1094)께서 "그대는 완전무결한 경지에 도달한 뛰어난 상의(上醫:최고의 의사)"라고 극찬한 다음 사전(思全)이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 하사하셨다.
■ 나라가 위기일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나선 애국자
이렇게 시조께서는 의사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서 정치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1126년(인종 4) 이자겸(李資謙)이 척준경의 무력을 바탕으로 궁궐을 범하고 권세를 남용할 때였다. 이자겸은 15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인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혼자서 농단하고 있었다. 반대파는 모두 한직으로 몰아내고 심복들만 요직에 앉혀 아무도 이자겸의 권력에 대항하지 못하여 고려왕조는 멸망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때 최탁과 오탁 등이 이자겸을 제거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자겸의 심복인 척준경의 막강한 군대가 궁궐을 불태우는 등 무력으로 맞서 결국 모두 잡혀 사형당하고 만다. 이때 불탄 궁궐을 수리도 하지 못하고 한달을 지내던 인종은 이자겸에 의해 강제로 이자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이렇게 인종을 포로로 잡은 이자겸은 인종을 없애고 왕이 될 명분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 힘이 아닌 지혜로 적을 이긴 지혜로우신 분
이때 마음씨 여린 인종은 이자겸에게 양위(임금의 자리를 내어 줌)하기로 하고 어의이면서 항상 가까이에서 정치적 조언을 하던 시조께 이 사실을 알리게 된다. 그러나 이를 들은 시조께서는 한사코 말리고 자신이 이자겸을 제거하기 위하여 나서게 된다.
그러나 시조께서는 어의일뿐 그에게는 군대도 권력도 없었다. 그렇지만 시조께서는 천만군을 다스릴줄 아는 비상한 머리가 있었다. 시조께서는 비록 움직일 군사는 없었지만, 적의 군사를 움직이는 우두머리를 움직일 생각을 하였던 것이었다. 시조께서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오랑케는 오랑케로 제어한다는 고사성어를 생각하셨다.
시조께서는 이자겸은 심복 척준경이가 없으면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과 척준경은 군인으로 성품이 단순하면서 우직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이자겸을 그의 심복인 척준경으로 하여금 제거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척준경은 이자겸의 충복으로 만일 실패할 경우 본인의 목숨은 물론, 모든 가족이 목숨을 잃을 매우 위험한 일어었다. 아마 이때 잘못되었다면 탐진최씨는 없었을 것이다.
■ 드디어 고려왕조를 구하시다
드디어 시조께서는 결연한 의지로 척준경(拓俊京)을 찾아갔다. 척준경에게 정연한 논리로 충의를 가득 담아 인종에게 돌아올 것을 호소하였다. 그렇지만 자기가 모시는 주인을 배반하라는 다른 사람의 충고를 쉽게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조께서 간파했던 것처럼 척준경은 우직하며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인을 배반할 수는 있어도 주인의 주인인 임금을 배반할 수 없었다. 마침내 시조의 조용하면서도 강한 호소에 감복한 척준경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이자겸을 사로잡아 제거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 척준경은 궁궐을 불태운 죄를 물어 제거하게 된다. 이렇게 시조께서는 비록 아무런 힘도 없었지만 맨몸으로 고려왕조를 구하게 된다.
■ 그만둬야 할 때 그만 둘 줄 아는 진정한 애국자
그리하여 시조께서는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아 어의가 아닌 병부상서(지금의 국방부장관)에 고려왕조 최고 영예인 추충위사 공신이 된다. 그 후 인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이듬해 이부상서(지금의 내무부장관)·지도성사(知都省事)로서 수사공(守司空)·좌복야(左僕射:지금의 부총리)가 더해졌고,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 뒤에 수태위(守太尉) 주국(柱國)·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 지금의 부총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조께서는 절제할 줄 아는 분이셨다. 권력을 탐하였다면 더욱 더 치세하였을 것이나, 은총이 넘친다 하여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탐진(지금의 강진)으로 낙향한다. 그리고 1139년 수(壽) 72세에 돌아가시었다. 인종 사후 1147년(의종 1년)에는 제겹공신으로 시호 장경공(莊景公)을 추서받고 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전남 강진군 군동면 나천리에 있고 향사일은 10월 15일이다.
탐진최씨는 휘(諱) 최사전(崔思全, 시호는 장경공)을 시조로 한다. 휘(諱) 사전(思全)은 고려 예종의 내의(內醫)로서 이자겸의 심복 척준경(拓俊京)을 설득하여 이자겸을 제거케 하였는데, 그 공으로 병부상서에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이 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후에 탐진(耽津)백에 봉해졌다.
그 후 후손들이 본관을 탐진(耽津: 현재의 전라남도 강진)으로 하였으나 여러 차례의 병화로 문헌이 실전되고 말았다.
이에 시조의 큰아들인 상서공(尙書公) 휘(諱) 변(弁) 후로
화성파(華城派)에 중서령(中書令) 휘(諱) 응규(應奎)
작은아들 효자공(孝子公) 휘(諱) 열(烈) 후로
강진금천파(康津金川派)에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휘(諱) 준량(埈良)과
보성조내파(寶城兆內派)에 영암군(靈巖君) 휘(諱) 총(聰)과
광주성서파( 光州城西派)에 영돈령부사(領都僉議事) 휘(諱) 윤덕(允德)을 중시조로 하여 세를 이어왔다. 그러던 중 최근 휘(諱) 열(烈) 이후부터 휘(諱) 준량(浚良)이전 3대를 추가 확인하여 1993(계유보)년도 족보 편찬시에는 휘(諱) 준량(浚良) 이전 5대를 모두 복원하여 시조로부터 약 천년의 세를 잇고 있다.
2000.11.1.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가구수 21,191가구, 68,127명으로 나타났다.
> 시조 : 최사전[崔思全]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탐진(耽津)은 전라남도 강진군에 속해 있던 옛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동음현인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탐진현으로 고치고 조선 1417년 도강현과 합하여 강진으로 고쳤으며,
1895년(고종32) 강진군이 되었다.
탐진최씨(耽津崔氏)는 고려 때 상약원 직장을 지낸 최철(崔哲)을 원조로 하고
고려때 장작감(將作監)을 지낸 정(靖)의 아들 최사전(崔思全)을 시조로 하고 있으나
사전의 아들 변(弁)과 열(烈) 이하의 기록은 누차의 전란으로 문헌이 실전되어
각파 중시조들의 세거지를 따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사전(思全)은 경주최씨에서 분적한 해주최씨의 시조 최온의 증손이다.
사전은 처음에 의술(醫術)로써 조정에 나갔으나 1126년 이자겸이 궁궐을 범하고 함부로
권세를 부리자 왕과 협의하여 자겸의 심복 척준경을 설복하여 이자겸을 제거한 공으로
공신에 책록되어 병부상서에 올랐다. 그후 삼한후벽상공신으로 수태위,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만년에 스스로 은총이 넘친다 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원했다.
그는 두아들 변(弁)과 열(烈)을 두었는데, 변(弁)이 이부상서에 올랐고,
둘째 아들 열(烈)은 [효인(孝仁)]이란 칭호를 왕으로부터 받았다.
일찍이 사전은 두 아들에게 금 술병을 한 벌씩 주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첩(妾)이 그하나를
훔쳐내었다. 변(弁)이 화가 나서 매를 치려고 하니 열(烈)이 말하기를
"이는 선군(先君)이 사랑하시던 사람이라 마땅히 가산(家産)을 기울여서라도 구제해야 옳겠거늘 하물며 이 물건이 문제가 되겠소. 제가 얻은것이 또 있으니 청컨대 이것을 형님에게 드리리다." 하였다. 왕이 듣고 가상히 여겨 "효자요 또 인인(仁人)이라고 할 만하다."하며 어필로 <효인(孝仁)>이라고 써 주었다고 한다.
문헌에 나타난 각 파의 중시조 이래의 내력을 살펴보면 화성파(華城派)는 중조 응규(應奎)가 고려때 중서령을 지냈고, 그의 아들 상(尙)은 1056년 예부낭중으로 감찰어사를 거쳐
1065년 예부상서로서 사은사가 되어 거란에 다녀와 동지중추원사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상(尙)의 아들 원습(原鈒)은 태복시정을 지냈고, 원길(原吉)은 중랑장에 올랐으며,
원습(原鈒)의 아들 용폐(龍陛), 용승(龍陞), 용승(龍陞)의 아들 숙륜(叔倫)이 당대에 뛰어났다.
강진금천파(康津錦川派)의 중조 준량(浚良)은 생원으로 우문관 대제학에 추증되었고,
아들 령(齡)이 예의판서를 지냈으며, 령의 아들 직림(直霖)은 판도판서로 오산군에 봉해졌다. 직림의 아들 봉(鳳)이 조선때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봉의 아들 만(滿)이 조선 세종때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만경파(萬頃派) 중조 효로(孝老)의 현손이고 능참봉을 지낸 숙(淑)의 아들 학령(鶴齡)은
1539년(중종34) 진사로 정시문과에 장원했으나 어사의 홍패(紅牌)에 틀린 글자가 있다고
받기를 거절하고 돌려 보낸 뒤 포의(布衣)로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으로 일생을 보냈다.
보성조내파(寶城兆內派) 중조 총(聰)의 아들 표(彪)는 공양왕때 참지정사를 지냈고,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그의 아들 귀령(龜靈)은 담양부사를 지냈고,
세조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강호(江湖)에 숨어 살았다.
광주성서파(光州城西派) 중조 윤덕(允德)은 고려말 영도첨의로 조선이 개국한 후
광산으로 귀양가서 살았으며, 손자 호(灝)가 중종때 계공랑에 이르렀고 가선대부로 한성판윤겸 오위도총부 총관에 추증되었으며, 호의 손자 언웅(彦雄)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금남파(錦南派) 중조 정원(井元)의 손자 부(溥)는 1482년(성종13) 진사로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뒤 교리로 [동국통감(東國通鑑)] 및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뒤에 호당(湖堂)에 뽑혔다
만경율리파(萬頃栗里派) 중조 해(海)는 세조때 벽동군수를 지냈으며, 아들 한춘(漢春)은
의영고직장에 있었고, 한춘의 증손 경란(景瀾)은 가선대부를 지내다가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만경율리에 은거함으로 후손들이 문호를 열었다.
그 밖에 인물로는 채희귀한도(蔡姬歸漢圖)를 그린 조선 성종때의 화가 경(涇)이 소헌왕후와
세조,예종,덕종의 초상을 그린 공으로 성종이 안구마(鞍具馬)를 하사하였으며
1484년 당상관에 올랐다. 사전의 후손 홍전(弘甸)은 문장에 능했고 천문(天文), 지리(地理),
역상(易象) 등에 밝았으며, 1679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낭관(郎官)을 지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탐진최씨(耽津崔氏)는 남한에 총 14,609가구, 61,8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석천리 / 전남 광산군 비아면 산월리
충남 예산군 광시면 노천리 /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동호리
충남 청양군 대치면 농소리 / 전남 담양군 수북면 남산리
경남 함양군 안의면 도림리 / 전남 강진군 강진읍 송덕리
전북 옥구군 임피면 술산리
유희춘 [柳希春, 1513~1577]
본관 선산(善山). 자 인중(仁仲). 호 미암(眉巖). 시호 문절(文節). 여류문인 송덕봉(宋德峯)의 남편. 최산두(崔山斗)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4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다음 수찬 ·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1547년 벽서(壁書)의 옥(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고,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면되어 직강(直講) 겸 지제교(知製敎)에 재등용되었다. 이어 대사성 ·부제학 ·전라도관찰사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575년(선조 8)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하였다.
경사(經史)와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미암일기(眉巖日記)》 《속위변(續諱辨)》 《주자어류전해(朱子語類箋解)》 《시서석의(詩書釋義)》 《헌근록(獻芹錄)》 《역대요록(歷代要錄)》 《강목고이(綱目考異)》 등의 저서를 남겼다. 좌찬성에 추증되어 담양(潭陽)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茂長)의 충현사(忠賢祠), 종성(鍾城)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나덕헌 [羅德憲, 1573~1640]
본관 나주. 자 헌지(憲之). 호 장암(壯巖). 시호 충렬(忠烈).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 2년 뒤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을 도와 안현(鞍峴) 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진무원종(振武原從)의 훈공을 받았다. 사신으로 여러 차례 후금(後金)의 심양(瀋陽)에 다녀왔다. 1628년 봉산군수가 되고, 1631년 길주목사(吉州牧使)를 지낼 때 덕천(德川)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635년 창성부사(昌城府使)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지내고, 이듬해 춘신사(春信使)로 다시 심양에 갔다.
그때 후금의 태종이 황제를 자칭하며 즉위식을 거행하자 이에 항거, 하례(賀禮)를 거부하다 매를 맞고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國書)를 가지고 돌아왔다. 국서에 황제라 칭한 내용이 있어, 황제참칭(皇帝僭稱)의 글을 받아왔다 하여 척화론자(斥和論者)들로부터 논핵을 받았다. 김상헌(金尙憲)의 진언으로 간신히 극형을 면하고, 백마성(白馬城)에 유배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 뒤, 앞서 심양에 갔을 때 후금의 태종에게 항거한 사실이 밝혀져 죄를 용서받고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에 특진되었다. 1639년 사임하고 나주로 돌아갔다
무양서원은 개화기 이후인 일제하(1927년)에 탐진최씨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 세운 서원으로 고려 인종때의 명신 장경공 최사전을 비롯하여 그의 후손인 손암 최윤덕, 금남 최부과 문절공 유희춘, 충렬공 나덕헌등 다섯 분을 모시고 매년 음력 9월 6일에 제향하고 있다.
광주의 옛이름 "무진의 볕"[武珍之陽]이라는 뜻에서 무양서원으로 이름지었다. 구조를 보면 강당인 이택당의 좌우에 합의문과 합인문이 있으며, 합인문의 일반적인 통용문이다. 합의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동재인 성지재가 있으며 왼쪽에는 서재인 낙호재가 있다. 이어 높은 대지위에 담장을 돌린 무양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내삼문인 삼오문이 있어 사우(祠宇)안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원래 서원이 명현을 제사하는 사(祠)와 교육을 담당하는 재(齋)로 나누어진 점을 생각하여 탐진최씨 문중에서는 1945년 광산구 쌍암동에 무양중학교를 설립, 지금까지 교육기관의 역활을 담당하고 있다.
무량서원에는 장경공, 손암, 금남, 문절공, 충열공등 다섯분이 배양되어 있다.
최씨(崔氏)성의 원조(元祖)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斯盧) 6촌 중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의 촌장이었던 소벌도리(蘇伐都利)로, 신라 3대 유리왕(儒理王 또는 儒理尼師今. 재위 24-57) 9년인 AD32년에 신라 6부의 명칭을 개칭할 때, 고허부(옛 고허촌)를 사량부로 개칭하고 최씨 성(姓)을 사성(賜姓)함.
탐진최씨(眈津崔氏)의 시조 최사전(崔思全 1067-1139)은 해주최씨(원조;최철)의 시조 최온(崔溫)의 증손이며, 고려 16대 예종(睿宗 1079-1122)의 내의(內醫)를 거쳐, 17대 인종(仁宗 1109-1146)때에는 소부소감, 군기소감, 수태위문하시랑평장사의 벼슬에 이르러 탐진백에 봉해졌으며, 그에 따라 그의 후손들이 탐진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음.
그러나 후에 그의 두 아들 이하의 세계가 수차례의 병화로 고증과 문헌을 잃어버림으로서 계통을 밝힐 수 없자, 최사전을 시조로 하고 각 세거지의 후손들을 중시조로 삼아 세거지의 명칭을 딴 20여파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음.
.( 탐진은 백제시대에는 동음현, 통일신라시대에는 탐진현, 조선조 1417년(태종17)에는 강진, 1895년(고종32)에는 강진군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음.)
최윤덕(崔潤德)은
1376(우왕 2)∼1445(세종 27). 조선 초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여화(汝和)·백수(伯修), 호는 임곡(霖谷).
지중추부사 운해(雲海)의 아들이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국경의 수비에 나가 있어 한마을에 사는 양수척(楊水尺)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어느날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쏘아죽였다.
그뒤 음관(蔭官)으로 기용되어 아버지를 따라 여러 번 전공
세우고 부사직이 되었다.
1402년(태종 2)에 낭장이 되고, 곧 호군을 거쳐 이듬해 대호군이 되었다.
1406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가 되었다가 1410년 무과에 급제하여 상호군이 되고, 동북면조전병마사(東北面助戰兵馬使)가 되었다가 이듬해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에올랐다.
1413년 경성등처절제사(鏡城等處節制使)가 되어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를 복속시켜서 야인들의 준동을 막았으며, 영길도도순문찰리사(永吉道都巡問察理使)·우군총제·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하였다.
1419년(세종 1)에 의정부참찬으로 삼군도통사가 되어 체찰사 이종무(李從茂)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1421년에는 공조판서가 되어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곧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었다.
1426년 좌군도총제부사, 1428년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1433년 파저강(婆猪江)의 야인인 이만주(李滿住)가 함길도 여연(閭延)에 침입하였을 때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어 이만주를 대파하였고, 이 공으로 우의정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적이 또 변방을 침입하자 평안도도안무찰리사(平安道都安撫察理使)로 나가 이를 진압하였으며, 돌아와서는 무관으로서 재상의 직에 있을 수 없다는 소를 올려 무관직에 전임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35년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영중추원사에 전임된 뒤 1445년에 궤장(#궤02)을 하사받았다.
그는 성품이 자애롭고 근검하여서 공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묵은 땅에 농사를 지었고,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남편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여인의 호소를 듣고 그 호랑이를 잡아서 배를 갈라 남편의 뼈를 찾아 장사를 지내게 해 준 일도 있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통천의 상렬사(尙烈祠)와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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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숙손, 경손, 광손, 영손이다.
장군의 묘는 현재 경남 창원시 북면 대산리 산8번지 사리실마을 뒷산에 있다.
최윤덕장군에 관한 일화 한편이 청파극담(靑坡劇談)에 있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최윤덕 장군(정승)이 모친상을 당해, 한 필의 말을 타고 종 하나만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개울을 건너가는 때에 인근 고을의 수령 두세명이 모여 시냇가에서 장막을 치고 늘어지게 술을 마시면서 서로말하기를,
“저 사람 상복차림으로 말을 타고 가는 것을 보니 필시 이 고을 촌민일거야.
감히 수령을 향하여 무례하게 이처럼 이르다니, 불가불 크게 벌을 주어야 하겠군.” 하고는 군졸을 시켜 노비를 잡아와 물었다.
“네 주인이 누구냐?”“최고불입니다.” “네 주인의 이름이 무엇이냐 말이다.” “또 이르기를 최고불입니다.” 하자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네 주인이 내려야 할 곳에 내리지 않아 죄를 지었거늘, 너는 다시 이름까지 숨기니, 주인과 노비가 똑같이 나쁘구나.”
하면서 노비의 머리를 때렸다. 노비가 천천히 말하길,
“고불은 최윤덕정승이며,(모친상을 당해) 고향인 창원으로 내려가는 중입니다.” 하였다.
수령들은 크게 놀라 뉘우치며 즉시 천막을 걷어치우고 술마시는 것을 파하였으며 서로 달려가 용서를 구했다.라 되어 있는데 청렴하여 모친상을 당해도 한 필의 말과 종 하나만 거느리고 시골 촌노처럼 귀향한 모습을 볼수 있는 부분이다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3) 금남(錦南) 최부(崔溥)의 표해록(上)
입력: 2007년 02월 02일 15:06:13
최부 선생이 나고 자란 곳으로 추정되는 전남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성지마을에 있는 느티나무. /사진작가 황헌만
전라남도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성지마을, 이곳에서 553년 전에 뛰어난 인물이 태어나 자라며 학문과 사상을 익히고 키웠다. 그 인물이 바로 금남 최부(1454~1504)다. 본관은 탐진이고 자는 연연(淵淵)이며 호가 금남(錦南)이다.
최부는 아버지 최택(崔澤)과 어머니 여양 진씨(陳氏) 사이에서 단종2년인 1454년에 태어났다. 동강면 소재지의 이름난 고깃집에서 나주곰탕과 생소고기에 맛있는 점심을 들고 거기서 가까운 성지마을에 우리가 들렀을 때는 오전에 내리던 눈도 그치고 차가운 겨울 날씨에도 햇볕은 밝게 비치고 있었다.
그 마을 출신으로 서울에 거주하는 지인과 동행했기 때문에 찾아가는 길은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마을에 도착하자 최부의 흔적이라고는 ‘금남최선생유허비(錦南崔先生遺墟碑)’라는 비 하나가 서있을 뿐 마을 사람들은 집터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 태어난 지 550년이 지났고 세월과 함께 세상은 또 상전벽해가 되었으니 알 길이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였고, 더구나 그 마을에는 후손이라고는 한 사람도 살지 않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유허비 주변에는 아직 베어내지 않은 아름드리 노송이 몇 그루 남아있고 수명을 알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느티나무가 두 그루 넉넉하게 서 있는 것을 보면, 필시 오래된 마을인지라, 그 언저리가 분명 최부가 태어난 집이 있었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후손 중에 어떤 분은 유허비의 맞은편 등성이 아래가 옛날의 집터라고 전해온다고 하였다. 그래도 후손들이 유허비를 세울 때 무언가 근거가 있었기에 그곳에 세우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고서 좌우를 살펴보니 그곳이 바로 최부의 탄생지라고 여겨도 좋을 것 같았다.
최부의 집터에 세워진 금남최선생유허비.
현인이 지나가면 그곳의 산천도 빛이 난다는 옛말이 있다. 최부 같은 당대의 문장가이자 벼슬아치이던 어진이가 태어난 곳이건만 마을이 이렇게 처량하게 되어 흔적이 빈약하다니 안타까움을 이길 수 없었다. 무상한 500년의 세월이 만들어 준 일이니 누구를 탓할 수 있으랴.
# 최부가 쓴 중국 표류견문기 ‘표해록’
최부 하면 그의 유명한 표류기인 ‘표해록(漂海錄)’이라는 책이 떠오른다. 성종 19년인 1488년에 35세의 최부가 지어 왕에게 바친 책으로, 저작된 지 80여년 뒤인 1569년에 외손자 유희춘(柳希春)에 의하여 간행되었고 또 1578년에도 간행되었다. 이 책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저자가 당한 처절한 고난과 역경의 서술이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대단히 유명해졌고, 일본이나 중국에서까지 번역되어 세계 3대 여행기로 꼽히고 있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하멜표류기’와 함께 근대 이전의 세계적 여행기로 거론되는 것이다.
최부의 ‘표해록’
한문으로 된 ‘표해록’과 함께 한글로 번역된 책까지 있었고, 최근에는 여러 출판사에서 다투어 순수한 우리말로 번역했다. 그러나 읽는 사람도 많지 않고 최부에 대한 관심이 매우 희박하여 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국민은 극소수에 이르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당대의 학자이자 최부의 외손자인 유희춘은 외할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여러 곳에서 정확하게 밝혔다. “경술과 기절이 뛰어나 성종대왕에게 발탁되어 시종신(侍從臣)이 되었다”고 했고, “박학과 씩씩한 기절로 온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라고도 했다. 미암 유희춘은 자세한 생애를 ‘금남선생사실기(錦南先生事實記)’라는 제목으로 밝혀놓았다.
“특별한 자질을 타고나 강의(剛毅)하고 정민(精敏)하였다. 어른이 되자 경전을 익혀 글을 짓는데 일반에서 특별히 뛰어났다. 24세에 진사과에 3등으로 합격하였고 29세에 알성급제로 재주 있다는 명예를 드날렸다. 전적(典籍)의 벼슬에 있으며 ‘동국통감’을 편찬하는 사업에 참여하여 명백하고 정확한 서술로 당시 모든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33세에는 중시(重試)에 을과(乙科) 1등으로 합격하여 홍문관 부교리에 올랐다. 34세인 1488년 9월 제주도 3읍의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선발되어 제주도로 건너가 직무를 수행하다가 35세의 윤 정월에 부친상의 소식을 접했다. 급히 고향인 나주로 귀향하던 배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중국의 태주(台州)에 이르렀다. 천신만고의 고생을 겪고 6월에 한양으로 돌아와 왕에게 ‘표해록’을 지어바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추쇄경차관이란 불법자들을 찾아내 문책하는 벼슬아치다. 육지에서 죄를 짓고 제주도로 도망간 범법자들을 찾아내 치죄하려고 파견된 직분이었다.
아버지의 상을 당한 상인(喪人)으로 집상할 겨를도 없이 6개월 만에 돌아온 고국에서는 왕명으로 표류전말을 올려 바쳐야 했다. 그 뒤 고향인 나주로 돌아가 아버지 상을 마치기도 전에 다시 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최부는 효자로서의 본분을 지켜 4년 동안 시묘(侍墓)하는 효성을 다하고서야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39세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아버지 상을 당하고 귀국했으면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 집상을 해야지 아무리 왕명이라해도 ‘표해록’을 저술한 것은 아들의 도리로 잘못이 있다는 간관(諫官)의 탄핵을 받아 벼슬길이 순조롭지 못했다. 그러나 최부를 절대 신임한 성종은 궁중으로 불러 표류전말을 구술하라고 명하여 전말을 듣고 나서는 그 혹독한 고난과 불운한 사정에 감탄하여 선물로 옷을 한 벌 하사하여 지극한 칭찬을 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41세에는 벼슬아치의 꽃이라는 홍문관 교리에 오르고 같은 해에 대제학에 오를 가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리지 않는 벼슬인 예문관 응교(應校)라는 벼슬에 오르기도 했다. 44세에는 질정관(質正官)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한창 벼슬에 올라 능력을 발휘하려던 무렵인 45세 때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사간(司諫)으로 연산군의 잘못을 상소하고 고관대작들의 비행을 폭로한 상소를 올리자 미움을 받던 중, 점필재 김종직의 문집을 보관했다는 이유로 46세에 함경도 단천이라는 나라 북쪽 끝으로 귀양살이를 떠나고 말았다.
그처럼 황량한 변방에서 귀양 살면서도 최부는 그곳의 문화와 문명을 개화시키기 위해 제자들에게 많은 교육을 했다. 열심히 연구하고 글을 짓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연산군 10년(1504)인 51세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다시 체포되어 극형을 당하는 불행을 맞고 말았다. 문장과 학문을 안고 반백에 세상을 마치고 만 것이다.
최부는 어린 시절 진사이던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고 경사(經史)를 익혔다. 자라서는 일세의 학자이자 문장가인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당대의 제제다사들과 함께 교육하면서 학문을 깊고 넓게 연구하였다.
사림파의 종장이던 김종직, 그 무렵에 벌써 나라에는 당파싸움이 시작되었으니 이른바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이 그것이었다. 김종직 문하의 뛰어난 인물들이 비참하게 파멸한 사화가 무오사화요, 갑자사화다. 김일손·최부 등이 귀양가거나 죽임을 당해 사림파가 뿌리째 흔들렸던 때가 바로 그 시기였다.
무도한 연산군의 횡포에 이유 없는 죽임을 당한 최부, 그의 최후에 대해 역사는 그냥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실록 연산군 10년 10월25일의 기사에서 사관(史官)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최부는 공렴정직하였고 경전과 사서(經史)에 박통(博通)하고 문사(文詞)에 넉넉하였다.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고 말하고는 “죽임을 당하자 조정이나 재야의 모두가 애석하게 여겼다”는 말로 애통함을 기록하였다.
경전과 역사에 밝고 문사에 뛰어나며 공정하고 청렴하며 정직한 데다 나라에 옳고 바른 말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벼슬아치였기에, 우리는 그를 훌륭한 선비로 추앙하는 것이다.
# 사림파의 대표적 선비
30대의 젊은 관료로서 주자학이나 성리학의 예교(禮敎)정신에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기개를 지켰던 그는, 젊은 조선 사람의 긍지를 중국에 널리 알린 점만으로도 우리들이 대우해야 할 선조 중의 한 분이었다.
‘표해록’을 번역한 북한의 학자가 말했던 점은 정곡을 찌르는 부분이 있다. “그의 굳센 절의, 밝은 예절, 높은 인격, 깊은 학문은 중국 사람들의 경탄과 동정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라를 사랑하는 지극한 충의, 부모를 생각하는 애절한 효성, 이는 중국 관원과 인민들과의 응답에서 언제나 솟구쳐 상대방의 심금을 울려마지 않았다. 그는 들놀지 않는 신념으로 우리나라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와 명성 높은 인물들을 자랑하였으며 또 우리나라의 위신을 높였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양반 관료이고 당시의 역사적 제한성 때문에 오늘의 생각과 일치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망망대해의 풍파 속에서 난파 직전의 43명의 동승자들에게 했던 최부의 말을 들어보자. “배 안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해야 한다. 딴 나라 사람이 함께 탔더라도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야 하거늘 하물며 우리는 모두 한 나라 사람으로 정이 육친과 같음에랴. 살면 함께 살고 죽으면 함께 죽자.”(표해록 윤정월 10일조) 그의 마음은 그렇게 철석 같았었다. 미암 유희춘의 제자로 큰 이름을 날린 허균의 형인 허성은 금남에 대해, “웅대한 문장과 곧은 절개로 큰 명성을 날렸다(以雄文直節 致大名)”라는 찬사를 올렸다.
최부 선생이 나고 자란 곳으로 추정되는 전남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성지마을에 있는 느티나무. /사진작가 황헌만
최부의 표해록 (漂海錄)
제주 관아에 근무하던 최부는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고향인 나주로 가던 길에 배가 풍랑을 만났다
42명의 인원이 탄 배는 두 달 가까이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중국 명나라에 도착하였지만 도적 떼를 만나 목숨을 잃을 뻔 했고
마을에서는 왜구로 의심받아 심한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럴 때 마다 일행들은 관복을 입고
조선 관리의 위엄을 보여 주자고 설득했지만
최부는 예에 어긋난다며 상복을 벗지 않았고
인수(印綬)와 마패를 빼앗아간 도적들에게
나라의 신표를 사사로이 사용할 수 없으니
돌려주시오 라고 의사를 전하며 도를 지켰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와 도를 중시하는 최부의 강직한
성품은 일행의 목숨을 지켜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명나라 관청에 끌려가 여러 차례 심문을 받게 된
최부는 쏟아지는 질문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하며
도리에 어긋나는 일에는 몸은 이곳에 있다 하드라도
나는 조선의 신하이며 말과 행동에
변함이 있을 수 없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뛰어난 문장과 학식에 명나라 황제까지 감복하여
의관을 선물하고 무사히 귀환할 때 까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드디어 1488년 6월 최부는 표류한지 6개월 만에 당시의
인원 42명 중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명나라에 머문 135일이 최부에게는 답답한 시간만은 아니었다
8천 80리를 다니며 겪은 내용을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하였기 때문에
훗날 <표해록>으로 탄생한 그의 일기는 나라의 귀중한
정보가 되었고 오늘날 중국 3대 기행문 중 하나로 꼽힌다
정해진 길로 가는 사신보다 그가 당시 명나라의 발전된
다양한 문물과 세세한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의외의 장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주위를 면밀하게 관찰한 덕분이었다
최부야 말로 동방의 마르코 폴로라 할 수 있으리라
[북경대 갈진가 교수의 최부표해록에 관한 논문]
글을 발표한 곳: 중국사회과학원 세계역사연구소, 1991년 12월
제목: 표해록 초평 -표해록에 대한 초보적 탐구
번역: 김예화, 중국 조선족으로 중국어 통역관 정리: 최철호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전에 조선인 최부가 중요한 저작인 표해록을 기술했다. 그 내용은 최씨및 그와 한 배에 탄 43명의 조선인들이 조선의 제주도 근방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하여 중국의 절강성에 표착, 수로와 육로로 귀환한 경험을 중심으로 기술했다. 중국 명나라 초기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 교통및 도시풍경 등 다방면의 상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 책은 중국 명나라 시기의 해안방비, 정치제도, 운하, 도시, 지지, 민속및 중조(中朝)의 양국관계등을 연구하는데 증거가치가 있는 고서라할 만하다.
표해록은 본래 최부가 조선 국왕에게 찬진한 '내부보고'였다. 그러나 최씨의 견문은 모두 얻기 어려운 기초자료이었으므로 조정의 큰 중시를 받았다. 표해록은 유창한 한문으로 썼는데 전문(구두점 불포함)은 5만 4천 여자에 이른다. 내용은 만상을 망라하고 있으며 문장이 간결하고 생동감이 있다. 출판된 후 구독자가 많았지만 유포가 넓지 못하였다. 최부 사후 70년(1573, 조선 선조 6년, 명나라 만력 원력)후에 그의 외손 유희춘(교사제조로 있었음)이 교정본을 판각, 인쇄하여 출판함으로써 후세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조선의 해동문헌 총록, 문헌비고는 이 책을 중요한 고서로 수록했다.
아는 바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1769년에 키오타 군킨이 표해록을 일문으로 번역, 책이름을 '당토행정기'로 고쳤다. 또한 미국에서도 1965년 존 메스킬이 표해록을 영문으로 번역하였는데 책명을 '표해록역주' 라고 하였다. 1979년에 최부의 방계후예인 최기홍(崔基泓)이 본국문으로 번역하여 서울에서 출판했으며 1988년 평양에서도 표해록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중원묘사의 거필'인 이 책을 알고 있는 사람이 적다. 이 외국의 한문서는 다방면의 연구에 자료를 제공해줄 수 있는 저술로서 마땅히 중국 학술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야할 것이다.
본문은 표해록에 대해 전면적인 평론을 하지 않고 다만 중국에 관한 과거의 외국기록중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는 방면에 대해 초보적인 탐구를 하려고 한다.
1. 명조 홍치원년 해금(海禁), 해방(海防)과 관련, 표해록 기재
명나라 홍치초기의 해금, 해방 상황
왜구에 대한 재난은 명나라 초기부터 비교적 엄중하게 다스렸다. 명나라 태조는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여 일찍이 산동에서 광동에 이르는 연해지역에 성을 구축하고 군사를 증강시켜 해안 방어공사를 강화하였으며 엄밀한 순겁제도를 세웠다. 영락 17년에 왜구가 요녕성 동쪽에서 섬멸된 후 왜구에 의한 재난이 좀 드물어졌다. 세종 가정 중기에 이르는 100여 년동안에는 해상에 큰 침범이 없게 되었지만 그러나 언제든 철저히 막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표해록이 제공한 자료로 보아 홍치초기에 명나라 정부의 해금은 매우 엄격하였고 관리와 백성들의 해안 방어의식이 매우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최부를 비롯한 표류인들이 정강 태주부의 임해현 소속인 우두외양에 이르렀다. "산위에 수많은 봉화대가 줄 지어 있는 것이 보였다."「표해록 권1, 홍치원년, 정월 16일」그들은 배를 버리고 상륙한 후 곧 왜구로 오인되었다. 당시 주민들이 포위, 심문을 하는 한편 그들을 급히 관부로 압송해 갔다.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였고, 이리 저리 날뛰며 소릴 질렀다.", "어떤 이는 창과 칼을 지녔고 어떤 이는 북과 징을 쳤다.", "마을 사람 모두 막대기를 휘드르고 쳤다.", "좌우를 끼고 전후를 가로 막으며 차례 차례로 체송하였다."「표해록 권1, 정월 17일」"길 옆에서 구경하는 자들이 모두 팔을 위로 흔들며 머리를 가리키면서 참수하는 흉내를 냈다."「표해록 권1, 정월 18일」이튿날 해문위인 천호 허청이 곧, "왜구가 침범했다는 말을 듣고 체포하기 위해 왔소,"하고 최씨 등을 급히 해문위 도저소에 보내 심문케 하였다. 최씨 등은 도저소 성근처에 이르러, "7-8리 주위에는 군졸이 갑옷을 입고 창, 총, 방패 등으로 무장 길거리를 메우고 잇었다. 그 성에 도착했는데 성에 중문이 있었고, 문은 철로 된 문비가 있었으며 성위에는 수비하는 초소가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표해록 권1, 1월 19일」"성곽이 관문과 같았다."「표해록 권1, 1월 18일」등을 보았고, 또 최씨 등은 연도의 영해현 건도소를 경유하면서, "병선이 무장을 완비하고 남강을 상하로 순회하고 있었다", "성문에 들어가니 문은 모두 중문이며 북, 각, 총소리가 바다와 산을 진동시킬 듯했다", 천호인 이앙은 체구가 장대하고 용모가 출중했으며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있었다."「표해록 권1, 1월 24일」"백, 천의 무장병으로 성을 에워쌓으며 거리를 경호했다."「표해록 권 1, 1월 25일」등도 보였다. 영해현 월계순검사는 바로 최씨 일행이 통과한 첫 순검사이다. "성은 산정에 있었으며, 군졸들이 모두 무장하고 바닷가에 열립해 있었다."「표해록 권1, 1월 25일」 이를 보아 명나라 초기에 태조가 해안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연해일대에 성을 구축하고, 요새에 호위소를 설치하였으며 홍치초기에 이르기까지 위수부대를 주둔시켜 경비케 했음을 알 수 있다.
태주는 절강 동부연안에 자리잡고 있어 여러 차례 걸친 왜구의 침요를 당했다. "명사기사본말(明史記事本末), 55권, 연해왜란"의 기술에 의하면, 홍무 17년부터 정통 4년에 이르는 50여 년간에 절강 동부 일대에서만도 왜구의 침입, 약탈을 일곱 번이나 당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태주 도저일대가 가장 심한 피해를 입었었다. 정통4년(1439년) 4월 왜구가 절강동부 일대에 침입하여 감행한 약탈만행은, "왜구가 도저에 들어왔을 때, 관의 창고와 백성들의 집을 불지르고 약탈했으며 장정들을 몰아세워 종묘를 파 헤쳤다 갓난애를 대나무위에 묶고 끓는 물을 들어 부으며 그 울부짖음을 보고 박장대소하였다. 임산부를 데려와 아들인가, 딸인가를 점쳐 그 배를 도려내어 그 맞음과 틀림으로 술내기를 하여, 쌓인 해골이 언덕같았다."는 기술로 보아 왜구로 오인된 최씨 일행이 심문, 구축, 구타를 당하게 된 연고를 가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표해록은 당시 관리와 백성들의 왜구의 침입, 약탈에 대한 긴장된 분위기와 그들의 고도의 해안 방어의식을 생동감있게 기술했다.
홍치초기에도 감금조례가 여전히 매우 엄격했다. 최씨일행은 대륙에 발을 들여 놓은 순간부터 매우 엄한 감금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상륙한 이튿날 그들이 만난 명나라의 첫 지방관원은 바로 천호인 허청이었다. 허청이 먼저 최씨에게, "우리 대당의 법도는 매우 엄하다."「표해록 권1, 1월 18일」라고 일러 주었고, 동시에 다른 사람도 그에게, "옛부터 왜적은 우리 변경에 여러 번 침입하여 겁탈했기 때문에 국가는 비왜도지휘, 비왜파총관을 설치하고 왜에 대비하고 있다. 만약 왜인을 잡으면 선참후계한다"「표해록 권1, 1월 19일」라고 일러 주었다. 송문 등지의 비왜지휘 파총관인 유택도 그에게, "당신과 같이 남몰래 변경을 침입한 사람들은 원래 군법으로 다스린다."「표해록 권1, 1월 21일」라고 했다. 항주에서도 한 관원이 그에게, "국법이 아주 엄하고 규율이 대단하다. 누설되면 충군(充軍)이란 형벌에 처해진다."「표해록 권2, 2월 8일」라고 일러 주었다.
명대의 "위법도강(渡江)"규정에 의하면, "모르고 도운 것이 결과적으로 법을 어긴 도강이 되었을 경우, 장 80에 처한다. 감시자가 고의로 놓아주는 경우 같은 죄로 처리한다." 라고 되어 있으며, "첩자" 규정에 의하면, "변방 요새지의 관문및 내지의 경우, 경내에 첩자가 침입, 경내 사정을 누설 혹은 몰래 내통하는 경우 모두 참수에 처한다. 경유지의 감시자가 고의로 놓아 주거나 은익, 자수하지 않는 경우, 범인과 동죄로 처리한다." "사출외경(私出外境)" 의 규정에 의하면, "사정을 누설한 자는 참수에 처한다."「大明會典, 권 167, 刑部 9, 律例 8, 兵律 2」라고 규정지어 당시 관민의 강렬한 감금의식은 당시의 엄격한 감금조례 규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금을 강화시키기 위해 명대에는 해방장려(海防奬勵)의 일환으로 표창제도를 실시했다. 명사의 기재에 의하면, "태조 29년 연해위소지휘(沿海衛所指揮) 천호(千戶), 백호(百戶)에게 명하기를 왜선및 적을 포획한 자는 일계급 승진하고 상으로 은 50량, 지폐 50정(錠)을 급여한다. 군사가 수륙(水陸)에서 적을 포살할 경우 상으로 은을 급여하되 차등이 있게 하라", "세종때 왜로 인한 고통이 심했기 때문에 해상에서 공로는 북방변경에 비해 가장 우대했다." 이후 가정 35년에 이르러 개정되기를, "왜의 두목을 참했을 경우 일계급 승진, 봉급 3질(秩)을 올려준다. 맹목 추종자는 150량, 적을 복종시킨 자는 일계급 승진시키고 봉급 1질을 올린다. 이처럼 해양에서 적을 만나 공을 세운 자는 한결같이 논공행상을 잃지 않았다.", "만력 12년 개정에는 구법보다 약간 다른 점이 있었다. 즉 적의 수및 선박의 다과에 따라 논공행상의 차이를 두었고 해양정벌과 전투에 있어서 평온을 되찾을 경우 왜적, 해적을 막론하고 공로를 검토한 후 뛰어난 공로로 인정이 되는 경우 공로의 영예를 대대로 세습케 하였다."「명사 권92, 志第68, 兵4」
명사에 홍치초기때의 규정에 관해서는 비록 상세히 기재되지 않았지만 "표해록"에 기록된 사자채 수비관이 최씨일행을 왜구로 오인하고 그들의 왼쪽 귀를 잘라 바치어 공훈을 세우려 시도한 내용으로 보아 홍치초기의 표창제도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당시 해금은 매우 엄격했는 바, 외국인이 입경하기만 하면 해안수비 부문에서는 엄한 대책을 세웠다. 이 방면의 상황에 대해 최부는 표해록에서 수많은 중요한 지료를 기재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은 항주에서 그들 일행을 북경으로 호송할 때 연도의 각부, 역에 통보한 공문인 것이다.「표해록 권2, 2월 11일」 이 공문은 명나라 홍치초기의 해금 등 각 방면의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반영했다. 이 공문을 통하여 최부일행이 사자채에 이른 후 각급 해안 수비부문에서 어떤 대책들을 취했고 어떤 부분에서 출해감시와 수비를 하며, 어떤 부분에서 배를 나포, 구금을 하며 심사확인할 것인가에 대해 모두 명확히 햇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 공문은 그당시 각급 해안수비 부문에서 언제나 경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해안 수비정보가 잘 통하고, 지휘배치가 신속했으며 해안방비 시설도 완비했다는 것을 반영했다. 표류사건 심의절차와 명나라 홍치초기 법도 표류사건(표류 국경침범 사건)은 외교, 국경수비와 관련되기 때문에 일반소송과는 다르다. 일반사법의 안찰사사(按察使司)가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포정사사(布政使司), 안찰사사가 합동심사를 해야만 안건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최씨 일행건은 우선 해안 수비부문인 해문위, 천호, 파총, 송문 등 왜구 수비지휘자의 초보적인 심문을 거쳤다. 다시 상급인 소흥부에 보내어 총독왜구방비 관공서인 도지휘첨사, 순시해도부사, 포정사분수우참의 등의 연합심문, 즉 부급(府級)심사의 합동심사를 받아야 했다. 다시 상급인 항주 포정사사에 올려 진수절강사설감태감과 순안절강감찰어사의 조사를 받아야 했으며 마지막으로 절강도지휘첨사, 좌포정사, 안찰사부사 등 삼사가 합동 재심사를 하여 폭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다음에야 안건을 결정할 수 있으며, 또한 관을 파견하여 북경으로 호송케 된다. 소송의 절차로 보아 위소(군현), 주부(州府), 사(司)의 삼급(三級)을 거쳐 다시 중앙에 보내는데, 대체로 일반 소송절차와 같이 사심(四審)을 거쳤다.
최씨 일행 안건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각급 관원들이 안건처리를 공평히 하고 조사연구를 중요시했는데 이는 홍치초기의 사법이 엄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씨 일행 안건의 기본골자는 그들의 신분을 똑똑히 밝히는 것이었다. 최씨 등의 일행이 비록, "왜와 말이 다르고 의관이 다르다." 또한 관인, 마패, 각대, 소지문서, 서적 등이 분명 조선인이라는 것을 맑혀 주기는 하나 생각해 보면, "왜인의 도적질은 신기하다. 변복하여 흡사 조선사람과 같이 위장하고 있는지 모른다."「표해록 권1, 1월 19일」또한 신인 등의 물건은 왜구가 조선인의 것을 얻었는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이는 반드시 배제해서는 안 될 의문인 것이다. 최씨 일행의 언어, 의관, 행동을 관찰하고 또 그들이 활 하나, 칼 한 자루를 소지한 것 이외에는 다른 무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도적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파총, 송문 등 각 부문의 비왜지휘들은 최부에게, "당신과 같이 남몰래 변경을 침범한 사람들은 원래 군법으로 처형키로 되어 있으나, 그 정실이 가긍한 점이 있어 잠시 처형을 보류하고 있으니 침범의 유무와 정상을 사실대로 글로 써서 제출하라."「표해록 권1, 1월 21일」라고 했다. 파총관은 표류와 관련된 실정 등을 물은 후 또 조선의 위치가 어느 방향인지…의관과 예절은 어느 때에 만들어졌는지, 어떤 법규를 사용하는지 등 조선과 유관한 사항을 구체적으로 질문하여 최부 일행이 조선인이 아닌지의 여부를 조사했다. 최부는 이에 하나 하나 작성하여 회답했다.「표해록 권1, 1월 21일」
파총관은 최씨가 작성한 공문및 서술을 들은 후 기본적으로 국경을 침범한 혐의가 없음을 인정하고 예로서 대했다. 그리고 북경에 전송하여 본국으로 돌려 보내려 했다. 소흥부에 도착해서 역시 포정사의 심문이 있었는데 이는 더 한층 자세한 질문이었다. "당신은 조선인 같으니 당신 나라의 연대, 연혁, 도읍, 산천, 인물, 풍속, 제사의식, 상제, 호구, 병제, 전부(田賦), 관상(冠裳)제도를 자세히 써내라. 이를 근거로 시비를 판별하겠다."「표해록 권1, 2월 4일」최씨는 이에 대해 상세히 답했으며 반복되는 심문과정을 거쳐 최부일행을 왜구로 잘못 오인 조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에 최씨일행 안건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절차를 받은 것이다.
각급 관리들이 안건을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한데 대해 최부는 깊은 감동을 느끼고, "위엄을 보여주고 관대히 대해 주었으며 후정으로서 대했다."「표해록 권1, 1월 25일」처음에 왜구로 오인되어 갖은 홀대와 멸시를 받은 후 조선인으로 인정받자, "가는 곳마다 공경과 후대를 받았다", "빈 손으로 왔으나 많은 선물을 갖고 간다."「표해록 권3, 5월 19일」이렇게 환대를 받았던 그들은 명나라 황제와 지방관리들로부터 하사품을 받기도 했다. 수상한 물품이 15짐바리에 이르렀다.「표해록 권3, 5월 27일」
2. 홍치초년의 남북교통과 방무(防務)에 관한 기재
역참분포와 위소관문 수비
최씨 일행은 표류하여 절강 우두외양에 이르러 태주부 임해현 사자채에 상륙한 후 항주에 이르렀다. 항주에서 남운하를 따라 진강에 이르고, 진강에서 장강을 건너 양주에 이른다음 다시 북운하를 따라 북경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북경에서 육로로 요동 구련성에 이르러, 압록을 건너 조선으로 돌아갔다. 노정은 8,800여 리. "표해록" 에는 최씨 일행이 연도에서 경유한 산천, 호수, 댐, 역참, 농촌, 도시, 다리, 동굴, 정자, 대, 누각, 사당, 이정표, 시설등이 모두 기재되어 있으며, 더욱이 중국의 관문요충, 각지 역관, 수로교통, 국방 등 상황에 대해, 각별히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역참은 옛날부터 국가의 주요 교통선이었다. 최씨 일행은 중국에 체류한 136일 동안 남에서 북으로 올 때, 바로 연도의 역참에서 숙식했던 것이다.
최부의 실지답사 이정(里程)은, 임해현 시자채에서 도저소까지 160여 리, 도저소에서 영해현까지 400여 리나 되는 바, 그 구간은 연해 벽지로 역관이 없었다. 월계순검사에 이르러서야 포(鋪)가 있었고, 영해현에 이르러서야 백교역이 나타났다. 백교에서 출발, 서점, 연산, 사명, 차구, 요강, 조아, 동관, 봉래, 전청, 서흥을 지나, 항수 무림역에 도착했는데, 도저소부터 무림역까지는 1,500여 리. 무림으로부터 오산, 장안, 조림, 서수, 평망, 송릉, 고소, 석산, 비릉, 운양을 지나 진강부 경구역에 도착했는데, 항주에서 여기까지는 1,000여 리. 여기서 양자강을 건너 양주부 광릉역에 이른다. 여기에서 최씨 일행은 수로와 육로를 통해 북경에 도착한다. 수로로는, 소백, 맹성…하서, 화합, 통주노하 수마역까지이며, 양주에서 여기까지의 이정(里程)은 3,300여 리. 노하로부터 북경 회동관까지는 구간 40리 간격이고, 회동관에서 노하, 하점, 공락, 어양…요양, 요동성까지 1,700여 리. 요동에서 두관…참(站)을 경유 압록강까지는 300여 리였다.
최부 일행의 복행노정은 8,800여 리이고 경유한 역참은 100여 개다. 최부의 관찰에 의하면, 역에는 역승(驛丞)과 역리(驛吏)가 있었으며, 변경의 역참은 "군이 지키고 있어 마치 방어소와 같았다." 육로의 역간 거리는 매우 가까운 데, 일반적으로 30, 40리 또는 50, 60리가 되며, 수로의 역간 거리는 매우 먼데, 일반적으로 60, 70리에 이르며, 또는 80, 90리 혹은 100여 리에 달하기도 했다. 명대의 양주부는 남북 수륙교통의 요지였다. 이 곳에서 북으로 올라가며, 수륙으로 나눠져있는데, 최씨 등이 거쳐간 길은 수로였다. 양주로부터 북경까지의 육로에는 32개의 역관이 있다.「표해록 권3, 6월 4일 부기」 이 육로는 2,500여 리나 되나 수로에 비해 800여 리가 짧다. 최부에 의하면, "사명감을 가지고 맡은 직무에 전력을 다하도록 하고 있다. 상거래는 대개 수로를 이용하고 있으나 가뭄으로 인해 강물이 감수되어 선박의 운항이 불가능할 경우, 또한 관청에서 화급한 일이 생겨 역마를 이용해야 할 경우는 대개 육로를 이용하고 있다."「표해록 권3, 6월 4일 부기」최부 일행 안건은 바로 육로를 통해 북경에 상신했던 것이다.
최부는 연도에서 산해위, 산해관, 장성 등 관문 요충지를 경유했을 뿐만 아니라, 이 지방들의 역사, 지리 및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일일이 기술했다.
산해위에 관해, 그는 표해록에서, "성의 동남쪽에 있는 고산은 해빈에 임해 있었다. 북쪽에는 각산이 우뚝 솟아 있고, 산해관은 그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으로 산을 등지고, 남으로 바다를 두르고 있었다. 산해관 주위 10여 리 거리는 요해지로서 진나라 장수 몽염이 장성을 소축했는 데, 장성은 각산의 허리에 걸터앉아 산해위의 동성까지 연이어 뻗어 바다에까지 도달하고 있었다. 동운 체운소는 성안에 있었다."「표해록 권3, 5월 6일」 산해관은 산해위성의 주요 일부이다. 최씨는, "조교를 지나 산해위 서문으로 들어가… 망부대의 전설에 의하면, 진나라가 장성을 축조할 당시, 맹강의 부인이 남편이 그리워 불원천리하고 찾아왔던 곳이라 한다."라고 기술했다.「표해록 권3, 5월 7일」 관내외부의 방어에 관해 그는, "산해관 이내에는 10리마다 연대를 설치하여 봉화를 대비하고 있었다. 산해관 이후에도 5리마다 작은 돈을 설치하고 푯말을 세우고, 이정을 기록해 놓았다."「표해록 권3, 6월 4일」
"산해관의 동쪽에도 긴 담장을 축조하고…야인을 방어하고 있었다.", "성을 축조하지 않은 부, 주…위소를 설치했다.", "체운소는 모든 성을 축조했고, 방어소와 마찬가지로 성이 있었다."「표해록 권3, 6월 4일 부기」
산해외성에 대한 상술은, "표해록"의 서술에서 전형적인 실예가 된다. 매우 간결한 글로 이 험준한 요새의 방위, 지형, 지세, 연혁, 수비, 시설, 고적 및 요도를 통과할 때의 상황 등을 일목요연하게 기술했다.
최부 일행이 귀국 도중, 장성의 동단(東端)을 거칠 때, 성화년간(成化年間)에 신축한 담장의 모습에 대해 들은 바를, "명나라 홍무년간에 또다시 긴 담장을 쌓아 오랑캐에 대비했으며, 진나라가 축조한 긴 성과 맞닿아 동으로 뻗고 있었다." 라고 기술했다.「표해록 권3, 6월 4일」 긴 담장은 명나라때 요동도사(邀東都司)가 지역분할을 위해, 건축한 "요동변장(遼東邊 )"이다. 그 축성기간은, 수선 정통 7년(1442)에 요서(遼西)에서 쌓기 시작했다 하며, 주로 몽고인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에는 성화(成化) 3년(1467)에 요동에서 쌓기 시작했으며, 주로 여진족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표해록"에, 요하 동쪽으로 벽이 뻗어나가는 모습을, "삼차하 서쪽으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며, 동쪽으로는 북쪽의 장정, 장녕, 장안, 장승, 장용, 장영, 정원, 상유림, 십방사 등 보루가 있고…압록강까지는 대개 수천리나 된다고 했다."라고 기술했다.「표해록 권3, 6월 4일, 부기」 그 것에는 수치에 대한 서술이 있는데, 요동변장의 길이는 당연 1,700여 리이다. 5월 22일 최부의 서술에 의하면, "고돈포를 지나 신관문에 이르니 긴 토성(土城)이 있는데, 그 북쪽이 장성(長城)에 연접해 있었고, 남관문은 그 토성의 중앙에 있었으며, 바로 성화년간에 신축한 것이다." "표해록"중의 명나라 때, 산해관 동쪽에 "긴 담장"을 축조해, 오랑캐와 여진족 침입을 방어했다는 서술은, 역사사실과 부합됨으로 참증자료로 제공할 수 있다.
하천, 운하의 치수(治修), 제방, 수문 수축에 대한 제도
중국의 남북운하는 원나라 지원(至元)26년(1289)부터 태정(泰定)2년(1325)에 이르는 36년동안에 걸쳐, 물을 가로 지르는 치수공사를 완성함으로써 전운하가 관통되었다. 그러나 지원말년에 와서는 물길이 막히고 말았다. 결국 명나라 초기의 준설을 거쳐 운하의 형태가 바로 잡히게 되었다. 명나라 홍치년간은 운하항로가 비교적 그침없이 통하게된 시기였다. 의외의 사고로 표류해온 최씨일행이 중국해안에 이른때는 바로 북경과 항주간의 운하가 완전히 개통된 후였으므로 그들은 전운하를 경유한 첫 한국인이 된 것이다.
표해록의 기술에 의하면 명대전기(明代前期)에는 전국의 조운(漕運)과 남북교통에 관계되는 이 운하를 매우 중시하였으며, 전문기관을 설치하여 관리하였고 항상 준설하며 제방과 수문을 검사, 수축했다한다.
맹성역에 이르렀을 때 최부일행이, "고우주의 석축 제방길이는 30리가량 되었다." 「표해록 권2, 2월24일」 회음역에 도착했을 때 최씨 일행은 범광, 보응, 백마호등을 거쳤다. "범수포로부터 여기까지….연이어져 있었다."「표해록 권2, 2월26일」 회안부를 거쳐갈 때 최씨일행은 회안입구에서 청강갑, 복흥갑, 신장갑등을 통과했다.「표해록 권2, 2월 27일」 "여량홍에 도착…대로 꼰 뱃줄로 끌어야하는데 소 열 마리에 해당하는 힘이라야 위로 끌어갈 수 있었다."「표해록 권2, 3월 2일」"백 보쯤 가니 홍이 있었다. 사, 수, 제, 문, 패 등 강물이 합류하고…뱃줄로 배를 묶어 끌어올렸다."「표해록 권2, 3월 3일」 표해록이 기술한 다성점 협구역 북쪽, 황가갑 미산의 만익비는 간단명료하고, 요령있게 명대의 강, 운하의 치수(治修)상황을 설명했다.「표해록 권2, 3월 5일」 비문은 사람들에게 대운하는 명나라 시기에 와서 물길이 기본적으로 정해짐으로써, 남북의 물자 및 문화교류의 대동맥으로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명나라때 강, 운하치수(治修)의 중점은 양주, 회안, 서주, 제남 구간이었다. 명대 운하의 제방에 관해서도 표해록에서는 역시 상세하게 기술했다. "강물이 다량으로 쏟아지는 데에는 언과 파를 설치하고…어떤 데는 목책까지 있는 곳도 있다."「표해록 권3, 3월 5일」
운하연안의 상업도시
명나라 시기에는 도시가 전보다 한층 발전되었는데, 특히 동남연해지역, 강남지역, 남북 운하연안의 도시 발전이 더욱 빨랐다. 운하연안 도시에 대한 최씨의 기술은 역사와 지리, 유명인사 및 고적에 치중하였으나 하천과 운하교통의 혜택으로 상공업이 발전하게 된 상황도 기재했다.
최씨일행이 연도에서 경유한 운하연안의 도시는 10여 개나 된다. 그 중 임청, 덕주, 천진 3도시는 행정구획이 현소재지거나 군소재지였다. 여기에 표해록에 기재된 항주, 소주, 양주, 회안, 임청, 덕주, 처진 등 운하연안의 도시에 대해서만 발췌하려한다.
항주부, "동남에서 제일가는 도회지로서 화려한 가옥이…가무 탕객이 질탕하다"「표해록 권2, 2월 12일」 항주는 대운하 남단의 화물 집산 중심지였다. "온갖 돛대달린 선박이 빽빽이 정박하고 있었다." 라고 생동감있게 남북의 물산을 각처로 중계운송하는 곳이었던 항주를 묘사하고 있다. 표해록에서는 또한 오산역 일대를 실례로 들며 항주 주변 소도시들의 발전에 대해서도 묘사했는 데, 오산역 일대는, "10여 리에 이르며, 시내 상점들이 서로 접해있다." 덕승파 일대는, "온주, 처주, 엄주, 소흥, 영파 등까지는 절강 이남의 상선들이 집합하는 지방이어서, 돛대가 마치 뭉쳐 있는 것과 같았다."「표해록 권2, 2월 13일」 이것은 명나라 홍치년간의 도시발전이 주변 소도시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소주부는, "동쪽은 바다에 연하여 있고, 세 개의 강을 옆에 두고 다섯 개의 호수에 둘러싸여 있는 옥야천리이며, 사대부도 깊은 못에 물고기가 모이듯 많이 모여 있고 해륙진보와 사라능단, 금은주옥 및 백고기예와 부상대고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었다.", "상점이 별처럼 밀집되어있고 여러 강과 호수의 물이 종횡으로 흘러 교류하는 곳이기도 했으며, 남방의 t아선들이 모여 운집하고 있었다."「표해록 권2, 2월 17일」 보대교에서 고소역에 이르기까지는, "양쪽 기슭에는 상점이 상접했고, 선박이 운집하여 있었다."「표해록 권2, 2월 16일」
소주부에 대한 묘사에서 최부는 당시 비단과 수공예의 2개 항목의 주요 경제사업을 위주로 한 소주부의 상공업 발전모습을 개괄했다. 최부일행이 양주부를 경유할 때 배를 타고 지나갔으므로 물에 오르지 않았지만 최씨가 기재한 수정청, 세과국의 상황으로 보아 당시 양주의 상업이 매우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로써 명조정부는 이 곳에 세수 징수기관을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회안부는, "옛 성의 동쪽에 또 새로 성이 건축되어 있는데, 새로 건축된 성안에 대하위가 있고 그 외 다른 관아는 아직 설치되지 않고 있었다.", "남도문으로부터 북향하여 회하에 도착했다." 그 사이에, "공부창, 상영창, 조운부, 회남, 강북, 강남의 여러 위소는 모두 이 지대에 몰려 있었다. 또한 조선창도 설치되어 있었다."「표해록 권2, 2월 27일」 회안은 명초부터 남북조운에 연접한 교통의 중심으로 성의 경제발전은 운송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운송의 수요에 적응하기 위해서 명정부는 특별히 회안에 운송 감독소를 설치하여 운송사업을 감독했다. 뿐만 아니라 청강포에 상영창을 설치했다. 지폐청, 즉 각관은 민간 상세(商稅)를 징수하는 곳이다. 상로(商路)로서의 운하는 원활했다. 회안의 소금 및 대량의 남북 잡화교통은 모두 회안의 각관을 통화해야만 했다. 관영 조선창은 모두 회안부 청강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임청현은, "남경과 북경의 요충지로서 상인 및 여행하는 사람들이 폭주하는 곳이었다."「표해록 권2, 3월 14일」 여기에서 당시 임청도 역시 운하연안 남북화물의 집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최씨 일행은 임청에서 출발하여 우연히 길에서 진기등 7명의 요동상인을 만났다. 덕주위는, "강이 성의 서북쪽을 둘러 흐르고 있었다.", "지역은 광대하고 인구는 조밀했으며 상인들이 폭주하는 곳이었다."「표해록 권2, 3월 18일」
덕주는 당시에도 남과 북을 왕래하는 교통의 요지 중의 하나였다. 당시 그곳에 건립된 것은 위성 즉 군사상의 요지로 성내에는 거주민이 없었다. 덕주로 몰려온 사람들은 모두 상업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천진위는, "위하는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강으로, 우리는 바로 이 위하를 따라 내려왔다. 백하는 북에서 남류하고 있는 강으로, 우리가 곧 위로 거슬러 올라 갈 강이었다. 두 강은 천진위성 동쪽에서 합류하여 바다로 빠지고 있었다. 성은 두 강물이 합류하는 지점에 임하여 있고, 바다는 성의 동쪽으로 십여 리쯤 되는데 옛날에는 양자강과 황하이남의 운항은 모두 대해를 항해한 후 다시 여기 천진에서 모여 서울에 도달했다 한다. 지금은 운하가 개발되고 수문을 설치하여 개폐를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선박교통도 어디든 통하고 있었다. 성안에는 수위사, 좌위, 우위가 있어서 해운업무를 맡고 있었다."「표해록 권2, 3월 24일」명대 영락 2년 천진에서 성을 건축하고 위를 설치했으며 천진이라는 이름으로 명해졌다. 홍치초년에 천진은 상공업 도시로 발전하는 중이었으며 그곳의 발전은 해운과 하운의 원활한 소통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최씨가 표해록에서 천진이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관건은 치수에 있다고 했는데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최부의 이 견해가 아주 타당했다고 할 수 있다.
3. 명대 홍치초기의 시정풍정에 대한 기재
최부는 중국풍물에 대한 관찰에 유의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민속에 대해서도 매우 유의했다. 중국의 미풍양속에 대해 그는 일률적으로 논한 것이 아니라, "양자강으로써 남북이 나뉘어짐" 이라 하여 관찰하고 대비했다. 아래는 그가 몇개 지방을 중국의 남북풍속을 비교하여 서술한 것이다.「표해록 권3, 6월 4일」
「작성자 주: 중국의 남북풍속 비교 서술한 기재는 강진가 교수의 다른 하나의 논문 "표해록 재평"에 중복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본문을 생략합니다. 필요하신 분은 "표해록 재평"과 교양사에서 발행한 표해록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항목은 시내상범및 산물, 주택, 의복, 성격, 문화지식, 어로, 부녀자, 무기, 단장, 화폐, 종사업, 교통수단, 장례 등이 있습니다.」
최씨는 중국의 남북민속의 차이점을 비교했을뿐만아니라 그 공통점도 기술해 놓고 있다. "서로 같은 점은 귀신을 받들고 도교나 불교를 숭상하고 있는 점이다. 말할 때에 반드시 손을 흔드는 습관이 있고 화를 낼 때는 반드시 입을 찡그리고 게거품을 내면서 말을 하고 음식이 정갈치 못하고 서로 같은 그릇과 같은 상을 쓰고 있으며 젓가락도 제각기 일정한 것이 없어 돌려 쓰고 있었다. 이는 반드시 입에 넣어서 씹고, 절구통은 모두 돌로 만들었으며 맷돌을 가는 일은 노새나 소를 부리고 있었다. 시 주변 술집에는 술집이란 표지의 기를 세우고 행인들은 물건을 어깨에 메고 다니기는 하여도 머리에 이는 법은 없었으며 거의가 상업에 힘쓰고 있었다. 비록 관직을 가진 거족이라 하더라도 몸소 소매속에 저울을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하찮은 이해일지라도 따지는 사람도 있었다. 관부에서는 일정한 형벌이 있기는 하나 곤장같은 것으로 다스릴 때에는 소인 등속이라고 손가락질 하면서 달아나곤 했다."
표해록은 연도에서 본 중국 남북민속의 다른 점을 서술식으로 기술했다. 이 기초적인 자료들은 두말할 것 없이 사실적인 것이다. 비록 주마간산식이었지만 어떤 것은 매우 자세히 관찰했다. 이를테면 강남의 여인복장들은 옷깃이 왼쪽으로 여며져 있고, 창주 이북의 복장의 옷깃은 오른쪽 혹은 왼쪽이었으며 통주 이후부터는 모두 오른쪽이었다. 그야말로 세심한 관찰이라 아니할 수 없다.
4. 최부로부터 관찰된 유학사상의 조선에 대한 영향
최부의 자는 연연, 호는 금남이며 전라도 나주인이다. 1454(조선 단종 2년, 명 경태 5년)년에 출생, 24세 때에(1477년, 조선 성종 8년, 명 성화 13년)지사 3위로, 29세에 문과 을과 1위로 급제하여 교서관 저작, 박사, 군자감 주부,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홍문관 부수찬, 수찬을 역임했다. 33세에 문과 중시 을과에 1위로 급제 하였으며, 34세에 홍문관 부교리, 용마위 사과, 부사직, 관급 5품이었다. 동연 9월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부임하였다. 익년(1488, 조선 성종 19년, 명 홍치 원년) 윤정월 초3일에 부친상의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귀향 하던 중, 불행히도 폭풍을 만나 17일에 중국 절강성 임해현 태주부에 표착, 왜구로 오인되었다. 계속되는 심사과정을 거친 후, 왜구로서의 혐의가 풀려 북경에 체송되었다. 6월 4일 압록강을 지나 조선으로 귀환한 후, 왕명을 받아 표해록을 찬술하니 나이 35세였다. 동년 7월 조선 국왕은 사신을 보내 명 조정부에 최부 등 43명을 귀환시킨데 대해 감사를 표시했다.「성종강정대왕실록 무신 19년 7월 임술」
1492년(조선성종 23년, 명 홍치 5년)에 최부는 3년 탈상후 조선국왕 이강정을 알현했다. 국왕은 궁전에서 상세히 표류전말을 하문한 후, 찬탄하며 말하기를, "발섭사지(跋涉死地)에 국위선양을 발휘했다"며 옷과 신발을 하사하며 칭찬했다. 동년 최부는 서장관으로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갔다. 그 후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홍문교리대관, 승문교리,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고 부응교 및 예문관 응교로 승진되었다. 1496년(조선 연산군2년, 명 홍치 9년), 조선 호서(湖西)지방에 큰 가뭄이 들자 왕명으로 중국으로부터 배운 수차 제조법과 운용 방법을 가르쳤다. 제 2년에 질정관으로 다시 북경에 갔다. 1498년 "사화"가 일어나니, 최부는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당한다. 1504년(조선 연산군 10년)에 처형을 당하니, 그의 나이 51세였다. 1506년(조선 연산 12년),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최부의 저술은, 후세인(後世人)이 편집한 "금남문집"에 수록되었으며, 그 중 표해록이 있다. 표해록에서 그의 모든 행동은 유학사상에 기초를 두었음을 살펴 볼 수 있다. 조선에 유입된 유학사상은 14세기초 고려왕조 후기와 조선왕조 초기를 거쳐서야 비로소 불교를 대신, 통치사상으로 자리를 잡는다. 이씨조선 시기(1392-1910)는 유학을 대폭 흡입, 확장시켰다. 조선 이조시대에 통치적 지위를 누린 유학사상은, 선진(先秦)의 사상도 아니었으며, 한 대(漢代)의 사상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송명이학(宋明理學) 사상이었다. 조선에서는, "아들이 태어나면 먼저 "소학", "가례"를 가르치며…치상거가(治喪居家)는 주문공가례를 따른다."「표해록 권3, 3월 29일」 "집집마다 모두 효(孝), 제(悌), 충(忠), 신(信)을 본분으로 삼는다."「표해록 권1, 1월 18일」 "사람들은 모두 집에 들어와서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어른을 공경하며 임금에 충성하고, 친구에 신의를 지킨다."「표해록 권2, 2월 11일」 "선비들은 경학궁리(經學窮理)를 업으로 삼고 있다." 「표해록 권2, 2월 17일」"사서오경을 공부하는데, 경서 하나만 가지고서는 유학자의 대열에 끼지 못한다."「표해록 권3, 4월 8일」 "불도를 이단시하고, 유도(儒道)를 존중한다."「표해록 권2, 2월 11일」 이러한 상황하에, 유학가정 출신인 최부는 어릴때부터 유학의 정통교육을 받았다. 사서오경을, "격치성정(格致誠精)의 학문으로 삼았으며,"「표해록 권1, 1월 19일」 유학자들이 신봉하는 "천리(天理)"의 윤리사상을 추구하고 실천하였다.
"천리"중 중요한 것은 "삼강(三綱)"이며, 그 중 군신, 부자관계는 주요 관건이었다. 최부는 상중인 동시에, 생사문제에 직면했으나 "천리"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않았다.
최씨등은 구사일생으로 영파지방에 표착하였으나, 적선을 만나 다시 해상에서 표류한다. 재차 태주지방에 표착, 배 6척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씨와 그의 부하는 아래와 같이 문답을 한다.「표해록 권1, 1월 16일」
"관인(官人)의 위의를 보이지 않아, 도적을 불러들인 것같이 되어 죽을 뻔했다. 관대를 갖추고 저들에게 위의를 보여주시오."
"자네는 왜 의를 훼손하는 일을 종용하고, 나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가."
"이처럼 죽음이 코앞에 있는 마당에 어떻게 예의만 차립니까. 임기응변으로 살길을 찾은 후에 예의로 치상(治喪)한다고 해서 의를 해하는 길이 아닙니다."
"상복을 벗는다는 것은 바로 길(吉)이기 때문에, 효(孝)가 아니다. 그리고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차라리 죽음에 이를지언정, 효가 아니고 진실이 아닌 처신은 못한다. 바르게 처신하고, 그 다음 오는 일에 순응하겠다."
최부는 위험을 만나 이국땅에 갔지만, 의연하게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따라 소복차림으로 음주를 하지않고 육류를 먹지 않았다. 그리고 삿갓을 쓰고 상관(喪冠)을 하였는데 이는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으며, 피눈물의 마음을 견지(堅持)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북경에서 상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길복을 입어야 하는 바, 이 일이 그를 궁지에 빠트렸다. "상중의 몸이나 길복은 예에 맞지 않으며, 상복을 입조함도 예의상 어긋난다."「표해록 권3, 4월 18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상을 받을 때에는 예의 절차가 없어, 남이 대신 받을 수 있으나, 사은 때에는 반드시 직접 황제에게 친배하여야 했다. 최씨는 비록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사세(事勢)의 핍밥으로 길복을 입고 장안문으로 입궐하였다. 예식이 끝난 후에 다시 상복을 갈아입고 입궐한 문으로 나왔다. 해상에서 표류시, "모진 풍랑을 겪으며 살갗이 이처럼 회복되지 않고, 발이 벗겨졌다." 그는, "신체발부, 효지시야(身體髮膚 孝之始也)"「표해록 권2, 2월 9일」라는 효경(孝經)의 한 구절을 지적하며 슬퍼했다.
孝와 忠은 統一的이다. 효경의 제 1장에서 개종명의(開宗明義)는, "夫孝, 始于事親, 中于事君, 終于立身"이라 말했다. 효도의 전 과정에서 移孝作忠, 奉事君主, 服務國家를 최상의 효행으로 보았다. 최씨는 유가경전을 근거로 하여, 효와 충을,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는 말이 있다. 어버이에 효도를 다하지 못한 사람이 임금에게 충성을 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표해록 권1, 1월 22일」라고 생각했다. 종법제(宗法制)를 기초로 하는 봉건사회에 있어서, 군주는 바로 국가를 대표하였고, 충군(忠君)은 애국을 표시하며 일체의 공덕은 모두 군주에게 속하는 것이다. 최부는 명나라 황제의 상을 받은 것은, 조선 국왕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황제가 우리에게 시상한 것은 우리 국왕이 외천사대지덕(畏天事大之德)이 아니었든들 자네들이 이러한 영광된 자리에 이를 수 있겠는가. 우리 국왕의 덕을 잊지 말아야 한다."「표해록 권3, 4월 20일」라고 부하들에게 특별히 강조했다. 최부는 孝親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주에게 더욱 충성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국왕의 성까지도 다른 사람에게 경솔히 말하지 않았다. "나라밖에 있으니 괜찮다." 라며 유도질문을 하였으나 최부는, "신하된 자, 나라밖에 있다 하더라도 나라를 배신하고, 그 행동을 달리하며 그 말함에 변함이 있어서는 안된다."「표해록 권1, 1월 22일」라고 말했는데, 이 언행은 바로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상을 집중적으로 표현하였고 상사에게 복종하는 儀式, 情感 및 心理의 표시이다. 그러나 최부는 결코 어리석은 우충지사(愚忠之士)는 아니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일생동안 자신을 돌보지 않고 분투하였고, 여러차례 忠言을 서슴치 않으면서 대의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것이다.
유학의 경국치세(經國治世) 개념은 역사적 사명감과 사회적 책임감이다.
최부는 비상 상황하에서도 이 관념을 견지하였다. 그는 과거에 본국인이 중국 강남을 직접 가본 일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강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느끼며 강남에 표류하게 된 것을 좋은 기회로 삼았다. 그는 연도를 따라서 여행하며 세심한 고찰을 하였고, 또한 4명의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매일 기록하게 하였다. 명 홍치초년의 중국 장강 남북의 정황에 대한 그의 기술은 얻기 어려운 제일류의 자료였다. 특히, 중국 강남의 水車는 조선에 전해졌는데, 이는 그의 큰 공로였다. 명 홍치년간 남부지역에서 농부가 사용했던 수차는, 힘이 적게들고, 물을 많이 끌어올릴 수가 있어서, 논이 많고 가뭄이 자주 드는 조선에 유익하고 적합하였다. 그는 수차의 형태, 제조법, 재료, 사용법까지도 상세하게 기록했다. 「표해록, 권2, 3월 23일」 귀국후, 남부 지방에 가뭄의 피해가 크자, 왕명으로 내려가 수차의 제조방법과 운용방법을 농민에게 가르침으로써 가뭄을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成宗康靖大王實錄, 무신 19년(1488) 6월 丙辰」
經國治世와 관련, 유학에 있어서 국가품위는, 군주의 명을 받들어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데에 있다. 최부는 외국에서도 이를 실천했다. 구사일생으로 표착했을 때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최부는 부하들에게, "우리나라는 원래 예의지국이다. 비록 분상중에 표류되어 군색하고 당황중이라 하더라도 예의와 위의를 보여 이 지방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나라의 예절을 알도록 해야 한다."「표해록 권1, 1월 17일」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들은 경우에 따라 직위와 직급에 따라 절을 하게하고, 마을이나 성에 도착하여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읍례를 하도록 했다. 한번은 지방군리가 수행원중 한 사람을 구타하였는데, 최부는 관인에게 이를 보고, 치죄케 하였다.「표해록 권1, 2월 4일」 최부는 죄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중국 관원에게 사람을 보내, "우리와 같은 타국인에 대해서도 법을 가지고 처리해야할 것이며, 더욱이 우리 군인들은 타국에서 언어와 습관이 불통하여 실로 맹아와 같은데, 비록 실수가 좀 있다 하더라도 가련하게 여겨 타이를 일이지, 도리어 때려서 상처를 입게하는 행동은 우리를 호송하는 관인으로 도리가 아니다."라고 힐책하기도 했다.「표해록 권2, 2월 24일」 최부는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를 지냈다. 그가 군량(軍糧) 관계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 문제는 군사기밀과 연관된다고 생각하여, 자신은 儒臣이며, 군자감 주부를 재임한지 한 달만에 전임되었으므로 그 상황은 잘 모른다고 핑계를 댔다. 그의 대답은, 이치에 맞는 말이지만, 문제를 교묘하게 피했던 것이다. 이처럼, 최부는 국가의 이익과 존엄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입신행사(立身行事)의 기준으로 삼았다.
최부는 正道를 걷는 선비였다. 품행과 절개를 중히 여기고, 처신을 단정히 하였다. 절강성의 봉화 연산역에서 폭행 당했을 때, 동행한 관인이, 의류 꾸러미까지 약탈당했다는 내용을 현령에 고발하겠다는 말에, 최부는, "약탈당하지도 않은 물건을 강탈당했다고 무고하여 죄없는 사람을 벌받게 하면 사리에 어긋나고, 우리를 보호하는 것은 좋으나,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데 공갈하면, 갈중침포죄(喝衆侵暴罪)가 되니 하지 않는게 좋다."「표해록 권2, 2월 25일」면서 강직한 인품을 나타냈다.
格(物), 致(知), 誠(意), 正(心)으로 학문을 삼고있는 최씨는 가는 곳마다, 유학의 道에 따라 행동을 하였다. 유학사상이 조선에 미친 영향은 최부를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최부는 여행가가 아니었다. 그는 예측하지 못한 폭풍을 만나 중국에 표착한 것이다. 비록 이탈리아 여행가인 마르코폴로처럼 먼 길을 고생하며 동방에 온 것도 아니고, 일본 승려 엔닌(圓仁)이 당나라에 와서 겪은 고난과 위험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더욱이 마로코폴로나 엔닌과는 달리 최씨에게는 아무런 물적, 정신적 준비도 없었다. 엔닌은 고승의 신분으로 당나라에 와서 성지를 순례하며 불법을 탐구하였고, 마로코폴로는 원나라에 와서 유람도 하였고 객경으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최부의 경우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우선 왜구로 오인받았다가 여러급의 심사를 거친 후, 경계를 침범하지 않았다고 인정은 받았지만, 표류자였으므로 규정된 시간과 여정에 따라 관원의 호송하에 귀국하는 수 밖에 없었다. 시간상으로, 마르코폴로는 17년간 유람하였고, 원인이 중국에서 성지순례하며 불법을 탐구한 기간도 9년 7개월이나 된다. 그러나 최씨가 중국에 체류한 시간은 단지 136일로 그들의 체류기간의 끝자리 수도 안되며, 또한 그 대부분을 여정으로 보냈다. 이처럼 어려운 조건하에서, 최부가 광범한 내용의 장편 기행문을 썼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엔닌은 고승이었고, 마르코폴로는 여행가였지만, 최부는 바로 유가사상에 귀의한 사대부였다. 만일 견인불발의 정신이 그들의 사업 성취의 공통적인 품성이었다면 유학을 신봉하고, 그것을 실천한 최씨의 사명감과 사회 참여의식은 훨씬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중국의 역사문화에 대해, 최씨는 엔닌보다 숙지하였고, 마르코폴로보다 더욱 정통했던 것이다. 참증적 자료가치가 있는 최부의 표해록은 "당나라 불법탐구 여정기", "마르코폴로 여행기"에 이어 외국인이 중국의 상황을 기술한 또 하나의 중요한 고서임에 손색이 없다.
최부의 구사일생 고국 귀환, 그리고 안타까운 죽음
1488년 명나라 영파 해안에 표류해 귀환한 뒤 『표해록』을 남겨 유명한 최부와 그의 조상 최사전, 최부의 외손인 유희춘을 모시고 있는 무양서원(武陽書院). 세 사람 외에 병자호란 직전 절의를 지킨 나덕헌도 모시고 있다. 무양서원은 1927년 탐진 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 세운 서원으로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에 있다. [사진=문화재청홈페이지]
1487년(성종 18년) 11월 교리 최부(崔溥·1454~1504)는 삼읍추쇄경차관(三邑推刷敬差官)이란 직함을 갖고 제주도에 도착한다. 육지에서 제주도로 도망쳐 들어간 죄인들을 색출하고 노비와 목장 행정을 살피라고 파견된 특별 어사였다. 그런데 이듬해 1월 30일 최부는 나주에서 달려온 집안 노비로부터 부친의 부음을 듣는다.
상복으로 갈아입고 황망히 귀향을 서두르는 그를 제주의 지인들은 만류했다. 한라산에 구름이 끼고 날씨가 고르지 못하면 큰 바람이 일어날 우려가 있다며 배를 타지 말라고 말렸다. 하지만 윤1월 3일, 최부는 나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런데 추자도 부근까지 왔을 때 배는 역풍에 휘말려 거꾸로 떠내려가고 만다.
대양에서 표류하기를 열흘 남짓, 최부와 일행 마흔세 명은 말린 쌀을 씹고, 오줌과 빗물을 받아 마시며 악전고투를 벌인다. 12일 명나라 영파(寧波) 근처의 하산(下山)이라는 곳에 표착한다. 그곳은 해적들의 소굴이었다. 해적 두목은 최부에게 금은을 내놓으라며 작두로 목을 베려고 덤빈다. 최부의 부하들이 빌면서 애원하자 그들은 의복과 식량 등을 빼앗은 뒤 배의 노와 닻을 끊어 버리고 사라진다.
17일 우두(牛頭)라는 해안에 이르렀을 때 두 번째 위기가 찾아온다. 그곳을 지키던 사자채(獅子寨)의 명 관원들은 최부 일행을 왜구(倭寇)로 확신하고 목을 베어 공을 세우려고 덤빈다. 최부의 부하들은 최부에게 상복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으라고 간청한다. 사모관대를 갖추면 조선의 관원임을 인정받아 왜구 혐의를 벗고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상복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는 것은 효의 도리에 어긋난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효도와 신의가 아닌 일은 차마 할 수 없다”고 버텼다. 부하들이 “목숨을 건진 뒤에야 의리도 지킬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항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최부 일행은 결국 그들을 죽이려는 명군을 피해 내륙의 마을로 도주한다.
굶주림과 공포에 지친 최부 일행은 윤1월 21일 무렵에야 비로소 조선 사람임을 인정받고 왜구라는 오해가 풀렸다. 이후 영파부의 관원은 최부 일행을 북경으로 보낸다. 영파에서 항주(杭州)·가흥(嘉興)·소주(蘇州)·진강(鎭江)·양주(揚州)·제녕(濟寧)·임청(臨淸)을 거치는 수천리 길이었다. 각 지방을 지날 때마다 최부는 심문을 받았다. 그는 그래도 상복을 벗지 않았고 고기와 생선·젓갈 등은 입에 대지 않았다. 부친상을 당한 상주로서 몸가짐을 흐트러뜨릴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계속).
미암 유희춘, 유배 중 학문에 정진하다 - 담양 연계정·모현관, 광주 무양서원, 해남 해촌서원
암기력 돋보이고 경연에 특출했던 선비
벽서사건으로 유배의 길…선조 때 복권돼 중용
변방에
모현관
서도 학문에 정진…보물 '미암일기' 집필
종성은 천하의 궁벽한 곳
티끌 모래 날로 일어 자욱만 하네.
사투리를 잃지 않은 십년 나그네.
부질없이 고향 꿈만 꾸고 있다네.
북쪽 변방 아무도 물어오는 사람 없는데
하서 혼자 나를 생각하며
삼 백 자나 되는 시를 새로 적어 보내
털끝만큼 어긋나다 크게 그르쳤음을 말해주네.
두만강 끝 함경도 종성에서 유배중인 한 선비가 전라도 장성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장성 친구가 보낸 안부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아름다운 아미암 같은 사람
어찌 이리도 생각나게 하는 가
언제 함께 평상에 앉아
책 펴고 조금씩 갈라 밝힐 수 있을 지
이 편지들의 주인공은 하서 김인후(1510-1560)와 미암 유희춘(1513-1577)이다. 미암은 종성에서 유배중이고 하서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장성에서 살고 있다.
1545년 인종이 승하하고 11살의 명종이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한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밀지를 내린다. 윤임, 유관, 유인숙등 대윤 일파를 제거하라고 지시한다.
이 밀지를 받은 대신들은 모여서 상의를 한다. 유희춘, 백인걸 등은 그 자리에서 부당함을 지적한다. 죄목이 분명하지 않고 밀지에 의해 처리할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문정왕후는 크게 노한다. 곧바로 유희춘 등은 파직을 당한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547년 9월에 다시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척신 계열인 부제학 정언각이 봉투에 든 글 한 장을 문정왕후에게 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 딸이 남편의 임지를 따라 전라도를 가기에 전송하려고 과천현의 양재역에 갔다가 익명의 벽서를 보았습니다. 이에 봉하여 올립니다.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력을 농단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윤원형 일파는 이 벽서사건을 이용하여 윤임의 잔당세력과 정적들을 일제히 제거한다.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 윤원형을 탄핵한 송인수, 그리고 이약빙을 사사(賜死)시키고 ,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임형수, 백인걸, 정유침(정철의 부친), 권벌 등 수십 명을 귀양 보낸다.
그리하여 노수신은 진도로 유희춘은 제주도로 유배를 간다. 그런데 유희춘은 유배지가 함경도 종성으로 다시 바뀐다. 제주도가 고향인 해남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였다.
미암 유희춘. 그는 해남에서 태어났다. 미암(眉庵)이란 호도 해남읍 금강산에 있는 초승달 같고 미인 눈썹처럼 생긴 바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아버지 유계린은 최부의 사위인데, 순천에서 유배중인 김굉필에게 공부를 배웠다.
최부와 김굉필은 둘 다 갑자사화로 처형된 사림이고, 미암의 형 유성춘도 기묘사화로 화를 당하였다. 미암도 대를 이어 사화의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다.
미암은 15세 때 하서와 같이 동복현에서 유배중인 최산두에게 공부를 배웠다. 그리고 하서보다 먼저 관직에 등용되어 하서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그는 성균관 관원이었다.
그때 하서는 전염병에 걸려 위독했는데 사람들이 감히 돌보지 못하였다. 미암은 하서를 밤낮으로 간호하여 다시 살려냈다. 허균은 '성소부부고'에서 이 일화를 전하고 있다.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을 가는 도중에 미암은 하서를 만난다. 하서는 미암과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실낱같은 재회를 기약한다.
술에 취해 꺾었다오. 버들가지 하나
이별의 순간은 다가오는 데, 한없는 이 정을 어이하리.
만리라. 내일이면 머나먼 길을 떠난다지.
저 달이 몇 번이야 밝아야 그대 돌아오려나.
그리고 하서는 ‘자네가 멀리 귀양을 가고 처자가 의지할 데가 없으니 자네의 아들을 나의 사위로 삼겠노라’고 한다. 그 당시 미암의 외아들은 벼슬이 없었다. 하서 집안에서 반대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서는 셋째 딸을 미암의 외아들에게 시집보낸다. 미암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삭풍이 몰아치는 외진 땅 종성에서도 미암은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육진이 있는 변방은 되놈으로 불리는 말갈족과 대치하고 있는 곳이었다. 백성들은 말 타고 활 쏘는 무인 기질이 농후하였고 학문과는 아예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그는 종성 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처음에는 지겨워하는 백성들도 차츰 그를 따라 공부를 배웠다.
그는 총명이 뛰어나서 읽은 책치고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유배중에도 속몽구 (續蒙求) 4권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모두 암송하고 있는 것을 토대로 하여 만든 것이다.
1565년에 문정왕후가 별세하고 윤원형이 축출 당하자 양재역 벽서 사건은 소윤이 꾸민 공작정치로 밝혀지고 유배 갔던 사림들은 다시 등용 된다. 그러나 유희춘은 그러하지 못했다. 충청도 은진으로 유배지가 옮겨지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1567년에 선조 임금이 즉위하자 세상은 달라졌다. 사림들이 중용되었고 사화로 피해를 입은 선비들이 다시 복직되었다.
1567년 10월 선조는 유희춘, 노수신의 복직을 명한다. 20년 만의 관직이었다. 그래도 품계는 예전 그대로였다. 기대승이 나섰다. “20년 귀양살이 중에도 학문을 폐하지 않고 곤궁과 환난 중에도 변절하지 않은 사람은 순서를 따르지 않고 발탁하여 기용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이다.
미암사당
1568년 1월 드디어 선조는 기대승의 건의를 받아 들여 유희춘, 노수신을 특진시킨다.
미나리 한 펄기를 캐어서 씻우이다.
년대 아니아 우리 님께 바자오이다.
맛이야 긴치 아니커니와 다시 씹어 보소서
미나리 한 포기를 캐어서 씻습니다. 다른 데 아니라 우리 님에게 바치옵나이다. 맛이야 좋지 않습니다마는 다시 씹어 보소서.
이 시조는 1571년 유희춘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왕명을 받고 내려온 박순과 함께 전주 진안루에서 노닐 때 지은 헌근가이다. '여씨 춘추'의 ‘벼슬에 있지 않는 이가 살진 미나리를 캐어서 임금께 바치고 싶다‘는 구절에 착안하여 살뜰한 연군의 정을 표현하였다. 하기야 미암 입장에서는 선조 임금에게 무엇이든 못 바치랴. 그를 등용하여 특별 승진 시켜준 이가 선조 아니던가.
유희춘은 선조임금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특히 경연에서는 특출하였다. 경전은 모르는 것이 없고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 총명한 암기력은 그를 돋보이게 하였다. 그는 책도 많이 만들었는데 국조유선록과 헌근록이 대표작이다. 국조유선록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등 네 분 명현의 저술과 언행, 행장을 엮은 책이고, 헌근록은 역대 선현들이 임금에게 제시한 임금의 길을 편찬한 책이다.
한편 19년의 유배기간동안 집안일을 도맡아 한 사람은 부인 송덕봉이었다. 그녀는 담양 출신으로 친척인 면앙 송순의 중매로 유희춘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유배기간 동안 노모를 모시고 집안을 이끌며 3천리나 되는 종성 유배지를 찾아다니는 여장부였다. 그리고 여류시인이었다.
가고 가서 마천령에 이르니
동해 바다 끝이 없더니 종성이 나오더라.
여인네가 만리를 어인 일로 왔는가.
삼종(三從)의 의리는 중하고 내 몸은 가벼운 것을
연계정
이 시는 언제인가 송덕봉이 마천령을 넘으면서 지은 시인데 '대동기문'에 전하여 진다.
유희춘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미암일기'이다. 유희춘은 다시 벼슬한 1567년 10월부터 죽기 전인 1577년 5월까지의 11년간의 기록을 자세하게 일기로 남긴다. 미암일기는 16세기 조선 시대의 생활사를 알 수 있는 소중한 기록으로서 보물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희춘의 신위는 외할아버지 최부와 함께 해남 해촌서원과 광주 무양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또한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에는 미암이 노후에 지낸 연계정과 미암일기를 보관한 모현관이 있다. 미암과 부인 송덕봉을 모신 사당도 후손이 사는 집 뒤에 있다. 그리고 모현관 옆에는 미암 유물 전시관 공사가 한창이다
미나리 한 펄기를 캐어서 씻우이다.
년대 아니아 우리 님께 바자오이다.
맛이야 긴치 아니커니와 다시 씹어 보소서
미나리 한 포기를 캐어서 씻습니다.
다른 데 아니라 우리 님에게 바치옵나이다.
맛이야 좋지 않습니다마는 다시 씹어 보소서.
유희춘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왕명을 받고 내려온 박화숙과 함께 전주 진안루에서 노닐 때 지은 시조이다. <여씨 춘추>의 ‘벼슬에 있지 않는 이가 살진 미나리를 캐어서 임금께 바치고 싶다‘는 구절에 착안하여 살뜰한 연군의 정을 표현하였다. 하기야 미암 입장에서는 선조임금에게 무엇이든 못 바치랴. 1547년 정미사화로 20년간의 귀양살이에서 그를 등용하여 고속 승진을 시켜준 이가 선조임금 아니던가.
한편으로는 궁중에 실력 있는 신하가 많지만 지방에도 신실한 신하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는 선조 임금 덕분에 당상관에 오르는등 광영을 누렸다. 이런 것이 말년 복이 있다고 말하나.
미암 유희춘이 말년에 살던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여기에 보물 260호인 미암일기가
보관되어 있다.
미암 일기<판목포함> 보물260호
소 재 지; 전남 담양군
이 책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인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1513∼1577) 선생이 직접 손으로 쓴 일기이다. 유희춘(柳希春)은 본관 선산(善山). 자 인중(仁仲) 호 미암(眉巖) 시호 문절(文節) 중종8년에 해남에서 태어났다. 1538년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 정언 등의 벼슬을 거쳤으나, 1547년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다시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1575년 이조참판을 지내다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글쓰기로 보냈다.『미암일기』외에도『속몽구』,『역대요록』등을 남겼다. 지금 남아있는 일기는 선조 즉위년(1567) 10월부터 선조 10년(1577)까지 11년간에 걸친 내용이다. 내용 가운데 일부 중간은 몇 군데 빠진 곳이 있으나, 여기에는 조정의 공적인 사무로부터 자신의 개인적인 일에 이르기까지 매일 일어난 일과 보고들은 바를 빠짐없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일지는 임진왜란 때 선조 25년 이전의 기록이 다 타고 없어져,『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이이의 『경연일기』와 더불어『선조실록』의 기본사료가 되었다. 본래는 14책이었으나, 그 내용은 아래에 따로 기록한 것과 같다. 이 책은 조선시대 개인의 일기(日記)중 가장 방대한 것이며 동시에 사료(史料)로서의 가치가 크다. 일기(日記)에서 자기의 일상생활에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하여 상세히 적었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아울러 당시 상류층 일반학자들의 생활상황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본인이 중앙의 요직으로 있었던 만큼 선조(宣祖) 초년에 조정에서 일어난 사건은 물론 경외의 각 관서의 기능과 각 관리들의 내면적 생활 및 사회·경제·문화·풍속등을 여실히 보여 준다. 한편 임진왜란에 선조 25년 이전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다 타고 없어져서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할 때 사료(史料)로 된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일기초(日記草)중 제 12책에는 부록으로 미암(眉巖)과 그 부인(夫人) 송씨(宋氏)의 시문(詩文)과 잡록(雜錄)도 수록되어 있다. 이 일기(日記)는 담양의 미암(眉巖) 선생의 사당(祠堂)에 보관되어 있다가 근자 후손에 의하여 이 앞의 연당(蓮塘)안에 석조로 보관건물을 건축하여 보관하고 있다. 이 책은 판본을 포함하여 일괄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이 중 3매를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임시 보관했다가 현재는 작자의 후손들이 보존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 개인의 일기 중 가장 방대한 것이며, 동시에 사료로서의 가치도 크다. 조선시대의 각 관서의 기능과 관리들의 내면생활, 사회, 경제, 문화, 풍속 등을 여실히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해남사람들은 해남읍을 병풍처럼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미암산(금강산)아래 미암바위를 잘 안다.
미암 유희춘(1510~1577년)의 호는 미암바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는 당파싸움으로 정치가 어지러웠던 1513년(중종8) 12월 해남읍 해리에서 태어낫다.
본래 그의 아버지 계린은 광양인 이었으며 그가 해남으로 터를 옮겨 오면서 미암과 그의 형인 성춘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미암의 가계를 보면 고조부 문화는 감포만호를 증조부는 진사를 지냈으나 부친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서 독서에만 열중햇으며 어머니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무오사화 때 유배되고 갑자사화 때 처형을 당한 금남최부의 두째딸이다.
미암은 어려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고 16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최산두, 김안국에게 사사했다.
특히 김안국에게 큰 영향을 받고 그를 존경했는데 너무 영리햇기 때문에 제자로 대하지 않고 동등하게 토론을 폈다고 전해진다.
선산 유씨인 미암은 향교 18현 중 한 명인 하서 김인후와 함께 모재 김안국의 문화생이 되어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미암의 선생인 김안국은 경기학파로 조광조와 함께 김장생 문화생이었던 사람이다.
같은 선생 밑에서 공부했던 미암과 하서의 일화는 유명하다. 같이 공부를 햇지만 먼저 과거에 급제한 미암이 성균관 조교로 있을 때 부득이하게 그 밑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하서가 전염병에 걸려 사람들과 격리 당하고 있을 때 미암이 극진히 치료해 낫게 했다.
이같이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된 집까지 찾아와 친구를 보살핀 우정이 이후 미암이 을사사화로 제주도로 유배 갈 때 서너 살밖에 안된 미암의 아들인 경렴을 하서가 거두었다고 하며 나중에는 사위가 된다.
미암은 성격이 매우 소탈해 집안 안살림에는 소홀했다.
의관이나 수건, 버선 같은 것이 때가 묻고 헤어졌어도 개의치 않았고 거처하는 방도 책상위에 책을 펴 놓은것 외에는 아무리 지저분하고 먼지가 쌓여도 소제할줄 몰랐으나 학문에 대한 것이나 정치하는 도리에는 투철한 소건과 해박한 지식으로 남들이 도저히 생각 못한 것을 토로해 주위를 놀라게 하곤 했다.
미암은 중종 32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별시병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 보임되고 춘추관, 기사관등을 거쳐 중종 37년에는 세자강원설서에 임명돼 동궁을 돌며 지도하였다.
당쟁의 회오리 을사사화
인종이 죽자 정치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다. 명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해 세력을 얻게된 윤원형 일파가 인종의 외숙인 윤임과 그 일파인 좌의정 유권, 이조판서 유인숙 등을 제거하기 위해 교지를 내려 부정하다하여 반론할 것을 거부했다.
다음날 윤원형은 같은 당파인 임백령 허현 등과 짜고 세 사람의 죄를 고해 교지를 거부한 유희춘 등 대간을 파직하고 을사사회를 일으킨다.
이로 인해 미암은 파직 당하고 이리에 칩거한다. 그러나 이듬해 9월 전라도 양재역에서 벽서가 발겨노디는 소위 '양재역벽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안 문정왕후는 죄인들을 가볍게 처벌한 것이 사건의 원인이라는 의견을 내 미암을 주도에 유배했다가 고향인 해남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조선 최북단 함경도 종성으로 위배시켰다.
종성에서 미암은 19년 동안 유배 생화을 하게 되는데 밤낮으로 깊은 사색에 잠겨 저술을 계속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여 변경지역 주민의 교화에 힘썻다.
이후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 세력이 쇠퇴하자 을사파 죄인들의 사면복권이 일어나 미암은 충청도 은진에 위배되었다가 2년후에 풀려났다.
미암은 선조 원년인 1567년에 풀려 나와 홍문관교리, 이조판서를 거쳐 학문하는 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고 선망되었던 관직인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다.
미암의 학문적 경향
미암의 학문적 경향은 유학경서에 충실한 경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학문적 풍조였던 유학의 사상적 형이상학적 연구를 중시했던 도학에 대해 그는 탁상공론에 불과한 공허한 학문이라는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일기에도 이 문제를 가지고 퇴계이황과 자주 논쟁을 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미암은 이황 뿐 아니라 율곡과도 자주 접촉, 그의 학문적 견해인 도학을 비판하면서도 서로 책도 교환해서 보고 소감문도 교환하는 등 학문적 교류를 맺었다.
후진양성을 중시했던 도학 학풍인 영남학파들에 비해 미암은 경학을 중시했던 만큼 후학 양성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문화생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미암은 많은 저술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문집 『국조유선록』.『역대요록』2편『동몽구』.『미암일기』등 몇가지이다.
살아있는 역사서 미암일기
『미암일기』가 우라나라 역사에 인식된 것은 임진왜란으로 선조초년의 기록이 많이 유실되어 「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그의 일기가 주요 자료로 이용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선조 25년 이전의 승정일기가 모두 불타버리자 그후 조선실록을 만들 때 이이의 경정일기와 미암일기를 참고하여 선조실록을 꾸몄다.
미암일기에는 위로는 조정의 공적, 사적인 일부터 아래로는 미암 개인의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매일매일의 일, 견문한 것 등이 빠짐없이 상세하고도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또 명종말 선조초의 여러 가지 사건, 관아의 기능 관리들의 내면생활, 본인이 홍무관 전라도 감사 사헌부 등을 역임하면서 겪은 사실들을 비롯해 당시의 정치, 사회경제 상태와 풍속 등을 기록해 놓았다.
특히 동서분당 전의 정계의 동향과 사림의 동태, 감사의 직무수행, 경재소와 유향소의 조직과 운영, 중앙관료와 지방관료와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써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또 실록이 주로 정치에 관한 것만 언급하고 있는데 반해 미암일기에는 선조초년의 조정에 대한 대소사와 일반 백성의 사회, 경제사, 문화사를 이해하는데필수자료로 이용되고있다.
미암일기는 1936~1938년에 『조선사료총간』으로 5권에 두주, 방주를 곁들여 간행한 바 있으며 국보 401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보물 206호로 지정돼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모현관에 원본이 소장되어 있다.
모현관은 1959년 4월에 준공했으며 모현관이 건립되기 이전에는 미암의 14대손인 고 유대수씨가 가보로 간직해 왔다.
미암은 해남출신이지만 담양에 유물이 남아있는 것은 미암의 부인인 송씨 부인이 담양 출신으로 미암이 24세때 결혼과 함께 과거급제를 해 관직에 오르면서 그의 부인이 거쳐를 담양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을사사화로 정치는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정치가 어지러웠던 틈을 타 경제가 균형을 이루지 못해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백성이 늘어가더니 인심조차 흉흉해졌던 시대, 그 사회를 중간관리 입장에서 안타깝게 지켜본 미암이 19년의 귀양살이 동안 써낸 일기는 조선중기 사회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지식인의 최소한의 양심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암은 현재 해남읍 구교리에 있는 해촌사에 배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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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중요한자료인거 같내요 감사하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