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화 네 흰 뜻
그를 몰라 헤맸거늘
사월 한봄에
온 꽃이 다 붉는 것을
세상이 다 그러할 걸
미리 알고 피던 것을
* 목련은 이른 봄에 핀다.
잎도 나기 전에 소복한 여인처럼 하얀 꽃을 토해낸다.
그 빛이 희다 못해 푸르다.
왜 목련은 따스한 봄도 오기 전에 그렇게 일찍 피어난
것일까. 아마 요염하고 수다스런 다른 꽃들과는 함께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일찍 왔던 것인지 모른다.

기다림 / 임보
길가 담벼락 아래
한 녀석이 떨고 있네
12월 낡은 햇살
바람도 시린데
지난여름 그 홍조紅潮
누구에게 다 뜯기고
버려진 수밀도水蜜桃
한 알의 단단한 씨
* 담벼락 밑에 뒹굴고 있는 복숭아씨 한 알,
어느 곳에 묻혀 뿌리를 내려야 할 텐데―
추위에 떨며 아직 방랑하고 있다.

씨 / 임보
껍질을 벗기면 다시 또 껍질
껍질을 벗기면 다시 또 껍질
양파의 씨가 어디 있느냐고?
네가 벗기는 그것이 바로 씨다
* 양파의 씨는 껍질만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
껍질 속에서 씨를 찾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의 실체實體도 이와 같아서
찾으려 하는 것이 오히려 부질없는 일인지 모른다.

늙음 / 임보
눈 어둠은 보기를 탐내지 말라는 뜻
귀 먹음은 듣기를 탐내지 말라는 뜻
이 빠짐은 먹기를 탐내지 말라는 뜻
잠 없음은 덧없이 꿈꾸지 말라는 뜻
* 늙음은 생명 활동의 쇠퇴를 뜻한다.
생명체는 그들의 임무, 곧 새끼를 생산하는 일이 끝나면
그만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서서히 돌아가고 있는 것이 곧 늙음이다.
감각은 무디어지고 육신은 낡아간다.
가는 것들을 억지로 붙들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첫날밤 / 임보
오리나무 칡넌출 뒤얽힌 산골
억배기 박 서방 재취再娶 맞는 밤
억새지붕 무너지게 쏟아지는 별
부엉이 벅국이 떼 소쩍꿍
* 궁벽한 산골에 땅이나 파먹고 살아가는 한 순박한 사내가 있다.
아내를 잃은 지 몇 년이 되었는데도 새로 맞을 신부가 없다.
그러던 중 이 무슨 횡재인가.
하늘이 그의 착한 마음을 가상히 여겼든지 초야를 맞게 된다.
천지 자연이 온통 축제의 분위기다.

소문 / 임보
갱부 천남근千男根은
밤마다 들어간다
이마에 전지를 달고
바우 에미 이불 속으로
* 천하의 모든 남성들은 다 갱부다.
밤마다 이불 속의 굴을 찾아가
열심히 일을 벌인다.

목화밭 / 임보
육척거구六尺巨軀 산발 바랑
호리 술병 둘러메고
무명 장삼 너울대며
경허鏡虛가 흘러가네
목화밭 김매다가
오줌누는 여인네야
장삼 끝 이는 바람에
네 속곳 다 젖는다
* 걸승 경허 선사禪師는 기골이 장대하고 호탕하며 술을 좋아했다.
가끔 밭에서 일하는 여인들을 골려주고 도망치기도 한다.
놀림을 당한 여인들은 소리야 질렀건만 즐거웠으리.

볕쬐기 / 임보
진버짐 마른버짐 코흘리개들
동짓달 지는 햇볕 토담 아래서
코 묻은 터진 손등 무명고의춤
얼어붙은 탱자 불알 녹이고 있네
* 전란의 소용돌이를 겪었던 1950년대만 해도 말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얼굴과 머리가 각종 피부병으로 얼룩져 있었고,
겨울철이면 햇볕으로 몸을 덥히기 위해 양지쪽에 늘어서서
볕쬐기를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