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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육군 백골부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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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최선봉 돌파로 국군의 날을 제정케 한 천하무적 육군 백골부대 |
6. 25당시 150여회의 전투에서 백전백승의 신화를 창조한 부대!
최초로 38선을 돌파하여 국군의 날 제정의 기원이 된 부대!
혜산진 탈환!
최북단(함경북도 부령)까지 진격한 부대!
5.22, 7.16작전 등 수많은 대침투 작전을 완벽하게 수행한 대침투 작전 최우수 부대!
12회의 대통령 부대 표창 수상 부대!
북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대!
1. 지역소개
한반도의 중부전선. 수도 서울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인 철원?김화?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 고구려의 회복을 구호로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가 송악에서 옮겨와 14년간 통치했던 땅. 이곳에는 “필사즉생(必死則生), 골육지정(骨肉之情)”의 白骨魂을 이어받아 24시간 완벽한 경계 작전을 수행하면서, 북한의 도발을 초전 박살낼 준비를 완료한 최정예 부대, 천하무적 백골부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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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GOP 철책정밀점검을 하고 있는 장병들 |
<그림 2> 수색중대원들의 수색작전 |
부대가 위치하고 있는 철원?김화 지역은 광활한 평야지대, 남북으로 발달한 도로망과 산악능선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북한 대규모 기계화 부대의 주 기동로로 예상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6. 25당시 북한은 철원 축선으로 주력부대를 기동시켰으며, 부대우측 전방의 저격능선 일대는 휴전 직전 43일 동안 33번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2.부대 명칭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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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박석순 소위와 18결사대 서울입성 |
<그림 4> 김일성 고지 전투 |
부대는 해방직후 월남한 서북청년단원들이 18연대에 자원 입대하여 “죽어 백골이 되어서라도 끝까지 싸워 조국을 수호하고 북녘의 땅을 되찾겠다.”는 굳은 의지로 철모 좌?우측에 백골 그림을 그려 넣고 싸운 것이 그 유래가 되었으며 62년 장우주 사단장 재직시 “백골부대”로 부대명칭이 정립되었다. 또한 “백골”이라는 경례 구호는 72년 박정인 사단장 재직시 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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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사단마크 |
-. 삼각형 : 3사단, 강력한 전투 의지
-. 별 : 영원 불멸한 3사단의 기상
-. 청백색 : 깨끗하고 순수한 하늘색으로 평화를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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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 부대의 상징 “백골상” |
“필사즉생(必死則生), 골육지정(骨肉之情)”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반드시 이기는 사생관
-형제처럼 뭉치는 단결력, 전우애
-부대 전통의 자긍심에 기초한 애대심
-조국수호를 위한 투철한 사명감 / 애국심
5. 6. 25 전투사
6. 25가 발발하자 동두천 지구전투를 시작으로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였다. 낙동강 방어전투에서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적 전차를 방어하기 위해 22연대 이명수 상사는 특공대 12명을 지휘, 육탄으로 적 전차 3대를 폭파하고 적 1개 중대를 괴멸시켰으며, 18연대는 안강?기계 전투에서 전원이 죽음을 각오하고 유서와 함께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을 유품으로 남기고 적진 깊숙이 결사대로 침투하여 적 1,300여명을 사살하는 등 북한 남침 이후 최대의 전과를 이룩하였다.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함께 총반격 작전의 선봉에 나선 백골부대는 진격 개시 10여일 만인 10월 1일, 강원도 양양지역에서 원한의 38선을 전군 최선봉으로 돌파함으로써, 이 날을 기념하여 국군의 날이 10월 1일로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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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북진을 거듭한 결과 50년 10월 10일에는 북한군 제5사단을 격멸 시키며 당시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원산을 탈환하는 전과를 거둠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상하였으며, 전 장병이 일계급 특진하는 영광을 차지한 바 있다. 적이 원산에서 결정적인 참패를 당함으로써 아군의 두만강 진격작전의 거점 확보는 물론이거니와 평양도 그 허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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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원산공격을 위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있는 18연대 |
찔리는 형세가 되었다.
함경남도의 도청소재지이자 군사상의 중심지였던 함흥 진격전에서 적 제42사단 및 원산 경비여단, 제 5사단이 함흥 부근에서 부대를 집결하여 아군에 대한 완강한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18연대는 성천강을 건너 함흥에 돌입한 다음 1시간여의 시가전 끝에 함흥을 점령(10월 17일)하고 함흥부근 주요고지에서 적을 몰아냈다.
이 여세를 몰아 흥남, 성진을 탈환하였고, 이어 18연대가 최북단인 부령까지 진출하였고, 22연대는 11월 30일 한?만 국경에 위치한 혜산진을 탈환하고 23연대는 백암에 자랑스런 태극기를 휘날리었다.
이렇게 최북단 진격부대로 눈부신 활약을 벌이던 우리 백골사단은 중공군의 불법개입으로 인해 12월 9일 성진에서 해상으로 철수하였고, 부산과 구룡포에 상륙후 다시 중부전선에 투입, 51년초에는 홍천, 남대리, 옥동리 등의 공격작전에 참가하였으며 그 후 피의 능선전투, 김일성 고지 전투, 변암동 지구 전투, 689고지 전투 등에 참여해 혁혁한 무용을 과시하였다.
백골부대는 6.25 전쟁 기간중 적 사살 40,521명, 생포 11,647명, 귀순 650명, 소화기 10,316정, 기관총 6,446정, 박격포 및 야포 200여문, 전차 22대, 대전차포 98문을 노획하는 등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전과를 올리는 신화를 창조하였다.
6.국군의 날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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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7> 38선 돌파기념 |
이날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정부는 백골부대의 38선 돌파를 기념하고 이를 국군의 진취적 기상과 상승의 계기로 삼아 조국수호의 선봉장이 되라는 기대와 열망에서 1956년 9월 4일 대통령령 제 1117호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제정하였으며, 백골부대에서는 1992년, 건군 44주년 국군의 날을 맞이하여 선배 전우들이 이룩한 찬란한 부대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38선 최선봉 백골 부대원으로서 다시 한 번 조국수호와 통일의 최선봉이 될 것을 다짐하여 국군의 날 제정 기념탑을 세우게 되었다.
7. 6.25전쟁의 영웅들(백골혼의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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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박석순 소위와 18결사대 이승만 대통령 부대표창 |
<그림 9> 가칠봉 지구 전투시 김일문 일병 |
-.변암동 전투의 박석순 소위와 18결사대
1953. 3. 27~28 변암동 전투에서 18연대 1대대 소대장 박석순 소위가 지휘하는 18결사대 는 적지 깊숙이 뛰어들어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적 사살 6명, 포로 3명을 획득하는 큰 전공을 세워 아군의 사기를 크게 고취시켰다. 그날의 전과로 18결사대 용사 전원은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1953. 6. 4 경무대로 이승만대통령을 예방하였다.
-. 51년 가칠봉 지구전투시 김일문 일병
1951년 10월 27일 제5사단과 진지를 교체해서 가칠봉으로 올라간 제22연대는 악명 높은 고지인 김일성 고지를 공격할 준비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주공인 제5중대는 희생이 너무 많아 실패했고, 1중대가 다음 번 주공을 맞게됐다. 공격은 12시부터 시작됐고, 이중 1052고지를 맡은 제1소대는 적의 맹렬한 사격으로 인해 8부 능선부터 전진을 못한 채 주춤거렸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하에서 갑자기 한 명의 소총 사수가 적진을 향해 단신 으로 나아갔다. 경상도 상주출신의 체격이 당당한 김일문 일병이었다. 소총을 허리에 대고 적의 산병호를 닥치는 대로 후려치는 그 기세에 적들은 겁을 먹었는지 김일병에게 달려드는 적은 없었다. 사나운 기세로 계속 나가던 김일병에게 갑자기 정상 근처의 큰바위 곁에서 세 명의 괴뢰군 병사가 총을 겨누고 나타났다. 순간 김일병은 소총을 거꾸로 휘어잡고 맹호처럼 바위를 뛰어넘었다. 곧 1대 3의 백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소총을 몽둥이처럼 가볍게 휘두르는 김일병의 위용에 북한군 3명은 박살이 나고 말았다. 진정 뛰어난 용맹이었다. 이 백병전투로 돌격로를 개척한 그는 고지 정상을 향해 사납게 돌진했고 중대원들은 용맹스러운 그의 단독 돌진에 힘입어 일제히 정상을 향해 돌격해 나갔다. 생사를 초월한 그의 용맹성 때문에 이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으며 김일문 일병에게는 영예의 충무훈장이 수여되었다.
-. 영덕?강구지구 전투시 이명수 일등상사
1950년 7월 27일 경북 영덕을 방어중이던 제22연대 2대대장은 연대장으로부터 특공 습격대를 편성, 적 전차를 궤멸하라는 명령을 받고 12중대 2소대장 대리 근무를 맡고 있던 이명수 상사에게 이 임무를 부여했다. 이 상사는 12명의 습격대를 편성하여 치밀한 계획과 습격시 필요한 준비를 갖추면서 적과 조우시 대응책으로서 트럭을 대행으로 예행연습을 하였다.
7월 28일 적진으로 침투한 습격대는 3km쯤 침투하여 조그만 능선에 올랐을 때 약 1개 소대의 적병이 계곡 냇물가에서 떠들며 물을 마시는 등 무질서한 모습을 본 이상사는 30여명의 적을 3면에서 포위한 후 일제히 수류탄을 던져 대부분의 적을 격멸시키고 경상을 입은 4명을 생포했다. 이들을 심문한 결과 전차부대의 유도 임무를 맡고 있고 이날 밤 적의 암호가 쥐와 새라는 것도 알게되었다.
이들을 앞세우고 3대의 적 전차가 있는 것을 보고 특공대 3개조가 각각 1대씩 맡아 전차로 접근하여 암호를 댔고 이에 적이 헤치를 연 순간 이상사를 비롯한 나머지 대원들도 전차 안으로 수류탄을 집어넣었다. 몇 초 후 밤하늘에 울리는 폭음을 뒤로하고 습격대는 계획된 통로를 따라 철수했다.
또한 적에게 포로가 된 부하를 구출하기 위해 특공대의 선두에서 돌격을 감행한 이상사와 특공대원들은 고지를 탈환했고 적에게 생포된 2명의 습격대원과 부상한 아군을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공으로 이 상사는 태극무공훈장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수여받았다.
8. 5.22완전작전, 7.16완전작전 등 대침투 작전 최우수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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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0> 5. 22 은하계곡 작전 노획물 |
최근 사례라면 「522완전작전」과 「716완적작전」을 들 수 있다.「522완전작전」은 92년 5월 22일 야음을 틈타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을 월경하여 침투한 적 3명에 대해 퇴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수색부대를 투입하여 전원 사살한 작전이다.
'92년 5월 22일 적 GP로부터 적 병력 11명이 남하하는 것을 아군 수색조가 발견, 그 중 8명은 복귀하고 나머지 3명이 군사분계선을 통과하여 은하계곡을 따라 계속 남하하였다. 이에 아군 차단조가 남하중인 적 퇴로를 차단하고, 수색 정찰 병력을 투입하여 적 2명을 사살했고, 도주하는 나머지 적 1명을 차단팀과 잠복호 병력이 합심하여 사살하였다. 이 작전을 522완전작전 또는 은하계곡 대침투작전이라고 한다. 이 작전에서 박철호 병장은 턱에 관통상을 입고 피를 흘리면서도 도망가는 적을 끝까지 추격하는 백골혼을 실천하였다.
'97년 7월 16일에는 북한군 14명이 적 GP를 이탈하여 남하하기 시작, 아군의 수차례 경고방송에도 불구하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계속 남하하였다. 이에 아군은 적에 대해 경고사격을 실시하였고, 적이 아군에게 조준사격을 가함으로써 피아간 치열한 교전이 실시되었으며, 교전결과 아군 피해 없이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고 퇴각하게 하였다. 이 작전이 바로「716완전작전」이다. 이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어냄으로써 당시 GP장 구자학 소위는 신세대 소대장에 대한 불안과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백골부대는 522완전작전, 716완전작전으로 각각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상한 바 있다.
9. 특공무술
특공무술은 가장 근거리에서 적을 눈앞에 두고, 언제 적과 마주칠 줄 모르는 수색대원들이 적을 격멸하고 호신하기 위해 연마하는 수색대원만의 특공무술이다. 백골부대의 특공무술은 단전호흡, 특공Ⅰ형, 특공Ⅱ형, 대검형, 야삽형, 공격/방어술, 낙법, 격파술 등이 있다. 특공무술은 체력, 정신력을 바탕으로 하며, 특히 특공Ⅰ형은 낮은 자세와 신체의 균형, 신속?정확한 동작을 특징으로 하며, 특공Ⅱ형은 고급단계의 형으로 내공의 힘과 공중동작, 힘의 움직임을 이용하여 적을 순식간에 기선 제압할 수 있는 고난이도의 무술이다. 또한 맨손이나 대검 등 무기를 이용하여 각종 상황에 맞게 즉각적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도록 유형화되어 있으며, 신속하게 적의 급소를 제압하는 것이 특공무술의 특징이다.
10. 북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대
보병 제3사단 예하 부대로 창설된 18연대는 1949년 2월 1일부로 제 2여단에 잠시 예속변경 되었으며 동년 6월에는 황해도 옹진반도에 진출하여 독립 연대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때 북한은 장차 남한을 무력 적화시킬 목적으로 유리한 지형확보를 위해 옹진반도를 수 차례 걸쳐 침략해왔다('49. 8. 4). 18연대는 이에 맞서 중과부적의 병력이지만, 전 장병이 죽음을 불사하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겠다는 결의로 과감하고 신속한 반격작전을 시도하여 모든 진지를 재탈환했으며, 이 여세를 몰아 오히려 38선 이북 중요 지형물인 은파산 및 작산을 점령하였다.
이로 인해 북한은 크나 큰 병력 손실을 보았고, 백골부대의 용맹성에 대해 이때부터 북한이 가장 무서워하는 부대가 되었으며, 6?25 초기 전투에서도 임전무퇴의 부대로서 항상 공격 부대의 최선봉에 서서 싸움에 임해 적이 제일 두려워하는 부대로 온 천하에 위명을 떨치게 되었고, 1950년 12월 15일 1년 여 만에 모체 부대인 3사단으로 다시 복귀한 뒤에도 최정예 부대로서 많은 격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북한군이 백골부대를 두려워하게 된 또 다른 계기가 있다. '73년 3월 7일 우리측은사전 방송을 통해 북측에 통보한 후, MDL표지판 작업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북측의 공격에 의해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당시 제 25대 사단장이었던 박정인 장군은 포병연대에 독단적으로 사격을 실시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도발하는 적 GP에 백린 연막탄 57발, 연막탄 17발의 포사격을 실시하였다. 그 중 백린 연막탄 1발이 적 GP에 명중하여 적을 무력화시켰으며, 아군 부상자를 구출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백골부대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부대’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85년도 이상군 함남도민 회장이 이산가족 평양방문단의 일원으로 평양에 갔을 때, 북한 정치보위부 고위 간부가 “박가성을 가진 요란한 사단장은 요즘 뭘 하오?”라고 관심을 표명한 적도 있다.
또한, 지난 75년 귀순한 유대윤 인민군 소위도 “백골부대는 북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대”라고 증언한 바 있으며, 지난 '00년에 귀순하여 초빙강연을 했던 북한군 통신단 출신 김영임씨도 “북에 있을 때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리고 전투에 있어서는 악랄하다고 들어왔던 백골부대에 와서 강연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백골부대의 위용을 고백했다.
11. 전투준비태세
백골부대는 현 위치가 수도권 방어의 최선방임과 동시에 국방의 생명선과 같은 최후의 방어선이라는 각오 아래 적이 언제, 어디서, 어떠한 형태로 도발해 온다 하더라도 기필코 승리할 수 있는 완벽한 전투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아울러 ‘적은 반드시 도발한다’는 것을 전제로 완벽한 경계 및 대침투 작전 수행을 위하여 항재 전장의식의 생활화와 작전임무위주의 부대운용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적의 움직임을 24시간 감시하면서, 상시 즉각적인 출동태세를 유지하고 전투장비에 대한 100% 가동상태 유지, 편제 화기 조작 능력 극대화는 물론이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실질적 상황조치 훈련 등을 생활화하고 있다. 그 결과 합참 선정 '98년 전투준비태세 우수부대의 영예를 안은 데 이어, '99년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상하는 등, 총 12회의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아 부대의 위상을 과시하고 있다.
12. 백골용사 선서
하나, 나는 백전백승의 백골사단 용사가 된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삼는다.
둘, 나는 명령에 복종하며 조국과 민족에 충성을 다하는 용사가 된다.
셋, 나는 죽어 백골이 되어서도 조국의 수호신이 되어 이름 석자를 남길 것을 맹세한다.
13. 결의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천하무적 우리 백골부대는『원칙에 강하라』,『부하를 진정 사랑하거든 강한 훈련을 시켜라』는 교육훈련 신조 아래, 가장 중요한 위치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중부전선의 전략적 요충지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백골혼을 이어받아 죽음을 겁내지 않고, 백골이 되어도 싸워서 이기는 무적의 정예부대!
살아도 백골! 죽어도 백골! 필사즉생 골육지정
백골! 백골!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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