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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수필 문학의 진수(12)
올더스 헉슬리 Aldous Leonard Huxley(1894 -1963)
김철교(배재대 교수)
1. 작가 소개 및 작품 감상
영국의 소설가, 평론가, 시인. 이튼 칼리지를 졸업하고 의학도가 되려 하였으나 실명에 가까운 심한 눈병을 앓고 나서 의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옥스퍼드대학교의 벨리올 칼리지(Balliol College)에서 영문학을 공부하였다.
1916년 시집 <불타는 수레바퀴(The Burning Wheel)>를 출판한 이래 몇 권의 시집도 냈으나, 그가 소설가로 일생을 보내기로 결심한 것은, 소설 <크롬 옐로(Crome Yellow. 1921)>가 인정을 받게 된 후부터였다. 재치있고 박식하며 염세적인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관념소설이라는 점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사회소설에 대한 하나의 도전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연애대위법(Point Counter Point, 1928)>은 갖가지 형의 1920년대 지식인들이 풍자적으로 묘사된 작품이며,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1932)>는 반유토피아적 소설로, 계급사회를 배경으로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제조되는 사회를 나타내고 있다.
그의 소설과 수필에서는 사회적 관행, 규범, 사상 등에 대한 탐구와 비판이 주로 담겨져 있다. 현대문명의 폭넓은 지식과 비평안을 가졌으나,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어머니(Mother)>라는 글에서도 이런 경향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수필은 ‘역사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정신분석학적으로 여러 각도에서 어머니를 분석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우리 조상들에게 어머니는 가정생활의 행복을 만들기도 하고, 망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위대한 모성이 숭배를 받는 곳에서는 창조자인 동시에 파괴자였다. 자비로운 어머니인 동시에 무서운 어머니며, 창조와 보존의 여신인 동시에 파괴의 여신이었다. 무서운 어머니 모습은 모든 종교의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멕시코에서, 어머니의 머리는 이를 하얗게 드러낸 두개골이고, 방울뱀으로 짠 치마를 두르고 나타난다. 고대 희랍 사람들 사이에서, 어머니는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머리칼이 뱀으로 된 고르곤인데, 그의 눈초리는 모든 생물을 돌로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인도 칼리에서, 위대한 어머니상은 어떤 때는 자비롭고, 어떤 때는 무서웠다. 자식을 먹여 살리기도 하고, 잡아먹기도 한다.“
헉슬리의 <어머니>을 읽다보면, 현학적인 이야기 전개가 놀랍기도 하지만, 역시 독자들을 피곤하게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정신을 차리고 읽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기 쉬운 것이 영국 수필의 일반적인 특질 중의 하나라 할 것이다.
2. 작품 읽기
어머니(Mother)
A. 헉슬리
열(熱)과 중력(重力), 분자운동과 핵분열 - 이런 것들은 우리 경제의 물질적인 원동력이다. 그러나 생각, 감정, 본능, 그리고 욕망의 에너지도 있다. 이런 에너지들도 통로를 만들어 주고 길을 내주면 유용한 일을 하고, 상당한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들의 일부는 문명의 여명기에 이용되기 시작하여 그 후로 산업의 수레바퀴를 계속 돌려왔다.
예를 들어 개인적인 허영이 베틀의 대부분을 움직이게 했고, 모든 보석상인들을 먹여 살렸다. 죽음의 공포와 살아남겠다는 소망이 피라밋을 세웠으며, 많은 비석과 비문을 새기게 하였고, 많은 화가, 석공, 방부기술자나 성직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었다.
공포, 침략성, 권력에 대한 욕망, 자만심, 시기, 탐욕은 어떤가? 이들은 부싯돌을 쓰던 시대로부터, 핵분열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군수산업의 원동력이 되어 왔다. 근년에는 제조업자들이나 소매상들이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자원인 심리산업의 에너지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광고업자들에 의해, 상업적인 이익의 수단이 되어버린 속물근성과 대세에 순응하겠다는 생각이 수백만 마력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성적(性的)인 성공에 대한 동경과 배척당할까 하는 두려움이 성장일로의 화장품과 방향제 산업의 원동력이 되어 왔다.
심리학자들은, 종교적인 전통과 어린이들의 환상과 가족사랑을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려고 얼마나 훌륭하게 애써왔던가! <픽위크 페이퍼즈(The Pickwick Papers)>에 나오는 옛날 크리스마스에 대한 디킨스(Charles Dickens)의 묘사를 읽어보라. 그리고 딩글리 델(Dinngley Dell: 디킨스가 쓴 픽위크 페이퍼즈에 나오는 인물인 Mr. Wardle의 집)에서 일어난 일과, 현대 미국의 크리스마스의 희생자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비교해 보라. 디킨스의 시대에는 많이 먹고 많이 마시는 것으로 성탄절을 축하했었다. 종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선물을 받지 않았다. 오늘날 크리스마스는 우리 자본주의 경제의 하나의 주된 요소가 되고 있다. 흥겹고 즐거워야 할 날들이 지속적인 선전효과 때문에, 오랜 동안 흥청망청하는 축제로 변질되어, 모든 사람들이 서로 선물을 강제적으로 주고받게 되어서, 결국 상인들이나 제조업자들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리고 <어린 부인들(Little Women: 19세기 중반 뉴잉글랜드 중류가정의 생활을 그린 작품으로 Alcott가 쓴 소설)>, <푹산의 요정(Puck of Pook's Hill: Kipling이 쓴 동화집)> 그리고 <곰돌이 푸(Winnie the Pooh: Milne이 쓴 동화)>에서 묘사된 어린이들의 노는 모습과, 전자기기가 넘쳐나는 요즘 시대에 자라는 어린이들의 행태를 비교해 보라. 텔레비전이 발명되기 전에는 어린 시절의 환상은 개인적이고, 자유분방하고, 돈이 들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어린이의 환상은 공개적이고, 고도로 조직화되고 양친들의 상당한 희생이 없이는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어버이들은 텔레비젼을 하나 더 사야하고, 환상의 전파자가 광고하는 상표가 붙은 아침식사를 사야하고, 어린 시청자들에게 장난감 권총과 너구리 가죽 모자를 사주지 않으면 안된다.
개인적인 것을 공개하고, 자유분방하던 것이 규격화 되고, 무료로 하던 것에 돈이 드는 과정을 인간관계의 측면에서도 똑같이 볼 수 있다. 가족이라는 것은 무한의 심리적인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허용되고 오히려 장려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최근까지는 이 에너지가 산업이나 상업에 어떠한 도움을 주지 못하고 낭비되도록 내버려졌었다. 이러한 것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그 존립을 의존하고 있는 문명세계에서는 참고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자들의 노력으로, 사적이며, 자유분방하고, 돈이 들지 않은 자식들의 마음이, 규격화 되고, 물질적인 이익으로 변했다.
어머니날과, 불쌍한 아빠의 어색함이 차차 커지는데도 아버지날까지 제정되어, 어린이들이 어버이들에게 선물을 사거나, 아니면 적어도 인사 카드를 보냄으로써, 이 축제를 축하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편지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 편지는 개인적이고, 두서가 없고, 우체국에만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요즘에는 전화가 있고, 철자법 교육의 진보적 방법이 있는 이 시대에 편지를 쓰려는 사람도 거의 없고, 제대로 철자법을 아는 사람도 없다. 관심있는 모든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가끔 손으로 직접 쓴 편지를 받고 좋아할 사람을 제외하고는) 인사 카드가 생겨났고 시판되고 있다.
몇 주일 전에 나는 ‘세계 최대의 잡화상’(가게이름: 역자 주)에 어떤 사람과의 약속시간 보다 반 시간이나 일찍 나간 적이 있었다.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나는 필요한 만큼의 모든 알약이나 치약도 있었고, 타이프 용지나, 전구나, 자명종, 위스키, 카메라, 접을 수 있는 카드놀이용 탁자도 집에 있었다. 나는 장난감이나 나일론 양말도 필요 없었으며, 피부영양크림이나 껌이나 유행하는 잡지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볼만한 것은 기념일 인사 카드들이었다. 그 카드는 수백 수천 장이 여러 단으로 된 (대충짐작으로) 54피트 이상이나 긴 선반에 놓여 있었다. 생일용 카드, 장례식용 카드, 결혼용 카드, 결혼식이 끝났을 때 보낼 카드 등의 한겹에서 네겹까지 된 것으로, 여러 가지 크기로 되어 있었다. 아픈 사람을 위한 카드, 병에서 회복하는 사람을 위한 카드, 유족에게 보내는 카드들이 있었다. 형제에게, 자매에게, 숙모에게, 조카에게, 아저씨에게, 사촌에게, 그리고 가계의 3-4대에 이르는 모든 사람에게 보내지도록 만들어진 카드들이 있었다. 정중하게 아버님께 보낼 카드, 아빠에게 다정하게 보낼 카드, 유우머러스하게 아빠에게 보낼 카드들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보낼 여러 가지 규격으로 된 아주 많은 카드들이 있었다. 이들 카드 각각에도 손으로 쓴 것처럼 인쇄 된 시가 하나씩 적혀 있어서, 만일 어머니가 다시한번 유년기를 맞는 다면, 그 감정이 기성품이 아니라 맞춤이며 그것을 보낸 사람의 넘치는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서정시라고 착각할 것 같았다.
존경하는 어머니, 훌륭하세요.
하시는 모든 일
가정의 행복이
온통 어머니 덕분이지요.
또는 더 은근하게,
어머니는 달콤한 집에 꿀을 넣었어요
당신이 하신 사랑스런 일로 말입니다.
나날을 아주 행복하게 만드셨어요
그렇게 다정하셨기 때문이지요.
이런 글귀가 카드마다 적혀 있었다. 상품화된 모성의 천국에서 프로이드적인 비열한 뱀은 그 흉한 고개를 쳐들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사 카드에 나타난 어머니는 달콤한 디즈닐랜드 속에 살고 있는데, 그곳에는 모든 것이 꿀이며, 테크니컬러(Technicolor, 천연색 영화제작법의 하나: 역자 주)이며, 매력적인 것이며, 매우 감상적인 음악이다. 내가 54피트짜리 선반을 훑어보며 지나갈 때, 이것들이 모두 가장 역사가 길고 가장 심오한 종교의 하나인, 위대한 모성숭배의 잔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구석기시대의 사람에게는 매일이 어머니날이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인사 카드를 사는 어떤 현대인보다도 더 진지하게 ‘존경하는 어머니, 훌륭하세요.’라고 믿고 있었다. 어머니가 얼마나 훌륭했는가 하는 것은, 2만년전에 우리 조상들의 큰 신전으로 사용되었던 동굴 속에서 출토된 어머니의 조각에 의해서 증명되고 있다. 태고 시절에 남자들이 숭배하던 어머니의 모습들이, 석회암에 활석에 맘모스의 상아에 조각되어 있다. 남자들의 숙인 머리는 매우 작고 얼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다. 팔은 있으나마나 하고, 다리는 가늘고, 발은 흔적도 없다. 어머니는 온통 몸통만 있다. 거대한 젖가슴과, 풍부하고 뚱뚱한 배와, 넓적다리와 엉덩이를 가지고 있는데, 어떤 개인적인 어머니 모습이 아니라, 번식력의 거대한 상징이며, 죽음에 대항해 싸우는 생명의 신성한 신비의 구현체이며, 영원한 소멸 속에서의 영원한 재생의 구현체이다. 어머니는 풍요로운 지구와 같은 것으로 유추되어, 수세기 동안 어머니의 이미지는 거대한 우주와 등가물로 표현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집트에서는 어머니는 때때로 알 수 없는 하마로 변형되어 표현되었다. 페루에서는 어머니는 가끔 거대한 여성적인 땅딸보 모양의 맥주컵으로 나타났고, 어디에서나 어머니는 항아리, 단지, 신성한 그릇이나 큰 쟁반으로 묘사되었다. 우리가 (만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생물학, 생태학, 발생학, 유전학 등 과학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과거 우리의 선조들은 항상 분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어머니 상징물을 대했을 때, 분석적으로는 그 상징물들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온몸으로, 다시 말해, 심리적으로 감정적으로 지성적으로 그 상징물들과 맞닥뜨렸던 것이다.
우리들이 인간과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매일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그렇게 비현실적이며, 그렇게 경솔하게도 피상적이게 된 까닭은 어쩐 일인가? “가정생활 행복의 전부가 어머니에게 달려 있지요.” 이 말은 분명히 일반적인 사람들이 어머니에 대한 주제를 다루려고 할 때 흔히 가지는 마음처럼 깊이가 있다. 그리고 인사 카드를 보내는 정도를 넘어, 프로이드 박사의 학설을 추종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견해도, 이들의 의견보다 더 적절하다고는 할 수 없다. 프로이드 학파 학자들은 어머니는 여러 면에서 놀랍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즉 아들에게 대한 소유욕이 놀랍도록 강한 어머니가 있는데, 그들은 아들들을 어린애 취급해서 만성적인 소아증 환자로 만들고, 80이 될 때까지 노예로 삼은 딸들의 피를 빨아 먹고 사는 놀랍고 달콤한 늙은 흡혈귀 같은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언짢은 것이지만, 잘 대처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일들이다. 그러나 이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전부가 아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전부를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책을 하나 소개하겠다. 나는 사실은 ‘세계 최대의 잡화상’에서 인사 카드를 살펴 보았던 바로 그날 아침에 그 책을 다 읽어 버렸다. 이 책은 볼링겐 총서 47번으로 근간에 출간된 에리히 뉴맨의 <위대한 어머니(The Great Mother)>라는 책이다. 이 책은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왜냐하면 저자는 칼융학파의 심리학자인데, 융의 제자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 스승과 마찬가지로 따분하고 장황하게 썼기 때문이다. 칼융의 글은 광대하여 겁나는 수렁과 같다. 애써 내딛는 걸음마다 독자는 전문용어와 일반화 속에 엉덩이까지 빠지며, 의지할 만한 굳은 지적인 땅은 조금도 없고, 그 끝없이 넓은 진흙탕 속에 단단하고 확실하며 구체적인 사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같은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융의 체계는 심리학적인 사실을 묘사하는 데는 프로이드보다도 더 낫다. 융의 묘사방법이 최선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통합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융과 마이어즈를 통합하고, 거기에 탠트릭 불교(Tantrik Buddhism)나 선종(禪宗)의 수련을 가미하면, 인간 경험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사실을 전부를 설명할 수 있는 유용한 가설을 얻게 될 것이며, 그 가설과 더불어 인간 경험의 서로 다른 요소들을 증명하는데 써 먹을 만한 일련의 절차를 얻게 될 것이다.
자, 이제 어머니에게로 화제를 돌리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조상들에게 어머니는 가정생활의 행복을 만들기도 하고, 망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우주의 신비를 나타내 주고 있는 존재였다. 어머니는 여러 가지 측면, 즉 생물학적인 면, 생리학적인 면, 그리고 심리학적인 면 등에서 생(Life)을 보여주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어머니는 무의식의 바다이며, 그 무의식으로부터 개인적인 자의식(주관적인 경험에 있어서의 남성적인 요소)이 발현된다. 즉, 그 무의식속에서 개인적인 자의식이 목욕을 하고 있다. 더 분명한 것은, 어머니는 육신적인 삶의 근원이며 생산의 원리이다. 그러나 생산의 원리는 만물의 성질상 또한 소멸의 원리이다. 육신적인 삶을 주는 자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주는 자이다. 우리의 세계는 생명의 결과로서 죽음이 불가피한 곳이며, 생명은 재생을 위해서 죽음을 요구하는 곳이다. 위대한 모성이 숭배를 받는 곳에서는 - 이 세상에는 어느 한때나마 모성이 숭배 받지 못한 곳이 없었지만 - 위대한 모성은 창조자인 동시에 파괴자이다. 어머니가 주고, 어머니가 빼앗아간다. 어머니가 건설하고 어머니가 다시 짓기 위해 부숴버린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히 반복된다.
자의식을 가진 개인으로서, 법률의 지배를 받고 도덕적 이상에 지배를 받는 우리들에게는 이와같은 신(神)의 공정성은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신학자들은 항상,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방식’을 정당화하는 것이 매우 어려우며,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적인 설명으로는 정당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인의 사상의 가장 깊고도 뛰어난 산물인 욥기(욥은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이면서도 혹독한 시련을 받았다: 역자 주)에서 하느님은 자신을 정당화하기를 거부한다. 하느님은 아이러니칼한 질문을 하며, 이 세상의 거대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사실 즉, 이 세상이란 - 그것이 이 세상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 인간에 맞게 창조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욥기는 기원전 5세기나 4세기에 쓰여 졌을 것이다. 이 당시는 고대의 모계사회 사상과 모계사회조직이, 부계사회 사상과 부계사회조직으로 바뀌어서, 지고하신 하나님이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숭배 받았다. 이 책의 독창성은 남성적인 하느님이 고대 종교의 위대한 모성과 공통성이 아주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여호와는 원칙적으로 정의의 신이며, 도덕적 의지와 자의식이 있는 이상주의의 신이다. 그러나 여호와는 역시, 욥기의 저자가 주장하기를, 헤아릴 수 없이 깊은 무의식의 신이며, 비합리적인 기준을 가진 신이며,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정의의 하느님인 여호와는 모든 선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같이 공정하게 창조한 분이며, 또한 그의 우주에서 전개하는 연극 속에서 악뿐이 아니라 우리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똑같이 파괴하는 분이기도 하다.
욥을 위로하는 자들의 모든 도덕적인 이야기를 쓸데없는 소리라고 빈정대는 욥의 하느님보다 훨씬 이전에, 위대한 어머니상(the Great Mother)은 적극적인 면뿐이 아니라, 소극적인 면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자비로운 어머니인 동시에 무서운 어머니며, 창조와 보존의 여신인 동시에 파괴의 여신이었다. 무서운 어머니 모습은 모든 종교의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멕시코에서, 어머니의 머리는 이를 하얗게 드러낸 두개골이고, 방울뱀으로 짠 치마를 두르고 나타난다. 고대 희랍 사람들 사이에서, 어머니는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머리칼이 뱀으로 된 고르곤(희랍신화에 나오는 여자 괴물: 역자 주)인데, 그의 눈초리는 모든 생물을 돌로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인도 칼리에서, 위대한 어머니상은 어떤 때는 자비롭고, 어떤 때는 무서웠다. 자식을 먹여 살리기도 하고, 잡아먹기도 한다. 평화롭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또한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긍정적인 면은 자연의 신이며 동시에 직관의 신이고,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창조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녀는 우리를 끌어올려서 영속시키는 영원한 여성상이며 또한 우리를 끌어내리고 후퇴시키는 영원한 여성상이기도 하다. 그녀는 행복한 가정에 꿀을 넣어 주고, 나중에는 우리의 피를 빨아먹는다.
생명이 죽음을 낳고, 파괴가 새 창조의 길을 준비하고, 무의식에서 자의식이 생기고, 그 자의식이 무지의 암흑으로 돌아가려는 충동과 모든 것을 알아채는 광명으로 나아가려는 충동 사이에서 망설이는 것 - 이 같은 것이 우주적이며 주관적인 신비들인데, 이들에 대해 우리의 조상들은 위대한 모성의 수많은 상징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명확히 표명되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분석되거나 개념화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잠재적 과학이나 내재한 철학의 비논리적 시스템이었다. 이 같은 상징들을 생각 할 때, 사람들은 어떤 구체적인 지식을 얻어낸 것이 아니라, 단지 사물의 큰 조직과 그 조직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막연하게 이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신비스런 경험에 대처하기 위해, 현대인은 위대한 모성 같은 우주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직 과학과 기술적 이념 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다. 과학자로서 현대인은 생성, 성장 그리고 죽음에 관한 사실들을 관찰한다. 그는 관찰한 것들을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분류하고 자기의 가설을 실험으로 규명한다. 철학자로서 현대인은, 모든 형이상학자들의 이론이나, 상징을 만드는 사람들의 의미있는 암시나 의견들이, 적합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 즉, 전혀 허튼소리라는 것을 논리적 실증주의를 써서 증명하고는 스스로 만족한다. (아니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는 오히려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어떤 명제도 직접적인 관찰에 의해서 증명되지 않거나, 또는 우리가 그 명제로 부터 다른 ‘지각할 수 있는 명제들’을 끄집어내어 직접적인 관찰에 의해서 증명하지 못하면, 어떤 명제도 의미가 없다는 공리(公理)가 자명한 것이라고 늘 가정한다면, 물론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의 말도 아주 옳은 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가슴도 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지각이나 지각에서 출발한 논리적 추론에 의존하지 않는 형태의 이해가 여러 가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 실제로는 우리 모두 그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 우리들은 형이상학자들이나 특히 형이상학적 상징을 만드는 사람들을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특히 상징 창조자’를 강조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주적이거나 주관적인 신비를 다룰 때에 말로 표현하는 개념은 늘 그림이나 도식으로 된 상징보다는 표현 수단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징은 주어진 우리 삶의 경험된 역설들을, 언어(특히 인도 유럽 언어)와는 달리, 자기모순적인 요소들로 분석하지 않고도 표현할 수 있다.
현대인은 아직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징들을 만들어내어서는, 분석적인 사고의 대용품으로, 삶의 가장 중요한 시점에 이를 이용하고 있다. 깃발이나 卍자나 망치나 낫과 같은 상징들은, 주로 이 시대의 우리 삶에 광범위하면서도 나쁜 영향을 주어왔다. 이것들은 모두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상징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일들을 상징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는 별로 준비된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 십자가와 같은 종교적인 상징들은 윤리의 영역이나 순전히 정신적인 것에 관한 것들이다. 우주의 신비의 여러 다른 면을 포함한 종교적 상징은 가지고 있지 않다.
힌두교는 자연과, 자연의 끊임없는 창조와 파괴를 상징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기독교나 유대교나 회교는 그 방법을 모른다. 서구세계에서는, 우리의 선조들이 자연을 보아왔던 방식과는 달리, 자연은 종교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 인간을 제외한 환경이나 우리의 육체적 존재는 자연과학이 다루는 독점적 영역이 되어버렸다. 이 같은 독점은 나쁜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우리는 두 세계, 아니 모든 세계를 - 즉 명백한 관념적 지식의 세계와 막연한 이해의 세계, 언어로 분석할 수 있는 세계와 이해할 수 있는 상징의 세계, 과학의 세계와 종교와 형이상학적 세계 등 -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위대한 모성을 부활시키거나, 삶과 죽음이라는 우주의 신비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 상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언젠가는 가능할까? 혹은 무한히 오랫동안, 혹은 대중들이 인사 카드나 주고받는 수준에서 정신없이 날뛸 때까지, 그대로 기다리고 있어야 할 운명인가? 실제적인 심오함보다는 사소한 것 혹은 그럴듯한 것은 더욱 쉽게 경제적인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학교 선생이나 교수들이나 철학자나 신학자들보다 상업적 선전 담당자들이 더 대중들을 잘 교육할 수 있다. 사소한 것이나 그럴듯한 것이 고용주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현대사상을 주무르는 자들은 이를 주입시키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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