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새 언약의 주 그리스도
1. 고난으로 온전케 된 구원자
2016년 11월 6일 이현래 목사님 주일 말씀
[히2:5~15]
“05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06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07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08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0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12 이르시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찌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천사보다 못하게 되심,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심
지난 시간에 세 번에 걸쳐 새 언약의 주에 대해 말씀드렸다. 구약의 중심에는 항상 모세가 있다.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을 구약이라고 한다. 그러면 새 언약은 무엇인가? 예수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새 언약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늘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새 언약은 없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에 대해서 지난 세 시간 동안 말씀드렸다.
오늘은 고난으로 온전케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왜 새 언약의 주는 고난으로 해서 온전케 되느냐? 왜 천사보다 못하게 되셨으며 왜 죽음의 고난을 통해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게 되었는가? 이 문제이다. 아마 제자들이 의문스러운 것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꼭 그렇게만 해야 되느냐? 다른 길은 없냐? 꼭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가 구속에 이를 수 있느냐?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방법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 않느냐?
산꼭대기를 올라가는데 동쪽에서 올라갈 수도 있고 서쪽에서 올라갈 수도 있으니까 방법은 여러 가지가 아니냐는 이런 이론이 있다. 산꼭대기를 올라가는 것이라면 남쪽에서 올라가나 북쪽에서 올라가나 마찬가지이다. 길은 서로 다르더라도 정점에서 만나는 것은 한곳이니까 이것을 종교 다원주의라고 한다. 이 종교면 어떻게 저 종교면 어떠냐, 가기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니냐. 이런 얘기이다. 그것이 논란이 많이 있다. 자유진영에서는 일리가 있다. 보수진영에서는 그럴 수 없다.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 이래서 싸우고 있다.
우리 안에도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구원을 받는다면 한 방법뿐이냐? 십자가로 말미암은 것만이 구속이냐? 다르게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십자가에서만 참 사람이 나타나느냐? 다르게도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불교에서도 자기를 다 비우고 아무것도 없는 그런 상태에 이르려고 간다. 그러면 십자가도 마찬가지로 죽음으로 해서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이니까 매한가지 아니냐? 그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마찬가지 아니냐? 그러니까 내가 완전히 비운 사람이 된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 하고 십자가에서 인생의 운명이 드러났다는 것 하고 뭐가 다르냐? 이런 생각이 난다.
그러니까 굳이 십자가가 아니라도 가는 길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느냐? 여러분 중에 그런 생각이 안 드느냐? 십자가가 아니라도 내가 다 벗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나라는 것은 없고 그러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있다.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목적지가 하나니까 방법은 여러 가지라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목적지가 같다면 방법은 여러 가지 있을 있지만 목적지가 다르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가 없다. 목적지가 다르다면,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구속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구속이냐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 구속의 목표가 어디 있는 것이냐?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꼭 죽어야 되는 것이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려면 내 마음을 비우면 되는 것이지 꼭 십자가에 가야 되는 것이냐? 이런 많은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여기 성경에 보니까 죽음에 고난 받으심을 인해서 영광과 존귀로 관 썼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된다. 지혜를 통해 할 수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십자가라는 정말 좋지 않은 방법을 택할 필요가 있느냐?
고난 받으심을 인해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썼다고 한다. 그러면 이것이 또 무슨 영광이냐? 십자가에 못 박혀서 뛰어내리지 못한 것이 무슨 영광이냐? 이런 문제가 또 생긴다. 많이 복잡하다. 말씀을 깊이 들을 필요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창세 이래로 지금까지 자신의 경륜을 이루심에 있어서 언제나 먼저 사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시행하셨다. 약속은 스스로 하셨으나 언약은 쌍무적인 협정과 같으므로 반드시 언약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하시는 하나님이다.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신들이 많다. 민족마다 믿는 신들이 있고 다 신들이 있는데 우상이라는 것은 뭐냐면 언약을 할 수 없는 것이 우상이다. 언약을 했다는 말은 내가 너와 이렇게 약속을 했고 이렇게 이렇게 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인격적이다. 서로 상대가 있어서 한 것이니까 상대방의 언약이 있는 것이니까 사람이 어떤 자기 생각으로 믿는 어떤 것과는 다르다.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느냐 하면 언약이 있는 하나님이었다.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 그러면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겠다. 이것은 언약이다. 이 언약은 그러니까 일방적인 약속과 다르다. 쌍무적이니까 계약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비록 계약을 했을지라도 어느 일방이 약속을 어기면 그 약속은 쌍방이 무효가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 만일 그 언약을 바꿔도 그대로 지키지 못하면 무효가 된다. 그런데 그대로 지켰으면 유효하다. 당연히 지켰으니까 내놓으시오 할 수 있는 것이다.
은행에 돈을 맡겼으면 이자를 주겠다는 것은 서로의 약속이다. 그래서 내가 돈을 맡겼으면 당연히 은행에 가서 이자를 달라고 할 수 있다. 안주면 고소할 수 있다. 왜? 계약이니까 그렇다. 그런데 은행에 돈을 맡기지 않았다면 이자를 줄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에게 이자를 주는 것이 아니고 돈을 맡겨 놓은 사람에게 이자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그냥 사람의 생각에 있는 그런 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새 언약은 율법과 제사로는 더 이상 하나님과 연합될 수 없는 백성을 위하여 더 완전하게 연합하기 위하여 최종적으로 새롭게 세우신 것이다.
이런 사실 속에서 새 언약은 왜 세워졌느냐 하면 율법과 제사, 구약의 모든 언약은 율법과 제사 안에 들어 있다. 율법을 이러 이렇게 지키면 내가 이러 이렇게 해주겠다. 너희가 제사를 이러 이렇게 드리면 나는 이러 이렇게 해주겠다. 전부 율법과 제사라는 큰 기둥을 놓고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더라도 이 두 채녈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
그 전에는 천사를 통해서, 무슨 소리가 들려 왔다, 이런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해진 것이 없으니까 그런데 구약에는 율법과 제사라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의 모든 통로가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를 벗어나면 아닌 것이다. 율법과 제사라는 이 채널을 벗어난 것은 아닌 것이다.
지금 오늘날도 문제가 되는 것이 새 언약이 주어졌으면 새 언약의 채널을 통해서 하나님이 관계를 하신다. 그런데 이 언약의 채널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 많이 있다. 어떤 신비주의적인 것이 많이 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무슨 말을 해줬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해줬다는 이런 것이 있다.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에게 무엇이 있다는 것이 많이 있다.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새 언약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구별해야 한다. 이것이 새 언약의 채널을 통해서 온 것이냐 아니면 다른 채널을 통해서 온 것이냐? 방송을 들을 때 이것이 KBS인지 아니면 평양방송인지 채널을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다. 평양방송을 잘못 들어서 큰 혼란에 빠진다. 우리는 채널을 정확하게 돌려야 한다. 그래서 라디오나 TV는 채널을 정확하게 돌려야 한다. 나는 KBS를 본다고 틀었는데 MBC가 나온다든지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는 새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을 법으로 정했을 뿐 아니라 이것은 최종적이다. 여러 시험을 거쳐서, 새 언약을 줬다는 말은 옛 언약으로 시험을 다 해보고 그것이 모자라고 안 돼서 다시 언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종적인 언약이다. 이 최종적인 언약을 가지고 관계를 갖게 되는데 이 최종적인 언약을 버리고 그 바깥에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아니다. 뭐라고 말하기 그런데 좌우간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뒤흔든 사건이 있다. 여러분 다 아시고 시끄럽다. 어떤 사람이 계시를 봤는데 너는 앞으로 왕이 될 것이다 이런 계시를 봤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잡혀 들어갔다. 여기 한번 잡혀 들어가면 꼼짝 못한다. 다 맞춘다. 점쟁이라는 것이 그렇다. 오늘 뭐 할 것을 안다. 그러니까 잡혀 들어간다. 통일교에 가 있는 친구에게 얘기를 들으니 거기는 영통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당 점쟁이와 같다. 오늘 아침에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올 것이다.’ 하면 그렇게 된다고 한다. 그것을 영통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 종교에 들어간 사람들은 이적이나 기적이 없으면 이런 곳에 빠질 수 없다. 이적 앞에서는 이성이 없어져 버린다. 대통령이 이적을 믿었다면 이것은 큰 문제다. 왜냐하면 나라는 이성으로 다스려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 문제다. 이성보다도 이적이라는 이것이 더 중요하다. 음성이 들려왔다든가, 꿈을 꿨다든가, 그래서 한 번 들어가면 헤어나지 못한다. 점쟁이에 빠진 사람이 그래서 못 헤어 나온다. 한 번 들어가 보면 되지 했다가 딱 들어맞을 게 아닌가? 딱 딱 들어맞으면 그대로 안 할 수가 없다. “당신 조상의 묘에서 지금 불이 나고 있습니다. 어디 어디에 묘가 있습니다.” 찾아가 보니까 딱 묘에 무슨 이상이 생겼단 말이다.‘야! 용하네..’‘용하네.’ 해 버리면 딱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야, 그거 용하네...’
이런 것이 기독교 속에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구나 한국 기독교 안에는 무당 끼가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데 좋게 말해서 샤머니즘이지 무당이다. 무당 끼인데 무당 끼가 굉장히 많다. 우리 민족에는 그런 끼가 속에 깔려 있다. 유교가 들어오기 전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 민족에는 이미 샤머니즘이 깔려 있었다. 이것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래서 이런 영통한 사람이 생기면 거기에 안 끌려 갈 수가 없다.
그러니 올바른 이성을 가지고 해도 안 될 것을 그런 계시나 영통 같은 것에 이야기 해 버리면 이것은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도 새 언약이 필요하다. 천사로 안 돼서 율법과 제사를 주었다. 천사라는 채널을 통해서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아무나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듣는다고 하더라도 정확할 수 없다. 그래서 율법과 제사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것으로도 안 된단 말이다.
새 언약은 율법과 제사로는 더 이상 하나님과 연합될 수 없는 백성을 위하여 더 완전하게 연합하기 위하여 최종적으로 새롭게 세우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새 언약을 세운 것이다. 새 언약을 세운 이유가 이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구약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수 없이 많다. 구약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단 말이다. 기독교가 그렇다. 구약적인 요소가 신약으로 바뀌어야 하는 데 그게 바꿔지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예수를 믿고 있는데 삶은 구약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신앙은 구약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조사해 보면 굉장히 많은 비율일 것이다.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며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이 언약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동산을 떠난 이후 더 나은 연합을 위하여 세우셨던 모든 언약 위에 뛰어난 것이며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창조적인 것이다.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며 저의 생각에 기록하겠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법을 줘도 그 법을 사람이 지킬 수가 없다.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가 없다. 그래서 최종적인 방법으로 그 법을 아예 사람 속에다 기록을 해서 생명이 되게 하겠다는 이 말이 아닌가? 내 마음에 생각에 기록한단 말은 생각이 되겠다는 말이다, 생명이 되겠다는 말이다. 어떻게 기록하겠는가? 마음에다 어떻게 기록하겠는가?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이 되게 하겠다 이 말이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약속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동산을 떠난 후에 더 나은 연합을 위해 늘 언약을 세웠다. 더 하나님과 가까이 가기 위해서, 또 하나님도 사람과 더 가까이 오기 위해서다. 여기에 비해서 이것은 뛰어난 것이다. 지금 까지 모든 계약은 다 바깥에 있었다. 내가 있고 하나님이 있고 중간에 계약이 있다. 그런데 이 계약은 그게 아니고 내 생각을 저희 마음에 두고 내 법을 저희 생각에 기록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완전히 다른 게 아닌가? 구약과 비슷한 게 아니고, 구약의 연속이 아니고 전혀 다른 것이다. 생명의 언약이 된 것이다. 생명을 바꾸겠다는 것이니까 창조나 마찬가지다. 창조나 같은 것이다. 하나님만 이룰 수 있는 창조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이것을 할 수가 없다. 석가모니라도 할 수가 없고 공자님도 누구도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가르칠 수는 있지만 어떻게 생명을 바꾸겠는가? 가르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생명에 새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이 언약은 말로나 글로 새길 수 없고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새겨야 하기 때문에 이 언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라는 판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언약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말로나 글로 새길 수 없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새겨야 하기 때문에 이것을 새길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냥 쓰는 것은 종이에 쓰면 되는 것이다. 모세는 그랬다. 써서 백성 앞에서 낭독하고 거기다 피를 뿌려서 약속을 했다. 양의 껍데기인지 파피루스인지 모르지만 하여간에 써서 읽게 했다.
그런데 마음과 생각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또 마음과 생각이 없으면 기록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마음과 생각이라는 판이 있어야 된다. 모세에게 말씀을 줄 때 두 돌 판을 요구했다. ‘두 돌 판을 가지고 오너라. 그러면 내가 말씀을 새겨주마.’ 이랬다. 그래서 모세는 두 돌 판을 만들어서 올라갔던 것이다. 그 돌 판 위에 새겨진 것이 십계명이다.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이었다.
옛 언약을 새기기 위하여 두 개의 돌 판이 필요했다면 새 언약을 새기기 위해서는 합당한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라는 심비가 필요한 것이다.
옛 언약을 새기기 위해서 두 돌 판이 필요했다면 새 언약을 새기기 위해서는 합당한 마음과 합당한 생각이 필요하단 말이다. 정상적인 생각 위에 기록해야 되지 비정상적인 생각에다 기록해 놓으면 안 될게 아닌가?
옛날에 라디오를 보면 굉장히 잡음이 많았다. 초창기 라디오는 잡음 반 방송 반 그랬다. 더구나 진공관 라디오에서 트랜지스터라디오로 바꿔지는 때에 트랜지스터라디오는 처음에 잡음이 너무 심해서 들을 수가 없었다. 왜 그랬는가? 거기에 있는 콘덴서가 불순했기 때문이다. 전기가 전자가 되고 음성으로 바꿔질 때 콘덴서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그것을 통과 하면서 요술을 부리게 되는 것인데 불순물이 많으면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만드는 공장은 먼지가 하나라도 나면 안 되는 모양이다. 옷도 전부 방진복을 입어야 한다. 먼지가 안 나는 옷을 입어야 한다. 마스크도 쓰고 머리도 가리고 한다. 먼지가 들어가면 찍 소리가 나니까. 불순물이 있었기 때문에 찍찍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을 개선하려고 계속해서 노력을 하고 해서 지금은 깨끗하게 소리가 난다. 처음에 들었던 트랜지스터라디오와 지금의 라디오는 천지차이고 지금은 트랜지스터를 안 쓰고 집적 회로인가 IC 회로를 쓴다. 그러니까 잡음이 들어갈 데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깨끗하게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새기려면 판이 합당한 판이 되어야 된다. 사막을 통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래 위에다 그것을 써 주었으면 바람이 불면 그게 없어질 게 아닌가? 그래서 돌 판을 가지고 오라고 했던 것 같다. 바람이 불어도 안 없어질 돌 판 말이다. 그때 모세는 어디서 구했는지 돌 판을 가지고 가서 거기다 말씀을 새겨서 왔다. 그러니까 합당한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필요한 데 합당한 마음과 합당한 생각은 합당한 사람이라야 되지 않는가? 마음만 어디서 구해올 수가 없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심비라고 한다. 심비에 새겼다. 먹으로 종이에 쓰지 아니하고 영으로 심비에 새겼다고 한다.
아무에게나 새길 수 있다면 문제는 간단할 것 같지만 모래 위에 글을 새길 수 없듯이 아무 사람의 마음에나 이 언약을 새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었다면 아담을 지을 때 이미 그의 심비에 새겨 만들었을 것이다.
아무에게나 새길 수 있다고 한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하나님이 못 하실 게 있겠는가? 아무에게나 새기면 되지.’ 이러면 아주 간단할 것 같다. 그런데 안 된단 말이다. 하나님도 안 된다. 하나님도 불순한 마음에다가는 아무리 새겨도 안 된다. 찍찍 거리고 다른 소리가 나 버리니까 말이다. 그렇게 하신다면 처음에 아담을 지을 때 아예 그 심비에다 새기지 왜 안 새겨서 이렇게 속 썩이게 하겠는가? 그렇게 못 하니까 안 하신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흙을 빚어 만들었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빚기가 쉽고, 생명나무 열매를 심기가 적합해서 그러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가 연약함을 이유로 전능자가 되고 싶어서 사탄을 따라갔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흙을 빚어서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가 있는 데 왜 하필이면 흙으로 만들었을까? 우리가 간단하게 생각하면 빚기가 쉽다. 흙이 제일 주무르기가 쉽고 만들기가 쉽다. 조각하는 사람도 흙부터 한다. 또 생명나무 열매를 심기가 좋다. 씨를 심어 놓으면 잘 난다. 그러니까 빚어지기 쉽고 생명을 자라게 하기가 쉽고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우리가 간단하게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 연약함을 이유로 했다. 그렇게 하려니까 연약하게 되었다. 빚으려니까 연약해야 빚지 딱딱하면 빚겠는가? 연약해야 된다. 또 씨를 심으려니까 흙이 연약해야 되지 강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용도가 이렇기 때문에 사람은 연약하게 지어졌다. 용도가 이렇기 때문이다. 짐승들을 보면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잡초 같은 것을 보라, 얼마나 생명력이 강한지! 제초제를 그렇게 뿌려도 또 나고 또 나고 한다. 제초제를 사람이 먹으면 금방 죽는다. 죽는 데도 식물은 뿌리면 다 타버리는 데도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한다. 그러니 짐승은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그런데 사람은 정말로 약하다. 왜 이렇게 약하게 지어 놓았는가? 그것은 빚기가 쉬워야 하기 때문이다. 씨를 심으면 발아를 잘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아기를 낳기 때문에 남자보다 약하다. 아기를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들이 아기를 낳기 위해서 약하게 지어 놓았는데 원망하면 안 된다. 그러려면 여자를 그만 둬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은 특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약하다. 그러니까 사람은 원래부터 누구든지 약하게 지어졌다. 어떤 사람이든지 다 그렇다.
그런데 그것을 안 그래 보려고 강해져 보려고 발버둥 친다. 전능자가 되고 싶어서 사탄의 말을 들은 것이다. 그 연약함을 극복해 보려고 말이다. 우리가 타고난 연약함을 극복해 보려고 하다 보니까 무리가 생긴 게 아니겠는가? 그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탄을 따라 갔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은 잠시 정지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강하게 하면 좋을 것 같은 데 강하게 되어 버리면 하나님의 일은 멈춰야 한다. 되지 않는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지더라.’(고후12:9) 바울은 그렇게 말했다. 이것은 세상의 능력과 다른 것이다. 세상은 다 강해지려고 하는 것이다. 제일 강해지려고 하다 보니까 대통령이 되려고 저렇게 난리를 치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보니까 줄줄이다. ‘대통령을 10명쯤 뽑아서 그 사람들끼리 의논해서 정치를 하라고 하면 좋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 한 명만 뽑아서 저렇게 속 썩일 필요가 없이 한 10명쯤 뽑아서 공동 대통령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조용하려는가 모르겠다. 그러면 하고 싶은 사람이 다 나오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획을 회복하기 위해서 모세를 통해 두 개의 돌 판에 말씀을 새겨주셨으나 사람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율법과 계율이 되고 심비에 새겨지지 않았으므로 시행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하고 싶은 계획이 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흙을 통해서 뭔가를 하려는 것이 있다. 이것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모세를 통해서 두 개의 돌 판을 준비하게 하셨다. 그리고 말씀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완악함으로 인해서 율법이 계율이 되고 말았다. 또 자기 연마를 위해서 자기 연단을 위해서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다. 율법이나 제사나 이런 것들을 모두 다 말이다.
그러니까 종교 안에 들어와서 율법주의자가 된다는 말은 율법으로 자기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을 무시하는 이유는 ‘너희는 율법이 없는 백성’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을 가지고 있는 백성이다. 이것으로 차별을 한다. 율법이 법인 것이다. 그러니까 율법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주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오히려 자기를 강화시켰다. 그러니까 더 안 되게 되었다. 심비에 새겨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시행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법을 주었어도 시행할 사람이 안하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맨 처음 만들어진 헌법이 미국 헌법에 못지않다고 한다. 그런데 민도가 낮기 때문에 미국식 민주주의가 안 되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고집이 세고 우월감이 강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하는 방식 그대로 그 방식대로 다른 나라에 다 적용하려고 했다. 이것이 실패다. 미국이라는 특이한 토양에서 재배된 제도인데 그것을 한국이라는 토양에 시행하려니까 되겠는가? 안된다. 한국을 충분히 연구를 해서 이 토양에다가 했어야 하는데 이상은 높고 현실은 낮고 해서 헌법은 참 좋은 헌법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대로 되느냐 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만날 싸우는 것이다. 처음부터 눈높이에 맞춰 헌법을 만들었으면 이런 갈등이 생기지 않았을텐데 헌법은 좋은데 시행이 안 되니까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다른 언약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른 언약을 받은 사람을 찾아야 한다. 모세를 찾은 것처럼 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 모세가 없었으면 구약은 받을 수가 없다. 받을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모세가 없으면 돌 판이라도 만들어 올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면 돌 판은 아무나 만들면 될 것 같은데 모세가 아니면 그 돌판을 만들어 가지고 올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신약도 마찬가지로 새 언약을 새기기 위해서는 새 언약을 받을 한 사람이 필요하다.
고난으로 온전케 된 구원자
그래서 그 사람을 고난으로 온전케 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고난으로 온전케 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다 똑같은 사람인데 누구는 받고 누구는 못 받느냐는 것이다. 왜 누구는 받고 누구는 못 받느냐?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했다.
아담은 하나님과 연합하여 신성한 경륜을 이루기 위하여 연약함이라는 존재적 약점을 운명으로 받았다. 이것은 하와가 아담의 갈빗대로 지어진 것과 같다. 하나님은 전능자시다. 전능자의 배필이 전능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전능자에게 없는 것, 즉 필요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과 연합해서 신성한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적인 약점을 운명으로 하고 있다. 이 약점이라는 것이 운명이다. 이것은 하와가 아담의 갈빗대로 지어진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래서 남자에 비해서 약하다. 약하니까 싸우면 두드려 맞는다. 요즘은 마누라에게 맞고 사는 남편도 있다고 하는데 세상이 뒤집어져서 그런 것인데 어차피 남자가 육신적으로는 강하다.
그러니까 하와는 아담의 갈빗대로 지어졌다. 이 말이나 사람이 연약함을 운명으로 타고 났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 대신에 아담이 할 일이 있고 하와가 할 일이 있고 다르다. 하와가 하는 일은 아담이 못한다. 그러니까 사람은 약하지만 사람이 할 일을 하나님이 직접 못한다. 그러니까 남이 못하는 것을 하는 것이니까 약하다고 해서 꼭 나쁜 것이 아니다.
키 작은 사람이 필요할 때도 있고 키 큰 사람이 필요할 때도 있다. 옛날 같으면 선반에 올려진 것을 빼 내먹으려면 키 큰 사람이 필요하고 농 밑에 감춰 놓은 것을 ㅊ찾아 먹으려면 키 작은 사람이 필요하다. 옛날에 의자가 없는 시절에는 높은데 있는 것을 꺼내 먹으려면 한 사람은 엎드리고 한 사람은 그 위에 올라갔다. 요즘은 의자가 있으니까 그런 아이들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래서 전능자를 찾지 않는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전능자가 아니다. 약한 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다 강한 자가 되면 전능자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뭐라도 강해지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신앙생활 안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능자가 필요하지 않다.
요즘은 동성애자도 있는데 동성애자 속에서도 남자 여자가 있다고 한다. 동성애 안에도 약한 사람이 여자 노릇을 하고 강한 사람이 남자 노릇을 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전능자가 왜 또 전능자를 찾겠는가. 전능자는 전능자가 필요치 않다. 누가 필요한가? 약한 자가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이 왜 약한 인간을 선택했는가를 알 수 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호랑이나 늑대가 아니다. 토끼나 이런 것이 아니고 사람이 필요하다. 만물 중에 제일 약한 사람이 필요하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했는데 왜 심령이 가난해야 하나 심령이 풍성하면 더 좋지,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누구 집을 찾아다니는지? 누구를 찾아다니는지 우리가 잘 생각을 해봐야 한다. 하나님이 어디로 가시고 있는지 알려면 어디로 행차하는가를 알려면 하나님의 성질을 알아야 한다. 내가 이것은 비밀인데 가르쳐 드리는 것이다. 나 혼자 갈텐데 그래도 여러분까지 그냥 보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비밀을 가르쳐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니시는 길이 있다. 그 길을 알면 만나기 쉽다. 그런데 그것을 떠나서 엉뚱한데 가서 만나려니까 만나지겠는가.
그런데 아담은 전능하게 되어 보려고 자신의 위치를 떠난 것이다. 이것이 실패의 시작이며 인생고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기 운명 이외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하고 하나님이 저어 주신 본래의 위치로 돌아와야 한다.
아담은 전능자가 되어보려고 전능해보려고 자신의 위치를 떠난 것이다. 전능자가 되려고, 이것은 맞먹어 보려는 것이다. 이것이 실패의 시작이고 인생고의 원인이다. 불가에서는 인생고의 원인이 업이다, 아집이다. 이런 것을 원인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집념을 버려라, 집착을 버려라 그것 때문에 인생고가 온다는 얘기이다. 그러니까 생각하는 방향이 다르다. 거기서는 인생고의 원인은 내가 집착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뭐냐 하면 인생고의 원인은 강해지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길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누가 더 근원적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근원적이다. 위치를 떠난 것, 그래서 인생고가 온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수행을 하면서 받았던 시험과 예수님이 시험을 받은 것이 성질이 전혀 다르다.
그러니까 아담이 하나님과 연합하려면 정해진 운명이외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강해지려고 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본 위치로 돌아와야 한다. 고난이 다른 것이 아니고 이것이 고난이다. 억지로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고 내가 쓸데없는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버리려니까 고난이다. 하나님이 일부러 어렵게 하겠는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데 짐이 많으면 고생이다. 피난을 가는데 몸만 가면 쉽다. 그런데 짐까지 짊어지고 가려니까 얼마나 어려운가.
625때 기차 칸에 탈 때가 없어서 화물칸에 타고 화물칸에 다 못 타서 뚜껑에 타고, 열차위에 지붕에 매달려 갔으니 생각해봐라. 지금은 전기나 디젤로 가지만 그때는 석탄을 태웠으니까 굴에 한번 들어가면 완전히 시커멓게 되는 것이다. 그 굴에 들어가면 기차위에 납작 엎드려 있어야 한다. 그렇게 피난을 내려왔다. 그 고생을 언제 다 잊어먹고 지금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거기 매달려서 떨어진 사람은 죽고 아이들은 묶어 놓았다. 그렇지 않으면 떨어져 버린다. 오죽하면 아기를 업은 엄마가 사람들 속을 막 다니다보니까 아기가 없어졌다. 벗어나간 줄도 모른 것이다. 그렇게 살았다. 그러니까 공연히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니고 버려야하기 때문에 그 고생이다. 불교에서도 버리느냐고 고생을 하는 것 같더라.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구원자는 이 길에서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녀의 몸에서 출생하시는 것이 고난이며,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고난이었다.
그래서 이 일을 이루려면 출애굽을 할 때도 구원자가 필요했다. 수백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나올 수 없다. 인도자가 있어야 나온다. 그러니까 회사에서 종업원도 귀중하고 사장도 귀중하지만 종업원이 천명이 있다고 해서 회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사장 때문에 회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한 사람의 사장이 없으면 천명의 종업원이 있어도 회사가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자가 필요한데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고난을 감수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짐을 많이 지고 있는 것을 벗어야 하는데 다른 모든 사람을 보고 벗고 오라고 하면 못 올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려면 불교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군가 한 사람이 다 벗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벗어서 다 벗게 되는 그런 묘책이 있어야 된다.
그 묘책이 없으니까 사람마다 다 벗고 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을 따라가려면 다 벗고 와야 한다. 그러니까 각자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니까 자기 힘으로 해야 하니까 그것이 가능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도전했다가 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그렇다. 다 못한다. 나도 힘만 있다면 한번 해보겠는데 나는 자신이 없어 도저히 못하겠다.
그러니까 회복의 길은 고난의 길이다. 엉뚱한 길을 갔으니까 회복의 길 자체가 고난의 길이다. 아담은 자신 아닌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이 아닌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그것을 너무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돌이키려면 고난을 받는 것이다. 고난이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는 오시고 가시는 길이 다 고난이었다. 처녀의 몸에서 출생하시는 것이 고난이며,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고난이었다.
예수님에게는 오고 가는 길이 다 고난이었다. 오시고 가시는 길이 다 고난이다. 하필이면 처녀의 몸에서 나느냐? 처녀의 몸에서 날 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데 하필이면 처녀의 몸에서 나서 비난 받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부인들도 많은데 결혼한 집에 태어났으면 되는데 왜 하필이면 처녀의 몸에서 나서 낳는지 안 낳는지 지금도 말이 많게 이렇게 되겠나. 당시에 처녀의 몸에서 낫다는 것은 이것은 아주 불행한 일이다. 불행 중에 가장 불행한 일이다. 만약 알려지면 다 돌에 맞아서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이다. 돌로 쳐서 죽인다. 그런데 하필 왜 그런 데로 와야 하나?
하필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할 형틀 속에서 죽었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이 다른 것이 아니고 이것이 고난이다. 이 고난 속에 모든 고난이 포함되어 있다. 내 맘대로 나온다면 처녀에게서 안 나온다.왜 처녀에게서 나와서 살얼음판을 가야 하나. 내 생각대로 한다면 귀부인에게서 나야 하고 내 생각대로 한다면 죽어도 안락사 한다든지 조용하게 죽어야 한다.
불가에서 승려들은 다 참선하고 앉아서 죽는다. 대단하다. 사람이 힘이 없으면 쓰러지는 것인데 앉아서 그대로 죽는다. 그렇게 죽으면 편하겠다. 그렇게 죽는 사람이 고통이 있겠는가. 앉아서 좌선하고 있다가 죽는데 무슨 고통이 있겠는가. 죽음 자체도 신비로운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이 앉아서 죽는다고 생각을 해봐라. 어떤 경지에 이르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죽음도 하나의 경지다. 사람이 못할 것이 없다.
하여간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고난이었다.
천사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되시므로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
천사에게는 죽음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죽음이 있다 이것은 천사와 인간의 운명적 차이다. 아마도 아담이 이것 때문에 사탄의 말을 들은 것이 아닐까?
천사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시므로 죽음의 고난을 받으셨다. 천사에게는 아예 죽음이 없다. 그래서 죽음이 없으니까 사람이 천사를 따라갔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왜 죽음이 있을까? 육체를 가진 모든 피조물에게는 다 죽음이 있다. 육체는 한번 나고 한번 죽는다. 육체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형상이며 도구이므로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중요한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이 육체로 인하여 영광과 존귀를 받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왜 죽음이 있느냐?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육체를 가진 모든 피조물에게는 다 죽음이 있다. 왜냐하면 육체는 한번 나면 한번 죽도록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육체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형상이고 도구이다. 생명을 표현하는 도구다. 그러니까 형상이 영원히 있을 수가 없다. 형상이고 도구니까 자기 임무가 있고 자기 임무가 끝나면 없어지는 것이다. 병원에서 주사기를 쓰고 나면 도구니까 버린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러니까 우리 육신은 육신이 있을 동안에 무엇을 하라고 준 것이다. 뭘 하기 위해서 육신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래서 이것을 준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이 아니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을 우리가 찾아서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 육신이 가치가 있는 것이고, 육신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을 모르고 한다면 육신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꼭 육신이 있어야 된다. 꼭 육신이 있어야 된다면 그러면 육신이 귀중한 것이다. 중요한 사명이 육신에게 있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말씀이 그냥 말씀으로 있었으면 우리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다. 그런데 말씀이 육체가 되어 해서 우리가 성막처럼 들어가고 나오고 했다. 육체가 없으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다.
예수께서는 죽으심으로 천사보다 나은 영광과 존귀를 받으셨다. 그의 죽으심으로 인간의 진실, 즉 참 인간이 나타났다. 아담은 나무 뒤에 숨어 있었다. 항상 자신보다 큰 나무를 앞에 내세우고 그 뒤에 숨어서 살았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죽으심으로 천사보다 나은 영광과 존귀를 받았다고 한다. 천사보다 높게 되는데 그 내가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육체! 연약한 그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영광과 존귀로 관을 썼다. 하나님을 대신하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일에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육체 없이 하나님을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다윗도 그런다. 내가 죽어 음부에 내려가면 여호와를 송축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육체 없이는 여호와를 찬송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다. 감사할 수 없고 찬송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육체가 영광이 있다. 꼭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진실이 드러났다. 무엇이 진실인가? 참 인간이 누군가? 이것이 드러났다. 아담은 나무 뒤에 숨었다고 했다. 항상 자신보다 큰 나무 뒤에 숨는다. 사람은 그래서 어떤 업적을 만들려고 한다. 그것을 만들어 놓고 그 뒤에 숨으려고 한다. 업적이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업적 없는 사람은 그냥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비석에도 업적이 있는 사람은 뭐라고 써 놓고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그렇다. 유가에서는 벼슬이 없는 사람들을 다 학생이라고 한다. 여러분 지방을 쓸 때 보면은 “현고학생부군신위” 이렇게 쓰여 있다. 그 말은 벼슬을 못했다는 것이다. 현고학생 학생이라는 말이 다 배웠다는 뜻이다. 거기에 벼슬을 했으면 거기에 벼슬을 딱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육신이 있으니까 무엇을 하는 것이지 육신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아담은 나무 뒤에 숨었다. 지금 사람들은 다 나무 뒤에 숨어 산다. 제대로 자기를 내 놓고 사는 사람들은 없다. 다 나무 뒤에 숨어 산다. 우리 순모임에 오면 좀 내놓고 산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자기를 내 놓고 살 수가 없다. 못 산다. 그러니까 자기를 다 가리고 살아야 된다. 무엇인가를 가지고 가리고 살아야 된다. 항상 뭔가를 가리고 산다는 것은 늘 불안한 것이다. 그것이 스트레스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는 스트레스다. 나는 그런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런데 스트레스는 받는다. 왜냐하면 나는 본성적으로 나무 뒤에 숨어 있으니까! 항상 숨어 있으니까! 내가 숨으려고 숨어 있는 것이 아니고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생의 본질이 폭로되고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참사람이 나타났다. 인간의 존재적 위치가 밝혀진 것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하신 아버지 앞에 그의 필요에 합당하도록 서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인생의 본질이 폭로 되었다. 숨을 수 없는 인생이 폭로되었다. 예수님의 죽으심 안에 가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숨을 수 없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참 사람이 비로소 나타났다. 우리가 하나님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놨는가? 하는 그 사람이 나타났다. 인간의 존재적인 위치가 밝혀졌다. 그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감춰졌던 모든 것이 다 폭로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진실! 진실! 자꾸 한다. 진실을 내 놔라! 진실을 내 놔라! 자꾸 한다. 지금 떠드는 사람들 모두가 다 진실을 내 놔라! 한다. ○○○ 보고 진실을 내 놔라! 대통령 보고 진실을 내놔라! 비서실장 보고 진실을 내놔라! 전부 진실을 내놔라! 한다. 왜 그렇게 진실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진실을 내놔라! 하면서 자신은 진실을 내놓지 않고 남 보고만 진실을 내 놓으라고 한다. 참 고약한 성질이다. 자기는 감추고 살면서 남 보고는 진실을 내 놓으라고 하니까! 아주 고약한 것이다.
우리는 진실을 내 놓으나 안 내 놓으나 똑 같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실도 아니고 가짜도 아니다. 원래 태생이 그렇게 생겼으니까! 똥 싼 개보고 진실을 내 놓으라고 야 이놈 진실을 내놔봐! 그러면 똑같은 것이다. 개보고 말이다. 이 놈이 틀림없이 무슨 꼼수가 있어서 똥을 여기 쌌을 것이다. 하필이면 잔디밭에 와서 쌉니다. 일부러 우리 집에 들어와서 말이다. 만약 수사관이라고 생각하면 요놈이 분명 무슨 생각이 있어서 나에게 무슨 앙심이 있든지 뭔가 있어서 왔지 그냥 단지 쌀 때가 얼마든지 많은데 하필이면 우리 집 잔디밭에 와서 쌉니까! 글쎄!
그래서 진실을 밝히라고 할 것이다. 신문이 세 개가 있다면 세 개의 신문사가 다 이야기 할 것이다. 다 이놈이 무슨 꿍심이 있다고 말이다. 세월호 사건도 무슨 진실을 내놓으라고 한다. 나는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진상을 밝히라고 한다. 도대체 진상이 뭔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나는 진짜로 모른다. 알고 모른다는 말이 아니고 진짜로 모른다. 무엇을 가려 놓았다는 말인지! 누가 일부러 거기다가 배를 뒤집어 지게 만들었다는 말인가! 누가 일부러 저런 사건을 만들었다는 말인가! 또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진상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요번에 어디서 보니까 7시간 동안 사건이 난 이후로 7시간 동안 대통령은 어디에 있었나! 이것의 진실을 내 놓으라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대통령은 화장실도 못가지 싶다. 하도 쫓아다니니까 대통령의 움직임을 매시간 적는 다고 한다. 그것을 내 놓아도 소용없다고 하고 진실을 내 놓으라고 한다.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도 모르겠다. 자기들은 무엇인가 감이 잡히니까 그런 말을 하겠지만 나는 그 감을 못 잡겠으니까 모르겠다. 진실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어찌 그렇게 모두 진실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자기도 진실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은 이상하다. 진실하지 않는 사람이 더욱 진실을 내 놓으라고 한다. 문제 있는 사람이 문제를 더 말한다. 이상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 본질이 폭로되고, 참 사람이 나타나고, 존재적 위치가 발견되고 하는 거기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옛날에 우리가 배울 때는 그분이 우리의 죄를 사해 줬다고 생각했다. 사해 줬다고 하는 표현도 되지만 이렇게 판사가 판결해서 사해 준 것처럼 사해 줬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는 지금 와서 보니까 그 폭로된 그 사람 속에서 우리가 못 봤던 그 사람이고, 생각지 못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사실은 알고 보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상식적인 사람이다. 그건데 우리에게 무엇인가 씌어가지고 못 봤던 것이다.
십자가에 죽은 한 사람을 딱 놓고 보니까 당연히 날마다 보던 사람이고, 당연히 나한테도 있는 것이고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몰랐다. 그래서 맨날 진실을 내 놓으라고 했다. 뭔가 모르기는 모르겠고 이러니까 그랬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것이다.
왜 구속을 받는가? 우리는 거기서 참 사람을 봤다. 원래 사람을 봤다. 그러니까 ‘아 내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가짜구나 저것이 진짜 사람이구나!’그렇게 우리는 알게 됐다. 알고 보면 진짜 사람을 알게 된 것이 구속이다. 진짜 사람을 안 것 그것이 참 사람이다. 그렇게 참 사람 되려고 애를 썼는데 참 사람 되는 것은 애쓰는 것이 아니고 바로 저것이 참사람이구나! 그래서 알고 보면 애쓰는 사람은 가짜다. 참 사람은 애쓰는 사람이 아니다. 거기 있는 그 사람이지 애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참 사람 되는 것도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고 진실하기도 어려운 하나도 것이 없다. 아무것도 어려운 것이 없다. 우리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내가 진실하려고 하니까 얼마나 어렵겠는가. 어디까지 진실해야 아~참 진실하다 그렇게 할 건지! ‘참 저 사람 진실하다.’이말 듣기가 어렵다. 그런데 보니까‘어려운 것이 아니네!’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자리에 가 보니까 진실이 다른 것이 아니라 저것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시인한 것이 진실 아닌가? 저것이 인생이라고 시인 하는 것이 진실 아니가? 그러니까 내가 무슨 힘을 썼는가? 내가 사실을 보고 사실을 말하고, 인정한 것인데 나는 왜 말하기가 쉬운가 하면 곧 진실한 것을 보고 말하니까 쉽다. 내가 딴 재주가 있어서 말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 있는 것 보고 말하니까 그냥 쉬운 것이다. 여러분들도 있는 것을 보고 말해 보면 쉽다.
그런데 나무 뒤에 숨은 사람을 보고 나무만 보고 자꾸 나무 나무 나무 하면 그것은 봐 도 본 것이 아니다. 뒤에 숨은 사람이 진짠데 앞에 나무만 보고 나무 나무 나무 하면 그것은 본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 가서 나무 나무 나무 하고 다니면 그것은 전무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고 그러면 그 사람의 나무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고 숨어 있는 그 사람의 나무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지 그 사람 자신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짓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보고 “아 저 사람이 진실이구나!” 우리가 그 원형을 알아야 다른 사람을 볼 때도 그 알 수 있다. 그 원형을 모르고는 고장 난 것을 알 수 없다. 정상적인 TV를 알아야 고장 난 TV를 알지 정상적인 TV를 모르는데 어떻게 고장 난 TV를 알 수 있겠는가. 고장 났는지 안 났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참 사람을 봐야 저것이 진짠지 가짠지 알게 된다.
나는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다 거짓말로 보인다. 정치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정치라는 것이 진실만 말하고 사는 것이 정치가 아니다. 사람들이 전부 오해하는 것 같다. 정치는 그런 것이라고 알 알아야 한다. 정치자체가 그렇다.
정치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하면 우리 부인들이 주방에서 요리하는 것과 같다. 특별히 중화요리하고 비슷하다. 중국이 정치를 잘 한다. 15억이나 되는 인구가 꼼짝 없이 찍 소리 안 하고 하고 있다. 년 17%나 성장하면서 꼼짝 안 한다. 빈부의 격차가 엄청나게 많은 곳이다. 우리나라의 빈부격차는 말도 안 된다. 그런데도 꼼짝없다. 왜냐하면 정치를 잘 하기 때문에 그렇다. 어떻게 정치를 잘해서 저런가?
중화요리를 자세히 보면 여러 가지 재료를 갖다가 모두 다 기름에 볶아 버린다. 다 기름에 볶아 버린다. 그래서 맛의 보편화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것뿐만 아니라 그 위에다 마지막에 갈분(전분)을 만들어 싹 부어 주면 그러면 싹 덮어 버린다. 먹을 때는 다 부들부들 하다 중화요리는 다 부들 부들 하다. 특별히 매운 것도 없고 특별히 짠 것도 없고 그렇다. 그러니까 중화요리는 온 세계 사람들이 다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음식은 싸~~하고 칵~~하고 찍~하고 이래야 된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운 것이다. 정치라는 것은 두리둥실 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다. 이 수많은 사람 국민을 놓고 어떻게 고추 따로 가지 따로 하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냥 두리두리 뭉실뭉실 해가지고 먹어야 되는 것이다.
작은 재료들도 꼭 필요할 때가 있다. 요즘 땡초라는 것이 있다. 그것을 처음에 월남고추라고 했다. 무지무지 맵다. 제주도에 가면 생선으로 국을 끓여 먹는다. 갈치, 옥돔, 심지어는 고등어까지 생선을 끓여먹는다. 생선을 맹물에 끓여 놓으면 얼마나 비린내가 나겠는가. 그런데 비린내 안 나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다. 땡초를 넣어 놓으면 깔끔해 져 버린다. 별로 맵지도 않고 그냥 땡초만 밑에 깔아버리면 그 비린내가 없어져 버린다. 우리는 비린내 없애려고 된장 치고 뭣치고 막 이렇게 한다. 그러면 맛을 다 배려 버린다. 그런데 땡초 몇 개 딱 넣어 놓으면 깔끔해 진다. 여러분도 해 보시기 바란다. 맵지 않을 정도로 넣어야 한다. 그러면 밑바탕에 뭔가 깔려 가지고 맛이 깔끔하다. 그러니까 땡초는 거기에 들어가는 것이다. 요즘 중화요리에서도 땡초를 쓴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들이 깔끔한 것을 좋아하니까 땡초를 속에다가 섞어 놓는데 땡초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넣어 놓았다.
정치라는 것도 그런 것이다. 그래서 정치하는 사람들의 말을 다 믿어도 안 되고 안 믿어도 안 된다. 그냥 적당히 믿고 적당히 알고 이래야 되지 ‘아 어느 것이 진실이고, 누가 진실이냐?’이것이 미친놈 이고 이 사람이 더 미친 사람이다. 그러다 보면 내가 더 미친 사람이 된다. 월래 그런데 가가지고 어떻게 중화요리를 놔두고 ‘이것 왜 이 맛이 안 나?’ 이러게 할 수 있겠는가. 두리둥실 뭉쳐 놨는데 중국사람 성격이 그렇다. 성격도 그렇다. 중국 사람들이 그래서 두리둥실 해가지고 팍 나서고 그러지 않는다.
우리 대구 경북 사람들도 중국 사람들과 좀 비슷 한데가 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조용해져 버린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있다. 나서지 않는다. 안 나선다. 지금 문제는 새누리당 문제인데 새누리당 사람들은 조용하게 있다.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아무 말 안 한다. 이것은 아주 현명한 방법이다. 이럴 때 “나서서 맞다 안 맞다. 우리는 뭐 박근혜하고 틀리다 맞다.” 이래 봐야 더 시끄럽기만 하게 된다. 그런데 그냥 죽은체하고 가만히 있다. 아마 내가 볼 때는 바람이 다 잘 때까지 가만히 있을 것이다. 아주 지혜로운 방법이다. 세상 살려면 그래야 한다. 이런 난세에 나와서 덤벙거리면 욕이나 얻어먹지 뭐가 되겠나! 지금 날 뛰는 사람들은 아주 하수들이다.
그러니까 예수 안에서 우리는 원래 진실한 사람을 봐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세상 보는 것이 쉬워진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새 언약을 받으려면 아까 처음에 말한 대로 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 필요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한다. 그 사람이 누구냐? 바로 폭로된 이 사람이다. 바로 참사람인 이 사람이다. 바로 존재적인 위치가 밝혀진 그 사람이다. 거기다 쓸 수가 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을 거기에 새긴다.
그래서 구속하실 분을 그런 위치에 두게 되었다.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서 돌비에 새기기 위해서 돌을 다듬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심비에 새기기 위해서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천만번을 새기려고 해도 안 된다. 새겨 놓으면 다른 것이 되어 버린다. 아까 말한대로 율법과 계율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자기 훈련을 위해서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버리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더 강화되어 버리고 더 고집스러워져서 다른 사람들하고 화합이 안 되는 이런 사람이 되어버린다. 유태인들이 그래서 배타적이다. 아랍세계 모든 사람들 다 배타적이다. 그러니까 싸움이 안 끝나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참사람을 보지 못했다. 참사람을 죽여 버렸으니까 보지 못했다.
회복된 것이다. 원래대로 되돌린 것이다. 자신의 구속 안에 모든 사람을 포함하신 것이다. 할렐루야!
그러니 이 사람이 그리스도라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은 또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고 그러나 구원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다. 아멘입니다. 아멘! 그럴 때는 “아멘”해야 한다.(아멘! 박수 짝짝) 그 안에 모든 사람이 다 포함된다. 그러니까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해서 사람을 하나로 포함 시키겠나. 정치적인 포함이라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지 실제로 한 생명으로 포함 될 수 없다. 그런데 예수께서 죽으신 그 자리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한자리에 있다. 저절로 포함이 되어 있다. 이렇게 안하면 많은 아들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할 수 없다.
자 예수님 목적, 하나님 목적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함께 들어가야 한다.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사람은 안 되고 어떤 사람은 천당 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가고 이래서 천국이 되겠나. 다 한 형제간인데 열 명의 아들들이 있는데 다섯 명은 천당에 갔다. 다섯 명은 지옥에 갔다. 그래가지고 천국이 되겠냐는 것이다. 그 집구석이 천국이 되겠나. 그 아버지가 기쁨이 되겠나! 한사람도 낙오자가 없어야 될 것이 아닌가! 그래야 완전한 축제가 되지 반은 가고 반은 못 갔다는 것은 하나님 뜻을 너무너무 모르는 일이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하는 것은 공갈치는 것이고, 그 방법이 너무 졸렬하다. 급해서 써 먹는 것이지만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야 된다. 그러니까 예수 안에 우리가 모두 포함 되었으니까 예수님이 영광에 들어가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영광에 들어간다.
영광이 별거 인줄로 알지만 그것이 아니다. 사람의 위치에서 진실하고 하나님이 인정하면 그것이 영광이다. 죽으심으로 영광에 이르렀다고 한다. “잠깐 동안 못하게 했지만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했다. 자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보고 어떤 사람이 영광과 존귀로 관 쓰셨다고 보겠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다른 사람들이다. 눈이 달라진 사람들이고 미친 사람들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을 보고 “야~ 영광과 존귀로 관 쓰셨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정말로 용납하든지 안 하든지 둘 중에 하나다. 예수를 따르려면 이 사람을 용납하고 이 사람을 인정하든지 아니면 버리든지 둘 중 하나다. 이럴 수가 어디 있겠는가? 십자가 못 박혀 죽은 사람을 보고 영광과 존귀로 관 쓰셨다고 하는데 이 말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 이것이다. 그냥 믿으려고 생각하면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부활은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으로서 살아봐야 된다. 그래야 영광과 존귀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래야 그 부활의 삶을 경험하게 되고, 그 부활의 삶 속에서 이 말이 나오지 부활의 삶 속에서가 아니면 절대로 이 말이 나올 수가 없다. 어떻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썼는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사건을 놓고.
예수의 구속은 신비한 것이다. 전혀 반대다. 죽어서 완전히 실패한 것인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올라갔다고 한다. 완전히 거꾸로다.
무엇이 영광(榮光)인가? 영광에 대한 기준이 다른 것이다. 사람에게 있는 진실, 결국 그것이 영광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인정한 것이니까. 하나님의 법이 새겨지고 하나님 마음이 새겨졌으니까 영광스럽다는 말이다. 사람이 벼슬을 많이 해서 훈장을 많이 달았다고 해서 사람들이 영광스럽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영광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이 새겨지고 하나님의 마음이 새겨졌기 때문에 영광스럽다는 그 말이다.
우리 인생이 무엇을 해서 인생으로서 영광스러울 것인가? 생각해보라. 우리가 세상에서 살 때, 사회에서 국가에서 살 때, 훈장이라는 것이 필요하고 별도 필요한 것이다.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다 필요하다. 그런데 그냥 인생으로서, 한국사람도 미국사람도 아닌 그냥 사람으로서, 무엇이 사람의 영광이겠는가? 그냥 사람으로서 그냥 인간으로서 어차피 계급장은 다 내 것이 아니니까 내 자신이 아니고 업적일 뿐이다. 순수하게 나를 놓고 나의 영광이 무엇인가를 한 번 생각해보라.
내 영광, 인생의 영광이 무엇인가? 무엇으로 내가 영광스럽다고 하겠는가? 훈장을 가지고 영광스럽다고 하겠는가? 무엇을 가지고 영광스럽다고 하겠는가? 하나님 마음이 새겨진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 마음이 새겨진 내가 있다면 그것이 영광스러운 것이다. 하나님 법이 새겨진 사람, 그 사람이 영광스럽다. 내 인생에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없다. 무엇을 해도 이 영광은 다른 영광이다. 이것은 무엇을 해도 변하지 않는 영광이지만 다른 영광은 떨어지면 줄줄 떨어지는 영광이다.
이번에 줄줄이 떨어질 것이다. 우수수 떨어져버렸다. 그것도 말썽이더라. 총리에게 아무 의논도 없이 후속타(다음 총리)를 지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스마트폰으로 그동안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를 보냈다는 것이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지금 또 난리다. 정말 그랬다면 일개 나라의 국무총리인데 해임하고 다른 사람을 임명하려면 미리 통보를 하든지 미리 의논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이러한 형편이니까 당신이 좀 물러나시오, 다른 사람을 임명해야 되겠다고 해야 될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SNS로 했다는 것이다. 하도 거짓말이 많으니까 사실인지 아닌지를 모르겠지만 그렇게 했다고 또 난리다.
영광이라는 것이 그냥 우수수하면 떨어지는 것이다.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변하지 않는 영광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법이 새겨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됐냐 안 됐냐를 떠나서 되기만 한다면 그보다 영광스러운 것이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되기만 한다면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없다고 하는 것 정도는 믿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다른 것은 못하더라도 그 정도는 믿어야 된다. 그러면 영광스럽겠다. 그것이 진짜 영광이겠다. 이렇게는 믿어야 된다. 그것도 못 믿겠다고 하면 안 된다. 그 정도는 믿어야 된다. 그래도 교회를 얼마를 다녔는데 그 정도는 믿어야 된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시고,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였으며, 형제라 부르시고, 주의 이름을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교회 중에서 찬송하게 하셨다.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다.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형제라 부르려면 이 자리에서만 형제라고 부를 수 있다. 다른 자리에서는 형제라고 부를 수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하고도 형제라 부를 때는 이 자리에서 부르는 것이 진실한 형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다. 진짜로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만이 진짜로 하는 것이다.
여러분 순모임에서 형제자매들이 만난다. 형제자매들이 순 안에서 만나지는 것만이 진짜로 형제이고 자매이다. 거기서 형제자매라고 하는 것이 진실이다. 세상에서는 진실이 아니다.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주의 이름을 형제들에게 선포하고(주의 이름은 하나님 이름, 여호와 이름이다), 교회 중에서 찬송하게 하셨다. 우리가 형제에게 여호와 이름을 선포하려고 하더라도, 또 형제를 형제라고 부르려고 하더라도, 교회 중에서 우리가 함께 찬송하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에 들어가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다른 자리에서는 불가능하다. 기도 잘해도 안 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된다.
이 자리에서 밖에는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다. 예수님과 나뿐만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다 그렇다. 거기서밖에는 우리가 한 자리에서 만날 자리가 없다. 여기서 만난 자리는 영원하다.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가 40년 동안 한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이다. 혹시 지금 나간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또 돌아오면 똑같다. 때나 좀 묻혀서 올 뿐이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혈육에 함께 속하심으로 죽음을 맛보셨으나 이는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고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려 하신 것이다.
혈육에 함께 속하심으로 죽음을 맛보셨다. 혈육에 속해서 육신을 가져서 이런 죽음을 맛보고 고난을 받는데, 지금 이유가 나온다. 우리 모두를 이끌고 함께 가기 위해서다. 형제라 부르시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선포하기 위해서, 교회 중에서 찬송하기 위해서, 또 한 가지가 있다.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려 한 것이다.
우리가 왜 마귀에게 잡혔는가? 우리가 육신이기 때문에 연약하여 잡혔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해서 육신의 가치가 달라졌다. 다른 가치가 생겼다. 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육신의 가치와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과한 육신의 가치와 그 가치가 달라졌다. 이 가치가 얼마나 존귀한 줄 알면 마귀한테 끌려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능력에 끌려갈 필요가 없다. 신비에 끌려갈 필요가 없다. 인격의 가치를 알면 사람의 가치를 알면,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의 가치를 알면 신비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 신비에 휘말렸다는 말은 결국 천사에게 휘말렸다는 말이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다고 하거나 무슨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요즘 중국에서는 전능자가 판을 친다고 한다. 그 사람들 성경책을 보니까 이렇게 두껍다. 빡빡하게 써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보니까 성경말씀도 있고 여러 가지 말씀이 꽉 차있다. 내 생각은 그 책 때문에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책이야 성경책이 더 좋다. 아마 거기에 틀림없이 신비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전능자라고 부르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 전능자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왜 끌려 다니는가?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사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고, 우리는 천사를 부려할 존재인데 천사를 부리지 못할 위치에 갔기 때문에 우리는 천사에 속한 그런 것들을 부러워한다.
나도 하마터면 그렇게 될 뻔했다. 그때 내가 예언을 했거나 방언을 했거나 꿈을 꾸거나 했으면 그쪽으로 나가서 어찌됐을지 모른다. 잘됐을지 못됐을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쪽으로 나갈 길이 있었다. 내가 방언만 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선교사 내외분이 와서 개척을 하고 있는 곳이었는데 사람을 보니까 마음에 들었는지 어찌하든지 나를 잡으려고 애를 썼다. 자기 교단에 들어오게 만들려고 두 분이 기도를 많이 했는데, 도저히 안 되는 것을 어떡하겠는가. 그곳은 첫째로 방언을 못하면 아예 교역자가 될 수 없다. 왜? 성경세례를 못 받은 것이니까. 나를 두고 두 분이 열심히 기도했다. 안 되니까 어찌하겠는가. 만일 그때 됐더라면 내가 오갈 데가 없는 사람인데 안 들어갔겠는가.
하나님이 못 가게 딱 막아놓은 것 같다. 왜? 인생의 가치를 알게 하려고. 그때는 내가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랐다. 이 육신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랐을 때이니까 능히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안 돼서 못 갔다.
그런데 혈육에 주님께서 함께 속하였다. 나와 함께 혈육에 속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그분이 자기 육신을 죽음에 내어놓고 마귀를 물리쳤다. 자기의 모든 자존심을 내놓고 마귀를 물리쳤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나는 못한다고 하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는가? 생각해보라. 우리 같은 사람이야 당연히 못한다고 하면 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에게 가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해보라고 하니까 못한다고를 아무나 하겠는가? 얼마나 자존심을 다 내려놓아야 되겠는가.
돌로 떡 만드는 것은 그만두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봐라. 그러면 천사들이 와서 발에 너를 받아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해보라는 것이다. 이것도 자존심을 팍 꺾는 얘기다. 완전히 꺾는 얘기다. 거기서 능력을 행하였으면 자존심이 팍 살아날 것이다. 얼마나 자존심이 200% 300% 나타나겠는가? 그런데 자존심을 다 엎고 주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했다. 내가 하나님을 시험할 자격이 있느냐다. 나는 하나님을 시험할 자격이 없다.
육신으로 참여를 했지만, 우리와 함께 육신이지만 그는 그 육신으로서의 인생의 소중함을 알았다. 뛰어내리지 못해도 상관없다. 돌로 떡을 만들지 못해도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다. 조심하면 된다. 굳이 높은 데서 떨어져서 하나님이 받아주니 안 받아주니 할 필요가 없다. 올라가지 않으면 그만이지 왜 그것을 시험하고 앉았겠는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고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려 하신 것이다. 우리는 육신이 살고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육신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돼지의 육신도 있고 소의 육신도 있고 개 육신도 있다. 사람이 육신으로 태어난 것은 육신으로 할 일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약점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마귀에게 끌려다닌 것이다.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시므로 자비롭고 충성된 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시며 시험 받은 자를 능히 도우신다.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시므로 자비롭고 충성된 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시고 시험 받은 자를 능히 도우신다고 했다. 이것은 그가 육신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우리를 능히 다 도우실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정을 다 알고 계신다는 뜻이다. 이 제사장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말씀 드리겠다.
*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함께 영광에 들어가기 위하여 고난으로 온전케 되심, 마귀를 없이하심, 제사장으로서 안식을 줌
고난으로 온전케 되셨다.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함께 영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고난 때문에.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하셨다. 우리 연약함을 채우려고 하시는 제사장이 되셨다. 그분은 육체(육신)를 투자해서 이 영광스러움을 얻었다. 우리도 우리 육신을 투자해서 이렇게 영광스러운 것을 거둔다면, 이 말이다. 이것은 육신을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이다. 다르게는 안 된다. 천사는 육신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이 육신을 던지기만 하면 투자하면 된다는 말이다.
예수 안에 우리 인생이 있으니까 이것이 가능하다. 예수 안에서는 가능하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예수 안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내가 구속을 받으면 다른 사람이 다 구속 받을 수 있다. 나 따로 너 따로가 아니다. 내가 구원을 받으면 네가 지옥을 간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구원을 받으면 다른 사람도 구원을 받게 되어있다.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내가 저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구원을 받았다면, 내가 받은 구원으로 인해서 그 사람도 자신의 구원에 이르게 된다.
뭐라고 비유하면 좋을까? 저 사람도 능히 할 수 있는 일인데 아직 한 번도 해보지를 않아서 전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했다. 그러면 그 사람도 하게 된다. 원래 할 수 있게 되어있는 것이니까. 다만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도 못할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 사람을 보니 하니까 자기도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예수 안에 있으면 우리가 구원 받은 대로 다른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나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담대하게 세상 사람들 앞에 가서 이 구원을 전파하게 된다. 왜? 나도 받았는데 너는 왜 못 받냐? 나만 특별한 것을 받은 것이 아니다. 나는 너무 보편적인 것을 너무 쉬운 것을 받았다. 너무 쉬운 것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한테 주고 싶은 것이다. 또 어려운 것을 받았으면 남에게 못 준다. 어떻게 주겠는가? 나도 고생인데 너까지 고생시키겠냐가 될 수 있고, 너는 이걸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보니까 너무 쉽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이렇게 모르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가 전도하는 것이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말이 있다. 전도는 미련한 것이라고 한다. 왜 미련한 것인가? 밥을 먹을 수 있는 인간에게 밥을 먹으라고 가르치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어리석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밥을 먹을 수 있는데, 빵만 먹는 사람은 밥을 못 먹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을 만나보았다. C.C.C.에 있을 때 노르웨이 청년인데 무전여행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다. 한국에도 네 번인가 몇 번을 왔다고 한다. 그런 사람인데 밥을 못 먹을 것으로 알고 있었다. C.C.C.에서 훈련을 받을 때인데, 다 밥을 주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쫄쫄 굶고 앉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서 빵을 사왔다. 요즘처럼 좋은 빵도 아니고 싸구려 빵인데 빵은 잘 먹었다. 이 녀석이 빵은 먹을 줄 아는데, 밥은 먹을 줄 모른다.
우리가 전도를 하는 것은 뭘 하는 것인가? 이 사람도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련한 짓이다. 밥에 콩이 덤성 덤성 들어있으니까 젓가락으로 콩만 딱 잡아다 먹는다. 쌀은 안 먹는다. 입에 좀 넣어보면 되는데 아예 넣지를 않고 콩만 먹었다. 별 놈을 다 봤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도 그와 같다는 말이다. 어려운 것이 전혀 아니다. 아주 같은 것이다. 내가 하면 다 하는 것이다. 내가 하면 다 할 수 있는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 나는 하는데 못하는 것, 내가 히말라야 산꼭대기에 올라가는데 남에게 말해보았자 못 올라온다. 그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했으니까 다 할 수 있는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
서울대학교를 가는데 점수가 높아야 가는데, 나는 점수가 없는 데도 가는 방법을 알았다. 그래서 이것을 알고 나니까 가르쳐주어야 될 것 같다. 사람들한테 가서 서울대학교를 무시험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다니는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은 무시험 합격이다. 이것을 전파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이것을 전파하는 것이 사역을 하는 것이다. 너무 너무 쉬운 것을 너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세계에 쉽게 이것을 전하는 것이 복음으로 사역하는 것이다.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하는 것을 들어보면 너무너무 어렵다. 세상에 저렇게 연구하여 마음을 가닥가닥 다 뜯어내어 언제 그것을 다 수양하고 있겠는가? 나는 지금 나이가 많아서 그렇지만 젊어서라도 저렇게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그것을 한다고 대드는 것 보면 대단하다. 진리는 어려운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평이하고 쉬운 데 있는 것이 진리다. 너무 쉬워서 사람들이 모르는 거기에 진리가 있다. 진리가 깊은 산중에 있는 것이 아니고, 너무 평범하다. 너무 평범한 것이 진리다.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진리다. 무슨 진리를 안다고 해도 자기밖에 모르는 그것을 진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주님께서는 고난으로 온전케 되셨다.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 모두를 보편화되게 만들어버렸다. 다 똑같이 만들어버렸다. 다 쉽게 만들어버렸다. 누구나 할 수 있게 만들어버렸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여러분 어려운 데서 생각하지 말라. 나는 안 돼, 나는 안 돼, 자꾸 안 된다는 사람은 결국 사고 난다. 뭘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되지 말라고 하는 건데 기어코 되겠다고 한다. 뭘 되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도 기어코 되겠다고 몇 명이 나갔다. 이해가 안 된다. 쉬운 것이 있다는데 그것을 하지 않고 왜 어려운 데를 가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고생도 팔자다. 나도 옛날에 고생을 많이 하고 지금 가는 건데 내가 대신 고생을 해주었으면 그만이지 또 가서 고생을 하겠다고 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내 한 사람 고생한 것으로 족하다. 내 고생은 너무너무 적었기 때문에 이 구속을 위한 고생이 안 된다.
예수님 고생이 진짜 고생이다. 그 고생 속에 우리가 쉽게 구속을 받았다. 여러분 그것을 시인하면 다 구속받은 사람들이다. 시인하고 그대로 살면 된다. 시인하고 살면 다른 삶이 나온다. 무슨 삶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다른 삶이 나온다. 어떻게 살 것인지 규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다른 삶이 나오게 된다. 그것이 부활의 삶이다. 마지막 부활이 또 있다고 하니까 있겠지만 우선은 그렇다. 우선 부활의 삶은 지금 구속 안에서 사는 것이 부활의 삶이 된다. 한편으로는 구속이고, 한편으로는 부활이다. 손바닥이 구속이라면 손등은 부활이다. 손이 보일 때 손바닥이 보일 수도 있고 손등이 보일 수도 있다. 손바닥이 보이면 구속이고, 손등이 보이면 부활이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손바닥으로 하는 것이 손등으로 하는 것이다. 손바닥이 있어야 손등이 있는 것이지 손바닥이 없는데 손등이 있겠는가.
부활만 갖고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손바닥 없이 부활만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다른 데로 가버린다. 그래서 내가 손바닥만 얘기하는 것이다. 손바닥만 얘기해도 손바닥만 확실하면 손등은 저절로 있는 것이다. 손바닥은 있고 손등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손바닥이 있는 사람은 손등은 다 있다. 손등이 없이 손바닥이 있는 사람은 있어도 손바닥 있고 손등이 없는 사람은 없다. 걱정하지 말라.
아이고, 그러면 부활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구속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활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고 부활할 때는 어떤 모양으로 부활할 것인가? 이렇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어떤 모양으로 부활할 것인가?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우리가 씨를 뿌릴 때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냐, 우리는 씨만 뿌리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각기 그 씨에 따라서 형상을 주신다는 것이다. 부활을 설명할 때 그렇게 설명한다. 바울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우리는 어떤 형체로 부활합니까?, 부활할 때 어떤 모양으로 부활하게 됩니까?, 하고 물었다. 우리는 다 궁금한데 이 어리석은 놈들아, 우리가 씨를 뿌릴 때 장래의 형체를 뿌리느냐, 씨만 뿌리는데 형체가 나오지 않느냐, 달의 형상도 있고 별의 형상도 있고, 여러 형상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님이 무엇을 줄지 모른다는 것이다. 씨만 보고 어떻게 이파리를 알겠는가? 모른다. 씨를 심는 사람은 씨만 심으면 된다. 그래서 어리석은 놈들이라고 했다.
생각해보라. 누가 부활을 본 사람이 있는가? 구속 안에서의 삶이 곧 부활로 된다. 그렇게 믿고 살아보라. 아~ 이것이 부활인가, 뭐가 좀 달라지네,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면 고질병이 지랄병 된다고 부활의 길로 가다보면 큰 부활이 오지 않겠는가? 부활의 길에서 부활이 오지 엉뚱한 길에서 부활이 오겠는가. 경부선을 타야만 좌우지간 언젠가는 부산을 가지 호남선 타고 앉아있으면 부산을 가겠는가? 못 간다. 안심하고, 부활을 몰라도 좋으니까 안심하고 구속의 삶부터 살아보라. 살아보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체험하고 하는 말이다. 적지만 경험하고 하는 말이니까 여러분도 해보면 안다. 그러면 어떤 모양으로 부활하는지가 궁금하지 않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이 정해주신 귀한 자리를 놓고 우리가 속아서 멀리멀리 갔던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고난 받으심으로 인해서 우리 모두 어리석은 것을 다 밝혀주시고 참된 것을 진실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생각을 다 잠잠하게 하시고 우리의 계략과 생각과 이런 것들을 다 소멸하시고 주님 당신이 보여주신 그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것이 내 자리고 내 운명이고 나라고 알고 살게 해주시기를 원하고 거기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져서 부활의 삶을 경험하도록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