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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속에 나타난 천지창조
- 임번삼 교수 (명지대학교 외래교수, 전 대상그룹 식품당당 대표이사, 한국창조과학회 이사)
대학 3학년이던 1964년, 나는 철학과 종교서적에 심취해 있었다. 고려대학교 농화학과에 입학하며 1학년 때는 국내문학서, 2학년에는 해외문학서, 3학년에는 철학·종교서, 4학년에는 위인·전기서를 섭렵한다는 목표를 실천하는 중이었다.
나는 국민학교 때부터 교회를 열심히 나간 모범적인 크리스천으로 자부했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주일예배에 참석하느라, 극장을 한번도 가보지 못했으며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과학의 허구에 대해 생물선생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아무런 학문적 뒷받침이 마련되지 못한 상태였기에 나의 일방적인 참패로 끝났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시절까지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은 인생의 허무와 알 수 없는 절망감들이었다. 그것은 모두 불우한 환경 탓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1950년과 51년 사이 조부와 부친, 큰 형이 공비들에 의해 처참히 피살되었다. 굶기를 밥 먹듯 해야 했고 조모와 어머니의 계속되는 탄식소리는 어린 내 가슴에 필은 우울감을 심어주었다. 어떻게 보면 적극적인 교회생활을 어려운 가정환경을 망각할 수 있는 도피처로 삼은 셈이었다. 따라서 새벽기도는 빠지지 않을 정도로 신앙적 열성을 보였다.
그렇지만 이때까지의 신앙은 나 자신과 심성을 변화시킬 만큼 강한 동기를 마련해 주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접하기 시작한 카뮈와 사르트르의 실존적 허무주의는 나에게 강렬한 색채로 흡수되었다. 조금도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암담한 현실들, 늘 한계를 체험하는 인간의 나약을 이 철학은 깊은 공감대를 형성케 했다.
야스퍼스나 키에르케고르는 초월자의 구원을 인정하는 유신론의 철학논리를 폈지만 신에 대한 단편적 사고 이상의 것을 주지 않았다.
이 무렵에 읽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내 삶에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신앙을 버리기로 작정한 것이다.
'인간은 인간다워야 하지 않는가. 인간은 모든 것을 누리고 획득하고 추구해야할 권리가 있다. 그동안 나는 '기독교' 라는 틀에 갇혀 사고와 행동을 억제당해 왔다. 책 내용처럼 새는 알을 깨는 아픔을 견디고 나와야 창공을 날으며 온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나도 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온 세상을 넓게 바라보자' 나의 의도적인 신앙포기는 교회 친구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결심은 번복될 수 없었다. 그토록 열심히 활동하던 교회학교 교사직과 성가대도 중단했다.
인간에게는 선악의 의지가 공존한다고 느껴졌다. 그것을 나 스스로의 의지로, 또 인간다움에 충실한 자세로 맞아보겠다고 의도했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다움이 '하나님의 영적세계' 안에 있으며 나의 이 무모한 신앙적 방황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깨달은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1966년 해군간부후보생으로 입대, 군 생활을 시작했다. 종교를 버리고 인간다운 삶을 추구한다는 목표를 세웠기에 모든 선택을 자유의지에 맡겼다.
인간의 제한받지 않는 자유는 세상적인 속성에 금방 물들게 했다. 술과 담배를 입에 대기 시작했으며 장교 숙소에서 노름으로 며칠을 밤새우기도 했다. 이런 생활에 몰입하면 나는 삶의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남는 것은 아득한 공허감뿐이었다. 감각적인 것은 감각으로 끝났다. 그 무엇보다도 내게 '참된 만족'을 선사하지 않았다. 나는 이 속에서도 한계를 발견했다.
두 번째 내가 시도한 것은 학문적 성장이었다. 사물을 깨치고 지식을 습득하는 길만이 인간을 높은 가치의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해군 의무단 병리연구소에 근무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바로 옆방에는 생화학실이 있었는데 그곳 의사들과 함께 해군의 에너지 대사량과 영양상태 등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이것이 내가 식품분야 연구생활에 몸담게 된 첫 시발점이었다.
1969년 제대와 함께 바로 부산에 있는 미원(주) 연구개발실에 입사했다. 나는 발효분야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성과를 올릴 때마다 성취감과 만족을 느꼈다. 많이 알고 배우는 길만이 '최고'라는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1971년에는 대만과의 합작회사 설립 관계를 준비했다. 그때 영어회화를 못하는 내가 통역을 하겠다고 나섰다. 남은 5개월 동안에 습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2개월을 학원에 다닌 후 남은 기간동안 상황별로 구성된 회화책을 모조리 구입해 외었다. 무사히 통역을 끝내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지적성취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래서 1972년 법학을 전공한 아내와 결혼식을 올린 지 15일 만에 회사에서 보내주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신혼의 단꿈보다 '많이 배우는 것'이 내겐 더 소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학문적 성취의 만족에도 한계가 있었다. 남보다 빠른 승진,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으나 이것이 인생의 전부가 될 수 없었다.
1980년 가을, 당시 나는 37세의 나이에 계열사인 한국크노르(주)의 품질관리 및 연구개발부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의 정국은 '광주사태' 등으로 몹시 어지러워 '안개정국'이라고 불렸다.
'국가와 사회가 몹시 어렵고 혼란스럽다. 그런데 나는 무엇인가. 직장생활을 통해 자기만족을 얻으며 착실히 승진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을 다하는 것인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추구했던 욕망의 덩어리들 이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무엇보다 나를 괴롭힌 것은 이런 암담한 모든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절망감이었다.
잠을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던 연말의 어느 날이었다. 하나님께서는 15년이나 당신을 잊었던 초라하고 불쌍한 이 영혼을 다시 찾아 주셨다.
현실문제에 깊이 고뇌하며 가슴 아파하는 가운데 '삶' 자체에 대한 의문들이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상식적 범위의 질문들이었지만 내겐 절박한 과제로 압박해 들어왔다.
사람이란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왜 죽음을 맞이해야 하며 짧은 생애에 이다지도 고달프고 슬퍼해야 하는가. 인생사에는 초연한 듯한 저 해와 달 우주, 산천초목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명은 어떻게 태어난 것인가. 나 스스로 그 어떤 질문에도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이런 복합적인 요소들이 범벅이 되어 나는 우울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것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이런 어느 날 나는 퇴근길에 레코드 상점에 들러 네 개의 찬송가 테이프를 샀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평소 가지 않던 레코드 상점에 들렀으며 찬송가 테이프를 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림을 받은 것이었다.
집에서 나는 그 찬송가들을 듣고 또 들었다. 무언지 모르게 이 노래들은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대부분 예전에 불러 보았던 곡들이라 귀에 익었다. 이 중에서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야곱이 잠깨어', '잃었던 영혼 찾았고', '죄인 오라 하실 때' 등의 가사가 영혼 속 깊이 울려 퍼졌다.
찬송가에 몰입한지 3일째 되던 날 밤이었다. 찬송가를 듣기위해 카세트의 스위치를 누른 순간 메말랐던 심령을 상쾌하게 적셔주는 물줄기의 느낌을 받았다. 그 가사에 내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그토록 생생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찾았다. 그것은 논리와 이성이 아닌 알 수 없는 힘이었다.
'주님, 길을 잃고 세상에서 헤매던 한 영혼이 주님을 다시 찾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기도 후 내 앞에 펼쳐진 모든 세계는 이전의 세계가 아니었다.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환희의 세계였다. 나는 성경을 본격적으로 묵상할 계획을 세웠다. 우선 창세기, 마태복음, 사도행전, 요한계시록을 읽기로 했다.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자 신비와 경이의 깨달음이 나를 계속 놀라게 했다.
창세기에서는 천지만물이 창조된 경위와 인간의 창조목적을 깨달았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역사였다.
마태복음을 읽으며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알 수 있었다. 또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탄생과 복음이 이방세계로 어떻게 흘러갔는지 그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우리 인류가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심판주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을 확신하게 되었다.
마음의 눈이 열리며 인생의 새로운 가치관을 발견하게 되었고 인생관도 하루하루 달라져 갔다.
성경을 통해 진리를 하나하나 깨쳐 가는 과정은 감탄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생명과학분야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특히 창세기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되었다.
빛 (에너지)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으며(열역학 제1법칙) 인간에게 그것을 다스리는 만물의 영장권을 주셨다.
그런데 처음 사람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실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공의의 하나님은 이 죄에 대한 대가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떠나게 하셨다. 인간의 역사는 이때부터 형벌을 받는 기간이 되었다. 따라서 사람을 포함한 모든 만물이 늙거나 부패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열역학 제2법칙).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죽음의 벌'이 형벌의 의미만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란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죄 된 세상에서 고통 받으며 영생하는 것보다 일정기간을 고생하다 슬픔과 괴로움이 없는 우리의 본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사고력을 주셨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사물의 형태와 법칙을 해석하고 평가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과학과 문명의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영역을 벗어나는 죽음이나 우주의 신비 등 초월적인 세계는 그 무엇으로도 이해하지 못한다. 한치 앞도 미리 알지 못하는 인간의 왜소와 무력함은 결국 스스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무릎 꿇게 되어 있다' 나는 집 근처 교회에 등록을 하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는 신앙생활은 모든 것이 기쁘고 즐거웠다.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성가대에 들어갔다가 교회학교 교사까지 겸직했다.
나중에는 해외선교부장을 맡았다. 직장에서도 신우회를 조직,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었다.
크리스천에게는 일반은사와 특별은사가 있다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성도라면 마땅히 해야 할 전도와 구제, 봉사 등이 일반은사이며 특별은사는 자신의 특별한 달란트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의 특별 은사는 무엇일까. 그렇다. 나는 창세기에 가장 많은 은혜를 받은 과학자가 아닌가. 창조과학회에 들어가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증거하자” 고등학교 1학년 때 생물교사에게 진화론 허구를 지적했던 기억이 났다. 이제 학문적으로 자세히 창조론을 이해한다.
진화론의 허구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막연하게 알고 있던 창조론의 과학적 사실은 관련서적과 성경을 읽으며 확고한 사실로 부딪쳐 왔다.
생명의 기원을 진화론적으로 해석하게 될 때 우리 조상이 무기물에서 출발하여 원생동물, 파충류, 원숭이를 거처 사람이 되었다면, 왜 수많은 생물들이 오늘날까지 장구한 세월을 살면서 또 다른 고등동물로 바뀌는 집단적인 대진화현상이 발견되지 않는가? 이 질문에 진화론은 설득력 있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1981년 나는 그동안 바빠서 하지 못했던 박사과정의 공부를 시작했다. 예전보다 더 바빴지만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는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도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통해 나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다시 체험할 수 있었다.
1984년 박사과정 후 논문 제출을 남겨놓고 있었다. 발효화학을 전공한 나는 실험 데이타를 근거로 논문을 작성해야 했다.
그러나 실험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고 모처럼 연구를 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논문마감이 20여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포기상태였다. 1년을 더 공부할 각오까지 했다.
”임 선생 좀 힘들더라도 꼭 논문을 제출해 보시오” 지도교수의 격려에 용기를 얻었지만 현실적으론 불가능했다. 순간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떠올랐다. 즉시 기도의 포문을 열었다.
”하나님 저의 부족함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을 주시면 가능함을 믿습니다. 논문이 통과되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고 생명공학을 통한 창조론 증거에 더욱 매진할 것을 서원합니다” 기도가 끝나자 용기와 자신감이 솟았다. 연구를 다시 시작했는데 계속해서 세포융합이 이루어지며 데이타가 쏟아져 나왔다. 보름정도의 연구결과는 논문쓰기에 충분했다. 이것을 학술적으로 정리하려면 서너 달이 필요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아이디어를 주셔서 손에 얼음찜질을 해가며 일주일 만에 논문을 끝냈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성취였다.
논문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받았을 때, 나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이후부터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창조론 강의요청이 들어오면 그것을 최우선 스케줄로 잡았다. 해외 출장을 자주 다니는 나는 다양한 창조과학 서적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번역의 사명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 느껴져 먼저 일본창조과학회 부회장 호리코시 목사가 지은 '인간의 탄생'을 1차로 번역, 출간했다.
지금은 미국 컨콜디아사에서 발간한 '중국한자 속에 나타난 천지창조' (The Discovery of Genesis)를 번역하고 있다.
이 책은 1988년 독일출장 중에 발견한 것인데, 중국한자에 하나님의 역사가 담겨 있다는 내용이다. 읽을수록 나를 사로잡았기에 번역을 결심했다.
약 5만자로 추산되는 중국의 한자는 상형문자 6백여 개, 표의문자 7백여 개, 표음문자 2만여 개로 되어 있다고 한다. 한자 형성 시기는 BC 24세기쯤으로 성경역사에 비춰보면 바벨탑 사건 직후가 된다. BC 2230년 중국은 동지와 하지 때 하늘을 향해 제사를 드렸다. 그 비문에 이런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
”오성(五星) 운행 전 태양과 달 있기 전 공허와 암흑 뿐 이 땅 창조 전 찬란한 영광만 빛나는 하늘에 대전쟁 있었노라. 우주통치자 신황(神皇)이 왕으로 오셔서 선악을 분리시키셨도다. 그분이 하늘을 열고 땅 펴시고 인간을 자기 모양대로 창조하니라. 그분 능력으로 천지와 만물이 지음 입었노라” 4천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를 알리는 내용이 중국제사 비문에 적혀 있을까. 상형문자를 보면서 나는 더욱 놀랐다.
선(船)자는 배 주(舟)에 여덟 팔(八)자와 사람을 나타내는 입구(口)자로 되어 있어 노아의 방주에 8명이 탄 것을 암시한다. 또 창조한다는 지을 조(造)자는 먼지와 흙을 나타내는 토 (土)자에 입 구(口)자, 동작이나 생명을 나타내는 1획, 사람이 걸을 수 있다는 之로 구성되어 있다. 창세기 2장 7절은 이 지을 조(造)자를 그대로 증명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土)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口) 불어 넣으시니 (丿)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辶)”
중국인 찬첸킹 목사와 미국 해부학의사인 넬슨 여사가 같이 집필한 책 '중국한자 속에 나타난 천지창조'의 내용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확실히 증거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중국은 유교 도교 불교 등이 발생하기 전 약 2천년간 유일신인 하나님만 믿어왔다고 밝힌다. 당시 하나님을 썅띠(上帝), 센(神), 솅링(聖靈)으로 불렸다. 이것은 발음상 샹, 셴, 솅등과 유사하며, 이는 히브리어의 하나님 칭호인 샤데(샤다이)와 연결된다.
창세기 1장 2절에 ”하나님의 神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되어 있다. 神은 示와 申으로 구성되는데, 示의 위 '一'는 하늘, 아래 '一'는 땅이며, 小는 셋을 의미한다. 따라서 神은 '하늘에서 땅으로 세 분(삼위일체 하나님)이 오셔서 밭(에덴동산)을 펼쳐 만드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靈은 雨ㅁㅁㅁ巫로 구성되어 있다. 雨는 하늘(一) 덥다(冖) 물(::)로 구성 된다. ㅁㅁㅁ은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을 나타내고, 巫는 사람(人) 일(工) 사람(人)으로 구성되어 있다. | 은 사람이란 뜻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서 협력하여 일하시는 세분 하나님을 나타낸다. 따라서 靈의 뜻은 ”하늘로부터 수면 위로 세 분 하나님 (삼위일체)이 오셔서 창조 작업을 하신 것”으로 해석된다.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신 것은 6일째였는데, 이 날 땅위의 모든 육축 짐승 기는 것들을 창조하셨고 저녁에 아담을 만드셨다. 흙으로 창조했기 때문에 이름도 '흙'이란 뜻의 '아담'이라 지으셨다. 그래서 西는 一(하나) 口(울타리) 人(사람)으로 구성되는데, 첫(一) 사람(人) 아담이 에덴동산 (口)에 지음 받은 때 해가 서쪽에 있었다는 뜻을 나타낸다.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해 하와를 만드셨다. 하와(女)는 첫번째 (一) 사람인(人) 아담에게서 갈비대를 빼어서(丿)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생물학적으로도 남자 염색체서만 남자(XY)와 여자(XX)가 만들어짐이 증명되고 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6일간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아담과 하와에게 선물로 주시고 복(福)을 주시며 모든 생명을 다스리라 하셨다. 福은 하나님(示)이 첫 (一) 사람(口)에게 에덴동산(田)을 주신 것을 나타낸다.
선악과를 따먹은 뒤 남자(男)는 밭에서(田) 수고(力)해야 소산을 먹을 수 있게 하셨다. 죄를 범한 인간에게는 반드시 형벌이 따랐으며 이 형벌은 영원한 죽음(육체적·영적)을 의미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반면 당신이 창조하신 사람들을 사랑하시므로 구원계획을 알려주시고 그대로 행하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즉 어른이 되면 1년에 1~3회씩 성막(성전)에 나아가 흠 없는 어린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면 사죄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칭하시어 천국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義'란 모든 사람들 각자(我)가 제물인 양(羊)을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사죄의 제사를 드릴 때 얻는 칭호임을 알 수 있다.
과학자로서 비논리적인 것은 인정치 않는 나였다. 그렇지만 이 내용들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확고히 믿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이것을 근거로 세계사를 하나하나 따져 내려오면 역사 속에 좌정하신 하나님을 언제나 만날 수 있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순간순간 느끼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는 말할 수 없이 컸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무한한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에너지를 끊임없이 받으며 생활해야 의욕과 기쁨이 넘친다. 그것은 새싹이 단비와 햇빛을 받아 무럭무럭 성장하는 이치와 같다.
신앙생활에 열중하느라 경쟁시대에 내가 뒤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우려도 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내가 앞서서 달리고 있었다. 만물을 오묘하고 신비롭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필요와 부족을 늘 채워주셨고 한계를 초월하게 하셨다.
20여 편이 넘는 연구논문을 국내외에 발표하고 해외에 7개, 국내에 30여개의 특허를 등록하도록 인도하심은 결코 나의 능력이라 생각지 않는다.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의 갑옷을 덧입었기 때문이다.
1987년, 정진기언론문화상 과학기술부문대상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 주심으로 선교영역을 확대할 수 있도록 하셨다. 대학 강단에서 학생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이것은 전공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간접적으로 증거하라는 깨달음으로 와 닿았다.
나는 어디서나 '인간성 회복'을 주장한다. 인간성 회복이란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구원받아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운동은 사회와 환경을 변화시키며 종국적으로 하늘나라 확장에 기여하리라 믿는다. 그래서 창조주를 믿는 신본주의 삶이 지향될 때 참된 인본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89년 10월, 기독교방송 '지성의 샘터' 프로에서 창조·진화론에 대해 방송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열심히 기도한 뒤 원고지 30장 분량을 집필했다』 ”인간을 동물의 차원과 비교할 수 없음은 존엄성과 양심의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화론은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유독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쓰여 있음이 바로 그 정답입니다” 이 방송이 나간 후 많은 분들의 격려를 받게 되었고, 나는 내게 맡겨진 사명을 새롭게 확인했다.
나는 성경 중에서도 창세기를 가장 즐겨 읽고 주위에도 읽으라고 권하고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의 음성을 생생히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화론에 오염된 학문과 갖가지 인본주의 사상이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불행한 인생을 살게 하고 있다.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장 1절)는 말씀은 역사와 한 인간의 앞날을 등불로 밝혀주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크리스천 과학자로서 진화론으로 오염된 자연과학세계를 창조섭리로 개선해야 할 사명감을 느낀다.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기도의 능력을 의지하며 하늘나라 확장에 최선을 다할 각오를 해본다. ”가슴 속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 속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 (욥기 38장 3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