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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티칸에서의 안식일 연구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인 사무엘레 바끼오끼 박사(Dr. Samuele Bacchiocchi)는 천주교회의 제수이트가 세운 그레고리안 교황청 대학교(Pontifical Gregorian University)를 최우등(summa cum laude)으로 졸업할 뿐만 아니라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금메달을 수여받으며, 그의 박사 학위 논문(From Sabbath to Sunday)은 1977년 교황청 인쇄소에서 출판되었다. 그후 바끼오끼 박사는 이디오피아에서 선교사로 봉사했고, 2000년 7월까지 앤드루스 대학교에서 교회사와 신학 교수로 봉직했으며, 16권의 책을 저술했다. 이어지는 내용은 바끼오끼 박사가 2003년 한국을 방문하여 안식일학교 대회에서 행한 강의 내용으로써 한국연합회 안식일학교부의 도움으로 이곳에 올린다.
풍요로운 안식일 성수를 위한 세미나(이하, 안식일 성수 세미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식일 성수 세미나를 통해서 풍요로운 안식일 성수의 의미와 세계 각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안식일 성수 세미나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우리가 이미 안식일의 의미와 성수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 않은가?”라고 의아해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제안하므로 안식일의 의미와 오늘날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에 대해 다시 한번 점검하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안식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고, 안식일 성수의 경험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의 의미와 풍요로운 안식일 성수의 경험을 많이 하면 할수록 안식일이 주는 축복들을 더욱 더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의 타당성 또는 정당성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만 안식일이 주는 축복 또는 유익들은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안식일을 하나의 의무 또는 명령으로 보므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안식일을 지켜야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때로 안식일은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에 대해 감사하고 찬미하는 축제의 날이라기보다는 별로 기분 좋은 날이 되지 못합니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긴장과 스트레스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안식일이 주는 축복이 필요 되고 있습니다. 타임지에 의하면,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약 가운데 하나가 긴장과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는 약이라고 합니다.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기 원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신경 안정제, 마약을 하고, 술을 마시고, 환희를 맛보기 위해 아름다운 섬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마음의 평안과 진정한 쉼은 약이나 어떤 장소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우리 구주의 임재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풍요로운 안식일 성수를 위한 세미나의 필요성에 대한 두 번째 이유는 안식일 진리의 선포를 위해 우리 스스로 안식일 진리로 완전 무장을 하자는데 있습니다. 초기문집 32페이지에 보면 세상 역사의 마지막 시점에서 “안식일이 더욱 온전히 선포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안식일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잘 방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안식일은 끊임없는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오늘날 그 공격의 정도가 더욱 격렬해졌으며, 주로 네 분야에서 공격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교황 요한 바로 2세에 의해 안식일이 커다란 공격을 받고 있는데, 그는 간교하고 기만적인 방법으로 일요일이 성서적인 안식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전술을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해 “포화 속의 안식일”이라는 책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천주교와 개신교에 있는 많은 학자들이 여러 개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일요일의 합법성은 성서적이요 사도들이 세운 제도라고 주장하면서 안식일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전에 안식일을 지켰던 안식일 엄수주의자들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옛 언약에 속한 안식일 제도가 폐했다고 주장하면서 안식일을 거절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식일이 더 이상 얽어매는 올무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안식일을 공격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문명 사회가 거룩한 날 하나님 안에서 쉼과 평안을 찾는 대신에 사람들에게 쾌락과 이익을 추구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먼저 풍요로운 안식일 성수를 위한 세미나에서 다루는 문제들을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그 첫 번째 강의는 “바티칸 대학에서 안식일을 위한 나의 연구”라는 제목입니다. 이것은 내 생애 가운데 안식일 성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섭리하심 가운데 안식일 진리와 재림 기별이 나의 부모님들에게 어떻게 전파되었으며, 로마의 바티칸 바로 옆 동네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주께서 나로 하여금 1451년 스페인의 성직자요 제수이트의 창설자인 이그나티오스 로욜라가 설립한 제수이트 사회에서 명성을 떨치는 대학, 교황청에서 운영하는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안식일 문제를 연구하도록 하고 연구한 것을 교황청 출판소에서 출판하도록 섭리하신 것들을 소개하는 이야기입니다. 고레고리안 대학은 모든 교황, 추기경, 감독 그리고 천주교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공부한 대학입니다. 나의 경험들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면서 내 생애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인도하심에 대해 주님께 찬양을 돌리기를 원하며, 특별히 나로 하여금 안식일 진리를 발견하도록 하신 것만 아니라, 안식일 진리를 하나의 부담거리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 분 안에 와서 쉬라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초청으로 여기도록 하신 것에 대해 찬양을 돌리고자 합니다.
두 번째 연구 주제는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 사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안식일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들을 누리며 안식일을 성수할 수 있는 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 강의의 주제는 “봉사를 위한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에 하나님과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봉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 번째 강의는 “쉼 없는 인류를 위한 거룩한 안식”이라는 제목입니다. 이 강의의 주제는 제가 출판한 동일한 제목의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강의합니다. 이 강의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심으로 얻을 수 있는 평안과 쉼에 대한 7가지 방법을 연구하게 됩니다.
그 다음 강의는 “포화 속의 안식일”이라는 제목입니다. 이 강의 제목은 제가 쓴 “포화 속의 안식일”이라는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 강의를 통해서 안식일과 일요일에 관해 논의되고 있는 최근 문제들을 다루게 됩니다. 이 연구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하게 됩니다. 그 처음 부분은 최근에 안식일에 대한 어떤 공격들이 감행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고, 두 번째의 것은 교회 지도자들, 학자들, 여러 종교 단체들이 안식일을 어떻게 발견하고 있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이 강의를 통해서 많은 정보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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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대학에서의 나의 안식일 연구에 관한 이야기는 1938년도에 내가 태어난 이태리에 있는 로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내 부모님들은 당시 천주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신도들이었고, 일요일마다 거행되는 미사에 참석했으며, 매일 저녁 로자리(rosary) 묵주의 기도를 암송했습니다. 나는 바티칸 성벽에서 돌 하나 던지면 떨어질 만큼 아주 가까운 거리, 바티칸 박물관 입구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는 성 베드로 사원의 그림자가 미치는 곳, 이 세상을 감싸고 있는 팔로 묘사된 사원 옆에서 자랐습니다. 성 베드로 사원 안은 그곳을 거닐 때마다 늘 깊은 인상을 받는 곳입니다.
성 베드로의 보좌라고 알려진 동상, 황금으로 된 태양의 동상을 바라보면서 가지게 된 느낌들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황금 태양은 악을 정복한 태양의 능력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러한 황금으로 된 태양 우상은 태양신이 악신들을 이겼다고 하는 태양신에 대한 이교의 신화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성 베드로의 동상으로 로마 신들의 아버지인 주피터 신상이었다고 믿는 동상이었습니다. 이교주의에 그 기원이 있다고 믿는 것 가운데 하나는 두 손가락으로 인사하는 광경인데, 이교도들 사이에 승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흔히 사용되는 인사법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를 존경하는 의미로 세 손가락으로 인사했습니다. 왼 손에 한 세트의 열쇠와, 그의 이마에 면류관을 씌움으로 천주교회에서 주피터 신, 이교 신들의 아버지인 주피터 신을 그리스도교회의 창립자로 믿고 있는 베드로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베드로의 동상에 있는 그의 발가락에 입을 맞추는 천주교회 성도들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발가락에 입을 맞추기 때문에 병원균을 옮기는 것 외에 그의 발가락이 닳아있습니다. 많은 신실한 순례자들이 베드로의 동상에 있는 발가락과 로마 시 여러 곳에 진열 전시된 동상들에게 수도 없이 입을 맞추었고, 그로 인해 저들이 원하지 않는 균들을 거룩한 도시(?)로부터 옮겨갔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성 베드로의 동상 옆에는 인상 깊은 교황의 제단이 있는데 아주 특별한 경우에 교황이 미사를 집전합니다. 그 동상은 이태리의 유명한 조각가 지오바니 로렌조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가 한 것입니다.
나의 부모님은 신실한 천주교 신도였습니다. 특별히 나의 아버지의 경우 더욱 그러하셨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신앙적이었습니다. 그는 천주교회에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규적으로 종교 집회에 참석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 24세 되었을 때 일하는 일터에서 왈덴스인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왈덴스인이 내 아버지에게 성경을 읽어보라고 하면서 성경 한 권을 주었습니다. 내 아버지의 일생을 통해서 처음으로 보고 만져본 성경이었습니다. 아주 진지하게 많은 것을 기대하면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왈덴스인들은 여러 세기를 거쳐서 성경을 보급하고 배포하는 일을 해 온 사람들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피드몬트 계곡(Piedmont valleys)에 있는 또레 펠리스(Torre Pellice)에 있는 교회로 많은 왈덴스인들이 중세기에 저들의 신앙을 지키다가 죽어간 곳입니다. 이 작은 마을은 투린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피드모트 계곡에 있는 것으로 유명한 왈덴스 계곡입니다.
성경이 최고라고 하는 증거는 또레 펠리스에 있는 역사적인 왈덴스 교회의 강단에서 성경이 발견된 것입니다. 강단 바로 앞에 성경이 있고, 또한 강단 바로 위에도 성경이 있습니다. 여기에 피드몬트 계곡에 있는 전형적인 돌로 된 왈덴스인들의 집이 있습니다. 왈덴스인들은 이렇게 볼품없이 생긴 곳들에서 저들의 피난처를 발견했고, 상인으로 위장을 하고 집집을 찾아다니며 전할 성경을 베꼈습니다.
여러 세기를 통해서 왈덴스인들은 여러 모양으로 천주교의 정치적 공격과, 다른 종교 단체들의 힘에 의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1655년 수천의 왈덴스인들은 사보이 공작이었던, 찰스 임마누엘 2세(Charles Emmanuel II, Duke of Savoy)의 군대에 의해 대량 학살당했습니다. 저들의 많은 시신들은 카스텔루조라고 부리는 언덕 아래로 내던져졌습니다. 1655년 사보이 공작 찰스 임마누엘 2세의 군대에 의해 대량 학살된 왈덴스인들에 대해 불후의 명작인 실낙원이라는 책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오 주여!
죽임을 당한 당신의 성도들의 원수를 갚으소서!
죽임 당한 저들의 뼈들이
차가운 알프스 계곡 여기 저기 흩어져 있나이다.
우리 선조들이 나무와 돌들을 섬기고 있었을 때
저들은 당신의 옛 진리를 고수하였나이다.
-요한 밀턴의 실낙원에서-
1848년 사보이의 찰스 알버트에 의해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얻기까지 저들은 이러한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이태리 로마에 있는 아름다운 왈덴스인들의 교회에 나의 아버지께서는 참석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일요일에만 교회에 가신 것이 아니라 왈덴스인들이 경영하는 세미나리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끄는 성경 연구 집회에 주 중에도 참석하셨습니다. 어느 수요일 밤 집회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두 학생이 안식일과 일요일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서로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학생이 놀랍게도 제칠일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로서의 정당성과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창세기 2장 1-3절에 언급된 안식일의 제정과 창조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쉬시고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스스로 “내가 지금 첫째 날에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읽으면서 안식일에 관한 진리를 찾기 시작하셨으며, 성경에서 안식일에 관계된 원칙과 안식일 준수에 관한 것을 발견하면서 놀라셨습니다.
아버지는 이태리 로마 시에 안식일을 지키는 교회가 있는가 하고 찾기 시작했습니다. 사제들과 목사들은 로마시 안에는 안식일을 지키는 교회가 없다고 나의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나의 부모님들은 저들의 집에서 저들 스스로 안식일에 구주를 높이며 찬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의 부모님들만 유일하게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므로 구주를 높이는 것이 하나의 시험하는 경험이 되었습니다.
건축 일을 하시는 아버지가 책임자에게 토요일에 일을 할 수 없다고 하셨기 때문에 아버지는 직장을 잃으셨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6개월 동안 직업을 찾으셨으나 아무런 곳도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로마 시에 일거리는 많았으나, 그 어떤 건설업자도 나의 아버지에게 토요일에 쉴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6개월이 지난 후부터 나의 가족은 배고픔에 굶주렸습니다. 음식도 없었고, 음식을 살 수 있는 돈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절박한 상황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건설업자의 마음에 감명을 주셔서 토요일에 쉬면서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한 기도를 드린 후 아버지께서 지난 6개월 동안 했던 동일한 방법으로 일자리를 찾기 위해 나가셨습니다. 그가 간 첫 건설 현장에서 혹 그가 그곳에서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두말 할 것 없이 당장부터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토요일은 그가 믿는 성서적인 거룩한 안식일이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다고 서둘러 설명을 했습니다. 건축업자는 돌변하며 빈정거리면서, “휴가를 원한다면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휴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간절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주님께 신실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건축업자에게 통사정을 하면서, 일요일이나 밤에 또는 휴가 기간 동안에도 일을 하겠다고 사정을 했습니다. 건축업자는 깊은 감명을 받은 듯, 즉시 일을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 이후 아버지는 50년 동안 단 하루도 일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안식일은 나에게 시험거리가 되었는데, 이는 그 당시 내가 로마 시에서 자랐으며, 오늘날처럼 주 5일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토요일은 공부하는 날이었습니다. 나는 안식일을 지키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교장 선생님께서 나의 어머님에게 의사의 진단서 없이 토요일 날 세 번 연속하여 결석하면 퇴학을 맞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어머님은 나를 데리고 의사에게 찾아가 우스꽝스러운 진단서를 만들어 학교에 제출했는데 그 진단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무엘레 바키오키는 토요일만 되면 심리적으로 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학교 교장은 의사가 내린 진단서이기 때문에 무마해주었습니다.
나는 또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씩 학교에 오는 천주교 사제로부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는 내가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자라는 사실을 안 후부터 학급 전체에게 나를 배교 개신교주의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나의 반생들이 그의 말을 듣고 나를 그렇게 대했습니다. 마치 내가 에이즈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나를 멀리했습니다.
나의 급우들이 나를 가까이 하지 않고 멀리하는 것은 나의 마음을 심히 아프게 했습니다. 때때로 나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학교에 안가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나의 눈을 바라보시면서, “아들아, 네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굳게 서야 한다. 주께서 너의 이러한 헌신을 높이실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중학교 교장 선생님, 천주교 사제들, 급우들과 친척들로부터 안식일을 지킨다는 이유 때문에 비웃음과 냉대와 핍박을 받으면서, 언젠가 내가 어느 날이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분명히 밝혀내리라고 굳게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떤 종교적인 전통 때문에가 아니라 성경의 진리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자 했습니다. 나의 이러한 꿈은 1977년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의 인쇄소에서 “안식일에서 일요일로”라고 하는 나의 논문집이 천주교 교황청의 공식 허락을 받고 인쇄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때 그 경험은 내 자신이 도무지 기대할 수 없는 그 이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십대 소년으로 주께서 나로 하여금 바티칸 대학에 입학하게 하시고, 그곳에서 공부하고 연구하게 한 후 안식일 진리를 바티칸 대학의 인쇄소에서 출판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개신교인이 교황청이 운영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 천주교의 허락을 받아 나의 논문을 인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서 일요일로”라고 하는 나의 논문집은 비천주교인이 쓴 것으로 교황청 안에 있는 인쇄소에서 교황의 허락을 받아 인쇄된 유일한 책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책입니다. 여러분이 상상하실 수 있겠지만 이 논문집이 배포되었을 때, 특별히 천주교세가 강한 나라에서 상당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어떤 천주교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내 자신이 기만자였다고 비난했습니다. 저들은 내가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의 진실한 의도를 밝히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페이지는 천주교회의 공식 허가를 받은 것을 복사한 것으로, 그레고리안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내 논문의 통과를 얻어내기 위해 내 자신이 저들을 속였다고 말들을 합니다. 저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사실과 다른데 그 이유는 그레고리안 대학 당국에서 내 자신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교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학감이 나의 입학 원서를 검토하는데 여러 달을 보냈는데 이는 비천주교인으로 그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내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쯤 되면 “바키오키 박사님, 무엇 때문에 제수이트 대학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공부하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안식일교인으로서 개신교도들을 억압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제수이트 대학에 공부하고자 하는 저의가 무엇이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그레고리안 대학과 제수이트들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몇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교황청 안에 있는 그레고리안 대학은 제수이트 대학으로 명성을 떨치는 대학으로 1551년 스페인의 성직자 이스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모든 교황들, 추기경들, 그리고 로마 천주교에 관계된 중요한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공부하는 대학입니다. 그레고리안 대학은 예수회 교회와 아주 흡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수이트들이 경영하는 대학의 모체이기도 합니다. 이 교회를 한번 방문하면 제수이트들이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회 교회를 짓는데 50년이 걸렸습니다. 1584년도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조각상들은 이교도들을 억압하여 승리를 거두어 개신교도들이든지, 이교주의자들이든지 천주교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저들의 목적이요, 사명입니다. 그곳에 있는 조각상들을 좀더 근접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예수회 교회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문이 두개가 있는 데 두 문 위에 아주 의미 있는 조각상이 있습니다. 출입구 오른쪽에 있는 상은 이그나티우스가 이교주의자를 짓밟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이교도들을 색출해서 없애버리고자 하는 제수이트의 결단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석관 위에 서 있는 제단입니다. 제단 양 옆에 두 개의 의미심장한 상이 있는데 제수이트들의 사명을 묘사한 것입니다.
좀더 가깝게 접근해서 보겠습니다. 제단 우편에는 개신교회의 개혁자들이 이루어 놓은 일들을 제수이트들이 억압하는 것을 묘사한 상이 있는데 이것이 저들의 사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천주교회를 상징하며, 개혁자들인 루터와 캘빈을 짓밟으면서, 오른 손에는 횃불을, 왼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있는 상입니다.
왼편에 서 있는 천사는 루터의 성경을 찢고 있는 형상입니다. 이 형상은 제수이트들이 개신교회주의를 억압하여 개신교회 국가들을 천주교회로 전향시키는 제수이트들의 사명을 강력하게 묘사하는 형상입니다.
동일한 형상인데 좀더 크게 확대한 사진입니다. 이것은 루터가 독일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평범한 말로 번역한 성경을 천사가 찢고 있는 장면을 근접하여 찍은 형상입니다. 중세기 동안 평신도들은 성경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루터가 성경을 독일말로 번역하는 용기를 내므로 천주교회의 독재에 반격을 가한 것입니다.
제단 왼쪽에 거의 비슷한 형상이 있는데, 여자는 천주교회를 대표하며, 이교 통치자들을 짓밟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 형상은 이교국가의 통치자들을 천주교회에 복종하도록 하는 제수이트들의 사명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 두 형상은 제수이트의 사명을 분명히 묘사한 것으로, 개신교회와 이교도들로 천주교회의 권위와 가르침을 수락하도록 강압하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살펴 볼 때 제수이트들이야 말로 천주교회의 가장 호전적인 수도회인데, 무엇 때문에 내 자신이 저들이 운영하는 대학에 가서 공부하게 되었느냐는 것이 질문입니다.
내가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근본적인 이유는 바티칸에 있는 도서관에서 초대 교회 당시 안식일이 일요일로 바뀌게 된 것들을 찾아 연구하고자 하는데 있었습니다. 나는 명성을 날리고 있는 바티칸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주께서 길을 열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내 일생을 통해서 그렇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포기하고 일요일을 받아들이게 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파헤치고자 하는 나의 꿈을 이루는 것이 될 기회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내 자신의 입학 허가 자체가 문제로 대두되었는데 지금까지 450년 동안의 역사를 통해 비천주교인이 그 대학에 입학고자 시도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회의에서 분리된 형제들이 교황청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결정했기 때문에 비천주교인들도 이러한 교육 기관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내 자신이 그레고리안 대학에 비천주교인으로 입학할 수 있는 특권을 받은 처음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달 동안의 서신 연락이 있었으며, 인터뷰하러 오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였습니다. 가장 문제가 된 핵심 사항은 그레고리안 대학에 입학한 후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변절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조건적인 입학 허가를 얻게 되었습니다. 조건은 저들의 어떤 시설들을 이용해서 내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을 전파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레고리안 대학 구내에서 개종시키는 일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나의 급우들과, 교수들에게 내가 믿는 신앙관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 것이 입학 조건이었습니다. 예외적으로 허락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나의 믿는 신조에 대해 물어볼 때에는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내가 가진 경험들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교수님들과 급우들의 경건한 모습과 헌신은 늘 나에게 영감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내가 수도사나 사제들의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자주 내가 믿는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나의 급우들은 때때로 너는 어느 수도회에 속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자신 있게 아주 특별한 수도회인 애드벤티스트(재림교회) 수도회에 속한 군사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느 수도회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저들은 천주교회 안에 있는 많은 수도회 가운데 한 수도회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내가 믿는 나의 신앙을 소개할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가 되었었습니다.
이러한 호기심은 공부하는 시간에까지 미쳤습니다. 때때로 나의 교수들도 저들이 연구하고 있는 문제 중에 재림교회에서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고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런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신앙을 분명히 밝힐 수 있었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물어왔을 때에는 나의 믿는 신앙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조건적인 입학 허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나의 주임 교수가 바티칸 제2차 회의에서 일요일 미사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토요일 오후에 미사를 할 수 있도록 결정하는 문제에 대해 의논할 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상당한 시간 동안 토론한 후, 나의 교수님은 “사무엘레 군은 토요일 오후에 하는 미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재림교도들이 이러한 사실에 대해 기뻐하지 않을까? 그 이유는 천주교도들 역시 안식일 끝 부분을 지키게 되니까 말이야”라고 물었습니다.
“나의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요일에 하는 미사를 토요일 오후에 하는 것은 일요일 미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좋을 수 있습니다만,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을 지키는데 교회에 가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24시간 동안 주님과 함께 안식하며 헌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교인들은 안식일에 하는 모든 일들이 예배의 연속인데, 이는 마음속으로부터 그분의 거룩한 날을 그분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기로 결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기회가 나에게 일요일의 기원에 대한 나의 연구를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연구를 하도록 마음먹게 한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주차 공간을 찾기 위해 그레고리안 대학 교정에 도착했습니다. 피아자 델라 파일로타(Piazza della Pilotta)라고 하는 작은 공간은 인근 도시로부터 매일 5,000명의 학생들이 찾아오는데 저들의 차를 주차하기에 너무 좁은 공간이었습니다. 강의 시간까지 두 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최근에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 출판사에서 발행한 책이 어떤 것들이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시간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통로에 진열되어 있는 최근에 발행한 “일요일의 기원”이라고 하는 논문집에 나의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나는 즉시 모스나(Mosna)가 쓴 논문집을 샀습니다. 나는 그 후로 여러 달에 걸쳐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500페이지가 넘는 그 논문집을 연구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모스나의 논문 내용은 안식일에서 일요일로 변경된 것은 그리스도의 권위로, 그리고 사도들이 주일 중 첫날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높이기 위해 성찬미사를 한 것이 그 기원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가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견해입니다. 천주교회와 개신교회 많은 학자들 가운데 일요일의 기원은 사도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일요일이 성서적인 안식일이라고 주장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역사적인 천주교회의 입장과 반대되는 일을 시도하려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천주교회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라로 여기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그의 숨마 띠올로지카(Summa Theologica)에 분명히 “새로운 법령에 안식일 대신 주의 날을 지키는 것은 (안식일 계명과 같은) 성경의 개념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기관이 정한 것이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회의 이전에 천주교회는 공개적으로 안식일이 일요일로 바뀌게 된 것은 교회의 권위로 한 것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천주교회에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천주교회가 더 이상 교회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그리스도의 권위와 사도들의 권위로 그렇게 했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요일은 이제 교회의 권위로 된 것이 아니라 성서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최근에 천주교회와 개신교회 학자들이 일요일 준수를 사도들이 세운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한 바로 2세 교황 자신이 최근에 주의 날에 대한 목회 서신을 통해서 일요일을 성서적인 안식일로 지키도록 독려하는 내용의 글을 보냈습니다. 전에 안식일을 지키던 안식일 엄수주의자들이 천주교회와 개신교도들과 손을 맞잡고 일요일이 성서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데 협력하고 있습니다.
일요일 준수가 성서적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내 자신에게 “주님께서 나를 그레고리안 대학에 오도록 하신 것이 혹시 초대 교회 당시에 안식일이 일요일로 바뀌게 된 시간, 장소, 원인 그리고 결과에 대해 보다 정확한 이유들을 찾아내도록 연구하게 한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생각하며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나의 주임 교수인 빈센조 모나치노 교수를 만나서 이러한 연구를 하고 싶은데 그의 허락을 받으라는 느낌을 더욱 분명히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사무실에 찾아가 개인적으로 만났던 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교수님에게 창세기에 언급된 일요일 준수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하고 물었을 때 그의 반응은 내가 기대한 그대로였습니다. 두말 할 것 없이 모나치노 교수는 그의 서재에 있는 모나스가 쓴 논문집을 가져왔습니다. 그 논문을 모나치노 교수가 지도한 것이었습니다. 그 책을 내 앞에 놓으면서, “사무엘레 군, 이것이 최근에 발표한 중요한 연구 논문일세.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연구한 동일한 문제에 대해 또 다시 연구하도록 허가해 주는 것을 대학 규정상 반대하고 있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안 된다”라고 하는 그의 대답을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의 가방을 열어 내가 최근에 읽었던 책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모스나가 쓴 논문도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내 마음 속에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만약 내가 성경과 역사적인 고찰을 통해서 다시 검토하고 연구한다면, 이 진리에 가까운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도와주시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모나치노 교수가 내가 가진 확신과 열성에 대해 감명을 받았는지 교수님이 나에게 “자네가 만약 이 문제에 대한 연구에 그토록 강한 열망이 있다고 하면 학감에게 가서 이 문제에 대해 연구하게 해 달라는 청원서를 내면 허가해 주도록 추천하겠네.”라고 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모나치노 교수 밑에서 이 문제에 대해 연구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는 지성이 높은 사람으로 성경 진리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늘 기꺼이 수락했습니다. 모나치노 교수는 주로 나의 논문 통과를 위한 책임 교수였습니다. 불행스럽게도 사실 나의 논문 통과를 도운 것이 그에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연구를 하도록 허락하고 독려하여 출판하도록 도와 천주교회에 손해를 끼치게 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와 연락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내가 그레고리안 대학을 졸업한 후 몇 년 동안은 내가 로마에 갈 때마다 모나치노 교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분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안식일에서 일요일로” 라고 하는 나의 논문집이 천주교 서점에서 모두 수거되었습니다.
내가 노린 것은 성경절과 역사적인 재료들을 분석하고 그 의미를 모나치노 교수와 함께 토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발견한 것과 내가 연구한 것을 그분이 점진적으로 수락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의 연속성과 타당성에 관한 의미 있는 입증 자료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나의 주임 교수님과 그 문제에 대해 함께 의논을 했습니다.
그 한 예로 내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가인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의 증거 자료를 발견했을 때의 일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는 예루살렘 교회 교인의 후예로서 나사렛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에피파니우스는 예루살렘 교회 교인의 직계 자손으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20절에 주신 권고의 말씀에 따라 예루살렘 교회의 신도들이 주후 70년에 있었던 파멸 이전에 예루살렘 도시를 떠나 예루살렘 북쪽 약 100마일(165km) 떨어진 펠라(Pella)라는 곳으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저들이 그곳에서 함께 모여 살았는데 그곳 사람들이 나사렛 사람들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에피파니우스는 그가 살던 당시에 나사렛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켰는데 그 때가 14세기 중반이라고 했습니다. 이 중요한 역사적인 문서는 예루살렘 교회, 초창기 기독교에서 안식일을 포기하고 일요일을 지켰었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입니다.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의 후예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꾸었다고 하는 것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로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도록 영향을 미친 반유대주의자들의 첫 출현은 주후 135년 하드리안 황제(the emperor Hadrian)가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도록 하는 금령을 내린 때였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 당시 태양 숭배가 너무나 만연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로 태양의 날을 수락하므로 유대인들과 상관이 없으며, 로마 사람들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이도록 한 것입니다.
1세기 후반에 이르러 반유대주의자들이 로마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메시야가 나타날 것을 기대하면서 황제가 지배하는 여러 지역에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의 황제 하드리안은 바르코코바(Barkokkoba)라고 불리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무리가 일으킨 유명한 팔레스타인 폭동을 진압하는데 많은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그러한 반역은 주후 132년에서 135년까지 이르렀다. 결국, 하드리안은 주후 135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유대주의를 반대하는 법령을 선포하고 법으로 유대주의자들이 행하는 예식들과 특별히 안식일 성수를 금한다는 법령을 선포했습니다.
안식일을 반대하는 법령을 제정하고 억압하기 때문에 이러한 억압을 피하기 위해 많은 이방인 그리스도인 로마의 감독들이 안식일을 일요일로, 유월절을 부활절 일요일로 바꾸는데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기 때문에 유대인처럼 대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들은 로마사람들과 같이 일요일을 지켰으며,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내가 내리고자 하는 결론은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꾼 것은 거룩한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편리성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편리하다는 것 때문에 거룩한 명령을 바꾸기 위해 법제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계명 가운데 지키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그 일로 염려하지 말라. 그냥 바꿔버리라!”라고 한번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리스도인들이 때때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보다 편리성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반유대주의의 영향으로 안식일을 포기하고, 태양을 숭배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일요일 제도를 받아들이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2세기 초에 일요일에 태양신을 섬기는 일이 로마에 편만했다는 것을 알아두는 일입니다. 태양신을 섬기는 것이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태양을 섬기는 날을 로마 주일 제도의 첫째 날로 만들었습니다.
태양의 날을 주일 중 둘째 날에서 첫째 날로 바꾸었을 때, 이교주의의 배경을 가진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태양의 날을 저들의 예배의 날로 바꿈으로 저들은 유대인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으며, 그 당시 로마법에 의해 로마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금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연구의 결론은 초대 교회 당시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꾼 것은 이름이나 숫자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그 의미와, 권위와 경험까지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거룩하게 제정된 거룩한 날(Holy DAY)을 사람이 만든 휴일(holiday)로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변개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일을 통해서 주고자 의도하는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신앙적인 경험들을 수 세기를 거쳐서 수 백 수만의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서 빼앗아버리도록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치면서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경험한 가장 흥분적인 사실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974년 6월 14일에 있었던 내 논문 심사 때 있었던 일입니다. 논문 심사는 금요일 오후에, 그레고리안 대학 아울라 마그나 대강당(Aula Magna-the Grand Hall)에서 있었습니다. 이 강당은 금으로 된 잎으로 천정이 장식되었으며 바로크 식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가장 아름다운 건물입니다.
논문 심사원 석에 제수이트 학자들 가운데 유명한 다섯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저들 모두는 내가 입은 것과 같은 번쩍거리는 겉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경우에 따라 더욱 번쩍거리는 것을 붙이기도 합니다. 나는 중앙에 있는 작은 책상 뒤에 앉아 있었습니다. 로마 시에 있는 재림 교회 교인들 가운데 이 광경을 목도하기 위해 약 100여명의 신도들이 함께 배석해 있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연구한 방법과 내 연구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시간을 주었습니다. 결론을 내리면서 긴장으로 인해 쉼이 없는 사회에서 안식일이 주는 의미와 축복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열렬하게 호소했습니다. 나의 주임 교수였던 모나치노 교수의 논평은 믿기가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전에 콘라도 모스나라고 하는 학생이 논문을 쓸 때 약 2년간에 걸쳐서 지도하면서 일요일의 기원은 사도들에게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사무엘레 바키오키 군과 2년 동안 또 다른 시간을 보내면서 연구할 결과, 내 마음이 바뀌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키오키 군과 토의하고 연구한 결과. 이제 내가 가진 확신은 일요일을 지키게 된 것은 초대교회 이후부터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나치노 교수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논평을 마쳤습니다.
“사무엘레 바키오키가 말하고, 안식일에 대해 연구한 것처럼 우리가 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하고 거룩한 쉼의 안식의 날이 그에게 임하기를 비는 바입니다.”
나의 주임 교수가 한 이 말들은 지금도 내 귀에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이 말들은 사실 내가 바오로 6세 교황으로부터 받은 금메달 이상으로 중요한 말이었습니다. 그런 후 며칠 있다가 나는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나의 학교 성적과 논문에 대한 금메달을 수여받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소식은 나에게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특별히 내가 연구 발표한 논문이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기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금메달의 전면에는 교황 바오로 6세(Pope Paul VI)의 그려져 있고, 교황 즉위 9년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메달 뒷면에는 어깨에 양을 메고 있는 목자가 새 예루살렘으로 양을 이끄는 장면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메달의 의미는 교황이 인류를 이끄는 목자로서의 사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금메달을 보여드리는 것은 나 개인의 어떤 승리가 아니라 진리가 승리한 것이며, 안식일의 진리를 긴장에 휩싸여 쉼이 없는 사회에 전해야 할 복된 소식이며, 이 진리가 승리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보여드립니다.
금메달뿐만 아니라 양피지에 손으로 직접 정사한 특별한 학위 수여증도 받았습니다. 이것은 사실 내가 처음에 저에게 주려고 했던 학위증을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기 때문에 두 번째로 만들어서 준 학위증서입니다. 처음 학위증을 거절한 이유는 학위증의 맨 첫 말이 내 자신이 천주교회의 가르침에 동의하는 것으로 서명했기 때문에 이 증서를 수여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나는 학감에게 그러한 문구가 있는 학위증을 받을 수 없는데, 내가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내가 믿는 신앙을 저버리고 천주교회로 개종한 것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학감은 학위증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는 것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저 그 종이 위에 내 이름만 적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서 학위증에 적혀 있는 말에 대해 라틴어로 되어있으니까 미국 사람들은 라틴말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그러한 학위증을 받지 않겠다고 거절하자, 학감은 바티칸 서기에게 천주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했다고 하는 말을 빼고 특별한 학위증을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사용하는 특별한 학위 수여자들을 위한 휘장입니다. 나는 사실 이런 것을 입는 것에 대해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난 27년 동안 5-6회 정도만 입었습니다. 이것은 휘장 가운데 새겨진 그레고리안 대학을 표상하는 마크입니다. 금실로 수놓아져있습니다. 재림교인 신부(神父)의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면 아마 이런 모양일 것입니다.
중앙아메리카를 비롯해서 천주교세가 강한 나라의 천주교 지도자들의 반발로 인해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처를 했습니다.
1). 나의 논문 “안식일에서 일요일로”라고 하는 책이 수거되었고,
2). 나의 주임 교수로 하여금 나와 더 이상 접촉하지 말라는 경고를 했고,
3). 그레고리안 대학에 비천주교인들을 위한 입학의 문이 닫혔습니다.
나는 바티칸 도서관에서 이러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섭리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날에는 이 일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분의 특별한 섭리로 내 생애를 인도하셨다는 점입니다. 섭리에 의해 바티칸 바로 옆에 사시던 나의 부모님을 통해서 재림 기별을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섭리로써 대학에 들어가게 하시고, 공부하게 하시고, 유명한 바티칸 대학의 출판소에서 안식일 진리를 출판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책의 보급으로 인해 세계 도처에 있는 교회 신실한 지도자들이 안식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안식일 주는 축복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안식일 진리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하셨고, 체험하도록 하신 점입니다. 그레고리안 대학에 입할 당시의 안식일에 대한 나의 견해는 부정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나는 안식일 계명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꼭 지켜야만 하는 중요한 계명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성경과 역사적인 재료들을 연구하면서 처음으로 안식일이란 고대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얽어매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친교하자고 보내는 하나님의 자비의 초청에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안식일은 매 안식일마다 그분에게 와서 쉼을 얻으라는 그리스도의 초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환영한다는 것은 우리 삶 속에, 우리의 가정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그리스도를 특별한 손님으로 초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에 무엇을 하던지, 어떤 말을 하던지, 안식일의 주님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안식일이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오라는 초청을 받을 때.
하던 일을 멈추고,
그분을 위해 시간을 마련하고,
그분의 초청에 사랑으로
반응을 보이는
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더욱 온전히 더욱 자유스럽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안식일에 우리를 위해 하던 일들을 멈추는 것을 배우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임재와 평안과 쉼을 느끼고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게 될 때, 안식일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사랑에 대해 더욱 많이 깨닫게 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4.5.29
Crossabbath Gospel Ministry
안식일복음 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