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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고개를 넘어 구리시 인창동의 동구릉 속으로 들어가 보자.
‘동구릉’으로 입주해 온 ‘능’으로는, 5대 문종 이후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입주하길 거절해 오다가
드디어 후보자가 나왔다. 조선의 ‘버금 멍~ 군왕’ 14대 선조의 원비 의인왕후가 1600년 승하한 것이다.
처음, 포천에서 산릉공사를 하는데 불길하다며 검암산 ‘동구릉터’에 신규로 들어온다.
문종의 현릉을 조영한 이후 실로 150년 만의 일이고, 현덕왕후의 능이 우여곡절 끝에 되돌아온 것
역시 1513년 이므로 90여 년 전의 일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라에 Money가 Have NO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직후로 피폐한 국토와 재정으로 국상 치르기가 쉽지 않았다.
미분양(?)터에 쉽게 쉽게 유택을 정했고, 이후에 1608년 선조임금은 서쪽 언덕 지금의 ‘경릉’자리로
모셨다가, 1630년 의인왕후 곁으로 옮겼다. 천장하고 2년 후 계비 인목왕후가 승하하자 선조의 좌측에 능침을 조성하였다. ‘목릉’은 같은 묘역 내에 동원이강의 형태로 세 분이 잠들어 계신다.
목릉이 들어오면서 ‘동구릉’이 서서히 왕가의 무덤군으로 꾸며지기 시작한다.
:: 선조의 목릉이다. 좌측에 원비 의인왕후 능과 2개의 단릉 형태로 있다.
:: 정자각 뒤로 왕과 원비의 능이 보이고, 비각 오른쪽 언덕 위에 인목왕후의 능이 보인다.
조선의 국왕이 중국에서 태어났다. ‘으뜸 멍~ 군왕’ 인조의 둘째아들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있을 때 아기가 태어난 것이다. 그 분이 18대 현종인데 완벽 엄처시하로 믿거나 말거나 15년간 국왕을 지내면서 후궁이 한 명도 없었다. 정말이다. 명성(明聖)왕후에서만 숙종과 공주 세 분을 두셨을 뿐이고, 흘리고 다닌 자식이 정말로 없었다. 34세에 승하하면서 아들 숙종을 위해 서인과 남인을 골고루 데리고 놀면서 아들에게 파벌싸움을 적절히 이용하는 산교육을 제대로 보여 주시고 가셨다.
부왕 효종이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자 본래 건원릉 서쪽 둔덕에 모셨었다가 1673년 여주 세종대왕 옆으로 이장을 하였다. 이듬해 2월 인선왕후까지 승하하여 여주에 모셨었는데, 현종께서도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8월에 승하하신 것이다.
숙종대왕이 다음 해 1674년 검암산에 능침을 마련하고 ‘숭릉’이라 하였다.
명성왕후 김씨가 10년 후에 현종의 옆으로 오게 되자 쌍릉으로 모셨다.
동구릉에 효종의 ‘영릉(寧陵)’이 들어왔다 나갔지만 새로 ‘숭릉’이 들어서면서 점차 더 왕가의 무덤군
으로 변모해 간다.
:: 모화사상의 영향으로 화려한 팔작지붕이고, 정전5칸x 배위청3칸으로 보물 1742호이다.
::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숭릉(쌍릉)이다.
‘으뜸 멍~ 군왕’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가 합장된 인조와 인열왕후의 장릉(長陵, 당시는 갈현리로 이장 전이므로 운천리이다.)을 피해 검암산에 숙종이 장사지내며 능호를 ‘휘릉’으로 하였다.
1688년(숙종14년)의 일이다. 숙종은 재위기간도 영조 다음으로 긴 46년을 국왕으로 있었지만 재위기간 중에 국상만 6번을 치루었는데, 이 휘릉이 3번째 조영한 능으로 당시 유행하던 초화려함의 중국바람을 선왕의 숭릉에 이어 증조 할머니의 능에도 적용시켜 아주 화려하게 만들어 드렸다.
이 휘릉이 조영되면서 ‘동오릉’이 되었다.
:: 보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숭릉 정자각에 버금가는 크기와 화려함을 지녔다.
:: 인조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단릉)이다.
숙종대왕과 장희빈의 아들인 조선 20대 군왕 경종의 세자빈 단의왕후 심씨가 승하하였다.
병약한 세자(경종)을 20년 이상 잘 섬기었는데 졸하였다.
할배인 현종의 ‘숭릉’ 왼쪽 산줄기에 세자빈의 예우로 장사지냈다. 2년 후 경종이 즉위하자 추존되어
왕후가 되었고, 능호를 ‘혜릉’으로 받았다.
숙종대왕 사망 2년 전인 1718년(숙종45)의 일이다. 이제 ‘동육릉’이다.
:: 세자빈의 신분으로 승하하여 조형물이 검소하다.
‘동구릉터’ 하이라이트는 단연 영조대왕과 정순왕후 김씨의 ‘원릉’이다.
정조대왕의 할배이자 사도세자의 부친 영조대왕은 조선 최장수 국왕으로 재위 52년에 보령 82세로
1776년에 승하하자 국왕으로 즉위한 손자 정조대왕은 할배에 대한 생전의 유감으로 할배가 원했던 원비 정성왕후 서씨의 곁에 마련된 수릉터가 준비되어 있음에도 마다하고 1673년 즉 100년 전에 여주로 이장해 간 효종의 구 영릉터에 유택을 마련해 장사지냈다.
당시 지관들 조차 흠이 없는 길지라 주장하고, 영조 계비 정순왕후 김씨 역시 영조가 원비 정성왕후
곁으로 가는 것이 더 싫었음 인지 별 의견이 없었으므로 당시로는 정조와 사도세자에 이은 업보의
라이벌 정순왕후 김씨의 의견이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아 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망자의 입장에서 더욱 기가 막힐 노릇인 것은 1724년 영조대왕의 이복형 경종이 급서하여 21대 국왕
으로 즉위하여 국장을 치룰 때 지관들이 바로 지금의 그 음택을 천거하였다.
당시 영조는 어찌 국장을 치르는데 파묘하여 이장해 간 자리를 쓰겠느냐고 물리쳤던 곳인데... 바로
그곳을 자신의 음택으로 남은 자들이 정해버렸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1805년(순조 5년), 계비 정순왕후가 순순히(?) 영조대왕 좌측으로 쌍릉으로 들어왔다.
15세의 나이에 65세의 영조와 혼인하여 가문(경주김씨)의 세도정치 확립에 지대한 영향력을 실어 주었던 인물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던 사도세자나 며느리 혜경궁 홍씨보다도 10세 아래였었고, 손자이자 대(代를) 이은 영원한 업보의 라이벌 정조대왕보다 불과 7살 위였다.
:: 효종의 파묘터에 조영한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의 원릉(쌍릉)이다.
죽어서 국왕이 된 다섯 분의 추존왕 중에 마지막 추존왕 문조(익종)는 23대 국왕이신 순조와 순정왕후 김씨의 적장남으로 1830년 세상을 떠난 효명세자이다.
19세에 부왕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안동김씨의 견제를 위해 처가 쪽 풍양조씨와 소외집단의 인재를 등용하여 세력을 균형화 시키며 선정에 힘을 쏟았으나, 세상사 맴대로 되는 것이 그렇지요~~
순조 30년, 22세로 요절하고 말았다. 부왕 순조는 처음 아들 유택을 큰 할배 경종의 ‘의릉’ 왼쪽 언덕에 마련하여 ‘연경원’으로 하였다. 1834년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추존되어 ‘익종’이 되었다.
1846년에는 풍수상 불길하다며 양주 용마봉 아래로 천장하였다가, 다시 1855(철종6년)에 ‘동구릉’ 내
건원릉 왼쪽으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부인 신정왕후 조씨(조대비)는 23세에 혼자가 되었고, 아들이 8세에 국왕이 되자 왕대비로 수렴청정을 펼친다. 그러나 헌종이 재위 15년에 2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모후 순원왕후 (안동김씨)를 등에
업고 1849년 철종을 즉위시키며 집권하자 안동김씨 일문에 한을 품는다.
순원왕후와 철종이 차례로 승하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된 조대비는 흥선군의 아들을 차기 국왕으로 지명하여 안동김씨를 견제하고 고종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혈맥을 잇게하니, 즉 고종은 헌종의 동생이 되어 1863년 조선의 26대 국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실세는 대원군이었고, 친정세력을 기용하였지만 명성왕후가 정치에 참여하면서 민씨세력에 밀리고, 국가는 망조의 늪으로 하염없이 빠져들자 오히려 살아있는 삶을 원망하였단다.
1890년, 83세의 조대비가 경복궁 흥복전에서 승하하여 ‘수릉’에 합장되었다. ‘동팔릉’이다.
:: 수릉(綏陵)은 효명세자 죽은 뒤 60년이 지나서 합장되었다.
동구릉터에 마지막으로 입주하신 주인공은 왕릉에서 형태가 전무후무한 삼연릉의 헌종이시다.
헌종은 연인을 위하여 창덕궁 낙선재를 지어 선물하신 조선의 풍류남아 젊은 군왕이었다.
삼연릉의 나머지 주인공은 원비 효현왕후와 계비 효정왕후로 최종 입주는 1903년 계비가 하였다.
헌종은 추존 익종과 신정왕후(=조대비)의 외아들로 순조의 손자가 된다.
3세 때 부친이 죽어 왕세손이 되었다가 순조가 승하하자 1834년 8세에 즉위하여 할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그러나 보위 15년, 1849년 후사도 없이 보령 23세에 승하한다.
헌종이 승하하기 6년 앞서 원비 효현왕후 김씨가 1843년 16세의 나이에 병으로 승하하였다.
건원릉의 가장 서쪽 산줄기에 모시고 ‘경릉’이라 능호를 지었다. 이어 헌종이 승하하자 처음에는 쌍릉
으로 모셨고, 1903년 계비 효정왕후 홍씨가 승하하시자 걍~ 세 분의 능침을 나란히 모셨다.
‘경릉’은 분양은 1849년으로 일찍 받았지만 최종 입주는 1903년으로 동구릉에서 제일 늦다.
1903년이면 조선이 합병 당하기 7년 전으로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듬해 1905년 조선을 상대로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며 합방에
한 걸음 더하던 시점이었는데, 허울뿐인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에 무슨 힘이 남았겠나??
국장을 치를 만한 능력조차 없는 마당에 새롭게 조영하느니 걍~~ 능침 하나 추가하여 대~충 국장을 치루었다. 외견상 그럴 듯하게 세 개의 능침을 나란히 붙이고, 또 난간석으로 세 개의 능을 연결해 놓으니
어때요? 괜찮아 보입니까?? ... 정말로 예뻐요? 멋있어요?? 그럼 OK!!
:: 곡장 뒤에서 보았을 때 우측이 헌종, 원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순서이다.
이렇게 해서 동구릉은 처음 1398년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으로 시작하여 마지막을 1903년 효정왕후의 능침이 ‘경릉’에 들어오면서 ‘동구릉’이란 이름을 갖기까지 505년이 걸린 것이다.
참말로 오래 걸렸다. 조선의 역사가 519년인데... - 세나 - 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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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구릉에 갔을땐 그저 릉이겠지 했었는디~~~~
왕후들의 릉도 화려하긴 마찬가지네...
집에서 가까이 있으니 조만간 다시함 가봐야겠당~~~~
예쁘네요.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어릴적 무지 소풍 많이 다닌 곳이나..어느 왕과 왕후가 잠들어계신지는 안중에도 없었는데..했던 곳.
미롭지만..
저리 많은 왕족들의 갖가지 사연이 깃든 곳이군요.
예전 남동생 포천쪽 군복무할 때..지나치며..어머 여기가 동구능이야
언제 다시 찾아보아야지 싶었는데..
서울 근교 왕릉들 선선해지면 찾아보고싶어요.
많은 자료와 이야기 정리하시느라 요즘 하나님 머리에 쥐나신다능..
읽는 우리야 행복하고
하나아저씨가 글재주는 타고났어요.
그르게요정말 잼있게 쓰세요신왕...etc...
빙
덕분에 오늘에야 동구능 서오능에 얽힌 사연 다 알게 되었군요.
모두 다 옛날에 소풍갔던 곳들이지요.
왜 그 때는 소풍갔다하면 능으로 갔나 몰라요. 요새보니 갈 곳도 많드만.
하와이도 있고 욜여사님 좋아하는 마추피추도 있고 시애틀의 레이니어 산, 갈 곳도 많드만.
차비 때문이었을까? 그건 문교부에서 부담하면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었을텐데 ...^^
어느해인가는 정능으로 소풍을 간대요, 세상에...
그건 소풍이 아니라 집 뒤의 뒷산 산책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그 소풍은 안갔지요.
어려서 소풍때문에 이래저래 능에 대한 추억만 늘어났었댔습니다.
놀만한 넓은 장소가 없었던것일겁니다.
저도 8년을 서오릉으로 소풍을 갔습니다.
그것도 봄 가을요.
그땐 다 그랬쓔 지둥 중3까정 한곳을 울집앞 넓은 자갈밭 냇가를 여덟번 간적두ㅎㅎ
참말루 지가 우린 집에서 놀다 가면안되냐구해본적두 ㅋㅋ 학교까정은 4km를 가야 혔응께요
우리후배는 집앞의 분교에 다녔지만 분교는 이미 폐교된지 오래더만요
구래두 왕릉으로 소풍 다니신 분덜은 품격이 남 다르네유.
우린 산골짝 이름 없는 무덤가로 소풍 다녓다는,,,,,,,,,,
ㅠㅠ
즐겁게님 덕분에 늘 즐겁습니다.
하나아저씨가요. 그때 그 소풍장소, 그곳 사진찍어 보내시면
누구의 무덤인지 알수있데요.
깊은 산 오솔길 옆인데두유?
와현 멋쟁이..그흔한 후궁이 없었다니..꼭 기억해둘께유이 양파정당을 적당히 가지고 논거..맞는거 같어유대충 훑고..낭중 또..
글구 숙
넘넘 좋아요
정말입니다.
조선 왕조에 현종같은 사람이 있었다니 믿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전직 대통령, 클린튼 같은 친구는 왕도 아니면서 200명의 궁녀랑 어쨌다고 자랑하기두 하드만.
머저리 같은 녀석...
현종 같이 훌륭한 사람은
노벨상 중에서도 '착한사람상'같은 것 있으면
꼭 줘야 합니다.
앞으루 남정네들은 다 현종왕릉앞에선 기어서들 댕기슈 ㅋㅋ
제대루 서서댕길남정네가 몇이나 과연 있을지 ................... 에혀!
울들은 존경의 인사로 정중히 큰절루다가 설라무네 ㅎㅎ
현종(顯宗)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위에서 하나또하나님이 설명하셨듯, 그는 중국(심양)에서 태어나셨죠.
아버지 효종이 만주족의 나라인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자, 망한 한족의 나라인 명나라의 원수를 갚겠다는 '小中華思想'에 의해 청나라를 무찌르겠다는 '북벌론'을 펼치다 승하하자, 나름대로 개혁을 추진했던 賢君이었습니다.
그런데 건강상 문제로 몇년을 넘기지 못하고 승하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현종시대는 짧았지만 세종대왕 못지 않은 태평성대였지요...
원래 '顯宗'이란 묘호도 아무 임금에게나 부여하지 않습니다.
한족이 세운 나라의 '顯宗'들은 대부분 聖君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