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권제44 (열전 제4) 거칠부
거칠부(居柒夫)<혹은 황종(荒宗)이라고도 하였다.>는 성이 김씨(金氏)이며 내물왕의 5대손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각간(角干) 잉숙(仍宿)이고 아버지는 이찬 물력(勿力)이었다.
거칠부는 젊었을 때에 사소한 일에 거리끼지 않았고 원대한 뜻을 품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구경하였다. 문득 고구려를 정찰하려고 그 땅에 들어갔다가 법사(法師) 혜량(惠亮)이 절을 개창하여 불경을 설법한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그 곳에 나아가 강경(講經)을 들었다. 어느 날 혜량이 묻기를 '사미(沙彌)는 어디서 왔는가?' 하므로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날 저녁에 법사가 그를 불러 만나니 손을 잡으며 은밀히 말하였다.
'내가 많은 사람을 보았는데 자네 용모를 보니 분명 보통 사람이 아니다. 아마 다른 마음을 가졌지?'
이에 답하였다.
'저는 변방에서 태어나 아직껏 불도의 원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법사님의 덕망과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왔으니, 법사님께서는 거절하지 마시고 끝까지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소서.'
법사가 말하였다.
'노승은 불민한 데도 능히 그대를 알아볼 수 있는데, 이 나라는 비록 작지만 사람을 알아보는 자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대가 잡힐까 염려하여 은밀히 충고하여 주는 것이니 빨리 돌아감이 좋을 듯하다!'
거칠부가 돌아가려 할 때 법사가 또 말하기를 '그대의 상을 보니 제비 턱에 매의 눈이라, 장래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이다. 만일 군사를 거느리고 오거든 나를 해치지 말라.' 하였다.
거칠부가 말하기를 '만일 법사님의 말씀과 같이 법사님과 즐거움을 같이하지 않는다면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환국하여 관직에 나갔는데 직위가 대아찬에 이르렀다.
진흥대왕 6년 을축(545)에는 왕명을 받아 여러 문사(文士)들을 모아 국사(國史)를 편찬하였고 파진찬으로 승진하였다.
12년 신미(진흥왕 12년: 551)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大角)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平壤)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리의 기세를 타서 죽령 바깥,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취하였다.
이때 혜량법사가 자기의 무리를 이끌고 길거리로 나오니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례로 인사를 올리고 앞으로 나가 말하기를 '전일 유학할 때 법사의 은혜를 입어 생명을 보전하였는데, 지금 뜻밖에 서로 만나니 어떻게 보은하여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고 하니 법사가 대답하였다.
'지금 우리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바라건대 나를 그대 나라로 데려가기 바란다.'
이에 거칠부가 수레에 태워 함께 돌아와서 왕을 뵙게 하니, 왕이 법사를 승통(僧統)으로 삼았다. 이때 비로소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八關)의 법이 시작되었다.
진지왕 원년 병신(576)에 거칠부는 상대등이 되어 군사와 국가의 중대한 일을 맡았다가 늙어 집에서 죽으니 향년 78세였다.
居柒夫 或云荒宗 姓金氏 奈勿王五世孫 祖仍宿角干 父勿力伊 居柒夫少 弛有遠志 祝髮爲僧 遊觀四方 便欲高句麗 入其境 聞法師惠亮開堂說經 遂詣聽講經 一日惠亮問曰 ꡒ沙彌從何來ꡓ 對曰 ꡒ某新羅人也ꡓ 其夕法師招來相見 握手密言曰 ꡒ吾閱人多矣 見汝容貌 定非常流 其殆有異心乎ꡓ 答曰 ꡒ某生於偏方 未聞道理 聞師之德譽 來伏下風 願師不拒 以卒發蒙ꡓ 師曰 ꡒ老僧不敏 亦能識子 此國雖小 不可謂無知人者 恐子見執 故密告之 宜疾其歸ꡓ 居柒夫欲還 師又語曰 ꡒ相汝鷹視 將來必爲將帥 若以兵行 無貽我害ꡓ 居柒夫曰 ꡒ若如師言 所不與師同好者 有如日ꡓ 遂還國返本從仕 職至大阿 眞興大王六年乙丑 承朝旨 集諸文士 修撰國史 加官波珍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比台角․耽知․非西․奴夫波珍․西力夫波珍․比次夫大阿․未珍夫阿等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 乘勝取竹嶺以外高峴以內十郡 至是惠亮法師 領其徒出路上 居柒夫下馬 以軍禮揖拜 進曰 ꡒ昔遊學之日 蒙法師之恩 得保性命 今邂逅相遇 不知何以爲報ꡓ 對曰 ꡒ今我國政亂 滅亡無日 願致之貴域ꡓ 於是居柒夫同載以歸 見之於王 王以爲僧統 始置百座講會及八關之法 眞智王元年丙申 居柒夫爲上大等 以軍國事務自任 至老終於家 享年七十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