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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하나님의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속함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1:30),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9)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는 말씀은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지어졌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지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야곱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 하셨다. ‘나서’라는 말은 거기서 출생하고 거기서 창조되었다는 말이다. ‘나와서’라는 말은 거기로부터 나와서라는 말이니까 출생해서, 창조되어서라는 말이 아니고, 거기로부터 나와서 지혜로 나오고 의로 나오고 거룩함으로 나오고 구속함으로 나왔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원래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지었던 것이다.
비유로 말씀 드리면, 전기회사에서 전기를 만들어 전구로 올 때까지는 ‘나서’이고, 전구에서 빛이 비칠 때는 ‘나와서’ 비치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서, 거기서 세상에 대해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게 하려고 한 것이다. 우리가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만들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빛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놓을 수가 없다. 불이 있으니까 거기서 빛이 비추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거기서 나온 것이 지혜다. 거기서 나온 것이 의로움이다. 거기서 나온 것이 곧 거룩함이다. 그런데 사람은 사탄에게 속아서 자기가 지혜라는 것을 만들려고 생각했다. 의로움이라는 것을 만들려고 생각했다. 거룩함이라는 것을 만들려고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거룩해질까를 생각한다. 나는 어떻게 하면 의로워질까를 생각한다. 나는 어떻게 하면 지혜로워질까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원래 만드실 때는 우리를 보고 지혜를 의로움을 거룩함을 구속함을 만들라고 한 것이 아니고,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거기서 너희가 나와서 지혜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거기서 나와서 의로움이 되고 거룩함이 되고 구속함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불이 있으니까 빛이 비춘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불의 결과가 빛이니까 아주 자연스럽다. 아담의 일을 보면 불이 없는데 빛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노력은 불이 없는데 빛을 만들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노력이다.
반대로 하나님은 불이 있으면 저절로 빛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불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불만 있으면 저절로 구속함이 되기도 하고, 의로움이 되기도 하고, 지혜가 되기도 하고, 거룩함이 되기도 한다. 불이 있으면 뜨거운 것으로 사용하고 싶으면 열로 바꾸어 쓸 수 있고, 밝게 하고 싶으면 빛으로 바꾸어 쓸 수 있고, 동력으로 바꾸어 쓰고 싶으면 동력으로 바꾸어 쓸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바꾸어 쓸 수가 있다. 그 근원은 모두다 불이다. 근원은 모두 불인데 불을 그렇게 사용할 수가 있다.
하나님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도 알고 보면 다 하나이다. 그것이 빛도 되고 열도 되고 동력도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그것이 나올 때 그렇게 나와진다는 말이다. 이것이 생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가 밥을 먹었더니 손에 힘이 생기고 발에 힘이 생겨서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밥을 먹지 않고 손을 아무리 훈련을 한다고 하더라도 손이 힘이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이고, 발이 힘이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다. 먹었기 때문에 우리는 힘이 생겨서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을 보고는 움직이라고 하지도 않고, 교육을 시키지를 않아도 젖만 먹이면 저절로 움직이고 있다. 젖만 먹였는데 생명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저절로 기고 저절로 엎드리고 저절로 서게 된다. 이것이 생명의 오묘한 법칙이다. 누구든지 이 법칙을 어기는 것은 도적이요 강도다. 이것은 문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고, 담으로 넘어온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 우리가 보는 예수는 누구인가? 바로 지혜이고 의로움이고 거룩함이고 구속함이다. 왜냐하면 그는 나와서 우리에게 보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있을 때는 우리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우리에게 나와서 의로움이 되었다. 그가 우리에게 나와서 지혜가 되게끔 되었다.
우리도 만일 하나님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거기서 우리는 빛을 발하게 된다. 등불을 켜놓으면 저절로 많은 세계가 밝아지는 것처럼 그 안에 있으면 우리는 빛을 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그 안에 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빛을 내고 싶어도 낼 수가 없다. 아담은 동산 안에 있을 때,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그는 만물에게 이름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산을 나온 후로 그는 만물에게 이름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되고 말았다. 그래서 반대로 오히려 만물로 인해서 자기가 이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너는 누구냐고 사람에게 물으면 나는 김아무개다, 이아무개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이름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이름으로 모자라기 때문에 부자다, 장군이다, 박사다, 아니면 교수라는 이름을 가지려고 한다. 그것을 자기의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김아무개, 이아무개를 자기 이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부자라고 하면 나를 규정해준다. 누가 나를 알아줄 때 부자로 알아주는 것이지 김아무개로 알아주는 것이 아니다. 장군이라면 나를 장군으로 아는 것이지 김아무개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장군 누구누구라고 하면 모르지만 그냥 누구누구라고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명함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이아무개라고 써갖고 다니면 다른 사람이 보나마나 마찬가지다. 과장 이아무개라거나 면장 이아무개라고 붙어야 명함이 되지 그냥 이름만 있으면 명함이 되지 않는다. 그러려면 그냥 입으로 나는 누구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은 만물에게 이름을 줄 수 있는 권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만물로 인해서 자기가 이름을 얻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만물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만물이 자기의 이름을 정해주기 때문에 자기가 그 만물을 무시했다가는 자기의 이름이 없어져 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자기는 자기의 이름을 얻기 위해서 만물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왜 돈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왜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왜 학식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는가? 그것이 있어야만 자기 이름이 생기기 때문에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으면, 만물에게 이름을 줄 수 있는 권능이 있게 된다. 하나님 안에서 벗어나면 만물에게 이름을 줄 수 있는 권능이 없기 때문에 반대로 자기가 만물에게서 이름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되게끔 된다. 원래 우리는 지어질 때 생명과를 먹고, 불이 있으면 빛이 나오듯이 밥을 먹었으면 힘이 나오듯이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지어놓았다. 그런데 생명과를 먹지 아니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었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든지 만들어야 된다. 지혜도 만들어야 되고, 의로움도 만들어야 되고, 거룩함도 만들어야 된다. 가령 거룩한 것을 만들려면 까만 옷을 입고 하얀 테를 들러야 된다고 생각한다거나 아니면 깨끗한 생활을 해야만 거룩함이 된다거나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를 만들려고 생각한다. 의로움을 자기가 만들려고 생각하면 옳치 않는 일은 절대로 반대하고, 옳은 일만 꼭 시인하면 의로워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의 의를 만들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잘 되는 일은 택하고, 잘 안 되는 일은 버리면 지혜로워진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지혜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도 아니고, 하나님의 의로움도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함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지혜가 아니라는 것이다. 벌이 지혜로운 것은 생명의 지혜다. 사람이 지혜로운 것은 생명의 지혜가 아니고 세상의 지혜라는 것이다. 개미가 지혜로운 것은 생명의 지혜다. 그러나 사람이 지혜로운 것은 만들어놓은 지혜다. 그래서 그 지혜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다. 그런데 벌은 모든 벌이 다 똑같다. 왜냐하면 생명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지을 때, 그 만물에게 각각 지혜를 주었다. 그 말은 생명 안에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생명만 확실하고 충만하다면 생명이 살 수 있도록 지혜를 그 생명 자체가 갖추고 있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그것이 굼벵이건 뭐가 됐건 자기 자신이 살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우리 속담에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한다. 굼벵이는 적이 오면 동글동글하게 뭉쳐서 굴러 내려가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자기가 살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이 지혜는 다른 것이 전혀 흉내 내지도 못하고 뺏어가지도 못한다. 그리고 가장 완벽한 지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완전한 지혜와 완전한 의로움과 완전한 거룩함과 완전한 구속함이 되셨다.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벗어나서 가짜 지혜와 가짜 의로움과 가짜 거룩함과 가짜 구속함이 많게 되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부르셔서 다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서 참 지혜와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과 참 구속함에 이르기를 원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혜>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란 어떤 것인가? 인간의 지혜와 비교를 해보자.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의 관원들이 하나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의 관원들이라는 말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공회원들과 같은 종교적인 지도자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서 아주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지도자들, 최고의 머리를 갖고 있는, 최고의 지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혜는 완전한 승리를 가지고 있는 지혜이다. 사탄은 이런 생각을 했다. 자기가 사람을 지배하고 하나님을 능멸하기 위해서는 자기는 만물을 소유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만물을 자기가 마음대로 가지고 사람에게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하면 사람이 자기에게 복종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탄은 하나님에게 가서 당신이 하나님처럼 유세를 하고 있지만 당신도 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만물을 쥐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만물을 가지고 내었다 들였다 하면 사람들은 다 내게로 따라오지 당신에게 따라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송사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욥기에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나를 존경하고 공경하는 것은 내가 만물을 주고 물질을 주고 안 주고 환경을 주고 안 주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자기를 지은 자이기 때문에 내가 참 하나님이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 내 종 욥을 시험해 보아라. 생명을 해하지 말고 욥에게 모든 시험을 다 해보라고 말했다.
사탄은 내려와서 욥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를 가지고 장난하게 된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만물이다. 그 만물을 욥에게 주었다가 빼앗다가 하는 일을 계속했다. 그랬더니 욥이 마지막에 자기 몸까지 병드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친구들이 위로하러 왔다가 싸움이 벌어지고, 아내가 자기를 원망하고, 여호와를 원망하고 죽으라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그때까지 욥은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지를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기가 그런 일을 당한다는 것이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자기의 결백함과 진실함을 아무리 말한다고 할지라도 세상에 아무도 그것을 알아줄 자가 없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미 악한 자는 벌을 받고 선한 자는 상을 받는다는 관념에 박혀있기 때문에 자기가 아무리 죄가 없다고 하더라도 네가 죄가 없다면 왜 그런 일이 생기겠느냐는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은 그 욥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욥은 이것이 참으로 답답하고 슬펐다. 그때까지 사탄은 승리를 하는 것 같았다. 옳지, 이것 봐라. 사람은 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욥이라 할지라도 들락날락하기만 하면 이것은 금방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욥은 정면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원망을 했다. 차라리 내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 될 것 같으면 차라리 일찍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소년 때에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젖먹이였을 때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내가 강보에 싸여있을 때 죽었으면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내가 모태에 있을 때 낙태가 되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저주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실상 내용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은 그러면 그렇지. 네가 별 수 있느냐? 하나님을 향해서 당신이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사람이 당신을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는데, 당신을 원망하고 있는데 당신이 무슨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까? 이렇게 공격했다. 마침내 욥에게서 “내신 이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이도 여호와시니 내가 어찌 여호와를 원망하겠는가?”하는 말이 결국 나오게 되었다. 그때 사탄은 물러가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이다. 얼른 생각하면 사탄이 이길 것 같았다. 승리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 시간까지 전혀 욥을 도와준 일이 없다. 그 욥을 하나님께서 냈다는 이유 때문에, 생명을 만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키웠다는 이유 때문에 마침내 무슨 말이 나오는가? “내신 이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이도 여호와시니”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나의 모든 소유는 내 생명에 앞설 수가 없다는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좀 더 유식하게 이야기한다면 내 존재는 내 소유에 앞선다는 이야기다. 내가 소유가 있기 전에 내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 존재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결국 욥이 선언하게 되었다. 그때 하나님이 승리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주지 않고 승리했다. 이것은 세상의 관원들이 아무도 깨달을 수 없는 지혜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도와주지 않았다. “엘리엘리라마 사막다니 하시니”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하소연을 했다. 왜냐하면 그는 전혀 하나님께 잘못한 일이 없고, 억울하게 죽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그렇게 말했다. 욥의 말과 똑 같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뛰어내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했을 때도 하나님은 아들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 자리까지 사탄은 완전히 승리하고 있는 것이다. 봐라, 사람이 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예수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말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드립니다.” 그때 예수께서 돌아서서 하나님을 포기하고 사탄에게로 가야겠다. 나를 십자가에서 뛰어내려주게 하는 이에게로 돌아가야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가 받으십시오”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승리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을 줌으로써 그가 지혜를 나타내게 되었다.
하나님의 지혜는 생명의 지혜다. 하나님의 지혜는 바로 그리스도다. 하나님은 사람을 완성하심으로써 사탄을 이기려고 하시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사람을 만들었다.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가? 사탄을 이기기 위해서 만들었다. 사탄을 왜 이겨야 하는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평화를 깨는 것이 사탄이기 때문에 이 사탄을 이기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아니한다. 그래서 이 사탄을 멸하기 위해서 사람을 지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그 목표를 그리스도에게 두었다. 다시 말하면 사탄을 이길 수 있는 사람에게 목표를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탄에게 끌려 다닐 자가 아니고, 우리의 운명은 사탄을 결국 정복할 자다. 히브리서에서는 언제 내가 어느 때 천사를 가리켜서 내 아들이라고 한 적이 있느냐? 천사는 단지 내가 필요해서 부리는 영에 불과하고,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너는 나를 상속할 자고 천사는 결코 나를 상속할 자가 아니고, 오히려 너를 수종 들 자라고 말하고 있다. 욥이 승리했을 때 사탄은 물러가고, 천사는 수종 들더라. 예수님께서 승리했을 때 사탄은 물러가고, 천사들이 와서 수종 들더라고 하고 있다. 승리하는 인간을 위해서 천사는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곧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이다. 이 그리스도는 아담과 같지 아니하고 물질에 매인 것이 아니라 만물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에 매인 사람이다. 그 아버지와 아들이 생명으로 결탁된 것처럼 생명에 매인 사람이다. 요셉과 베냐민을 이야기할 때, 야곱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아들은 내 생명과 결탁되어 있다는 말을 한다. 즉 생명으로 결탁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생명으로 결탁되어 있는 이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나온다. 아무리 많은 것이 와도 마지막에는 생명이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로 가자는 것이다. 십자가 앞에 가면 우리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의 생명만 남게 될 것인데, 그때 보면 우리가 꼭 있어야 할 것만 있게 된다. 하나님과 나 사이, 나를 지은 이와 지음 받은 자만 남게 될 것이니까 이것만이 진실이고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지혜가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 그것은 바로 여기서 나온 지혜이다. 머리에서 나온 지혜가 아니고, 생각으로 짜낸 지혜가 아니라 바로 십자가 앞에서 나온 지혜이다. 내신 이도 여호와시고 가져가시는 이도 여호와시라고 하는 데서 나오는 지혜이다. 우리가 아무리 지혜로워도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사탄을 이기지 못하면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엇에 놀아나는 것이다. 무엇에 놀아나는지 잘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길에 가보면 자기가 원하던 길에 와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원치 않는 길에 와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인도를 받아서 온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갈 곳으로 간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 못할 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우리가 사탄에게 속으면 우리 인생은 망해버리고 만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다. 하나님께서 수면에 운행하실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물을 고치지도 않고 물위에 발판을 놓지도 않고 거기에 사람을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 속에서 하나님이 거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물을 다스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신 분이다. 사람을 만든 것보다 지혜로운 것은 없다. 사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모든 것이 있어도 자기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셈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위해서 만물이 있는데,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이 있어야 그 만물은 가치가 있어진다. 사람이 없으면 그 만물은 전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만물은 사람을 위해서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있는 분이다. 어제도 어떤 분과 이야기를 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는데, 해도 만들고 달도 만들고 별도 만들고 굼벵이도 만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것은 잘 모른다고 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분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굼벵이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태양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단지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다. 사람을 만드시면 사람 안에 만물이 성취되게 되어있다. 사람이 되면 사람 속에 만물이 완성되게 된다. 사람만 있으면 만물이 완성되지만 사람이 없으면 해가 아무리 있어도 소용이 없고, 달이 아무리 있어도 소용이 없다. 만물이 아무리 있어도 성취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이름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 돼버리고 만다. 그 쓸모없는 것을 알아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 쓸모없이 태양을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무엇 때문에 알겠는가? 그것은 과학적인 필요에 의해서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어떤 과학적인 방식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누가 만들었든지 간에 절대로 비과학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모든 만물은 완전하게 과학적으로 만들어졌다. 우리가 그것을 규명하여 안다면,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안다면 과학이 발달할 뿐이다. 내가 행복해지거나 내가 승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을 연구하게 되면 자연과학이 발달하게 될 것이고, 과학이 발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발전하지는 않는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을 알아야 인간이 발전되지 태양을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알아서는 인간이 발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전혀 알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다. 그 그리스도 안에 버려진 만물들이 모두 성취가 된다. 버려진 만물들이 모두 유용해지게끔 된다. 우리는 만물을 어떻게 하면 될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람이 되면 만물이 복종하게 되고, 내가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만물이 나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그 만물로 인해서 복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 만물로 인해서 눌리는 자가 되고, 만물로 인해서 노예생활을 하는 자가 돼버리고 만다. 너희는 만물을 다스릴지니라고 했는데, 반대로 만물이 너희를 다스릴 것이다가 돼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지혜는 바로 사람이다. 사람보다 소중한 것은 없고, 그리스도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십자가를 지난 그리스도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거기서 모든 지혜가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십자가만 지나면 지혜를 연구할 필요가 없다. 지혜를 만들 필요도 없다. 그 사람은 저절로 지혜롭다. 마치 벌이 지혜롭듯이 마치 굼벵이가 지혜롭듯이 그 사람은 사람으로서 완전한 지혜를 갖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지혜이다.
이것이 어디로 나왔는가?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느니라고 했다. 예수는 거기서 ‘나와서’ 지혜가 되었다. 지혜를 만들어서가 아닌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바친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드립니다.”하고 바친다. 세상의 지혜로 볼 때는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세상의 지혜는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뭐가 되는가? 바치지 않으면 본전이 나오는 것인가? 어디서 우리 생명의 값을 받을 때가 있는가? 우리가 억만년을 살아갈 수가 있는가?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무슨 수가 있는가? 알고 보면 내가 기왕 없어질 인생이면 하나님께 바치는 것보다 더 지혜로운 것은 없다. 내가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내 것인가?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가지고 가는가? 아니면 내가 영원토록 사는가?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더럽게 소모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보다 지혜로운 분은 없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보다 지혜로운 것은 없다. 세상에서는 가장 미련한 짓이라고 한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는데, 이상하게 하나님께 바치는 것보다 더 지혜로운 것은 세상에 없다. 우리가 머리가 좋아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하나님께 바치는 것보다 더 지혜로운 것은 없다. 하나님께 바치면 부활의 영광에 이르지만 하나님께 바치지 아니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니까 아무데도 보상을 받을 데가 없다. 영광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자리는 하나님께 바치는 길밖에 없다.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이 나를 쓰시는 것보다도 내가 영화롭게 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께 나를 바치는 것보다도 영광스러워지는 일은 세상에 없다. 물건이 주인에게 쓰여지는 것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다. 사람이 만든 만물이 사람에게 쓰여지는 것보다 더 고귀할 수가 없다. 이것이 개에게 간다고 하더라도 소에게 간다고 하더라도 원숭이에게 간다고 하더라도 누구에게 간다고 하더라도 제 값을 발휘할 수 없다. ET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만일 우주인이 있어서 인간보다 IQ가 높은 기계인간이나 고무인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으로 만들어진 만물은 사람 앞에서만 가장 가치가 있다. 사람을 떠나면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인생은 하나님에게서만 가장 가치가 있다. 우리가 당장 대우를 받는 자리에 가서 보면 하나님 앞에 가야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는다. 우리는 다른 데서는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 서야만 우리는 비로소 인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는 인생이구나. 나는 사람이구나. 다윗이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무엇이관대 이렇게 존귀하고 사람이 무엇이관대 이렇게 귀합니까?” 하는 말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나님 앞에서 그 말이 나오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쓰여지면서 비로소 인생의 값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 하나님께 쓰여지지 않았을 때는 내 인생의 값은 만물 값보다 못하다. 왜냐하면 내 인생이 쓰여진 자리는 전부 만물을 위해서 쓰여진 자리이기 때문이다. 온 천하를 놓고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 목숨보다 못한 것을 위해서 내 목숨을 바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천하를 얻고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그러나 너희 목숨보다 더 귀중한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자기 목숨보다 더 귀중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디에 바치는가? 목숨 아닌 것에 자기를 바치는 것이다. 명예도 자기의 목숨이 아니다. 권세도 자기의 목숨이 아니다. 사람의 추구하는 어떤 최고의 이상도 자기의 목숨이 아니다. 그것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인생보다 어리석은 인생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보다 귀한 분에게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목숨이 귀해지는 일은 없다. 하나님에게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고귀한 값은 없다. 우리가 물건을 가지고 가서 여기 가서도 물어보고 저기 가서도 얼마를 주겠느냐고 물어본다. 가장 필요한 자에게 가서 가장 많은 값을 받을 수가 있다. 필요하지 않는데 가서는 값을 받을 수가 없다.
옛날에 내가 서울에 있을 때 방학에 내려왔다 올라가면서 여비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해산물이 나오니까 자잘한 장어, 요즘 말로 아나고를 쪼개서 말린 것이 있다. 우리지방에서는 굉장히 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값이 비싼 것이다. 이것을 서울에 가지고 가면 여비는 나오겠지 생각하여 사 갖고 올라갔다. 남대문시장에 가서 팔려고 내놓으니까 아무도 사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울 사람들은 아예 장어 말린 것을 먹을 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값이 있겠는가? 골치를 앓았다. 하루 종일 들고 돌아다녔다. 내가 처음 서울에 올라갔을 때만 하더라도 서울 사람들이 먹는 생선이라는 것은 거의 몇 가지로 제한되어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생선, 조기나 고등어나 갈치와 같은 대표적인 생선 이외에는 없었다. 고속도로가 뚫리고 난 다음에 서해안에서 올라오고 부산에서 올라오고 목포에서 올라와서 여러 종류의 잡어들이 들어와서 지금은 잡어들을 먹고 살지만 옛날에는 그런 것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러니 장어 말린 것을 언제 보았겠는가? 그래서 들고 돌아다니다가 본전도 못 받고 할 수 없이 주고 말았다. 다 먹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필요하지 않는 데 가서는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제 값을 받을 수가 없다.
사람은 어디에서 필요한가? 사람을 필요로 하시는 이는 하나님밖에 없다. 세상 어디에도 사람을 필요로 하는 데는 없다. 우리의 능력을 필요로 하고, 우리의 기술을 필요로 하지 사람을 필요로 하는 데는 절대로 없다. 여러분이 점심을 싸 갖고 ‘사람을 필요로 하는 데가 있습니까?’하고 돌아다녀 보라. 하나님 앞에 가지 아니하면 절대로 없다.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릅니다. 나는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 기술도 없습니다. 나를 좋아해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누가 당신을 환영한다고 할 사람이 있겠는가? 빨리 나가라고 할 것이다. 당신 같은 인간은 필요치 않다고 할 것이다.
결국 사람이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 같지만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기술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쓰다가 기계를 써버린다. 사람이 필요하다면 왜 기계를 쓰겠는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능력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과 같은 능력을 가진 기계만 있다면 누가 사람을 쓰겠느냐는 것이다. 골치 아프기 때문에 안 쓴다. 노사분규 일어나고 데모하는데 뭣 때문에 사람을 쓰겠는가? 기계 한 대 들여놓으면 밥을 달라하는가? 옷을 달라하는가? 데모를 하는가? 마르고 닳도록 사용할 수가 있다. 잘못하면 망치로 때려 부숴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원하고 있는 데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에게서 밖에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에게 가야만 인간 대우를 받게 되어있다. 어떤 능력으로서의 내가 아니고, 어떤 재주로서의 내가 아니고, 어떤 기술로서의 내가 아니라, 나의 생명, 나의 인격 하나밖에는 필요하지 않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모든 만물이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람이 중요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사람이 중요한가?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사람이 꼭 있어야 된다. 기계로는 나타낼 수가 없다. 하나님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 그렇게 속을 썩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니면 당신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격이 아니면 당신의 인격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기어코 붙들고 너는 내 백성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잊지 못한다는 것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사람들을 보내면 죽이고 때리고 욕하고 능욕하여 보낸다. 당장 주먹으로 치고 싶지만 그래도 없애버리면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이 안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고 또 다시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말로 사람이 없으면 안 되는 분이다. 호세아는 집 나간 아내를 부르러 다닌다. 가서 사정사정하여 집으로 돌아가자, 내가 네 좋은 것을 다해줄테니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여 데려다놓는다. 그러나 5~6일 살고나면 어디로 가버린다. 전화하고 경찰서 신고하여 간신히 찾아보니까 강원도 어느 산골짜기에 가 있다. 거기로 쫓아가서 돌아가자고 사정사정했다. 내가 전보다 더 잘해주마. 간신히 왔다. 또 5~6일 살고 나가버렸다. 이번엔 수소문을 해보니 술집에 가있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지만 이 아내가 하나밖에 없으니 이 아내를 기어코 찾지 않으면 안 되게 생겼다. 자존심도 있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할 수 없이 술집에 가서 이 사람이 내 아내이니 내 달라고 하니 돈 주고 샀으니까 마음대로 못 주겠다고 한다. 돈이 얼마냐고 하니까 100만원이라고 하여, 고래심줄 같은 100만원을 할 수 없이 주고 아내를 사왔다. 데려다놓으면 며칠 있으면 또 나가 버린다. 이것이 호세야서의 내용이다. 세상에 이런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남편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한두번도 아니고 술집으로 갔다가 창녀촌으로 갔다가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여자를 무엇 때문에 돈을 주고 사와야 되는 것인가?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인가? 하나님인 것이다. 바로 여호와다. 이스라엘을 부르신 여호와라는 것이다. 왜 그러겠는가? 여호와는 사람이 필요해서다. 호세야가 아내가 필요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것이 온 세상의 모든 것을 갖는 것보다 더 큰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다. 만물로서는 나자신을 나타낼 수가 없다. 사람이 있어야만 자신이 드러난다. 개에게 내 말을 많이 해주어서 내 속을 알아달라고 해도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천만금을 주고 사온 컴퓨터 앞에 가서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해도 알아줄 수가 없다. 돈벌이를 하려고 하니 일 좀 해달라고 하면 잘 해주지만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면 그 기계가 내 마음을 알 수가 있는가? 지금 사람들은 소원하고 있다. 마음을 알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도 무엇 때문이겠는가? 앞으로 그런 컴퓨터가 나오게 된다면 나는 이제 사람과 살지 않고 기계와 살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외로울 때면 기계 앞에 가서 자기의 외로운 이야기를 다 하고 하소연을 다 하고 기계와 같이 이야기하려는 생각을 가질지도 모른다.
사람은 사람이 없으면 자기의 마음을 알릴 데가 없다. 아무리 모든 것이 많다고 해도 천만금이 다 쌓여있다고 해도 사람이 없으면 자기를 나타낼 데가 없다. 자기의 고독을 위로할 데가 없다.
그러니까 사람은 얻는 자보다 지혜로운 자는 없다. 하나님은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지혜로우신 분이다. 그는 생명이고 인격이기 때문에 사람을 찾고 있다. 인격이 아니라면 누가 사람을 찾겠는가? 만일 자기 속에 나쁜 것밖에 없다면 아마 사람을 찾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찾아놓으면 그 사람을 통해서 나쁜 것이 나오게 될 것이니까 찾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 들어있다. 지극히 고귀한 것을 가지고 있다. 이 고귀한 것을 세상에 내놓아야 되는데, 꼭 사람을 통해서 내놓아야 된다. 그래서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다. 아버지께서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었다. 그것이 바로 지혜이다. 내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고 하고 다니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 사람을 통하여 그 사람은 참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보다 훌륭한 사람은 없다. 국회의원 출마하겠다고 나와서 나는 이렇게 위대한 사람이고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고 돌아다녀보면 사람들이 다 비웃는다. 그런데 어떤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은 이러이러해서 훌륭한 사람이고 그 사람은 이러이러해서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그렇습니까, 그 사람 참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증인이 말하니까 그렇다. 자기가 말하면 네가 위대한지 안 한지 누가 알겠느냐는 것이다. 너 혼자 똑똑하냐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증인이 와서 말하면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냐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와서 당신 자신의 증인을 불러내었다. 베드로는 예수의 증인이었다.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고 참 아들이고 참 사람이라고 증거했다. 그래서 그의 증거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다. 참된 증인을 통한 증거보다 완전한 일은 없다. 하나님은 자기의 증인을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기를 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이다. 누구든지 자기가 아름다운 것이 있거든 내가 아름답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나의 아름다운 것이 보이도록 해야 된다는 것이다. 내가 아름다운 것이 있어 나 혼자 아름답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른 사람에게 내가 아름답게 함으로써 그 사람이 그 아름다움을 보고, 또 다른 곳에 가서 참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말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이다. 그것이 생명으로 말미암은 일이다. 그것은 기계로 말미암아서는 되지 않고, 꼭 생명으로 말미암아 되는 일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 지혜는 세상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는 지혜이다. 기계를 필요로 하고 인간들이 이 지혜를 갖겠는가? 사탄이 이 지혜를 갖겠는가? 오직 하나님 밖에 이 지혜를 가질 수가 없다. 이 지혜가 바로 그리스도다.
<의로움>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의로움이 되었다고 했다. 의롭다고 하면 불의를 미워한다, 불의의 반대가 의니까 불의를 싫어하는 사람을 보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한다. 불의에 반대되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참으로 의로운 것은 그것이 아니다. 진실해야만 의롭다. 진실하다는 것은 무엇이 진실해야 의로운가? 예를 들어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었는데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다. 은혜를 베풀었는데 은혜를 모른다면 그것은 세상에 나가서 별 유명한 일을 다 하고, 별 의인 노릇을 다 해도 그것은 불의한 사람인 것이다. 불의한 돈과의 비유에서, 어떤 사람이 일만 달란트를 빚져서 도저히 갚을 길이 없으니 내가 당신 집에 와서 종살이를 하겠다고 한다. 그 주인이 안타깝게 생각하여 빚을 모두 탕감하여 주어 보냈다. 감사하다고 가서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만나서는 왜 아직도 안 갚느냐? 갚을 것이 없어서 못 갚았으니 조금만 참아달라고 하니, 그만큼 참았으면 됐지 하면서 경찰서로 끌고 갔다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고 불의한 사람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은혜를 모른다는 것이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서 정의를 위해서 싸우거나 정의를 구현한다거나 불의와 대항을 하는 것을 사람들은 의롭다고 생각하지만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의롭겠는가? 은혜를 아는 것이 의로움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없으면 내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빼놓고는 자기 부모를 아는 것이 가장 의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부모가 아니면 내가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가장 의로운 것이다. 그 의를 빼놓고 어디에서 의를 찾겠느냐는 것이다. 옛날에는 충신을 찾을 때 효자집안에서 찾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옛날에는 부모와 임금을 같이 취급했다. 아버지나 임금을 같은 급으로 취급했으니까 아버지의 은혜를 안다면 임금의 은혜도 안다고 생각했다. 임금이라야 은혜를 베푼 사람도 아니지만 그때는 임금은 은혜를 베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신하를 고르려면 거기서 골라야 된다는 것이다.
의인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자를 아는 것이다. 그것이 의다. 그 은혜를 베푼 자를 모르고 정의사회를 만들겠는가? 무슨 의로운 일을 하겠는가? 그 의로운 일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로운 일인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자기에게 못 마땅하다는 의이지, 그것은 절대로 은혜를 아는 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래서 그 의를 주장하는, 의롭다고 하는 사람들의 세계를 가보면 너무너무 잔인하고 강팍하다. 불의한 세계를 보고 그들은 참지를 못한다. 죽여도 시원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길이 참았었다. 자기가 자기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에 의롭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가 있다면 나를 만드신 이를 인정하는 것이 내 의다. 그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내 의라고 하는 것은 가짜 의다. 가짜 의라는 것이 어디에서 판명되는가? 가짜 의의 내용을 보면 판명되어 있다. 그 의 속에는 분노가 들어있다. 악을 보고 분노하지 않는 것은 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회 어떤 곳에서 불의한 일이 일어나면 분노한다. 분노를 하면 그 사람은 인정이 된다. 그것을 보고 씩 웃고 있거나 말도 않고 있다거나 그러면 그렇지라고 하면 똑같은 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전부다 욕을 하게끔 되는 것이다. 자기 일도 아니지만 욕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도 의로운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그 의 속에는 정당한 의가 아니고, 자기를 변명하기 위해서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의이지 결코 은혜를 아는 의가 아니다.
근원적인 의는 은혜를 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다.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한 데서 사람은 불의해져버리고 말았다. 불의해져버린 인간이 무슨 의를 만들겠는가? 의로운 사회를 만든다고 난리들이다. 아무리 만들어보라. 의로운 사회가 되는지? 전혀 되지 않는다. 싸움하는 사회이지 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의라는 것을 가지고 투쟁하는 사회이고 싸우는 사회이지 의로운 사회가 되지 않는다.
의인은 길이 참을 것이다. 의인은 깊이 깊이 인정할 것이다. 의인은 깊이 감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의인은 은혜를 입은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하나님 자신의 의가 예수 안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로서 나왔기 때문에 베드로에 대해서 의로웠다. 제자들에 대해서 의로웠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의로우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 대해서 의로웠다. 하나님이 자기에 대해서 길이 참으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 대해서 길이 참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서 나왔기 때문이다. 거기서 나왔으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다. 불에서 나왔으니까 빛이 된 것처럼, 불에서 나왔으니까 열이 된 것처럼,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그의 의가 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나오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의가 되지 못한다. 호세야의 의가 될 수가 없다. 어째서 호세야는 집 나간 아내를 그렇게 부르러 다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집 나간 아내를 찾고 다니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의 집 나간 아내를 데려오라는 그 말씀 때문에 데리러 간다. 나는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면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를 너는 집 나간 아내를 데리고 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할 수 없이 가서 집 나간 아내를 불러오는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호세야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집 나간 아내를 찾으러 갔다는 뜻이다. 하나님께로서 나왔기 때문에 찾으러 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에 대해서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한 것이 불의이다. 일만 달란트를 빚져서 갚을 길이 없는 사람을 불쌍히 생각하여 탕감해주었으니까 자기도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에게 그렇게 했어야 의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불의라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의와 다른 것이다. 세상의 의는 가짜 의다. 이 의는 진짜 의가 되는 것이다. 대대에 미치는 의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은혜를 베풀어서 그 사람이 은혜를 알고, 그 사람이 은혜를 알고 은혜를 베풀고 그 사람이 은혜를 베풀어서 또 그 사람이 은혜를 알고 대대에 이르는 의이지만 세상의 의는 다 똑똑 끊어져버리는 것이다. 하나도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다. 날마다 학습을 해야 되고, 훈련을 해야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의가 된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이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하나님께로서 나온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이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그가 의로웠다. 우리가 의로우려면 하나님께로서 나와야 의로워진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야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의가 되었으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올 때 거기서 나와서 의가 되는 것이다. 내가 저절로 의를 만들어놓은 것은 가짜 의가 되는 것이다.
<거룩함>
거룩함이 되었다고 한다. 사람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반대적으로 생각한다. 나쁜 것과 좋은 것.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 이런 개념에서 거룩함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거룩한 천사라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거룩하다고 하면 천사가 생각난다. 거룩하다고 하면 가운 같은 것이 생각난다. 거룩하다고 하면 수녀들이 머리에 쓰고 다니는 것이 생각난다.
그런데 거룩함이란 그것이 아니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된 것을 보고 거룩하다고 했다.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을 보고 거룩하다고 한다. 이것이 근원적인 말이다. 깨끗하게 보인다거나 훌륭하게 보인다거나 청결하게 보인다는 것은 지극히 표면적인 것이고 바깥에서 보이는 것을 보고 하는 이야기고, 거룩함의 근본적인 의미는 어떤 것인가? 귀한 자리에 특별한 자리에 쓰여지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한다. 성전을 보고 거룩한 곳이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쓰여지는 자리이기 때문에 성전이라고 한다. 그 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가리켜 성물이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쓰여지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귀한 자리에 쓰여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여지면 거룩한 것이다. 옷을 어떻게 입고 다니면 거룩한 것이 아니고, 거룩한 것처럼 하면 거룩한 것도 아니고, 어떤 거룩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거룩한 모양이 따로 있지 않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고 한 말처럼 거룩한 모양은 있으나 거룩한 것에 능력이 없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께 쓰여지지 아니하면 거룩하지 않다. 그것이 만일 더러운 데 쓰여지면 더러운 것이고, 깨끗한 데 쓰여지면 깨끗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탄에게 쓰여지면 사람이 사탄의 종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 쓰여지면 그것이 거룩한 것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합당한 자리에 쓰여지는 것이 거룩한 것인데, 어디에 쓰여지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 나를 지으신 이에게 쓰여지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거룩 거룩이라는 것이다. 거룩한 것 중에 더욱 거룩한 것이다. 영어로는 지성소라는 말이 거룩 거룩한 장소라는 뜻이다. 사람이 언제 거룩해지는가? 하나님께 쓰여질 때 거룩해진다. 하나님께만 쓰기 위해서 구별되어질 때 거룩해지는 것이다. 어린양을 제단으로 바치기 위해서 구별할 때 그것이 거룩한 물건이 된다. 우리도 하나님께 구별할 때 거룩한 것이 된다. 레위인들은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서 구별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거룩하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백성이라고 한다. 왜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는가?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서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이라고 말한다.
성도라는 말은 하나님께 쓰이기 위해 따로 몫을 지어놓았다는 말이다. 어떤 행실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나쁜 것은 아니지만, 위대하기 때문에 훌륭하기 때문에 깨끗하기 때문에 성도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몫이라는 뜻이다. 몫이 다른 몫이라는 뜻이다. 세상 몫이 아니고, 하나님 몫이라는 뜻이다. 초태생은 다 거룩하다는 말이 있다. 왜 그런가?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다. 초태생, 처음 난 것마다 다 여호와의 것이다. 초태생은 거룩하다. 하나님 것이니까 그것을 보고 거룩하다고 한다. 몫이 다르다는 뜻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거룩해지겠는가? 하나님 몫이 되어야만 우리가 거룩해진다. 내가 세상 몫이 되면 거룩하지 않다. 나는 하나님 몫이라야 거룩하다.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몫으로 만들었다. 레위인을 당신의 몫으로 만든 것처럼 우리를 당신의 몫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그의 몫인 안에서 거룩한 것이다. 그러니까 헛되게 거룩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거룩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거룩하려고 긴 치마 같은 옷을 입고 다닐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몫이라야 거룩한 것이지 어떤 모양을 만든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 몫으로 정해진 것은 다른 데는 못 쓴다. 다른 데는 쓸 수 없도록 되었다. 그 사람들도 그것을 표시하려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 옷을 입고 다닌 것은 우리는 다른 데는 못 쓰는 사람이다. 하나님에게만 쓰는 사람인 줄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달라. 우리는 다른 데 못 쓰는 사람이니까 다른 데서 우리를 쓰려고 생각하지 말아달라. 그런 의미로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다. 제사장들은 그런 옷을 입고 다녔다. 그것은 백성들을 향하여서 우리는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거룩한 옷을 입고 다녔다. 제사장은 방울소리가 나는 옷을 입었다. 어디를 가도 제사장이 가면 방울소리가 나게 되어있었다. 거룩한 사람이 오는구나. 그 말은 우리말로 하면 하나님 몫이 지금 오는구나하는 뜻이다.
세상이 우리를 보고 이 사람들은 하나님 몫이구나. 우리 몫인 줄 알았더니 아니로구나. 그러면 가야 된다. 와서 보고 이 사람을 봤더니 내 몫이 아니구나 하고 가야 된다. 우리가 잘못 보이면 내 몫 같이 보여 세상이 자꾸 가져가려고 한다. 우리가 얼빵하게 서 있으면 사탄이 내 몫이 될 것 같아서 자꾸 끌어가려고 한다. 우리가 그런 데서는 똑똑해야 되겠다. 그래야 사탄이 와서 이것은 나에게 와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해야 될 것이다. 그래야 피차가 편한 일이 된다. 피차가 신경전을 할 필요도 없고 피차가 그러니저러니 할 필요도 없다. 가능성이 있을 때 그러니저러니 한다. 전혀 가능성이 없으면 와서 아예 손을 대지 않는다. 아주 편하다. 사람도 아주 악질이면 누가 옆에 가지를 않는다. 옛날에 기차를 타고 다녀보면 어떤 사람이 술이 취해 소주병을 들고 올라온다. 무임승차다. 들어오면 차장이 보고 있다가 가버린다. 싸워보았자 자기만 손해이다. 말 몇 마디 하다가 가버린다. 아예 악질이 돼버리면 아무도 상대하지를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 몫이 돼버리면 사탄이 우리를 가져가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탄도 편한 것이고, 우리도 편한 것이다. 하나님도 좋고 다 좋은 것이다. 왜 초대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던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물속에 푹 들어갔다가 한참 있다가 나왔다. 왜 그렇게 나왔는가? 우리는 이제 예수 것이요. 그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물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가 하면, 아버지 이제는 내가 하나님께 바친 몸입니다. 섭섭하지만 그렇게 알아주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불효해서가 아니고, 내가 아버지가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원래 하나님 것이니까 나는 하나님께 바칠 몸이라는 것을 아버지께서 알아주십시오. 그래서 세례를 받았다.
우리가 세상 앞에 우리 자신을 선포해야 된다. 거룩한 백성으로서 선포를 해야 된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선포해야 된다. 그러면 승리가 훨씬 쉽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많은 고생을 해야 된다. 훈련소에 가서도 두 번 맞지 않으려면 한번 맞을 때 뼈다귀가 나오도록 맞으면 그 다음에는 다시는 그 사람을 때리지 못할 것이다. 기어코 끝까지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다 지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열외로 제쳐놓고 때리지 않는다. 처음에 얼빵하게 해놓으면 이 놈은 어느 때는 때려보다가 어느 때는 달래보다가를 하다가 훈련소 나올 때까지 맞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백성으로서 자기를 선포해야 된다. 이 거룩함은 무엇인가?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거룩함이 되었다.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게 될 것인가?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바쳐지는 하나님의 몫이 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그렇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렇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나는 거룩한 물건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구별되어진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가면 다 거룩한 것이 된다. 거룩하려고 생각할 것도 없고 연구할 것도 없고 옷을 입을 것도 없고, 십자가 안에 들어가면 우리는 다 거룩한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 안에 들어가면 내 것도 네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아무의 것도 아니고 나는 오로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다 거룩하다. 성전에 일단 들어가면 거룩한 것이다. 왜냐하면 다시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린양은 성전에 발을 딛고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살아나오지 못한다. 그 안에서 죽어서 피로 바쳐지는 것이다. 그것이 거룩한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 안에 들어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돼버리고 만다.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가 발견되고 만다. 우리가 십자가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가 그때 비로소 하나님 것이구나 하고 스스로 아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있을 때 하나님의 것인 줄 모르고 내 것인 줄 생각했다. 그런데 십자가 안에 가보니까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때 나는 비로소 내가 거룩한 자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나를 거룩하게 했구나. 나를 하나님이 귀한 자리에 쓰시려고 구별을 해놓았구나를 알 수 있게 된다.
인생이 어디에 쓰여지는가를 잘 생각해보라. 그것은 거룩한 데 쓰여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쓰여지는 것이 아니고, 모두 시시한 데 쓰여지는 것이다. 내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에 쓰여진다. 나 한 사람이 없었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아무 일도 없는 자리에 일생동안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쓰여져서 얻어놓은 소출은 모두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쓰여져서 얻어놓은 것은 내 것이 안 되고 말아버린다. 왜냐하면 내가 쓰여질 자리에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거룩한 백성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도 안타까운 것이 저 백성은 하나님이 거룩한 백성으로 불렀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쓰시려고 불러놓았다. 그런데 그들이 항상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쓰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하나님을 쓰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아직도 안 되고 있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사용해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쓰시려고 불러놓았는데,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가 쓰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 거기서 나타난 것이 거룩함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한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우리의 모든 생활과 우리의 모든 행동은 거룩한 것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쓰일 용도가 딱 결정되어 있으면, 우리가 어디에 쓰여질 것인가를 알게 된다면 허튼 것에 쓰여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금 그릇을 가지고 똥바가지를 하겠는가? 절대로 그럴 리는 없다. 그것이 녹이 다 쓸어 아주 더러운 것으로 보이면 똥바가지로 쓰지만 깨끗이 닦아서 금 그릇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그것을 똥바가지로 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생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귀한가를 모르기 때문에 똥바가지처럼 사용해버리고 만다. 내가 얼마나 귀한 줄을 안다면 정말로 귀한 자리에 자기를 쓰려고 할 것이다. 헛된 자리에 자기를 쓰지 않을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거룩함이 되었다.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마다 다 거룩하다. 하나님께로서 나오는 것은 어느 통로로 나오는가? 그리스도 예수라는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께로서 나온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라는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께로서 나온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 것을 의미한다. 부활은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 것을 말한다. 십자가 안에서 죽어서 다시 사는 것을 부활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거룩함이다.
부활은 바로 거룩이다. 그것은 이미 벌써 세상이 끊어져버린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다. 십자가 안에서 다시 나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룩이고 의로움이고 지혜이다. 예수에게서 나온 모든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라는 것은 십자가 안에서 다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새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새 생명의 특징이, 새 생명의 나타남이, 새 생명의 현상이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다.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라는 것은 절대로 세상에는 없다. 새 생명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벌의 특색이 절대로 없다. 사람은 벌이 아니기 때문이다. 벌에게만 벌의 특색이 있다.
새 생명의 특색은 새 생명 안에만 있다. 헌 생명 속에는, 옛 생명 속에는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 절대로 없다. 옛 생명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이것을 흉내낸 것이다. 이것을 모방한 것이다. 이것은 가짜이고 모조품이다. 우리가 진짜 거룩을 보고, 진짜 의로움과 진짜 지혜를 보면, 그때 우리가 세상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진짜 다이아몬드를 보지 못했을 때 큐빅을 보고도 다이아몬드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진짜를 보지 않았으니까 큐빅을 누가 진짜라고 하지 않겠는가? 진짜를 본 사람만 큐빅이 가짜인 것으로 알게 된다. 한번도 다이아몬드를 보지 않은 사람은 보석상에 가서 이것이 다이아몬드라고 하면 그것이 다이아몬드인 줄 알지 어떻게 다른 것이 다이아몬드인 줄 알겠는가? 지난번에 누구 반지를 한다고 갔는데, 내 눈에 아무리 봐도 다이아몬드 같다. 그런데 그것이 다이아몬드가 아니라고 했다. 진짜 다이아몬드를 내놓고 보니까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우리가 진짜를 보지 못했을 때 가짜를 보고서 진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짜를 본 사람은 다시는 속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를 본 사람은 세상에 속지 않는다. 참 지혜를 본 사람은 거짓 지혜에 넘어가지 않는다. 참으로 의로움과 거룩함을 본 사람은 그 거짓 의로움과 거룩함을 거룩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혀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정의를 부르짖어도 그것이 의라고 여기지 않는다. 거룩함을 부르짖어도 거룩함이라고 여길 수가 없다. 하지 않으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봤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안 된다. 아무리 거룩하게 만들어놓아도 거룩하게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짜 거룩한 것을 봤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봤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보지 못한다면 가짜 거룩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구속함>
그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의 구속함이 되었다. 구속함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누구에게 팔려가 있는 것을 내가 돈을 주고 사왔다는 뜻이다. 물에 빠져있는 것을 내가 건져왔다는 뜻이다. 사왔다, 건져왔다는 말은 사탄에게 뺏겨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값을 주고 다시 사왔다는 뜻이다. 사탄에게 뺏겨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다시 사온 상태가 구속이다.
구속은 하나님 창조의 영원한 목적이다. 당신 자신이 있기를 원하는 그 상태를 위해서 돈을 주고 사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구속은 하나님 창조의 영원한 현상이다. 영원한 실재이다. 이 구속의 내용은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있으매”(계21:2)이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고 했다. 생명수가 넘쳐나는 자리가 구속의 실재이다. 그것이 구원의 현장이다. 구원받았네, 구원받았네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무엇을 구원받았는지를 잘 모르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구원의 실재가 생명수가 흐르는 곳이다. 왜냐하면 성령과 신부가 따로따로 있어서 생명수가 나오지 않았다. 이 성령과 신부가 하나가 되니까 생명수가 나온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것이 구원의 실재다. 하나님과 사람이 영원히 거리가 있어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드려도 안 되던 그것이 “한 장막에 거하매”, 이것이 구원의 실재다. 사람과 하나님이 하나가 됐다는 그 말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이것이 구원의 실재다.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들도 다 우리 안에 있어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것이 구원의 실재이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이다.
우리 안에 구속이 되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나타난 현상이 바로 그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온 현상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현상이다. 임마누엘의 현상이다. 십자가 안에서 나온 현상이 임마누엘이다. 우리가 임마누엘을 어떻게 만들겠는가? 십자가 안에 있어야 임마누엘이 나타나는 것이다. 불이 있어야 나타나는 것처럼 십자가 안에서 나온 것이 구속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만들 수가 없다. 어떤 것도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 안에 있는 것이니까 만들 수가 없다. 벌 속에 들어있는 지혜를 만들 수가 없다. 왜냐하면 벌의 생명 속에 있기 때문이다. 벌이 살아있으면 그 지혜가 언제든지 나오고, 벌이 죽어버리면 그 지혜도 같이 없어져버리고 만다.
지혜라는 것이 따로 있지 못한다. 벌 속에서 어떻게 그 지혜를 뽑아내겠는가? 못 뽑아낸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지혜는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뽑아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그 구속도 어떤 생명의 상태이기 때문에 이 구속이라는 것을 따로 뽑아낼 수가 없다. 구원이라는 것을 따로 뽑아낼 수가 없다. 값 주고 살 수도 없는 것이다. 누구에게 팔 수도 물론 없는 것이다. 매매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어떤 생명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의 현상이 바로 임마누엘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장막에 사람과 함께 거하는 현상이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는 현상이다. 생명수 강이 흘러 좌우의 열두가지 과일이 맺혀 시절을 쫓아 열매를 맺는 그 현상이다. 그것이 모두다 십자가 안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구속함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서 창조되어서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십자가의 그 운명 안에 우리는 있다. 예수는 거기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비로소 지혜와 의로움과 구속함이 된다. 우리가 그 안이 아니라면 우리는 가짜가 돼버리고 만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만들어질 때 그 장소에 만들어졌는데, 마치 아담을 만들어 동방의 에덴을 창설하여 에덴에 두었다고 하는 것 같이. 그 에덴은 어디인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동산이다. 그 동산에 두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있다는 말이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더라는 그 말이다. 에덴에 두었다. 동방에 에덴을 창설하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함께 거니는 동산이니까 하나님과 함께 사는 동산을 이야기한다. 그 동산에 우리를 두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는 그 말이다. 아담은 하나님께로 창조되어 에덴동산에 있고라는 그 말이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질 때 그 동산 안에 거하도록 만들어져있다. 그런데 우리가 사탄에게 속아서 거기를 벗어나온 것이다. 우리는 옛 사람이 된 것이고, 우리는 아담이 돼버리고만 것이다. 우리는 원래는 그렇지 않다.
우리를 구속하신 십자가 안에서 우리가 재발견되어야 된다. 다시 발견되어야 된다. 속은 자리에서 발견될 것이 아니라 참으로 옳은 자리에서 발견되어야 된다. 왕의 아들이 태어났는데 어려서 잃어버렸다. 누가 훔쳐가 버렸다. 그 사람이 훔쳐 키우다가 거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거지 아들이 돼버리고 말았다. 자기는 지금 거지 아들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자기는 왕의 아들이지만 거지 아들로 발견되고 있다. 이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가 임금의 아들로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평생 거지가 돼버리고 만다.
우리는 사탄에게 팔려가 버렸다. 우리는 선악과를 먹고 팔려가 버렸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에 팔려가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거지 아들이 돼버리고 말았다. 사탄의 아들이 돼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가 발견될 때마다 사탄의 아들로 발견된다. 우리가 발견될 때마다 구제불능이구나. 우리가 발견될 때마다 인간은 안 되지 인간은 불완전하지 인간은 죄 투성이라는 것으로 발견되고 만다는 것이다. 사실은 하나님 아들로 왕자로 발견될 것인데, 의붓아버지가 거지이니까 거지로 발견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의 모습과 꼭 같은 한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를 보고 내 얼굴과 똑 같은데 저 사람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 사람 얼굴을 자세히 보았는데 그 얼굴이 바로 자기 형님 얼굴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왕자인 줄 알게 되었다. 그날로부터 왕자로 발견되었다.
우리 형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발견된 것이다. 맏아들 되신 예수 안에서 우리가 발견된 것이다.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발견된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신기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어찌 그 사람이 길을 지나다가 우리 집에 들렀을까? 왜 그 사람이 다리 밑에 놀러왔었을까? 여름에 온도가 38도로 올라가니까 할 수 없이 다리 밑에 쉬러 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연히 내가 다리 밑에 살다가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참 형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우리의 참 골육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이 비로소 의붓아버지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친 아버지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 아들로 발견되는 자리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들로 발견된다. 예수를 십자가 앞에서 자세히 봐보면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모습이다. 우리의 운명이다. 누구 다른 사람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거기서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당신은 하나님 아들이니 믿으라고 해도 내가 나를 생각해보니까 들여다보니까 염치가 없어서 안 된다. 도저히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랬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고 이제는 우리가 염치없는 것이 아니고, 진짜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구속함을 받았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구속함이 되었다. 우리의 영원한 실재로 드러나게 되었다. 생명의 영원한 본향으로, 하나님 창조의 영원한 목표로 우리에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비로소 구속함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으로 우리가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께 지음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십자가 운명 안에 있고, 예수는 십자가 운명 안에서 우리에게 나와서 비쳐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 것이다. 우리도 꼭 그와 같이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전혀 노력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힘쓰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애쓰는 것도 아니다. 전혀 뜻밖의 일인 것이다.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해서 이러이러한 것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많이 생각했다. 어떤 좋은 것을 생각했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사람을 원하지. 하나님의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지. 이런 것을 많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목표로 세워놓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날마다 애를 썼던 사람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예수를 만나고 보니까 그것이 아니고, 전혀 자기가 노력하지 않는데, 자기가 있더라는 말이다. 전혀 노력하지 않았는데, 자기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이것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 못했던 일이라고 하게끔 되었다. 그렇게 하고 보니까 지금까지 노력한 일이 말짱 헛일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전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험에도 나오지 않을 문제를 밤새도록 파고 앉았던 것이다. 그러니 잠도 못자고 눈만 아픈 셈이 되었다. 시험지를 보니까 어제 밤에 본 것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엉뚱한 것만 나와 할 수 없이 빵점을 맞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울은 목표를 세웠었다. 자기가 아는 어떤 한 세계가 있으니까, 자기가 아는 그리스도, 자기가 아는 하나님, 자기가 아는 낙원, 자기가 아는 천국, 자기가 아는 선택된 사람, 그 모든 것이 다 있었다. 유대인들이 다 그런 것이 있다. 그것을 다 세워놓고 달성하기 위해서 달려가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인하여 내가 전에 알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내가 뒤의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앞에 있는 부르심의 푯대를 향해서 달려간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신기한 인생인가! 밤새도록 애쓰던 인생이 아니고, 이는 전혀 다른 인생이 자기 앞에 보였다. 하나님께로서 나온 인생을 보았다는 뜻이다. 지금까지는 사람에게서 나온 인생을 보았는데, 이제부터는 하나님께로서 비쳐 나온 인생을 보았다. 얼마나 시원한 것인가! 우리가 이마를 두드려서 빛을 내고 있던 세계에서 전기불이 확 들어온 세계를 보면 얼마나 다른가! 얼마나 신기한가! 오죽 답답하면 자기 이마를 때렸겠는가? 번개 불이 번쩍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이 보이는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어디서 전기가 확 들어오니까 얼마나 시원한 것인지! 그러니 바울이 옛날에 알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자기의 자랑하던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자기가 높아진 것이 낮아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저절로 낮아져버렸다. 저절로 자랑이 부끄러움이 되었다. 저절로 자기의 소망이 부끄러운 소망이 되어버리고, 이제는 하나님께로서 나온 소망이 자기에게 비춰왔다. 이것이 새로운 인생의 출발이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 하나님께로서 나와야 자랑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만 오직 주 안에서만 자랑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다는 것이다. 오직 주 예수 안에서만 자랑하라고 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주 예수 안에서 밖에는 자랑할 수가 없다. 내가 이렇게 했다고도 못하고, 내가 저렇게 했다고도 못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오직 주 예수 안에서 밖에는 자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이 사람이 또 얼마나 깨끗한 사람인가!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다 자기가 한 것 같은데, 이 사람이 하는 말이 ‘다 주 예수 안에서’ 나온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자기가 노력하고 애써서 한 것이니까 전부다 그 사람의 것일 것인데,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고 그보다 더 큰 것임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 안에서만 자랑이 된다. 그러니 얼마나 신선하고 깨끗한 것인가! 우리는 세상의 그런 것을 보면 체증이 내려가 버리고 말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자랑이 되니까 자기가 아무리 자랑을 해도 자기가 아니고, 아무리 내놓아도 자기가 아니다. 너무나 신선하고 너무나 깨끗한 것이다. 이것이 세상 앞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이다. 다른 것들은 별 선언을 해도 별로 충격을 주지 못한다. 무슨 선언이 나온다고 하면 TV앞에 기다리고 서 있다. 무슨 신선한 것이 나오는가 하지만 그 말이 그 말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서 이것이 선포가 되면 신선한 충격이 되게끔 된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예수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오직 주 안에서만 자랑하게 하려는,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였구나. 그래서 바울이 보니까 내가 나를 자랑할 수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어져버렸고, 자기를 자랑하면 다 부끄러운 것만 있고, 그래서 불가불 주 안에서 밖에만 자랑할 수 없는 사람이 돼버리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참 지혜롭구나. 나에게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하지 않고, 할 수 없이 주 안에서 자랑하도록 만들어놓았다. 어쩔 수 없이 주 안에서 자랑하도록 만들어놓았다.
그러니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오묘한지! 이것을 세상의 관원의 지혜로 알겠는가? 제사장이 된다고 알겠는가? 공회원이 된다고 추기경이 된다고 교황이 된다고 알겠는가? 전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다멕섹에 가다가 안 일이기 때문에 교황청에서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얻은 일이다. 다리 밑에서 얻은 일이니까 우연히 심심해서 하동 집회에 와서 얻은 일이니까 공짜 아닌가? 바울은 다멕섹으로 달려가다가, 더군다나 예수를 핍박하려고 달려가다가 받은 것이니까 너무나 신기한 것이었다. 이것은 정말로 값을 주고 살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이다. 우리가 영원히 자랑할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 자신을 완전히 소멸시켜버릴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를 불살라 버릴 수 있는 것들이다. 내가 아무리 나를 죽여도 안 되고, 깨우쳐도 안 되고, 눌러도 안 되고, 억눌러도 안 되던 것이었는데, 나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없고 나를 구속한 주만 보이더라는 것이다. 이상하게 나는 어디로 가고 없고, 자랑하려면 예수 밖에 자랑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내가 나를 자랑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불쾌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남이 나를 조금만 무시해도 핏대가 올랐는데, 나는 어째서 밤낮 예수만 자랑하게 되었는지! 자기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자기를 없애려고 그렇게 노력했다. 중이 된 사람도 자기를 없애려고 애를 쓴다. 자기 욕망, 자기 생각 등 자기를 없애려고 애를 쓰고 앉아있다. 그래도 만나보면 여전히 자기다. 중과 이야기를 해보면 얼마나 자기가 강한지! 하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똘똘 뭉쳐서 얼마나 차돌멩이처럼 강해져 있는지, 바늘도 들어가지 않게 돼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것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없고, 자랑할 것은 예수 밖에 자랑할 것이 없게 되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1:31)고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였구나. 자기는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이 참 위대하시구나. 참 신기하시구나. 참 지혜롭구나. 나를 어디로 가져가 버렸을까? 그리고 자랑하는 자는 오직 주 안에서만 자랑하게 만들었을까? 바울은 이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새로운 세계였다.
다멕섹에 가다가 얻은 구원은 놀라운 구원이었다. 이것은 세상의 관원에게서 온 구원도 아니고, 제사장에게서 온 구원도 아니고, 이것은 어디서 온 구원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온 구원이었다. 갑자기 내려 비치는 빛을 통해서 온 것이니까 이 구원이 영원히 하나님께 찬송할 구원이었다.
진짜를 본 사람은 가짜를 보고 살 수가 없다. 그래서 3년 만에도 오고 5년 만에도 오고 1년 만에도 오는 것이다. 주염열매를 먹으면 옛날에 쌀밥 먹던 생각이 나기 때문에 3년 만에도 오고 4년 만에도 오고 5년 만에도 오는 것이다. 어차피 진짜는 진짜로 있다. 가짜만 있을 때는 가짜에게 속아 살게 되지만 진짜가 오면 우리는 가짜에게 속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자기가 머리가 나빠도 속을 수가 없다. 아무리 자기가 엉망진창의 인간이라도 속을 수가 없다. 사람이 이상하게도 다른 데는 다 엉망진창이라도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데는 엉망진창이 안 된다. 누구든지 다 그렇다.
이것은 사람의 머리도 아니고, 이것은 사람의 생각도 아니고, 그 사람의 성격도 아니고, 이상하게 진짜와 가짜는 다 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1년 만에 오는 사람, 2년 만에 오는 사람, 3년 만에 오는 사람, 5년 만에 오는 사람, 아마 앞으로는 10년 만에 오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 사람은 자기가 뭐가 잘 안 되어도 그래도 거기서 무엇이 나오는 줄을 알고 있다. 불을 본 사람은 그래도 거기서 뭐가 나오는 것을 알고 있다. 헛된 데 가서 부비고 있지 않게 될 것이다. 부벼보았자 빛이 나오겠는가? 아무리 해봤자 안 나오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1:30~31)고 했다. 우리는 이제 주 안에서 밖에는 자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주 안에서 밖에는 자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증거가 되게 될 것이고, 이것이 우리의 간증이 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내보일 필요가 없이 그리스도를 내보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내보여도 역시 자기고, 자기를 내보여도 또 그리스도다. 그것이 얼마나 편리한 일인지! 뭘 하나 감추어놓고 뭘 하나 내놓으려면 참 어려운 일인데, 어디에다 덮어놓고 하나 보여주려면 어려운 일인데,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이니까 그리스도는 참 편리하다는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그냥 하나로만 나타나면 빛도 되고 열도 되고 동력도 되니까 빛 따로 만들고 열 따로 만들려면 어려운 일인데, 불만 있으면 쓰고 싶은 대로 된다. 어두운 데 가서는 빛이 돼버리고, 추운 데 가서는 열이 돼버리고, 움직이지 않는데 가서는 동력이 돼버리니까 아주 참 편리하지 않은가!
그리스도는 참 편리한 것이다. 생명은 아주 편리하다. 아주 만능인 것이다. 어디든지 다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었다. 하나님은 승리한 것이다. 완전한 승리자가 되었다.
세상 것은 쓰다보면 바닥이 나지만 이것은 써도 바닥이 안 나는 것이다. 안심하고 사용하면 더욱 많이 불어나게 될 것이다. 땅속에 묻어두면 그대로 있지만 장사를 하면 계속 불어난다고 했다.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많이 얻어서 돌아오도록 될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간에 자기가 좋으면 되는 것이니까 자기 좋은 것만 계속 이야기하면 좋지 않은 사람이 좋아지게 된다.
이것은 누룩처럼 번지는 것이다. 전염병처럼 번지는 것이다. 우리는 좋은 전염병을 퍼트려야 된다. 복을 뿌리는 것이 아니고 약을 뿌리는 것이고, 악취를 뿌리는 것이 아니고 향기를 뿌리는 것이니까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뿌려서 냄새나는 모든 것이 전부 향기로워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것은 말이 되든지 안 되든지 좋기만 하면 된다. 특별히 조리있게 말할 필요도 없고, 특별히 많이 공부할 필요도 없다. 그저 좋은 것이 나타나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좋지 않다는 것이다. 좋은 것이 세상 앞에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가야만 가짜 세상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엉뚱한 데서 헤매는 사람들이 참으로 쓰여져야 할 자리에 쓰여지게 될 것이다. 참으로 기뻐해야 할 자리에서 기뻐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될 것이다. 우리가 땅속에 묻어두지 말고 많이 장사를 하여 많은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나가서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그렇게 된다. 내가 뭔데라는 생각을 하지 말고,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서.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니까. 지극히 아무것도 아닌 운명이다. 시시한 운명, 숨이 코에 붙었다는 운명인데 그 시시한 내용이 세상에 가서 엄청난 능력이 되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능력도 다른 능력이 아니고, 그 능력이다. 숨이 코에 붙었다는 능력이다. 죽었다는 능력이다. 다른 사람들은 살았다는 능력인데, 예수의 능력은 나는 죽었다는 능력이다. 나는 숨이 코에 붙었다는 능력이다. 나는 내 영혼이 아버지 것이라는 그 능력이다. 그것이 세상을 진동시켰던 것이다. 우리도 굉장한 것을 가지고 세상을 움직일 것 같지만 굉장한 것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 세상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바울은 그것을 가지고 세상을 움직였다. 베드로는 그것을 가지고 옥토(獄土)를 움직였던 것이다. 우리도 지극히 적은 그것으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전혀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들어가야만 움직이게 된다. 이스트는 작아도 밀가루를 부풀게 하는 것처럼, 이것은 작아도 세상을 부풀게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처럼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기쁨을 일으키는 것이고 화목을 일으키는 것이고 사랑을 일으키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것과는 다르다. 다른 것은 싸움을 일으키지만 이것은 싸움을 하던 자들을 싸움을 그치게 만드는 것이다. 원수졌던 사람들을 화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 평화를 주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가는 것은 적지만 파급효과는 매우 크게 된다. 눈에 보기에 볼 것이 없는 것이지만 이것은 엄청나게 큰 위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지극히 작은 것인 줄만 알면 된다. 그 작은 것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만 알면 된다. 그것이 얼마나 값진 것이라는 것만 알면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만 알면 된다. 그 시시한 사람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만 알면 된다. 우리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바로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진실한 운명이라는 것만 알면 된다. 그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이것이 간단한 일이다. 이보다 더 쉬운 일은 없지 않은가? 내가 흙이라는 사실이 가장 귀하다는 것만 알면 된다. 세상과 다른 것은 세상은 그것이 시시하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위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이 굉장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진실하기 때문에 가장 굉장한 것이다. 가장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진짜가 폭발력이 강한 것처럼 그것이 가장 진짜이기 때문에 파급효과가 크게끔 될 것이고, 생명의 역사가 크게끔 될 수 있다.
우리 앞에는 아주 확실한 소망이 비춰져있다. 실험을 하여 성공하여 논문이 발표되고 실험 제작이 된 푯대가 우리 앞에 있다. 우리처럼 땅 짚고 헤엄치는 사람이 없다. 예수 안에서처럼 땅 짚고 헤엄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매일 소리를 쳐도 절대로 부끄러울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확실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땅은 꺼질 수 있고, 지구는 갈라질 수 있지만 이것은 영원히 갈라지지 아니한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질 것이지만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이 땅에 있다.(벧전1:24~25) 땅은 어느 날 체질에 녹아질 것이고 하늘은 종이 축이 말려진 것처럼 말려질 것이지만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이 땅에 있다. 우리가 굳게 믿고 있던 땅도 녹아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녹아지지 아니한다. 진실은 녹아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세상을 움직이게 될 것이다. 또 이것이 세상을 새롭게 만들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굉장히 귀한 것이다. 시시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니까 시시한 것이지 천국에서 보면 지극히 귀중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소중하고 값지게 여겨야 된다.
[ 기 도 ]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찾아도 찾을 수도 없고 우리가 더듬어도 헤아려 알 수 없는 당신의 무궁한 세계를 주님 우리에게 값없이 보여주시고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를 우리 앞에 보내주셔서 우리가 뜻밖의 그를 만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는 영원히 우리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추한 모습 밖에는 평생 보지 못했을 것인데 주님 우리가 이렇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발견되어 아버지 앞에 찬송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발견되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가 이 안에서 영원히 찬송할 수 있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입술로 찬송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하고 우리가 우리를 지으신 자를 송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합당한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 안에서 발견되어 우리가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지극히 합당한 일을 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영원토록 주 안에서 자랑하도록 축복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를 저주의 늪에서 건져주시고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