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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신성한 츨생이 사랑을 실행함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3:13~24]
신성한 출생과 그결과 두번째로 사랑을 실행함이란 주제로 말씀하겠다. 의라는것은 하나님과에 관계에 치중하는 것이고 사랑은 사람과의 관계에 치중하는 것이라고 할수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의로워야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사랑해야하는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생활이다.
의인은 하나님과 바른관계, 바른관계는 위치에 있는데 아담은 처음부터 위치가 이탈되어 아무리 옳은 행동을 해도 이탈된 위치에서 옳은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는 것이다. 제위치에서 관계가 되야지 다른위치에서는 좋은 관계가 불가능하다.
사랑은 형제와의 바른 관계이다 옳바른 관계에 있으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고 마땅한 것인데 관계가 잘못되면 서로 미워하게 된다. 이것은 위치가 이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의와 인간에 대한 사랑은 율법과 선지자의 총 강령이다.
이것은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주 너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이 말씀에 다 이루었다고 예수님께서 표현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옳바른 관계라야 되는것이지 하나님을 사람처럼 사랑할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표현하지만 사실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겠는가 사랑할수 없다 우리는 그에게 옳바른 관계를 갖는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길이다.
그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이런말을 했는데 세상은 그 자체가 미워하는 자에게 속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인것을 예로 들었다. 왜 가인은 아벨을 죽였는가 자기 행위는 의롭지 못하고 아우의 행위는 의롭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람의 모든 행위는 어떤 근원이 있다. 돌발적으로 나온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돌발적인 것은 없고 어디엔가에 근원이 있어 내려오다 돌발한 것이지 갑자기 돌발한 것은 없다.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져도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랜 시간동안 많은 과정을 거처 어떤 기후를 만나서 떨어지는 것이지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벼락이 떨어지는것도 멀리서부터 오랜 준비를 거쳐 치는것이지 갑자기 치는것이 아니다.
사람의 모든 행위는 근원이 있는 것이지 근원이 없는 것은 없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근원을 따라가 보면 가인에게는 그럴만한 요소가 있었다. 그럴만한 요소는 그 사람의 본질에서 나온것인데 그 본질은 사탄으로부터 온것이다.
사탄에게서 시작되어 아담을 거처 아담에 이르러 살인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근원이있고 본질이있고 요소가있고 다음에 어떤 영역이 생기는데 살인이라는것은 현실이니 영역이다. 그러니까 세상은 근원이 사탄이니 그 마지막 영역은 미워하는 것이니 세상이 미워하는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다.
성경은 계시라는 말이 이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아담에게 생명나무를 주려고 했지만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이탈하여 동산을 떠나왔다. 그러면 선악과를 먹고 동산을 떠나왔어도 거기서 열심히 노력하면 될것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가인이 나왔다.
이것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아담 자신은 잘못되었어도 아들은 잘되기를 바라는것이 부모의 마음인데 가인이 나왔다 이것은 출생의 운명이다 출생의 성질이 그러니 세상이 미워하는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냥보기에는 지금 세상은 잘살고 있는것 같지만 계속가다 마지막에는 가인과 아벨처럼 되는 것이다.
평소에는 좋지만 자기의 어떤것이 손상을 받게되면 그때는 돌변하는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이 마지막 영역에 이르면 가인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아는것이 지혜로운것이고 지금 잘 살고있는데 무슨소리냐하는것은 멍청한 생각이다.
감나무가 똘감이라도 잎이 날때는 무성하게 잘난다 그것을 보고 아는 사람이 이것은 똘감이 열릴것이다하면 무슨소리냐 이렇게 잎이 잘나고 잘크는데 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알때 세상은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로 가는것이다 그래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우리는 지금 신성한 출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출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어제 박치현형제가 피플테리어가 싸우는것을 녹화하여 가져와서 보았다. 그놈은 아무 특색이 없는 놈이지만 완전히 싸우기 위해서 태어난 놈이었다. 세퍼트 처럼 잘 생긴것도 아니고 진도개 처럼 생긴것도 아니고 모양은 아무 특색이 없었다. 털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귀가 뾰족한것도 아니고 두리뭉실하니 이상하게 생겼는데 싸울때는 죽기살기로 싸웠다.
그렇게 물어 뜯는데도 피가 나지 않았다 진도개는 그렇게 싸우면 금방 피투성이가된다 그래서 한놈은 도망간다 안가면 죽는다 물어뜯는것이 죽게 물어뜯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놈들은 가죽이 늘어나서 그런지 아무리 물어도 피가 나지 않았다. 40분동안 귀만 물어 뜯는데도 귀가 안떨어졌다.
짐승들은 싸우면 목을 문다 그런데 이놈들은 미끌어져 목이 안물렸다. 그래서 귀만 물고 늘어졌다 귀만 물고 늘어지다 지친놈이 졌다. 오로지 싸움에만 필요한 개였다 애완용처럼 귀여운것도 아니고 코믹하게 생긴것도 아니다 퍼그같은 개는 코가 하늘을 보고 있어 항상 킹킹거리고 다닌다 그놈은 보기만 해도 우습다 그래서 키운다 어떤 강아지는 너무 애교가 있어서 사람을 너무 좋아한다 우리집 뭉치도 사람을 너무 좋아한다 그런데 이놈은 오로지 싸우는것이 특색이다.
기진맥진해 있다가도 다시 풀어 놓으면 또 싸운다 두놈이 싸우다 둘다 퍼져 누웠는데 일으켜 놓으니 또 싸웠다 이놈은 싸우기 위해서만 태어난 놈이었다. 투견용으로는 최상품이다 이것은 누가 가르켜 그런것이 아니고 본능적이다 출생이 그런 결과를 가져온것이다. 그렇게 출생했기 때문에 개만보면 싸우는것이다 이유없이 잘잘못없이 무조건 싸운다.
출생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출생이 저놈을 투견으로 만든것이다. 세퍼트는 훈련을 시켜야한다 그런데 이놈은 훈련이 필요없이 본능적으로 싸운다 진도개가 본능적으로 사냥하듯 그런다.
그래서 세상이 미워하는것은 당연하다 출생이 사탄으로부터기 때문에 결과는 결국 싸우고 미워하는 것이다. 미워할일이 있어서 미워하는것이 아니고 그럴일이 없어도 미워한다 예수님이 내가 무슨 악한일을해서 죽이려하느냐 물으니 악한 일을 해서가 아니고 참람해서 그런다 했다. 참람한 것이 저와 무슨 상관인가 참람한 놈이 지옥에 갈 일인데 자기가 왜 상관하느냐는 것이다.
본성적으로 미워하게 되 있어서 남이 의로우면 본성적으로 미웁고 나보다 잘나면 본성적으로 미웁게 되있다 그래서 세상이 미워하거든 이상이 여기지 말라 그것은 가인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한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은 어떤 영역에서 어떤 영역으로 옮겼다는 말이다. 사탄과 그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역으로 옮겼다.
하나님은 근본이시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이시고 이 본질에 들어있는 요소가 있는데 이 요소는 교회안에 들어있다. 이것이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 사랑을 억지로 해서 되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 사랑이 되는것이지 사탄으로부터 나서는 사랑을 하려해도 안된다. 사랑은 본질 자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움과 사랑은 근원이 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미움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다. 그래서 누가 미워지면 저 사람이 말을 이렇게하니 행동을 저렇게하니 미웁다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미움이라는것이 전부 마귀에게 속한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는것이 아주 귀중한 일이다 사도요한은 근원을 이야기한다 했다 상대가 이러저러하면 미워진다하면 될것 같은데 요한은 그러지 않고 미움에 근원은 마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가 미워졌다 그러면 근원이 마귀에게서 온것이다 저사람이 나쁘기 때문에 미운것이 아니고 미워하는 근원이 사탄에게서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하면 저사람이 이러니 사랑하고 아니고가 아니고 근원이 하나님께로 왔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가페를 내 마음데로 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에로스는 자기가 근원이니 자기 스스로하는 것이지만 아가페는 내 스스로 하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와 아가페를 하는 것이다.
사랑과 미움이 근원이 있듯이 생명과 사망도 근원이 있다 사망의 근원은 마귀다는 것이다. 이 사망의 근원이 마귀이기 때문에 거기서 본질이있고 요소가 있고 영역이 있다 그 본질에서 요소가 있고 그 요소에서 영역이 있어서 그 영역이 곧 불의한 것이다. 마지막 나타나는 결과가 불의라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본질과 요소와 마지막 영역이 사랑이다는 말이다. 바울은 이것을 죄와 사망 의와 생명으로 말했다 죄와 사망은 한 본질이고 의와 생명도 한 본질이다는 것이다. 행위는 마지막 영역이기 때문에 행위 이전의 근원을 알아야 치료가 되는 것이다.
근원을 모르고 치료한다고 치료가 되는것이 아니다 몸이 아프다고 겉만 치료해서 되는것이 아니고 속에 무슨 이유가 있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근원을 다스리면 겉에것이 없어 지지만 겉만 치료하면 계속 재발한다. 병이 계속 재발되는 사람은 근원이 다스려지지 않은 이유다.
그러니까 미움과 사랑도 근원이 있고 사망과 생명도 근원이 있고 죄와 사망도 근원이 있고 의와 생명도 근원이 있는 것이다. 출생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성한 출생을 통해서 생명의 영역안으로 옮겨 졌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행할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냥 하나님의 사랑을 하는것이 아니고 그 영역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따랐는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본질에 접하기 때문에 그 영역으로 밀려갔다.
본질에 포함된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영역으로 밀려가게 되있다 물에 떠내려 가면서 낙동강으로 간다 낙동강은 바다로 간다 내가 그렇게 하려해서 그렇게 된게 아니고 그 본질과 요소안에 있으면 그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고기떼들이 바다에서 수십만마리가 갈때 그 가운데 들어있는놈은 자기가 헤엄치지 않아도 물쌀에 휩쓸려 가게된다. 잠자면서 같이 떠내려가게 되는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질안에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역안으로 흘러들어갈 것이다. 하나님의 씨가 있어 그런다고 요한은 말한다.
씨가 있다는 말은 본질이 있다는 말이다 이 씨는 결국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요소라 할수있다 이 성질이 결국 십자가를 지게한다. 이씨가 발아되어 열매가 열리는것이 이씨의 영역이고 이 영역이 교회다.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는 교회가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없이 교회를 만들고 있다. 이것이 문제가 된다. 그리스도가 있으면 그리스도의 영역인 교회가 생기게 되있는 것인데 그리스도가 없는데 교회라는것을 만들려고 한다. 요즘 신학교를 나온 젊은 사람들이 장로교나 감리교같은 식으로 어떤 형태의 교회를 하겠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없는데 교회를 하겠다한다 비극이다 어떤 본질이 어떤 영역을 산출한다는 원칙을 알지 않으면 우리도 거짓말장이가 되고 만다. 우리는 영역안에 있으면 본질을 누리게 되고 또 그 근원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는자는 그안에 하나님이 그 안에 있고 사랑치 않는자는 하나님이 없다.
형제를 사랑하는자는 생명이 있고 않는자는 생명이 없다 한것은 그 영역안에 있는 사람은 그 근원을 누리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 낙동강안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사람은 강원도 황지에서 나오는 물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낙동강안에는 황지천의 물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낙동강이 없는 사람은 황지천 물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실행하는 사람안에는 하나님이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최종적인 영역, 결과이니 그 안에 있다면, 그 최종적인 결과를 실행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것이고 실행하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은 내 안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의와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영역이다 우리가 만들어 낼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최종적인 영역이다. 그 안에 사는것이 곧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역안에서 의와 사랑을 실행하는것이 곧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는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쌀을 가지고 밥도하고 술도 만든다 이 술을 먹고 취한다 그러면 이 사람은 쌀을먹고 취한 것이다 쌀이 술이되고 술이 내안에와서 취한것이니 쌀에 취한것이다. 쌀이 변형된 상태를 우리가 누린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변형된 상태를 누린 것이다.
사랑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은 있지만 사랑은 하나님이사다는 말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있다면 나는 하나님을 누리고 있는것이다.
그리스도는 목숨을 버리고 우리를 사랑했다.이 목숨은 십자가에 못박힌 육신을 말하는것이 아니고 푸쉬케 그에 혼에 목숨을 말한다. 육신이 죽어 우리를 사랑했다는 말이 아니고 물론 육신이 죽었지만, 육신은 백번 죽어도 우리를 사랑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그에 혼에 목숨이 버려짐으로 우리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이로서 우리가 사랑을 알고, 사랑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것을 보고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았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자기의 푸쉬케를 버리는 것이다 가인은 자기의 푸쉬케를 살릴려고 아우를 죽인것이다.
푸쉬케는 혼이고 혼은 사람의 생각이고 생각은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자기 편리를 위하고 자기 영광을 위하고 자기 안일함을 위하는 자기 중심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영광을 받을려고하면 남이 영광을 받는것을 볼 수 없게된다. 내가 영광을 받을려는데 남이 받으니 미워지는 것이다. 이것이 혼에 목숨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심한것이 군대다 군대는 모든것이 명령으로 이루어진다 졸병이 가장 괴로운 것이 군대인데 상관이 편하려하니 밑에 사람을 괴롭힌다. 많이 괴롭혀 놓으면 자기는 편안하게 있을 수 있다. 상관이 자기가 일하려하면 부하를 괴롭게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자기가 편하려하니 부하를 괴롭게한다. 직장에서 상관이 되려는것은 상관은 일이 없어서이다.
자기혼의 목숨을 살릴려하면 진짜 자기 생명의 목숨은 잃을것이고 자기혼의 목숨을 버리면 진짜 생명을 얻을 것이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너희 목숨을 얻고자하면 잃을 것이고 잃고자하면 얻을 것이다한 말이 혼의 목숨을 말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우리를 사랑했다.
우리도 남을 사랑하려면 자기 영광을 버려야 남을 사랑하게 되지 자기 영광 자기 이익 자기 편리 자기 위주를 버려야지 버리지 않고는 남을 사랑할수 없다. 그리고 내가 욕심이 많을수록 적이 많고 내가 높아 질려고 할수록 적이 많다 적이 사방에 둘려 쌓여있는 사람을 보면 자기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적이되려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다 자기 잘살려고 왔는데 내가 뭔가를 하려고 내 영광을 구하려하니 적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혹시 우리가운데 적이 많다 내가 가는데마다 나를 괴롭게하고 사람마다 나를 이해못하고 왜 이럴까하는 사람은 거구로 생각해서 나를 골탕먹이려 태어난 사람은 없다 그런데 나에 어떠함 때문에 그런것이다하면 해답이 생긴다.
그런데 왜 나는 가는데마다 원수가 이리많냐하면 해답이 안생긴다 전라도에 살아도 경상도에 살아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혼에 목숨을 버리고 우리를 사랑했다. 이로서 우리가 사랑을 알고 그러니까 사랑을 막연하게 누구를 좋아한다 싫어한다 생각지 말고 누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를 싫어 할수도 있고 누구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를 미워할수도 있는데 그런 사랑이 아니라 내 혼의 목숨을 버림으로 사랑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누가 좋고 싫고가 아니고 나를 위주로 사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게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베풀수도있고 사랑할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내 혼의 목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할수없이 다 적이 되는것이다. 결국 1등하려는 사람에게는 다 적이되는 것이다. 반일등은 그반 전체가 적이고 전교일등은 전교생 전부가 적이다. 세상을 살리 어려운것이 이런 이유때문이다. 요즘 세상은 밥을 못먹어 어려운 것이 아니고 사실은 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적이 스스로 적이 된것이 아니고 내가 일등을 하려니 적이 된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원망 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남이 자기를 미워하면 내가 너를 이기려하니 미워하는구나 이렇게 알아야한다. 그런데 나는 저를 이기려하면서 너는 왜 나를 미워하느냐 생각하면 안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랑을 보여 주셨는데 그것은 자기 목숨을 버리고 우리를 사랑한 것이다. 이로서 우리가 사랑을 알고 우리가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생활안에 들어온 우리는 이제 우리의 혼의 목숨을 버려야한다 그래야 우리가 사랑을 할수 있다 이것을 아는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거듭남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난 출생이 필요하다. 혼의 목숨을 버리고 영원한 목숨으로 거듭나는 것이 필요하다.
마귀와 그 영역에서 하나님과 그 영역으로 옮기려면 시작된 근원을 바꾸어야한다. 마귀에서 시작된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역으로 올수 없으니 그 근원을 버리고 근원을 바꾸어야 하나님께로 근원을 바꾸어야 영역이 옮겨진다. 이것은 옮긴다고 표현을 했다. 그러면 거듭난다는 것은 마귀와 그 씨로부터 하나님과 그 씨로 거듭나는 것을 말한다.
옮긴다는 것은 장소적 개념으로 영역의 개념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생명의 개념이다 둘은 같은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 바꾸어지면 영역도 다른 영역으로 되기 때문에 우리는 거듭나서 다른 새로운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고 말할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줄을 안다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러니까 마귀의 영역에서 하나님과 그 영역으로 우리는 옮겨야하고 마귀의 씨로부터 하나님과 그 씨로 거듭나야한다.
마귀에서 아담 안으로 거역과 자고함과 속임같은 것들이 요소가 되어 그 마지막은 사망인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죄라고 한다 아담이 나타나는것은 마귀가 나타나는 것이다 아담이 표현되면 되는만큼 마귀가 더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서는 마귀가 덜 나타난다.
그런데 적극적인 사람에게는 더 나타난다 본질은 같지만 적극적인 사람에게는 더 나타나고 소극적인 사람에게는 덜 나타날 뿐이다. 똥도 굴러가는 똥이 더 냄새가 난다 가만히 있는 똥은 냄새가 안난다 이처럼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븐 사람이 있는것 같지만 본질은 같은데 빨리 굴르면 냄새가 더나고 천천히 구르면 냄새가 덜나는 것일 뿐이다.
반대로 하나님에게서는 그리스도가 본질인데 이 그리스도 본질 안에는 순종과 겸손과 진실이 요소가 되어있어서 의에 이를수 밖에 없는 것이다. 순종과 겸손과 진실이 요소가 되서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 그 마지막은 의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아름다워지고 아담은 나타날수록 불의하고 나타날수록 사망이고 죄인데 그리스도는 나타날수록 아름답고 나타날수록 생명이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 늘 기쁘고 즐거운것은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나타내려고 하면서 옛날 아담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려 노력하는 사람이있다. 그러다보면 그리스도는 어디로 가고 없고 구린네만 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까 아담은 나타내면 나타낼수록 냄새가 난다.
왜 교회가 좋은가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샘이 있으면 물이나온다 물속에는 물의 요소가 있다 이 물의 요소는 강속에 들어있다. 그래서 강을 누리는 것은 샘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누리는 것하고 같은 이치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밤낮으로 기도하고 사랑하다하는데 그것은 자기 생각이고 하나님은 어떤 요소로 누려지게된다. 우리가 물을 누리는 것은 H2O라는 요소를 누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생각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어떤 본질과 요소를 누리는 것인데 그 본질과 요소가 사랑이니까 사랑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사랑을 나타내는것이 또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경말씀을 유창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요소를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은 의와 사랑의 본질이다 어떤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의와 사랑을 실행할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남이 필요한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에게서 태어난, 신성한 출생이 필요하다 거기서 우리 인생을 옮기는 것이 필요하다. 니고데모 처럼 그냥 가지고 있으면서 선한 선생님을 자기 위에 얹여가지고는 안되고 근원을 바꾸어야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없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있다.
다른제자들도 이말을 들었겠지만 촛점이 여기에 있지않아서 다른 제자들의 복음서에는 그 말이 없고 요한의 복음서에만 있다. 요한은 생명과 근원에 관심이 있어 어떤 행동을 볼때마다 그 행동의 근원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거듭난다는 말이 요한에게서 나온것을 보면 요한은 생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의와 사랑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많지만 의와 사랑의 본질로서의 생명에 관심을 자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의와 사랑을 흉내내는것일 뿐인데 요한의 복음과 서신이 있어서 흉내내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바꿈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인줄 알게 되었다.
피플테리어가 그 생명이 그래서 죽기살기로 싸우는 것이다 그렇게 싸운다고 이익이 있는 것이 없고 손해 밖에 없지만 제 신명이나서 싸우는 것이다. 주인을 위해 싸우는것도 자기 영달을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니고 싸우는 자체가 즐겁게 싸우는 것이다. 개들이 사람을 보면서 좋으면 꼬리를 치는데 이놈들은 싸우면서 꼬리를 치면서 싸운다 싸우는 자체가 신명이 나는가보다. 우리가 볼대는 죽을 판이다 생각되는데 이놈들은 꼬리를 치면서 싸운다.
생명이 이렇게 중요하다 오늘 우리도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로부터 다시나면 우리는 그 생명 때문에 사랑을 하지 않으수 없고 생명때문에 의롭지 않을수 없고 생명때문에 교회생활을 않할수 없다 피플테리어가 싸우는것 외에는 의미가 없듯이 우리는 교회생활을하는 것 이외는 의미가 없어진다. 이것은 생명의 현상이다.
교회온다고 누가 돈을 주거나 밥을 주거나 벼슬을 주지 않는데도 교회에 오는것은 그것이 우리 생명에 즐겁기 때문이고 우리 생명에 맞는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개들은 도망을 가는데 그 개는 죽으면 죽었지 도망을 안간다한다 그 생명이 얼마나 완전하게 투견으로 생겼으면 죽을 때까지 싸우는가 그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은 막을수 없는 생명이구나 십자가에 못박힌 자리에서 태어난 생명도 막을 수 없는 생명이구나 그 사람은 죽으나 사나 내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고 바울이 바로 피플테리어 같은 사람이다.
예수를 보니 그 사람이 피플테리어 같은 사람이다 십자가를 뭐하러 지는가 자기가 아니어도 질 사람은 있을 것인데 왜 자기가 지는가 생명이 그래서 그런 것이다. 그 사람은 그것이 아니면 살 의미가 없고 그것이 아니면 자기는 의미가 없어 그런 것이다.
피플테리어가 생기기를 잘 생긴것도 아니고 귀여움 받게 생긴것도 아니다 오직 싸워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도 자기는 그렇게 살아야 하나님께 순종해야 자기 인생에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살아야 내 인생에 의미가 생기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적으로 사랑함에 이르게된다. 이 실제적으로 사랑하는 사랑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담대한 마음을 갖게된다. 누가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이것은 실제적이다는 말이다. 이 실제적인 사랑이 진리에 속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낳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을수 없는 그것이 하나님께로 낳았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담대함을 얻는다는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께로 낳았다는 것에대한 담대함이 생긴다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랑을 해보지 않으면 내가 어디서 낳는지 모른다.
피플테리어가 아무리 싸움을 잘한다해도 싸움을 안 시켜보면 어떤지를 모른다. 그 생명의 근원이 싸우기 위해 태어났는지 아닌지를 모른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적인 사랑안에 있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께로 낳는지 안 낳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투견장에 데리고 가보니 이놈은 종자가 그런 놈이구나 본능적으로 싸우기위해 태어난 놈이구나 그렇게 아는것 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아내는 실제적인 자리에 가보면 그때 우리는 내가 하나님께로 낳구나 알게된다 그래서 우리가 담대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수 있는가 모르는데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없는 사람이 될 때 그것이 내 안에서 입증이되니 내 안에서 하나님이 이렇구나하고 알아진다.
부모가 된 후에 우리는 부모의 마음을 안다 자녀들은 부모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는 알지만 어떤 종류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자기가 부모가 되봐야 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나님 마음을 알게된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안에 거하는 줄을 알게된다 그는 내안에 거하고 나는 그 안에 거하는구나 이렇게 알게된다.
이것을 이론적으로 알려하면 안되는것이다. 하나님을 이론적으로 알려하면 철학적인 신이되서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신이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론으로는 알수 없다 안다는 것은 다 가짜다 여기서는 다 체험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실제적으로 그분의 사랑으로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내안에 거하심을 안다는것은 체험이다.
내가 부모가 되서 자식을 낳음으로 부모의 마음을 안다 이것은 배워서 되는 일이 아니다 낳아보고 키워봐야 아는 문제지 지식이 아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안에 거하시는 줄을 안다 여기서 성령은 영이라는 뜻인데 우리에게 주신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깊은 속에서 우리 영이 하나님안에 있는줄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마귀에 속하였으므로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아담이 행하는 모든것이 다 불의했다 그자신이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잘하려해도 마지막 결과는 또 가인이 나오고 말았다. 3~40분동안 그로키가 되도록 싸우고나도 도 싸우고 또 싸우는것은 본성이지 가르켜 되는것이 아니다.
돈주면서 그렇게 싸우라고 싸우지 않는다 그놈은 뎃가도 없이 싸운다 산이 있어 산에 간다는 사람처럼 개가 있으니 싸운다는 것이다 왜 산에 가느냐하니 산이 있어 산에간다. 자기는 산이 좋아 산에간다는 말이다 피플테리어보고 왜 싸우냐하면 싸움이 있어 싸우고 개가 있어 싸운다 이렇게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우리 혼의 목숨이 끝났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할일 밖에 없다 이 생활이 바로 의로운 생활이다. 우리 혼에 목숨이 버려지면 사랑할일 밖에 없다 사랑이 좋은지는 다 안다 그렇지만 못하는것은 자기의 혼의 목숨때문이다.
자기 혼 목슴을 버리고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고 가르쳐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게 되면 우리도 역시 혼의 목숨을 떠나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아가페를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아가페를 우리가 실행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실제적으로 하나님께로 낳았음을 알고 실제적으로 내가 그 안에 거하는것을 알기 때문에, 실제적인 증거가 내안에 있으니 담대해진다.
누가 어떤 이론을 이야기해도 별다른 진리라는것을 가져와도 내안에서 담대함이 얻어진다. 마음으로 하나님이 알아지게 된다 우리가 그 안에 거하는줄 알게 되게된다 우리가 그에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 기뻐하는것을 행한다 피플테리어는 싸울 일밖에 없듯이 우리는 그에 계명을 지켜 그에 말씀을 따르고 그에 사랑을 행하는 그 일밖에 없다.
이 외에 도 할일이 있는 사람은 생명이 섞여서 그렇다 우리 일생에 할일이 무엇이냐하면 명확하게 이거 이거밖에 할일이 없다 이래야한다. 우리는 그에 계명을 지키고 서로 사랑할일 밖에 없다 교회에서 우리는 다른 아무일이 없고 모두 이 일이다. 이일을 하든 저일을 하든 다 그것 때문에 하는 것이다.
내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청소도하는 것이고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빈봉지라도 가지고 나가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예를들어 먹다 버리고 가고 우유통도 완전히 비우고가면 차라리 좋은데 먹다 남기고가서 모르고 쏫게 되고 이런 사람은 형제에 대해 관심이 없어 그렇다.
생명은 있는데 관심이 없고 사랑을 실행 안해봐서 자기안에 얼마나 깊은 사랑이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당장 실행을 해보라 내가 이 쓰레기를 놔두고 가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겠구나 내 사랑하는 형제에게 피해가 가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한번 가져가보면 그때 자기가 하나님께로 낳았음을 알게 될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실행에 옮기면 우리는 더 깊은 것을 깨닫게 될것이다 내 안에 이런 가능성도 있었구나 알게된다 아무리 피플테리어가 잘 싸우는 개여도 안싸워보면 모른다 자기가 싸울수 있는 개인지 아닌지 모른다 싸워보고나면 담대함이 생겨 내가 제일의 피플테리어구나하고 알게된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보고 내가 하나님께로 낳았음을 알게 되는것이다 내가 하나님께로 낳는지 어쩐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사람은 당장 오늘 실천해보라 형제에 관심을 가져보고 형제를 사랑해보면 금방 알게된다. 자기안에 가능성이 있는데 안써서 모르는 것이다.
자동차를 아깝다고 사용하지 않고 놔두면 못쓰게 된다. 달려다녀야 차가 좋아진다 아깝다고 40키로로만 다니면 더 오래쓰는 것이 아니고 못쓰게 되버린다. 150키로로도 달려봐야 기계가 좋은 기계구나하는것을 알게되고 질이나서 잘 돌아가게된다. 평생 40키로로만 다니던 차는 다른 사람이 타면 빡빡해서 잘 안나간다 그런데 많이 굴린 차는 미끄럽고 잘나간다. 순택이 형제가 따는 차를 타보니 미끄럽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그차는 고속도로를 많이 다녔기 때문이다. 60키로로 가는것은 누워서 떡먹기로 슬슬 밀려갔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로 낳았기 때문에 사랑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안해서 안되는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하루이틀 먹은것이 아니다 20년 먹었다 하면 다된다. 헌금도 마찬가지다 안해본 사람은 못한다 우리교회는 이방인들이 많아서 해보지 않아 안한다 할줄을 모른다 피플테이어인데 투견장에 한번도 안나가서 싸울줄을 모른다.
그래도 전에 다른 교회에 다녔던 사람들이 헌금을 한다. 그런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당연하게 한다. 그런데 이방인으로 온 사람은 헌금이 개념이 없어 안한다 사랑도 안해봐서 못하고 헌금도 안해봐서 못하는 것이다. 헌금 안하던 사람이 하려면 쑥쓰럽다 습관이 안되있고 실행을 안해봐서 그렇고 그 기쁨을 모른다.
내가 헌금도 해봐야 내가 하나님께로 낳구나 입증이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는구나하는것도 알게되고 내가 교회를 사랑하구나 하는것을 알게된다. 안하면 내가 교회를 사랑하는지 안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사랑해야한다.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안에 거하겠느냐 우리가 할수 있는 가능한 모든것을 개발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에서 출생한 모든것을 개발해야한다.
간증도 그렇다 어떻게 간증을 해야되는지 모르것다 할수 있는데 한번 해보면 이렇게하니 이렇게 하나님이 내안에 거하시는구나 알아진다 작은 모임에 가서라도 좋은 것을 말하면 된다 전에 지영이가 남이 자기를 싫어하는것만 이야기하면서도 교회에 왔는데 좋으니까 오지 싫으면 오겠는가 좋은것을 이야기하면 된다. 좋아서 왔으니 그것을 말하면 좋은 간증이 될것인데 그것을 못 뽑아내고 남에것만 보이기 때문에 그래 불평이 나오는것이지만 알고보면 그 속에는 좋은것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할수있고 사랑을 실행 할수도있고 봉사도 할수 있다 안해보아서 그런것일 뿐이다. 우리가 실천을 해보아야 우리안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가를 알게된다. 형제들이 각 지방교회에 나가서 말씀을 함으로 인하여 우리교회가 훨신 활력있게 되었다. 형제들이 듣기만하고 가만히 있었다면 지금같은 충만함과 확신이 없었을 것이다.
옛날에도 아멘했지만 지금 아멘하는것하고 다르다 자기가 직접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고 형제들을 사랑하고 돌보니 확신이 생겼다 내가 하나님께로 낳은것이 확실하고 내가 받은 복음이 확실한것이구나 내가 받은 생명이 확실한 것이구나 그래서 교회가 확 달라진것이다.
어제 서울서 온 형제가 제안을 했는데 서울에서는 주일학교가 활발하게 잘 안되어서 켐프에 다녀온것을 일년내내 그리워하다 한번 만나곤한단다 그래서 형제들만 올라올것이 아니고 주일학교 자녀들도 데리고와서 아이들과 같이 지네게 해달라고 했다. 아직 안해본 것이지만 서울 아이들도 유익하겠지만 여기 대구서 올라간 아이들이 더 유익할 것이다.
여기서는 교회 공기안에서 살기 때문에 좋은지 나쁜지를 모른다 그런데 자기가 소년 사도가 되어 가면 사명감이 일어나 서울의 친구들에게 지금까지 먹어두었던 것들이 솟아날것이다 그러면 그애들이 사도가 된다. 그래서 어제 그 형제가 그 이야기를 할때 그렇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서 거기 학생들과 교류를하다보면 나는 하나님께로 낳은게 확실하구나 나는 대구교회에서 낳은게 확실하구나 내시는 그리스도구나하는것이 확실하게 될것이다. 이것은 참 유익한 일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실천할때 담대함이 생긴다. 뭐든지 해보아야 담력이 생긴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때 어떻게 두발로 가나 하지만 누가 뒤에서 잡아주다 밀어주어 조금 가보고나면 담력이 생긴다 그래서 타게되었다. 자동차도 저렇게 빨리가는 차를 어떻게 제어를하고가나 하는 사람은 평생 운전을 못한다. 그런데 학원에가니까 처음에는 걸어가는 수준으로 가면서 연습을하다보니 담력이 점점 생겨 운전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것도 마찬가지로 적은것부터 실천해보면 확신이 생겨 내안에 하나님이 거하고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구나 이것을 알게되고 알게될때 우리의 삶이 달라지게 된다. 그렇지 않고 앉아서 생각만하고 있으면 끝이 없고 아무것도 안된다 생각하다보면 머리만 아픈데 머리 아프기전에 행동하는것이 낳다.
저도 밤에 잠자다 생각이 나서 잠이 안오면 잠을 자려 애쓰지 않고 일어나 책을 보던지 원고를 쓰다보면 잠이온다 그러면 쉽다 그런데 누워서 잠을 자려하면 두시간 있어도 안온다. 그러니까 생각하다 인생을 망치지 말고 생각되면 바로 행동으로 옮겨 자기 인생을 살아야한다.
내가 사랑할것을 미우어도 안되고 헌금할것을 미우어도 안되고 봉사할것을 미루어도 안된다 내 인생에 주어진 기회이니 활용해 보아야한다. 써봐서 그것이 과연 효과가 있는지 과연 이것이 값진 것인지 실험을 해서 얻어진 것이라랴 된다. 사도 요한은 막연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확실히 실험한 것이니 이 실험속에서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이다. 이 실험과 체험 속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말한 이유는 노스틱주의나 세린터스 같은 사람들이 머리만 커서 이론적으로 철학적으로 세상을 시끄럽게하고 교회를 시끄럽게하니 사도요한은 이론이 아닌 체험을 해보자 무엇이 진실이고 가짜인지 체험을 해보자 누가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지 체험을 해보자는 말이다.
오늘 우리도 세상에 나가면 우리보고 이러니 저러니 말이 많을수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이론적으로 싸워 이긴다느니 진다느니 할것이 아니고 우리가 먼저 체험을 통한 확신이 있어야 나가서 담대하게 서게된다. 아무 체험도없고 담대함도 없으면 입만 놀리다 오게된다 하다보면 그쪽 이론이 더 커서 기가 죽어 오게된다.
그러나 체험이 있는 사람은 이론이 모자랄지라도 기가 죽지않는다 말은 모자라고 성경도 너보다는 모르지만 내가 알고 있는것은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로 낳았음이 입증되었다 내 실행을 통해 입증되었다 그렇게 된다. 말좀 못해도 상관없다 실제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적으로 사랑하고 실제적으로 봉사하는 속에서 담대함을 얻자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로 낳았음을 입증하여 내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내 영안에서 하나님을 알아 담대함을 얻으면 세상의 어떤 이론이나 어떤것이 와도 그것을 뚫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할수가 있게된다.
기도합시다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일생을 당신의 생명안으로 이끄셔서 근원 안으로 이끄시고 우리를 거듭나게해서 이렇게 산 소망이 있게 하여주신것을 감사합니다. 신성한 출생으로 출생하게 하셔서 우리안에서 의와 사랑을 실행할수 있는 이런 요소들을 우리안에 심으신것을 감사합니다.
이런 본질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신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주게서 주신 이 본질와 요소들을 우리가 아낌없이 세상앞에 표현하고 교회앞에 실행하고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담력을 얻게 되기를 원하고 우리가 말로만 아니라 생각으로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낳았음을 입증하고 세상앞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것을 선포할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