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리, 새로운 엘로이즈(Julie ou Nouvelle Heloïse, 1761) 해제
끌레르(A. Clair), 에옹(J. Eon), Les Oeuvres I, Dictionnaire, PUF, 1992, p. 1428(P.2190.)
끌레르(André Clair, 1939-) 철학교수자격통과, 인문학 박사, 근대철학과 윤리 교수(렌1대학 명예교수) 파스칼(Pascal), 르끼에(Lequier), 키에르케골(Kierkegaard)에 연구자.
에옹(J. Éon, s.d.) 이 “전집: 사전”의 집필자 명단에도 J.로만 나와 있다. 구글이든 위키든 등장하지 않는다. (52OMC)
** 새로운 엘로이즈는 옛 엘로이즈 사건에 빗대어 쓴 것이라 한다. 옛 엘로이즈 사건은 당대의 최고 지식인 아벨라르(Abelard, 1079-1142)와 귀족이며 총명한 학생인 엘로이즈(Heloïse, 1100-1163) 사이(스물하나 차이)에 일어났던 사랑사건이다. 아벨라르는 거세당하여 파리에서 쫓겨나고 엘로이즈는 수녀원장을 지내며 보내다가, 아벨라르는 1132년(쉰셋)에 과거의 이야기를 책자로 낸다. 엘로이즈가 그 책자를 보고 편지를 하여 서신 왕래가 있었다. 아벨라르는 당대의 보편 논쟁(La querelle des universaux 1111)에서 플라톤주의자인 샹포(Guillaume de Champeaux, 1070-1121)와 유명론자에 가까운 로스랭(Jean Roscelin, 1050경-1121경) 사이에서 새로이 개념론(le conceptualisme)을 창안했다. 그의 개념론은 흥미롭다. 보편자에 관한한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보편자가 그 자체로 있고, 다른 하나는 오직 사유에서 있다고 한다. 전자에서는 물체적인 것과 비물체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비물체적인 것에는 감각과 사물의 결합과 감각 사물의 분리를 구별한다. 후자에서는 의미(semo)와 음성(vox)로 구분하였다. / 그는 두 번이나 단죄를 당했다. 1121년 첫째 단죄의 고발자는 십자군 동원에 앞장선 시또파 수도회원인 베르나르(Bernard de Clairvaux 1090-1153)였다. 그리고 1140년에 학생들을 위한 신학(Théologie pour les étudiants, 1133-1137 저술 때문에 상스 공의회에서(au concile de Sens)에서 이단으로 둘째 단죄를 당했다. 그리고 2년 후에 사망했다. (52ONF)
# 쥘리, 새로운 엘로이즈(Julie ou Nouvelle Heloïse, 1761) 해제
- 끌레르(André Clair, 1939-), 에옹(J. Eon, s.d.)
아직도 루소가 평판이 좋지 않던 시기에 한마디 하고자, 그는 이번에는 소설을 하나 출판했다. 이 이야기는 전기 속에, 즉 장-자끄가 마담 우드또에게 다가가고자 체험했던 감정들 속에 뿌리내려져 있으나, 그의 삶의 복사는 전혀 아니다. 이 책은 심지어 체험했던 것에 대한 설욕전을, 그리고 실현되기를 원했을 같은 꿈을 구성한다. 특히 너무나 상상적이었기에 실재적인 것을 그대로 베껴내는데 만족할 수 없어서, 루소는 매료된 피조물[사람들]의 미묘한 사교계들[사회들]의 허구 속에서 꾸며내기에 익숙해 있었는데, 여기서 자기 몽상들로부터 나온 선별한 존재자들을 구체화하였다. 사랑의 소설이자, 우정의 소설이며, 심정의 내밀한 소설이고 투명한 공동체의 소설인, 새로운 엘로이즈(Nouvelle Heloïse, 1761)은 심리학적 진실과 결합되어 있고, 애정적[감화적] 상태들의 분석에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은 우화적 모험들과 전통적 소설들에게 전개되는 급반전을 무시하고 있다. 루소는 자신의 독창성이 주제의 단순성에, 또 단지 몇몇 작중인물들 사이에 집중된 연애(une intrigue, [술책])의 순수성에, 애착을 갖고 있다고 평가한다. 새로운 장르를 창안하고 있다고 여기는 그는 소설의 지위를 진화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론적 중요작품과 같은 시기에, 그리고 지적으로 매우 풍성한 시기에 쓰여진 이 저술은 저자의 철학적 전념에 낯설 수 없을 것이다. 이 엇갈린 듯한[유감스런] 사랑의 소설은 자연적 성향들과 조건들 전체에 복종하는 세상의 사회적 협약들 사이에서 모순을 고발하는 기회였다. 또한 그는, 모방할 표본들을 제안하면서 그리고 대상들의 어떤 전형을 찾고자 기여하면서, 도덕론자에게 간접적 교훈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클라랑스(Clarens)에서 전원적인 삶의 매력에 안존해 있던, 루소는 “평등하고 단순한 삶에의 사랑”(II, 21)을 인간들에게 영감을 주고자 바랐고, 지방민들에게 그들의 지방에 애착을 갖기를 바랐으며, 게다가 도시들의 불길한 매혹을 분쇄하고자 바랐다. [그는] “게다가 공적인 풍습들을 시도할 어떤 개혁이 있다면, 그 개혁이 시작해야만 할 것은 가정적 풍습에 의해서 이다”(II 24)고 이해했었고, 따라서 개인의 재상(생장)과정(la régénération)을 다루는 에밀(1962)과 사회의 개조(la refonte)를 다루는 사회계약(1962) 사이에 연결을 확신하고 있었으며, 루소는 가정의 혁신(la rénovation)을 목표로 한다. 가정적 무차별에 대해, 자기 세기의 풍습의 자유에 대해, 그는 결혼의 건강성을, 부부의 정절을, 가족의 감정을 대립시켰다. 결국 철학자들과 크리스트교인들 사이가 서로 갈라지는 순간에, 무신론자인 남편과 경건한 신부(부인)의 상호 애착과 존중을 묘사하면서, 루소는 관용을 가르키고자, 각자의 편이 다른 편을 존경하기를 부추기고(자극하고)자 원했다. “만일 볼마르 신봉자들에게 기분나빠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그리고 그의 부인이 철학자에게 마음에 들었다면, 나는 아마도 사람들이 이 시대에 읽을 수 있었을 가장 유익한 책을 출판했으리라.”(CC, éd. Leigh, VII, 3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소설적인 성질들을 보존하고 있는 이 작품을 삼키지 못했다[포함하지 못했다]. 루소는 거기에서 공적인 대중들[공중들]에게, 특히 여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채택하면서 여성들에게 말을 건다. 주제에 맞는 소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즉 영웅들은 기획물(des épures)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솔한 두께를 소유하고 있다; 게다가 문인들에 의한 소설의 선택은 관점들을 다양화하면 할수록, 그럴수록 단순한 편집자로서 소개되는 작가와 갖추어진 설법들(발언들) 사이의 거리는 잘 유지된다. 게다가 루소는 새로운 엘로이즈를 자기 체계 속에 집결시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철학의 기본틀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삽화의 수준이며, 이미지 작업의 수준이다. 심성을 가진 자들에게 몇가지 가치들을 획득하게 하고자 원하면서, 그는 그들의 구현에 따른 절차를 실행한다. 또한 도덕화 작업에 배려로 교훈적인 작업을 비켜갔다. 하나만의 이성으로 정해진 설교들보다, 작가는 감성을 움직이는 삶의 원본(모델)들을 선호했다. 그리고 그는 완전화 작업을 재현하고자 스스로 방어하였는데, 이 완전화 작업이 모방작업에는 낙담 했을 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소설적 형식으로, 반감을 주지 않고서 가르침을 베풀고자 하였고, 자기의 특수성을 잃지 않고서 자신의 커다란 도안[기획]에 참여하고 있었다. (A. Clair et J. 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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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
1730 벨가르드, 마담 우드또(Elisabethe Sophie Françoise de Lalive de Bellegarde, Sophie Lalive de Bellegarde, comtesse d'Houdetot, 1730-1813) 마담 에피네의 시누이이며 상-랑베르씨의 연인이다. 백작의 부인이 된다. 루소가 1757년 “신 엘로이즈”(Nouvelle Héloïse)를 쓸 때, 그녀를 여주인공 쥘리와 동일시하였다. 그는 그녀와 1년간 플라토닉 관계를 지낸 후에 멀어졌다. 이 감상적 모험이, 마담 에피네((Louise-Florence d'Épinay, 1726-1783)에 의해 요구된, 오두막집으로 출발의 원인이 되었다.
* 볼마르(M. de Wolmar), 이 소설의 중요 인물중 하나. 이 책의 주인공 쥘리의 아버지(에탕쥬 남작)의 군대 동료이다. 볼마르가 전투에서 남작 에땅쥬의 목숨을 구해주어서, 쥘리의 아버지 에땅쥬는 볼마르에게 자기 딸과 맺게 해주겠다고 하였다. / 쥘리는 그녀의 가정교사인 생-프뢰(précepteur Saint-Preux)에 사랑에 빠졌다.
* 참조 1 *********
-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1774, ‘젊은 베르터의 고뇌’) 등 후대의 소설들에 끼친 영향도 지대하다.
-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 1830)은 스탕달(Stendhal, Marie-Henri Beyle 1783-1842) 의 장편소설이다.
# 참조 2: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연표(부분)*******
1757(45살) 디드로와 불화이후 곧 화해하다. [달랑베르와 꽁디약이 화해 주선했다고 한다? 이해 달랑베르는 신학논쟁으로 백과전서파에서 떠난다고 하는데...]
마담 두드또(d'Houdetot)에 향한 정열이 일다. 루소는 마담 데피네와 제네바로 가기를 거절하다. [Elisabeth Sophie Françoise, dite "Mimi", Lalive de Bellegarde, par son mariage, comtesse dHoudetot 1730-1813) 살롱 여주인.]
루소와 그림(Grimm) 사이에 불화가 생기다. 그리고 몽모랑시(Montmorency)에 있는 몽루이(Montlouis) 정원, 룩상부르(Luxembourg) 원수 집에 기거하다.
1758(46살) 백과사전 제7권에 있는 「제네바」항목에 대한 응답으로 연극(광경, spectacles)에 관해 달랑베르에게 편지를 쓰다. [달랑베르에게 보낸 편지(Lette à M. d’Alembert, 1758)]
디드로와 단절이 6월에 이루어졌다(conommee).
[쥴리(Julie ou Nouvelle Heloise)가 완성되다, 출판은 1761]
1759 몽루이(Montlouis)를 수선하고, 이 시기에 루소는 몽모랑시의 작은 성에 기거하다. 그래서 루소는 룩상부르 원수에게 일상적으로 방문하다.
루소는 과학자들 지(Journal des savants)의 발행인의 지위를 거절하다.
1761(49살) 쥘리(Julie ou Nouvelle Héloïse, 1761)가 파리에서 출판되어 성공적이었다. 제네바에서는 이 작품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다.
언어 기원론(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 출판 1781)이 작성되었다.
1762(50살) 말세르브(Malesherbes)에게 편지 쓰다.
사회 계약론(Du contrat sociale, 1762), 에밀(Emile, 1762)이 나오고, 경찰은 이것을 압수하고, 소르본느 대학은 고발하고, 의회는 단죄하였다. 루소는 신체구금의 형을 선고받고, 스위스로 달아나서, 이베르동(Yverdon)에 도착하다. / 에밀(Emile)이 파리에서 불타다. 에밀(Emile)과 마찬가지로 사회 계약론(Du contrat sociale)도 봉인되었다. 제네바도 루소를 신체 구금형을 언도하였다.
루소는 이베르동(Yverdon)을 떠나, 모띠에(Motiers)로 가서, 프러시아에 속하는 뇌샤텔(Neuchatel)의 공국으로 피신하였다.
마담 바랑스(Warens 1699-1762)가 죽다. 루소가 아르메니아인의 옷을 입기 시작하다. / ㉭ 사도세자 사망(1735-1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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