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선생 제거음모와 함께 선거련략도 함께 진행하였으니
)서대문 의장공관 밀실 회합
1959년5월6일밤 9시경 서대문 의장공관 밀실에는 연락받은 자유당 거물들과
장관 몇이 뫃여 들었다
부족한 식량 문제등 시급 사항들을 대충 논의 대책안을 마련하고
다 돌아 갔는데 유독4월30일에 교통부에서 내무부장관으로 옮겨 앉은 최인규만 남아있다
최장관 차기 대통령 선거에 필승할수있는 작전 계획을 세워 갖어 오도록 하세요
예 각하 빠른 시일내 필승 전략이 담긴 계획서를 완성해 보고 하겠읍니다
그렇게하여 선거 필승계획이 완성 된것이였으니 최인규의 뛰어난 머리로 작성된 계획서의
주요 내용은
자유당 군당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주축이되여 각면의 주요 유지들을 포섭
각부락에 구장 반장이 유력한 사람하나가 투표하는날 4~5명식 감시 투표하는
이른바 3인조 4인조의 투표를 하도록 한것이다
연이나 조내에는 감시하는 1인이 포함돼 있음이다
이질서를 감시 협조자로 각 경찰서 사찰계가 비밀리에 관장하여 실시토록
그외에도 자유당당원등 세밀한 행동계획이 있었으나 생략한다
이계획이 완성된후 조급한 이기붕은 국회를통해 평상5월에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를
논번기를 피한다는 구실로 1960년3월15일에 실시 했으니
이것이 곧 3.15 부정선거다
이때 물론 자유당은 이승만 이기붕이 런닝 메이트가 되고 민주당런닝 메이트는
조병옥 장면이였다
한데 후보 등록을 맟인 조병옥후보가 위급한 병이이 발생하여 미국에 건너가 수술을 하였으나
불행이도 2월3일 급서 하였으니
사실상 대통령은 단독 출마가 된셈이고 부통령 전인 셈이다
이때 혹자들은 이승만은 천운을 타고 났느니 하는등 하는 여론이 날려 다녔으나
자유당으로서는 대통령 보다는 부통령에 지대한 관심 사항 이였으니
80세인 대통령이 당선된 다음날 죽을지 1년후에 죽을지 아무도 모르고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그잔여 기간을 승계하도록 법률이 정해진 판에랴 어찌 할것인가
그래서 전 공무원 에 ㅁ명령을 내리거나 교육을 한것은 물론
투표 당일 3인조 6인조 감시하는것도 모자라
개표장에서 야당 참관인을 돈으로 매수하는것은 물론 투표함 바꿔치기 사전투표
심지어
피아노 올빼미등 신조어가 등장 했으니
피아노는 야당 당선 투표를 인주로 뭉개 무효표를 만들고
올빼미는 전기를 꺼 캄캄해진 사이 투표함을 바꾸는 행위였으니
이것은 민주주의 선택 행위가 아닌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난장판 이였다
이승만90% 이기붕82% 득표 당선이라는 공표와 거의 동시에 전국 곳곳에서 저항시위가 발생했으며
그중에도 마산의 자유당 독재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한 의거 시위가 가장 극렬하여
7명이 죽고70명이 부상 당했으나 도하 신문에는 경상자 몇명 발생것으로 보도 되였다
하지반 이런 큰 사건은 누른다고 진정이 되는것은 아니였으니
당일 행방이 묘연 했든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왼쪽 눈에 최루탄 탄환이 박힌채 장장 27만인
4월11일에 마산의 중앙 부두에 떠 오름으로 사회는 또다시 흉흉한 바람이 불었다.
4월19일 고려대학교 학생 2000 여명이 동대문 경찰서와 종로경찰서 경찰관들의 방어선을 피해
동대문시장 포목점 샛길을 우회하여 데모 진격 하등중 이정재 무리와 충돌이 있었고
그익일 서울대 경희대등 수많은 학생들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했으나 최인규 곽영주등의 발포 명령으로 다시 해산됐고 드디어4월24일 교수들이 파고다 공원앞까지 데모 행렬이 나타나자
학생들은 물론 전시민이 합세하여 중앙청 광화문거리 시청광장 남대문서울역 까지
분기한 민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쫙 깔리고 경기도청이 불에타고 여기저기 불길이 치솟음은
물론 시내에 다니든 차량들 조차 성난 군중들이 탈취 태극기를 꽂고 질주하였으며
경무대앞은 물론 여기저기 경찰이쏜 총탄에 수를 헤아릴수없는 사상자가 발생하고
조선호텔 맞은편506특무대 에서도 웨워산 궁중들에 건물 친입을 막기위한 난사를 했었다
드디어 계엄군의 탱크가 시청앞 과화문 거리에 진주했으나
계엄 사령관<송요찬>장군의 특명으로 발포는 엄금한다는 명령이 하달되여 발포가 없는것을 안
궁중들은 느릿 느릭 움직이는 전차우에 올라가 군인들과 같이 만세를 부르며 시가를 질주한바이니
군인도 성난 군중과 함께 시위 하는 모양세로 돌변했다
군중심리란 벌때같이 휘몰아 다니는 억생 반항심이 발로하는것으로서
당시 소공동에 살고있든 수중<필자>도 함께 차를 타고 시가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질주했다
서대문 의장 공관도 박살난체 끄집어 나온 빨간 캐펫트가 도로에 깔리고
종로5가 평화극장도때려 부수고 충무로5가 있든 방공예술단 사무실등 여하간 이기붕 일파에 동조한
건물이나 사무실등은 박살이 났다
그렇게 휘몰아 치는 군중 심리는 계속이어지고 그칠모르고 계속 되였으니
상황을 타개위한 수습책을 논의하든 경무대에서 미대사 매카나기 송요찬 계엄 사령관의
권유로 4월26일 이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방송 되였다
한편 국가 원로와 정당 지도자들이 뫃여 수습 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데모를 중단 귀가 하도록 선무함은 물론
4월28일 허정외무부 장관을 관리 내각수반으로 하여 수습국면으로 조용히 가라 앉았다
허정 정부는 수습하는데 박차를 가해 의원 내각제를 선포하고<국회 동의여부불확실이나 동의 햇든것 같음>1960년7월29일 민의원 선거를 실시한다
선거 결과 민주당 175석 무소속21석 자유당2석 기타 정당1~2석 정도의 결과로
민주당이75%를 찾이하여 일사부란하게 진행 되는줄 알았으나
민주당 역시 신파와 구파로 갈라저 쟁탈전이 계속되뇐다 이는 3차개헌을 소개한후 다시 이여 쓰기로 하고 3차 개헌기록을 명시한다
제3차개헌 1960년6월15일 의원내각제 개헌
4.19 혁명 직후의 개헌으로 제헌에 가까운 개정 기본본질적 내용보장(본질적 내용 훼손금지가
명문화됨 정당규정신설(정당의 헌법상 지위의 명시적부여)
위헌 정당 해산제도 도입 법관 선거인다에 의한 버관선출
대법원장과 대법관의 선거제도 채택
부정 선거를 막기 위해 선거관리 위원회의 헌법 기관화
지방자치 단체장 직선제
공무원(경찰등)의 정치적 중립 규정
헌법 재판소에 위헌법률 심사제 부여
제4차개헌 1960년11월29일 소급개헌 반민주 행위자 처벌을 위한 부칙개정
내용 : 3.15 부정선거 관련자에 대한 처벌과 자유당 정권하에서의 반민주 행위자에 대한
공민권제한및 부정축제자에대한 행정상 형사상의 처리를 위한
특별법령 근거및 특별 검찰부와 트별 재판소의 설치에 관한 근거 규정
위에 이야기를 계속한다
신파는 박순천 당수와 전부통령장면박사가 주축이 되고 구파는
윤보선과 김도연 주축이 되였다
잘은 모르지만 내각책임제에서는 총리가 실세이고 대통령은 상징적 국가 수반에 해당 했든 모양이다 서로 총리 자리를 움켜 쥐려고 신 구파간에 치열한 다툼이있어 몇일인가 조각이 지연 되였으나
갓가스로 합의가 도출되여 대통령은 구파가 신파가 총리를 나누어 같기로 하고
우선 대통령을 선출 거의 절대 다수로 선출했으나
총리도 투표로 선출해야 된다는 미명하에 구파가 틀어 몇일이 지연되고
당시 구파 김도연 의원은 소공동 삼화삁딍<지금의 조선호텔옆명동쪽롯데백화점 후면>2층에
대책 사무실을 마련하고 무소속 의원들을 포섭하기에 이르니 권력 앞에는 합의 같은것은
팽개 치는것이 예사인가 보다
결국 투표로 선출 하기로 하고 대결을 벌렸으니
장면박사가 김도연보다 한표가 앞선 그야 말로 신승을하여 조각 하기에 이른다
어쩨거나 1961년 제2공화국 국무 총리로 출범 했으나
국가는 무능했고 사회는 그야말로 데모 천국이 되였으니
당시 국무원 사무처 총무과에 근무 하든 이희신 형과 점심을 같이먹거나 차를 마시고저
소공동을 출발해 걸어 가다 보면
경향 신문사직원들도 상공회의소도 석탄 공사도 서울시청도 일은 않고 몰려나와 데모를 하는가 하면
국회 의사당도4.19 부상자와 또다른 시위자들로 둘러 쌓여 있고
당시 중앙청 현관에 들어 서면 현관에서 부터 2층 우측의 총리 비서실까지
이들로 꽉차 발 딛딜 틈이 없는 형상으로 그야 말로 무법 천지였다
심지어 장면 총리는 총리실로 출근을 못한채 반도호텔 5ㅇ5호실인가 하는곳에
비상 집무실을 설치하여 집무를 하는 지경에 이르니 그야말로 무정부 상태의 혼란에 극치가
내 내 지속 되였다
모든것은 질서 위에 비롯 된다는 어느 철학자의 금언 그대로 가슴에 닿는 시기 이기도 하다
한편 지방은 비교적 조용하지만 소위 반민주 행위자 조사 위원들이 설처 대고 있음이니 피해 다니고
자유당 군당 원장이나 사찰계 그무한자들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에 떠는 처지였다는 풍문이다
이것이 독재자를 몰아낸 한심한 자유국가의 위상이였으니 실로 한심한 참경 이였음에랴 드디어
1961년 5월16일 밤 12시경 요란 총성이 서울 하늘을 뒤 흔들었으니
보다 못한 군사 혁명이 발생 것이였다
처음은 무엇인가 몰라 어리둥절 했으나 후에 보니 이것은 국가 장래를 위해 필연이라는 것이
내 개인에 생각이다
다음은 군사혁명 직후와 5차개헌을 기술해 보고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