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글을 쓰면서 내내 나를 괴롭히던 하나의 사건, 나의 언니에 관한 이야기를 써야 하나 아니면 그냥 피해 지나갈 것인가로 많이 갈등하였다. '내가 피할수 있다면 피하게 해주소서' 하며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주위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를 그냥 덮어 둔다고 잊혀질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이 얘기는 우리 민족 역사의 과도기적 현상에서 일어날수 있는 민족적 가정적 비극의 하나라는 점에서, 또 나의 언니에 대해 그리고 거기 얽힌 주위사람들의 사정과 심경에 대해 사실상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그 피하고 싶었던 십자가를 꺼내 지기로 한다. 이글이 감히 아버지에 관한 역사의 한 기록이라는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면 옳은 기록이란 좋은 것 뿐이 아닌 치부까지도 다 솔직하게 밝혀낼 수 있어야 진실과 객관성을 보유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그동안 알던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이었다. 물론 리챠드 파인먼, 켄 윌버나 스티븐 호킹 등이 천재라는 말은 들었으나 그들의 저서만 대했을 뿐 내가 직접 만나 본 일은 없다. 허지만 내가 직접 만나고 접해 본 사람들 중엔 아버지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는 한번 얘기를 꺼내시면 예를 들어 '그 사람은 숙종 몇년에 태어나 자는 무엇이고 호는 무엇이며.. '로 시작하여 그의 부모 당숙 친구 등의 이름까지, 또 역사적 사실을 말씀 하실 때 서기 천몇백몇년에.. 등 정확한 해라든지 경제문제에서 많은 숫자 등을 나열하며 장 시간 모든 사실을 줄줄이 꿰며 말씀하시었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 '아 아버지는 어른이시라 그런가부다, 나도 어른이 되면 저렇게 유식해지겠지' 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의 그 나이가 되었을 때 더 유식해 지기는 커녕 내가 기왕에 알고 있던 적은 지식마저 잊어가고 있음을 알고 더 아버지는 타고나신 천재셨구나 하는 감탄을 하였다.
부산 국제신보 사설을 쓰실 때 매일 기자들은 대개 오전에 우리집에 와서 원고마감 전까지 가져가야 할 원고를 기다리며 마루에서 초조하게 앉아있었다. 그 동안 아버지는 안방에서 이불더미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구술하고 어머니는 원고지위에 받아 쓰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어머니가 쉬지않고 받아 쓰실수 있을 만큼의 속도로 구술하셨는데 다 쓰고 난 다음 어머니께 한번 읽어보라 하시곤 흠 되었다 하셨지 한번도 어디를 고치거나 다시 쓰셨던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대신동에서는 그래도 좀 나았지만 동래에서 시내까지 버스타고 원고를 날랐던 기자들도 참 수고가 많았다 싶다. 그러고 보면 요즘 이메일 송고같은 시스템이 얼마나 편리한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자신이 그렇게 천재셨기 때문에 자신의 자식들도 닮았겠지 하여 우리를 그렇게 무리하게 월반시키셨나보다.
그런데 우리 6형제들 가운데 아버지 머리를 가장 많이 닮은 천재가 바로 나의 언니이다. 언니는 서울사대 병설국민학교(지금의 교대부국) 4학년에 다닐 때 6.25가 나서 남으로 피란가 아버지가 잠깐 교감으로 계시던 경남 안의중학 2학년에 입학하였다. 처음에 들어가니 알 수 없는 영어를 모두 배우고 있는데 자신은 알파벳 글자도 생소한 것을 어린 나이에 어찌 노력하였는지 어쨋든 혼자 영어를 익힌다.
그 다음 해 부산으로 가서 아버지가 동아대와 부산대학으로 가시기 직전 잠깐 교장으로 계시던 대연동(그때 허허벌판이 대부분이던 대연동이 지금은 놀랍도록 변해있다) 대연중고등학교에 중학 2학년에 몇달 다니다가 다시 부산사범대병설중학 2학년에 편입해서 1년을 다닌 후 3학년이 되야 하는 대신 그당시 그 입시율이 어마어마하다는 부산 최고의 부산여고에 27등이란 놀라운 성적으로 입학한다. 그 해 부산여고 1학년 2학기엔 부산대학이 동래 장전동으로 이사할 때 동래여고 1학년 2학기 대신 3학년 2학기로 전학을 하고는 그 다음 해 부산대 정치과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그러니까 국민학교 4년, 중학 2년, 고교 1년, 남들은 12년 다니는 것을 언니는 7년만 다녔다. 나도 8년을 다녀 막상막하라 할 수도 있겠으나 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 나는 실력이 형편없었던 것에 비해 언니는 정말 피나는 노력으로 독학을 하다싶이 하여 탄탄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평생 그렇게 정말 목숨 내 놓다싶이 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을 본 일이 없고 언니가 자는 모습도 거의 본 일이 없다. 그 당시에 어떻게 구입했는지 미제 인스탄트 커피를 끈적거리는 액체 고약처럼 은박지에 넣어 한 조각씩 뜨거운 물에 타 먹는 것을 언니는 그 한판 열잔도 더 되는 분량을 물에 타지도 않고 쓰다며 상을 찡그려가며 다 짜 먹고 밤새 책상 앞에 앉아있던 모습이 기억난다.
부산대학관사는 적산가옥이라 온돌이 아니고 다다미라서 겨울엔 꽤 추웠는데 언니는 겨울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앉아 뒤에서 보면 항상 둥그런 작은 산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유명했던 '영어 삼위일체' 두꺼운 문법책을 1학년 때 언니는 그렇게 세번이나 통독하여 동래여고 3학년이 되었을 땐 영어시험은 항상 올 만점을 기록하였다. 나도 그렇게 도전해야 될 입장이라 삼위일체를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지만 너무도 재미없고 딱딱한 문법이라 지루해서 중간 이상을 넘어 본 일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앞 부분만 서너번 읽은 셈인데 시작이 반이니 그래도 한번 완독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있다.
수학은 독학으로 되는 과목이 아닐텐데도 내가 몰라서 무엇을 물어보면 언니는 항상 척척 대답을 해 주었지만 시간을 뺏는 것 같아 미안해서 많이 물어 볼 수도 없었다. 타고난 천재와 후천적인 노력, 하긴 노력한다는 그 정신도 타고 나야겠지만. 그 노력은 결국 월반이라는 높고 험한 난관에서 언니를 이기게 해 주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언니를 깊이 신뢰하여 언니를 자주 앉혀놓고 '너는 동생들을 다 공부시키고 책임져야 한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러나 실상 언니는 동생들 공부까지 가르칠 시간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그 말씀은 그 후 내내 계속되어 언니 머릿속에 거의 세뇌되다싶이 하였다.
부산대 정치과 1학년에서 서울 성균관대 정치과 2학년으로 편입(여기서 또 한번 월반)한 언니는 거기서도 홍일점으로 부산대 정치과에서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허지만 이번에는 좀 사정이 달랐으니 그 중에 한 남학생과 가까워졌던 것이다. 그 당시 유명했던 영화, '茶와 동정(同情)'이란 영화에서 교수 사모님인 데보라 카를 사랑하는 학생 죤 카 와 닮았다며 대단한 미남이라고 극구 내게 자랑하던 그 가회동에 살던 양반 도련님. 내가 실지로 보니 언니가 말한 만큼 미남은 아니었지만 꽤 단정하고 깨끗한 신사였다. 그점은 눈에 콩 깍지가 낀 언니 사정으로 이해할만 하였지만, 나중에 TV에서 흘러간 옛 영화라며 그 '차와 동정'을 보여줄 때 유심히 보니 내가 보기에 그 남자분은 죤 카와 하나도 안 닮았던데 언니는 어쨋든 어지간히 좋아하였던 모양이었다.
1961년 5.16이 나기 직전 아버지가 언니를 부산으로 불러 내리셨을 때 그 도련님은 그 당시 큰 히트를 친 대한극장의 '벤허'(처음으로 들어온 70미리 대형화면을 그 때 상영할수 있는 극장은 우리나라에서 대한극장밖에 없었다)를 보러 올라오라는 초대를 한다. 어느 주말에 언니는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상경하였고, 그리고 그 때 언니는 그의 프로포즈를 받는다. 그 날 언니는 아버지 얘기를 하며 '나는 앞으로 다섯동생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언니 심정은 그리해도 괜찮다 하며 결혼하자 하기를 바랬을텐데, 자신의 교수님이기도 한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라 할 수도 없었던 그는 그 때 언니를 포기하고 얼마 후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같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버렸다. 특별히 부유한 집안도 아닌 평범한 중산층 출신인 그는 다섯 처남 처제들을 공부시키고 결혼시키자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채 희생시켜야 한다는 부담이 컸으리라.
상심한 마음으로 부산으로 내려온 언니는 혜화(惠花)여중에서 가르치며 또 그 억척이 발동했는지 직장도 여러개를 가졌다. 부산 미공보원(USIS) 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단 한명을 뽑는 시험에 합격하여 그 도서관에서 근무하였고 모든 수입은 봉투 째 어머니께 갖다 드리고 약간의 교통비와 용돈을 타서 쓰고 있었다.
그 공보원은 주말이 아닌 주중의 수 목요일에 이틀을 쉬어 그 수 목요일엔 혜화여중에 나가 수업을 이틀로 몰아 아침부터 온종일 가르키고, 부산 MBC래디오에서 정기적으로 미인(美人)영어회화 시간에도 매일 출연하였다. 그리고 틈틈이 학생들을 모아 일반 영어회화반을 조직해 가르쳤으니, 일주일 내내 하루도 쉴 틈없이 일하였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일과가 끝나고 부산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두시간 후에 동래집에 도착하면 항상 깊은 밤중의 통행금지 시간 직전 이었다. 온천입구 정류장에서 내려 통행금지시간(82년 해제될때까지 12시가 통행금지였음)을 가까스로 피해 인적이 끊긴 그 길을, 오른 쪽은 논이고 왼쪽은 울창한 숲이라 해만 지면 무섭던 그 길을 지친 몸으로 혼자 걸어올라오며 몸도 마음도 얼마나 허전하였을까. 그렇게 언니는 아버지가 부탁하신 가장역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온 몸으로 최선을 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하루는 서면에서 가까운 하야리아 미군부대 앞 근처의 한 영어회화모임에서 어느 날 한 미군 자원봉사자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으니.. 그 부대에 와 있던 한 미국인 리포터였는데 언니는 무심히 보고 지나쳤으나 그 리포터는 언니를 보는 순간 갑자기 '독침을 맞은 듯 전신이 마비'되어 한동안 꼼짝 못하고 입도 얼어붙었다고 한다.
그 후로 그 미국인이 언니에게 가한 사랑의 폭격이란, 한국남자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열렬한 공세였다. 사랑한다는 말조차 쑥스러워 못하던 우리네 남자들과,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활화산 그 자체인 그네들과. 그로부터 외로웠던 언니는 두갈레의 마음에 엄청나게 시달린다.
아버지가 아시면 큰일 날꺼야 말도 안되는 일이지, 나는 동생들을 책임져야 되 하는 마음과 자신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경도되 가는 마음과. 그 두 마음의 오랜 갈등속에 언니 자신의 표현으로 '죽도록 미쳐 나가다가' 결국 언니는 그 끝도 없이 고생스럽고 외롭고 결혼의 희망도 없어 보이던 상황을 용감하게 탈출하는 길을 택하였다.
내가 대학 1학년 되던 해 언니가 그 미국인을 데리고 서울로 왔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이란.. 나 역시 두 갈래의 마음속에 몹씨도 괴로웠다. 언니의 처지를 잘 알고 있던 나는 '그냥 여긴 다 잊고 훨훨 날아가서 행복하게 잘 살아'라 말해주고 싶은 심정과 아버지를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너무도 잔인한 일이라 극구 말려야 한다는 마음과. 말려봐도 이미 결심이 너무 확고해 늦어버린 상황이라 겉으로는 반대를 하면서도 어정쩡한 태도로 괴로워할 뿐 무슨 말을 하기엔 모든 것이 너무 늦어 있었다.
나는 마포교도소로 아버지 면회를 다니면서 언니는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계속한다고 알고 계신 아버지께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고 언젠가는 알게 되실 수 밖에 없다는 현실앞에 점점 더 가슴이 타 들어가고 있었다.
그 당시 미국 비자 얻기가 별따기 만큼 어려웠던 시절, 더구나 언니는 아버지때문에도 신원조사에 걸려 할 수없이 그 남자는 만기제대하여 한국에 더 체류할 수 없어 혼자 미국으로 돌아갔다 다시 일반 관광비자를 얻어 언니를 데리러 나왔다. 그는 대학 졸업 후 한국에 용병으로 와서 저축한 모든 돈을 몇 번 비행기표를 산다고 다 날려 버린다. 언니는 끝까지 비자를 얻을수 없어 두사람은 편법으로 이탈리아비자를 얻어 떠나 로마에서 1년 살다 그곳에서 미국비자를 얻어 미국으로 간다.
비자신청에 걸리는 사항으로 시시콜콜 언니의 모든 활동내역들이 기록돼 있다는데 대해 언니는 놀래었다. 60년대 초 한국전쟁이 지난지 얼마 안되어 우리는 모든것이 아직 부족하던 시절 정보만큼은 미국 CIA의 지도아래 기술을 그대로 수입하여 최첨단을 걷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예를 들어 언니는 미공보원에 다닐 때 거기서 가까운 건물의 사무실을 빌려 잠깐 한 두달간 일반 영어회화반을 만들어 가르친 일이 있었다. 그 건물은 아버지 제자들 중 한분이 사무실이 비는 저녁시간동안 무료로 빌려 주어 언니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도 몰랐었지만 기록엔 그 사무실은 민민청(民民靑 민주민족청년)단체들의 사무실이라 결정적으로 비자를 못 얻는 조건이 되었다.
언니가 떠난 후 62년 겨울방학동안 부산에서 어머니와 동생들이 모두 올라와 같이 안양교도소로 아버지 면회를 갔는데 아버지는 대번에 '우창이는 왜 안 왔느냐'고 물으셨다. 잠깐의 침묵속에 가슴이 얼어붙는데 어머니께서 '우창이는 미국 갔습니다'라고 대답하셨고 아버지는 멍하게 쳐다보시다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들어가 버리시었다.
드디어 한번은 당해야 할 고개를 넘는 셈이지만 아버지가 그 후 당하신 고통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필시 참석했던 간수에 의해서겠지만 그 소문은 삽시간에 교도소전체로 퍼져 교도소내 동지들간에 아버지는 수형생활 내내 말할수 없는 공격을 받으시고 항의할 어떤 말도 못 찾은 채 침묵으로 일관 하신다.
자신의 딸이 미 제국주의자와 결혼하여 자식하나 건사 못하는 사람이 어찌 민족사업을 하는가, 어찌 친일 친미주의자들을 공격할 수 있는가라는 공격에 유구무언이 되신다. 또 그렇게 깊이 믿었던 언니에 대한 배신감 또한 아버지를 이중으로 괴롭혔을 것임에.. 나는 그런 아버지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말할 수 없는 동정을 느껴 그래서 더욱 위문음악회를 열어드릴 생각을 한다. 그것으로서 아버지의 위치가 조금이라도 회복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66년 봄에 언니는 네살 난 딸을 데리고 수일원으로 출옥하신 아버지를 뵈오러 먼길을 온다. 놀래실가봐 집 밖에서 잠깐 언니를 기다리게 해놓고 내가 혼자 먼저 들어가니 아버지가 '여어 우인이 왔나!'라 하며 반가워 하시어 '실은 언니가 아버지를 뵈오러 지금 밖에 와 있어요'라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금방 얼굴빛이 바뀌어 돌아서서 수일원 산 쪽으로 올라가 버리셨다. 어머니는 슬피 우는 언니를 달래고 계시고 나는 또 중간에서 아버지를 찾으러 산쪽으로 갈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에서 가슴이 얼어붙고 있었다.
차라리 내가 아버지만 지지하는 입장이라면 또는 언니쪽에만 서 있을수 있다면 좀 덜 괴롭지 않았을까. 나는 늘 두 사람 입장을 다 이해하는 위치에서 더 난감하고 괴로웠으니 이 또한 내가 평생 지고온 두개의 커다란 짐이었다.
89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언니는 미국에서 단숨에 달려와 드디어 어버지 시신이나마 만나뵐 수 있었다. 내가 파주에 살고 있던 2003년 봄에 나는 미국에서 온 언니를 데리고 다시 양산에 있는 아버지 묘를 찾아 아버지 앞에 고개를 숙였다. 언니는 '아버지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라고 통곡하며 몸부림치고 그 모습을 보는 나도 뭐라 말로 표현할수 없이 괴로웠다. 나는 속으로 '아버지, 이제 그만 언니를 용서해 주세요. 이 시대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비극이잖아요..'하며 같이 울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아직도 언니를 용서 못하고 계시는지 또는 다 부질없는 지나간 인생사이다 라며 용서하셨는지도 모른다. 허지만 살아있는 언니는 아직도 가슴깊이 사무친 아버지에 대한 회한으로 요즘도 한국을 찾을 때면 슬피 울고 있으니 어느 약소국가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그리고 일어났던 슬픈 일들 중 하나가 아닌까. 언니는 도미 직 후 20대 중반부터 은행 텔러로 일하기 시작하여 점점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서 이미 30대 초반에 은행지점장이 되어 사회적으로는 성공가도를 달렸다고 할 수 있으나 가슴 깊숙이 남아있는 차다찬 앙금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첫댓글 (아래 댓글에서 계속..)
아버지면회를 다니다가 1학년 여름방학 때 집에 내려가 내동생 우눌이 진해 해병대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면회 가 봤더니 하도 맞아 풀밭에 엉덩이를 대고 잘 앉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던 모습이 늘 잊혀지지 않습니다. 국가권력에 의해 고통 당하고 있는 우리 가족들.. 이렇게 말도 안되는 야만적이고 썩은 군대 시스템이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정신적 육체적으로 오죽 고통스러우면 지금도 그렇게 자살을 많이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지금 유독 군인들 뿐이 아니라 청소년들, 또 현 이 땅의 많은 젊은이나 성인 노인들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