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돈(Dedon)이 밀라노 가구 박람회장에서 선보인 조명 디 아더스(The Others). 디자인 스테판 버크스(Stephen Burks)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 동안 카르텔(Kartell)이 로 피에라에서 선보인 전시 <컨태미네이션ContamiNATION>.
반세기 이상 지상 최대의 디자인 행사로 세계 디자인 트렌드를 이끌어온 밀라노 디자인 위크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세계적인 메이저 가구 브랜드들이 신상품을 선보이는 박람회장 로 피에라(Rho Fiera)에선 조명 전시 <에우로루체Euroluce>를 함께 개최해 최신 조명 디자인이 쏟아져 나왔고 총 136개국 34만 4000여 명의 관람객이 이곳을 찾았다. 또 브랜드에 제한이 없고 자유로운 연출이 가능한 장외 전시 푸오리 살로네(Fuori Salone)에도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대형 브랜드 전시장이 밀집한 토르토나(Tortona) 지역과 신진 디자이너들의 참신함이 느껴지는 람브라테(Lambrate), 가구 브랜드 매장이 밀집한 두리니(Durini) 거리와 예술과 디자인의 실험성이 느껴지는 브레라(Brera) 등 지역별로 각기 다른 매력을 뽐냈다. 또 한적한 지역에조차 특별한 공간 연출이 가능하거나 임대료가 합리적이기만 하면 어김없이 전시 공간이 들어섰다. 그 전시장을 다 돌아봐야 하니 해가 갈수록 다리가 더 아파진다는 디자이너와 기자들의 행복한 푸념(?)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기에 리빙을 넘어 패션, 자동차, 전자, 예술 등 장르 제한 없이 디자인의 첨단을 추구하는 다양한 브랜드와 기관이 이 행사에 참여하면서 전시장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추세이다.
행사가 열리는 6일을 꼬박 투자해도 모든 전시를 보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관람객의 시선을 끌기 위한 브랜드들의 전시 연출 경쟁이 한층 치열해지고 있다. 콘텐츠뿐 아니라 전시 자체가 흥미진진한 볼거리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장외 전시의 볼거리와 이벤트가 나날이 화려하고 풍성해지다 보니 행사의 주인공인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 이상의 인기를 구가하게 됐다. 지난 15년간 이곳을 방문한 경험에 비춰봤을 때 올해 새롭게 등장한 디자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실험적이었다. 박람회장 부스 구성에도 변화가 있었다. 지금까지 박람회장 가구관 구성은 전통적 스타일을 반영한 클래식관, 미니멀하고 기능주의적인 디자인이 주류인 모던관,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디자인관으로 나뉘어 있었다. 기존에는 1:3:2 정도의 비율로 구획되었는데 점차 디자인관이 늘어나더니 올해는 급기야 1:0:5의 비율이 되었다. 모던관이 아예 사라지고 이 공간을 디자인관으로 대체한 것이다. 이는 무난함을 상징하던 ‘모던’이 소비자들에게 더 이상 예전만큼 매력을 발산하지 못하며, 실험성 높은 디자인관 상품이 시장의 주류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곳에서 주목받은 디자인은 얼핏 지나치게 유희적이거나 시대를 거스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고, 심지어 다소 산만하다는 인상마저 풍겼다. 그러나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한층 깊어진 리빙에 대한 본질적 성찰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데 미숙하거나 소극적이었던 소비자들이 더 이상 리빙을 ‘내가 맞춰야 할 틀’이 아닌 나의 행복을 위해 ‘내게 맞춰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편견처럼 굳어진 인테리어 공식과 유행에서 벗어나 나의 시선이 나의 삶의 중심이 되게 한 것이며 ‘나 혹은 내 가족이 원하는, 내가 행복한, 나다운, 나만의 공간’을 찾기 위한 실험을 하는 셈이다. 다시 말해 그동안 패션 산업처럼 인위적으로 정해진 최신 유행을 너나없이 따라 하며 그 틀에 나를 맞추던 메가트렌드(megatrend) 시대가 저물고, 개인의 취향에 맞춰 자신의 색깔을 찾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가구가 보여주는 재기 발랄한 발상은 새로운 첨단 기술과 소재 개발로 한층 자유로워진 구성을 통해 구현되었으며, 소비자의 다양성과 개성을 다채롭게 표현해냈다. 그 정신이나 형식 면에서 탈모더니즘을 추구하던 과거 포스트모더니즘의 향수가 느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공급이 아닌 수요가,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가 시장을 움직이는 ‘온 디맨드 경제(on demand economy)’ 시대에 맞춰 리빙과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점도 주체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를 표현하는 방식이 첨단 기술과 신소재를 접목시키는 기술 지향적 트렌드가 아니라 아날로그적 감성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등 인간의 노동을 위협하는 기술의 발전과 예측 불가능한 경제 상황에서 현대인이 받는 스트레스가 가중되면서 이에 반하는 디자인 경향이 강세를 보인 것이다. 첨단 디지털 기기와 상업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있고, 바쁜 삶으로 야외 활동이 제한되어 있는 현실에서 리빙 공간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최후의 도피처이자 성지다. 나와 사랑하는 이들이 편안하게 쉬며 기운을 북돋는 공간인 만큼 올해 전시장 곳곳에서는 자연적 요소를 가미하거나 다소 투박하지만 친근함이 느껴지는 수공예적 감성의 디자인이 눈에 띄었다. 상대적으로 하이테크를 연상시키는 광택이나 형태는 의도적으로 피한 듯했는데 이처럼 시대를 거스르는 듯한 역설적 미학은 필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산업혁명으로 기계 생산이 시작된 이래 기계 만능주의가 점차 확산되며 인간의 가치에 큰 충격과 혼란이 가중되던 19세기 중반에도 인간의 손길을 중시하는 미술 공예 운동(Arts & Crafts Movement) 바람이 거세지 않았던가. 급진적 변화로 인한 심리적 불안과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이 시대에 침착하게 본연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는 공간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르겠다. 디자인 위크 기간에 선보인 이 의외의 디자인들은 다소 유치하거나 우스워 보여도 그동안 잊고 지냈던 찬란한 개성과 다양성에 집중해 인간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줬다. 타인의 시선에 나를 맞추는 수동적인 삶이 아닌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유롭게 개성과 취향을 표출하는 삶. 이것이야말로 현재 우리가 리빙 공간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지식과 공식, 트렌드는 잠시 잊은 채 시끌벅적하고 제멋대로여도 사람 냄새 나는 이 새로운 물결에 시선을 맞춰보자. 생각지 못했던 풍성한 즐거움과 창의적 영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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