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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10월 12일 유관순 동상 제막식. 서울 남대문 앞 중앙녹지대
민족을 배신했던 자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과 조작을 통해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고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서슴없이 역사를 그 도구로 활용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교육과정기 교과서부터 유관순이 실린다는 것은 '유관순기념사업회'의 홍보와 미군정청의 지원으로 유관순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와 국민교육적 활용 가치가 급격히 향상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1차 교육과정기 초등교과서에 나타난 유관순의 모습은 영화에서 그려졌던 독실한 서구종교인으로써 모습이 부각되고, 또 ‘구국의 영웅’으로써 이승만, 공산군과 싸우는 국군의 모습, 건국 등과 겹쳐서 나타난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3ㆍ1운동 정신의 승계를 표방한 헌법을 선포하고 삼일절을 국경일로 제정했으며 한국전쟁까지 치른 이후, 국민을 위한 기초교육을 담당한 ‘초등학교’ 교재에서는 3ㆍ1운동과 그 정신을 ‘애국’, ‘건국’, ‘반공’과 연결시키면서 유관순에게 구국의 영웅적 면모를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독재자 박정희는 친일파정권답게 유관순 동상 건립, 유관순 유적지 정화 등과 같은 유관순 영웅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했으며, 결국 그들의 민족반역행위를 덮기위해 국민을 기만하고 속이는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 서대문형무소의 수형자기료표에는 유관순이 1902년 12월 11일생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한데도 교과서에는 1902년 3월 15일, 1904년 3월15일, 1902년 12월 16일 등 제각각 다르게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신장은 151.5cm가 아닌 '5척(尺) 6촌(寸)' 수치를 척당 30.3㎝(1척=10촌)의 '미터환산법' 으로 계산한 결과 169.68cm로 밝혀졌다. 특히 머리형태도 미혼여성의 댕기머리가 아닌 혼인한 유부녀가 하는 쪽머리다.
그렇다면 먼저 알기 쉽게 유관순이 3.1만세운동의 영웅이 아니라는 점을 교과서에 서술된 내용부터 살펴본다.
-2편 유관순수형자 기록표와 출옥했다는 기록을 참조하자.
[수형자기록표에 유관순은 1902년 12월 11일 출생으로 기록돼 있음.
氏名-柳寬順
年齡-光武6年 12月 11日,明治35年 12月 11日
-1921년 1월3일 유관순 수형자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했다는 기록표
出獄年月日及其事由
大正10年 1月 3日 滿期
歸住地 天安郡 東面 龍頭里 418 從兄 柳京錫方
#유관순은 서대문형소 수형자 기록표를 보면 서울역에서 절도범으로 잡혀 1920년 9월28일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3개월를 살다 1921년 1월 3일 석방되었다는 사실이다.]
영웅의 기록은 정확해야 하고 그 기록은 영구불변이어야 하는데, 교과서 등에는 각기 다르게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교육과정마다 유관순에 대한 서술내용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교과서에 수록된 유관순에 대한 설명
제1차 교육과정(1955~1963)
성은 유요, 이름은 관순이니, 나라의 딸이다. (중략)
총과 칼에 시달린 채 비와 바람에 부대끼기 열이요 여섯... (중략)
기미년 삼월 일일에 천안도 아내를 뒤흔든 자유군의 선두를 가로 맡았으니, 이 곧 “순국의 처녀” 샛별 같이 빛나는 우리의 꽃이었다. (중략)
우리의 관순 아기는 한 고비 단단하게 “민족”을 부둥켜안았고, 더 한층 든든하게 “조국”을 짊어졌다. 그리하여, 영욕을 벗어난 초인이 되었고, 물불이 범하지 못하는 생신이 되었던 것이다.
칠년의 형기를 받았으나, 그는 오히려 백 년의 생명에 차약하였고... (중략)
이리하여, 우리의 거룩한 “나라의 딸”은 필경 오랑캐의 갈퀴에 찍히어, “륙시”로 갈래 되니 원통하여라.
열 일곱의 봉오리! 피와 살과 뼈가 송두리째 아귀의 밥이 되고 말았다. (중략)
제2차 교육과정(1963~1973)
나는 지금 파란 삼월의 하늘을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독립 만세 외치다 외치다, 옥 속에서 숨이 지며 안타깝게 그려 보던 저 하늘을,
지금도 저 파란 하늘을 우러러보면, 그 날에 부르짖던 소리들이 막 들려 오는 듯합니다.(중략)
제3차 교육과정(1972~1981)
1919년 3월 1일. 서울 거리에 물결치는 태극기를 보고 만세 소리를 들은 유 관순 누나는, 나라를 위하여 만세를 부를 것을 결심하였읍니다. (중략)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온 유 관순 누나는, 마을 사람들을 예배당에 모아 놓고 독립 만세를 부를 것을 부르짖었읍니다. (중략)
“여러분! 우리도 나라를 찾기 위한 만세를 부릅시다.”
유 관순 누나의 외침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은, 품 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었읍니다. “대한 독립 만세!” (중략)
“왜 죄 없는 우리 부모님을 죽이느냐! 이 악독한 놈들아! 대한의 원수, 부모의 원수들아!”
하며, 일본 헌병에게 덤벼들었읍니다.
그러나 원통하게 유 관순 누나는 일본 헌병에게 붙들리고 말았읍니다.
그리고, 온갖 고문을 당했읍니다. (중략)
유 관순 누나는 7년이라는 징역을 받고 감옥으로 옮겨졌습니다. (중략)
제4차 교육과정 (1981~1987)
나는 지금 파란 삼월의 하늘을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독립 만세 외치다 외치다, 옥 속에서 숨이 지며 안타깝게 그려 보던 저 하늘을, 지금도 저 파란 하늘을 우러러보면, 그 날에 부르짖던 소리들이 막 들려 오는 듯 합니다. –만세!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제5차 교육과정 (1987~1992)
우리 겨레는 1910년에 불행하게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내 나라, 내 땅에서 마음 놓고 살 수가 없게 되었다. (중략)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폭발한 독립의 외침은 삽시간에 삼천리 방방곡곡에 퍼져, 한 달이 넘도록 그칠 줄 몰랐다. 3.1 운동의 불길이 솟던 그 날, 열 여섯 살의 여학생 유 관순도 독립 만세를 부르는 대열에 참가하였다. (중략)
정오가 되었다. 그러자, 유 관순은 싸전에 놓인 곡식 가마니 위로 올라섰다.
“여러분, 반만 년의 빛나는 역사를 가진 우리 겨레가 왜놈들에게 짓밟히고 있읍니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그들에게 나라를 빼앗겼읍니다. 지금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두 일어나 독립을 외치고 있읍니다. 여러분, 나라를 되찾아야 합니다. 만세를 부릅시다. 대한 독립 만세를!” (중략)
늦게 도착한 일본 헌병들은 경찰과 합세하여 마구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부상당하였다. 주모자를 찾느라고 온 마을을 뒤졌다.
유 관순은 잠시 몸을 피했다가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일본 경찰과 헌병이 집을 에워싸고 있었다.
“저 애를 잡아라. 저 계집애가 유 관순이다. 주모자다”
유 관순은 헌병에게 끌려갔다. (중략)
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은 유 관순은 공주와 서울에서 재판을 받았다.
유 관순은 7년의 징역을 언도받고 형무소에 갇혔다. (중략)
제6차 교육과정 (1992~1998)
유관순은 1904년 3월 15일, 지금의 충청 남도 천안군 병천면 지령 마을에서 태어났다. (중략)
유관순은 서울 정동에 있는 이화 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때가 1916년이었다. (중략)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중략)
유관순과 친구들은 목이 터져라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튿날, 일본은 학교 문을 강제로 닫게 했다. 그래서 기숙사의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유관순도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은 독립 만세를 부를 준비를 하였다. (중략)
정오가 되자, 유관순은 싸전에 놓인 곡식 가마니 위에 올라서서 외쳤다.
“여러분, 반만 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겨레가 불행하게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이제 나라를 되찾아야 합니다. 지금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두 일어나 독립을 외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라를 되찾아야 합니다. 만세를 부릅시다. 대한 독립 만세를!” (중략)
“저 애를 잡아라. 저 계집애가 주동자다.”
유관순은 일본 헌병들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그리고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일본 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고 나서, 유관순은 공주와 서울에서 재판을 받았다. (중략)
마침내 7년의 징역형이 내려지고, 유관순은 감옥에 갇혔다.
제7차교육과정 (1998~2009)
유관순은1902년 3월 15일, 지금의 충청 남도 천안시 병천면 지령 마을에서 태어났다.
7년의 징역형이 내려지고, 유관순은 감옥에 갇혔다.
1920년 어느 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만세를 부르던 유관순은 열아홉의 꽃다운 나이에 감옥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7
-초등학교 국어읽기 4-1 8쪽 2008년 발행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지금의 충청 남도 천안시 병천면 지령 마을에서 태어났다. (중략)
7년의 징역형이 내려지고, 유관순은 감옥에 갇혔다. (중략)
1920년 9월 28일, 나라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만세를 부르던 유관순은 열아홉의 꽃다운 나이에 감옥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초등학교 국어읽기 5-2 170쪽 (2016년 발행)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중략)
3년 형이 내려지고 유관순은 감옥에 갇혔다. (중략)
1920년 9월 28일, 나라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만세를 부르던 유관순은 열 아홉의 꽃다운 나이에 감옥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교과서 유관순과 서대문형무소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유관순 출생
#수형자기록표: 1902년 12월 11일 출생.
#교과서기록: 1902년 3월 15일, 1902년 12월 16일, 1904년 3월 15일 출생으로 조작.
유관순 형기 및 사망
#수형자기록표: 3개월 수형하다 출소했음. 사망이 아니라 만기출옥.
#교과서기록: 3년형, 7년형. 사망으로 조작.
세계 위인전이나 영웅들의 역사적 인물의 기록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유관순은 이와 같이 생년월일과 사망일자, 형기 등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기록된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유관순을 제외하고는 역사상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유관순 정도의 나이의 여학생들이 댕기머리를 하고 수업받는 장면. 당시 미혼인 여성은 댕기머리, 혼인한 여성은 쪽머리
▲ 유관순은 쪽머리를 하고 있다.
아래 증언은 해방직후 감리교인 박인덕은 유관순을 영웅으로 조작하면서 서대문형무소의 유관순이 댕기머리를 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당시는 유관순이 쪽머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음이 분명하고 서대문형무소 수형자기록표 등도 입수하지 못했음을 반증해준다.)
유관순에 대한 증언기록
신봉조(이화여고 교장출신): "그런데 그 얼굴을 아신 것은 선생님이 가르쳤기 때문에 아신거죠?"
박인덕(인덕대학교 설립자): "내가 가르쳤으니까 알았지요, 걔 하나만이고 다른 사람들은 보통 죄수들, 기결수들이고 유관순 하나만 있는데 아! 걔가 머리를 따내리고..." -생략
▲박인덕과 유관순, 이화학당 학생들과 함께 기념촬영했다는 사진. 배경이 실내다
▲박인덕과 유관순, 이화학당 학생들과 함께 기념촬영했다는 사진. 배경이 실외다.
위 두 장의 사진은 똑 같은 모습이다. 윗줄 왼쪽의 한 학생이 빠져있지만, 똑 같은 모습으로 실내와 실외를 배경으로 합성한 사진이다. 이는 유관순을 영웅으로 조작하기 위해 댕기머리로 만들어 합성한 사진이다.
서대문형무소의 유관순과 사진을 비교해 보더라도 어린이와 성인의 키며, 외모에서도 성인괸 어린이 모습이다 .
나중 밝히겠지만, 유관순의 팔도 다른 학생에 비해 월등히 길다. 즉 다른 이를 유관순 얼굴모양으로 교체하였지만, 팔은 실수로 내버려 두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매국매족매혼노들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마는, 참으로 기가 막히고 통탄할 일이다. 이런 가짜를 영웅으로 만들다 보니 진짜 독립운동가들이 묻혀져 있고, 발굴도 미진한 게 사실이다. 진실을 밝혀야만 하늘에서 통곡하고 계실 독립지사들이 살아 나고, 나라가 살고, 민족정기가 구현될 것이다.
이어서 #유관순은 가짜였다ㅡ4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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