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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시티 과달루페 성모님(Basilica de Nuestra Senora de Guadalupe)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의 중심가에서 미니버스로 1시간 정도 북쪽으로 가면 시경계선 부근에 ‘과달루페의 성모’로 유명한 과달루페 성당이 있는데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성당 건물이라고 한다.
1531년 12월 9일, 미사를 보러가던 원주민 인디오 ‘후안 디에고(Juan Diego/57세)’는 테페약 언덕에서 청록색 망토를 걸친 성모님을 만난다. 성모님은 인디언 부족어로 나는 ‘과달루페 성모’라 불리기를 원한다고 하시며 ‘어려울 때에 정성을 다해 나를 찾는 이들에게 나의 사랑, 자비, 도움과 보호를 드러내도록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 테페약 언덕에 성당을 짓도록 하여라.’라고 말씀하신다.
과달루페(Guadalupe)는 아스텍(Aztec) 인디오 언어의 한 가지인 나후탈(Nahuatl)어로 ‘뱀의 머리를 짓밟는 분’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테 콰틀라소페우(Te Coatlaxopeuh)’가 ‘테 과틀라소페우(Te Quatlaxopeuh)’로 되었다가 영어로 번역하면서 ‘과달루페(Guadalupe)’가 되었다고 한다.
마야인들이 신성시여기고 섬기던 뱀 신은 깃털달린 뱀 신인 케찰코와틀(Quetzalcohuātl)이 있는데 1세기 전후 융성하였던 멕시코시티 인근의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에서 처음 발견되고, 유카탄 반도 중부 치첸잇사(Chichen Itza)에서 발견되는 쿠쿨칸(Kukulkan)도 뱀 신이다. 영어로는 Feathered Serpent.
당시 멕시코 인디오들은 세 가지 모양의 뱀의 형상과 조각들을 숭배하고 온갖 잡신들을 섬겼으며 그 신들에게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을 꺼내 제물로 바치고 있었다. 사실 성모님은 마야인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뱀의 머리를 짓밟으러 오셨던 것이다.
디에고는 주교관으로 달려가 성모님을 만난 이야기를 전하지만 스페인 주교 ‘후안 데 수마라가’(Juan de Zumarraga)는 믿지 못하고 미심쩍어하며 증거를 가지고 오라고 한다. 다시 테페약 언덕으로 간 디에고는 성모님을 만나 그 말을 전했고, 성모님은 처음 만났던 언덕위에 가서 피어있는 장미꽃을 주워오라고 한다. 바위투성이의 산일뿐더러 겨울철로 장미가 피는 계절이 아니었지만 언덕위에는 장미꽃이 만발하여 있었다. 꽃을 주워 내려오자 성모님은 디에고가 펼쳐놓은 틸마(Tilma/멕시코인들의 망토/거친 선인장 줄기로 짠 천) 위에 가지런히 장미를 놓아주며 가는 도중에 절대로 펼쳐보지 말라고 한다.
디에고가 주교님 앞에 가서 틸마를 펼치자 멕시코에서는 자라지 않는 주교의 고향인 스페인 카스티야(Castilla)산 장미 꽃송이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며 꽃을 쌌던 디에고의 틸마에 성모님의 모습이 새겨져 나타나는 기적이 일어난다. 틸마에 새겨진 성모님은 1m 45cm의 자그마한 키에 피부색은 인디오처럼 거무스름한 황갈색이고 머리카락은 검은색이며 머리에서 발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청록색 밝은 망토를 입은 모습이었다.
1754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과달루페의 성모(Our Lady of Guadalupe 혹은 Virgin of Guadalupe)를 북아메리카 수호성인으로 선포하면서 화해의 모후, 희망의 모후, 위로의 모후, 토착화의 모후, 사랑과 자비의 모후로 선포하였다.
잔인한 토속신앙과 스페인 식민통치의 고통에서 구원해 주시려고 발현하신 성모님은 수많은 멕시코 인디오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고, 토속신앙과 식민통치의 고통을 위로 받았는데 다른 면으로 생각해 보면 스페인은 식민통치의 한 수단으로 이용하였을지도 모른다.
멕시코인들의 ‘과달루페 성모’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가톨릭 신앙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전국 어디를 가나 성당마다 과달루페 성모님을 모시고 있고 성당이름도 과달루페를 딴 성당이 수도 없이 많다.
내가 방문했을 때도 수많은 신도들이 굉장히 먼 성당 정문 바깥부터 성모님을 모신 제단까지 묵주기도를 바치며 무릎걸음으로 가는 행렬이 끝이 안보일 정도였다.
스페인이 멕시코 식민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을지도 모를 ‘과달루페 성모’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멕시코 독립운동은 물론, 멕시코혁명 때에도 성모님이 새겨진 휘장을 높이 받들고 성모님이 새겨진 모자를 쓰고 독립투쟁과 혁명에 나서서 민중의 커다란 구심점과 힘이 되었다고 한다.
매년 수십만 명의 성지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이곳은 성모님이 발현하셨던 테페약 언덕 위에 자그마하고 아름다운 성당이, 그 아래 광장에는 1709년 다시 세워진 아름답고 웅장한 바로크식 옛날 성당건물(Old Basilica)이 있다. 그런데 옛 성당 건물은 지반침하로 붕괴의 위험이 있어 현재는 박물관과 공연장 등으로 사용되고 바로 옆에 조개껍질을 엎어놓은 형상의 엄청난 규모의 새 성당(New Basilica)을 지어 미사를 봉헌한다. 디에고의 틸마에 새겨진 성모화(聖母畵) 원본도 이곳에 모셔져 있다.
테페약 언덕을 오르는 아름다운 석조계단은 꽃과 장미로 뒤덮인 언덕 모습과 어울려 환상적이었고 옆쪽 절벽 아래에는 디에고가 성모님을 만나는 모습의 조각이, 또 조금 떨어져 디에고가 주교님 앞에서 틸마를 펼쳐 보이는 모습이 동상으로 세워져 있다. 테페약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성당의 모습은 정말 그림 같이 아름다워서 가슴가득 감동을 주었다. 친지들에게 선물 할 묵주와 목걸이를 비롯한 성물 몇 점을 산 뒤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 틸마에 그려진 성화 조사
1979년, 미국의 과학자들은 적외선을 이용하여 틸마(Tilma)에 새겨진 성모님 모습을 면밀히 조사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성모님의 눈을 우주광학기술로 2.500배 확대하여 보았더니 성모님 눈의 홍채(紅彩)와 동공(瞳孔)에 장미꽃을 쌌던 틸마를 펼치는 순간과 거기에 함께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나타나 보였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더욱더 신중히 조사를 하고 내린 결론은 “인간의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 성모의 눈은 즉석카메라처럼 눈앞에 비친 순간의 형상을 그대로 포착하였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조사를 중단했다고 한다. 또, 이 그림은 붓질을 한 흔적이 전혀 없으며 사용된 물감도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염료로 밝혀졌고, 선인장 줄기로 짠 거친 천임에도 안으로 전혀 배어들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색이 바래거나 변질도 없었으며 식물성도, 동물성도 아닌 전혀 새로운 물질로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성모님 눈동자 홍채에 나타난 사람들 1,2/ 장미꽃이 쏟아지는 틸마/ 성모발현 모습
포르투갈 리스본 파티마(Fatima) 성모님
파티마 성당 / 히야친타, 루치아, 프란치스코 / 당시 신문 기사
포루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아침 일찍 성모 발현성지 파티마(Fátima)를 가려고 왕복 버스표를 끊었는데 타고 보니 파티마가 종점이 아니고 이튿날 우리가 갈 포르투(Porto)의 중간쯤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아예 배낭을 메고 파티마를 들른 다음 방문이 끝나고 곧바로 포르투로 갈 걸....
쓸데없이 다시 리스본으로 다시 갔다가.... 파티마는 버스를 타면 리스본에서 북쪽으로 1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다.
가난한 포르투갈 시골 동네 파티마의 젊은 농부의 자녀들인 7살의 히야친타(Hyacintha), 9살의 프란치스코(Francisco)와 10살의 루치아(Lucia)는 1917년 5월 13일부터 그 이후 10월 13일까지 인근의 이레네(Irene) 골짜기에서 자신을 ‘로사리오의 성모 마리아’라고 밝힌 한 여인을 매달 만났다고 한다. 히야친타와 프란치스코는 친 남매간이고 루치아는 사촌 간이었다. 3번째로 성모 마리아를 만난 뒤 아이들은 자신들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직접 성모님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다음 달 10월 13일, 아이들의 말을 확인하려고 신문기자와 7만여 명의 군중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날씨는 시커먼 구름이 온통 뒤덮이고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는데 오후 1시경, 갑자기 비가 그치고 먹구름들이 물러갔으며 태양이 구름을 뚫고 나와 묘한 은빛 원반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루치아가 군중을 향해 태양을 보라고 크게 소리치자 하늘에는 여러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고, 태양이 하늘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으며, 또한 태양이 하늘에 있는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가기 전에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꼈다고 한다. 이 현상은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수십 km 떨어진 인근 마을의 주민들도 모두 목격하였다. 훗날 수녀가 된 루치아는 성모님과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지금까지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매우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그 부인이 입은 옷은 반짝거리는 물이 채워진 수정 유리보다 더 강하고 밝은 빛을 쏟아내는 찬란한 것이었다.
부인이 입은 옷은 발밑에까지 늘어뜨려졌으며 별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나이는 열여섯 살 정도로 보였고,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운 천상의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지 생각에 잠긴 듯 슬픔도 비치고 있었다. 가늘고 섬세한 부인의 손은 진주 같은 것으로 엮어진 묵주를 들고서 가슴 부분에서 서로 맞잡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모님의 모습이나 말씀을 들을 수 없었고 오직 세 어린이들에게만 보이고 들렸다.
처음에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주교님도 1930년 10월 13일 세 어린이의 환영목격을 성모 마리아의 출현으로 공식 승인했고 같은 해에 교황은 파티마 순례자들에게 면상(免償)을 주었다.
파티마가 성모발현의 성지로 알려진 후 전국적인 규모의 파티마 성지순례는 1927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1928년에 바실리카(Basilica/성전)가 건축되기 시작하여 1953년에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65m 높이의 탑 위에는 거대한 청동 왕관과 수정 십자가가 얹혀있고, 성당의 양쪽에는 병원과 피정의 집이 있다. 정면에는 엄청나게 넓은광장이 있는데 한쪽에 자그마한 성모 발현 기념성당이 있다. 이 파티마 성모 발현성지는 기적적인 치유의 은총이 많이 알려졌지만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없다고 한다.
1967년 5월 13일, 성모님 첫 출현 후 50주년 기념일에는 100만 명으로 추산되는 군중들이 교황 파울루스 6세(Paulus VI)가 평화를 기원하며 집전한 미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운집했다고 한다.
2007년에는 파티마에 신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광장 앞에 추가로 성당을 지었는데 8,5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며 공사비는 모두 순례자의 헌금으로 충당되었다고 한다.
미사 전 성모님을 모신 가마를 뒤따르는 깃발 행진 / 대성당 / 파티마 성모님
마침 우리가 가던 날이 9월 29일 주일이어서 대 광장에서 미사가 봉헌되었는데 광장은 이미 수만 명이 운집하여 발 디딜 틈이 없다.
의자도 없이 모두 맨바닥에 앉거나 서서 미사를 드리는데 신자가 아닌 사람들인 듯 사람 숲을 헤집고 다니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여념이 없는 이들도 있다. 미사를 보는 사람들의 가운데 통로는 묵주를 들고 무릎걸음으로 가는 신자들의 행렬이 끝이 없는데 광장 입구부터 제단 앞까지 200m도 넘을 거리를 수없이 왕복한다. 어떤 이들은 자녀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옆에 따라가며 손수건으로 땀도 닦아주고 비틀거리면 부축도 한다.
또 광장 안쪽에는 초를 봉헌하는 곳이 마련되어 있는데 봉헌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놓을 자리가 없어 옆쪽에 큰 불구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초를 들고 오는 사람들은 그 앞에 이르면 초에 불을 밝히고 기도를 드린 후 불구덩이에 초를 던지는데 시커먼 불꽃과 연기가 엄청나게 치솟는다. 초도 작은 초가 아니고 굵기가 팔뚝만 한, 1m도 넘는 초를 서너 개씩 들고 가는 사람도 있는데 그 행렬이 100m도 넘는다. 나는 간단한 기도로 미사를 마무리하고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프랑스 루르드(Lourdes) 치유의 성모님
루르드 성채 / 마사비엘 동굴 / 베르나데트 수비루 / 루르드 성모님
루르드(Lourdes)는 프랑스 남서쪽 피레네 산맥의 오트피레네(Hautes-Pyrenees) 주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위 절벽 위 마을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있는 요새화된 성채이다.
기원 전후 로마령이던 이곳은 로마가 외세의 침입에 대비하여 견고한 이 성곽을 건설했는데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성이었다고 하며, AD 8세기 프랑스 샤를마뉴(Charlemagne:프랑크왕국 2대 국왕)에 점령되면서 프랑스령이 되었고 이후 주로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858년 2월 11일 목요일, 당시 14살이었던 소녀 베르나데트 수비루(Bernadette Soubirous, 1844~1879)는 여동생 뚜아네뜨(Toinette), 친구 쟌느(Jeanne)와 같이 땔나무를 모으러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마사비엘 (Massabielle) 동굴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정체불명의 ‘부인’을 만났다고 한다.
베르나데트와 친구들은 마사비엘 동굴 근처에 있는 개울을 건너려고 신발을 벗었을 때 갑자기 폭풍우 같은 바람 소리를 들었는데 강변의 나무와 수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동굴에서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발끝까지 내려온 하얀 드레스에 하늘색 허리띠를 두르고, 하얀 베일로 머리와 어깨를 덮었으며 팔에는 묵주를 두르고 있고 발아래에는 노란 장미가 있는 모습으로 한 여인이 나타났다.
베르나데트는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묵주를 꺼내 기도를 바쳤다. 베르나데트가 묵주 기도를 끝마치자, 여인은 베르나데트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한 다음 순식간에 사라졌다.
베르나데트는 이 일을 자기만이 아는 비밀로 하려고 했지만, 돌아오면서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여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 비밀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그녀의 부모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부모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로 그녀와 그녀의 동생은 벌을 받았다고 한다.
3일 후, 베르나데트는 다른 두 명의 소녀와 같이 동굴을 다시 찾았는데 베르나데트가 동굴 벽면을 쳐다보며 황홀경에 빠진 모습을 보고 두 소녀는 몹시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녀들이 마을로 돌아왔을 때 베르나데트는 아직도 황홀경에 빠져 멍한 눈빛이 없어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2월 18일에는 베르나데트에게 “너는 앞으로 2주일 동안 매일 이 동굴에 오너라.”라는 말을 들었다.
부인은 이어서 “나는 너에게 이 세상의 행복은 약속하지 못하지만 다음 세상의 행복은 약속 하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경찰과 시당국까지 포함한 지역 전체의 관심이 이곳에 집중되었다. 부모와 경찰은 베르나데트가 더는 마사비엘 동굴로 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로 둘러막고 조치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계속 동굴을 찾았다.
아홉 번째 발현 때는 ‘샘에 가서 물을 마시고 몸을 씻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베르나데트가 파낸 자그마한 샘물이 아직도 메마르지 않고 엄청나게 많은 양이 솟아나오는 기적의 샘물, 루르드의 샘물이다.
며칠 후 밤중에 베르나데트는 다시 어둠을 틈타 동굴 건너편에 겨우 도착하였다.
동굴 주위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강가에 무릎을 꿇고 동굴을 바라보았는데 잠시 후 베르나데트는 부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베르나데트는 성모님의 모습을 흰옷에 파란색 허리띠를 두르고, 하얀 베일로 머리를 감쌌으며 팔에는 묵주가 있고 발아래에는 노란 장미가 있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성모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베르나데트의 물음에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Immaculata Conceptio)’라고 밝히시고, ‘회개하고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메시지를 남기셨다고 한다.
얼마 후 부활절 날, 베르나데트를 관찰한 의사는 그녀가 넋이 나간 상태에 빠졌을 때, 촛불에 손을 뻗었는데도 화상을 전혀 입지 않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 성모님 발현과 기적의 샘물 소식이 방방곡곡에 알려지면서, 온갖 종류의 병을 앓는 환자들이 대거 몰려와 이 샘물을 마시거나 몸에 뿌렸고 그 후 수많은 기적이 보고되었다. 그들 가운데 7명은 1860년 베르게(Berge) 교수에 의해 어떠한 의학적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샘물을 통해 기적적으로 치유된 것으로 인정받은 첫 번째 환자는 사고 후 오른손이 기형으로 변했던 여성이 멀쩡하게 나은 것이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던 교회는 전국적인 확인공세에 직면하자, 1858년 루르드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발족하기로 하였다. 루르드가 속해있던 따르브(Tarbes)의 주교 로렌스는 신학자, 과학자, 의학자 등으로 구성된 루르드 조사위원회를 발족하였고 1862년 로렌스 주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천주의 어머니께서 베르나데트에게 발현하신 것은 진실이다.”라고 발표하였다. 곧이어 성당이 세워지고 순례자들 중 병자들을 위한 병원과 순례자들의 편의시설이 늘어났다. 1862년 교황 비오 9세는 그 지역 주교에게 권한을 부여하여 루르드의 성모를 공경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교황 베네딕토 15세, 비오 11세, 요한 23세는 주교 시절에 루르드를 찾았으며, 비오 12세는 교황 때 루르드를 찾았다. 비오 12세는 또한 루르드의 성모 발현 100주년을 기념해 회칙 《루르드의 성지 순례》(Le Pelerinage de Lourdes)를 발표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루르드를 총 세 번 방문하였고 베네딕토 16세는 2008년 9월 15일 루르드의 성모 발현 150주년을 맞아 루르드를 찾아 미사를 거행하였다.
베르나데트는 1866년 느베르(Nevers) 수녀원에 들어갔고, 1879년 4월 16일 35세의 나이에 지병인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1925년 6월 14일에 복녀품에 올랐고, 1933년 12월 8일에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諡聖) 되었다. 사후 그녀의 시신이 조금도 부패하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다.
시골소녀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루르드의 성모가 발현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진 결과, 루르드는 매우 중요한 가톨릭의 성지 순례 장소 가운데 한 곳으로 탈바꿈하였다. 오늘날 루르드에는 약 1만 5천 명의 주민이 살고 있지만, 매년 약 5백만 명의 순례자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약 270채의 숙소가 있는 루르드는 프랑스에서 파리(Paris) 다음으로 가장 많은 숙소를 보유한 도시이다.
루르드는 질병의 치유를 위해 찾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선사하고, 동시에 회개와 보속을 통한 내적 치유를 만들어내는 순례지이기도 하다. 루르드(Lourdes)는 멕시코의 과달루페(Guadalupe), 포르투갈의 파티마(Fatima)와 함께 세계 3대 성모발현성지(聖母發顯聖地)로 꼽힌다.
나는 스페인 여행을 마치고 남프랑스로 오느라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루르드를 가지 못한 것이 슬펐다.
피레네(Pyrénées) 산맥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을 이루는데 그 산맥 속에 작은 왕국인 안도라(Andorra) 공국이 있다.
당초 내 여행계획은 안도라왕국의 수도인 안도라라베야(Andorra la Vella)에서 2박, 루르드 가톨릭 성지에서 1박으로 세웠었는데 아프리카 모로코에서의 여행 일정이 두 배로 늘어나는 바람에 안도라와 루르드 성지 일정은 취소할 수밖에 없어서 몹시 아쉬웠다.
프랑스 파리 뤼드박 성당 ‘기적의 메달’(Notre-Dame de Paris/Médaille Miraculeuse)
카타리나 라부레 수녀님 시신 / 기적의 메달 / 뤼드박 성당
1830년 7월 18일, 프랑스 파리 자비의 수녀원 ‘사랑의 딸’회 소속의 카타리나 라부레(Catherine Laboure, 1806-1876) 수녀님에게 성모께서 발현하였는데 수녀원 소속의 뤼드박(Rue du Bac) 성당이었다.
수녀님이 뵌 성모님은 상아빛 부인복 위에 푸른 망토를 걸치고 머리에는 흰 베일을 쓴 모습이었다고 한다. 성모님께서는 지구 모양의 작은 구(球)를 딛고 계셨으며 양손을 내려뜨리고 계셨는데 귀한 보석으로 꾸며진 그 손에서 나온 빛줄기가 딛고 계신 그 구(球)를 향해 뻗혀 흐르고 있었다.
성모님께서 설명하시기를 ‘이 구(球)는 전 세계 특히 프랑스와 각 개인의 영혼을 나타내는 것’이며, 눈부신 빛줄기는 ‘나에게 구하는 이들에게 부어줄 은총을 상징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1830년 11월 27일 토요일 저녁 5시 30분 무렵, 두 번째로 발현하셨는데 발현 중에 타원형과 같은 후광이 복되신 성모님을 둘러싸기 시작했고 그 위부분에는 『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님, 당신께 의탁하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성모님은 수녀님에게 열심히 기도를 할 것과 위의 글이 씌어있는 메달을 만들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믿음을 갖고 메달을 몸에 지니거나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은총이 내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1949년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 살던 한 소년은 썰매를 타다가 나무에 부딪혀 뇌를 크게 다쳤는데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소년은 의식불명인 상태로 10일이나 있어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었다. 다급해진 소년의 어머니는 다니던 성당에 찾아가 신부님으로부터 메달을 하나 받아 누워있는 소년의 목에 걸어주었다. 성모마리아상이 새겨져있는 그 메달을 목에 걸어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이 의식을 되찾았다. 의사들이 놀라 소년의 뇌를 조사했더니 뇌 속의 손상부위가 깨끗이 사라져버린 것을 확인하고 이것은 ‘기적’이라고 놀라워했다고 한다. 소년은 3일 후 퇴원하여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 메달이 바로 뤼드박 카타리나 수녀님의 ‘기적의 메달’이었다.
70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카타리나 수녀님의 시신은 성당 안 유리관에 모셔져 있는데 수녀님의 시신은 전혀 부패되지 않고 가장 먼저 변하는(부패하는) 눈동자가 푸른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프랑스 라 살레트 ‘눈물의 성모님’(Our Lady of La Salette)
라 살레트 성모대성당 / 목동들에 발현하신 성모님 / 눈물의 성모님
1846년 9월, 프랑스 라 살레트의 시골마을에서 양떼를 돌보는 목동이던 11세의 막시망 지로(Maximin Giraud)와 15세의 멜라니 칼바(Mélanie Calvat)에게 성모님이 발현하신다.
눈부신 광채 속에 성모님은 장미로 둘러싸인 신발을 신었으며 순백색 드레스에 발끝까지 닿은 황금색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넓고 반듯한 소맷자락은 손끝까지 드리워졌고 어깨위에는 장미술이 달린 망토를 입고 있었다. 가느다란 목걸이엔 십자가가 달렸고 하얀 면사포를 쓴 머리위에는 가지각색의 장미로 꾸며진 빛나는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 여인은 우물가의 돌 위에 앉아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서 이렇게 알려주어라. 회개하고 잘못을 뉘우쳐서 하느님과 화해하라 내말을 들으면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말을 듣지 않으면 곧 재앙이 닥칠 것이다.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버티면 앞으로 7년 동안 큰 흉년이 들어 엄청난 기근이 올 것이다. 밀과 포도는 썩어 없어지고 가축들도 전염병으로 떼죽음을 당하고 역병이 창궐하고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아이들이 성모님을 만난 이야기는 라 살레트 성당의 주교님에게 전해졌지만 주교는 물론 어느 누구도 이 무시무시한 메시지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윽고 성모님의 말씀대로 흉년이 들고 1870년 보불(프러시아-프랑스)전쟁까지 터지자 그때서야 사람들은 라 살레트의 메시지를 기억하고 회개의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성모님이 앉아 눈물을 흘렸던 우물은 원래 물이 바싹 말라 있었는데 성모님 발현이후 물이 다시 솟아나왔고 그 물을 마시고 수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쳤다. 라 살레트의 성모 발현은 1848년 교황 비오 9세(Pio Ⅸ)에 의하여 공식 인정되었다.
보스니아 메주고리예(Međugorje) ‘치유의 성모님’
치유의 기적 / 메주고리예 성모님 / 메주고리예 성당
1981년, 동유럽 아드리아해 연안 발칸반도의 보스니아(Bosnia)에 살던 6명의 어린이들이 바위산 꼭대기에서 성모 마리아를 만난다.
맨 처음, 『미르야나 드래지세빅』(16세)과 『이빈가 이반코빅』이 포드브르산에서 전방 2,3백 야드쯤 되는 지점에 밝게 빛나는 사람의 모습을 보았으나 그들은 자기들에게 성모님이 나타나실 리가 만무하다는 농담을 하며 마을로 내려왔다. 하지만 다음날 『이빈가』 『미르야나』 『마리야 파블로빅』 『비카 이반코빅』 『이반 드래지세빅』과 『야코브콜로』 등 6명의 청소년들이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메주고리예의 여섯 어린이들은 그들이 목격하기 시작한 발현이 15년이 넘도록 지속될 줄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발현 역사 중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고 또 매일 이루어져 횟수로도 벌써 5000회가 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교황청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순례객들의 방문은 허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매년 수만 명의 순례자들이 찾는 성모발현성지이다.
이 메주고리예 성모님의 메시지는 인류가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하느님의 징벌을 피하기 어렵다는 내용으로 인류가 회개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성모님은 아이들에게 수차례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나의 아들 예수님께 대한 믿음, 즉 너희들의 그 믿음을 널리 전파하도록 나는 너희를 부르고 있다. 성령의 비추임을 받는 나의 사도인 아이들아, 그 믿음에 대하여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도 하지 않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너희의 믿음을 전하여라.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사랑의 은총을 받기 위하여 아주 많이 기도해야 한다. 즉 사랑은 믿음의 표시이기 때문이란다. 그리하면 너희들은 나의 사랑의 사도가 될 것이다..... ”
<이하 생략>
성당 앞에 세워져 있는 십자고상은 치유의 기적을 보이는데 청동으로 만든 예수상의 무릎 근처에서 물방울이 생기는데 이것을 휴지로 닦아(묻혀) 아픈 부위에 바르면 치유가 되는 기적을 낳는다고 한다.
프랑스 퐁멩(Pontmain) ‘우리들 희망’ 성모님
유젠(남 12세), 요셉(남 10세), 잔 마리(여 9세), 프랑크와즈(여 11세) / 요셉신부 / 퐁멩성모님
1871년 1월 추운 겨울저녁, 10살의 요셉 바르바데트(Joseph Barbadette)와 12살의 유젠(Eùgene Barbadette)은 창고에서 아버지의 일은 돕고 있었는데 유젠은 밖을 내다보려고 창가로 갔다.
별들로 가득 찬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웃 지붕 위 하늘 한 곳에는 실제로 별들이 보이지 않았으며 갑자기 아름다운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부인은 황금빛 별들로 뒤덮인 파란 색 가운을 입었고 머리에는 황금왕관과 검은 색 베일을 쓰고 있었다.
어른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마침 그때 그 곳 학교의 선생이었던 비탈렌(Vitaline) 수녀가 오게 되었는데 그 수녀 역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데리고 온 3명의 학생들 중 9살 된 잔느-마리 르부세(Jeanne-Marie LeBosse)와 11살 된 프랑크와즈 리셔(Francoise Richer) 두 소녀는 도착하자마자 요셉과 유젠이 설명한 것과 똑같이 성모발현을 목격하고 기쁨을 나타냈지만, 가장 나이 어린 학생 한 명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유진이 아버지와 동생 요셉을 불렀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반면 요셉은 ‘오! 아름다운 부인!’ 하고 외치며 부인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 부인은 황금 빛 별이 박힌 긴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엔 검은색 면사포를 쓰고 그 위에 붉은색 줄무늬가 있는 금관을 쓰고 있었으며 발에는 황금색 리본이 달린 푸른색 신발을 신고 있다. 기적의 메달에 있는 것처럼 팔을 아래로 내리고 있는 모습이다. 어머니 역시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수녀님들을 불러 사실 확인을 부탁하였지만 그녀들도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소문은 삽시간에 마을 전체에 퍼져 마을 주민 거의 모두가 바르베데트네 광문 앞에 모여들었다. 본당 신부도 와있었다. 거기 모인 이들 가운데 유진, 요셉, 그리고 그들 또래인 9세의 잔느 마리, 11세의 프랑수아즈 네 명 만이 성모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본당 신부의 권고로 모든 이가 묵주기도를 바치기 시작했을 때 성모님의 모습은 더 크게 되었으며 별의 수도 늘어나 성모님의 옷과 주위를 장식했다. 묵주기도 끝에 마니피캇(Magnificat)을 노래할 때는 약 1미터 넓이의 크고 평평한 흰색 띠가 성모님 발아래 펼쳐졌다. (마니피캇:성모찬가)
그러고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쓰는 듯 황금빛 글자가 그 띠 위에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네 명의 어린이들은 띠에 나타나는 글자를 한 자씩 읽었다. ‘얘들아, 끊임없이 기도하여라.’ 발현 장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을 통해 전해 듣고 있던 사람들이 성모 호칭 기도를 드리는 동안에는 ‘하느님께서 곧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라는 글자가 나타났다고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읽었다. 모든 이들이 감격에 젖어 성가를 부르고 있는 동안 ‘내 아들은 너희의 기도를 기꺼이 들을 것이다.’라는 글자가 또 나타났다.
처음 성모발현이 있은 후 두 달이 지난 1871년 3월 성모발현에 대한 조사가 정식으로 시작되었으며, 같은 해 5월 라발교구 주교 디오세스(Diocese)와 위카르(Wicart)는 어린이들의 증언을 문제 삼았지만, 신학자들은 세세한 부분의 검증을 통해 더 많은 조사가 계속되었는데 신뢰 할 만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러한 조사결과에 만족한 디오세스 주교는 성모님 발현 첫 돌을 축성했고, 1872년 2월 어린이들에 발현한 분이 성모 마리아가 틀림없다고 선언했다.
성모발현 당시 10살이었던 요셉 바르바데트는 ‘원죄없이 잉태하신 마리아수사회(修士會)’(Congregation of the Oblates of Mary Immaculate)의 사제가 되었으며 당시 12살이었던 유젠은 퐁펭교구의 사제가 되었다. 유젠 사제는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목격했던 당시 11살이었던 프랑크와즈 리셔(Francoise Richer)를 가정부로 택하여 성모발현 증명에 도움을 받았으며 당시 9살이었으며 나중에 수녀가 된 잔느-마리 레보세(Jeanne-Marie Lebossé)도 증인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아일랜드 노크(Knock) ‘치유의 성모님’
노크 마리아 성당 / 성모발현 모습 / 노크의 성모님
1879년 8월 21일 아일랜드의 녹크(Knock)에서 열다섯 살 난 마거릿 번, 메리 맥룰린이 성모의 발현을 목격했다. 저녁 7시 30분경, 노크 마리아 성당 남쪽 박공벽(牔栱壁)에서 발현하셨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초저녁이었으나 발현하신 분들의 모습은 전혀 비에 젖지 않으신 채로 나타나셨다. 목격자들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박공벽: 세모난 지붕의 측면
하늘에서 빛나는 이상한 광채를 보게 되었는데 그 광채 속에는 마리아와 성 요셉 그리고 주교복장의 한 인물이 있었다. 복되신 동정녀는 흰 옷을 입고 계셨고, 크고 찬란한 화관을 목에 두르셨다. 그녀의 손은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들어 올려져 있었고, 눈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 오른편에는 마리아를 향하여 머리를 기댄 성 요셉이 있었고, 왼편에는 복음사가 성 요한이 서 있었는데, 그는 주교복장을 하고서 왼손에는 책을 잡고 오른손은 마치 설교할 때처럼 치켜들고 있었다. 성 요한 왼편에 제대가 있었고, 그 위에는 십자가 하나와 8주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양 한 마리가 있었다. 제대 뒷편이 되는 박공벽은 온통 빛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두 시간 동안 계속된 발현동안 14명의 동네사람들이 그것을 목격했고 비가 오는데도 발현한 인물들의 모습과 이웃사람들이 서 있는 자리는 젖지 않았다.
특이한 것은 다른 곳과 달리 이곳 노크의 성모님은 아무런 메시지도 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치유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정밀히 검사하는 보건국도 있다고 한다. 이보다 더 큰 기적은 놀라운 영적 치유에 대한 경험이라고 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9월 30일에 이 성지를 방문하여 성모발현 백주년을 기념하셨다.
“1879년 8월 21일, 그 은총의 날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몸과 마음이 부자유스런 수많은 환자들과 고난 받는 사람들이 천주의 모친께서 우리를 천주 성자께 인도해 주시리라는 신뢰 때문에 치유되었고, 믿음으로 큰 위로와 위안을 받았습니다.”
벨기에 보랭(Beauraing) ‘황금 심장의 성모님’
보랭 수녀원 / 보랭의 성모님 / 성모알현 아이들
벨기에 보랭에서 서른세 번에 걸쳐 발현한 성모 마리아는 1932년 11월에서부터 1933년 1월까지 9~15세의 어린이 다섯 명에게 발현하였다. 그들은 자매인 앙드레 드쟝브르(Andre Degeimbre 14세)와 질베르트 드쟝브르(Gilberte Degeimbre 9세), 그리고 또 다른 3남매인 페르난드 브와쟝(Fernande Voisin 15세), 질베르트 브와쟝(Gilberte Voisin 13세), 알베르 브와쟝(Albert Voisin, 11세)이다.
처음에 아이들은 너무 놀라 도망가고 숨었으나 나중에는 성모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의 진술에 따르면, 순백의 옷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왕관을 쓴 아름다운 부인이 구름을 타고 나타나 자신을 원죄 없이 잉태된 동정녀라고 밝혔으며 이곳에 많은 사람이 순례를 오도록 성당을 지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부인은 또한 아이들에게 “기도하여라. 기도하여라. 많이 기도하여라.”라고 말하면서 두 팔을 펼쳤는데 가슴에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심장이 드러나 보였다고 한다.
마지막 발현 때, 성모 마리아는 어린이들 각자에게 따로 말하였다.
앙드레 드쟝브르에게는 “나는 천주의 성모이며 하늘의 모후이다. 항상 기도하여라. 잘 있어라.”라고 말하였다. 질베르뜨 브와쟝에게는 “나는 죄인들을 회개시키겠다. 잘 있어라.”하고 말하였다. 알베르트 브와쟝과 질베르트 드쟝브르에게는 단순히 “잘 있어라.”라고만 말하였다. 페르난드 브와쟝에게는 다음과 같은 문답을 나누었다. “너는 나의 아들을 사랑하느냐?” “예.”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너는 나를 위해 너 자신을 희생하라.” 그리고 성모는 작별의 표시로 페르난드에게 황금빛으로 빛나는 자신의 성심(심장)을 보여주며 “잘 있어라.”하고 말한 후, 사라졌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가 발현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세계 각지에서 순례자들이 벨기에 남부에서 가난하고 작은 마을인 보랭에 모여들었고, 기적적으로 질병이 치유된 사례가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보랭에서의 성모 발현은 1949년 교황청에서 공식으로 인가하였다.
벨기에 바뇌(banneux) ‘치유의 성모님’
기적의 샘물 / 바뇌성당 / 동생을 돌보는 마리에트 / 바뇌 성모님
‘바뇌(Banneux)의 성모’는 벨기에 동부 리에(Liege)주에 있는 바뇌에 살았던 가난한 집 7남매 중 맏딸인 12세 소녀 마리에트 베코(Mariette Beco)에게 성모마리아께서 1933년 1월 15일부터 3월 21일까지 8번에 걸쳐 나타나셨던 성모발현을 가리키는 말이다.
마리에트는 그녀의 가족과 지도신부님에게 자신을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라고 자신을 밝힌 순백의 옷을 입은 아름다운 부인을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그 부인은 고개를 약간 왼쪽으로 갸우뚱하면서 합장한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있었으며, 마리에트에게 “나는 고통을 받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왔다. 나를 믿어라. 나도 너를 믿겠다.”라고 말하였다. 성모님은 마리에트를 작은 샘이 있는 곳까지 안내한 후, 이 샘을 치유의 샘이라고 부르며 “이 샘은 모든 백성들과 병자들을 위해서 보존되어 왔단다.”라고 말하였다.
이 치유의 샘이 있는 곳은 시간이 흘러도 수많은 순례자가 방문하고 있다. 오늘날 작은 샘은 매일 엄청난 양의 물을 산출하고 있으며 수많은 기적적인 치유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마리에트의 환시 사례는 1935년부터 1937년까지 벨기에 주교단이 공식적으로 조사하였다. 주교단이 작성한 보고서는 더 심층 높은 조사를 위해 로마에 제출되었다. 1942년 5월 리에주 교구장 케르크호프스 주교는 성모 발현의 신빙성을 처음으로 승인하였다. 1947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 성모 발현에 대한 공식 승인이 내려졌다.
성모 발현 이후, 마리에트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된 다른 성모 발현 목격자들과는 달리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며 다른 일반인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 밖의 수많은 성모발현>
그 밖에도 수많은 성모님 발현이 일어나서 보고되고 있지만 정식으로 바티칸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정을 받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의 예도 있는데 1985년 6월 30일, 전남 나주의 윤홍선 율리아(1947년생/당시 50세)씨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성모상(聖母像)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가하면 피눈물이나 향유(香油)가 흐를 때도 있고, 석고로 된 성모상이 움직이기도 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또, 율리아 자신의 몸에서 진한 장미향이 날 때도 있는 등 수많은 기적에 대하여 주변사람들의 증언이 수도 없이 이어졌다. 뿐더러 세상의 온갖 고통, 특히 낙태의 고통을 대신 보속하는 육신의 고통 등의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이러한 현상 중에 성모님으로부터 수많은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마침내 성체의 기적까지 일어났는데 입속에 넣은 성체와 성혈(밀떡과 포도주)가 진짜 살과 피가 되는 기적도 일어난다. 수많은 성당 신부님들이 직접 방문하여 목격한 후 거짓이 아님을 증언하기도 했지만 교황청에서 파견하여 조사하고 한국가톨릭 중앙회에서 정밀 조사한 결과 일부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틀림없지만 하느님의 뜻과는 별개의 특이한 현상일 뿐이라며 성모발현의 기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한 예이지만 세계 곳곳에서도 이런 인정받지 못하는 기적의 사례들이 수도 없이 많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