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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가장 인상 깊었던 전시를 꼽자면 금호 미술관에서 열린 <김보희 작가 초대전>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민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관람하는 진풍경을 연출하며 전시 기간 내내 SNS에서 화제가 되었고, 전시가 종료되기 전 도록과 포스터까지 매진되는 바람에 몇 번이나 새로 제작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게다가 BTS의 멤버 RM이 전시에 다녀가면서 더 큰 이슈가 되며, 2018년 미국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방한했을 당시 두 나라 영부인의 기념사진 배경으로 진열되었던 그림까지 덩달아 주목을 받았다. 작가에게도 2020년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한 해였다.
김보희 작가는 이화여자대학교 미숙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작품 활동을 병행하며 2017년 퇴임까지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지난 40여 년간 자신의 삶이 주목하는 것들을 그려온 작가는 수묵과 채색 기법을 오가며 자연을 비롯한 다양한 대상을 화폭에 담아왔다. 김보희 작가의 작품은 동양화와 서양화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을 넘어서는 그녀만의 독특한 시점과 채색 스타일 덕분이다. 특히 지난해 금호미술관의 초대적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작가가 살고 있는 제주의 풍광을 청명하고도 신비스러운 초록색으로 표현했고, 생동하는 자연이 발산하는 초록 에너지가 팬데믹에 지친 사람달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는 평가다. 제주에 정착한 작가가 정원을 가꾸고 자연과 가까이 살면서 받은 초록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작품을 통해 관람객에게 전해진 것일까? 수많은 사람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준 제주의 풍광은 김보희 작가가 살고 있는 집과 그 근방의 자연이었다. 지금 김보희 작가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곳, 제주. 마크 테토가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 함께 제주의 자연을 경험했다.
M 작가님 안녕하세요? 작가님의 제주도 집과 작업실이 멋지다는 소문을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멀리까지 와주셔서 감사해요. 이곳은 남편과 제가 20년 전부터 가꾸어온 공간이에요. 제 작품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고요. 멋지게 봐주셨다니 고마워요.
M 실제로 와보니 더 멋진 걸요! 제주에는 어떻게 정착하신 건가요?
저희 부부가 결혼할 때만 해도 제주도가 신혼여행지로 인기가 최고였잖아요. 저도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왔던 게 제주도와 첫 인연이었죠. 그 후 결혼기념일마다 종종 여행을 왔는데 올 때마다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남편하고 노후에는 제주에서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다가 정말로 땅부터 사고 이주 준비를 시작한 거예요. 남편과 제가 은퇴하면 함께 내려와 살려고 했는데, 남편이 먼저 퇴직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좀 더 일찍인 20년 전 먼저 내려와서 집을 짓고 생활했어요. 저도 서울하고 제주를 오가며 생활하다가 제주에서 본격적으로 살게 된 지는 4년 정도 되었고요.
M 그림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어요?
저희 어머니가 원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는데 못 하셨대요. 그래서 미술에 대한 열정을 딸들에게 쏟으셨어요. 자녀 교육에 열정적인 분이셔서 그림부터 피아노까지 이것저것 다 가르치셨는데, 공부는 잘 못하고(웃음) 그림에 소질이 보이니까 중학교 때부터 홍익대학교 출신의 개인 과외 선생님에게 수업을 받도록 해주셨어요.
M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알아볼 정도로 재능이 있었나 봐요.
아주 작은 아이일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참 좋아했어요. 지금도 초등학교 시절 창경원에서 열린 그림대회에 참가했던 기억이 나요. 여러 초등학교 학생들이 모여서 한두시간 안에 그 안의 풍경을 그려서 제출하면 우위를 가려서 상을 줬죠. 그 정도로 규모가 있는 대회에서 상을 받으니 저도 그림 그리는 게 점점 재미있어졌고요. 어머니도 그런 제 모습을 보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M 어떤 그림을 좋아하셨어요?
어릴 때까지는 어떤 스타일 없이 그렸는데, 중학교 때 개인 과외 선생님이 동양화를 전공하신 분이었거든요. 그때 동양화에 입문하게 되고 먹을 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서예, 사군자까지 배웠는데 저랑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 전에는 크레용이나 수채물감 정도를 사용했다면, 동양화는 완전히 새로운 분야였죠. 붓을 잡는 법, 선 긋는법, 난을 치는 법에 모두 원칙이 있는데, 그냥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문인의 법도와 정신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M 그중에서도 특히 작가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게 있었다면요?
저는 다 좋았어요. 장래 희망이 선생님이었는데,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모든 걸 잘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풍경화, 정물화, 인물화, 산수화 다 좋아하고 그렸어요. 대학교 졸업 작품은 인물화였는데, 그 그림이 국전에서 특선했던 작품이에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은 가리지 않고 그렸던 것 같아요. 다만 당시에는 동양화에 채색을 하면 일본 그림처럼 보인다고 금기시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어요. 교수님께 제가 색맹이 아닌 이상 보이는 색들을 그리지 않을 수 없다고, 형체도 보이지만 색에 더 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반항하기도 했죠(웃음).
M 확고한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갖고 계셨나 봐요!
일부러 반항하려고 한 건 아니지만,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굴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까 말했던 국전에서 특선한 졸업 작품이 인물화라고 했잖아요. 그게 누드 작품이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국전에 누드를 내면 수상도 못 하고 그랬어요. 제가 그 그림을 그렸을 때 못마땅해하는 교수님들도 계셨는데, 저는 개의치 않고 마음 가는 대로 그렸던 것 같아요.
M 작가님의 시작은 동양화이지만 이제 서양화 기법도 많이 사용하시는 것 같아요.
서양화와 동양화로 분야를 구분하는 것은 좀 의미가 없다고 봐요. 아무리 서양화를 전공했다고 하더라도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한국적인 미감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으니까요. 서양화를 전공한 많은 작가가 동양화적으로 그림을 풀어가는 경우도 많이 봤고요. 저 역시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살면서 다양한 서양미술을 경험했기 때문에 동양화와 서양화의 경계에 서 있다고 봐야죠. 요즘처럼 동서양이 원활히 소통하는 시대에 서로의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저는 동양화로만 그려야지 이런 생각은 안 해요. 그런 생각이 이미 나의 그림을 억압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M 그래서 2가지 매력이 공존하는 작가님만의 그림체가 탄생한 것이군요!
그렇게 보였다니 기분이 좋네요. 동양화는 선으로 입체를 표현하기 때문에 어려울 수 있어요. 저도 처음엔 선으로 모든 걸 표현하라고 배웠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서양화 기법이 흔해지고 채색과 명암으로 입체를 표현하게 되더라고요. 하나의 스타일에만 익숙하던 분들에겐 좀 새로워 보일 수도 있어요.
M 재료는 주로 어떤 것들을 사용하세요?
물감은 동양화 물감을 써요. 신기하게도 동양화 물감하고 서양화 물감은 낼 수 있는 색이 달라요. 그 대신 동양화 물감은 한지에 잘 먹지만 캔버스에는 표현이 잘 안 돼요. 채색을 많이 하게 되면서 한지 대신 캔버스를 주로 사용하는데, 동양화 물감이 잘 먹지 않아서 애를 먹었어요. 그래서 정 안 되는 부분은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기도 하고 재료에 제한을 두지 않게 되더라고요.
M 그림의 대상은 작가님의 주변 환경인 거죠?
네, 제주도에 정착한 후에는 저희 집 정원이나 산책하는 제주도 풍경을 많이 담고 있어요. 여행에서 본 풍경도 기억해서 그려보기도 하고요. 이전에도 풍경화를 많이 그리긴 했지만, 제주도에 내려온 이후에는 특히 초록색을 많이 사용했어요. 저도 제가 초록색을 좋아하는지 그제야 알았다니까요(웃음). 지겨워지면 안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초록색이 너무 좋아서 자꾸 그리게 되네요.
M 집의 정원이 너무 아름다워서 감탄했어요.
작품에서 본 풍경이지만 직접 보니 새롭게 느껴져요. 20년 동안 가꾸었더니 이제 좀 집하고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 같아요. 저와 남편이 좋아하는 나무 스타일이 달라서 처음엔 의견 충돌이 잦았지만 절충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여기는 제주도에서도 남쪽이라 야자나무 같은 열대식물이 잘 자라요. 저는 언제부턴가 열대지방 식물이 좋더라고요. 이파리도 크고 싱싱하고 막 생명력이 느껴져요. 그래서 여행지에서 접한 동식물을 많이 그렸어요. 제 그림에 등장하는 여우원숭이 같은 동물들은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들이에요.
M 오늘 제주의 자연이 작가님에게도 새로운 작품 세계를 열어주고, 관객들에게도 좋은 에너지를 전달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앞으로도 제주의 초록 기운을 전달해주세요!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고민하고 그걸 하려고 노력하길 바라요. 무엇이든 해봐야 실력이 늘고, 자기만의 길을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면 동양화 기법도 꼭 배워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정말 새로운 세계가 열릴 거예요!
기획 심효진 기자 사진 김덕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