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열
2016년 9월 30일 오전 01:20 -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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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 각남면 죽바위...
각남면 녹명리(鹿鳴里)의 옛이름은 구만동(救萬洞)이라 하였다. 당시의 구만동은 지금의 신당동(新堂洞), 녹명 1동, 2동(鹿鳴 1洞, 2洞)이 합쳐서 한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한다. 어느해 큰 홍수가 일어나서 밀어닥친 급류가 세갈래로 갈라지면서 큰 내가 되어 마을이 지금처럼 세 동네로 갈라졌다고 한다.그때까지 이 동네를 구만동이라 부르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조 제 14대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길을 나누어 창녕, 영산, 밀양을 거쳐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쳐들어 왔다.구만동 앞에 있는 운정산(雲亭山)은 사방이 한 눈에 보이는 요지였다. 왜적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동민과 이웃마을 주민들은 이 산 속에 숨어서 성을 쌓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싸울 준비를 갖춘 후 왜적을 기다렸다.다행히 왜적은 이 곳에 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는 것을 모르고 지나쳐 북상하였다. 그곳에 숨어 있던 1만여 명이 목숨을 건졌다 하여 그 후부터 이 곳을 구만동이라 하였다 한다. 당시 성을 쌓기 위하여 날랐던 돌들이 지금도 산 밑 들판에 군데군데 흩어져 있고, 성지(城址)도 약간 남아 있다. 이 옛 성터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높이 20m 가량 되는 바위가 널따랗게 펼쳐져 있다.이 바위의 옛 이름은 죽바위(粥岩)인데 이는 죽을 넓은 그릇에 담아둬야 편하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죽바위(粥岩)로 불렀다.지금으로부터 300여년전 어떤 이승(異僧) 한 사람이 이 곳을 지나다가 바위를 보고 나무꾼에게 물었다. "이 바위가 잘 생겼는데 이름이 무엇이요?"하니 죽(粥)바위라 부른다고 하니. 이 말을 들은 이승(異僧)이 "이 곳은 장사(壯士)가 태어날 고장인데 장수가 어찌 죽을 먹고 힘을 쓰겠느냐"하며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대나무 한 그루를 구해와서 심어놓고 "앞으로는 죽암(竹岩)이라 부르시오"하고는 길을 떠났다.그로부터 이 바위를 죽암(竹岩)이라 부르게 되었고, 대나무는 수백 그루로 늘어갔다. 세상이 평온해지자 죽바위를 중심으로 하는 운정산에는 수풀이 우거지고 사슴이 마을 뒷산까지 내려와서 울게 되자 구만동을 녹명동(鹿鳴洞)으로 바꿔 불렀다 한다.
각남면 녹명리 죽바위 또한 신라 군사 주둔지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 20m의 널따란 바위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다. 신라가 가야를 치기 위해 설치한 서기정(西畿停)의 흔적을 설명해주는 유적이다. 바로 인근에 산성이 있고, 신당리에는 두야보부곡이 있었다고 기록에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