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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증산 성사께서 어느 날
진묵의 고사(故事)를 들려주셨다. 김봉곡(金鳳谷)은 조선시대 유학자이고 진묵(震黙)은 승려로서 둘은 친구였다.
“김봉곡(金鳳谷)이 시기심이 강한지라. 진묵(震黙)은 하루 봉곡으로부터 성리대전(性理大典)을 빌려 가면서도 ‘봉곡이 반드시 후회하여 곧 사람을 시켜 찾아가리라’ 생각하고 걸으면서 한 권씩 읽고서는 길가에 버리니 사원동(寺院洞) 입구에서 모두 버리게 되니라.
봉곡은 과연 그 책자를 빌려주고 진묵이 불법을 통달한 자이고 만일 유도(儒道)까지 통달하면 상대할 수 없이 될 것이고 또 불법을 크게 행할 것을 시기하여 그 책을 도로 찾아오라고 급히 하인을 보냈도다.
그 하인이 길가에 이따금 버려진 책 한 권씩을 주워 가다가 사원동 입구에서 마지막 권을 주워 돌아가니라.
그 후에 진묵이 봉곡을 찾아가니 봉곡이 빌린 책을 도로 달라고 하는지라. 그 말을 듣고 진묵이 그 글이 쓸모가 없어 길가에 다 버렸다고 대꾸하니 봉곡이 노발대발하는 도다. 진묵은 ‘내가 외울 터이니 기록하라’고 말하고 잇달아 한 편을 모두 읽는 도다. 그것이 한 자도 틀리지 않으니 봉곡은 더욱 더 시기하였도다.
그 후에 진묵이 상좌에게 ‘내가 8일을 한정하고 시해(尸解)로서 인도국(印度國)에 가서 범서와 불법을 더 익혀 올 것이니 방문을 여닫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고 곧 입적(入寂)하니라.
봉곡이 이 사실을 알고 절에 달려가서 진묵을 찾으니 상좌가 출타중임을 알리니라. 봉곡이 ‘그럼 방에 찾을 것이 있으니……’라고 말하면서 방문을 열려는 것을 상좌가 말렸으나 억지로 방문을 열었도다.
봉곡은 진묵의 상좌에게 ‘어찌하여 이런 시체를 방에 그대로 두어 썩게 하느냐. 중은 죽으면 화장하나니라’고 말하면서 마당에 나뭇더미를 쌓아 놓고 화장하니라. 상좌가 울면서 말렸으되 봉곡은 도리어 꾸짖으며 살 한 점도 남기지 않고 태우느니라.
진묵이 이것을 알고 돌아와 공중에서 외쳐 말하기를 ‘너와 나는 아무런 원수진 것이 없음에도 어찌하여 그러느냐’ 하니 상좌가 자기 스님의 소리를 듣고 울기에 봉곡이 ‘저것은 요귀(妖鬼)의 소리라. 듣지 말고 손가락뼈 한마디도 남김없이 잘 태워야 하느니라’고 말하니 진묵이 소리쳐 말하기를 ‘네가 끝까지 그런다면 너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를 면치 못하리라’ 하고 동양의 모든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옮겨갔도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동양이 서양보다 사상(思想)의 발전이 앞서 있었으나 이후로 동양의 사상은 퇴보하고 서양의 사상이 크게 발전하였다.
*김봉곡(金鳳谷․1575~1661):조선 인조 때의 유학자. 본관은 광산(光山). 본명은 동준(東準), 호는 이식(而式). 유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문인(門人)으로 4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인조반정 뒤에 의금부도사에 천거되어, 사헌부감찰. 양성현감, 한성판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척화에 앞장서는 한편 인조를 수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게 하였다. 그 뒤 세자사전, 사헌부지평, 의정부사인 등 여러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1년 정도 상운도찰방을 했을 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과 한문야학으로 여생을 보냈다. 유저(遺著)에 연남도(演男圖), 계몽편(棨蒙篇),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이 있음.
*진묵(震黙․1562 명종 17~1633 인조 11) : 조선의 승려. 이름은 일옥(一玉), 만경 불거촌(萬頃 佛居村) 사람으로서 7세에 전주(全州) 봉서사(鳳棲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석가의 소화신(小化身)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술이면 무엇이나 한정 없이 마시는데, 술이라 하면 안 마셨으나 곡차(穀茶)라면 마셨다고 한다. 그의 술잔을 다른 사람이 핥아보면 술맛은 없고, 단맛이 있었다고 한다. 신통이 자재(自在)하여 물 위를 걸어 다니고 땅 속으로 마음대로 들어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 그 자리에서 다 외고 책을 버렸다고 한다. 봉곡(鳳谷)김동준(金東準)과 우의가 깊었고 변산(邊山)의 월명암(月明庵)・전주의 원등사(遠燈寺), 대원사(大元寺) 등에 있다가 72세에 입적했다.
강증산 성사께서 어느 날 또 말씀하셨다.
“서양인 이마두(利瑪竇 :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동양에 와서 지상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다만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神明)을 서로 왕래케 하고, 그가 사후(死後)에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열었느니라. 이로부터 지하신(地下神)은 천상의 모든 묘법(妙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었노라.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라.”
그리고 이르시기를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天理)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신도(神道)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常道)가 어겨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도(道)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원시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佛)과 보살(菩薩)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劫厄)을 구천(九天)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삼십년을 지내다가 최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典憲)을 넘어 대도(大道)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에 드디어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년에 강세(降世)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
이것이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께서 인세에 대강(大降)하신 기록이다.
강증산 성사께서 가라사대
“위징은 밤이면 옥경에 올라가 상제를 섬기고 낮이면 당태종을 섬겼다 하거니와, 나는 사람의 마음을 뺐다 넣었다 하리라”고 하시니라.
동학가사에 세 가지 기운을 밝혀오니
말을 소ㆍ장(蘇秦, 張儀)의 웅변이 있고 앎은 강절(康節)의 지식이 있고 글은 이ㆍ두(李太白, 杜子美)의 문장이 있노라 하였으니 잘 생각하여 보라.
소진(蘇秦 ?∼BC 284)은 중국 전국시대 중후기 낙양(洛陽) 출신으로 생년은 미상이다. 자는 계자(季子)이고 진(秦)의 효공(孝公)이 위(魏)나라 출신 상앙(商鞅)을 등용하여 변법을 시행한 이후 진나라는 일약 제후국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하였다. 기존의 강대국 제나라와 신흥 강대국 진나라를 사이에 두고 주변 제후국들이 각자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내놓은 것이 이른바 ‘연횡’과 ‘합종’인데 ‘연횡’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장의라면 ‘합종’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소진이다. 1973년 장사(長沙)의 마왕퇴삼호한묘(馬王堆三號漢墓)에서 발굴된 『백서전국책(帛書戰國策)』에는 소진이 제나라의 민왕(재위 BC 300∼284)과 연나라의 소왕(재위 BC 311∼279)에게 보낸 서신과 헌책 등이 실려 있다. 소진은 연나라의 문후에게 6국 합종의 이익을 설득하여 합종책을 성사시켰다. 다시 조(趙)․한(漢)․위(魏)․제(齊)․초(楚)의 여러 나라를 설복하는데도 성공하여, 드디어 BC 333년 연나라에서 초나라에 이르는 남북선상의 6국의 재상이 되었고, 스스로 무안군이라 칭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이 때문에 동방으로 진출을 꾀하려던 진나라는 십수 년간 그 진출을 저지당했다. 그러나 그의 합종책은 장의 등이 헌책한 연횡책에 패배하여 실패하였다. 그 후 소진은 연나라의 관직에 있다가 다시 제나라에 출사했으나, 제나라 대부의 미움을 받아 암살당하였다. 소진은 진나라를 위해 연횡책을 썼던 장의와 함께 전국시대 책사의 1인자로 병칭되고 있다.
장의(張儀 ?∼BC 168)는 중국 전국시대 모사이다. 종횡가의 비조이며 위나라 사람이다. 합종책(合從策)을 제창한 소진과 더불어 귀곡선생에게서 사사하였다. 처음에 초나라에 가서 벽(璧)을 훔친 혐의를 받고 태형의 벌을 받은 뒤에 추방되었으나 제후에 대한 유세(遊說)를 계속하였다. 이후 소진의 주선으로 진(秦)나라에서 벼슬을 하게 되어 혜문왕의 재상이 되었다. 그는 연형책(連衡策)을 주창하면서 위․조․한 등 동서[횡(橫)]로 잇닿은 6국을 설득, 진을 중심으로한 동맹관계를 이룩하는 등 활약이 컸으나 혜왕이 죽은 후에는 실각하였으며 위나라로 피신하여 재상이 된 지 1년 만에 죽었다.
소진과 장의는 중국 전국시대 최고의 책사들로서 그들은 웅변으로써 전국시대 6국을 설득하여 가히 천하를 움직여 통합하였다.
소강절(邵康節 1011∼1077)은 중국 송대(宋代)의 유학자이다. 이름은 옹(雍)이며 자는 요부(堯夫)이고 강절은 그의 시호이다. 이정지(李挺之)에게 도가(道家)의 도서선천상수(圖書先天象數)의 학을 배워 신비적인 수리(數理) 학설을 세우고, 이에 의해 우주관과 자연철학을 설파하였으며 또 이를 기본으로 한 경륜(經綸)을 주장했다. 그는 「황극경세서」에서 역리(易理)를 응용하여 수리(數理)로써 천지만물의 생성변화를 관찰ㆍ설명하였는데 123진(辰)을 하루, 30일(日)을 한 달, 12개월을 1년(年), 30년을 1세(世), 12세를 1운(運), 30운을 1회(會), 12회를 1원(元)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1원(元)은 12만 9천 600년이고, 천지(天地) 우주는 1원(元)마다 한 번 변천하고, 만물은 이 시간적 순서에 따라 진보한다는 것을 밝혔다. 6권까지는 역(易)의 64괘(卦)를 원ㆍ회ㆍ운ㆍ세에 배당하여 요제(堯帝)의 갑진년(甲辰年)에서 후주(後周)의 현덕 6년까지의 치란(治亂)의 자취를 적고, 7~10권은 율려성음(律呂聲音)을 논하고, 11~12권은 동식물에 관해 논하였다.
이러한 소강절의 지식은 가히 천문ㆍ지리와 역사, 정치, 예술, 동식물학까지 통달하였다.
이백(李白 701∼762)은 중국 당(唐)나라 시인이다. 자는 태백(太白)이고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산둥(山東)·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四川省)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시대․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생활태도를 반영한 대표작으로는 「촉도난(蜀道難)」등이 있다. 이태백 시집 30권이 전한다.
두보(杜甫 712∼770)는 중국의 당대(唐代) 시인이다. 자는 자미(子美)이며 호는 소릉(少陵)이다.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고적(高適) 등과 사귀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그는 방랑을 하다가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백거이(白居易)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현재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이 전해지는데, 고체(古體) 399수, 근체(近體) 1006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태백과 두보의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속 깊이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기운이 있다.
그러므로 천하사에 뜻을 둔자라면 소ㆍ장의 웅변과 강절의 지식과 이ㆍ두의 문장이 주는 기운과 같이 설득할 수 있는 능력과 천지 우주에 이르기까지 관통한 지식과 상대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 비분강개케 하거나 웅지를 품게하는 기운을 사용할줄 알아야 함을 잘 알아 두라는 교훈이다.
사람들은 도(道)의 이치(理致)를
이야기하면 ‘그것이 내가 한평생 풍족하게 살아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미친 소리를 그만 두라’고 한다.
상제께서는 도(道)의 모습을 알려주기 위하여 두 가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 첫 번째 이야기
옛날에 어떤 탕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방탕하여 보낸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회과(悔過), 자책(自責)하여 “내 일생을 이렇게 헛되게 보내어 후세(後世)에 남김이 없으니 어찌 한스럽지 아니하리요. 지금부터라도 신선(神仙)을 만나서 선학(仙學)을 배우겠노라”고 개심(改心)하였다.
그러던 차에 탕자는 갑자기 심신(心身)이 상쾌하여지더니 돌연히 하늘에 올라가 신선(神仙) 한 분을 만났다. 그 신선이 “네가 이제 뉘우쳐 선학(仙學)을 뜻하니 심히 가상하도다. 내가 너에게 선학을 가르치리니 정결한 곳에 도장을 짓고 여러 동지를 모으라”고 일러주었다.
방탕자는 그 신선의 말대로 정신을 차리고 동지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과거 그의 방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과거 방탕만을 보았을 뿐 개심(改心)한 그를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는 겨우 몇 사람만의 응락을 받고 이들과 함께 도장(道場)을 차렸다. 그들이 도장에서 진심으로 기도를 올리던 중 어느 순간 갑자기 천상(天上)으로부터 채운(彩雲)이 찬란하고 선악(仙樂) 소리가 들리더니 그 신선이 나타나서 선학을 가르쳤다.
● 두 번재 이야기
“최풍헌(崔風憲)이라는 고흥(高興) 사람은 류 훈장(柳訓長)의 하인인데 늘 술에 취해 있는 사람과 같이 그 언행이 거칠지만 일 처리에 남보다 뛰어난지라 훈장은 속으로 그 일꾼을 아꼈도다. 훈장은 왜군이 침입한다는 소문에 민심이 흉악해지는 터에 피난할 길을 그에게 부탁하였으되 풍헌은 수차 거절하다가 주인의 성의에 이기지 못하여 ‘가산을 팔아서 나에게 맡길 수 있나이까’ 하고 물었느니라. 류 훈장이 기꺼이 응낙하고 가산을 팔아서 그에게 맡겼도다. 풍헌은 그 돈을 받아 가지고 날마다 술을 마시며 방탕하여도 류 훈장은 아예 모르는 체하더니 하루는 최풍헌이 죽었다는 부고(訃告)를 받고 뜻밖의 일로 크게 낙담하면서 풍헌의 집에 가서 보니 초상이 난지라. 그는 하는 수없이 그의 아들을 위로하고 ‘혹 유언이나 없었더냐’고 물으니 그 아들이 ‘류 훈장에게 통지하여 그 가족들에게 복을 입혀 상여를 따라서 나를 지리산(智異山) 아무 곳에 장사하게 하라’고 전하니라. 이 유언을 듣고 류 훈장은 풍헌을 크게 믿었던 터이므로 집에 돌아와서 가족에게 의논하니 다만 큰아들만이 아버지의 말씀을 좇는 도다. 사흘이 지나 모두들 운상하여 지리산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산상(山上)에서 ‘상여를 버리고 이곳으로 빨리 오르라’는 소리가 들리는지라. 모두 그 쪽을 바라보니 최풍헌이라. 모두들 반겨 쫓아 올라가니 그곳의 집 한 채에 풍부한 식량이 마련되어 있느니라. 다시 최풍헌을 따라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그가 가리키는 대로 내려다보니 사방이 불바다를 이루고 있는지라. 그 까닭을 물으니 그는 ‘왜병이 침입하여 마을마다 불을 지른 것이라’ 이르도다.”
강증산 성사께서 가라사대
“나의 일은 여동빈(呂洞賓)의 일과 같으니라. 그가 인간의 인연을 찾아서 장생술을 전하려고 빗장사로 변장하고 거리에서 ‘이 빗으로 머리를 빗으면 흰머리가 검어지고 굽은 허리가 곧아지고 노구가 청춘이 되나니 이 빗값은 천 냥이로다’고 외치니 듣는 사람마다 허황하다 하여 따르는 사람이 없기에 그가 스스로 한 노구에게 시험하여 보이니 과연 말과 같은지라. 그제야 모든 사람이 서로 앞을 다투어 모여오니 승천하였느니라”하시니라.
이와 같이 강증산께서 인세에 대강하셔서 내놓은 도는 불로장생술을 전하여 신선이 되게 하려는 것이지만 여동빈 고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상 사람들은 허망하다하여 믿으려 하지 않다가 세상에 그 일 나타나면 그때라서 욕심이 나서 달려오지만 이미 때는 늦으리니 어찌하리오.
“보라, 선술(仙術)을 얻고자 십 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그의 성의(誠意)로 하늘에 올림을 받은 머슴을! 그는 선술을 배우고자 스승을 찾았으되 그 스승은 선술을 가르치기 전에 너의 성의를 보이라고 요구하니라. 그 머슴이 십 년 동안의 진심갈력(盡心竭力)을 다한 농사 끝에야 스승은 머슴을 연못가에 데리고 가서 ‘물위에 뻗은 버드나무 가지에 올라가서 물위에 뛰어내리라. 그러면 선술에 통하리라’고 일러주었도다. 머슴은 믿고 나뭇가지에 올라 뛰어내리니 뜻밖에도 오색구름이 모이고 선악(仙樂)이 울리면서 찬란한 보연(寶煙)이 머슴을 태우고 천상(天上)으로 올라가니라.”
어떤 사람이 상제를 만나 뵈려고
상제께서 계신 곳으로 가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어 항상 다니던 길을 버리고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 가다가 마침 그 길을 걸어가고 계신 상제를 만나 뵈옵고 기뻐하였다. 그 사람은 상제를 반기면서 “이 길에 들어서 오지 않았더라면 뵈옵지 못하였겠나이다”고 여쭈자 상제께서 가라사대
“우리가 서로 동․서로 멀리 나누어 있을지라도 반드시 서로 만나리라. 네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나를 좇고 금전과 권세를 얻고자 좇지 아니하는도다. 시속에 있는 망량(魍魎)의 사귐이 좋다고 하는 말은 귀여운 물건을 늘 구하여 주는 연고라. 네가 망량을 사귀려면 진실로 망량을 사귀라”
고 이르셨도다.
그 사람은 이러한 상제의 말씀을 듣고 종도들의 틈에 끼어서도 남달리 진정으로 끝까지 상제를 좇았도다.
*망량(魍魎) : 산이나 물ㆍ나무 따위의 정기(精氣)가 어리어 된 도깨비. 이매망량(魑魅魍魎)의 준말.
도주께서 어느날 고사 한 가지를 들려주시니 다음과 같다.
『옛날 김모(金某), 박모(朴某)라는 두 노인이 친하게 살다가 하루는 김모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와 말하기를 "내가 염라국(閻羅國)에 가니 아직 올 때가 아니라 하며 다시 돌아가되 반드시 오늘 오시(午時)까지 한 사람을 보내라 하였으니 오늘 오시(午時)에는 부득이 이 앞 다리 위에서 행인(行人) 하나를 떨어뜨려 죽일 수밖에 없노라." 하고 다리 위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기다리니라.
이때 한 아이밴 부인이 유아(幼兒)를 업고 앞을 지나갔으나 김모는 결행(決行)하지 못하고 다시 와서 "늙은 목숨 하나 살려고 젊고 어린 세 목숨을 죽일 수 없노라."하며 스스로 자결하므로 장사를 지내니라.
다음날 김모가 박모에게 현몽(現夢)하여 "나의 선행을 염라대왕이 가상히 여겨 모산(某山) 산신(山神)으로 임명하여 부임하게 되었으니 그대가 찾아오면 산삼(山蔘)은 얼마든지 주리라." 하니라.
그 후에 박모가 찾아가자 "내가 산신(山神)이 되면 산삼(山蔘)은 임의로 하는 줄 알았더니 물건에는 각기 주인이 정하져 있어 불가능(不可能)하도다.
그대에게 대죄(大罪)를 지었노라." 하며 사과하였다 하니 알아두라.』
세상에서 우순(虞舜)을
대효(大孝)라 일렀으되 그 부친 고수(瞽叟)의 이름을 벗기지 못하였으니 어찌 한스럽지 아니 하리오.
● 진정한 대효
우순의 대효(大孝)에 관한 구절은 『맹자(孟子)』, 「이루장구상(離婁章句上)」편에 나온다.
舜 盡事親之道 而瞽瞍底豫 瞽瞍底豫而天下化
순 진사친지도 이고수저예 고수저예이천하화
瞽瞍底豫而天下之爲父子者定 此之謂大孝
고수저예이천하지위부자자정 차지위대효
순임금이 어버이 섬기는 도를 다하심에 고수가 기뻐하도다. 고수가 기뻐하는 것으로 천하를 교화하고, 고수가 기뻐하는 것으로 천하가 부자(父子)되는 것이 정해지니, 이것을 대효라 이른다.
이와 같이 세상 사람들은 순임금이 그의 부친 고수가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섬기는 도리를 다하였으므로 대효라고 이르고 있다.
그러나 시경(詩經)의 「우서(虞書)」 요전(堯典)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帝曰兪予聞如何
제왈유여문여하
岳曰 瞽子 父頑 母嚚 象傲 克諧以孝 烝烝乂不格姦
악왈 고자 부완 모은 상오 극해이효 증증예부격간
제[堯]께서 이르기를 그러하다. 내 이미 들은 바 있으니 어떠하뇨. 악[四岳]이 이르되 소경의 아들이니 애비는 완악(頑惡)하며 어미는 간특하고 상(象)이 교만한데도 능히 고르게 하되 효로써 대하고 나아가 다스리어 간사한 데에 이르지 않게 하나이다.
『시경』에는 이와 같이 순은 효도를 다하나 고수를 완악한자라고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였다.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순(舜)의 아버지를 고수(瞽瞍)라고 부른다. 마음속에 마땅히 지녀야 할 도덕과 신의의 도리가 없는 것을 완악(頑惡)이라 한다.”라고 하여 순의 부친 고수를 부도덕하고 신의가 없으며 고집이 세다고 악평을 하고 있다. 자식이 대효(大孝)인 이유는 완악하고 부도덕한 아비를 잘 받들어서 대효가 되었으니 우순의 대효에는 언제나 그 아비의 부도덕함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완악한 자의 머리로 ‘고수’라고 욕을 하니 어찌 아비를 욕 먹여 효자가 된 자를 대효(大孝)라 일컫겠는가.
그러므로 우순이 진실로 부모에게 효를 다하였다고 하지만 그 효도의 반대에 붙어 있는 부모의 오명을 벗겨 드리지 못한 점이 한스러운 일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진정한 대효(大孝)란 부모와 선대 조상의 이름까지 널리 빛나게 할 수 있어야 진정한 대효라 할 것이다.
“예로부터 생이지지(生而知之)를 말하나 이는 그릇된 말이라.
천지의 조화로 풍우를 일으키려면 무한한 공력이 드니 모든 일에 공부하지 않고 아는 법은 없느니라. 정북창(鄭北窓) 같은 재주로도 입산 3일 후에야 천하사를 알았다 하느니라”고 이르셨도다.
● 정북창 설화(說話)
정북창(鄭北窓)은 조선 명종 때의 학자․관리․도인(道人)인 정렴(鄭磏)을 말한다.
정렴의 자는 사결(士潔)이며 호는 북창(北窓)이며, 일명 용호대사(龍虎大師)라고 도 하였다.
정북창은 어릴 적부터 마음을 가다듬어 신(神)과 통할 줄 알았고, 가까이는 동리 집안의 사소한 일에서 멀리는 나라 밖의 다른 나라의 풍토와 기후의 다른 점과 외국인의 말까지도 마치 귀신처럼 잘 알아 맞추었다 한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할 줄 알았고 또 대낮에는 그림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천재요, 그림자가 없는 귀신이었다는 세평을 들을 만하였다.
정북창에 관한 설화(說話)는 많이 있지만 그 중에 몇 가지를 소개 하자면 다음과 같다.
정북창이 14세에 부친 정순봉(鄭順朋)을 따라 중국 북경(北京)을 갔었는데, 이상한 기운을 바라보고 중국에 왔다는 유구(琉球 : 일본 오키나와에 있던 나라) 사람이 정북창을 보고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운명을 점쳤더니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중국에 들어가면 어떤 진인(眞人)을 만나게 될 것이다'고 하더니 당신이 참으로 그 사람이신가봅니다." 하고, 그 자리에서 배우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정북창은 유구말로써 주역(周易)의 요결(要訣)을 가르쳐주었다.
이리하여 외국에서 온 모든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앞을 다투어 찾아와 보았다. 북창이 각국의 말로 응대하니 사람들은 깜짝 놀라 이상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고 천인(天人)이라고 불렀다. 한 사람이 자기의 운명을 묻는데, 객관(客館)에서 품팔이로 땔나무를 나르는 사람이 그 앞에 서 있었다. 눈 익혀 보았더니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당신도 할 말이 있어서인가?" 하니, "그렇습니다." 하였다.
같이 말을 나누어 보니 음양(陰陽) 운화(運化)의 기이한 술법을 잘 통한 사람이었다. 북창이, "당신은 어찌하여 품팔이를 하는가?" 하니, "이렇게 살지 아니하면 저는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저는 촉(蜀)나라 사람입니다. 아무 해에는 아무 데로 가게 될 것입니다. 선생은 벌써 만물에 신통하여 무궁한 경지에 들어가셨으니, 「도덕경」(道德經)에 '문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의 일을 다 안다'고 한 말이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인가 봅니다." 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19세 때 국자시(國子試)에 뽑히고는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양주 괘라리(掛蘿里)에 살 곳을 정하고 있었는데, 중종 때에 장악원 주부(掌樂院 主簿)·관상감(觀象監)과 혜민서(惠民署) 교수(敎授)가 되었고, 후에는 포천현감(抱川縣監)이 되었다가 갑자기 벼슬을 버리고 떠나났다.
정북창은 천성이 술을 즐기어 두어 말[斗]을 마실 수 있었고 취하지도 않았다. 북창 정염은 스승도 없었으며, 또한 제자도 없었다고 한다. 언제나 스스로 깨닫고 터득하였다. 언젠가 말하기를, "성인은 인륜(人倫)을 중히 여기는데, 석가(釋迦)와 노자(老子)는 마음을 닦아 성불[見性]하는 것만 말하고 인사(人事)의 학문은 빠뜨렸다. 아마 석가와 노자는 대개는 같으면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하였다. 그리고 남과 더불어 말할 적에는 공자(孔子)의 학으로 인륜(人倫)을 행하였다고 하니 그는 유불선에 두루 통달한 도인(道人)이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가 생전에 지은시에는 그 웅장한 포부가 잘 나타나 있다.
一生讀破萬卷書, 一日飮盡天鍾酒.
일생독파만권서 일일음진천종주
高談伏羲以上事, 俗說往來不掛口.
고담복희이상사 속설왕래부괘구
顔子三十稱亞聖, 先生之壽何其久.
안자삼십칭아성 선생지수하기구
일생 동안 만 권의 책을 독파하고
하루에 천 잔 술을 마시었네.
복희씨(伏羲氏) 이전 일을 고고하게 담론하고
속설은 입에도 담지 않았네.
안자(顔子)는 삼십을 살아도 아성(亞聖)이라 불리었는데,
선생의 나이는 어찌 그리 길더뇨?
그리고서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나니 북창의 나이는 44세였다.
북창이 44세에 죽은 사연에 관한 일화가 전해져 온다.
친구 중 한 사람이 북창을 찾아와서 말했다.
“내가 44세가 되는 모월 모일 죽는다는데, 무슨 좋은 수가 없겠는가?”
그러자 북창이 되물었다.
“그렇게 죽고 싶지 않는가?”
친구는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북창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그러면 모월 모일 어느 마을 어느 곳에 가면 수레를 끄는 노인이 한 분 계실 것이네, 자네는 아무 이유도 묻지 말고 그냥 그 노인에게 절을 하게나.”
이 말을 들은 친구가 모월 모일 그 장소에 가니 마침 수레를 끄는 노인이 보이길래 보자마자 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인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는 줄곧 따라다니며 절을 하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노인이 뒤를 돌아보며 그 친구를 가만히 보더니 말했다.
“북창이 보내서 왔군.”
그 후 그 친구는 44세를 넘기고도 건강히 살았지만, 북창은 44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북창이 친구와 수명을 바꾸었다고들 말을 한다.
그리고 정북창은 충청남도 아산군 송악면 솔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계수(季嫂)의 아들인 조카는 사랑하지만 정작 자기 자식 둘은 사랑하지 않아서 아내가 불평을 하였다.
정북창이 금강산의 산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밤에 겹으로 병풍을 두르고서 관을 쓰고 머리를 빗질하는 것도 폐하고, 밖을 내다보지도 않은 채 하루종일 고요히 앉아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언젠가 절의 중이 찾아와 질문을 하였는데, 북창이 얘기를 나누다가 “오늘 집에서 일하는 머슴이 술을 갖고 올 것이다”라고 말하다가 갑자기 놀라면서 “아깝구나. 오늘은 술을 못 먹게 생겼구나!” 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집에서 머슴이 도착하여 말하기를, 술항아리를 지고 오다가 고갯마루 밖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항아리를 깨뜨렸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머슴은 아들이 지금 죽게 되었으니 빨리 집으로 가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정북창은 “그 아들은 내가 혼인하기 전에 죽인 두 이방이 복수하려고 나에게서 태어난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오히려 그 자리를 피하여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지방 고을 관찰사로 부임한 적이 있었다. 그 고을에 이방(吏房) 둘이 있었는데 이들은 행정을 하면서 부정한 일로 인하여서 고을에 원성이 자자하였다.
정북창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그들에게 몇 차례 경고를 주었지만 방자한 행동이 고치지 않고 오히려 정북창을 모함하려 들었다. 그들의 진상을 조사해본 결과 이미 전임 관찰사도 모함하여 쫓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들의 수법은 교묘하여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북창의 눈은 속일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북창은 마침내 그들을 참형으로 다스려 죽였다. 그런데 두 이방은 정북창을 극도로 원망하고 복수에 찬 두 눈을 부릅뜨고 죽었다.
얼마 후에 정북창 장가를 가서 쌍둥이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아버지를 노려보는 두 아들의 눈빛이 얼마 전에 처형시킨 이방들의 눈빛과 똑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쌍둥이 아들을 얻었다고 경사라고 하였지만 북창은 내심 반갑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미 그 아들들이 복수를 하러온 이방임을 알았기에 조카는 귀여워했어도 자기 자식은 귀여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두 아들이 어느듯 18세가 되어 과거에 급제를 하여 돌아왔지만 정북창은 금강산에 들어가 나와 보지도 않았다. 과거 급제 얼마후 두 아들이 갑자기 깊은 병이 들어 함께 사경을 헤메자 하인이 급히 북창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자리를 피하고 말았던 것이다.
두 아들이 죽어 장사를 지냈는데 그날 밤 하얀 소복을 입은 두 아들이 무덤에서 나오더니 “앗다! 그놈 참 지독한 놈이다. 우리가 원수를 갚으러 아들로 왔는데도 저렇게 무심하게 대하니 어쩔 수 없다. 그냥 떠나자.” 하고 떠나는 것을 하인이 보고 주인에게 일렀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배우지 않고도 말을 하고 어려서부터 신(神)과 통하였다는 정북창이지만 입산 3일 후에야 천하사를 통하였다고 한다. 그의 나이 25세에 육통법을 시험해 보려고 입산하여 삼일 동안 정관하더니 이로부터 배우지 않고 저절로 통하여 천리 밖의 일도 생각만 일으키면 훤히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신기한 능력을 지닌 정북창이지만 입산 3일 후에야 천하사를 알았고 하니 실제 공부하지 않고는 아는 법이 없는 것이다.
강증산 성사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서전(書傳) 서문을 많이 읽으면 도(道)에 통(通)하고 대학상장(大學上章)을 되풀이 읽으면 활연 관통한다” 하셨느니라.
서전(書傳) 서문(序文)은 주자(朱子)가 서경(書經)을 집필한 후 그의 사위인 채침(蔡沈)에게 서문을 적을 것을 유언하였으므로 채침이 10년에 걸쳐서 서전의 진수를 간파하여 요의를 적은 글이다. 서전서문을 많이 읽으면 도에 통한다함은 서전서문에 요ㆍ순ㆍ우의 심법 전수를 설명하였고 이것을 알면 도에 통한다는 의미이다.
精一執中 堯舜禹相授之心法
정일집중 요순우상수지심법
建中建極 商湯周武相傳之心法
건중건극 상탕주무상전지심법
오직 일심을 갖고 도를 잃지 않음은 요 · 순 · 우가 서로 전한 심법(心法)이요, 중용의 도를 세워 만민의 삶의 푯대를 세움은 상의 탕과 주의 문이 서로 전한 심법(心法)이다.
● 심법전수(心法傳受)
강증산 성사에서부터 종통계승은 요순우상수지법(堯舜禹相授之心法)과 같이 모두 심법전수로 이루어져 내려왔으므로 일반적인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심법전수는 서로 간에 마음으로 통하여 의사를 주고받으므로 그 마음을 통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실제 예를 오조 홍인과 육조 혜능의 예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보리달마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불교의 종맥은 오조(五祖) 홍인(弘忍)으로부터 육조(六祖) 혜능(慧能)에게로 이어졌는데, 혜능이 오조 홍인으로부터 종통의 상징인 의발(衣鉢)을 물려받을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혜능은 중국 남방의 영남 신주 사람으로 총명하고 본성이 매우 밝았으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어려워 평소 장작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다 보니 학문을 익힐 기회가 없었다. 그가 어느 날 시장에 나갔다가 어느 사람이 금강경을 잃는 소리에 마음이 동하여 금강경을 가르치는 하북 황매산의 오조 홍인을 찾게 되었다. 홍인이 “너는 어디서 왔으며 여기는 무엇하러 왔느냐?” 하니 혜능이 “저는 영남 신주 사람으로 성불(成佛)하러 왔습니다.”하였다. 그러자 홍인이 대뜸 “너는 오랑캐인데 어찌 성불(成佛)하랴?” 하며 꾸짖자 혜능이 “불성(佛性)에 어찌 남북이 있으리요?” 하고 대답하였다. 홍인은 이러한 문답 중에 혜능의 비범함을 보았으나 홍인은 가르침을 주지 않고 후원에서 방아를 찧게 하였다. 혜능이 황매산에 온 지 여덟 달이 지났을 때, 오조 홍인은 법을 전수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깨우친 바를 시(詩)로 적게 하였다. 이때 가장 뛰어난 제자로 알려진 신수대사(神秀大師)는,
身是菩提樹 몸 이것은 보리수 나무요
신시보제수
心如明鏡臺 마음은 명경대와 같다
심여명경대
時時勤拂式 때때로 부지런히 씻고 닦아라
시시근불식
物使惹塵埃 먼지가 어지럽히지 말게 하라
물사야진애
라는 뜻의 시(詩)를 지었다. 그런데 방아 찧는 일을 맡은 혜능은 이 시를 듣고 아직 깨우치지 못한 시라며 자신의 시를 대필하게 하였는데,
菩提本無樹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보제본무수
明鏡亦非臺 명경은 역시 대가 아니다.
명경역비대
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본래무일물
何處惹塵埃 어느 곳에 먼지가 일어나겠는가
하처야진애
라고 읊었다.
그 날 오후에 오조 홍인은 신수와 혜능의 시를 평가해 주었다.
“이 글을 외우면 죄에 빠지지 않고 복을 이루리라.”
이것의 신수의 시에 대한 평가이다. 홍인은 그의 시를 인정해 준 것이다.
“이 시는 깨우침이 없다. 당장 지워버려라.”
이것의 혜능의 시에 대한 평가이다. 홍인은 그의 시를 혹평했다.
하지만 홍인은 그의 의중을 숨기고 있었다.
홍인은 잠시 후 신수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아직 문턱을 넘지 못하였으니 더욱 정진하라. 내일 아침에 가르침을 줄 테니 다시 오너라.”
그리고 후원에 방아를 찧고 있는 혜능을 찾아가 말을 걸었다.
“공부는 잘되어 가고 있느냐?”
혜능이 대답했다.
“해가 서산 너머로 너울너울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때 둘이 나눈 대화가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혜능의 대답을 듣고 난 홍인은 주장자로 방앗대를 세 번 치고는 주장자를 뒤로 끌며 천천히 돌아갔다. 홍인의 뜻을 깨우친 혜능은 그날 밤 삼경(三更)에 뒷문을 통과하여 홍인을 찾아갔다. 홍인은 그 자리에서 혜능에게 금강경을 해설하고, 가사와 바릿대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 길로 너는 남쪽으로 가라. 그리고 시기가 익을 때까지 절대 법을 설하지 말라.”
혜능은 그 길로 야음을 틈타 이 일이 알려지면 닥쳐올 저해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다음날 아침에 신수가 오조 홍인을 찾아갔으나 홍인은 이미 열반에 든 후였고 가사와 바릿대도 없어진 후였다. 그러자 신수가 혜명(惠明)을 시켜 급히 혜능을 쫒아 가사와 바릿대를 찾아오게 하였다. 원래 장수출신이었던 혜명은 날쌘 중들을 이끌고 추격하여 마침내 혜능을 잡았다. 혜명이 가사와 바릿대를 내놓으라 하자 혜능이 흔쾌이 가사와 바릿대 놓아두고 가져가라 하였다. 그러나 혜명은 그 가사와 바릿대를 들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혜명은 오히려 혜능을 따르게 되었다. 이후 혜능은 남방으로 내려가 15년 후에야 비로소 법을 설하기 시작하였으며 선종(禪宗)을 크게 융성시키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바릿대는 전해져 내려가지 못하였다.
오조 홍인은 대중이 보는 앞에서는 신수를 인정해주고 혜능을 무시하였다. 이것은 힘없는 혜능이 이미 기득권을 장악한 신수의 시기심으로 인한 저해를 받지 않게 하는 방비였다. 그리고 방앗간으로 찾아간 오조홍인과 혜능의 대화는 일반인으로써는 알아들을 수 없는 둘 만의 대화였다. 그러나 이미 서로 마음이 통하는 지라 혜능은 홍인의 뜻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장자로 방앗대를 세 번 치고 뒷짐을 지고 가는 홍인의 모습을 보고 혜능은 3경에 뒷문으로 오조 홍인을 찾아갔으며 이곳에서 금강경을 전수 받고 가사와 바릿대를 받았다. 힘이 장사였던 혜명이 가사와 바릿대를 들 수 없었던 것은 이미 혜능에게 신명(神明)이 옮겨갔음을 뜻하고 혜능이 육조(六朝)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심법전수는 서로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여 법이 전해져 내려갔던 것이다. 반면 신수는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하고 세력이 있다고 하여도 오조 홍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오조와 통하지 못하는 것이며 욕심으로 가사와 바릿대를 차지하려하여도 신명이 용납지 않았던 것이다.
강증산 성사께서 어느 날
“예로부터 쌓인 원을 풀고 원으로 인하여 생긴 모든 불상사를 없애고 영원한 평화를 이룩하는 공사를 행하시니라. 머리를 긁으면 몸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인류의 기록에 시작이고 원(冤)의 역사의 첫 장인 요(堯)의 아들 단주(丹朱)의 원을 풀면 그로부터 수천 년 쌓인 원의 마디와 고가 풀리리라. 단주가 불초하다 하여 요가 순(舜)에게 두 딸을 주고 천하를 전하니 단주는 원을 품고 마침내 순을 창오(蒼梧)에서 붕(崩)케 하고 두 왕비를 소상강(瀟湘江)에 빠져 죽게 하였도다. 이로부터 원의 뿌리가 세상에 박히고 세대의 추이에 따라 원의 종자가 퍼지고 퍼져서 이제는 천지에 가득 차서 인간이 파멸하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인간을 파멸에서 건지려면 해원공사를 행하여야 되느니라”고 하셨도다.
● 단주(丹朱)의 원(怨)
중국 한(漢)나라 무제 때 역사가(歷史家)인 사마천(司馬遷)이 편찬한 사기史記 제왕편(帝王篇)에는 이때의 상황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옛날 중국에는 오제시대(五帝時代)가 있었다. 소호(少昊)․전욱(顓頊)․제곡(帝嘗)․당요(唐堯)․우순(虞舜) 등의 천자(天子)를 오제(五帝)라고 하는데, 이들 중 요임금과 순임금이 다스리던 시기를 일컬어 ‘요순시대(堯舜時代)’라 하여, 천하가 태평성대를 누리던 시대였다.
요(堯)임금을 제요(帝堯) 또는 당요(唐堯)라 하며, 이름은 방훈(放勛)이었으며, 천자(天子) 제곡(帝嘗)의 아들이다. 그의 인덕은 마치 하늘과 같아서 만물에 고루 혜택을 주었다.
어느 날 나이가 든 요임금은 제위에서 물러날 생각을 하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누구에게 천자의 자리를 맡겼으면 좋겠는가?”
신하 방제(放齊)가 대답하였다.
“적자(嫡子)이신 단주(丹朱)께서 매우 총명하십니다.”
방제는 당연히 요임금의 정실 자식에게 제위를 넘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임금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단주는 송사(訟事)를 좋아하니 덕이 없다. 등용할 수 없다.”
요임금은 재판을 걸어 죄를 묻는 것보다 덕으로 용서하는 정치를 할 수 있는 인물을 원했던 것이다.
이때 다른 신하가 한 인물을 추천하였다.
“공공(共工)으로 말하면 자신의 인덕에 의해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힘이 있으니, 나라를 능히 다스릴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를 등용 할만 합니다.”
“공공은 말을 잘하여 사람을 그 주변으로 끌어 모으나, 막상 일을 맡기면 비뚤어진 마음이 나타난다. 그의 태도는 매우 공손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늘을 우습게보고 있으니, 등용할 수 없다.”
그러자 이번에는 모든 신하들이 입을 모아 또 한 명의 인물을 추천하였다.
“곤(鯤)이라면 능히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곤은 나의 명령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친목을 깨뜨렸다. 가족의 화친을 도모하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어찌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태평천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 역시 등용할 수 없다.”
요임금이 곤도 역시 거절하였다.
요임금이 찾던 인물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요임금은 신하들에게 다시 말하길
“짐은 벌써 제위에 오른 지 70년이나 되었는데, 이 자리를 받을 만한 마땅한 인물이 없구나. 경들 중에서 누구든지 천명(天命)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제위를 계승하라.”
원로대신 사악(四嶽)들이 신하들을 대표하여 말하였다.
“저희들은 속되고 덕이 없으며, 만약 제위에 오르더라도 그 자리를 욕되게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짐의 친족이 되는 신분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등지고 숨어사는 사람이라도 좋으니, 적임자를 한번 추천해 보라.”
요임금이 답답하다는 듯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한 신하가 말하였다.
“천하의 현자로 알려진 허유(許由)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를 데려 오라.”
신하들이 허유를 찾아 나서자, 허유는 임금이 되는 걸 사양하고 기산(箕山)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못 들을 말을 들었다 하여 냇가의 물에 귀를 씻었다. 마침 그때 소를 몰고 지나가던 사람이 허유에게 물었다.
“왜 귀를 씻습니까?”
“요임금이 나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한다는 말을 들어 귀를 더럽혔기에 씻고 있습니다.”
소를 몰고 가던 사람은 그 물이 또한 더럽다 하여 더 위로 올라가 자기의 귀를 씻은 후에 소의 귀까지 씻기면서 “너도 들었으니 씻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허유가 산속으로 숨어버리고 나자, 요임금은 다시 신하들에게 마땅한 사람을 추천하라고 하였다. 그때 신하들이 입을 모아 한 사람을 추천하였다.
“어떤 지위도 없이 숨어서 사는 우순(虞舜)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요임금의 얼굴이 밝아졌다.
“짐도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의 됨됨이는 어떠한가?”
사악(四嶽)들이 말하였다.
“순은 맹인의 아들입니다. 그의 부친은 덕이 없고, 모친은 말이 많고, 아우는 교만합니다. 그러나 순은 능히 효도로 가족을 화목하게 만들고, 언제나 착한 길로 인도하여 가족들로 하여금 간악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요임금은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의 두 딸을 우순에게 시집보내, 그의 덕이 그녀들을 어떻게 감화시키는지 관찰하기로 하였다.
순은 곧 두 여자를 아내로 맞아 부덕(婦德)의 도를 가르쳤다. 천자의 딸로 부귀영화를 누리던 두 여자는 순박한 농부의 아내가 되었지만, 남편 순에게 순종하여 부녀자로서의 도리를 배웠다.
또한 요임금은 순에게 다시 백관을 통솔하게 하였는데, 곧 백관의 정무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외부에서 오는 빈객들을 접대하게 했더니, 빈객들이 모두들 그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다시 치수사업(治水事業)에 전념케 했더니, 그는 지혜와 담력으로 폭우나 뇌우에도 피해를 입지 않게 하였다.
이러한 시험을 거친 결과 요임금은 순을 성인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대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미진한 바가 없었다. 또 그대는 헛발을 짚지 않고, 이를 실천에 옮겨 큰 실효를 거두었다. 짐은 그대를 천자로 추천하고, 이제부터 나라의 섭정(攝政)에 임하도록 하겠다.”
그러자 순은 아직 덕이 부족하다며 거절하였다. 요임금은 제위에 오르는 것까지 즐겨하지 않는 그를 보고 더욱 마음에 들어 하였다. 요임금은 순을 등용하여 나라 일을 두루 맡겼으며, 등용 20년만에 요임금은 그에게 섭정(攝政)을 시켰다. 이때 순의 나이 50세였다.
그때 요임금은 불초한 단주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보다는 현자인 순에게 제위를 물려주면 온 천하는 즐거움을 얻고 괴로움은 단주 혼자만 당하는 것이 더 옳다고 판단했다.
요임금은 순에게 섭정을 시킨 지 8년만에 9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순임금 나이 58세였으며, 3년상을 치루고 61세 때는 제위에 올라 순임금이 되었다.
순은 요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3년상을 치른 후, 천자 자리에서 밀려난 단주가 원을 품고 있음을 알고, 천자의 자리를 단주에게 양위하고 자신은 황하의 남쪽 땅으로 피신하여 살았다. 그러나 제후들은 단주에게 가지 않고 순에게로 가서 인사를 드렸으며, 소송을 하는 사람들도 단주보다는 순을 찾아갔다. 천자의 덕을 말하는 사람들도 단주를 찬미하지 않고 순을 칭송하였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자 자연히 단주는 천자의 위(位)에 있지 못하고 변방의 제후위로 밀려났다.
순은 이것이 천명임을 알고 다시 천자의 제위를 받아들였다.
아버지 요임금이 우순을 뽑아 천자의 위를 물려주자 단주가 울분을 터트렸다. 그러자 요임금은 단주에게 바둑판을 물려주면서 바둑이나 두며 덕을 닦으라고 훈계하며 무이구곡산(武夷九曲山)으로 들어가도록 하였다. 단주는 요임금이 바둑판을 물려주며 ‘후천(後天)운을 기다리라’한 깊은 뜻을 알 길이 없어 가슴에 맺힌 원은 깊어만 갔다.
단주는 나날이 천하를 빼앗겨 버린 원한을 품고 지내다가 순임금이 재위 39년만에 남방(南方)을 순시(巡視)할 때 광서성 부근의 창오(蒼梧) 들판에서 독화살을 쏘아 순을 죽여 버렸다.
그러자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마주치는 소상강(瀟湘江)에서 순의 죽음을 전해들은 두 왕비는 소상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때 두 왕비의 가슴에 맺힌 천추의 원한이 소상강 강변에서 자라던 대나무에까지 번져 들어갔으니 지금도 이곳에서는 소상반죽(瀟湘斑竹)이라 하여 핏빛보다 선명한 보랏빛 반점이 있는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로써 단주가 품은 한은 순의 두 아내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에게로 전해졌고, 이로부터 원(冤)의 뿌리가 세상에 박히고 세대의 추이에 따라 원의 종자가 퍼지고 퍼져서 인류의 참혹한 재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강증산 성사께서는 원(冤)의 시작이 되는 단주의 원을 풀어서 이것을 실마리로 하여 천하에 가득찬 원을 풀어내는 것이다.
강증산 성사께서 말씀하셨다.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라 하였으되 제갈량(諸葛亮)은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십오경(薄田十五頃)의 탓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느니라.”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라.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가정 일을 돌아보지 않는다.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십오경(薄田十五頃)
뽕나무 800그루와 천박한 밭 15경.
●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 고사
제갈량이 유비를 만나 천하사를 위해 떠날 때 동생 제갈균에게 당부하여 말하길 ‘내가 유비현덕의 세 번 찾아 주신 은혜를 받으매 아니 갈 수 없어 나갈 터이니, 너는 여기서 부지런히 밭을 갈아 땅을 묵히는 일이 없도록 해라. 내 공을 이루는 날 다시 돌아오겠다’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제갈량에 대해 지은 시가 있으니 이러하다.
미처 집을 나서기 전 돌아올 일 예산했네.
그가 공명 세운 날에 응당 생각나련만
간곡한 임의 부탁 저버릴 길 없어
추풍(秋風) 오장원(五丈原)에 큰 별은 떨어졌네.
여기서 제갈량의 마음과 뜻을 볼 수가 있다. 제갈량이 천하사에 뜻을 두고 혼란한 시국을 평정하여 천하의 창생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대의(大義)를 가졌다면 다시 돌아올 날을 걱정하여 유상팔백주와 박전 15경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갈량이 유비현덕의 삼고초려에 응한 것은 천하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스스로 분연히 일어선 것이 아니라 단지 유비현덕이 세 번이나 자신을 찾아온 간곡한 부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고, 또한 이로써 자신의 뛰어난 재주를 발휘하여 천하를 제패해보고자 하는데 뜻을 두고 있었음을 역력히 읽을 수가 있다.
천하창생을 편히 해주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자신의 재주를 세상에 한번 발휘해보고자 하는 공명심에서 나섰고 공을 세우고 나면 미련 없이 다시 돌아올 기약을 내심(內心) 하고 있었으니 천하사를 하러 떠나는 마당에 동생인 제갈균에게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을 맡아 잘 간수하라고 당부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언제까지나 제갈량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유비에게 올린 상소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初城都有桑八百株 薄田十五頃 子孫衣食自有餘饒 不別治生
초성도유상팔백주 박전십오경 자손의식자유여요 불별치생
以長尺寸臣死之日不使廩有餘票庫有餘財以負陛下及卒果
이장척촌신사지일불사늠유여표고유여재이부폐하급졸과
如其言
여기언
제갈량이 표상소를 올려 가로되 ‘신이 처음에 성도에다 뽕나무 팔백주와 박전십오경을 두어 자손의 의식에 여유가 있으니 달리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고자 하지 않겠으며 신(臣)이 죽을 때에 창고에 곡식을 남기고 창고에 재물을 남겨두어 폐하께 부담이 되게 하지 않으리다. 하더니 과연 그 말과 같으니라’ 하였다.
이 상소에는 제갈량의 청렴결백한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고는 하지만 그 마음속에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이 떠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을 남겨둔 것은 자신이 공을 이루는 날 다시 돌아가기 위한 기약이고, 자신이 죽을 때에 창고에 곡식을 남기고 창고에 재물을 남겨두어 유비현덕에게 부담이 되게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자신이 혹여 실패하더라도 자손들의 의식에는 여유를 둘 수 있으니 걱정이 없다는 말이다.
즉 제갈량이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을 언제까지나 마음속에서 털어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는 것은 공명을 세우고 나면 돌아가겠다는 그 마음을 떨쳐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며, 또 자신이 혹여 실패해도 자손의 의식에 염려가 없도록 방비를 미리 갖추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제갈량의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은 천하창생들을 염려하는 마음보다는 자신의 공명과 가사(家事)의 안위를 먼저 염두에 두고 있는 소극한 마음의 반영인 것이다.
제갈량의 모사(謀事)가 신에 가까울 만큼 뛰어났다고 하지만 이런 소극적인 마음에는 신명(神明)들이 응해줄리 만무한 것이다. 그 뜻이 천하창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대의(大義)에 있지 않았기에 제갈량이 꾸민 모사에 신명이 응해주지 않게 되자 결국 천하사(天下事)를 성공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제갈량이 호로곡(葫蘆谷)에서 사마의(司馬懿) 삼부자를 화공작전을 써서 꼼짝없이 죽게끔 만들었으나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려 사마의 부자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이 때 제갈량이 하늘을 우러러 한 말이 ‘모사재인(謀事在人)이요, 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 하였다. 즉 사람이 일을 꾸며도 이루고 말고는 하늘에 있다는 말이다. 제갈량의 신과 같은 재주라도 신명이 응해 주지 않으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 오장원(五丈原) 전투에서 사마의(司馬懿)가 천문을 보아 제갈량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지연작전을 써서 제갈량이 죽기를 기다렸다가 제갈량이 죽자 전투를 치루어 승리로 이끌었다. 그 후 그 아들 사마소(司馬昭)가 위(魏)를 도와 촉한(蜀漢)을 멸망시키고, 소의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위제(魏帝)로부터 황제자리를 양위 받아 제위에 올라 동진(東晋)을 세우고 사마의를 선제(宣帝)로 받들었으니 결국 천하는 사마씨(司馬氏)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제갈량의 재주는 뛰어 났으나 그가 품은 뜻이 혼란한 시국을 평정하여 창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대의(大義)보다는 자신의 재주를 발휘하려는 공명심과 가사의 안위에 연연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그의 모사에 신명이 응해주지 않아 대사를 그르치고 말았던 것이다.
도주 조정산께서 말씀하시길
‘천하사(天下事)를 도모(圖謀)하는 자는 모름지기 하우씨(夏禹氏)를 본(本) 받을 지니라’ 구천상제께서도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니라’ 하시고 제갈량의 성공하지 못한 고사(古事)를 말씀하셨거니와 ‘하우씨(夏禹氏)는 구년치수(九年治水)하는 사이 삼과기문(三過其門)하되 불입기문(不入其門)하였으므로 왕천하(王天下)하였느니라.하우씨(夏禹氏)인들 구년 동안 어찌 처자식이 그립지 않았으랴’ 하셨다.
천하를 건지려는 뜻을 둔 자가 나의 한 개인적인 가사에 치우친다면 천하사를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가사를 져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천하(天下)도 역시 하나의 큰 가정이므로 천하사의 책임을 맡은 자는 천하의 큰살림을 모두 살펴야 하는 것이지 개인적인 살림에 연연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우씨(夏禹氏)는 구년치수를 하는 동안 자기 집 앞을 세 번 지나칠 일이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것이 어찌 하우씨가 집안 식구들을 위하는 마음이 없어서이겠는가. 그러나 천하창생의 목숨을 책임진 자가 개인의 정에 이끌리어 마음에 편중을 두고 내 가정을 먼저 살핀다면 가정을 두고 치수(治水)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이 어느 누구인들 개인의 사사로움이 없는 자가 있겠는가. 그 사사로움을 모두 채우고자 하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재 살 길만 챙기느라 바빠서 천하창생을 구하는 치수(治水) 사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의 고사에서 보았듯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 있는 자로서 박전십오경과 유상팔백주를 두어 자손의 의식은 여유가 있으니 자신의 생활은 조금도 염려가 없다고 장담하였으니 제갈량이 과연 천하창생의 배를 불리고자 하였겠는가? 창생을 구하고자 하는 뜻이 없는 곳에 신명이 응할 리가 만무한 것이니 천하사를 성공시킬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사를 하는 자는 천하에 공평하게 처사하는 것이지 내 가정의 안위에 우선을 두어 편중을 둘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우씨는 천하창생을 구제하고자 하는데 뜻을 두고 천하사에 공평무사하였을 따름이요. 사사로운 감정을 조금이라도 두지 않았으므로 천하의 왕(王)이 되었으니 천하사에 뜻을 둔자라면 이 두 가지 고사를 잘 생각하여 마음가짐에 본(本)을 삼아야 할 것이다.
강증산 성사께 김형렬이
“고대의 명인은 자나가는 말로 사람을 가르치고 정확하게 일러주는 일이 없다고 하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실례를 들어 말하라고 하시므로 그는 “율곡(栗谷)이 이순신(李舜臣)에게는 두율천독(杜律千讀)을 이르고 이항복(李恒福)에게는 슬프지 않는 울음에 고춧가루를 싼 수건이 좋으리라고 일러주었을 뿐이고 임란에 쓰일 일을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고 아뢰이니라. 그의 말을 듣고 상제께서 “그러하리라. 그런 영재가 있으면 나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 슬프지 않는 울음에 고춧가루를 싼 수건의 고사
이율곡(李栗谷)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나 반대파의 주장에 밀려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가 임진란 10년전으로 그는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인 파주로 낙향하였다. 그리고 율곡은 그의 5대 조부 이명신이 지어 놓은 낡은 정자를 헐고 다시 지었다. 이 정자는 임진강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높은 언덕위에 지어진 정자로써 율곡은 어릴 때 부터 이 정자에 올라 시를 짓고 학문을 연마한 곳이고, 또한 여기서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기도 하다. 율곡이 정자를 다시 지을때 기둥과 도리, 들보와 석가레 등 자재를 온통 관솔로만 썻다. 그래서 “정자가 너무 사치스럽지 않느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율곡은 단지 “훗날 긴히 쓰일 데가 있을 것이다.”라고만 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율곡은 화석정(花石亭)에 들러 묵상 할 때면 언제나 기름걸레로 마루 바닥과 기둥을 닦으라고 시켰다. 제자들이 이상히 여겨 물으면 그저“훗날 긴히 쓰일 데가 있을 것이다”라고 만 답하였다.
그리고 임진란이 일어나기 8년전 율곡은 세상을 떠났다. 율곡이 세상을 떠나기전 유언하기를 “내가 떠나더라도 정자에 일년에 한번씩 꼭 기름을 칠하라”고 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무방비상태에 있던 조선은 맥없이 왜군에게 패퇴하여 선조는 한양을 떠나 의주로 몽진길 에 올랐다. 선조의 몽진일행은 벽제관에서 황급히 점심을 먹고 임진강에 도달한 시간은 한밤중이 되어서 였다. 이날은 하루 종일 큰비가 내린데다 그믐밤이라 칠흑같이 어두워 배는 보이지 않고 왜군들이 뒤쫓고 있는 다급한 상황에서 더 이상 지체할 수도 없는지라 모두 당황하고 있었다. 이때 피난길을 안내하던 도승지 이항복은 문득 율곡선생이 생전에 한말이 떠올랐다. “화석정이 훗날 긴히 쓰일데가 있을 것이다.”
백사 이항복은 율곡이 아꼈던 제자중의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이항복은 지체 없이 사람을 시켜 “강 언덕 위에 정자가 있을 것이니 찾아서 불을 지르라”고 하였다.
절벽위 화석정에 불을 질러 강바닥을 대낮같이 밝힌후에야 겨우 배를 찾아 선조일행은 무사히 임진강을 건널수 있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선조에게 이항복은 율곡선생이 화석정을 관솔로 다시 짓고 매년 기름을 칠하게 하였다고 아뢰자 선조는 눈물을 흘리며 “내가 율곡의 말을 들었더라면 오늘 이강을 건너지 않아도 되었을 터인데…” 하고 하소연 하였다고 한다. 이와같이 율곡은 이미 선조가 임진강을 건너 피난 할 것까지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지나는 말로만 대답할 뿐이었다.
이율곡은 이와 마찬가지로 이항복에게 “슬프지 않은 울음에 고춧가루를 싼 수건이 좋으리라”고 가르쳤고, 이순신에게는 ‘두율천독(杜律千讀)’만 가르쳤으나 이것이 훗날 임진란을 당하여 크게 쓰일 것은 말해주지 않았다.
율곡의 이 애매모호한 말은 훗날 임진란에서 나라를 구하는데 크게 쓰이게 되었다.
이항복에게 일러준 가르침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감동시켰으며, 이순신에게 말해준 두율천독은 해전(海戰)에서 크게 쓰여 왜의 보급로를 끊음으로써 왜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왜군이 쳐들어오자 아무런 대비책도 없던 조정에서는 북으로 도망가며 한편으로 명(明)에 원군(援軍)을 청하였다. 그러나 명군은 처음부터 남의 나라 싸움에 분투하고자 하는 마음도 크게 없었으며 게다가 구원병을 이끌고 온 이여송(李如松)은 의주로 피난 온 선조의 볼품없는 몰골을 보고 실망하여 돌아가려 하였다.
다급해진 이항복은 좋은 꾀가 생각났다. 이항복은 선조에게 막사 내에서 항아리를 끌어안고 울라고 하였다. 항아리에 머리를 박고 울면 그 소리가 웅장하게 나므로 이항복은 이여송으로 하여금 선조가 외모는 보잘 것 없지만 속은 웅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슬프지 않는데 어떻게 우느냐고 하며 울지 않자 이항복은 꾀를 쓸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율곡이 말해준 ‘슬프지 않은 울음에 고춧가루를 싼 수건이 좋으리라’는 말이 생각났다. 이항복은 수건에 고춧가루를 싸서 선조에게 눈을 닦으라고 하였다. 선조는 이항복이 시키는 대로 고춧가루를 싼 수건으로 눈을 닦자 눈에서 절로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한 번 눈물이 나자 선조는 그동안 쌓였던 어려움과 설움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라 항아리를 끌어안고 엉엉 울어대니 그 소리가 이여송의 막사에까지 울려 퍼졌다.
이여송이 그 소리를 들으니 용성(龍聲)인지라 깜짝 놀라 어떤 위인이길래 이렇게 울음소리가 우렁찬가 알아보라 하니 선조의 막사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에 이여송은 선조의 몰골은 형편없어도 그 마음에 품은 웅지(雄志)는 크다 하여 도와주기로 결심하고 왜병을 물리쳐 주었다.
● 두율천독(杜律千讀)의 고사
두율천독(杜律千讀)이란 ‘두보의 시를 천 번을 읽는다.’는 뜻으로, 두보의 시를 읽으면 사람을 비분강개(悲憤慷慨)하게 만들고 격앙시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흥에 빠져 나라를 위한 충ㆍ효ㆍ열(忠ㆍ孝ㆍ烈)의 마음이 솟아오르며 아무리 많은 적군이라고 하여도 무서워하지 않고 이겨 나갈 힘을 얻게 된다고 한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은 거북선을 이끌고 남해 해전에서 승승장구 왜군을 물리치자 왜군은 보급로가 끊어지는 등 큰 타격을 입게 되었는데 이때 왜군의 계략에 빠진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하니 이순신은 삭탈관직 당하였고 이후 다시 복귀되었으나 원균은 이미 수백 척의 배를 잃어버렸고 그 자신도 죽어버렸다.
남은 배는 겨우 12척이었다. 조정에서는 싸울 수 없다고 하였으나 이순신은 아직 12척이나 남아있으므로 싸울 수 있다고 하며 전투에 임했다. 이순신은 마지막 명량해전(鳴粱海戰)에서 단 12척의 배로 일본 대선단 330척의 배를 만나 싸우게 되었다. 적군은 수백 척의 배로 몰려왔고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져 있었다.
이때 이순신은 병사들에게 칼로 뱃전을 두드리면서 두보(杜甫)의 시를 외우도록 하였다. 두보 시의 특징은 비장미(悲壯美)이다. 그러므로 두보의 시를 읽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비장해져 자신도 모르게 힘이 충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보의 시를 읽는 병사들의 사기가 충천(衝天)하였고, 12척의 배로 수백 척의 적선을 물리치는 사상(史上) 유례없는 대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율곡은 이항복과 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란의 가장 어려운 고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일러줌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중대한 계기를 주었던 것인데, 이것은 이미 이율곡이 임진란의 모든 상황을 미리 꿰뚫어보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명인들의 도력이 어디에 까지 미쳤는지 과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천기를 안다고 하여도 이것을 말할 수 없는 비밀이므로 고인은 단지 지나는 말로만 가르치고 그 구체적인 사용처에 대하여는 발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강증산 성사께서는 김형렬로부터 이 말을 들으시고 “이항복과 이순신 같은 그런 영재가 있으면 나도 가르치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담긴 교훈은 그 지혜를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지혜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그 결실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이 담겨있다.
이율곡이 임진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였으나 실천 할 수 있는 영재가 없었으므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반면, 지나는 말로 일러준 몇 마디가 전세(戰勢)를 바꾸어 놓을 만큼 큰 결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이율곡의 뛰어난 지혜도 있지만 그 지혜를 실천할 영재가 있으므로 가능하였던 것이다.
신도(神道)로서 크고 작은 일을
다스리면 현묘 불칙한 공이 이룩되나니 이것이 곧 무위화니라. 신도를 바로잡아 모든 일을 도의에 맞추어서 한량없는 선경의 운수를 정하리니 제 도수가 돌아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지나간 임진란을 최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에 불과하고, 진묵(震黙)이 당하였으면 석달이 넘지 않고, 송구봉(宋龜峰)이 맡았으면 여덟 달에 평란하였으리라. 이것은 다만 선․불․유의 법술이 다른 까닭이니라. 옛적에는 판이 좁고 일이 간단하므로 한가지만 써도 능히 광란을 바로 잡을 수 있었으되 오늘날은 동서가 교류하여 판이 넓어지고 일이 복잡하여져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혼란을 능히 바로 잡지 못하리라.
최풍헌은 선조(宣祖)가 피난 간 의주로 가서 거지차림으로 막사를 돌며 “나에게 병권을 주면 왜적을 3일에 물리치리라” 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그를 믿어주지 않자 그는 병권을 얻지 못하여 역사(役事)를 하지 못했다. 만약 최풍헌이 병권(兵權)을 가졌더라면 당시 왜적이 3파로 나뉘어 공격해오는 길목에 서서 적장의 목을 하루에 한 명씩 베어버리면 사흘 만에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진묵은 불도(佛道)에 통한 자라 그 법술이 신통하였으나 역시 전쟁에 나설 수 없었고, 송구봉 역시 서자 출신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으므로 나설 수 없었다. 다만 송구봉은 거북선의 설계도를 이순신에게 넘겼다는 다음과 같은 고사(故事)가 전한다.
이순신이 12, 3세 때의 일이었다.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하였으며 친구들과 함께 진(陣)을 치고 진법(陣法) 연습을 하곤 했다. 하루는 송구봉이 지나가다 이 광경을 목도하였다. 송구봉은 이순신의 진법놀이를 지켜보다가 자기의 집에 다녀갈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밤에 송구봉의 집을 찾아갔더니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방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벽에 구선도(龜船圖), 즉 거북선 그림이 걸려 있었다.
훗날 이순신은 무과에 급제하여 여수 수사로 부임하여 여수 둔덕재의 소나무로 어려서 본 그림대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그런데 거북선에 있는 여덟 개의 구멍 중 한 개의 용도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모를 일이었다. 이순신은 다시 송구봉을 찾아 물었더니 그 구멍은 사청목(蛇聽目)이라 하였다. 뱀은 눈으로 소리를 듣기 때문에 바깥의 말을 듣기 위해서 한 구멍을 만들어 두어야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임진란 때 왜군을 벌벌 떨게 했던 거북선이 완성되었다. 왜병의 병선은 선체가 적고 기동성이 뛰어난 반면 조선의 판옥선은 선체가 크므로 기동성이 떨어져 해전에서 불리하였는데 거북선은 기동성이 뛰어날 뿐아니라 견고하고 안전하며 강력한 화력을 탑재하고 있었으므로 왜병의 병선을 종횡무진 격파하였던 것이다. 거북선으로 기선을 제압한 연후 우세한 무기를 장착하고 큰 판옥선으로 왜병을 무찌르니 왜는 해전에서 연전연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불과 3일이면 임진란을 평정시킬 수 있었던 최풍헌이나 석달이면 가능하였던 진묵이나 여덟 달을 넘지 않는다는 송구봉과 같이 아무리 법술이 뛰어난 도인이라도 병사를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 없으니 마치 수족이 없는 자와 다를 바가 없는 처지가 되어 그 능력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들은 드러나지 않게 간접적으로 그 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능력이 다소 부족하였으나 사명당은 승병을 조직할 수 있었으므로 임진란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 이후 사명당은 선조의 명을 받고 휴전협상을 하러 일본으로 가서 그의 도력을 발휘함으로써 일본인들을 경악케 하였다는 고사는 지금도 전해져 오고 있다.
일본조정에서는 조선 사명당이 도력이 높다는 이야기를 일찍이 들었던 바라 그가 사신으로 오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를 시험하여 기를 꺾으려 하였다.
왜는 사명당이 사신으로 오는 길목에 병풍을 군데군데 세워두고 자랑을 하였는데 병풍에는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보낸 술사(術士) 서복과 동남동녀 500쌍이 일본에 머물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나중에 사명당이 도착하자 영접 나온 학자들이 길목의 병풍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사명당은 이때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답하였으나 끝내 한 장의 내용을 답하지 못하였다. 왜 그런가 물었더니 병풍에 글이 없었다고 하였다. 사실을 확인해보니 바람에 병풍이 접혀져 있었던 것이다. 사명당은 말을 타고 오는 중에 가끔씩 놓여진 병풍의 글을 읽고 모두 외워버렸던 것이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시험을 하였으나 사명당의 도력은 놀라웠다.
그러자 아예 죽여서 후환을 없애고자 구리로 숙소를 만들고 장작불을 때어 태워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날 방문을 열어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불에 타 죽었을 것이라 여겼던 사명당이 “일본은 덥다더니 어이 이리 추운고!” 하며 수염에 허연 고드름이 붙은 채로 추위에 덜덜 떨며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방 벽에는 얼음 빙(氷)자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사명대사의 고향인 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서있는 사명대사 비석, 일명 「표충비」에는 국란이 있을 때 마다 땀을 흘리고 있다.
이 표충비는 1738년(영조 14년) 사명대사를 기리기 위해 그의 법손인 남붕(南鵬)이 경산(慶山;경주의 산)에서 채취한 돌로 4년에 걸쳐 완성한 것으로 조선말 부산진에 있던 비를 밀양으로 이전해 왔다고 한다.
이 뒤로부터 신기하게도 국가에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비석에서 마치 사람처럼 땀을 흘린다. 그리고 이 땀은 진짜 사람 땀처럼 짠맛이 난다고 한다. 표충비는 1894년 갑오 동학혁명 7일 전에 서말 한되 분량의 땀을 흘린 것을 시작으로 1945년 해방 14일전 다섯 말 일곱 되, 1950년 6ㆍ25발발 25일전 서말 여덟 되, 1961년 5ㆍ16 군사혁명 5일전 다섯 말을 흘리는 등 지금까지 땀을 흘린 50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사명대사의 비석은 줄곧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생길 때마다 어김없이 땀을 흘려왔다. 사명대사의 도력이 몇 백년 지난 지금에까지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능력으로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던 사명당도 7년 풍진을 겪어가며 임진란을 평정하였다고 하니 최풍헌이나 진묵이나 송구봉의 법술은 과히 상상을 초월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법술은 유불선의 신명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옛날에는 판이 좁아 유ㆍ불ㆍ선중 한가지 법술로써 능히 광란을 평정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동서가 교류하고 판이 넓으므로 유ㆍ불ㆍ선뿐만 아니라 과학적 법리까지 모든 법리를 합하지 않고는 능히 혼란한 천하를 바로 잡을 수 없으므로 강증산 성사께서는 이 모든 법리를 합하여 혼란한 시국을 평정하신다는 것이고 그것이 열탕이 끓는 듯한 광란의 천하가 급격히 안정추세로 변해온 지난 100년 동안의 세계사에 나타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신도(神道)에 의한 무위이화(無爲而化)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강증산 성사께서
“제갈량(諸葛亮)이 제단에서 칠일 칠야 동안 공을 드려 동남풍을 불게 하였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라. 공을 드리는 동안 일이 그릇되어 버리면 어찌 하리요” 말씀하시고 곧 동남풍을 일으켜 보였도다.
● 적벽대전(赤壁大戰)과 동남풍
208년 원소(袁紹)를 토벌하고 북방의 평정을 완료하고 승상에 임명된 조조는 기세가 등등하여 남방 정벌을 시도하였다. 이때 형주(荊州)에서는 유표(劉表)가 병사하고 차남 유종(劉琮)이 뒤를 이었으나, 유종은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대로 항복하고 만다. 번성(樊城)을 지키고 있던 유비 군은 믿었던 유종이 괴멸하자 동남의 하구(夏口 : 지금의 漢口)를 향해 철수하였다. 강북지역현재의 양자강 이북지역을 장악한 위나라의 조조는 강남지역마저 정벌하여 천하를 평정하고 바다를 다스리고자 20만명(일설에는 83만명)의 대병을 거느리고 지금의 무한 부근에 있는 적벽에 주둔하면서 남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구에 몰리어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 유비는 손권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당시 손권은 시상(柴桑)까지 진군하여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제갈공명은 이때 사신을 자청하여 손권을 설득하기 위해서 오나라로 건너갔다.
결국 제갈공명은 형주가 함락되면 오나라도 직접 조조의 압력을 받게 되기 때문에 오와 촉이 연합하여 조조의 대군을 물리쳐야만 서로가 살 수 있다는 논리로 손권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이에 손권은 주유(周瑜)에게 명하여 수군 3만을 이끌고 출전하게 하였다.
주유는 기마에 능한 조조 군사들의 도강(渡江)을 막기 위해 어떠한 방법이 좋을지 전략가 방통(龐統)에게 묘계를 청하였다. 방통이라면 일찍이 유비가 사마휘에게 군사(軍師)를 청하자 ‘복룡(伏龍)과 봉추(鳳雛),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얻는다면 천하를 평정 할 수 있다’라고 했던 인물 중 한사람이다. 복룡은 와룡(臥龍)으로 제갈량을 말했고, 봉추는 바로 방통을 말했던 것이다.
주유가 노숙에게 당부하여 방통에게 묘계를 청하자, 방통은 반듯이 화공(火攻)을 쓰되 연환계(連環計)를 써야만 한다고 일어주었다. 연환계는 배를 쇠사슬로 서로 연결하여 묶어놓는 것으로 강 위에서 한배에 불이 붙으면 나머지 배들은 사면으로 흩어지고 말 것 이므로 연환계를 쓰서 배들을 한데 묶어 놓지 않고는 화공(火攻)을 쓰도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이 계책을 실현하기 위해 방통은 조조의 첩자로 주유에게 왔던 장간을 따라 거짓으로 조조에게 접근하게 된다. 방통은 수전(水戰)에 약한 조조 군사들이 상대적으로 수전에 능한 주유의 군사들을 대적하는 것이 큰 걱정거리임을 간파하고 조조에게 연환계를 쓰라고 일러준다. 조조군은 원래 북방의 군사들이라 기마에는 능하지만 배에는 익숙하지 않아 배 멀미로 인해 구토하는 병이 나서 전투를 수행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큰 배와 작은 배를 적절히 배합하여 삼십척에서 오십척씩 서로 쇠고리로 연쇄해 놓고 그 위에 넓은 판자를 깔아놓으면 아무리 풍랑이 일고 조수가 오르내린다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계책이었다. 조조는 방통의 계책에 흡족해 하였고 방통의 말대로 대소 선척을 모두 배합하여 연쇄해 놓았다. 그러자 정중덕이 나서서 말하길 “만약 적군이 화공을 쓰면 피하기 어려우니 방비를 하여야 합니다” 하고 걱정을 하자 조조는 웃으며 말하길 “대저 화공을 쓰려면 반듯이 풍력을 빌려야만 하는데, 이 겨울철에는 다만 서풍, 북풍이 있을 뿐이지 어찌 동풍, 남풍이 있겠소? 우리는 서북쪽에 있고 주유는 다들 남쪽 언덕에 있으니 화공을 쓰게 되면 도리어 저희 막사만 태워버리게 되니 무엇이 두렵겠소? 만약 시월 소춘(小春)시절이기나 하다면 내가 벌써 방비를 했을 것이오” 하며 호언장담하였다.
한편으로 주유는 방통의 계책대로 연환계가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문제는 조조의 말처럼 남동풍이 불어야 화공(火攻)을 쓸 수 있을 터인데 이때는 북풍이 거세게 부는 한겨울 동짓달이었으니 난감할 지경이었다. 이 때 촉나라의 재상 제갈공명이 대책을 제안하는데, 풍백우사라는 비법을 통해 동남풍이 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제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일찍이 이인(異人)을 만나 기문둔갑천서(奇門遁甲天書)를 전수 받아 능히 바람을 불게하며 비를 내리게 할 수 있소. 도독[주유]이 동남풍을 쓰시겠다면 남병산(南屛山)에다 칠성단(七星壇)을 쌓고 제가 그 단위에 올라가 술법을 써서 동남풍을 빌려다가 도독이 군사를 쓰시는데 도움을 드릴까 하는데 어떻겠소?”
주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대사를 가히 이룰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시일이 다급하니 늦어서는 안되겠습니다”라고 하며 당부하였으나 실은 반신반의 하였다.
그러나 주유는 일이 다급한지라 병사를 시켜 남병산에 칠성단을 쌓게 하였다. 칠성단은 동남방의 붉은 흙을 파다가 쌓게 하였는데 단의 둘레가 24장이요 매 층의 높이는 3척으로 모두 9척으로 쌓았다.
그리고 일층에는 이십팔수(二十八宿)의 기를 세우니 동방은 청기로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일곱 깃발을 벌려 세우고, 북방은 흑기로 두우여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 일곱 깃발을 세우고, 서방은 백기로 규루위묘필자삼(奎婁胃昴畢觜參) 일곱 깃발을 세우고, 남방은 홍기로 정귀유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 일곱 깃발을 세웠다. 그리고 이층은 64괘(卦)에 응하여 누런깃발 64개를 8방에 세웠다. 또 삼층은 네 사람으로 하여금 사방에 서게 하였는데 앞쪽 왼편에는 장대 끝에 닭의 깃을 달아 바람의 동정을 살피게 하고, 앞쪽 오른편에는 북두칠성을 그린 신호띠를 매달아서 바람의 방향을 표시하게 하고, 뒤쪽 왼편에 선사람은 손에 보검을 받들고, 뒤쪽 오른쪽에 선 사람은 손에 향로를 받들며, 단 아래는 24명이 각기 다른 무기를 들고 사면을 둘러싸게 하였다.
그리고 동짓달 스무날 갑자 갑일에 목욕재계하고 칠성단에 올라가 칠일칠야(七日七夜) 기도를 들였다.
한편 주유는 군관들을 장중으로 불러들여서 동남풍이 불면 곧 출전키로 하고 화선(火船) 20척을 준비해서 뱃머리에 큰못을 빽빽이 박아놓고 배안에는 마른 갈대와 섶단을 산더미같이 쌓아 올리고 유황 등의 발화물질과 생선기름을 부어 놓고 청포와 유지를 푹 덮어씌우고 적진을 향해 돌진할 준비를 했다.
결전의 날, 공명은 목욕재계를 한 후 칠성단에 올라가 남동풍이 불기를 기원했다. 해는 저물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하늘은 맑아 실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주유가 노숙을 보고 말하길 “공명의 말이 거짓이오. 이 깊은 겨울에 어떻게 동남풍을 얻겠단 말이요”라고 하며 의심을 하자, 노숙은 말하길 “내 생각에는 공명이 결코 거짓말을 한 것 같진 않습니다”라고 하며 기다렸다. 그런데 밤이 깊어 삼경(밤 11시∼새벽 1시 사이)이 가까워지자 바람소리가 들리기에 주유가 장막에서 나가보니 깃발이 펄럭이는데 서북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동남풍이 점점 거세지더니 바람이 크게 일어났다.
오나라 군사들은 급히 20여 척의 화선을 띄우고, 그 뒤에 각각 300여 척의 대군을 이끌고 조조 진영을 급습하였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조조는 대패하여 겨우 27기(騎)의 군사와 함께 혈로를 뚫고 도망가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적벽대전(赤壁大戰)이다.
주유는 동남풍이 거세게 일어나자 깜짝 놀라 “제갈량은 천지의 조화를 뺏는 법과 귀신도 헤아리지 못할 도술을 가지고 있으니 만일 이 사람을 남겨두었다가는 동오(東吳)의 화근이 될 것이다. 한시바삐 죽여서 후일의 근심을 없애도록 해야겠다” 하고 급히 남병산 칠성단으로 장수를 보내어 “제갈량을 잡아 불문곡직하고 즉시 목을 벤 다음 수급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으나 장수들이 칠성단에 도착했을 때 제갈량은 이미 배 한척을 타고 홀연히 떠난 뒤였다.
유비는 이 적벽대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마침내 형주를 손에 넣고 삼국정립(三國鼎立)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유비는 214년에 사실상 파촉(巴蜀)의 땅을 지배하고 221년 촉한(蜀漢)의 건국을 이룩하였다.
적벽대전의 결정적 승리는 바로 동남풍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이 동남풍을 빌어 전무후무한 전술을 펼친 것은 신묘한 재주임에는 틀림없으나 칠일칠야 정성으로 이루어졌으니 만약 이 동안에 조조가 침공을 해왔더라면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 러일전쟁과 동남풍
강증산 성사께서 이 일을 두고 말씀하시기를 “제갈량이 공을 드리는 동안 일이 그릇되어 버리면 어찌 하리요” 말씀하시고 곧바로 동남풍을 일으켜 보였다. 그리고 그 후 49일 동안 동남풍을 불게 하여 동양 전체를 섭권하려던 러시아의 야욕을 분쇄하게 하였으니 적벽대전에 비유될 바가 아니라 하겠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강증산 성사께서 계묘년(1903년) 여름에 자신을 따르는 종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동양 형세가 위급함이 누란과 같아서 내가 붙잡지 아니하면 영원히 서양에 넘어가리라” 깊이 우려하시며 “내가 일로전쟁(日露戰爭)을 붙여 일본을 도와서 러시아를 물리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당시 종도들로서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러시아에 비하여 군사력 면에서 적수가 되지 못하였던 때이므로 모두 허황된 말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실재 1904년 2월 러일전쟁은 일어났고 러시아는 육전에서 불리하게 되는데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노동자 폭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만주에서 전쟁중이던 육군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철수를 하였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육전에서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흑해에 정박중인 발틱함대를 극동으로 파견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작전을 구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38척의 무적함대 발틱은 뜻밖에도 약세를 면치 못하던 일본 해군 12척의 함대에 궤멸되고 마는데 이것은 바로 때아니게 불어왔던 동남풍(東南風)으로 인해서이다.
러시아 발틱함대가 38척이라는 거대한 선단(船團)을 이끌고 대한해협으로 들어오고 있을 즈음 강증산 성사께서는 “이제 서양 사람의 세력을 물리치고 동양을 붙잡음이 옳으니 대신문(大神門)을 열어 사십구 일을 한 도수로 하여 동남풍을 불어 일으켜 서양 세력을 꺾으리라”고 말씀하시고 동남풍을 불러일으키는 공사를 행하시자 49일 동안 연일 동남풍이 불어왔다.
당시 일본 해군 사령관 도고 헤이치로(東鄕平八郞)는 거대한 함대가 일렬로 줄지어 들어오는 꿈을 일주일 동안 세 번이나 꾸고는 “이것은 하늘의 계시다”라고 하면서 예상 밖의 전술을 구사하게 되는데 일명 “T”자 작전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전술로서 일렬로 들어오는 적을 가로로 막게되면 표적이 넓어 100%당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05년 5월 27일경 새벽에 실재 발틱함대는 등화관제를 하고 일렬로 줄지어 들어왔고 일본군은 그 길목에서 가로 막고 있었다. 꿈에서 본 상황 그대로였다.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고 발틱함대는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였는데 이것은 때 아닌 동남풍이 거세게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북 방향으로 대한해협을 가로지르던 발틱함대는 동남풍 때문에 파도를 옆면에서 받게 되고 이로 인해 배가 몹시 흔들렸던 반면 동남 방향으로 가로막고 있던 일본함대는 파도를 타고 있으므로 흔들림이 훨씬 적었던 것이다. 이것은 포탄의 명중률과 전투력 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어 러시아 함포의 포탄은 번번이 빗나가는 반면 일본군 함대의 포탄은 명중하였던 것이다. 발틱함대 전함 38척 중 35척 격침 또는 파괴, 3척 나포, 4,800명이 사망하는 대 참패를 당하였다. 이에 견주어 일본 해군의 피해는 전함 12척 중 고작 3척 침몰, 전사 117명에 불과했다. 이때는 5월 중순경이라 동남풍이 불어올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동남풍이 세게 불어와 일본해군을 도왔으므로 일본군은 이 동남풍을 일컬어 신풍(神風:가미가제)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제갈량은 동남풍으로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삼국정립을 시켰다면, 강증산 성사께서는 동남풍으로 러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이끌고 서양세력으로부터 동양을 구하였던 것이다.
이윤(伊尹)이
오십이지 사십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를 깨닫고 성탕(成湯)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나니 이제 그 도수를 써서 물샐틈 없이 굳게 짜놓았으니 제 도수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 오십이지 사십구년지비(五十而知 四十九年之非) 고사
이윤은 걸을 망하게 하고 탕을 도와 왕도정치를 펴서 은나라를 부흥시킨 훌륭한 재상이다. 이윤은 49세가 될 때까지 천명(天命)을 깨닫지 못하고 걸왕의 신하로 있으면서 걸을 바르게 세우고자 최선을 다하였으나, 50세에 비로소 천명을 깨닫고 성탕을 도와 걸을 멸하고 대업(大業)을 이루었다.이윤의 본명은 지 혹은 아형이다. 이윤은 본래 유신씨의 들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기의 재능을 숨기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이윤은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탕은 세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예를 갖추어 청한 후에야 비로소 부름에 응하였다.
「여씨춘추」나 「열자」에는 이윤의 출생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윤의 어머니는 이수가에 살고 있었다. 거기서 이윤을 잉태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꿈에 신령이 나타나 말하기를 ‘만약 이수에 절구통이 떠내려 오거든 너는 그것을 보는 즉시 동쪽을 향하여 달리되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고 경고하였다.
이튿날 이수에 가보니 과연 절구통이 떠내려 오는지라 그녀는 무조건 동쪽으로 달렸다. 10리쯤 달리고 나서 이제는 괜찮겠지 하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순간 마을은 완전히 물바다로 변했고 그녀는 속이 빈 뽕나무로 변해버렸다. 뽕을 따러 온 여인이 뽕나무속에 어린아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 아이가 이윤이라는 것이다.
이 이상한 아기를 유신국의 왕에게 드렸는데 임금은 이 아기를 주방책임자에게 맡겨 기르도록 명하였다.
이윤은 요리솜씨가 뛰어났으며, 이로 인하여 걸왕의 주방장으로 들어가 걸왕에게 간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 요ㆍ순ㆍ우왕의 시대를 일컬어 태평시대라고 한다. 순을 이어 우(禹)가 왕위를 물려받아 이끌어 가다가 우의 아들 계에 이르러 세습왕조체제로 바뀌어 하왕조가 이어졌다.
하왕조 17대에 이르러 걸왕(桀王)이 즉위하였다.
걸왕(桀王)은 이름을 계(癸) 또는 이계(履癸)라고도 하며 중국역사상 최초의 폭군으로 기록되었다. 53년간 재위하였으며, 나라가 망하자 추방되어 굶어 죽었다고 전한다.
힘이 장사인 걸왕은 언제나 그의 힘만 믿고 백성들을 이유 없이 괴롭혔으며 포악한 정치로 농업생산을 파괴하였으며, 대외원정을 남발하여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약탈하기를 일삼았다.
즉위 33년째 되던 해에 병력을 동원하여 유시씨(有施氏)를 정벌하였는데 유시씨는 화의를 청하는 뜻에서 그에게 매희(妹喜)라는 미녀를 바쳤다. 그는 매희를 매우 총애하여, 특별히 그녀를 위해 옥으로 장식한 화려한 집(瓊室)을 지어 상아로 장식한 회랑(象廊)과 옥으로 장식한 누대(瑤台)를 지었으며 옥으로 만든 침대(玉床)에서 밤마다 일락(逸樂)에 빠졌다.
걸왕은 매희의 소망에 따라 전국에서 선발한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에게 오색찬란한 옷을 입혀 날마다 무악(舞樂)을 베풀었다 한다.
또 무악(舞樂)에 싫증이 난 매희의 요구에 따라 궁정(宮庭) 한 모퉁이에 큰 못을 판 다음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고 향기로운 미주(美酒)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못 둘레에는 고기[肉]로 동산을 쌓고 포육(脯肉)으로 숲을 만들었다. 이것을 일러 후대사람들은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 하였다.
걸왕과 매희는 그 못에 호화선을 띄우고, 못 둘레에서 춤을 추던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이 신호의 북이 울리면 일제히 못의 미주를 마시고 숲의 포육을 탐식(貪食)하는 광경을 구경하며 희희낙낙 즐겼다.
이 같은 사치음일(奢侈淫佚)의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원성은 하늘에 닿았다. 걸왕이 즉위한지 37년째 되던 해에 동쪽 상(商) 부락의 장인 탕(湯)은 걸왕이 학정을 일삼는 것을 보고 재덕을 겸비한 현인 이윤(伊尹)을 걸왕에게 알현시켰다. 이윤 같은 사람이 걸왕을 보좌하면 나라가 올바르게 다스려 질 것이라 믿고 이윤을 선관(궁궐 안의 주방을 맡은 관리인)으로 변장시켜 걸에게 보냈던 것이다. 이윤은 요순의 인정(仁政)으로써 걸을 설득하여, 걸왕이 백성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심혈을 다해 천하를 다스리기를 간언하였다. 그러나 걸왕은 “선관 주제에 무슨 참견이냐” 하며 들은 척도 아니하여 이윤은 매번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만년에 이르러 걸왕은 더욱 황음무도해졌다. 그는 사람들에게 명하여 ‘야궁(夜宮)’이라는 큰 연못을 파게 한 다음, 한 떼의 남자와 여자들을 데리고 그 연못에서 뒤섞여 살면서 한 달 동안이나 조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태사령(太史令) 종고(終古)가 울면서 간언을 하였으나, 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종고를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한다고 질책하였다. 종고는 걸을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상(商)으로 가서 탕(湯)에게 투신하였다. 민심은 떠나고 나라 형편이 점점 피폐해져갔다. 현신(賢臣) 관룡봉(關龍逢)이 더 이상 볼 수 없어 걸에게 직간을 하다가 배가 갈리우고 허파가 뜯기는 비참한 죽임을 당하였다. 이를 지켜본 이윤은 마음을 바꾸어 탕을 도와 걸을 멸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이때 이윤의 나이 50세였다. 이것을 일러 오십이지 사십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라 한다. 즉 49년 동안 깨닫지 못하였던 천명天命을 50세에 이르러 깨달았다는 것이다.
혹은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느 날 술 취한 사람이
왜 박으로 가지 않는가?
왜 박으로 가지 않는가?
박은 크기만 한데.
깨어나라! 깨어나라!
나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네.
암흑을 버리고 광명을 찾을거나.
무엇이 걱정이란 말인냐!
여기서 박은 은나라의 수도라는 노래를 하기에 이제까지 자기가 걸왕을 섬겨온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고 탕의 훌륭한 재상이 되어 탕을 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상(商) 부락은 탕의 통치하에서 나날이 번성해졌다. 걸왕은 상의 탕이 자신에게 위협을 미칠 것을 염려하여 그를 하대(夏台, 지금의 하남성 禹縣 경내)에 가두었다. 얼마 후 탕은 걸왕을 안심시키는 계략을 꾸며 석방되었다.
걸왕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지자, 민심이 떠나버린 것을 알아차린 탕은 명재상 이윤(伊尹)의 도움으로 군대를 일으켜 걸을 정벌하였다. 탕은 먼저 걸왕의 측근인 위국(韋國)과 고국(顧國)을 점령하고 곤오국(昆吾國)을 격파한 다음, 하(夏)의 요충지 명조(鳴條, 지금의 산서성 안읍현 서쪽)로 돌진해갔다.
이 소식을 접한 걸왕은 급히 군대를 이끌고 명조로 달려갔다. 양군이 교전을 하고 있을 때 걸왕은 인근의 산꼭대기에 올라가 관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걸은 황급히 아래로 내려가 비를 피하였다. 하(夏)나라의 병사들은 원래부터 걸왕을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이 없었던지라 이때를 틈타서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다. 걸왕은 그것을 제지하지 못하고 급히 성안으로 도망쳤다. 탕의 병사들이 뒤를 추격해오자 걸왕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 없어 매희와 보석을 챙겨서 배를 타고 남소(南巢, 지금의 안휘성 소현)로 도주하였다. 그후 탕의 추격으로 사로잡혀 밖으로 추방되었다. 이때도 걸왕은 여전히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당시에 탕을 하대의 감옥에서 죽여 버리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럽구나!”라고 하였다.
걸왕과 매희는 사치가 몸에 배여 있었던지라 아무도 시중드는 사람 없는 황량하고 외진 산골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일할 줄도 몰랐다. 결국 그들은 와우산(臥牛山)에서 산채로 굶어 죽고 말았다.
탕은 이윤의 덕으로 폭군 걸왕을 몰아내고 천자의 자리에 올라 덕치에 힘을 기울여 왕도정치를 실현하였다.
탕이 백성의 뜻을 받들어 걸왕을 칠 수 있었던 것은 천도에 따른 것이며, 또한 이윤과 같은 현명한 재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도 걸이 망하고 탕이 흥한 것은 이윤에게 있다고 말씀하셨다.
桀惡其時也 湯善其時也
걸악기시야 탕선기시야
天道敎桀於惡 天道敎湯於善
천도교걸어악 천도교탕어선
桀之亡湯之興 在伊尹
걸지망탕지흥 재이윤
걸이 악을 행함도 그때요
탕이 선을 행함도 그때이다.
천도가 걸로써 악을 가르쳤고
천도가 탕으로써 선을 가르쳤다.
걸은 망했고, 탕은 흥하였으니
여기에는 이윤이 있었다.
탕왕이 죽은 후 태자 태정은 일찍 죽었으므로, 아우 외병이 즉위했다. 2년만에 외병이 죽고, 다시 그 아우 중임이 즉위했는데 또한 4년만에 죽으니, 태정의 아들 태갑이 즉위했다.
그러나 태갑은 어리석고 포악하여 조부인 탕왕의 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하여 이윤은 그를 동궁에 가두었다. 태갑은 3년 동안 선왕 중임의 옷을 입고 나서 크게 깨달아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의 부덕함을 깨닫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이윤은 태갑을 은의 수도 박으로 모셔왔다. 그로부터 태갑은 덕을 잘 닦았으므로 제후들이 모두 잘 따랐다. 태갑이 얼마 후 죽자 그의 아들 옥정이 즉위하였는데 이윤이 죽은 것도 이때이다.
이윤이 죽자 은나라에서는 그들 조상묘에 배향하는 파격적인 은혜를 베풀었다.
이윤이 없었다면 은나라는 천자국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선조의 사당에 배향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이윤이 탕 임금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다.
束手之地葛公謨計不能善事
속수지지갈공모계불능선사
瓦解之餘韓信兵仙亦無奈何
와해지여한신병선역무내하
두 손이 묶인 상황에서는 제갈공명이 일을 꾸며 계획한다 하여도 능히 일을 잘 할 수 없고, 병사가 흩어진 연후에는 병선이라는 한신이라도 어찌할 수 없다.
제갈공명의 신과 같이 뛰어난 재주라도 수족이 되어줄 사람이 없으면 쓰지 못하고, 아무리 병사를 잘 다루는 한신이라도 병사가 흩어지고 없어진 연후에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는 의미이다.
● 제갈공명의 속수지지(束手之地) 고사
조조(曹操)가 급파한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는 20만 대군으로 기산의 산야(山野)에 부채꼴[扇形]의 진을 치고 제갈량의 침공군과 대치했다. 이 ‘진(陣)’을 깰 제갈량의 계책은 이미 서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인 만큼 군량 수송로(軍糧輸送路)의 요충지인 ‘가정(街亭:韓中의 東쪽)’을 수비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가정(街亭)을 잃으면 촉나라의 중원(中原) 진출의 웅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책(重責)을 맡길 만한 장수가 마땅치 않아서 제갈량은 고민했다.
그 때 마속(馬謖:190-228)이 그 중책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러나 노회(老獪)한 사마의와 대결하기에는 아직 어렸다. 그래서 제갈량이 주저하자 마속은 거듭 간청했다.
“다년간 병략(兵略)을 익혔는데 어찌 가정(街亭) 하나 지켜 내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패하면 저는 물론 일가권속(一家眷屬)까지 참형을 당해도 결코 원망치 않겠습니다.”
제갈량은 마속에게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좋다. 그러나 군율(軍律)에는 두 말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서둘러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지형부터 살펴보았다. 삼면이 절벽을 이룬 산이 있었다. 제갈량의 명령은 그 산기슭의 협로(峽路)를 사수만 하라는 것이었으나 마속은 욕심을 내어 적을 유인하여 역공할 생각으로 산 위에다 진을 쳤다. 그러나 마속의 생각과 달리 위나라 군사는 산기슭을 포위만 한 채로 산 위를 공격해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자 산 위에서는 식수가 끊겼고, 다급해진 마속은 전병력을 동원해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위나라 용장 장합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마속이 실패한 지경에 이르자 제갈량의 계책(計策)도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결국 전군(全軍)을 한중(韓中)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갈량은 평소에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지만 군율을 어긴 마속을 참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제갈량의 뛰어난 계책일지라도 그 수족이 되는 장수가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마치 손발이 묶인 지경이 되어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 한신의 와해지여(瓦解之餘) 고사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를 멸하고 한(漢)나라의 고조(高祖)가 된 유방(劉邦)은 소하(蕭何)․장량(張良)과 더불어 한나라의 창업 삼걸(創業三傑) 중 한 사람인 한신(韓信)을 초왕(楚王)에 책봉했다(BC 200). 원래 한신은 제나라의 왕에 책봉되어 있었으나 전쟁이 끝나고 보니 유방은 한신이라는 존재가 몹시 두려웠다. 한신이 물산이 풍부한 제나라의 70여개 성을 점령하고 있으면 좀처럼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뿐아니라 그 세력이 커질 것을 두려하였던 유방은 한신을 멀리 초나라의 왕으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한신은 못 마땅하였으나 고향인 초나라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하라는 유방의 말에 어찌할 수 없이 초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유방은 황제의 위에 오르고 문무백관이 모인자리에서 한나라를 창업한 삼걸(三傑)을 칭찬하기를 “내가 천하를 얻게 된 것은 내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세분의 덕택이었다.
장중에 앉아서 천리 밖의 승리를 내다볼 수 있는 점에 있어서는 장량 선생을 따를 수 없고,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군량을 풍부하게 공급해 준 점에 있어서는 소하 승상을 따를 수 없고,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승리를 쟁취하는 점에서는 나는 한신 장군을 따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세분의 인걸을 얻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신에게 묻기를 “장군은 백만대군을 거느릴 수 있다고 보는데, 장군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한신이 웃으며 대답하기를 “신은 백만대군뿐이 아니옵고 다다익선(多多益善)이옵니다”
유방이 다시 묻기를 “그러면 나의 경우에는 군사를 얼마나 거느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폐하께서 거느리실 군사의 한도는 십만인 줄로 아뢰옵니다.”
이 말에 유방의 얼굴은 불쾌한 빛이 감돌았고 좌중은 긴장감이 돌았다. 한창 동안 눈을 감고 있던 유방은 가벼운 미소를 띄면서 다시 묻기를 “한신 장군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하면서, 나는 겨우 십만밖에 거느릴 능력밖에 없다면, 장군은 어찌하여 나의 신하가 되었소?”
이 질문에 한신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기를“신은 병사들의 장수[兵之將]가 될 소질은 풍부하여도 장수들의 장수[將之將]가 될 소질은 전혀 없사옵니다. 그러나 폐하게서는 병사들의 장수[兵之將]는 못되어도 장수들의 장수[將之將]가 될 재질을 풍부하게 타고 나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신이 폐하의 신하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에 유방은 크게 기뻐하자 좌중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말에 유방은 내심 한신에게 형용하기 어려운 두려움을 갖고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
당시는 유방이 항우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기는 하였지만 아직 곳곳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실정에서 항우의 맹장(猛將)이었던 종이매(鍾離昧)가 예로부터 절친한 사이였던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고조(漢高祖)는 지난날 종이매에게 고전했던 악몽이 되살아나 크게 노하는 한편 한신이 역심을 품고 있다고 의심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고조(高祖)에게 초나라 농부 한 사람이 찾아와 ‘한신은 항우의 심복이었던 종이매를 숨겨 두고 있을 뿐 아니라 농지를 수탈하여 군사 훈련장으로 쓰고 있으니 이는 필시 반란을 도모하려는 의사임이 분명하다’는 보고를 하였다. 진노한 고조는 당장 군사를 파견하여 무력으로 평정하려 하였으나 참모 진평(陳平)이 제지하였다. “한신과 무력으로 싸워서는 안될 것 입니다. 그는 항우에 비길 장수가 아닙니다. 군사를 파견하여 그를 무력으로 평정하시려다가는 큰일 나시옵니다. 그러므로 지략으로써 그를 생포하셔야 합니다. 신에게 좋은 계책이 있사옵니다.” 그리하여 유방은 진평의 헌책(獻策)에 따라 제후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모든 제후(諸侯)들은 초(楚) 땅의 진(陳:河南省 內)에서 대기하다가 운몽호(雲夢湖)로 유행(遊幸)하는 짐을 따르도록 하라” 하며 제후들을 소집하고 이 자리에서 한신을 생포할 계략을 세웠다.
고조의 명을 받자 한신은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고조가 이미 종이매를 숨겨 두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다고 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한신은 종이매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를 숨겨둔 사실이 발견되었으니 나도 죽고 그대도 죽게 될 것이요. 그러니 어찌하면 좋겠소?” 이 말을 들은 종이매는 한신에게 말하기를 “지금 유방이 쳐들어오지 못함은 나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요. 나를 죽이고 나면 초왕도 반듯이 죽게 될 것이요”라고 하자 한신은 “내가 비록 한제의 손에 죽는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두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야 겠소.”라고 하였다. 이 말에 종이매는 한신에게 친구를 배신하고 영달을 꽤하는 자라고 분개하며 자결하고 말았다.
그래서 한신은 자결한 종이매의 목을 가지고 고조를 배알(拜謁)했다. 그러나 종이매의 말처럼 한고조 유방은 한신을 역적으로 포박하고 말았다. 한신은 자신의 일을 해명하였으나 유방은 과거에부터 마음에 두었던 모든 사실들을 들춰내어 죄로 간주하며 한신의 해명을 들으려하지 않았다. 여기서 한신은 분개하여 말하기를
狡兎死 良狗烹 高鳥盡 良弓藏
교토사 양구팽 고조진 양궁장
敵國破 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적국파 모신망 천하이정 아고당팽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좋은 사냥개는 보신탕이 되어버리고,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은 곳간에 처박히며, 적을 다 때려 잡고나면 지혜 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고 하더니, 그 말은 천하에 이미 정하여져 있는 말이구나. 나 자신이 이런 신세가 될 줄 누가 알았으리오.
이일을 두고 후대 사람들은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 하였다. 한신이 죄인이 되어 수레에 실려 오는 광경을 보고 대부 전긍(田肯)은 유방에게 간하기를 “한신은 천하를 통일하는데 많은 공로를 세운 사람입니다. 폐하께서 세인들의 말만 듣고 운몽까지 행차하셔서 한신을 친히 체포하여 오셨으니 이 어찌된 일이옵니까?”
“천하의 보고인 제나라를 평정한 사람이 바로 한신 장군이었으니 그 공로로 보아 한신 장군을 제나라 왕에 봉했어야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신 장군을 초왕으로 강등하였다가 이제 죄가 있다고 체포까지 해오셨으니, 사후처리를 그처럼 그릇되게 하신다면, 폐하의 성은(聖恩)을 누가 믿겠습니까?” 라고 직간을 하자 유방은 마음이 누그러져서 한신을 살려두고 회음후(淮陰侯)에 봉하고 함양에 머물게 하였다.
이후 진희라는 자가 대주에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유방은 친히 원정을 떠나려 하자 여황후가 묻기를 “한신 장군을 두고 어찌 폐하께서 직접 원정을 나간신단 말이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방이 답하길 “한신이 진희와 결탁하여 모반할지 모르기 때문이요. 한신은 계략이 워낙 탁월하여 기회가 주어지면 어떤 변란을 일으킬지 모르오. 한신은 나의 그늘에서만 살아가기에 너무도 위대한 인물이오. 그래서 그에게 모든 병권을 박탈해버린것도 그런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요.”라고 하였다.
그리고 유방은 여황후(呂皇侯)에게 임시로 국권을 주고 한신을 잘 감시하라고 한 후 원정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여황후는 한신이 진희와 내통하고 모반을 한다는 이유를 들어 처형하고 말았으니 한신은 너무나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신은 형장으로 끌려가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아아, 나는 ‘3국 분립’을 하라는 괴철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가 오늘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구나. 이것이 나의 운명이었단 말인가.”
이처럼 병사를 다루는 데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 자신하였던 병선(兵仙) 한신 일지라도 이미 병권이 박탈당해 버리고 병사가 없어진 연후에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이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강증산 성사께서 동곡에 머무실 때
그 동리의 주막집 주인 김사명(金士明)은 그의 아들 성옥(成玉)이 급병으로 죽은 것을 한나절이 넘도록 살리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도저히 살 가망이 보이지 않자 아이의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업고 동곡 약방으로 찾아왔도다. 증산께서 미리 아시고 “약방의 운이 비색하여 죽은 자를 업고 오는도다”고 말씀하시니라. 성옥의 모는 시체를 증산 앞에 눕히고 눈물을 흘리면서 살려주시기를 애원하므로 증산께서 웃으시며 죽은 아이를 무릎 위에 눕히고 배를 밀어 내리시며 허공을 향하여 “미수(眉叟)를 시켜 우암(尤菴)을 불러라”고 외치고 침을 흘려 죽은 아이의 입에 넣어주시니 그 아이는 곧 항문으로부터 시추물을 쏟고 소리를 치며 깨어나니라. 그리고 그 아이는 미음을 받아 마시고 나서 걸어서 제 집으로 돌아가니라.
● 미수(眉叟)를 시켜 우암(尤菴)을 불러라
미수(眉叟)는 허목(許木, 1595∼1682)의 호로 경서(經書)와 학문(學問)이 출중했던 거유(巨儒)로 남인(南人)의 영수였으며, 우암(尤庵)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호로 서인(西人)의 거두이자 노론(老論)의 영수(領袖)로 특히 예론(禮論)에 밝았던 인물이다.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항상 주장이 상반되는 정적(政敵)관계였다.
조선조의 현종 숙종조 사이, 노론과 남인 간의 당파 싸움이 한창 치열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노론의 기둥인 송시열이 그만 병이 들어 눕게 되었다. 우암 송시열은 정객으로서 뿐만 아니라, 유학자로서도 일세를 풍미한 큰 인물이려니와, 대쪽같은 성품을 지닌 청렴한 선비로서, 또 기골이 장대하고 역발산의 괴력을 지닌 장사로서도 일화를 많이 남긴 인물이다.
그는 좀 특이한 요법으로 건강을 유지했는데, 매일 아기의 오줌(童尿)을 마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다른 건강을 과시하곤 했는데, 추운 겨울에 냉방에서 잠을 자도 그로 인해서 오히려 방안이 훈훈해졌을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이와같이 절륜한 체력을 지녔던 그가 막중한 정사를 앞에 두고 그만 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백약이 무효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기의 병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아들을 불렀다. “지금 곧 미수대감께 가서 내 병세를 소상히 말씀드리고 화제약방문를 좀 얻어 오너라.” 미수가 누구인가?
그는 바로 당시 우암의 최대 정적인 남인의 영수(領首) 허목(許穆)을 말함이다. 당시 우암과 미수는 각기 노론과 남인을 이끌면서 대왕대비의 복상(服喪)문제를 비롯해서 대소 정사(政事)에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아니, 장안에 허다한 의원들을 놔두고 왜 하필이면 미수대감에게 화제를 부탁하십니까? 천부당 만부당한 분부이십니다. 만일 화제에 독약이라도 넣으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가족들은 한결같이 펄펄 뛰었다. 그러나 우암은 가족들의 청을 못들은 체 하고 큰 아들에게 채근하였다. “어서 가서 미수대감을 뵙고 오너라.”
아들은 하는 수 없이 허목을 찾아가 우암의 병세를 이야기 하자 그것은 오줌을 지속적으로 마신 결과에서 오는 요독(尿毒)으로 인한 중독증세라고 하며 화제를 지어주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허목이 적어 준 화제를 보니 약재 중에 독약인 비상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닌가! 설마 했던 일인데 실제로 독약이 들어 있는 것을 본 가족들은 대경실색하였다.
“보십시오. 당초에 저희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는 아버님을 독살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아무리 남인이라지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암은 가족들이 허목을 성토하는 것을 크게 꾸짖고, 곧 화제대로 약을 지어오게 하였다. “아니, 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독약이 든 약을 잡수시다니요?” 가족들이 극구 나서서 우암의 마음을 돌려보려 하였으나 우암은 끝내 독약이 든 약을 마시고야 말았다. 우암은 곧 쓰러져야 했으나, 이러한 가족들의 우려와는 반대로 오히려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것은 바로 독으로 독을 중화시키는 이독치독(以毒治毒)의 방법으로 극약처방이다.
우암은 미수가 의술에 밝고 공명정대한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미수는 또한 우암의 덕망과 도량을 믿었기에 화제를 물리치지 않으리라 확신했던 것이다. 미수와 우암은 경륜과 포부가 달라 정파(政派)를 달리하고, 정사(政事)를 논함에 있어서는 갑론을박하여도 인격적으로 서로 믿고 존경하며 아껴주는 도량이 있었던 것이다.
강증산 성사께서 말씀하시되
“신농씨가 농사와 의약을 천하에 펼쳤으되 세상 사람들은 그 공덕을 모르고 매약에 신농유업(神農遺業)이라고만 써 붙이고, 강태공(姜太公)이 부국강병의 술법을 천하에 내어놓아 그 덕으로 대업을 이룬 자가 있되 그 공덕을 앙모하나 보답하지 않고 다만 디딜방아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강태공조작(庚申年庚申月庚申日姜太公造作)이라 써 붙일 뿐이니 어찌 도리에 합당하리요. 이제 해원의 때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신농과 태공의 은혜를 보답하리라”고 하셨다.
● 신농유업(神農遺業)
신농씨(神農氏)는 상고(上古) 천존시대(天尊時代)를 연 삼황(三皇:복희, 신농, 황제) 중의 한 사람으로서 성(姓)은 강(姜)씨이다. 성(姓)으로서는 풍(風)씨가 먼저 있었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몸에 붙여 풍채(風采), 풍신(風身), 풍골(風骨) 등으로 몸 생김새의 칭호만으로 남아 올 뿐이고 그 다음은 강성(姜姓)이 나왔으니 인류 최초의 성씨(姓氏)이다.
신농씨는 인류 생활의 기반이 되는 농사법(農事法)과 의약(醫藥)을 내놓았다.
그때까지 인류 생활은 원시사회로써 산과 들에서 식량을 직접 취했으므로 생활이 불편하고, 단지 작은 무리를 지어 서로 흩어져 살았다. 그러므로 짐승에 가까운 삶이었다.
그러나 경작법(耕作法)으로써 밭을 일구고 씨를 파종하여 농사를 지음으로써 인간은 집단을 구성하고 사회를 형성시켰다. 이때부터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신농씨는 약성(藥性)을 알아내어 가르쳤으니 이것을 적어놓은 책이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이다. 이 책은 동양 한의학의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교육서(敎育書)이다.
그리고 이 외에도 주조법(鑄造法)를 내놓아 농기구나 칼이나 창 등을 제조하는 공업(工業)의 시초(始初)를 이루었고, 서로간에 물물교환하는 교역(交易)을 가르쳐 상업(商業)의 시초(始初)를 이루었다.
다시 말하면 신농씨는 사회를 이루는 원시 사농공상(士農工商)과 의약(醫藥)의 창시자(創始者)로서 인류의 생활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신농씨의 은혜를 입어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해 가는 것을 모르고, 단지 매약(賣藥), 즉 약방(藥房)에 신농유업(神農遺業)이라 써 붙여 신농씨가 물려 준 업이라는 글귀만 남겼으니 세상 사람들은 신농의 그 은혜를 모르는 것이다.
● 강태공의 부국강병술
또한 강태공(姜太公)은 중고(中古) 지존시대(地尊時代)를 연 장본인(張本人)으로서 성(姓)은 강(姜)이요, 이름은 상(尙)이고, 자는 자아(子牙)라 하고, 태공(太公), 여망(呂望), 태공망(太公望) 등으로 불리웠다.
강태공은 동이(東夷)의 사람으로 곤륜산(崑崙山)에서 수도(修道)하였고, 위수(渭水)에서 10년 간 3600개의 낚싯대를 꺾으며 때를 기다려, 결국 문왕(文王)을 만나고 문왕을 도와서 영대(靈臺)를 지어 신명(神明)을 모시고 이 신명을 땅에 봉(封)하여 지존시대를 열었다. 그후 문왕의 아들 무왕(武王)을 보필하여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멸하고 대업(大業)을 이루었다.
그는 부국강병술을 펼쳐 주(周)나라를 부흥케 하였는데 후대에 이것을 기록한 책이 육도(六韜)이다.
육도(六韜)의 도(韜)는 화살을 넣는 주머니, 싸는 것, 수장(收藏)하는 것을 말하며, 변하여 깊이 감추고 나타내지 않는 뜻에서 병법의 비결을 의미하며, 육도(六韜)는 문도(文韜)·무도(武韜)·용도(龍韜)·호도(虎韜)·표도(豹韜)·견도(犬韜) 등 6권 6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육도는 치세(治世)의 대도(大道)에서부터 인간학․조직학에 미치고, 정전(政戰)과 인륜(人倫)을 논하여 깊이 있게 가르치고 있다. 이 육도에 진(秦)나라 때 사람 황석공(黃石公)이 강태공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후대에 가르친 삼략(三略)을 더한 육도삼략(六韜三略)은 유명한 병서(兵書)이다.
후대에 한고조 유방을 도와 대업을 이룬 장량이 황석공으로부터 육도삼략을 수업 받았고, 신왕조(新王朝)를 이루었던 자들 중 육도삼략을 공부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후대에 사람들이 강태공의 부국강병술의 덕으로 대업을 이룬 자가 있으되 그 공덕에 대한 보은은 하지 않고 다만 강태공이 고안한 디딜방아에 ‘경신년경신월경신일강태공조작(庚申年庚申月庚申日姜太公造作)’이라고만 적을 뿐이다. 그러니 이것은 강태공이 베푼 은혜를 모르는 소치이다.
그러므로 이제 해원의 때를 맞이하여 진법에 일만 이천 도통군자가 모여들고 그들에 의해 천하에 사농공상이 크게 일어나 지상천국이 이루어지고, 강태공이 내놓은 부국강병술이 크게 일어나 부족함이 없는 도통진경세계가 되니 이것이 바로 신농유업(神農遺業)이고 강태공의 부국강병술이니 이로써 신농과 강태공의 은혜에 모든 인간이 보답하게 되는 것이다.
강증산 성사께서
“강태공(姜太公)이 십 년의 경영으로 낚시 三천 六백 개를 버렸으니 이것이 어찌 한갓 주(周)나라를 흥하게 하고 제나라 제후를 얻으려 할 뿐이랴. 멀리 후세에 전하려 함이니라. 나는 이제 칠십이 둔으로써 화둔을 트니 나는 곧 삼이화(三离火)니라”고 말씀하셨도다.
그리고 이어 말씀하시기를 “문왕은 유리(羑里)에서 삼백팔십사 효(爻)를 지었고 태공(太公)은 위수(渭水)에서 삼천육백 개의 낚시를 버렸는데 문왕의 도술은 먼저 나타나고 태공의 도술은 이 때에 나오리라” 하시고 “천지무일월 공각(天地無日月空殼) 일월 무지인 허영(日月無知人虛影)”이라 하셨도다.
● 강태공과 문왕의 고사
강태공(姜太公, BC 1212(?)~BC 1073)은 중국 상(商)나라 사람으로 본래 성은 강(姜)씨이고 이름은 상(尙)이며, 자는 자아(子牙)이다. 그의 조상이 우(禹)임금의 치수 사업을 도운 공로가 있어 하(夏)시대에 여(呂), 지금의 하남성 남양 서쪽 땅에 봉해 졌으므로 여(呂)씨가 되었다. 그러므로 여상(呂尙)이라 부르기도 한다. 문왕의 아버지 태공(太公)이 오래도록 기다리며 바라던[望] 사람이라 하여 태공망(太公望) 또는 강태공(姜太公)이라고 불렀다.
그는 젊어 시절에는 곤륜산에서 수도를 하였다고 전해지며, 이후 나이가 들도록 벼슬을 하지 않고 동해가에 숨어살면서 매일 위수(渭水)에 나가 낚시만 하였는데, 미끼가 없는 곧은 낚시 바늘을 수면으로부터 석자 가량 떨어진 허공에 드리운 채로 낚시를 하였는데 10년 동안을 이와 같이 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가 문왕을 만나는 10년 동안을 위수에서 낚시를 하며 하루에 하나씩 낚시대를 위수에 버렸으니 3천 600일을 이와 같이 하였다.
맹자(孟子) 「이루(離婁)」에는 “태공이 은나라 주왕(紂王)의 폭정을 피해서 동해가에 살다가 문왕이 떨쳐일어나자, 천하의 존경을 받는 원로로서 귀의하였다”라고 하였다.
문왕(文王)은 성이 희(姬)씨로 이름은 창(昌)이다. 생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 의하면, 그는 용의 얼굴에 범의 어깨를 하고 신장이 10척이었으며 가슴에 4개의 젖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주(周) 왕조 시조 후직의 13대손 고공단부는 덕을 쌓아 많은 사람들의 인심을 얻고 있었는데 훈육 융적의 공격을 받아 기산으로 옮겨가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성곽과 가옥을 건축하고 읍을 나누어 백성을 다스렸으며 오관유사를 설치한 후 국호를 주(周)라 하였다. 당시 주는 은나라 제후국의 하나였다.
고공단부의 손자 희창(姬昌)은 기산(岐山) 아래에 나라를 세우고 선행하고 바른 정치를 폈다.
그가 바로 주문왕이다.
당시 은(殷)나라의 28대째 마지막 군주가 된 주왕이 제위에 올랐다. 주왕(紂王)은 수(受)라고도 하며 제신(帝辛)이라고도 한다. 생몰연대는 미상이며 제을(帝乙)의 아들이다. 제을이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하여 중국역사상 유명한 폭군으로 기록되었다. 33년간 재위하였다. 주왕은 신체가 장대하고 외모가 준수하며, 맨손으로 맹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또 총명하고 재치가 있으며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그는 여러 차례 산동성의 동이(東夷)를 공격하여 많은 노예들을 포로로 잡아왔다. 그는 또 동남쪽에도 주의를 기울여 중원문화를 회하(淮河)․장강(長江) 유역으로 전파함으로써 통일 중국의 면모를 갖추는데도 어느 정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주왕은 본성(本性)이 황음무도하고 포악하였으므로 이후 달기(妲己)라는 요녀에게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고 폭정을 일삼았다.
詩經 「大雅篇」에는 ‘고대 중국 하(夏), 은(殷), 주(周)의 3왕조 중 은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은 원래 지용(智勇)을 겸비한 현주(賢主)였으나 그를 폭군 음주(淫主)로 치닫게 한 것은 정복한 오랑캐의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공물로 보내 온 달기(妲己)라는 희대의 요녀 독부였다’라고 전한다.
기주에 흉년이 들어 주왕에게 공물을 진상을 할 수가 없게 되자 주왕은 격분하여 군사를 이끌고 기주를 정벌하려고 하자 유소씨는 자신의 외손녀 달기를 보내어 주왕의 마음을 달래려고 하였다.
달기를 본 주왕은 한 눈에 반해, 얼마 안가서 자신의 정실부인을 폐하고 달기를 정실로 맞아들인다.
주왕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도읍의 남쪽에 길이 3리, 높이 1000척의 녹대(鹿台)와 적성루(摘星樓)를 지었다.
또한 창고에는 백성들로부터 수탈(收奪)한 전백(錢帛)과 곡식이 산처럼 쌓였고, 국내의 온갖 진수기물(珍獸奇物)은 속속 궁중으로 징발되었다. 또 국력을 기울여 호화찬란한 궁정을 짓고 미주와 포육으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었다.
그 못 둘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젊은 남녀의 한 무리가 음란한 북리무악(北里舞樂)에 맞추어 광란의 춤을 추면 주왕의 가슴에 안긴 달기는 몰아(沒我)의 황홀경에서 음탕한 미소를 짓곤 했다. 또 때로는 낮에도 장막을 드리운 방에서 촛불을 밝히고 벌이는 광연(狂宴)이 주야장천(晝夜長川) 120일간이나 계속되기도 했는데 은나라 사람들은 이를 장야지음(長夜之飮)이라 일컬었다. 그리고 주왕은 달기의 말에 따라 포락지형(炮烙之刑)이란 형벌을 만들어 제왕의 행동을 비방하는 자들을 불충자로 몰아 포락(炮烙)의 형을 가하였다. 포락지형이란 속이 빈 구리 기둥[銅柱]을 숯불로 달구어 걸쳐놓고 그 위에 기름을 바르고 기둥을 건너면 석방시키겠다는 조건을 내리고 죄인을 그 위로 건너가게 하는 형벌이다. 죄인이 미끄러운 구리 기둥을 건너다가 숯불 속으로 떨어져 타 죽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모습을 달기와 주왕은 즐기며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같이 상궤(常軌)를 벗어난 광태(狂態)를 보다 못해 간언을 하였던 삼인(三仁)으로 불리던 세 왕족이 있었다.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이 그들이다.
주왕의 이복형 미자계(微子啓)가 여러 차례 그에게 충고를 하였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자계는 하는 수 없이 도성을 떠나 숨고 말았다. 주왕의 삼촌 비간(比干)이 그에게 충고를 하자 그는 노하여 “당신은 성인인가 보오. 성인의 심장은 구멍이 일곱 개라던데 당신의 심장에 구멍이 몇 개인지 내가 한번 봐야겠소!”라고 하면서 부하에게 명하여 비간의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내어 죽여 버렸다. 비간의 참살 소식을 들은 기자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척하며 남의 종노릇을 하였는데 결국 주왕이 그마저 잡아서 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왕의 보좌역인 삼공(三公) 중 구후(九侯)는 달기의 계략에 빠져 묶인 채로 소금에 절여져 죽었으며 시체는 젓갈로 담겨져서 여러 제후들에게 보내어졌다. 참다못한 악후(鄂侯)는 주왕에게 그의 악행을 간하다가 잡혀나가서는 말려 죽었다.
서백 희창[후에 문왕]은 구후와 악후가 끔찍한 꼴로 자신의 앞에 놓여지니 분노하였다. 이에 북쪽을 다스리는 제후 ‘숭후 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달기에게 아부하여 희창이 구후의 젓갈을 받지 않았다는 소식을 주왕과 달기에게 고했다.
끌려나간 서백은 주왕에게 직간(直諫)하길 “은나라 왕이 거울로 삼아야 할 선례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夏)나라 걸왕 때에 있다[殷鑑不遠 在夏侯之世(은감불원 재하후지세)]”라고 하였다. 이 말은 “600여 년 전에 은왕조의 시조인 탕왕(湯王:주왕의 28대 선조)에게 주벌당한 하왕조의 걸왕(桀王:주왕과 대동 소이한 폭군음주)을 거울삼아 그 같은 멸망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뜻이다.
분노한 달기는 당장 희창을 죽이라고 하지만 대신들이 나서서 극구 반대하자 주왕은 희창의 세력이 크니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유리(羑里)에 유폐시켰다. 이때가 BC 1144년으로 희창은 3년간 유리에 갇혀 있으면서 팔괘(八卦)를 깊이 연구하여 384효(爻)를 짖고 주역(周易)을 만들었다.
후에 희창의 장자 백읍고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주왕의 배알하러 갔다가 그의 준수한 모습에 달기가 반해 유혹하였지만 넘어오지 않자 달기는 그를 모함해 죽인다. 그리고 주왕(紂王)에게 간하여 백읍의 시신으로 만두를 만들어 희창에게 먹이라고 하였다. 주왕은 평소 희창이 점술에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내심 두려워하던 터라 이를 시험해볼 요량으로 백읍(伯邑)의 시신으로 고기만두를 빚어 그 아버지 희창[文王]에게 보내어 먹이라 하였다.
한편 희창[文王]은 아침에 쾌를 뽑아 점을 쳐본 결과 그 아들이 죽고 그 시신이 삶겨서 자신에게 돌아 옮을 알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자기 아들의 골육(骨肉)으로 빚은 만두를 가져오나, 희창은 이를 짐짓 모른 체 하고 만두를 삼킨다.
여기서 아는 체 하다가는 자신이 다시는 여기서 나갈 수 없음을 알았기에 적지 않은 눈물을 삼켰지만 마음에 울분을 참으며 겉으로는 태연한 체 하였다.
주왕(紂王)은 희창[文王]이 아주 순수히 고기만두를 먹어치웠다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희창을 대현철(大賢哲)이라고 하더니 자기 아들의 골육(骨肉)으로 빚은 만두조차도 모르고 먹는데 알기는 무엇을 안단 말인가’ 하고 경계심을 풀게 되었다.
얼마 후 희백의 신하들은 그를 석방시키기 위하여 많은 미녀와 명마, 진귀한 보석 등을 모아서 주왕에게 바치자 주왕은 희창이 구금 중에도 전혀 원망의 빛이 없고, 또 별로 두려워할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를 석방하고 다시 서백에 임명하였다.
석방되어 귀국하는 서백 희창[문왕]은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여정에 올랐다.
기산으로 돌아온 희창은 주족(周族)을 강성하게 만들어 주왕을 멸하고 천하를 구할 결심하였다. 그에게는 많은 신하와 장수들이 있었지만, 전체를 통괄할 수 있는 인재가 없어 그러한 사람을 백방으로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선친이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나 영호진(令狐津)의 나루터에 있는데 선친의 뒤에는 수염과 눈썹이 하얀 노인이 서있었다. 선친은 문왕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창아 너를 보필해줄 지혜로운 자가 주나라로 올 것이니라. 주나라는 그로인해 흥할 것이니라.”
참으로 기이한 꿈이었다. 이 위대한 현인이 자기의 나라 어디엔가 살고 있다고 들은 듯 하였다. 그러나 자세히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희창은 시종들을 데리고 이곳저곳 사냥을 다니며 마음속으로 늘 현인(賢人)을 갈구하였다.
다음은 육도삼략(六韜三略) 「문사(文師)」편에 나오는 문왕이 강태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어느 날 문왕(文王)이 사냥을 나가려 하였다. 이에 사관 편(編)이 거북점을 보더니 읖조렸다.
田于渭陽 위수가에 사냥을 나가시면
將大得焉 풍성한 수확이 있을 것이라네
非龍非彲 용도 아니고 이무기도 아니며
非虎非熊 호랑이도 아니고 곰도 아니지요
兆得公侯 어진 현인을 만나게 될 조짐이니
天遺汝師 이는 하늘이 내려 주신 훌륭한 스승이라네.
문왕이 묻기를 “점괘가 참으로 그러한가?”
사관 편이 대답하길 “저의 선조인 사관 주가 우임금을 위하여 점을 쳐서 명재상 고요를 얻었을 때의 점괘가 이와 견줄만 합니다” 하였다.
문왕은 사흘 동안 목욕재계한 다음 수렵용 수레와 말을 타고 위수의 북쪽으로 사냥을 나갔다.
문왕은 위수에서 띠풀을 깔고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한참을 살펴보았다. 그 노인은 괴이하게도 미끼가 없는 곧은 낚시를 수면 위에 석자가량 떨어진 허공에 드리운 채로 낚시를 하고 있었다.
현인으로 직감한 문왕이 다가가 정중히 인사하며 물었다.
“낚시를 즐기시는가 봅니다.”
태공망이 대답하였다.
“소인은 자기의 일이 이루어짐을 즐거워하고[소인락득기사(小人樂得其事)],
군자는 자기의 뜻이 이루어짐을 즐거워한다[군자락득기지(君子樂得其志)]고 들었습니다.
지금 제가 낚시를 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문왕이 물었다.
“이와 비슷하다는 말은 무슨 뜻 입니까?”
태공망이 대답하였다.
“낚시에는 세가지 모책이 있습니다.”
후한녹봉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모책과 많은 상을 내려 병사들이 목숨을 바치게 하는 모책과 벼슬을 주어 신하들에게 충성을 다하게 하는 모책입니다.
대저 낚시라는 것은 이것을 구하여 얻는 것인지라 그 담긴 뜻이 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가히 커다란 이치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문왕이 “거기에 담긴 깊은 이치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태공망이 대답하였다.
“낚시줄이 가늘고 미끼가 뚜렷하면 작은 물고기가 물고, 낚시줄이 약간 굵고 미끼가 향기로우면 중치의 물고기가 물고, 낚시줄이 굵고 미끼가 크면 큰 물고기가 물게 마련입니다.
물고기는 미끼를 물고 낚시 줄에 낚이고, 인재는 봉록을 받아먹고 군주에게 복종합니다.
그러므로 미끼를 드리우면 물고기를 낚아서 쓸 수 있고, 봉록을 내걸면 훌륭한 인재를 얻어서 능력을 쓸 수 있는 것 입니다.”
문왕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면 천하가 돌아와 복종하겠습니까?”
태공망이 대답하였다.
“天下非一人之天下 乃天下之天下也
천하비일이니천하 내천하지천하야
천하는 군주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며, 천하 만백성의 천하입니다.
同天下之利者則得天下 擅天下之利者則失天下
동천하지이자칙득천하 천천하지이자칙실천하
천하의 이익을 백성과 더불어 나누는 군주는 천하를 얻고, 천하의 이익을 자기 마음대로하려는 군주는 반듯이 천하를 잃게 됩니다.
天有時 地有財 能與人共之者仁也. 仁之所在 天下歸之
천유시 지유재 능여인공지자인야. 인지소재 천하귀지
하늘에는 때[춘하추동]가 있고, 땅에는 재물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능히 함께하여 베푸는 자를 어질다고 합니다. 어짊이 있는 곳에 천하는 돌아갑니다.
免人之死 解人之難 救人之患 濟人之急者 德也.
면인지사 해인지난 구인지환 제인지급자 덕야
죽을 처지에 놓인 사람을 살려주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풀어주고, 우환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고, 위급한 지경에 빠진 자를 건져주는 자를 덕(德)이 있다고 합니다.
德之所在 天下歸之
덕지소재 천하귀지
덕이 있는 곳에 천하는 돌아갑니다.
同憂同樂 同好同惡者義也 義之所在 天下赴之
동우동락 동호동오자의야 의지소재 천하부지
백성들과 시름을 함께 나누고 즐거움을 함께하며,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고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을 함께 미워하는 것을 의(義)라고 합니다.
의가 있는 곳에 천하 사람들이 나아갑니다.
凡人惡死而樂生 好德而歸利 能生利者道也
범인오사이낙생 호덕이귀리 능생리자도야
모든 사람들은 죽는 것을 싫어하고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덕(德) 보는 것을 좋아하고 이익을 좇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능히 살려주고 이익을 주는 자는 도(道)가 있다고 합니다.
道之所在 天下歸之
도지소재 천하귀지
도가 있는 곳에 천하는 돌아갑니다.”
문왕이 다시 절을 하고 이르기를 “제가 어찌 감히 하늘이 내리신 명을 받지 않겠습니까” 하고 다시 말하길 “선친이신 태공(太公)께서 자주 나타나 ‘성인이 주나라로 올 것이다. 주나라는 그로 인하여 흥성케 될 것이다’라고 하며 기다리셨는데[望], 공께서 바로 그분이십니다” 하고는 그를 수레로 모셔서 칭하길 태공망(太公望)이라 부르며 국사(國師)로 봉하였다.
이때가 주왕 15년(기원전 1140년)에 강태공의 72세에 문왕을 만났다. 그후 강태공은 다시 국상(國想)에 임명되어 정치와 군사를 통괄하였다.
강태공의 노력으로 주족(周族)은 안정 속에 발전을 거듭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후 견융(犬戎), 밀수(密須) 등의 부족을 공격한 다음, 상의 지지 세력인 려(黎:지금의 산서성 長治市 서남), 한(邗: 지금의 하남성 泌陽縣 서북), 숭(崇: 지금의 하남성 嵩縣 북쪽) 등을 멸망시키고, 숭에 도성인 풍읍(豊邑)을 세워 상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삼았다. 문왕(文王)은 만년에 이르러 이미 천하의 3분의 2를 장악하여, 그 영토가 서로는 지금의 섬서, 감숙 일대, 동북으로는 지금의 산서 여성(黎城), 동으로는 지금의 하남 필양(泌陽), 남으로는 장강(長江), 한수(漢水), 여수(女水) 유역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상의 도읍 조가(朝歌)에 바싹 다가감으로써 상을 멸망시킬 기초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을 멸망시킬 계획만 남겨놓고 문왕은 병에 걸렸다. 그는 자신이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아들 희발(姬發)에게 대임을 맡겼다. 그가 바로 무왕(武王)이다. 문왕은 서주(西周)의 건설에 기초를 확립하였으며, 50년간 주족(周族)의 장을 지낸 후 97세에 병으로 죽었다.
무왕(武王)은 주의 주력군이 동남에 있을 때를 노려 대군을 거느리고 주왕을 토벌하였다. 이때 주왕은 달기와 녹대(鹿台)에서 한창 술을 마시고 있다가 그 소식을 접하고 황급히 병사 70만을 편성하여 전선으로 달려가서 무왕의 군대를 맞이하였다. 양군은 목야(牧野:지금의 하남성 淇縣 남쪽)에서 마주쳤다. 무왕의 군대가 용감하게 돌격하자 주왕의 군대는 무기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주왕은 급히 조가성(朝歌城)으로 도망가서 명이 다한 것을 알고 자살을 결심하였다. 그는 또 죽은 후에 백성들이 자기의 시체를 꺼내 분풀이할 것을 두려워하여 궁중의 모든 패옥을 가지고 20미터 높이의 녹대로 가서 온몸에 패옥을 걸치고 녹대 아래에 마른풀을 쌓아 불을 지르게 하고 주왕은 불에 타 죽었다.
강태공은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아들 무왕(武王)을 도와 폭군 주(紂)왕을 쳐서 멸망시켰던 것이다. 이로써 상(商)나라는 무너지고 주(周)나라가 건립되었다.
이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개국공신으로 산동성(山東省)에 봉군하고 나라 이름을 제(濟 : 지금의 산동지방)라 하였으며 강태공으로부터 20대 강공(康公)까지 왕위를 계승 하였다.
● 강태공의 도술은 이제 나타나리라
후대 사람들은 강태공이 단지 주나라 문왕을 도와 상(商)나라 주왕을 멸하고 그 공로로 제나라에 봉해진 현자라고만 알뿐이고 봉신(封神)을 하고 지존시대(地尊時代)를 열은 사실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한다. 5500여 년 전 복희(伏羲)는 황하에서 용마(龍馬) 등에 그려진 하도(河圖)를 보고 팔괘[八卦, 희역(羲易)]를 지어 신명을 하늘에 봉(封)했는데 이로써 천존시대(天尊時代)가 열렸다. 그러나 이 천존시대는 때가 되면 바뀌게 되어 있다. 즉 천존시대는 희역의 섭리로써 봄철과 같은 태동의 섭리인 것이다. 인류역사의 태동기에 필요한 섭리이다. 봄이 다가고 나면 여름이 오듯이 희역의 섭리는 때가되면 주역(周易)의 섭리로 바뀌어야 했던 것이다. 즉 주역은 역사에 있어서 여름철의 성장기의 섭리가 된다. 주역은 문왕(文王)이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그려진 낙서(洛書)를 보고 지은 팔괘(八卦)로써 유리(羑里)에 유폐되어 있는 동안에 완성하게 된다. 강태공은 신명을 땅에 봉(封)하고 지존시대를 열어야했으므로 신명을 봉할 새로운 역(易)을 가진 자를 만나야만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강태공이 위수(渭水)에서 10년 간 3600개의 낚싯대를 버리며 때를 기다린 것은 결국 지존시대를 열 수 있는 새로운 역(易)을 가진 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역사적 사실로만 보자면 문왕이 강태공과 같은 현자(賢者)를 찾아 주왕을 멸하고 통일 대업을 이루는 것이겠지만 실재는 그와 반대로 강태공이 문왕을 낚기 위해 위수에서 10년간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봉신방(封神榜)은 땅에 신(神)으로 봉(封)할 365명의 명단을 말한다. 신을 봉하자면 일단 인간이 죽어서 혼(魂)만의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죽어 신이 되어야 된다. 그리고 그것도 보통 신으로는 되지 않고 충분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주왕의 폭정과 문왕의 역성혁명 중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고, 강태공은 문왕을 도와 주왕을 멸하는 과정에서 그 임무를 완수해 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강태공의 10년 동안 위수에서 낚시를 한 것은 봉신(封神)을 하고 지존시대를 열 도수(度數)를 짜는 과정이고 그 끝에 문왕을 만나 주역(周易)의 괘상(卦象)에 따라 봉신(封神)을 실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증산 성사께서 “강태공(姜太公)이 십 년의 경영으로 낚시 三천 六백개를 버렸으니 이것이 어찌 한갓 주(周)나라를 흥하게 하고 제나라 제후를 얻으려 할 뿐이랴. 멀리 후세에 전하려 함이니라.”하신 것은 이러한 강태공의 봉신(封神)으로 지존시대(地尊時代)를 열어 3000년간 인간의 운수를 이끌어 온 것을 말함이다.
지존시대의 모든 운수는 땅에 봉해진 신명의 기운을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살아서는 집터 보고 죽어서는 묘터를 보며 이사를 할 때도 방위를 따져서 이사를 가는 이유 등은 모두 지존시대에 신명이 땅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국운(國運)까지도 지기(地氣)의 영향을 받았으니 도읍을 정할 때 지관의 말을 따른 것도 모두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지존시대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바뀌게 되어 있다. 이제는 정역(正易)이 나타나고 정역에 의해 인간에게 봉신(封神)을 하는 인존시대(人尊時代)가 도래되는 것이다. 정역에 의한 인존시대는 가을철의 결실과 완성을 결정짓는 섭리가 된다. 그러므로 천존시대와 지존시대는 바로 이 인존시대의 결실을 보기위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강태공의 10년 경영으로 위수에 3600개의 낚시를 버린 것은 먼 훗날 인존시대를 준비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인존시대는 인간에게 신(神)을 봉(封)하는 것으로 신인상합(神人相合)이 되어 신선(神仙)이 실현되는 것이다. ‘문왕의 도술은 먼저 나타나고 강태공의 도술은 이제 나타난다’함은 다름이 아닌 문왕의 주역은 지존시대를 열어 3000년 동안 인류가 지기의 영향으로 살아가게 한 것에 있고, 강태공의 도술은 지존시대 3000년 동안에 유ㆍ불ㆍ선의 도(道)가 지기(地氣)를 타고 일어나게 하고 선천의 유ㆍ불ㆍ선도에 도통(道通)을 한 신(神)들이 이제 후천의 인존시대를 맞이하여 수도 완성된 인간에게 봉신(封神)이 되도록 한 것이다. 강태공이 3600개의 낚시를 위수에 버리면서 짜둔 도수는 바로 신인상합 할 유불선의 도통신들을 준비함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준비가 되었으니 강증산 성사께서는 이제 칠십이둔으로 화둔(火遁)을 틀어 선천(先天)의 주역시대에서 후천(後天) 정역시대로 넘어가는 개벽의 공사를 보시고 신인상합 할 새로운 도수를 짜두신 것이다. ‘나는 곧 삼이화(三離火)니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개벽을 이룩하시는 섭리의 주재자이심을 말씀하신 것으로 김일부 선생이 지은 역(易)의 중궁(中宮)에 2ㆍ7화(火)가 자리하고 있음을 말한다. 일부역(一夫易)은 우주의 주재자가 천지를 개벽하는 역(易)으로써 시루와 솥을 걸어놓고 불을 때고 완성시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연후에 비로소 정역(正易)의 인존시대가 도래되니 1ㆍ6수(水)가 중궁에 들어가는 우물 정(井)자가 되는 것이다. 이 우물 정(井)자는 바둑판의 모양으로 바둑판 360점에 36명씩 즉 일년 360일을 관장하는 군자(君子)가 하루 36명이 자리하면 일만 이천 도통군자가 봉신(封神)을 받게 되어 천지의 운영을 맡아가는 인존시대가 이룩되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선경세상이라 한다. 강태공의 도술은 여기에까지 미쳐 있는 것이니 범인의 생각으로는 가히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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