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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사론 제3권
10) 오상결처(五上結處)
오상분결(五上分結)이라 하는 것은,
색애(色愛)ㆍ무색애(無色愛)ㆍ도거(掉擧)ㆍ흔들림ㆍ만(慢)ㆍ무명(無明)을 말한다.
[문] 오상분결에 어떤 성질이 있는가?
[답] 색애(色愛)는 색계에 대한 애착이니, 이것은 깊이 사유함으로써 끊게 된다.
무색애(無色愛)라는 것은 무색계에 대한 애착이며, 이것은 깊이 사유함으로써 끊게 된다.
흔들림[調]ㆍ만ㆍ무명이라 하는 것은 색계와 무색계에 함께 존재하며 깊은 사유로써 끊게 된다.
이 여덟 종류가 오상분결의 성질이다.
이 상분결(上分結)의 성질을 말하자면, 그 종류와 모습과 바탕이 갖고 있는 것으로 자연히 성질을 말하고서는 곧 그 행을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상분(上分:위 세계)을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 상분(上分)에는 어떤 뜻이 있는가?
[답] 장차 위 세계에 이르려 하다가 떨어지면 위 세계에 올라 태어나려는 속박이 생긴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상분(上分)이라 말하는 것이다.
[문] 만약 장차 위 세계에 이르려 하다가 떨어져서 위 세계에 오르려는 속박심이 생기기 때문에 이를 상분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흐름[流]은 세우지 않아야 하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여러 세계, 여러 태어날 곳[趣]으로 흘러내려서 여러 가지 생명체로 생사윤회 가운데서 떠돌아다니는가?
[답] 그렇지 않다.
[문]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답] 여러 가지 세계가 있는 까닭에 상분결(上分結)을 세우는 것이다.
즉 장차 그가 위 세계에 이르려 하다가 떨어지면 위 세계에 오르려는 속박심이 생긴다.
그러나 거기서 해탈하는 까닭에, 또 바른 지혜를 얻는 까닭에, 성인의 도에 들어가는 까닭에 선법(善法) 때문에 흐름을 세워 생사에서 벗어나 제일유(第一有) 가운데 이르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이것은 하해탈(下解脫:아래 세계에서 해탈하는 것)이며, 바른 지혜이며 성인의 도이고 선법이다.
그런 까닭에 존자 바발라다(婆跋羅茶)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즉 “오랫동안 위 세계에 태어났다가 아래 세계로 흘러내려 왔다.
그런 까닭에 흐름을 말하게 되는 것이며,
이 상분결(上分結)은 위 세계에서 생기는 결이지 아래 세계의 결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 이 논리 가운데서는 다시 다른 논리가 생길 수 있다.
왜냐하면 상분(上分)은 위 세계에서 생기지 아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답] 진리를 밝혀[見諦] 깊은 사유로써 결을 끊는 것은 위 세계에서도 생기고 아래 세계에서도 생긴다.
그러나 이 상분결(上分結)이라 하는 것은 오로지 깊은 사유로써만 끊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위 세계에서만 생기지 아래 세계에서는 생기지 아니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성인의 생각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이지, 범부가 얻을 수 있는 결은 아니다.
그 성인이라 하는 것은 아나함(阿那含)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며,
수다원(須陀洹)이나 사다함(斯陀含)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문] 이 논리 가운데서는 다시 다른 논리가 생기게 된다.
왜냐하면 상분결(上分結)은 아나함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생각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수다원이나 사다함의 경지에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답] 그 일에 관해서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즉 그것은 위 세계에서 생기는 결이지, 아래 세계에서 생기는 결은 아니다.
이 수다원이나 사다함의 경지는 위 세계에서도 생기고 아래 세계에서도 생기지만,
아나함의 경지는 오로지 위 세계에서만 생기고 아래 세계에서는 생기지 아니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건너간 경계[度界]이며 과보를 얻은[得果] 경계라 말한다.
건너간 경계란 욕계의 강물을 건너갔다는 뜻이고,
과보를 얻었다는 것은 아나함(阿那含)의 과보를 얻었다는 것이다.
수다원이나 사다함은 비록 과보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아직 경계를 건너가지 못한 경계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경계를 건너간 사람의 결을 말한 것이며, 또한 하분결이 다하였음을 알게 된 사람을 말한 것이다.
수다원이나 사다함은 경계도 건너지 못하였고, 또한 아래 세계에 하분결이 다하였음을 알지도 못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과보를 얻고 공덕을 행하며 악을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을 말한 것이다.
수다원이나 사다함의 경지는 비록 과보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공덕을 행하면서 악도 행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과보를 얻고 범부와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아니하는 사람을 말한 것이다.
수다원이나 사다함의 경지는 비록 과보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범부와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손뼉을 치고 주먹을 쥐고 몸을 굽혔다 폈다 하면서 몸과 입으로 행동을 일으키고, 처자(妻子)와 더불어 함께 살며,
금은 보물을 지니고 전단향(栴檀香)과 화려한 타래머리를 몸에 붙여 두고,
높고 넓은 큰 침상에 누워서 여자의 몸을 쓰다듬고 만지며 두 사람이 한 쌍이 되어 서로 가까이 하지만,
아나함의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는 영원히 이러한 일은 없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과보를 얻어 다시는 세간에 돌아오지 아니하고, 어머니의 태속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지옥의 구리 가마솥 안에도 들어가지 아니하고, 죄인으로 옥에 갇히는 일도 없고, 다시는 날 것이나 익힌 창고[生熟藏] 속에 처하지 아니하는 사람의 번뇌를 말한 것이다.
수다원이나 사다함의 경지는 비록 과보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짐짓 이런 일이 있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상분결(五上分結)은 아나함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생각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결이며 다른 경지의 사람이 얻는 결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하나의 애(愛)를 두 개의 상분결(上分結)로 내세우고, 흔들림ㆍ만ㆍ무명은 하나의 상분결(上分結)로 세우는가?
[답] 마땅히 세워야 한다.
만약 그렇게 세우지 아니하였다면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도 다른 말씀이 계셨던 것이다.
즉 내용의 문(門)ㆍ약(略)ㆍ도(度)를 나타내시려는 것이니, 그 내용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에 있어서의 진리는 다른 어떤 진리도 이 진리를 넘어설 수 없으며,
그 진리로써 모든 법의 성질을 다 알게 되고 모든 행을 알게 되며 모든 법을 홀로 담당할 수 있으며,
그 진리는 독립된 진리로서 독립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문(二門)ㆍ이략(二略)ㆍ이도(二度)ㆍ이거(二炬)ㆍ이명(二明)ㆍ이광(二光)을 나타냄으로써 둘이라는 숫자로 나타낸다.
가령 애 가운데 두 가지의 상분결(上分結)을 세우면, 이와 같이 흔들림[調]ㆍ만(慢)ㆍ무명에도 마땅히 두 가지 상분결을 세워야 하고,
만약 흔들림ㆍ만ㆍ무명에 하나의 상분결만 세운다면, 애에도 역시 하나의 상분결만을 세워야 한다.
그러므로 이 상분결은 마땅히 네 가지 상분결이 존재하거나 또는 여덟 가지 상분결이 존재하여야 한다.
때문에 이문을 나타내는 데에서부터 둘이라는 숫자로 나타내기까지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는 경계[界]에서 끊어지고 경지[地]에서 끊어지고 종자[種]에서 끊어진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 때문에 모든 견이 성해진다.
그런 까닭에 애에 두 개의 상분결(上分結)을 세운 것이며,
흔들림과 만과 무명에는 하나의 상분결만 내세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답] 가령 졸음[睡]과 흔들림의 경우 이 두 가지는 모두 삼계(三界)에 다섯 종류가 있으며, 모든 오염된 생각을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왜 흔들림은 상분결(上分結)이라 규정하고 졸음은 상분결이라 규정하지 않는가?
[답]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법문에서의 진리는 다른 어떤 진리도 이를 넘어설 수 있는 진리는 없다.
그것으로 법의 성질을 다 알게 되고 행의 진리를 다 알게 된다.
상분결의 모습[相]이 있으면 상분결이라 규정하고 상분결의 모습이 없으면 상분결이라 규정하지 아니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근심이 성하고 고통이 지나치게 많은 것을 말한 것이다.
근심이 심한 까닭에 『바수밀경(婆須蜜經)』에 이르기를,
‘불선의 대지(大地) 가운데는 근심이 성한 까닭에 이에 대한 시설(施設)을 마련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시설이란 범부에게 욕(欲)으로 인한 활동이 일어날 때는 곧 다섯 가지 법이 생긴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욕애의 사(使)가 생기고,
두 번째는 욕애로 생기는 사의 종자가 생기며,
세 번째는 무명의 사가 생기고,
네 번째는 무명에 의한 사의 종자가 생기며,
다섯 번째는 흔들림이 생긴다.
근심이 성한 까닭에 아비담(阿毘曇)에서는 잡건도(雜犍度) 안에서 다루었다.
[문] 어찌하여 졸음은 무명의 사와 함께 말하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흔들림의 사와 함께 말하지 않는가?
[답] 이 졸음이라는 것은 많고 성한 근심이 아니며, 많고 무거운 허물이 아니며, 많은 고통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분결 가운데 세우지 아니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흔들림은 사지(四枝)ㆍ오지(五枝)의 선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졸음이라 하는 것은 선정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만약 생각에 졸음이 성해지면 그는 빨리 선정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 까닭에 흔들림은 상분결 가운데 세웠으나 졸음은 상분결이라 규정하지 아니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오상분결에서 말하는 흔들림은 결(結:번뇌)의 성질을 지닌 것인가, 결의 성질을 지닌 것이 아닌가?
[답] 만약 결(結)의 성질을 지닌 것이라면 저《바수밀평(婆須密經)》에서 말하는 결과 어떻게 통하겠는가?
그 경에서 말한 결의 법에서는 어찌하여 아홉 가지 결은 결의 법이 아니라고 하고,
아홉 가지 결을 제외한 나머지를 결의 법을 지닌 것이라 하였는가?
이것이 만약 결의 성질이라 한다면, 이 경과는 어떻게 통하겠는가?
이 경 가운데서 말하는 오상분결(五上分結)은 색애(色愛)ㆍ무색애(無色愛)ㆍ흔들림[調]ㆍ만(慢)ㆍ무명(無明)의 다섯 가지라 하였다.
이 논리를 짓고 나서 말하기를,
“이것은 결의 성질이다.”라고 하였다.
[문] 그런 까닭에 이 경에서는 오상분결을 세웠지만, 저 『바수밀경』과는 어떻게 통할 수 있는가?
그 경에서는 결의 법을 설명하면서 어찌하여 아홉 가지 결(結)은 결의 법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아홉 가지 결을 제외한 나머지 다른 법이 외부에서 얻는 결이라 하였는가?
그 경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면 이 경에서도 마땅히 그렇게 말하여야 할 것인데,
결의 법[結法]에서는 어찌하여 아홉 가지 결 및 오상분결의 흔들림은 결의 법이 아니라 하고,
아홉 가지 결과 오상분결 가운데 흔들림을 제외한 나머지 법이 외부에서 얻는 결이라 하는가?
그 경에서는 이와 같이 계빈(罽賓)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경에서는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답] 응당 그렇게 설명하여야 한다.
[문] 만약 아직 그렇게 말하지 아니하였다면 그것은 무슨 뜻인가?
[답] 그 경에서 말한 계빈과 이 경에서 말한 오상분결 가운데 흔들림[調]은 일정한 것이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이것이 결일 수도 있고, 결이 아닌 경우도 있다.
혹 결이 있는 사람도 있고 결이 없는 사람도 있어서, 때로는 결이 되고 또 때로는 결이 아닌 경우도 있다.
또 결이기도 하고 결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이것이 결에 해당되지만 욕계에서는 이것이 결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또 결이 있는 사람도 있고 혹 결이 없는 사람도 있다고 한 것은,
성인의 생각에 얻을 수 있는 흔들림은 결에 해당하지만 범부들에게서 있을 수 있는 흔들림은 결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또 때로는 결일 수도 있고 때로는 결이 아닌 경우도 있다고 한 것은,
성인 가운데서도 아나함(阿那含)의 경지에 이른 성인의 생각 가운데에서 있을 수 있는 흔들림[調]은 결에 해당되지만,
수다원(須陀洹)이나 사다함(斯陀含)의 경지에서 있을 수 있는 흔들림은 결에 해당하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렇게 일정하지 아니한 까닭에, 혹 이것이 결에 해당되기도 하고 결이 아닌 경우도 있고, 혹 결이 있는 사람도 있고 결이 없는 사람도 있으며, 때로는 결에 해당하고 때로는 결에 해당되지 아니하기도 만다.
그런 까닭에 흔들림은 결 가운데 세우지 아니하는 것이다.
[문] 이 논리 가운데서는 또 다른 논리가 생길 수 있다.
무슨 까닭에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흔들림을 결이라 세우고, 욕계에서는 결이라고 세우지 않는가?
[답] 이 욕계라 하는 것은 안정된 경계가 아니며 사유(思惟)하는 경지가 아니며 욕이 제거된 땅이 아니다.
욕계 안에서의 결은 마치 고삐 풀린 말과 같다. 그런 까닭에 흔들림은 이 욕계에서는 나타나지 아니한다.
그러나 색계와 무색계는 안정된 경계이며 사유하는 경지이며 욕이 제거된 땅이다. 그곳에서의 결은 고삐 풀린 팔과 같은 결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 가운데에서는 흔들림이 나타나는 것이며,
이런 이유 때문에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흔들림을 결 가운데 세우지만,
욕계에서는 흔들림을 결 가운데 세우지 아니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욕계에 많은 결은 이 법이나 법상(法想)이 아니다.
예를 들면 노여움이나 분해서 말을 하지 아니하는 일이나 거짓에 근거하여 높은 사람에게 아첨하고 남을 해치는 일 등, 이는 법이나 법상이 아니며 마음이 허물어지는 까닭에 이 가운데에서는 흔들림은 나타나지 아니한다.
그러나 저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이러한 일이 없나니, 이것은 법이나 법상의 결(結)이 아니며 그 가운데서 흔들림이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흔들림을 결 가운데 세우나 욕계에서는 결 가운데 세우지 아니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욕계는 안정된 경계가 아니며 깊이 사유하는 경지가 아니며 욕이 제거된 땅이 아니어서 이 가운데에서는 선정(禪定)은 없다.
흔들림이 생각을 어지럽힐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색계와 무색계는 선정의 세계이며 길이 사유하는 경지이며 욕이 제거된 땅인 까닭에 그 곳에서는 사지(四枝)ㆍ오지(五枝)의 선정 가운데에서 흔들림이 생각 안에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흔들림을 결 가운데 세우게 되지만,
욕계에서는 결이라 세우지 아니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으로 오상분결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