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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도론 제5권
8. 행문품 ②[1]
[2선]
이제 제2선을 구하는 것을 밝힌다.
초선의 과환과 2선의 공덕을 사유한다.
이때 좌선인은 즐겁게 제2선을 일으키고자 하고, 초선에서 몸에 자재를 얻는다.
왜냐하면 만약 초선에서 자재를 얻지 못하면, 비록 다시 사유하여 각관을 없애고 2선을 얻고자 하여도 또 다시 물러나 마침내 제2선정을 일으키지 못하고 다시 초선에 들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모든 비구를 위하여 송아지[山犢]의 비유를 들어 설한 것과 같다.
송아지가 어리석어 먹을 곳을 알지 못하고, 아직 걷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험하고 먼 곳에 가고자 하여 곧 스스로,
‘나는 이제 아직껏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 아직껏 먹어보지 못한 풀을 먹고,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시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발도 들지 못하면서 또 뒷다리를 들고, 넘어지고 흔들리며 불안하여 능히 전진하지 못하기에 결국은 아직껏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지 못하고, 아직껏 맛보지 못한 풀을 맛보지 못하고, 아직껏 먹어보지 못했던 물을 먹지 못한다.
그러면 다시,
‘갈 수 없게 되었으니 예전에 먹던 음식에 의지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비구가 어리석고 미숙해 행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욕심을 떠나 초선에 들어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 법을 닦지 않고, 자주 학습하지 않았으면서 곧 스스로,
‘제2선에 들어 각관을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안정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나는 제2선에 들어 각관을 벗어날 수가 없다.
물러나 초선에 들어 욕심을 벗어나고자 한다’라고 생각한다.
어리석은 비구는 그 송아지처럼 걷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마땅히 초선을 닦아 마음으로 하여금 자재를 얻게 하여야 한다.
식사 전이나 식사 뒤, 또 초야와 후야에 마음이 즐거워하는 바에 따라 오랫동안 가까이 하고, 뜻에 따라 걸림 없이 일으켜 관에 들어야 한다.
만약 일시로 혹은 수시로 많이 들어가고 많이 나온다면, 만약 일시로 혹은 수시로 그 초선에서 자재를 얻게 되고 자재의 즐거움을 얻었다면 제2선을 일으켜 초선을 뛰어넘는다.
그리고 다시,
‘이 초선은 거칠고, 제2선은 미세하다’라고 생각하고,
초선에 과환이 있는 것을 보고 제2선에 공덕이 있는 것을 본다.
[문] 무엇이 초선의 과환인가?
[답] 원수로 여기는 5개와 가깝고, 각관을 움직이게 하여 몸은 게을러지고 마음은 산란하게 된다.
그 일체법은 거친 정[麤定]이 되어 신통의 증득은 감히 이룰 수 없고, 초선을 즐기게 되면 승분(勝分)을 이루지 못한다.
이것이 초선의 과환이다.
제2선의 공덕은 그것에 대한 대치이다.
이미 초선의 과환을 보았다면, 다시 제2선의 공덕을 보고 이 일체입(一切入)의 상(相)에 대해 작의하여 제2선의 사(事)를 수행하고, 초선과 화합하는 것을 작의하지 않고, 각(覺)을 작의하지 않고, 관(觀)을 작의하지 않고, 정으로부터 생긴 희락으로 자재하면 마음으로 수지하게 한다.
그 좌선인이 이와 같이 작의하면 오래지 않아 각관이 소멸하고 정으로써 일어난 희락이 자재하여 마음을 안주하게 한다.
이제 2선의 4지의 뜻을 밝힌다.
그 좌선인은 각관이 소멸하는 까닭에 그 내신(內信)을 성취하고, 마음이 일성(一性)을 이루며, 각도 없고 관도 없으며, 정으로부터 희ㆍ락이 생겨 제2선에 든다.
이것은 지일체입의 공덕이다.
각관이 소멸한다는 것은 잘 분별함으로써 각ㆍ관이 소멸하는 것이며, 또는 단(斷)이라고도 한다.
[문] 무엇을 각ㆍ관의 소멸이라 하는가?
[답] 또한 이것은 초선의 각관의 과환, 및 일체 각관근(覺觀根)의 과환, 및 각관근과 각관을 함께 없애는 까닭에 각관의 소멸을 이룬다.
또 하열하고 거친 선[下麤禪]을 끊음으로써 훌륭하고 수승한 선[上勝禪]을 얻고, 또 현재에서 점차로 소멸하게 한다.
내(內)란 현증(現證)을 내라 한다.
내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내내(內內), 둘째는 내정(內定), 셋째는 내행처(內行處)이다.
무엇이 내내인가?
소위 6내입(內入)이다.
내정이란 스스로 몸을 관하는 것을 내정이라 한다.
내행처란 안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뜻을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며 섭의(攝義)를 그 성질로 하는 것, 이것을 내행처라 한다.
이 경에서는 내내가 바로 즐길만한 것이다.
신(信)이란 신ㆍ정신(正信)ㆍ사유증장신(思惟增長信)으로 이것을 신이라 한다. 내정에서는 이것을 내신(內信)이라 한다.
내신은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어지럽지 않은 것[不亂]이 내신의 상이고, 적적함이 그 맛이고, 혼탁하지 않은 것[不濁]이 그 일어남이고, 각ㆍ관이 그 처이다.
마음이 일성을 이룬다는 것은 마음이 정정(正定)에 머무는 것이니, 이것을 마음이 일성을 이루는 것이라 한다.
마음이 일성에 머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마음이란 뜻[意]이고, 일(一)이란 염(念)을 말하는 것이다.
성(性)이라 하는 것은 성론(聲論)에서 설하는 생성(生性)과 같다.
성이란 자연의 뜻을 말한다.
이 제2선에서는 일심이 능히 각ㆍ관을 소멸함으로써 일성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마음이 일성을 이루는 것”이라 한다.
마음이 일성을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전정(專正)이 그 상이며, 적적이 그 맛이며, 일렁이지 않음[無浪]이 그 일어남이며, 각관의 소멸이 그 처이다.
[문] 믿음과 마음이 일성을 이루는 것은 왜 초선에 포함되지 않는가?
[답] 초선에서는 각ㆍ관에 의해 물결이 움직이는 까닭에 혼탁하게 되고, 내신(內信)과 마음이 일성을 이루는 것이 청정하지 않게 된다.
물에 풍랑이 있으면 면상(面像)을 보는 데 있어 또한 청정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초선에서는 각ㆍ관이 물결이 되어 물결이 흔들리고 혼탁하게 되는 까닭에 내신 및 마음이 일성을 이루는 것은 청정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까닭에 이 선지(禪支)는 초선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각도 없고 관도 없다[無覺無觀]는 것은 각을 끊어 각이 없고 관을 벗어나 관이 없는 것을 말한다.
[문] 각관의 소멸과 무각무관 이 두 가지는 모두 각ㆍ관을 끊는 것이다.
왜 이 두 가지를 설하는가?
[답] 각관의 소멸이란 내신을 나타내기 위함이고, 마음의 일성을 원인으로 한다.
무각ㆍ무관은 적적으로 이루어지는 희락의 오묘한 상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또 각관의 소멸이란 이 각관으로써 각관의 과환을 보고 그 과환법을 끊는 것이다.
무각ㆍ무관은 색계의 각관을 끊는 것이다.
또 무각ㆍ무관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각관의 소멸에 의하지 않는 무각ㆍ무관이고,
(둘째는) 각관의 소멸에 의한 무각ㆍ무관이다.
오식(五識) 및 제3선 등에서는 각관의 소멸에 의하지 않고 무각ㆍ무관을 이룬다.
제2선에서는 방편적적에 의하는 까닭에 각관의 소멸하여 무각ㆍ무관을 이룬다.
이것이 두 가지 뜻을 설하는 것이다.
정(定)으로부터 생긴다고 하는 것은 정을 말한다.
초선은 그 지(智)로부터 생기고,
제2선은 초선의 정으로부터 생긴다.
또 정이란 제2선과 일심에서 함께 생기는 까닭에 정은 희락을 생기게 한다.
희락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분별하였다.
제2선이란 초선에 의해 얻어진 이름이다.
이 제2선에 들어 정수(正受)하는 것을 제2선에 드는 것이라 한다.
선이란 내신ㆍ희ㆍ락ㆍ일심, 이것을 선이라 한다.
정수에 들어 머문다는 것은 제2선을 얻고, 2지를 벗어나 2지와 세 가지 선(善)을 성취하고, 10상을 구족하고, 23공덕과 상응하는 것이다.
이것이 천주(天住)이고, 이 공덕으로 광요천(光耀天)에 태어나니, 앞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천주란 정으로부터 희락을 일으켜 인간계를 초월해 머무는 까닭에 천주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세존께서는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샘에서 솟는 물은 사방에서 온 것도 아니고 비가 와서 생긴 것도 아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이로부터 샘물이 솟아 맑고 시원하고 고루 적시고 가득 넘치고 멀리 흐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도 자기 몸에서 정으로부터 희락을 일으켜 청량함을 얻어 윤택하지 않은 곳이 없게 하고, 정으로부터 희를 일으켜 몸과 마음에 두루 변재하게 한다.
마치 샘물처럼.”
그 좌선인은 제2선에 들어 그 몸을 가히 알 수 있다.
사방에서 온 것도 아니고, 흘러든 물도 없고, 하늘에서 내린 빗물도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각관이 소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샘에서 흘러나온 물이 그 몸을 가득 채우며 파랑이 일지 않듯이,
이와 같이 정으로부터 생긴 희락이 이 명색신(名色身)에 가득 차 어지러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차가운 물이 몸을 시원하게 하고 모든 곳에 두루 미치듯이,
이와 같이 정으로부터 생기는 희락은 일체 명색신을 만족시킨다.
그리고 정을 닦은 과보로 이와 같이 천상에 거주하고 광요천에 태어나는 공덕을 얻는다.
이 제2선에 세 종류가 있으니, 그것은 하ㆍ중ㆍ상이다.
이 좌선인이 하선을 닦으면 목숨을 마친 뒤 소광천에 태어나며 수명은 2겁이다.
중선을 닦으면 무량광천에 태어나며 수명은 4겁이다.
상선을 닦으면 광요천에 태어나며 수명은 8겁이다.
[3선]
제2선의 과환을 염한다.
그때 좌선인은 제2선을 닦아 몸에 자재를 얻고 나서,
제2선은 거칠고 제3선은 적적하기에 제2선의 과환을 알고 3선의 공덕을 보아 제3선을 일으킨다.
무엇이 2선의 과환인가?
소위 각관에 가깝기에 이는 정의 적이고, 희의 가득함과 상응하는 까닭에 선이 거칠어진다.
희가 가득함으로써 마음은 크게 용약하지만, 능히 다른 선지(禪支)를 일으키지는 못한다.
만약 희에 집착하면 이것은 곧 실(失)이 된다.
만약 이 실을 알면 곧 부실(不失)을 이룬다.
만약 신통의 증득을 감히 이루지 못하고 2선을 즐기면 승분(勝分)을 이루지 못한다.
이것이 제2선의 과환임을 알고, 제3선의 공덕을 보아야 한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대치이다.
이미 2선의 과환을 보았으면 또 3선의 공덕을 보아, 일체입의 상을 의지해 작의하여 희심을 소멸시킨다.
희락을 수지하는 마음을 말미암아 이와 같이 작의하면 오래지 않아 희가 없는 낙[無喜樂]으로써 마음은 편안을 얻는다.
3선지를 풀이한다.
그 좌선인은 “희에 오염되지 않는 까닭에 사(捨)ㆍ염(念)ㆍ지(智)를 얻고, 몸으로 즐거움[樂]을 누린다.”
이것은 성스러운 가르침이다.
사ㆍ염ㆍ지ㆍ락을 얻고, 제3선의 정수(正受)에 머무는 것, 이것은 지일체입(地一切入)의 공덕으로, 희에 오염되지 않는 까닭이다.
희란 앞에서 이미 분별했다.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은 희를 끊고 사에 머무름을 얻는 것이다.
무엇이 사(捨)인가?
이 사는 호(護)이며, 물러나지도 나아가지도 않으며 마음이 평등한 것, 이것을 사라고 한다.
이 사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수사(受捨)ㆍ정진사(精進捨)ㆍ견사(見捨)ㆍ보리각사(菩提覺捨)ㆍ무량사(無量捨)ㆍ육분사(六分捨)ㆍ선지사(禪支捨)ㆍ청정사(淸淨捨)이다.
5근(根)이 수사가 된다.
때때로 작의하지 않는 사상(捨相)을 정진사라 한다.
“괴로움과 집착[集]을 나는 마땅히 끊어야 한다”라고 하여 얻게 되는 사를 견사라 한다.
보리각을 닦는 것이 보리사이다.
자ㆍ비ㆍ희ㆍ사 이것은 무량사이다.
눈으로 색을 보아도 괴로워하거나 기뻐하지 않고 사를 이루는 것, 이것이 6분사이다.
오염되지 않는 까닭에 사를 이루어 머무는 것, 이것이 선지사이다.
사를 청정하게 생각하는 것, 이것은 청정사이다.
이 8사 중에 수사를 제외한 나머지 7사법, 이것이 평등사이다.
또 세 가지 사가 있으니,
첫째는 상응승(相應乘), 둘째는 소경영(少經營), 셋째는 무경영(無經營)이다.
일체의 선을 행함에 있어서 선(禪)의 평등한 방편이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것, 이것을 상응승사(相應乘捨)라 한다. 이것은 하사(下捨)로서 제2선에 가깝고, 능히 크게 용약하는 마음을 끊는다.
마음에 경영이 없는 것, 이것을 소경영사(少經營捨)라 한다. 이 사는 제3선에 가깝고, 이것은 능히 일체의 용약하는 마음을 끊는다.
움직이지 않는 몸과 마음으로써 사(事)를 경영하는 마음이 없는 것, 이것을 무사사(無事捨)라 한다. 이 사는 제4선에 가깝다.
사는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평등이 그 상이고, 집착하는 바가 없는 것이 그 맛이며, 경영이 없는 것이 그 일어남이며, 오염이 없는 것이 그 처이다.
[문] 왜 이 사를 제2선이나 초선이 아닌 이 선에서 설하는가?
[답] 이 처는 희가 가득하고 아직 마음의 집착을 소멸하지 못한 것이다.
희락을 인연하는 까닭에 아직 소멸하지 못하고, 크게 용약함으로써 몸과 마음에 충만하다.
이러한 까닭에 두 가지 선에서는 사를 설하지 않나니, 충만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 제3선에서는 희의 오염이 없는 까닭에 상에 대한 집착을 소멸함으로써 선지를 일으키게 되고, 선지가 자재한 까닭에 사ㆍ염ㆍ정지(正智)를 설한다.
무엇이 염인가?
염은 수념(隨念)이고, 그 염은 기억하고 보전하여 잊지 않는 것이다.
염이란 근(根)을 염하고, 역(力)을 염하는 정념(正念)으로 이것을 염이라 한다.
[문] 염은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답] 수염(隨念)이 상이고, 잊지 않음이 맛이며, 수호가 일어남이며, 4념이 처이다.
무엇이 지(智)인가?
지해(知解)는 혜(慧)이며, 이 정지(正智)를 지라고 한다.
여기서 정지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즉 유의지(有義智)ㆍ자상지(自相智)ㆍ불우치지(不愚癡智)ㆍ행처지(行處智)이다.
여기서 유의지는 4위의를 갖는 것이고,
자상지는 공처에 드는 것이며,
불우치지는 세간의 8법을 아는 것이고,
행처지는 사(事)에 처하는 것이다.
이 경에서는 행처지를 취해야 한다.
[문] 지는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답] 어리석지 않음을 상으로 삼고, 연착(緣著)을 맛으로 삼고, 모든 법을 선택하여 취함을 일어남으로 삼고, 바른 작의를 처로 삼는다.
[문] 어째서 이 염ㆍ정지는 일체처에서 빠지지 않는가?
[답] 만약 사람이 염을 잃으면 정지는 일어나지 않고, 선의 외행(外行)도 감히 일으킬 수 없다.
[문] 왜 제3선을 설하고 제2선과 초선을 설하지 않는가?
[답] 여기서는 희가 으뜸이 된다.
거친 선지가 소멸하기 때문에, 정정(正定)이 세밀하기 때문에 이 정은 세밀한 곳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이 정지로써 능히 제3선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선지가 자재하게 된다.
또 이 선은 쉽게 일어나 그가 가장 좋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곳에 태어나게 하고, 또 어리석은 마음을 만든다. 이것을 착처(著處)라 한다. 이런 까닭에 이 선에서 자재를 얻을 줄 알아야 희를 끊는 것을 감당하게 된다.
또 희와 낙은 서로 친구라고 설한다. 이런 까닭에 이 염(念)ㆍ지(智)로 분별해야 희는 없고 낙이 있는 것이 일에 머물게 된다.
송아지가 어미를 따를 때 양쪽 귀를 잡아 떼어놓지 않으면 어미에게 들러붙어 따라다니는 것과 같다.
희가 없고 낙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염ㆍ지로 분별해야 낙이 머물고 행할 곳을 얻게 된다.
만약 느슨하게 떼어놓지 않으면 도리어 희에 들어가 선이 퇴분을 이루게 된다.
이 선지가 자재한 까닭에 염ㆍ지를 설하고, 이것으로써 사ㆍ염ㆍ지를 성취하기 때문에 사ㆍ염ㆍ지가 있어 몸으로 즐거움을 누린다고 설한다.
[문] 무엇이 마음의 즐거움[心樂]인가?
[답] 마음이 섭수하는 것을 심락이라 하며,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생기는 섭수가 심락수(心樂受)이다. 이것을 낙이라고 한다.
[문] 무엇이 몸[身]인가?
[답] 상음(想陰)ㆍ행음(行陰)ㆍ식음(識陰) 이것을 몸이라 하고, 이 즐거움을 몸으로 받는 것을 신수락(身受樂)이라 한다.
[문] 왜 이 낙에는 희가 없으며, 몸으로 받는 것이 아닌가?
[답] 제3선에서는 낙의 근이 소멸하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세존께서 “제3선에서 낙의 근은 소멸한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낙은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성(聖)이란 부처님과 제자이다. 열고, 합하고, 제교(制敎)하고, 분별하고, 현시하는 것, 이것을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이라 한다.
[문] 왜 성인께서는 다른 처가 아닌 이 몸에 대해 말씀하셨는가?
[답] 이 제3선은 쉽게 일어나 그 낙처에 도달하지만 그곳에서 낙을 받는 것이 없다.
성자는 낙을 향하여 머물고, 이것을 성인은 성취한다.
이러한 까닭에 성인은 이 선이 훌륭하다고 말한다.
사(捨)를 이루며, 염(念)이 있고, 낙(樂)에 머무는 것이 사ㆍ염ㆍ낙이니, 이것은 이미 분별하였다.
“제3선을 성취하고, 들어가 머문다”에서 제3은 제2에 의지하는 까닭에 제3이라 한다.
제3선은 이 사ㆍ염ㆍ정지(正智)ㆍ낙ㆍ일심인데, 이것을 선의 성취라 한다.
들어가 머문다는 것은, 그가 이미 제2선을 얻어 1분과 5분을 벗어나고, 세 가지 선을 성취하고, 10상을 구족하고, 22공덕과 상응하여 천상에 거주하고 변정천에 태어나니, 초선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천상에 거주한다는 것은 희가 없는 낙에 머문다는 것으로 인간계를 초월해 머무는 것을 천상에 거주한다고 한다.
이러한 까닭에 세존께서 모든 비구에게,
“이와 같이 비구여, 울파라 연못에 핀 꽃과 분다리 연못에 핀 꽃에서 울파라꽃ㆍ파두마꽃ㆍ분다라꽃 등은 물에서 생기고, 물에서 자라나고, 물로부터 일어나고, 물속에 머물면서 뿌리부터 머리까지 물속에 있게 한다.
이와 같이 비구여, 이 몸도 희가 없는 낙으로써 가득히 윤택하게 하며, 희가 없는 낙이 온 몸과 마음에 가득하게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울다라ㆍ파두마ㆍ분다리꽃이 물로부터 일어나듯,
이와 같이 제3선에 들면 그 몸은 연이 물에서 생겨나 뿌리부터 머리까지 일체에 가득함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제3선에 들면 그 몸은 희가 없는 낙으로써 몸과 마음에 가득하게 된다.
정을 닦은 과보로 이와 같이 천상에 거주하고 변정천에 태어나는 공덕을 얻는다.
이 제3선 역시 세 가지를 이루니, 곧 상ㆍ중ㆍ하이다.
여기서 좌선인이 하선을 수행하면 목숨을 마친 뒤 소정천(少淨天)에 태어나며, 그 수명은 16겁이다.
중선을 수행하면 무량정천(無量淨天)에 태어나고, 그 수명은 32겁이다.
상선을 수행하면 변정천에 태어나고, 수명은 64겁이다.
[4선]
3선의 과환을 염한다.
그때 좌선인은 이와 같이 제3선을 지어 몸으로 자재의 즐거움을 얻고 나서, 제4선을 일으켜 제3선을 초월한다.
제3선은 거칠고, 제4선은 묘하기에 제3선의 과환을 보고, 또 제4선의 공덕을 본다.
무엇이 3선의 과환인가?
소위 원수로 여기는 희와 가깝기에 정정(正定)은 낙지(樂支)에 의해 거칠어지고, 감히 신통을 얻을 수 없어 제3선은 승분(勝分)을 이루지 못한다.
이와 같이 제3선의 과환을 보고 제4선의 공덕을 보니, 이것은 그것에 대한 대치이다.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제3선의 과환을 보고 제4선의 공덕을 보고는, 오로지 그는 일체입의 상에 대한 작의를 지어 현재에서 낙을 소멸한다.
없앰으로써 사(捨)로 인해 마음이 수지되고, 이와 같이 작의하여 오래지 않아 사(捨)로 인해 마음이 편안을 얻는다.
4선지를 풀이한다.
그 좌선인은 낙을 끊은 까닭에, 먼저 이미 고를 끊은 까닭에, 처음의 기쁨[喜]과 걱정[憂]이 모두 없어진 까닭에, 불고불락의 사념(捨念)이 청정함을 성취하여 제4선에 머문다.
이것이 지일체입의 공덕이다.
낙을 끊은 것은 몸의 즐거움을 끊는 것이고, 고를 끊는 것은 몸의 괴로움을 끊는 것이다.
이전의 기쁨과 걱정이 소멸한다는 것에서 기쁨이란 마음의 즐거움이고, 걱정이란 마음의 고통이다.
이것이 모두 남김없이 소멸하는 것이다.
[문] 즐거움과 고통과 걱정을 이미 끊었는데 어느 처에서 소멸하는가?
[답] 초선 때에 소멸한다.
이 제4선에서는 고가 소멸한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셨다.
[문] 어느 처에서 고근(苦根)이 일어나 무여시(無餘時)에 소멸하는가?
[답]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초선에서 이욕(離欲)을 성취한다.
이 처에서 고근이 일어나 무여시에 소멸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어떠한 까닭에 초선에서 고근이 소멸하는가?
[답] 희가 가득한 까닭에 몸이 즐겁고, 몸이 즐거운 까닭에 고근이 소멸한다. 단(斷)으로 대치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까닭에 초선에서 고근이 소멸하고, 제2선에서 우근(憂根)이 소멸하며 우근이 끊어지게 된다.
부처님께서,
“어느 처에서 희근이 일어나 무여시에 소멸하는가?
이 비구에게서 각과 관이 소멸하는 까닭에 제2선을 정수하여 머물고,
이 처에서 우근이 일어나 무여시에 소멸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떠한 까닭에 제2선에서 우근이 소멸하는가?
만약 각ㆍ관이 있으면 오랫동안 각ㆍ관에 따라 몸이 게을러지고 마음이 나태해지며, 만약 마음이 나태해지면 우근이 곧 일어난다.
제2선에서 각ㆍ관이 소멸하는 것을 우근이 소멸한다고 설한다.
제3선, 이 처에서는 낙이 소멸한다.
세존께서,
“어느 처에서 낙근이 일어나며 무여시에 소멸하는가?
여기에서 비구는 희를 싫어하는 까닭에 제3선에 들어가 정수하여 머문다.
이 처에서 낙근이 이미 생겨나 무여시에 소멸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문] 어떠한 까닭에 제3선에서 낙근이 소멸하는가?
[답] 희가 소멸하기 때문이다. 희는 낙의 소멸을 이루는 원인이다. 이러한 까닭에 제3선에서 낙근이 소멸한다.
[문] 만약 고ㆍ락ㆍ우가 제3선에서 이미 소멸했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이 제4선에서 소멸한다고 설하는가?
[답] 3선은 이 4선에 이르는 길이며, 3선에서 이미 수(受)가 소멸한다. 이런 까닭에 제4선에서 소멸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또 불고불락의 수로써 현재에서 대치로 삼는다. 이러한 까닭에 고ㆍ락을 불고불락의 수로 대치한다고 설한다.
또 4선은 함께 수를 대치하여 거두어 모으는 까닭이며,
또 사(捨)는 번뇌를 현재에서 남김없이 끊는 까닭이다.
불고불락의 수는 의가 섭수하지 않고, 마음이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불고불락의 수라 한다.
불고불락의 수는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중간을 상으로 하며, 중간에 머무는 것을 맛으로 하며, 없앰이 일어남이며, 희가 소멸하는 것이 처이다.
무엇이 사(捨)ㆍ염(念)ㆍ청정(淸淨)인가?
이 중성(中性)이라 하는 것이 사가 되나니 이것을 사라 한다.
염이란 그 염(念)이 수념(隨念)ㆍ정념(正念)인 것을 염이라 한다.
사로써 염을 삼아 분명(分明)ㆍ청백(淸白)을 이루는 이것을 사념청정(捨念淸淨)이라 한다.
[문] 어떠한 까닭에 이 염은 사로써 분명ㆍ청백이 되는가?
[답] 이 사는 일체번뇌를 벗어나는 까닭에, 수(受)와 비슷하게 상응하는 까닭에, 부동(不動)ㆍ무경영(無經營)을 이룬다.
이 무경영으로 사와 상응하는 까닭에 이 염은 무동(無動)에 이르고, 무경영을 이룬다.
이러한 까닭에 이 염은 사로써 분명ㆍ청백을 이룬다.
4란 그 3선에 의지해 이 제4가 성취된다.
입정(入定)이란 4선에서 사념이 일심인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선의 성취라 한다.
입주(入住)란 그 제4선을 얻게 되어 1분과 3분을 벗어나고, 세 가지 선을 성취하고, 10상을 구족하고, 22공덕과 상응하는 것이다.
그 과보로 천상에 거주하고, 과실천(果實天)에 태어나는 공덕을 이루나니,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천상에 거주한다는 것은 사의 즐거움에 머물러 인간계를 벗어나는 것이니, 이것을 천상에 거주하는 것이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세존께서 모든 비구에게,
“어떤 사람이 앉아서 흰 천을 겹쳐 몸을 감싸는데, 머리부터 발에 이르기까지 온 몸 구석구석 두르지 않은 곳이 없다. 흰 천을 겹쳐 감싸지 않은 곳이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비구는 청백한 마음으로 온 몸 구석구석을 채워 청백한 마음이 닿지 않는 곳이 없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흰 천을 겹쳐 스스로 감싸는 것처럼,
이 좌선인 또한 이와 같이 모든 상번뇌(上煩惱)를 벗어나 제4선에 머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흰 천을 겹쳐 몸을 감싸 머리에서 발에 이르기까지 춥지도 덥지도 않게 하고 때를 잘 조절하여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듯이,
이와 같이 제4선에 들어 불고불락 하니, 이것이 사의 즐거움을 온 몸에 가득하게 하는 것이다.
정을 닦은 과보로 이와 같이 천상에 거주하고, 과실천에 태어나는 공덕을 얻는다.
제4선을 닦다가 목숨을 마친 범부는 과실천에 태어난다.
만약 마음이 과환을 싫어하면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며, 수명은 50겁이다.
만약 사문이라면 과실천에 태어나거나 5정거천에 태어나니, 이와 같은 과실의 공덕이 있다.
[문] 어떠한 까닭에 3선처에는 하ㆍ중ㆍ상과 과지(果地)의 수승함을 설하면서 제4선에서는 설하지 않는가?
[답] 3선에서는 얻는 바에 거침이 있고 묘(妙)가 있다. 이러한 까닭에 승지(勝支)로써 과지(果地)의 수승함을 설한다.
이 제4선은 이미 묘지(妙支)의 피안에 이르러, 이로부터 다시는 묘지가 없다. 따라서 여기에는 승과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