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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6권
12. 초품 중 ‘뜻에 걸림이 없다’[意無礙]를 풀이함
【經】 뜻에 걸림이 없다.
【論】 무엇을 뜻에 걸림이 없다13) 하는가? 보살은 온갖 원수나 친척, 또는 원수도 친척도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 평등한 마음으로 대하여 걸림이 없다.
또한 일체 세계의 중생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와서 침해하더라도 성내는 마음이 없고, 갖가지 방법으로 공경하고 공양하여도 기뻐하지 않는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부처님이나 보살에 대하여도
마음으로 애착하지 않고
외도나 악인이라도
증오하거나 성내지 않는다.
이처럼 청정함을 ‘뜻에 걸림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모든 법에 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다.
【문】 이 보살은 아직 불도를 얻지 못했고, 아직 일체지를 얻지 못했거늘 어찌하여 모든 법에 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는가?
【답】 이 보살은 한량없고 청정한 지혜를 얻었기 때문에 모든 법에 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는 것이다.
【문】 보살들은 아직 불도를 얻지 못했으므로 한량없는 지혜가 있을 수 없고, 남은 번뇌[殘結]가 있으므로 청정한 지혜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답】 이 보살들은 삼계 안에서 업을 맺는 육신이 아니다.
모두가 법신이 자재하게 되어 노ㆍ병ㆍ사를 초월하였으나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세상 가운데에서 행해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교화한다.
그러나 이미 자재를 얻었으니, 부처가 되고자 원하기만 한다면 능히 이루는 것이다.
【문】 법신 보살(法身菩薩)은 부처님과 다름이 없거늘 어찌하여 보살이라 하는가?
어째서 부처님을 예경하고 설법을 듣는가?
만일 부처님과 다르다면 어째서 한량없고 청정한 지혜가 있다고 하는가?
【답】 이 보살이 비록 법신의 경지에 이르러 노ㆍ병ㆍ사가 없으나 부처님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마치 열나흘 날의 달을 보면 사람들은 혹은 꽉 찼는지 혹은 아직 꽉 차지 않았는지 의심을 내는 것과 같다.
보살 역시 그와 같아서 비록 능히 부처가 되어 법을 설할 수 있으나 아직 부처가 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달이 보름을 꽉 채워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과도 같다.
또한 한량없는 청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진실로 한량이 있는데 헤아릴 수가 없어서 그것을 한량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바닷물이나 항하의 모래 등은 사람들이 헤아릴 수가 없으므로 한량이 없다고 하듯이,
부처님과 보살들에게는 한량없음이 되지 못한다.
보살의 한량없는 청정지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하늘이나 인간 및 성문ㆍ벽지불들이 헤아리지 못하므로 한량없는 지혜라 하고,
보살이 무생도(無生道)를 얻을 때 모든 번뇌[結使]를 끊는 까닭에 청정한 지혜를 얻게 된다.
【문】 만일 이때에 이미 모든 번뇌를 끊었다면 성불할 때에는 다시 무엇을 끊는가?
【답】 이 청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부처가 될 때 나머지 번뇌를 끝까지 다 제거하여 실로 청정함을 얻는 것이요,
둘째는 보살이 육신을 버리고 법신을 얻을 때 모든 번뇌를 끊고 청정해지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한 등잔으로도 능히 어두움을 제거하여 일을 할 수는 있으나 다시 큰 등잔이 있으면 더욱더 밝은 것과 같다.
부처님과 보살이 모든 번뇌를 끊는 것도 이와 같아서, 보살들이 비록 끊어야 할 것을 이미 끊었다고는 하나 부처님이 끊은 데다 견주면 아직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한량없는 청정지혜를 얻는 까닭에 모든 법에서 뜻에 걸림이 없다’고 말한다.
【經】 대인(大忍)을 성취했다.
【論】
【문】 앞에서 이미 등인(等忍)과 법인(法忍)을 말했거늘 어찌하여 이제 다시 ‘대인을 성취했다’ 하는가?
【답】 이 두 가지 인을 증장시킴을 대인이라 한다.
또한 등인은 중생들 가운데서 모든 것을 능히 참아 유순하는 것이요, 법인은 깊은 법에 대하여 참는 것이니, 이 두 가지 인이 자라나면 무생인(無生忍)을 증득하게 되고, 최후의 육신에 시방의 부처님들이 화현해서 앞에 나타나시거나 공중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대인을 성취한 것이라 한다.
비유하건대 성문(聲聞)의 법 가운데 난법(煖法)이 자라남을 정법(頂法)이라 하고, 정법이 자라남을 인법(忍法)이라 함과 같다.
다시 다른 법이 없어서 자라남에 차이가 있으니, 등인과 대인(大忍)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두 가지 인(忍)이 있으니, 생인(生忍)과 법인(法忍)이다.
생인이라 함은 중생들 가운데서 잘 참는 것을 말한다.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겁 동안에 중생들이 갖가지로 삿된 마음을 가한다 해도 성내지 않고, 갖가지로 공경하고 공양하여도 기뻐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중생을 관찰함에 처음이 없다.
처음이 있으면 인연이 없고, 인연이 있으면 처음이 없으며, 처음이 없으면 나중도 없으리라.
왜냐하면 처음과 나중은 서로 기다리기 때문이다.
처음과 나중이 없다면 중간도 없으리니, 이렇게 관찰할 때에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의 두 극단에 떨어지지 않으며, 안은도(安隱道)에 의하여 중생을 관찰해 사견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를 생인이라 하고, 매우 깊은 법에 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으면 이를 법인이라 한다.
【문】 매우 깊은 법이란 어떤 것인가?
【답】 앞에서 매우 깊은 법인에 대해 말한 것과 같다.
또한 매우 깊은 법이라 함은 12인연 가운데서 전전해서 과를 내지만 인 가운데 과가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과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 가운데에서 나오는 것을 매우 깊은 법이라 하는 것이다.
또한 세 가지 해탈문인 공ㆍ무상ㆍ무작에 들면 곧 열반의 항상된 즐거움을 얻는 까닭에 이를 매우 깊은 법이라 한다.
또한 일체법은 공도 아니요, 공 아님도 아니요, 형상 있음도 아니요, 형상 없음도 아니요, 작위 있음도 아니요, 작위 없음도 아니라고 관찰하니, 이렇게 관찰하는 가운데 마음 또한 집착되지 않으면 이를 매우 깊은 법이라 한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인연으로 생긴 법
이를 공(空)의 모습이라 하고
거짓 이름[假名]이라고도 하며
중도(中道)라고도 한다.
법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도리어 없어지지 않아야 하리니,
지금은 없고 앞에는 있었다면
이를 단견(斷見)이라 부른다.
항상하거나 단절되지도 않으며
또한 있음도 없음도 아니어서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고
언설(言說) 또한 다했다.
이러한 매우 깊은 법에 대하여 믿음이 걸림이 없고, 후회하거나 위축되지 않으면 이를 ‘대인을 성취했다’고 한다.
【經】 여실하고도 교묘히 제도한다.
【論】 외도의 법에서는 비록 중생을 제도하나 여실하게 제도하지 못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갖가지 삿된 소견과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2승(乘)14)은 비록 제도하기는 하나 적절히 제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일체지가 없어 방편의 마음이 얇기 때문이다.
오직 보살만이 능히 여실하고도 교묘히 제도하나니,
사공의 일로써 비유하건대 한 사람은 공기 주머니[浮囊]나 풀 뗏목으로 건네주고, 한 사람은 큰 배로 건네주는 것 같다.
이 두 가지 건네주는 일은 아득히 다르듯이 보살의 교묘하게 중생을 제도하는 일도 이와 같다.
또한 비유하건대 병을 고치는 데 쓴 약이나 침 뜸으로는 통증을 주어 차도를 얻지만,
소타선타(蘇陀扇陀)15)라는 묘한 약은 병자가 눈으로 보기만 하면 온갖 질병이 모두 낫는다.
병을 제하는 것은 같으나 우열의 차이가 있듯이, 성문과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는 일도 역시 그와 같다.
고행과 두타16)로 초저녁에서 한밤을 지나 새벽까지 부지런히 좌선하고 괴로움을 관찰하여 도를 얻는 것은 성문의 가르침이요,
모든 법의 모습이 얽매임도 없고 풀려남도 없음을 관찰하여 마음이 맑아지는 것은 보살의 가르침이다.
문수사리본연(文殊師利本緣)17)에서는 이렇게 얘기되고 있다.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대덕이시여, 한량없는 아승기겁을 지난 과거세에 사자음왕(師子音王)이란 부처님이 계셨는데, 부처님과 중생들의 수명은 10만억 나유타 세(歲)였습니다.
그 부처님께서 3승의 법으로 중생들을 제도하셨으니, 나라 이름은 천광명(千光明)이요, 그 나라 안의 나무들은 모두 7보로 이루어졌고, 나무마다 한량없이 청정한 법음, 즉 공ㆍ무상ㆍ무작ㆍ불생ㆍ불멸ㆍ무소유의 소리를 내니, 중생들이 그것을 듣기만 하면 마음이 열리어 도를 얻었습니다.
이때 사자음왕불의 첫 법회의 설법에 99억 사람이 아라한의 도를 얻었으며, 보살들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이 보살들은 모두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어 갖가지 법문에 들었고 한량없는 부처님을 뵈어 공경 공양드렸습니다. 능히 한량없고 셀 수 없는 중생을 제도했으며, 한량없는 다라니문을 얻었고 한량없는 갖가지 삼매의 문을 얻었으며, 최초로 발심하여 새로이 불도의 문에 들어온 보살들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이 불국토의 한량없는 장엄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교화를 마치시고는 무여열반에 드시니, 6만 세 동안 법이 머물더니, 모든 나무에서 다시는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때 두 보살 비구가 있었는데 하나는 희근(喜根)이요, 하나는 승의(勝意)였습니다.
이 희근법사는 용모와 위의가 순박 정직하고 세속법을 버리지 않으며 또한 선과 악을 분별하지도 않았습니다.
희근의 제자는 총명하여 깊은 진리 듣기를 좋아하였는데 그 스승은 소욕(少欲)과 지족(知足)을 찬탄하지 않고, 계행과 두타도 찬탄하지도 않고, 모든 법의 실상이 청정함만을 설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는 말하기를,
“온갖 법은 음욕ㆍ성냄ㆍ어석음의 모습이다.
이 모든 법의 모습이 곧 모든 법의 실상이며, 걸림 없는 바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방편으로 제자들을 가르쳐서 일상지(一相智)에 들게 하였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성내지 않고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후회하지 않음으로써 생인을 얻었고,
생인을 얻은 까닭에 곧 법인(法忍)을 얻어 진실한 법 가운데서 요동하지 않으니 마치 산과 같았습니다.
승의 법사는 청정하게 계를 지키고, 12두타18)를 행하여, 4선(禪)과 4무색정(無色定)을 얻었습니다.
승의의 제자들은 근이 둔하고 분별을 구함이 많아 ‘이것은 깨끗하다’ 혹은 ‘이것은 깨끗지 못하다’ 하며 마음이 동요하고 움직였습니다.
다른 때 승의가 마을에 들어갔다가 희근의 제자의 집에 가서 자리에 앉아 지계와 소욕과 지족행과 두타행과 한처(閑處)와 선의 고요[禪寂]을 찬탄하고,
희근을 비방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법을 설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사견에 들게 하니,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걸림 없는 모습을 설한다.
이는 잡된 행을 하는 사람이지 순수하고 청정하지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 제자는 근이 예리해 법인을 얻었는데,
그는 승의에게,
“이 음욕의 법은 어떤 모습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승의가 대답하되,
‘음욕은 번뇌의 모습이니라’ 하였습니다.
다시 묻기를,
“이 음욕의 번뇌는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이 음욕의 번뇌는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다.
만일 안에 있다면 밖의 인연을 기다릴 필요가 없고,
만일 밖에 있다면 나에게 관계가 없으니 나를 괴롭힐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거사19)가 말하되,
“음욕이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고, 동ㆍ서ㆍ남ㆍ북ㆍ 사유ㆍ상하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라면, 두루 실상(實相)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법은 곧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리니, 만약에 생멸의 모습이 없다면 공해서 없는 것이거늘 어찌 능히 번뇌가 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승의가 이 말을 듣자 불쾌하였으나 대답은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되,
‘희근은 많은 사람을 속여서 삿된 길에 집착하게 하는구나’ 하였습니다.
이 승의보살은 아직 음성다라니(音聲陀羅尼)20)를 배우지 못해서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면 곧 기뻐하고 외도의 말을 들으면 화를 내며,
세 가지 착하지 못한 법을 들으면 싫어하고 세 가지 착한 법을 들으면 매우 기뻐하며,
생사의 법을 들으면 근심하고 열반의 법을 들으면 기뻐하면서,
거사의 집에서 숲 속의 정사에 들어가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희근보살은 많은 사람을 속여 삿되고 나쁜 소견에 들게 하였소.
왜냐하면 그는 말하되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과 그 밖의 모든 법이 모두가 걸림 없는 모습이라 하였기 때문이요.”
이때 희근이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매우 성이 났으니, 나쁜 업에 가리워 큰 죄에 빠지게 되겠도다.
이제 내가 그에게 매우 깊은 법을 말해 주어야 되겠도다.
비록 지금 당장에는 얻은 바가 없더라도 뒷날 불도에 들 인연이나 되게 하리라.’
이때 희근은 승려들을 모아 놓고 일심으로 이런 게송을 읊었습니다.
음욕이 곧 길이요
성냄과 어리석음도 그러하니
이러한 세 가지 일에
한량없는 부처님의 길이 있다.
어떤 사람이 음욕과 분노와 우치
그리고 길을 분별한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과 멀어짐이
하늘과 땅 사이 같으리.
도와 음욕과 분노와 우치는
한 법이어서 평등하거늘
이 말을 듣고 겁내는 이는
불도에서 심히 멀어지리.
음욕의 법은 생멸하는 것이 아니니
마음을 괴롭히지도 못하거늘
만약에 사람이 나[吾我]를 계착한다면
음욕에 이끌려 지옥에 들리라.
있다 없다 두 법이 다르다 하면
이는 있다 없다를 여의지 못함이니
있음 없음이 균등함을 알면
수승히 초출하여 불도를 이루리라.
이와 같이 70여 게송을 말할 때 3만 명의 천자들이 무생법인을 얻었고, 1만 8천 명의 성문들이 온갖 법에 집착되지 않는 까닭에 모두가 해탈을 얻었습니다.
이때 승의보살의 몸은 지옥으로 빠져들어 한량없는 천만 세 동안의 고통을 받았고, 인간에 다시 태어나서는 74만 세 동안 항상 남의 비방을 들었고, 한량없는 겁 동안에 부처님의 명호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 죄가 차츰 엷어져서 불법을 들을 기회를 얻게 되고 출가하여 도를 닦았으나 다시 계를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계를 버리기 6만 3천 세 동안이었고, 한량없는 생 동안 사문이 되어 비록 계는 버리지 않았으나 모든 감관이 둔하고 어두웠습니다.
이 희근보살은 지금 동쪽으로 10만억 불국토를 지나 부처를 이루시니, 그 국토의 이름은 보엄(寶嚴)이요, 부처님의 명호는 광유일명왕(光踰日明王)이십니다.”
문수사리는 다시 말씀드렸다.
“그때의 승의비구는 바로 오늘의 이 몸입니다. 나는 그때 이렇듯 한량없는 고통을 받았음을 관찰합니다.”
문수사리가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누구든지 3승의 도를 구하되 온갖 고통을 받지 않으려거든 모든 법의 모습을 파괴하여 성내는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물으셨다.
“그대는 이 모든 게송을 듣고, 어떠한 이익을 얻었는가?”
문수가 대답했다.
“나는 이 게송을 듣고, 뭇 고통이 다하였으며, 세세(世世)에 예리한 감관과 지혜를 얻어 깊은 법을 잘 이해하게 되었고, 교묘하게 깊은 뜻을 연설하게 되었으며, 모든 보살들 가운데서 가장 으뜸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모든 법의 모습을 교묘하게 말한다 하니, 이것을 일컬어 ‘여실하고도 교묘히 제도한다’고 말한다.
13)
범어로는 apratihatacittaiḥ.
14)
성문승과 벽지불승을 가리킨다.
15)
범어로는 Sudhasyanda.
16)
범어로는 dhūta.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여의고 최소한의 생활수단으로 수행에 전념하는 것을 말한다.
17)
범어로는 Mañjuśryavadāna.
18)
12두타란 다음과 같다. ①인적 없는 한적한 곳에서 머문다[在阿蘭若處]. ②항상 걸식한다[常乞食]. ③빈부를 가리지 않고 걸식한다[次第乞食]. ④하루에 한끼만 먹는다[受一食法]. ⑤발우 안의 음식으로 만족한다[節量食]. ⑥정오가 지나면 꿀조차 먹지 않는다[中後不得飮漿]. ⑦낡은 옷만을 입는다[糞掃衣]. ⑧세 벌의 옷만을 지닌다[但三衣]. ⑨무덤에 머문다[塚間坐]. ⑩나무 밑에 앉는다[樹下坐]. ⑪지붕 없는 곳에 머문다[露地坐]. ⑫앉기만 할 뿐 눕지 않는다[常坐不臥].
19)
곧 희근의 제자를 가리킨다.
20)
범어로는 ghoṣapraveśadhāraṇī.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