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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12권
3. 분별세품 ⑤
이와 같이 유선나(踰繕那) 등[의 공간적인 길이의 단위]에 근거하여 기세간과 유정신의 크기의 차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으며,
해[年] 등[의 시간적 길이의 단위]에 근거하여 그들의 수명의 길이에 대해서도 이미 분별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길이의 단위가 동일하지 않음에 대해서는 아직 설하지 않았으니, 이제 마땅히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길이의 단위를 건립함에 있어 명칭에 의거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극소단위, 극미, 자, 찰나]
그렇다면 앞의 두 가지(즉 공간적ㆍ시간적인 양)와 명칭 즉 말[名]의 최소단위[極少量]에 대해 아직 상세하게 밝히지 않았으니, 여기서 마땅히 먼저 이 세 가지의 극소단위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극미(極微)와 자(字)와 찰나(刹那)가
색(色)과 말과 시간의 최소단위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색을 분석하여 나아가면 하나의 극미에 이른다. 따라서 일 극미(極微)는 색의 최소단위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온갖 말과 시간을 분석하여 나아가면 일 자(字)와 찰나(刹那)에 이르게 되니, 이것은 바로 말과 시간의 최소단위가 된다.1)
일 ‘자’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구(瞿, go)라는 말을 설하는 것과 같다.2)
[찰나]
무엇을 일컬어 일 찰나의 길이라고 한 것인가?
다수의 연(緣)이 화합하여 어떤 법이 그 자체의 존재를 획득하는 순간, 혹은 운동하고 있는 어떤 법이 한 극미에서 다른 한 극미로 변천하는 순간[行度頃]을 말한다.3)
그러나 대법(對法)의 여러 논사들은 설하기를,
“이를테면 어떤 장사가 손가락을 빠르게 한번 튀길 경우 65찰나가 소요된다”고 하였다.4)
이와 같은 것을 일컬어 일 찰나의 길이라고 한다.
세 가지의 최소단위에 대해 이미 알았다.
[공간과 시간의 단위]
앞에서 설한 두 가지 단위(유선나 등의 공간적 단위와 해 등의 시간적 단위)는 어떠한가?
[공간의 단위]
이제 바야흐로 먼저 유선나 등의 단위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극미(極微)와 미(微)와, 금(金)ㆍ수(水)ㆍ
토(兎)ㆍ양(羊)ㆍ우(牛)ㆍ극유진(隙遊塵)과
기(蟣)와 슬(虱)과 맥(麥)과 지절(指節)이 있어
뒤로 갈수록 그 양은 일곱 배씩 증가한다.
나아가 24지(指)는 1주(肘)이며
4주는 1궁(弓)의 양이 되며
5백 궁은 1구로사(俱盧舍)이니
이것의 여덟 배가 1유선나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극미(極微)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의 지절(支節)에 이르기까지 뒤의 것일수록 일곱 배씩 증가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7극미를 1미(微)라 하고,
‘미’가 일곱 쌓인 것을 1금진(金塵)이라고 하며,
금진이 일곱 쌓인 것을 수진(水塵)이라고 하며,
수진이 일곱 쌓인 것을 1토모진(兎毛塵)이라고 하며,
토모진이 일곱 쌓인 것을 1양모진(羊毛塵)이라고 하며,
양모진이 일곱 쌓인 것을 1우모진(牛毛塵)이라고 하며,
우모진이 일곱 쌓인 것을 극유진(隙遊塵)이라고 한다.
또한 7극유진을 기(蟣)라고 하며, 7기를 1슬(虱)이라고 하며,
7슬을 1광맥(穬麥)이라고 하며, 7광맥을 1지절(指節)이라고 한다.
그리고 3지절을 1지(指)라고 하니,5)
이는 세간에 상식적인 것으로서, 그래서 본송 중에서도 별도로 분별하지 않은 것이다.
나아가 24지가 옆으로 나란히 있는 것을 1주(肘)라고 하며,
4주가 가로로 쌓여 있는 것을 1궁(弓)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로 ‘심(尋)’을 말한다.6)
다시 가로로 5백 궁이 쌓여있는 것을 1구로사(俱盧舍)라고 하는데, 1구로사는 바로 마을로부터 아란야(阿練若:araṇya, 수행자들이 머무는 寂靜處)에 이르는 가운데 길의 길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8구로사를 설하여 1유선나라고 한다.7)
[극미의 길이와 부피]
이상의 공간적 길이의 최소단위인 극미에도 길이나 부피[方分]가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만약 극미가 부피를 갖는다면 그것은 다시 분석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극미라 할 수 없을 것이며,
만약 부피를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간적 점유성[礙性]을 본질로 하는 색이라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아무리 많은 극미가 취합하여도 역시 부피를 갖지 않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세친은 침묵하고 있지만, 중현은 이하 극미를 실제적[實] 극미와 가설적[假] 극미라는 이중의 구조로 해석하여,
전자는 감각[5識]으로 인식되는 물질의 극소,
후자는 관념[覺慧, buddhi]적으로 더욱 분할되어 추리에 의해 알려지는 물질의 극소라고 하였다.
즉 연장을 갖는 색법[可析法]은 분석되어 궁극에 이르게 되면 세간에서 현견될 수 있는 취색(聚色)이 되며,
그것이 다른 어떤 취색에 의해 다시 쪼개어질 경우 미세한 취색[細聚]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세한 취색은 더 이상 현견할 수 있는 것으로는 쪼개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관념으로써 다시 분석될 수 있을 것인데,
그러한 극소의 극미는 이미 최극소의 시간으로 설정된 찰나처럼 더 이상 분할 불가능한 관념적 소산[覺慧所知]이기 때문에 또 다른 관념으로 분석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가설적 극미이다.
이것은 결정코 존재하는 것으로, 이것이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구체적인 색 즉 취색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종론』 권제17, 한글대장경200,p.454-456)
이와 같이 유선나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시간의 단위]
이제 마땅히 다음으로 해[年] 등의 단위의 차별에 대해서도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찰나에서 해까지]
게송으로 말하겠다.
백 2십 찰나는
1달찰나(怛刹那)의 양이 되며
1납박(臘縛)은 그것의 60배이고
이것의 30배가 1수유(須臾)이다.
수유의 3십 배가 하루 밤낮이고
30번의 밤낮이 한 달[月]이며
열두 달을 일 년이라고 하니,
그 중의 반은 밤이 짧아지는 달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1찰나(kṣaṇa)의 120배를 1달찰나(怛刹那:tatkṣaṇa)라고 하며,
60달찰나를 1납박(臘縛:lava)이라고 하며,
30납박을 1모호율다(牟呼栗多:muhūrta, 須臾)라고 하며,
30모호율다를 하루 밤낮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밤과 낮은 어떤 때에는 길어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짧아지기도 하며, 또 어떤 때에는 같아지기도 한다.8)
또한 30번의 밤과 낮을 한 달이라고 하며, 12달을 일 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 년은 세 계절[三際]로 나누어지니, 이를테면 추운 계절[寒際]과 더운 계절[熱際]과 비 오는 계절[雨際]의 각기 4개월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12개월 가운데 6개월은 밤이 짧아지며, 그래서 일 년에 모두 여섯 번의 밤이 감해진다.9)
어떻게 하여 그렇게 되는 것인가?
어떤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춥고 덥고 비 오는 계절 중에서
한달 반이 지난 다음에
나머지 반달의 하룻밤이 감해지는 것을
지자(智者,즉 불교도)는 안다.10)
이와 같이 찰나로부터 일 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의 단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겁의 단위]
이제 다음으로 겁(劫)의 단위 역시 동일하지 않음에 대해 마땅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4겁(劫)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괴(壞)ㆍ성(成)ㆍ중(中)ㆍ대(大)의 겁이다.
괴겁은 지옥의 유정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 때로부터
외적인 기세간이 모두 다할 때까지의 기간이며
성겁은 바람[風]이 일어나는 때로부터
지옥의 유정이 최초로 태어나기까지의 기간이다.
중겁은 수명의 양이 헤아릴 수 없는 때로부터
감소하여 단지 10세에 이르고
다시 증가와 감소가 열여덟 번 있고 나서
최후로 증가하여 8만 세에 이르는 기간으로
이와 같이 이루어져 머무는 주겁(住劫)을
일컬어 중(中)의 20겁이라고 한다.
성겁과 괴겁, 그리고 허물어져 허공이 되는
시간(즉 공겁)의 길이는 모두 주겁과 동일하니
이러한 80중겁을 대겁이라고 하는데
대겁이란 3무수(無數)의 겁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괴겁]
괴겁(壞劫)이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지옥에 유정이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때로부터 외적인 기세간이 모두 멸진하는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11)
여기서 ‘괴(壞)’ 즉 허물어지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5취가 허물어는 것[趣壞]이고,
둘째는 세계가 허물어지는 것[界壞]이다.
혹은 다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유정이 허물어지는 것[有情壞]이고,
둘째는 외적인 기세간이 허물어지는 것[外器壞]이다.
즉 이 세간은 20중겁의 주겁(住劫)을 지나고 나면 이에 따라 다시 주(住)의 20중겁과 같은 괴겁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만약 어느 때 지옥의 유정들이 목숨을 마치고 다시 새로이 태어나는 일이 없게 되는 것을 괴겁의 시작이라고 하며,12)
내지는 그리하여 지옥에 어떠한 유정도 존재하지 않게 되면, 그 때를 일컬어 지옥이 ‘이미 허물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온갖 유정으로서 결정코 지옥의 과보를 받아야 할 업이 있는 자라면, 그러한 업력에 인기되어 타방(他方)의 지옥 중에 처하게 될 것이다.13)
방생과 아귀의 경우도 이러한 사실에 준하여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각기 본처(本處)에 머무는 것이 먼저 괴멸하고, 인천(人天)과 섞여 살고 있는 것은 인천과 함께 괴멸한다.14)
만약 그 때 인취(人趣)로서 이 주(洲, 남섬부주)의 어떤 한 사람이 스승도 없이 저절로[法然] 초정려를 획득하고, 정려로부터 일어나 노래부르기를,
“이러한 이생희락(離生喜樂:이는 초정려의 특질임)은 참으로 즐겁고 매우 고요하도다”고 말하면,
그 밖의 다른 사람들도 이를 듣고 나서 모두 다 정려에 들며, 아울러 목숨을 마치고 난 후에는 범세(梵世:초정려의 범중ㆍ범보ㆍ대범천) 중에 태어날 수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주(洲)의 유정들이 모두 멸진하게 되면, 이를 일컬어 바로 섬부주의 사람들이 ‘이미 허물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ㆍ서의 두 주의 경우도 마땅히 이에 준하여 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북주의 유정들은 목숨을 다하고 나서 욕계천에 태어나게 되는데, 그들은 능히 선정에 들어 이욕(離欲)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15)
이렇게 하여 인취에 어떠한 유정도 존재하지 않게 될 때, 이 때를 일컬어 인취가 ‘이미 허물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그 때 천취(天趣)로서 사대왕천 중의 어떤 한 천이 저절로 초정려를 획득하고, ……[정려로부터 일어나,
“이러한 이생희락은 참으로 즐겁고 매우 고요하도다”고 노래하면,
그 밖의 다른 천들도 이를 듣고 나서 모두 다 정려에 들며, 아울러 목숨을 마치고 난 후에는] 범세 중에 태어날 수 있는데, 이 때를 일컬어 바로 사대왕중천이 ‘이미 허물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다섯 욕천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여 동일하게 설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욕계의 어떠한 유정도 존재하지 않게 되면, 이를 일컬어 욕계 중의 유정이 ‘이미 허물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그 때 범세(梵世) 중의 어떤 한 유정이 스승도 없이 저절로 제2정려를 획득하고, 그러한 정려로부터 일어나 외치기를,
“이러한 정생희락(定生喜樂:이는 제2정려의 특질임)은 참으로 즐겁고 매우 고요하도다”고 하면,
그 밖의 다른 천들도 이를 듣고 나서 모두 다 그러한 정려에 들며, 아울러 목숨을 마치고 난 후에는 극광정천에서의 생을 획득하는데, [이 때를 일컬어 바로 범세의 유정이 ‘이미 허물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하여 범세의 유정이 모두 멸진하게 되면, 이와 같은 때를 일컬어 유정세간이 ‘이미 허물어졌다’고 하는 것이다16).
그리고 이 때에는 오로지 기세간만이 텅빈 채 남아 있게 된다.17) 그러다가 이러한 삼천세계(三千世界)를 초래하는, 그 밖의 다른 시방계(十方界)의 일체 유정들의 업이 다하게 되면, 이러한 삼천세계에는 점차 일곱 개의 해[日輪]가 나타난다.
그러면 온갖 바다(8海)는 말라 없어져 버리고, 여러 산(9山)들은 타오르며, 4대주와 3륜(즉 금륜ㆍ수륜ㆍ풍륜)도 아울러 따라서 불타오르게 된다.
그리고 바람은 맹렬히 화염을 일으켜 위의 천궁(즉 욕계 6천의 궁전)을 불태우며, 내지는 범천의 궁전도 모조리 태워버려 재도 남기지 않는다.
물론 자지(自地)의 화염은 자지의 궁전만을 불태울 뿐으로, 다른 지의 화재가 능히 그 밖의 다른 지의 궁전을 괴멸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불길을] 서로 인기(引起)함으로 말미암아 ‘하지의 화염과 바람이 회오리쳐 상지의 궁전을 불태운다’고 설한 것일 뿐이다.
말하자면 욕계의 맹렬한 화염이 위로 치솟는 것을 연(緣)으로 삼아 색계의 화염이 인기되어 낳아지게 된 것이니, 그 밖의 다른 재앙(즉 水災와 風災)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지옥이 점차 감소하는 때로부터 시작하여 기세간이 모두 다할 때까지를 총칭하여 ‘괴겁’이라고 한다.
[성겁]
앞에서 말한 성겁(成劫, vivarta-kalpa)이란 이를테면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부터 지옥에 처음으로 유정이 생겨나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말하자면 이 세간이 재앙(3재)에 의해 파괴되고 나서부터 20중겁(中劫) 동안은 오로지 허공만이 존재할 뿐인데(즉 空劫), 이같이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마땅히 다시 주겁(住劫)의 20겁과 동등한 기간의 성겁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즉 일체 유정의 업의 증상력에 의해 허공 중에는 점차 미세한 바람이 생겨나게 되니, 이것이 바로 기세간이 장차 이루어지려고 하는 조짐이다.
그러다 바람이 점차 증가하여 왕성해지고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풍륜ㆍ수륜ㆍ금륜 등이 성립한다.
그러나 처음에 대범천의 궁전 내지 야마천의 궁전을 성립시키고 그 후에 풍륜 등을 일으키니,18) 이것을 바로 외적인 기세간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기세간에 처음으로 어떤 한 유정이 극광정천(제2정려 제3천)에서 몰하여 대범(大梵)의 처소에 태어나 대범왕이 되면, 그 후에 온갖 유정들도 역시 그곳으로부터 몰하여 범보천에 태어나기도 하고, 범중천에 태어나기도 하며, 타화자재천에 태어나기도 한다.
그리하여 점차 그 아래로 태어나 인취(人趣)인 북구로주와 서우화주와 동승신주와 남섬부주에 태어나기도 하며, 그 후에 아귀ㆍ방생ㆍ지옥으로도 태어나게 되는 것이니, 뒤에 허물어진 것일수록 반드시 먼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은 자연적인 이치[法爾]이다.
그리고 만약 어떤 한 유정이 최초로 무간지옥에 태어나게 될 때, 바야흐로 20중겁에 걸친 ‘성겁’이 이미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중겁]
이후 다시 20의 중겁(antara-kalpa)이 있으니, 이것을 일컬어 ‘이미 이루어져 지속하는 겁’ 즉 주겁(住劫, sthiti-kalpa)이라고 한다. 이것은 차례 차례 일어난다.19)
이를테면 바람이 일어 기세간을 조작하면서부터 그 후 마침내 유정이 거기에 머물게 되는 것인데, 이 남섬부주의 인간들 수명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거쳐 주겁이 시작할 때에 이르러 수명은 바야흐로 점차 줄어들게 된다.
즉 무량(無量)의 수명으로부터 마침내 10세에 이르게 되는 것을 일컬어 첫 번째 주(住)의 중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후 열여덟 번의 중겁은 모두 증가와 감소가 있다.
이를테면 10세의 수명으로부터 증가하여 8만에 이르고, 다시 8만으로부터 감소하여 10세에 이르게 되니, 이것을 일컬어 두 번째 중겁이라고 하며,
이후 열일곱 번의 중겁도 모두 이와 같다.
그리고 이러한 열여덟 번의 증가와 감소가 있은 후에 10세로부터 증가하여 마침내 8만 세에 이르게 되는 것을 일컬어 스무 번째 중겁이라고 한다.
이러한 일체의 주겁에 있어서 수명의 증가가 8만 세를 넘는 일은 없으며, 일체의 주겁에 있어 수명의 감소도 오로지 10세가 그 한도이다.
그리고 열여덟 번의 중겁 중에 한번 증가하고 한번 감소하는 시간은 바야흐로 처음 감소할 때(즉 제1중겁)와 최후로 증가할 때(즉 제20중겁)가 동일하다.
따라서 20중겁이라고 하는 시간의 양은 모두 동일한데, 이 같은 20중겁을 총칭하여 ‘이미 이루어져 지속하는 겁’ 즉 주겁(住劫)이라고 하는 것이다.
[공겁]
그 밖의 성겁과 괴겁과, 괴멸하고서 허공이 되는 겁 즉 공겁(空劫)은 비록 20번씩 감소하고 증가하는 차별은 없을지라도 시간의 길이는 주겁과 동일하기 때문에, 주겁에 준하여 각기 20중겁을 성취한다.
즉 성겁 가운데 최초의 중겁에 기세간이 일어나며, 그 뒤의 19중겁 중에서는 유정이 점차적으로 생겨나 머물게 된다.
또한 괴겁 가운데 최후의 중겁에서는 기세간을 괴멸하며, 앞의 19중겁 중에서는 유정이 [하지에서부터] 점차 목숨을 버리게 된다.
[대겁]
이상에서 설한 성(成)ㆍ주(住)ㆍ괴(壞)ㆍ공(空)의 각기 20중겁을 합하면 80중겁이 되는데, 이러한 80중겁을 모두 합하면 대겁(大劫, mahā-kalpa)의 양이 되는 것이다.
[겁의 본질]
그렇다면 겁(劫)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오로지 5온일 뿐이다.20)
경에서 설하기를,
“3겁(劫)의 아승기야(阿僧企耶, asaṁkhyeya) 동안 정진 수행하여 비로소 성불을 획득하였다”고 하였는데,21)
앞에서 설한 네 종류의 겁 가운데 어떠한 겁을 쌓아야 3겁의 무수(無數, 즉 아승기야)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인가?
앞에서 논설한 대겁을 십 백 천을 쌓더라도 3겁의 무수를 성취할 수 없다.
이미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으면서 어찌 다시 ‘3’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무수’라고 하는 말은 헤아릴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해탈경』에서 60수(數)를 설하면서 아승기야를 바로 그 중의 한 수로 언급한 것이다.22)
무엇을 일컬어 60이라 한 것인가?
그 경에서 말한 바와 같다.
하나만이 있어 다른 것이 없는 수의 시작을 ‘일(一)’이라 한다.
일의 열 배를 십(十)이라 한다.
십의 열 배를 백(百)이라 한다.
백의 열 배를 천(千)이라 한다.
천의 열 배를 만(萬)이라 한다.
만의 열 배를 낙차(洛叉, lakṣa)라고 한다.
낙차의 열 배를 도락차(度洛叉, atilakṣa)라고 한다.
도락차의 열 배를 구지(俱胝, koṭi)라고 한다.
구지의 열 배를 말타(末陀, madhya)라고 한다.
말타의 열 배를 아유다(阿庾多, ayuta)라고 한다.
아유타의 열 배를 대(大)아유다(mahāyuta)라고 한다.
대아유타의 열 배를 나유다(那庾多, nayuta)라고 한다.
나유타의 열 배를 대나유다(mahānayuta)라고 한다.
대나유타의 열 배를 발라유다(鉢羅庾多, prayuta)라고 한다.
발라유다의 열 배를 대발라유다(mahāprayuta)라고 한다.
대발라유다의 열 배를 긍갈라(矜羯羅, kaṁkara)라고 한다.
긍갈라의 열 배를 대긍갈라(mahākaṁkara)라고 한다.
대긍갈라의 열 배를 빈발라(頻跋羅, bimbara)라고 한다.
빈발라의 열 배를 대빈발라(mahābimbara)라고 한다.
대빈발라의 열 배를 아추바(阿芻婆, akṣobhya)라고 한다.
아추바의 열 배를 대아추바(mahākṣobhya)라고 한다.
대아추바의 열 배를 비바하(毘婆訶, vivāha)라고 한다.
비바하의 열 배를 대비바하(mahāvivāha)라고 한다.
대비바하의 열 배를 올층가(嗢蹭伽, utsaṅga)라고 한다.
올층가의 열 배를 대올층가(mahotsaṅga)라고 한다.
대올층가의 열 배를 바할나(婆喝那, vahana)라고 한다.
바할나의 열 배를 대바할나(mahāvhana)라고 한다.
대바할나의 열 배를 지치바(地致婆, tiṭibha)라고 한다.
지치바의 열 배를 대지치바(mahātiṭibha)라고 한다.
대지치바의 열 배를 혜도(醯都, hetu)라고 한다.
혜도의 열배를 대혜도(mahāhetu)라고 한다.
대혜도의 열 배를 갈랍바(羯臘婆, karabha)라고 한다.
갈랍바의 열 배를 대갈랍바(mahākarabha)라고 한다.
대갈랍바의 열 배를 인달라(印達羅, indra)라고 한다.
인달라의 열 배를 대인달라(mahendra)라고 한다.
대인달라의 열 배를 삼마발탐(三磨鉢耽, samāpta)이라고 한다.
삼마발탐의 열 배를 대삼마발탐(mahāsamāpta)이라고 한다.
대삼마발탐의 열 배를 게저(揭底, gati)라고 한다.
게저의 열 배를 대게저(mahāgati)라고 한다.
대게저의 열 배를 염벌라사(拈筏羅闍, nimbarajas)라고 한다.
염벌라사의 열 배를 대염발라사(mahānimbarajas)라고 한다.
대염발라사의 열 배를 모달라(姥達羅, mudrā)라고 한다.
모달라의 열 배를 대모달라(mahāmudrā)라고 한다.
대보달라의 열 배를 발람(跋藍, bala)이라고 한다.
발람의 열 배를 대발람(mahābala)이라고 한다.
대발람의 열 배를 산야(珊若, samjñā)라고 한다.
산야의 열 배를 대산야(mahāsamjñā)라고 한다.
대산야의 열 배를 비보다(毘步多, vibhūta)라고 한다.
비보다의 열 배를 대비보다(mahāvibhūta)라고 한다.
대비보다의 열 배를 발라참(跋羅攙, balakṣa)이라고 한다.
발라참의 열 배를 대발라참(mahābalakṣa)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발라참의 열 배를 아승기야(阿僧企耶, asaṁkhyeya)라고 한다.
이러한 60수 중에서 나머지 여덟 가지는 망실되었다.
만약 대겁을 헤아려 이러한 수 중에서 아승기야에 이르게 될 때 그것을 일컬어 겁의 ‘무수(無數)’라고 하니, 이러한 겁의 무수를 다시 세 번 더해야 비로소 경에서 설한 3겁의 무수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온갖 산계론(算計論)으로 능히 헤아려 알 수 없기 때문에 3겁의 무수라고 설하게 된 것이 아니다.
[보살의 발원]
어떠한 이유에서 보살은 발원(發願)하고서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정진 수행하여야 비로소 불과(佛果)를 기약할 수 있는 것인가?
어찌 오랜 세월 수행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무상(無上)의 보리(菩提)는 참으로 얻기 어려워 많은 원행(願行)에 의하지 않고서는 획득 성취할 수 없으니, 보살은 요컨대 3무수겁을 거치면서 복덕과 지혜의 크나큰 자량(資糧)이 되는 6바라밀다(波羅蜜多)와 수많은 백천의 고행을 닦아 비로소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결정코 마땅히 오랜 세월 동안 원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그 밖의 다른 방편으로도 역시 열반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보리를 증득하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많은 고행을 닦는 것인가?23)
일체의 유정에게 이익과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였다.
그래서 그 같은 보리를 구하고자 오랜 세월 동안,
‘어떻게 하면 내가 크나큰 감당의 능력[大堪能]을 갖추고서 괴로움의 폭류(瀑流)로부터 모든 함식(含識,유정)을 구제할 것인가’하는 원을 일으켰던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열반의 도를 버리고 무상의 보리를 구하게 된 것이다.
다른 유정을 구제하면 자기에게 어떠한 이익이 있는 것인가?
보살은 유정을 구제함으로써 자신의 비심(悲心)을 성취하니, 그래서 다른 이를 구제하는 것으로써 바로 자신의 이익을 삼는 것이다.
보살에게 이와 같은 사정이 있다는 것을 누가 믿을 것인가?
자신의 윤택함만을 생각하고 크나큰 자비(慈悲)가 없는 이와 같은 유정에게 이 같은 사실은 믿기가 어렵겠지만,
자신의 윤택함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으며 크나큰 자비를 갖는 이와 같은 유정에게 이 같은 사실은 믿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컨대 남을 가엾이 여기지 않는 마음을 오래 익힌 자는 비록 자기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을지라도 즐거이 남에게 손해를 끼치니, 이는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살은 자비의 마음을 오래 익혀 비록 자기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을지라도 다른 이의 이익에 즐거워하니, 이 어찌 믿지 않을 것인가?
또한 예컨대 어떤 유정이 자주 익혀온 힘으로 말미암아 무아(無我)의 행(行)에 대해 그것이 유위(有爲)임을 알지 못하고 ‘나[我]이고 나의 것[我所]이다’라고 집착하여 애착을 낳고, 이것을 원인으로 삼아 온갖 괴로움을 달게 받는다는 것은 지자(智者)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살은 자주 익혀온 힘으로 말미암아 자아의 애착을 버리고 다른 이를 연민하는 마음을 북돋우어 이것을 원인으로 삼아 온갖 괴로움을 달게 받으니, 이 어찌 믿지 않을 것인가?
또한 종성(種姓)이 다름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뜻과 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즉 다른 이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으로 삼고, 다른 이의 즐거움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았지만, 자신의 괴로움이나 즐거움은 자신의 괴롭고 즐거운 일로 여기지 않았으니,
이는 다른 이를 이익되게 하는 것과는 다른 별도의 자신의 이익이 존재한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뜻에 근거하여 어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사(下士)는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
항상 자신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며
중사(中士)는 다만 괴로움의 소멸만을 희구할 뿐
즐거움은 희구하지 않으니, 괴로움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상사(上士)는 항상 자신은 괴로워도
다른 이의 안락과 아울러 다른 이의
괴로움의 영원한 소멸을 부지런히 추구하니
다른 이의 괴로움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겁(劫)의 양적 차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부처님과 독각의 출현]
그렇다면 모든 부처님과 독각(獨覺)이 세간에 출현하는 것은 겁이 증가할 때인가, 겁이 감소하는 상태에서인가?
[부처님]
게송으로 말하겠다.
8만 세에서 감소하여 백 세에 이를 때
모든 부처님께서는 세간에 출현하지만
독각은 증가나 감소에 관계없이 출현하며
인각유(麟角喩) 독각은 백 겁 후에 출현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 주(즉 남섬부주)의 인간들 수명이 8만 세에서 점차 감소하여 마침내 수명이 최대 백 세에 이르게 되는 그 중간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출현하신다.24)
어떠한 연유에서 수명이 증가하는 상태에서는 부처님께서 출현하는 일이 없는 것인가?
이 때는 유정의 즐거움이 증가하여 [세상에 대한] 싫어함[厭]을 가르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25)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백 세 이하로 감소할 때에도 부처님께서 출현하는 일이 없는 것인가?
5탁(濁)이 지극히 증대하여 교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 5탁이라 말한 것은,
첫 번째는 수탁(壽濁)이며,
두 번째는 겁탁(劫濁)이며,
세 번째는 번뇌탁(煩惱濁)이며,
네 번째는 견탁(見濁)이며,
다섯 번째는 유정탁(有情濁)이다.26)
즉 겁이 감소하여 장차 그 종말에 이르게 되면 목숨 등이 천박하여 찌꺼기의 더러움[滓穢, kiṭṭa, 분비물]과 같아지기 때문에 ‘탁(kaṣāya)’이라 일컬은 것이다.
여기서 앞의 두 가지 탁에 의해 순서대로 수명과 자구(資具, 생활의 도구)가 쇠퇴 손상되며,
다음의 두 가지 탁으로 말미암아 선품(善品)이 쇠퇴 손상되니, 욕락과 스스로의 고행에 탐닉하기 때문이다.
혹은 순서대로 재가(在家)와 출가(出家)의 선을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탁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쇠퇴 손상시키니,
이를테면 자신의 신체의 크기나 색ㆍ힘, 기억[念], 지혜, 부지런함과 용기, 그리고 무병(無病)을 허물어뜨리기 때문이다.
[독각]
그러나 독각(獨覺)은 겁이 증가하거나 감소함에 관계없이 출현한다.
모든 독각에는 두 종류의 구별이 있으니,
첫째는 부행(部行)이며,
둘째는 인각유(麟角喩)이다.
[부행독각]
부행독각이란 일찍이 성문(聲聞)이었던 자가 뛰어난 과보를 획득하였을 때를 말하는 것으로, 달리 독승(獨勝)이라고도 이름한다.27)
그러나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들은 본래 이생(異生)이었지만 일찍이 성문의 순결택분(順決擇分)을 닦았으며, 지금 스스로 도를 증득하였기에 ‘독승’이라고 하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본사(本事) 중에 설하고 있는 바에 따른 것이다.28)
즉 어떤 한 산중에 5백 명의 외도선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고행을 닦고 있었다.
그 때 한 마리의 원숭이가 있어 일찍이 독각과 서로 가까이 살면서 그의 위의(威儀)를 보았었는데, 그 후 이리 저리 유행(遊行)하다가 외도선인들의 처소에 이르러 일찍이 보았던 독각의 위의를 나타내었다.
그러자 모든 선인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 공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낳아 잠깐 사이[須臾]에 모두 독각의 보리를 증득하였다고 하였다.
만약 일찍이 [성문의] 성인이었다면 마땅히 고행을 닦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인각유]
인각유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홀로 머무는 이[獨居]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 종류의 독각 중에서 인각유독각은 요컨대 백 대겁 동안 보리의 자량을 닦은 연후에야 비로소 인각유독각을 성취한다.29)
나아가 독각이라고 말한 것은, 현재의 소의신[現身] 중에서 지극한 가르침[至敎]을 받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 도를 깨달아, 스스로는 능히 조복(調伏)하였지만 다른 이를 조복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은 것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독각은 다른 이를 조복시키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는 능히 정법을 연설할 수 없는 이도 아닐 뿐더러 그 역시 무애해(無礙解:法ㆍ義ㆍ詞ㆍ辯의 4무애해)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또한 과거세에 들었던 제불(諸佛)이 널리 펴신 성교(聖敎)의 이치를 능히 기억하기 때문에,
[그는 능히 다른 이를 조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에게 자비심이 없다고도 설할 수 없을 것이니, 유정을 포섭하기 위해 신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때는] 정법을 향수할 만한 근기가 없다고도 설할 수 없을 것이니, 그 때의 유정들도 역시 세간 이욕(離欲)의 대치도를 능히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같은 이치가 있을지라도 그는 숙습(宿習)으로 말미암아 즐거이 하고자 하는 일[欣樂勝解]이 적을 뿐더러 설하려고 하는 희망도 없기 때문에,
또한 [그 때의] 유정들은 심오한 법을 향수하기가 어려울 뿐더러 [생사의] 흐름을 따른 지 이미 오래되어 그 흐름을 거스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또한 대중들을 섭수(攝受)하는 것(즉 지도하는 것)을 회피하기 때문에,
다른 이를 위해 정법을 널리 설하지 않는 것이니, 시끄럽게 떠들어 잡란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전륜성왕]
전륜왕(轉輪王)이 세간에 출현하는 것은 언제이고, 그 종류는 몇 가지이며, 몇이서 함께 출현하는 것인가?
또한 그들은 어떠한 위엄과 어떠한 상호[相]를 갖추고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전륜왕은 [인간의 수명이] 8만 세 이상일 때 출현하니
금륜(金輪)ㆍ은륜(銀輪)ㆍ동륜(銅輪)ㆍ철륜(鐵輪)의 왕이
한 주(洲)ㆍ두 주ㆍ세 주ㆍ네 주를 반대의 순서로 다스리며
홀로 출현하는 것은 부처님과도 같다.
[그들은] 다른 이에 의해 모셔지고, 스스로 나아가 항복받으며
위덕을 과시하고, 진(陣)을 펼쳐 승리하지만 남을 해치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상호는 바르고 명료하고 원만하지 않으니
그래서 부처님과 동등하지 않은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 주(洲:남섬부주)의 사람들 수명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때로부터 8만 세에 이르는 동안 전륜왕은 생겨나게 되는데, 8만세 이하로 감소할 때이면 유정의 부귀ㆍ향락이 손상되고 수명이 감소하며, 온갖 악이 점차 치성하여 대인(大人)을 받아들일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때는 전륜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왕은 바퀴[輪]가 굴러 그것이 인도하는 대로 일체의 유정을 위엄으로써 항복받기 때문에 ‘전륜왕(轉輪王, cakravartin-rāja)’이라고 이름하였다.
『시설족론』 중에서는 그것에 네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니, 금ㆍ은ㆍ동ㆍ철의 바퀴에 따른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서대로 최승의 왕이고, 상품ㆍ중품ㆍ하품의 왕이며, 또한 반대의 순서대로 능히 한 주(洲)를, 두 주를, 세 주를, 네 주를 다스리는 왕이다.
즉 철륜왕은 한 주의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며, 동륜왕은 두 주의 세계를, 은륜왕은 세 주의 세계를, 그리고 금륜왕은 4대주의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라고 한다.30)
그런데 계경에서는 뛰어난 왕, 즉 금륜왕에 대해서만 설하고 있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이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왕이 찰제리(刹帝利:Kṣatriya,사성계급 중 통치계급) 종족으로 태어나 관정의 지위[灑頂位, 즉 灌頂의식을 거친 왕위]를 이어 받고자 보름날(15일, 즉 포살일) 재계(齋戒)를 받을 때이면 머리와 몸을 깨끗이 씻고서 수승한 재계를 받게 되는데,
이 때 높은 누대의 전각에 오르면 신하와 관리들이 그를 보필하여 좌우로 늘어서고, 동방에서는 홀연히 금륜의 보배가 나타난다. 그 바퀴는 천개의 바퀴살을 갖고 있으며, 속의 바퀴통과 밖의 바퀴 테를 모두 갖추어 모든 상이 원만하고 청정하여 참으로 교묘한 장인[巧匠]이 만든 것과 같다. 만약 이것이 미묘한 광명을 발하며 왕의 처소로 와 감응하면, 이 왕은 필시 금륜을 굴릴 왕인 것이다. 그 밖의 다른 전륜왕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31)
[오로지 한 분이 출현한다]
그리고 전륜왕은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두 왕이 함께 생겨나는 일이 없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이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곳에서도, 어떠한 상태에서도 동시에 두 명의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이 세간에 출현하는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니,
어떠한 곳에서도 어떠한 상태에서도 오로지 한 분의 여래만이 세간에 출현한다. 여래에 대해 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전륜왕 역시 그러하다.”32)
여기서 마땅히 살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오로지 한 분’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의 삼천세계에 근거하여 그렇다는 말인가, [시방의] 일체의 [삼천]세계에 근거하여 그렇다는 말인가?
어떤 이는 설하기를,
“다른 세계에는 결정코 부처님께서 태어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33)
그 까닭이 무엇인가?
박가범(薄伽梵)의 공능에 장애(한계)가 있을 리 없으니, 오직 한 분의 세존만으로도 널리 시방세계를 능히 교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중의 어느 한 곳이라도 한 부처님에게 그곳을 교화할 능력이 없다고 한다면 그 밖의 다른 곳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세존께서 사리자(舍利子)에게,
“어떤 이가 그대를 찾아와
‘범지(梵志) 사문(沙門)으로서 지금의 교답마(喬答摩, Gautama)와 동등한 평등하고도 무상(無上)한 깨달음을 획득한 자가 있는가?’ 하고 물으면,
그대는 그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고 말하였을 때,
사리자는 세존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어 말하였던 것이다.
“저는 그의 물음에 대해 마땅히 이와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지금의 범지 사문으로서 우리 세존과 동등한 무상의 보리를 획득한 자는 아무도 없다. 왜냐 하면 나는 세존으로부터 어떠한 곳에서도, 어떠한 상태에서도 동시에 두 명의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이 세간에 출현하는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니, 어떠한 곳에서도 어떠한 상태에서도 오로지 한 분의 여래만이 [세간에 출현한다]는 말씀을 직접 듣고 직접 받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3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범왕경(梵王經)』에서,
“나는 지금 이 삼천대천의 온갖 세계 중에서만 자재로이 전생(轉生)할 수 있다”고 설하였겠는가?35)
거기에는 은밀한 뜻이 있다.
은밀한 뜻이란 무엇인가?
즉 만약 세존께서 가행(加行)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오로지 이 삼천 대천세계만을 능히 관찰하였겠지만, 그러나 만약 어느 때 세존께서 가행을 발기하였다면 가이없는 무변(無邊)의 세계는 모두 불안(佛眼)의 경계가 되니, 천이통(天耳通) 등도 이러한 예에 따라 마땅히 그러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부파(대중부 등)의 논사는 말하기를,
“다른 세계에도 역시 별도의 부처님이 존재하여 세간에 출현한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많은 보살들이 있어 지금 현재 다 같이 보리의 자량(資糧, 즉 6바라밀다)을 수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한 세계[一界] 한 시[一時]에 다수의 부처[多佛]는 없다 할지라도 다수의 세계[多界]에 다수의 부처가 있다고 하면 무슨 이치로 능히 이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가이없는 무변의 세계 중에는 가이없는 무변의 부처님이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오로지 한 분의 부처님만이 출현하신다면, 설혹 일겁의 시절 동안 머물러 계신다 할지라도 한 세계의 불사(佛事)를 두루 다 할 수 없거늘 하물며 인간과 같은 수명으로 어떻게 가이없는 무변의 세계를 능히 이익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온갖 유정들은 가이없는 무변의 세계에 머물고 있을 뿐더러 [살아가는] 시절과 처소와 근기의 차별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응당 마땅히 이러한 유정들의 종류를 두루 관찰하시고서, 이와 같은 시절과 처소에서도 마땅히 그들이 세존을 볼 수 있도록 그들 근기에 따라 신통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였으니,
그의 과실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자에게는 생겨나지 않게 하고,
온갖 유정에게 이미 생겨났으면 능히 끊게 하며,
그의 공덕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자에게는 생겨날 수 있게 하고,
온갖 유정에게 이미 생겨났으면 능히 원만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분의 부처님만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이 같은 일들을 단박에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결정코 동시에 다수의 부처님이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그들(즉 유부 비바사사)이 인용한,
‘어떠한 곳에서도, 어떠한 상태에서도 동시에 두 분의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는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는 따위의 경문에 대해서도 마땅히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이 같은 말은 한 세계[一界]에서 그렇다는 말인가, 다수의 세계[多界]에서 그렇다는 말인가?
만약 다수의 세계에서 그렇다고 한다면 전륜왕도 역시 다른 세계 중에서도 [한 명 이상]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함께 생겨나는 것을 부정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전륜왕이 다른 세계에 따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다른 세계에서의 부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는가?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시는 것은 길상(吉祥)의 복을 갖추었기 때문으로,36) 다수의 세계에 다수의 부처님이 있다고 한들 무슨 과실이 있어 이를 부정할 것인가?
즉 다수의 세계 중에 온갖 부처가 함께 나타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량의 유정들을 능히 요익(饒益)하여 증상의 생(生)이나 결정적으로 수승한 도(道)를 획득하게 하는 것이다.37)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한 세계 중에 두 분의 여래가 동시에 출현하는 일은 없는 것인가?
필요없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한 세계 중에서는 한 분의 부처님만으로도 능히 일체 중생을 요익하게 하는데 충분한 것이다.
또한 원력(願力)을 일으켰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모든 여래는 보살일 적에 먼저 다음과 같은 서원을 일으켰던 것이다.
“원컨대 나는 당래 구원처가 없고[無救] 의지처가 없는[無依] 어두운 세계에 머물면서 등정각을 성취하여 일체의 유정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함으로써 구원처가 되고 의지처가 되며 밝은 눈이 되어 그들을 인도하리라.”
또한 공경하고 존중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니, 이를테면 한 세계에 오로지 한 분의 여래만이 존재하여야 깊이 공경하고 존중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속하게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니, 이를테면 [유정들이] ,‘
일체지(一切智)의 존자는 만나기가 매우 어려우니, 그가 세운 교법을 마땅히 신속하게 수행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 분께서] 반열반에 들거나 혹은 다른 곳으로 가시게 되면 우리는 구원처가 없고 의지처가 없게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이와 같은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한 세계 중에 두 분의 부처님이 출현하시는 일은 없는 것이다.38)
이와 같이 앞에서 설한 네 종류의 전륜왕은 위엄으로써 모든 곳을 평정하지만 여기에도 역시 차별이 있다.
즉 금륜왕(金輪王)의 경우 모든 작은 나라의 왕들이 각기 자발적으로 찾아와서 모셔가니,
그들은 이와 같이 청하여 말한다.
“저희들의 국토는 넓고 풍요로우며 안은(安隱)하고 부유하여 즐겁기 그지없는 곳으로, 온갖 종류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오로지 원하건대 천존(天尊)께서 친히 교칙만 내려 주신다면 저희들은 모두 천존의 신하[翼從]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은륜왕(銀輪王)이라면 스스로 그들의 땅으로 가 자신의 위엄을 가까이서 보여 주니, 그 때 그들은 비로소 항복하여 신하가 된다. 만약 동륜왕(銅輪王)이라면 그들의 나라에 이르러 위엄을 선양하고 덕을 과시하니, 그 때 그들은 비로소 그를 뛰어난 왕으로 추대한다.
만약 철륜왕(鐵輪王)이라면 역시 그들의 나라로 가 위세를 과시하고 진을 펼치는 것만으로 승리하여 [나라를] 평정하게 된다.
그렇지만 일체의 전륜왕은 모두 다 남을 해치는 일이 없으며, 그들을 항복시켜 승리를 얻었을지라도 각기 그들의 처소에서 편안히 살게 하고, 10선업도(善業道)를 닦도록 권유하고 교화한다.
그래서 전륜왕은 죽으면 결정코 하늘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설하기를,
“전륜왕이 세간에 출현할 경우, 7보(寶)를 갖고 세간에 출현한다”고 하였다.39)
그러한 일곱 가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첫째는 바퀴 보배[輪寶]이며,
둘째는 코끼리 보배[象寶]이며,
셋째는 말 보배[馬寶]이며,
넷째는 구슬 보배[珠寶]이며,
다섯 째는 여인 보배[女寶]이며,
여섯째는 주장신(主藏臣)의 보배이며,
일곱째는 주병신(主兵臣)의 보배이다.40)
코끼리 등의 다섯 가지 보배는 유정수에 포섭되는데, 어떻게 다른 이의 업이 다른 유정을 낳을 수 있는 것인가?41)
다른 유정이 다른 이의 업에 의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일찍이 서로에게 소속되는 업을 지었기 때문에 둘 중에 만약 어느 하나가 자신의 업을 받아 태어나게 되면 다른 하나도 역시 동시에 자신의 업에 편승하여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설한 바대로 모든 전륜왕은 7보를 갖지만 다른 왕과의 차이는 오로지 그것만이 아니다. 서른두 가지의 대사(大士:부처님을 말함)의 상호(相好)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역시 차이가 있다.42)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전륜왕과 부처님은 무엇이 다른가?
부처님인 대사의 상호는 각기 처하는 바가 단정하고 명료하며 원만하지만 전륜왕의 상호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43) 양자 사이에는 차별이 있는 것이다.
[겁초에 왕이 있었는가]
겁초(劫初:즉 성겁이 시작할 때)의 사람들에게도 왕이 있었던 것인가, 없었던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겁초의 사람들은 색계의 천(天)과 같았지만
그 후에 점차 맛에 대한 탐욕이 증가하게 되었고
나태하여 [물자를] 저장하자 도적이 생겨났으니
그것을 지키기 위해 수전(守田,즉 왕)을 고용하게 되었다.
논하여 말하겠다.
겁초의 사람들은 모두 색계의 천중(天衆)과 같았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설하기를,
“겁초 무렵의 사람들은 마음대로 성취되는 유색의 몸[有色意成]을 가졌는데, 사지와 몸뚱이가 원만하고 모든 근(根)에는 결함이 없었으며, 형색이 단엄(端嚴)하였다. 또한 몸에 광명을 띠었고, 자유자재로 허공을 날았으며, 희락(喜樂)만을 먹고 마시며 기나긴 시간에 걸쳐 오래오래 살았었다”고 하였다.44)
그런데 이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에게 점차 지미(地味, pṛthivīrasa, 『광기』에 의하면 땅 속에서 생겨난 融錫과 같은 것)가 생겨나게 되었으니, 그 맛은 매우 감미로웠고 그 향기도 매우 진하였다.
그 때 맛을 탐(耽)하는 품성의 어떤 한 사람이 그 향을 냄새맡고는 애탐을 일으켰으며, 마침내 그것을 맛보고는 바로 먹게 되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이를 따라 배워 경쟁적으로 그것을 취하여 먹기 시작하였으니, 바야흐로 이 때를 일컬어 ‘단식(段食)을 처음으로 먹기 시작한 때’라고 한다.
곧 단식을 섭취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신체는 점차 견고하고 무거워졌으며, 광명도 사라지고 바로 어둠이 생겨나게 되었으니, 해와 달과 온갖 별들도 이 때로부터 출현하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맛에 탐닉함으로 말미암아 ‘지미’는 바로 없어져 버리고, 이로부터 다시 지피병(地皮餠:구역에서는 地皮乾, 지미가 말라 떡같이 된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다투어 탐하여 그것마저 먹어버리자 지피병 또한 사라져 버렸다.
그 때에 다시 임등(林藤:포도덩쿨과 같은 덩굴풀)이 출현하였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그것을 탐하여 먹어버렸기 때문에 임등 역시 사라져 버리고,
땅을 갈아 파종하지 않아도 되는 향기 나는 벼[香稻]가 저절로 생겨나게 되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은 다 같이 그것을 취하여 먹거리로 충당하였는데, 이러한 음식은 거친 것이기 때문에 소화되고 남은 더러운 찌꺼기가 몸에 남아있게 되었고,
이것을 제거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두 갈래의 길(대ㆍ소변의 배설기관)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남근(男根)과 여근(女根)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근에 차이로 말미암아 형상도 역시 달라지게 되었으며, 나아가 숙세에 익힌 힘 때문에 서로 마주보고 마침내 비리작의(非理作意:즉 婬心)를 낳아 욕탐이라는 귀신 도깨비에게 몸과 마음을 유혹당하고 교란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본래의] 마음을 상실하고서 미쳐 날 뛰며 비범행(非梵行:청정하지 않은 행위로서 음행)를 행하게 되었던 것이니, 인간 중의 애욕이라는 귀신[欲鬼:구역에서는 婬欲鬼]이 처음으로 발동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때였다.
그런데 그 때의 모든 사람들은 언제든지 먹고 싶은 대로 향기 나는 벼를 취하여 먹었을 뿐 저장하여 쌓아두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 후 품성이 게으르고 나태한 어떤 사람이 있어 향기로운 벼를 많이 가져다 저장해 두고 나중에 먹고자 하였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이를 본받아 점차 더 많이 쌓아두게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벼에 대해 나의 것[我所]이라는 마음이 생겨나 각자의 탐욕스러운 성정(性情)대로 수확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벼를 거둔 곳에서는 두 번 다시 생겨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들은 다 같이 밭을 나누어 먼 장래 그것이 모두 없어져 버릴 것을 염려하여 방비하였는데,
자신에게 분배된 밭에 대해서는 아끼고 수호하려는 마음을 낳고,
다른 이에게 분배된 밭에 대해서는 침입하여 노략질하려는 마음을 품게 되었으니,
도둑질의 허물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를 막기 위하여 서로 모여 상의한 끝에 그들 무리 가운데서 한 명의 덕 있는 이[有德人]을 뽑아, 각기 수확한 벼의 6분의 1을 주고 그를 고용하여 지키게 하였다.
즉 그를 봉하여 전주(田主)로 삼았으니, 바로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찰제리(刹帝利, Kṣatriya)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하게 되었던 것이다.45)
그리고 대중들이 그를 흠모하고 받들게 되자 그 은덕이 온 천하로 흘러 퍼지게 되었기 때문에 다시 그를 대삼말다왕(大三末多王)이라고 이름하게 되었으며,46)
이후로부터 모든 왕들은 바로 이 왕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47)
또한 그 때의 사람으로서 그 성정이 집에 있기를 싫어하고 고요한 곳에 있기를 좋아하며, 엄격히 계행을 닦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 같은 성품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바라문(婆羅門, Brahmana)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후 어떤 왕이 있어 재물을 탐내고 아끼어 온 나라의 인민들에게 능히 균등하게 분배하지 않았다.
그래서 빈궁한 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도둑질을 행하게 되었으며,
왕은 이를 금지시키기 위해 가볍고 무거운 형벌을 시행하였으니,
사람을 살해하는 일은 이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때 어떤 죄인들은 그러한 형벌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과실을 숨기고,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말을 진술하기도 하였으니,
거짓말[虛誑語:구역에서는 妄語]이 생겨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부터였다.
[3재]
앞에서 겁이 감소하는 단계에서는 작은 세 가지 재앙[小三災]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업도(業道)가 증가하면서부터 수명이 감소하여
10세에 이르게 되면, 세 가지 재앙이 나타나니
도병(刀兵)과 질병과 기근이 그것으로, 순서대로
일곱의 날과 달과 해 동안 일어나다 그치게 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유정들이 거짓말을 하면서부터 온갖 악업도(惡業道)는 그 후 더욱더 증가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이 주(洲,남섬부주)의 사람들의 수명은 점차 감소하여 마침내 10세에 이르렀을 때 작은 세 가지 재앙이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재앙과 환란은 두 가지의 법이 근본이 된 것이니, 첫째는 맛있는 음식을 탐하는 것이며, 둘째는 성품이 게으르고 나태한 것이다.
이러한 작은 세 가지 재앙은 중겁(住의 첫 번째 중겁)이 끝나갈 무렵에 일어나는데,
여기서 세 가지 재앙이란, 첫째는 도병(刀兵)이며, 둘째는 질역(疾疫)이며, 셋째는 기근(饑饉)이다.
즉 중겁이 끝나갈 무렵 인간의 수명이 10세일 때, 사람들은 비법(非法)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상속신을 오염시키고, 불평등한 애착이 그 마음을 덮고 가리웠으며, 삿된 법이 얽히고 설켜 진에(瞋恚)가 증가하게 된다.48)
그래서 서로 보기만 하면 날카로운 해코지의 마음[害心]이 생겨나니, 마치 지금의 사냥꾼들이 들판에서 짐승을 보듯 한다.
손에 잡은 것이면 모두 예리한 칼이 되고, 각기 자신의 흉악 광폭함을 뽐내며 서로가 서로를 잔혹하게 해치는 것이다.
(이상 도병의 재앙)
또한 중겁이 끝나갈 무렵 인간의 수명이 10세일 때, 사람들이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온갖 허물을 갖추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비인(非人:이를테면 악령이나 악귀와 같은 것을 말함)이 독을 품어내어 질역 즉 점염병이 유행하게 되는데, 그 병은 치료하기가 어려워 걸리기만 하면 바로 목숨을 마치게 된다.
(이상 질역의 재앙)
또한 중겁이 끝나갈 무렵 인간의 수명이 10세일 때, 사람들이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온갖 허물을 역시 갖추고 있기 때문에 천룡(天龍)이 분노하고 꾸짖어 감로의 비를 내리지 않는다.
이로 말미암아 세간은 오랫동안 기근을 당하여 이를 구제하는 자가 없다면 대부분 목숨을 마치게 된다.
(이상 기근의 재앙)
그렇기 때문에 [경에서],
“기근으로 말미암마 취집(聚集)과 백골(白骨)과 운주(運籌)가 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49)
두 가지 종류의 이유로 말미암아 기근에 ‘취집’이 있다고 일컫게 되었다.
첫째는 사람들의 취집이니, 이를테면 그 때 사람들은 지극히 굶주려 여위었으므로 다 같이 모여서 죽기 때문이며,
둘째는 종자의 취집이니, 그 때의 사람들은 후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그들이 먹을 것을 거두어 작은 상자 속에 넣어두어 종자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같은 기근의 시절을 ‘취집’이라 일컫게 된 것이다.
기근에 ‘백골’이 있다고 말한 것도 역시 두 가지 이유에 의해서이니,
첫째는 그 때의 사람들은 몸이 너무나 말라 목숨을 마치고 얼마되지 않아 바로 백골이 드러나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 때의 사람들은 기근에 핍박되어 백골을 모아 그 즙을 삶아 마시기 때문이다.
기근에 ‘운주’가 있다고 말한 것도 역시 두 가지 이유에 의해서이다.
첫째는 양식이 너무나 적은 나머지 산가지(籌, 셈하는 가지대)를 뽑아야 그것이나마 먹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어떤 한 집에 어른으로부터 어린애에 이르기까지 산가지를 뽑는 날에 약간의 거친 음식을 얻어먹게 되는 것이다.50)
둘째는 산가지를 이용하여 그전에 곡식을 저장하였던 창고[場蘊]를 뒤적여 몇 알의 곡식 낱알을 얻어 물어 삶아 그것을 나누어 마심으로써 남은 목숨을 이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지교(至敎)에서는 그것에 대처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약 어떤 이가 능히 하루 낮과 하룻밤 동안 불살생의 계(戒)를 지닌다면,51) 결정코 미래 생에서는 도병의 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약 능히 간절하고도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 하나의 하리달계(訶梨呾雞, harītakī, 약이 되는 과일의 명칭)라도 승중(僧衆)에 받들어 보시하면 결정코 미래 생에서는 질역의 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약 능히 간절하고도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 한 덩어리의 밥으로써 승중에 받들어 보시하면 미래 생에서는 결정코 기근의 재앙이 일어나는 일을 만나지 않게 될 것이다.”52)
이러한 3재가 일어나게 되면 각기 얼마간의 시간을 거치게 되는가?
도병의 재앙이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7일간이며,
질역의 재앙이 일어나는 것은 7개월 7일간이며,
기근의 재앙이 일어나는 것은 7년 7개월 7일간이니,
이러한 기간을 지나면 재앙은 바로 그치고 인간의 수명은 점차 다시 증가하게 된다.
나아가 동ㆍ서의 두 주에도 이와 유사한 재앙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진에가 증성하고, 몸의 힘이 약해지며, 자주 기근과 갈증이 더해진다.
그러나 북주의 경우에는 이 세 가지 재앙 가운데 어떠한 재앙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3재]
앞서 [괴겁을 설명하면서],
‘화재(火災)는 세계를 불태우며, 그 밖의 다른 재앙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고 논설하였는데,
무엇을 그 밖의 다른 재앙이라 한 것인가?
여기서 마땅히 그 모두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대]3재는 화(火)ㆍ수(水)ㆍ풍(風)으로서
위의 세 정려를 꼭대기로 삼으니,
순서대로 내적 재앙[內災]과 동등하기 때문이며
제4정려는 부동(不動)이기 때문에 재앙이 없다.
그렇지만 그곳의 기세간은 항상하지 않으니,
유정과 함께 생겨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일곱 번의 화재에 한 번의 수재가,
일곱 번의 수재와 화재 후에 풍재가 일어난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대(大) 3재는 유정류들을 핍박하여 하지(下地)의 세계를 버리고 위의 천계 중으로 몰아가는데, 최초에 화재(火災)가 일어나게 되는 것은 일곱 개의 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수재(水災)가 일어나게 되는 것은 장마비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풍재(風災)가 일어나게 되는 것은 바람이 서로 휘몰아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3재의 힘은 기세간을 파괴하고, 내지는 극미(極微)도 역시 남김없이 파괴한다.53)
[극미가 상주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그런데 어떤 종류의 외도는 극미가 상주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들은 말하기를,
“그 때[괴겁 시 구체적 물질적 존재는 괴멸하지만] 그 밖의 극미는 존재한다”고 하였다.54)
어떠한 이유에서 그들은 그 밖의 다른 극미가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인가?
그 후 구체적인 물질적 현상[麤事]이 생겨나는데 종자(種子)가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온갖 유정의 업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바람이 능히 종자가 된다’고 어찌 앞에서 설하지 않았든가?
혹은 이러한 [구체적 물질적 현상은] 앞의 재앙(즉 이전 세간의 괴겁시의 재앙)이 닥칠 때의 꼭대기의 바람[頂風]을 연으로 삼아 생겨난 바람을 종자로 삼는다.55)
또한 화지부(化地部)의 계경 중에서는 말하기를,
“바람이 다른 세계로부터 종자를 날려 이곳에 오게 한 것이다”고 하였다.56)
비록 그러할지라도 [우리(승론)는] 싹 등이 생겨날 때, 그것은 바로 종자 등의 원인에 의해 직접 인기된다고는 인정하지 않는다.57)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싹(결과 즉 세계) 등은 무엇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인가?
각기 자신의 부분[分, avayava]으로부터 생겨난다.58)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부분은 다시 그 자신을 구성하는 부분에 의해 생겨나며, 이같이 계속 나아가 최소한의 부분을 갖는 것[有分]은 극미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싹 등이 생겨나는데 있어 씨앗 등은 어떠한 작용력을 갖는 것인가?
싹 등의 극미를 능히 이끌어 내어 집합[引集]시키는 것을 제외한다면 씨앗 등에는 더 이상 싹 등을 낳을 어떠한 힘도 없다.
어떠한 이유에서 결정코 이와 같이 주장하는 것인가?
다른 존재[異類]로부터 [다른 존재가] 생겨난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59)
어떠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인가?
결정성[定]이 없어지기 때문이다.60)
공능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결정되지 않는 일[不定]은 없으니, 마치 소리와 숙변(熟變)이 다른 존재로부터 생겨나는 것과 같다.61)
속성의 존재[德法, guṅa dharma]에는 [원인과 결과 사이에] 다름이 있지만 실체의 존재[實法, dravya dharma]는 그렇지 않다. 현견하건대 실체의 존재는 오직 동일한 존재[同類]에 의해서만 생겨나는 것으로, 마치 등나무가 그것의 가지를 낳고 실이 옷감을 낳는 것과 같다.
이는 이치에 맞지 않다.
무엇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인가?
상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비유를 인용하여 능증[能立]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인용한 비유가 어째서 상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가?
등나무와 가지, 실과 옷감을 개별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으로, 등나무나 실이 각기 결합 안포(安布)하여 동일하지 않게 될 때 가지와 옷감이라는 명칭을 획득하니, 마치 벌 등의 행렬과 같다.62)
어떻게 그러함(실과 옷감은 다른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인가?
[안(眼) 등의 감관이] 한 가닥의 실과 화합하는 중에는 옷감을 인식할 수 없고 오로지 실만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으로, 무엇이 장애하여 옷감을 인식할 수 없게 하는 것인가?63)
만약 한 가닥의 실 중에서는 전체 옷감[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마땅히 한 가닥의 실에는 옷감의 부분은 존재하지만 옷감은 존재하지 않아야 하며, 응당 마땅히 전체의 옷감은 오직 온갖 부분이 집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곧 옷감이라 일컫는 ‘부분을 갖는 것(즉 전체)’은 더 이상 [실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64) 또한 어떻게 옷감의 부분이 실과 다른 것임을 아는 것인가?
만약 옷감이 요컨대 다수의 소의(즉 실체로서의 실)가 결합한 것이라고 한다면, 오로지 다수의 실이 결합한 것에서도 역시 옷감이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혹은 마땅히 [어떠한 때라도] 필경 옷감을 인식할 수 없어야 할 것이니, [옷감의 어느 한 부분을 볼 때] 중간이나 그 밖의 다른 부분은 근(根)과 대응하지 않기 때문이다.65)
만약 점차로 [확대하여] 모든 [부분부분]이 근과 대응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안근과 신근은 오로지 온갖 부분만을 인식할 뿐이므로 마땅히 부분을 갖는 옷감(즉 전체)을 인식한다고 설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마치 선화륜(旋火輪)의 경우처럼 온갖 부분에 대해 점차로 요별하여 ‘부분을 갖는 것’(즉 전체)에 대한 지각을 총체적으로 일으키니,
이를테면 실의 각기 다른 색깔과 종류와 작용[業]을 떠나 옷감의 색 등의 그러한 세 가지는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비단의 색깔 등은 옷감에 소속된 것이라고 한다면, 실체가 다른 존재로부터 생기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니, 각각의 실의 색깔 등에는 여러 가지 색의 차이(즉 잡색)가 없기 때문이다.66)
혹은 다른 색 등이 없는 일부분에서는 마땅히 옷감을 보지 못할 것이니, 그러한 색 등은 옷감에만 나타나기 때문이다.67)
혹은 그것의 부분(즉 실)에서도 마땅히 [비단과는] 다른 색깔 등을 보아야 할 것이니, 옷감은 반드시 [실과는] 다른 색 등의 상을 갖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승론)는 ‘부분을 갖는 것’(즉 전체)은 그 자체 오로지 단일한 것이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색채와 종류와 작용에 차이가 있다고 인정하니, 살펴보건대 이 얼마나 신령스럽고도 신이한 일인가?68)
또한 동일한 불의 광명이 멀고 가까움에 따라 타고 비추는 데 차이가 있다고 하여 색과 촉에 차별이 있다고 하는 것은 마땅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69)
또한 각기 개별적인 극미는 비록 근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다시 말해 감각의 대상이 될 수 없을지라도] 함께 취집(聚集)해 있으면 바로 근으로 알 수 있으니,
이는 이를테면 ‘화합하면 능히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하는 그들(승론)의 종의와도 같으며,
혹은 ‘안(眼) 등이 화합하여 능히 식을 낳는다’고 하는 [우리의] 교설과도 같다.
또한 눈에 티끌이 들어간 자가 땅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볼 경우, 만약 다수의 그것이 서로 인접해 있으면 그는 능히 그것을 볼 수 있지만 하나하나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것을 능히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극미에 대한 근의 이치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색 등에 대해 극미라는 명칭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색 등이 괴멸할 때 극미도 역시 괴멸해야 하는 것이다.70)
극미는 실체에 포섭되고 색은 속성에 포섭되어 그 자체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결정코 동시에 괴멸하지 않는다.
(승론)
이러한 [극미와 색] 두 가지가 다르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 필시 그렇지 않으니, 자세히 관찰해 보면 색 등을 떠나 별도의 지(地) 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곧 이러한 두 가지의 본질은 다른 것이 아니다.
또한 그들(승론)의 종의에서 지(地) 등은 안근과 신근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데,71) 어찌 [지 등이] 색ㆍ촉과 다른 것이겠는가?
또한 모전(毛氈, 털로 짠 양탄자)이나 붉은 꽃 등이 불에 타면 그것에 대한 지각이 없어진다.
따라서 모전 등의 지각은 다만 색 등의 차별을 연으로 하여 일어난 것일 뿐이다.72)
또한 비유컨대 항오(行伍, 대열)[가 형태에 따라 인식되는 것]처럼 숙변(熟變)이 생길 때 형태나 양이 동등하기 때문에 항아리나 분(盆)으로 인식되는 것이니, 만약 형태를 보지 않으면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73)
그러니 누가 어리석은 이들의 미친 소리[狂言]를 채록(採錄)할 것인가?
따라서 그들의 종의에 대해 널리 쟁론하는 것을 여기서 마땅히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74)
[3재의 꼭대기]
이러한 3재의 꼭대기는 어디에 위치하는 것인가?
화재는 제2정려를 꼭대기로 삼으니, 이 밑으로는 불에 태워지기 때문이다.
수재는 제3정려를 꼭대기로 삼으니, 이 밑으로는 물에 잠겨버리기 때문이다.
풍재는 제4정려를 꼭대기로 삼으니, 이 밑으로는 바람에 날려 흩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재앙의 상지(上地)를 여기서 ‘꼭대기’라고 일컬은 것이다.
[정려와 재앙]
어떠한 이유에서 아래 세 정려는 화ㆍ수ㆍ풍의 재앙을 만나게 되는 것인가?
초정려와 제2ㆍ제3 정려 중의 내적 재앙[內災:즉 상속신 중의 재앙]이 그러한 재앙과 동등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초정려는 심(尋)과 사(伺)를 내적인 재앙으로 삼으니, 그것은 능히 마음을 태워 어지럽힌다는 점에서 외적 재앙인 화재와 동등하기 때문이다.
제2정려는 희수(喜受)를 내적인 재앙으로 삼으니, 경안(輕安)과 함께 몸을 침윤시킨다는 점이 수재와 같기 때문이다.
즉 온몸이 둔하고 무거운 것[麤重:욕계 苦受의 不調柔性]은 모두 이로 인해 제거되기 때문으로, 경에서도 설하기를,
“고근(苦根)은 제2정려에서 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제3정려는 동식(動息:들이쉬고 내쉬는 두 가지 숨)을 내적인 재앙으로 삼는데, 숨 역시 바람이기 때문에 외적 재앙인 풍재와 동등하다.
따라서 만약 이러한 정려에 들어갈 때이면 이와 같은 내적인 재앙을 갖게 되고, 이러한 정려 중에 태어날 때이면 바로 이러한 외적인 재앙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지(地)를 설정하여 역시 재앙이라 하지 않는 것인가?
기세간이 바로 ‘지’이기 때문이다.
즉 ‘화’ 등은 ‘지’와 상위(相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를 다시 ‘지’와 상위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4정려는 무엇을 외적인 재앙으로 삼는 것인가?
거기에는 외적인 재앙이 존재하지 않으니, 내적인 재앙을 떠났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로 인해 부처님은 그러한 정려를 설하여 ‘부동(不動)’이라고 이름하였으니, 내ㆍ외의 3재가 미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그 같은 정려지에는 정거천(淨居天)이 존재하기 때문으로, 그들은 온갖 재앙에 의해 괴멸되지 않는다.
즉 그들은 무색천에 태어날 수도 없고 또한 마땅히 다시는 다른 처소(즉 下地)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다.75)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한 정려지의 기세간은 마땅히 영원한 것[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는 않으니, 유정과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 같은 제4정려의 천처(天處)는 모두 땅의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뭇 별들의 거처에 각기 차별이 있는 것과 같을 뿐으로,
유정들이 거기서 태어날 때와 죽을 때 그들이 머무는 천궁도 따라 일어나고 따라 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기세간 자체도 역시 영원하지 않은 것이다.
[3재의 순서]
앞에서 설한 3재는 어떠한 순서로 일어나는 것인가?
요컨대 먼저 일곱 번의 화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그 다음으로 마땅히 한번의 수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 후 다시 끊임없이 일곱 번의 화재가 일어나니, 일곱 번의 화재를 거치고서 다시 한 번의 수재가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식으로 하여 일곱 번의 수재를 거치고 나서, 다시 일곱 번의 화재가 있은 후에 비로소 풍재가 일어나게 된다.
이처럼 모두 쉰 여섯 번(여덟 번에 걸친 일곱 차례)의 화재와 일곱 번의 수재와 한 번의 풍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그와 같이 [일곱 차례의 화재가 있은 후에 비로소 한차례의 수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인가?
그들 유정들이 닦는 선정의 원인이 상지에서는 뛰어나기 때문으로, 초래되는 신체의 수명도 그 길이가 점차 길어지며, 이로 말미암아 그들이 머무는 처소도 역시 점차로 오래 지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시설족론』에서 언급한 “변정천의 수명은 64[대]겁이다”는 말도 잘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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