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12칙 동산화상의 삼 세근(麻三斤)
“세근 짜리 삼베가사 입은 그대가 부처라네”
{벽암록} 제12칙에는 유명한 동산수초(洞山守初: 910~990) 화상의 삼베 세근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동산수초화상에게 질문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동산 화상이 말했다.
“삼 세근(麻三斤)이다.”
‘삼세근’은 가사걸친 수행자 상징
부처를 다른 데서 찾지 말라는 뜻
동산은 두 사람이 유명한데, 당대 조동종의 개창자인 동산양개 화상과 동산수초(洞山守初(910~990) 화상이 있다. 여기는 운문문언의 제자인 동산수초 선사이다.
이 공안은 {무문관} 18칙에도 제시하고 있는데, {전등록}23권 명교대사전과 {오등회원}15권 동산전 등에 수록하고 있다.
동산 화상이 처음 운문 화상을 참문하고 깨달음을 체득한 이야기는 ‘평창’에 자세히 싣고 있으며 {무문관}15칙에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동산 화상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스님이 질문한 부처는 어떤 부처를 말하고 있는가?
부처의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삼신(三身) 가운데 어떤 부처인가?
화신인 석가불인가? 보신인 아미타불인가? 법신인 비로자나불인가?
도대체 부처란 무엇인가?
이 문제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면 부처를 체득할 수가 없다.
여기서 질문하는 스님은 부처란 고귀하고 위대하고 존엄한 청정하신 부처의 이미지를 가지고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부처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동산은 곧장 “삼 세근(麻三斤)”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무문관〉21칙에 어떤 스님이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질문하니,
운문은 “똥 젓는 막대(乾屎)”라고 대답한바 있다.
{벽암록} 제7칙에는 혜초가 법안 선사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에,
법안은 “그대는 바로 혜초이다.”라는 선문답과 똑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동산 화상이 대답한 ‘삼 세근(麻三斤)’은 어떤 것인가?
먼저 이 말의 의미부터 이해해야 한다.
[통전(通典)] 제6권에 의하면 당나라에는 세근(三斤)의 마사(麻絲)가 하나의 단위로서 한 뭉치 마사(麻絲)의 무게가 세 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삼 세근의 실은 가사 한 벌(승복)을 만들 수 있는 재료이다.
당시에는 삼베(麻布)로 가사나 승복을 만들었다.
동산의 스승인 운문문언의 〈비문〉에도 “兩斤麻 一段布” 혹은 “三斤麻 一匹布”라는 문답이 있다.
{전등록} 10권 ‘조주’장에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조주 선사가 말했다.
“노승이 청주에 있을 때 한 벌의 승복을 만들었는데 마포의 무게가 7근이나 되었지.”라고 전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공안은 꽤 많은 사람들이 잘 못 알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씹기 어려워 입에 갖다 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담박하여 맛이 없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부처에 대한 질문에 많은 대답을 하였다.
어떤 사람은 ‘대웅전 안에 계신 분’이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32상(三十二相)을 갖춘 분’ 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장림산 밑에 있는 지팡이’라고 했다.
그러나 동산스님은 ‘삼 세근(麻三斤)’ 이라고 했으니 참으로 옛 사람의 혀를 꼼짝 달싹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말 저런 말을 둘러대어,
‘동산스님이 그 때 창고에서 마포(麻)를 저울질하고 있었는데,
어떤 스님이 부처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기 때문에,
‘삼세근(麻三斤)이라고 대답한 것이다’라고 하고,
또는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하였다’ 고 한다.
또는 ‘그대가 부처인데 다시 부처를 물었기 때문에 동산스님은 우회해서 대답한 것이다’ 라고도 말하고 있다.
더욱이 안목 없는 녀석들은 한결같이 ‘삼세근(麻三斤)이 바로 부처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전혀 맞지 않는 소리다.
너희들은 만약 이처럼 동산스님의 말을 더듬거렸다가는 미륵부처가 하생(下生)할 때까지 참구해도 불법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즉 “부처란 무엇인가?”라는 스님의 질문에 동산 화상이 “마 세근”이라고 대답한 것은
“세근(三斤)의 마사(麻絲)로 만든 가사(승복)를 걸친 스님이 바로 부처이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질문하고 있는 그대가 바로 부처일세!’라는 의미이다.
법안 화상이 “그대가 바로 혜초일세!”라고 대답한 것처럼, ‘혜초 그대가 바로 부처다’라고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부처를 밖에서 찾아도 찾을 수가 없고 얻을 수도 없다.
또한 부처란 어떤 형체가 있는 존재도 아니다.
결국 부처란 자기 자신이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선에서 말하는 부처는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지금 여기서 자신의 일에 번뇌 망념이 없는 불성의 지혜작용을 전개하는 자기의 본래면목을 말한다.
본래 면목이란 자기의 참된 모습과 지혜의 안목을 구족한 자기 자신이 지금 여기서 지혜로운 삶을 전개하는 것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삼신(三身)은 지금 여기서 불성의 지혜로운 삶으로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다.
보살의 원력과 서원을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통해서 실현하는 것이 보신이요,
시절인연에 맞추어 다양하게 변화한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화신이고,
자신의 원력과 지금 여기서 시절인연의 일을 지혜롭게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불성의 지혜작용이 법신인 것이다.
{금강경}에서 “모든 모양을 모양이 아닌 것으로 파악해서 볼 수 있는 반야의 지혜를 구족한다면 곧바로 여래를 친견할 수 있다(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라고 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여래도 외부에 존재하는 여래가 아니라 각자 자기 자신의 깨달음의 당체인 법신 여래를 말한다.
{금강경}에서 음성으로나 모양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설하고 있는 말씀도 잘 사유하고 음미해야 한다.
설두 화상의 게송을 통해서 설두의 견해를 살펴보자.
처음 “해(金烏)는 급하고, 달(玉兎)은 빠르다. 멋지게 근기에 응수 했으니 어찌 경솔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은,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스님의 질문에,
동산은 신속하고도 적절하게 “삼 세근”이라고 대답한 것을 읊은 것이다.
해와 달이 급히 지나가는 것처럼, 스님의 질문에 시간을 맞추고 학인의 근기에 대응하여 적절하게 잘 대답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삼 세근(麻三斤)이라는 말로서 학인을 상대했다고 동산의 안목(견해)을 파악하려 한다면, 절름발이 자라와 눈먼 거북이 빈 골짜기로 들어가는 꼴이다.”는 말은,
부처나 삼 세근(麻三斤)이라는 말로 대답했다고 부처나 삼 세근(麻三斤)이라는 말에 집착한다면 동산 화상의 진면목을 볼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또 “꽃도 수북수북, 비단도 수북수북, 남쪽에는 대나무, 북쪽에는 나무.”라고 읊은 말은 고사가 있지만 생략하고,
‘봄이면 살쾡이가 천지에 만발하고, 가을이면 온 산에 비단의 단풍이 가득하며, 남쪽지방에는 대나무가 많고, 북쪽 지방에는 나무가 많은 산의 모습이 그대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세계가 아닌가?’라는 의미로 읊고 있다.
마지막에 “그래서 장경 화상과 육긍 대부를 생각하니 웃어야지, 통곡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줄 알았네. 아이쿠()!”라고 읊고 있다.
이 역시 고사 있는 말인데, 생략하자.
말하자면 설두는 동산이 “삼 세근”이라고 대답한 것은 세간의 인정(人情)과 분별적인 상식으로는 깨달을 수가 없으니, 수행자들은 이 공안을 잘 사유하여 참구해야 한다는 주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