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당집 제3권[3]
[굴다 삼장 법사] 崛多
6조의 법을 이었고, 천축 사람이다. 대원大原의 정양현定襄縣 역촌曆村에 이르러 신수神秀 대사의 제자가 초막을 지어 홀로 앉아서 마음을 관하는 것을 보고 물었다.
“무엇을 하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고요함을 지켜봅니다.”
“지켜보는 이는 누구이며, 고요함이란 무엇인가?”
스님이 얼른 일어나 절을 하고 물었다.
“그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스님께서 지시해 주소서.”
삼장이 말했다.
“왜 스스로를 보지 않고, 스스로 고요하지 않는가?”
스님이 대답이 없었다.
삼장은 그의 근성이 매우 둔한 것을 보고 물었다.
“그대의 스승은 누구인가?”
“신수神秀 화상이십니다.”
“그대의 스승은 이 법만을 가르치던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던가?”
“저더러 그저 고요함만을 지켜보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서천西天의 하열한 외도들이 익히는 법이다. 이 땅은 선종인 줄로 알았는데, 역시 사람들을 대단히 그르치고 있구나.”
스님이 물었다.
“스님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6조이시니라.”
이어 다시 말했다.
“바른 법은 듣기 어려운 것인데 그대는 어째서 거기로 가지 않는가?”
그 스님이 삼장의 충고를 받자 바로 조계로 가서 6조를 뵙고, 위의 일을 자세히 말하니, 6조가 말했다.
“굴다의 말이 옳다. 그대는 어찌하여 스스로를 보지 않고, 스스로 고요해지려고 하지 않고, 누구더러 그대를 고요하게 하라 하는가?”
그 스님이 이 말씀에 크게 깨달았다.
[지책 화상] 智策
6조의 법을 이었고, 무주務州에서 살았다.
6조의 법을 이어받은 뒤에세상 밖에 소요하면서 대수롭지 않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으나, 교화한 인연의 처음과 끝의 사연은 자세하지 않다.
선사가 북쪽 지방을 지나다가 5조祖 밑의 지황智皇 선사라는 이가 20년 동안 선정을 닦고 있음을 보고 물었다.
“여기에서 무엇을 하는가?”
지황이 대답했다.
“선정에 듭니다.”
“선정에 드는 이는 마음이 있는 상태에서 선정에 들었는가,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선정에 들었는가? 만일 마음이 있는 상태에서 선정에 들었다면 온갖 유정 모두에게 마음이 있으니 역시 선정에 들 것이고, 만일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선정에 들었다면 온갖 무정물들도 역시 선정을 얻었어야 하리라.”
지황智皇이 대답했다.
“내가 선정에 들 때에는 있다 없다 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만일 있다 없다 하는 마음을 보지 않는다면 이는 항상한 정定이니, 더는 들고 나는 일이 없어야 하리라.”
지황이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는 도리어 선사에게 물었다.
“스님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6조이시니라.”
“6조께서는 어떤 법을 선정이라 가르치십니까?”
“묘하고 밝고 둥글고 고요하여 본체와 작용이 여여하고 5음이 본래 공하며 6진塵이 있는 것 아니니, 들지도 않고 나지도 않으며, 안정도 아니요 어지러움도 아니다. 선의 성품은 머묾이 없으니 머묾을 여읜 이를 선가禪家라 하고, 선의 성품은 생이 없으니 생을 여의어야 선의 모습이다. 마음은 허공과 같으나 허공이라는 자취도 없다.”
지황이 이 말을 듣고도 의문이 멈추지 않아 벌떡 일어나 석장을 끌고 곧장 남쪽으로 가서 조계를 뵙고 절을 하니, 6조도 이와 같이 말하매, 지황이 이 말씀에 크게 깨달았다.
그날 밤 용신이, 본래 살던 암자의 단월檀越의 꿈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지황智皇 선사께서 오늘 밤 도를 이루셨습니다” 하였다.
[사공산 본정 화상] 司空山 本淨
6조의 법을 이었다. 성은 장張씨이며, 강주絳州 사람이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기특한 일은 어떠합니까?”
선사가 말했다.
“한 생각조차 마음에 기쁨이 없느니라.”
스님이 말했다.
“어찌 기쁨이 없을 수 있습니까?”
선사가 말했다.
“기쁨은 누구의 몫인가?”
천보天寶 3년에 왕이 명하여 중사中使 양광정楊光庭으로 하여금 사공산司空山에 가서 항춘등恒春藤을 캐어 오게 하였는데,
그가 절에 이르러 선사원禪師院에 가서 말을 나누던 차에 선사에게 물었다.
“제자는 생사의 일이 크옵기에 일심으로 도를 사모하오니, 원컨대 화상께서는 자비로써 구제하시어 제도하여 주소서.”
선사가 말했다.
“대부大夫는 경성에서 왔으니 제왕의 땅이라, 선을 하는 이[禪伯]가 심히 많으리니, 그곳에 가서 물어보라. 나는 늙고 병들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노라.”
중사가 예를 올리고 거듭 청하니, 선사가 말했다.
“부처 구하기를 위함인가, 아니면 도를 묻고자 하는가? 만약 부처가 되기를 구한다면 마음이 부처이며, 만약 도를 묻고자 한다면 무심無心이 바로 도이니라.”
중사가 말뜻을 알지 못하여 말해 줄 것을 거듭 청하니, 선사가 또 말했다.
“만약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부처는 마음을 인하여 있음이니, 만약 무심無心임을 깨달을 것 같으면 부처 또한 있을 리가 없으며, 만약 도를 알려고 한다면 무심이 바로 도이니라.”
중사가 말했다.
“서울의 대덕들은 모두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고행苦行 등으로 부처를 구하게 하는데, 이제 화상께서는 무루無漏의 지혜 성품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본디 청정하여수행을 빌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니, 그런고로 전에는 헛되이 공만 허비했음을 알겠습니다.”
중사가 서울에 돌아가 왕에게 항춘등을 바쳐 올리고 나서 선사와 있었던 위와 같은 일들을 낱낱이 아뢰니, 왕이 듣고 나서 명을 내려 중사로 하여금 다시 가서 조칙을 전하고 선사를 모셔 오게 하였다.
천보天寶 3년 12월 17일에 선사가 서울에 이르러 수인사를 마치니, 왕이 백련화정자白蓮花亭子에 있게 하였다.
정월 15일에 조칙이 있어 서울 안 대사와 대덕들로 하여금 선사와 더불어 도를 논論하도록 하였다.
선사가 말했다.
“산승은 오랫동안 병들어 있어 담론할 여가가 없으므로 번거로운 말을 빌릴 것 없이 요점만 말하여 질문에 대답만 하겠습니다.”
태평사泰平寺의 원遠 선사가 물었다.
“성인 앞에서 번거로운 말을 감히 못하겠습니다.
무엇을 도라 하겠습니까?”
선사가 말했다.
“도란 본래 이름이 없는 것이나 마음을 인하여 도라고 이름하는데, 만약 마음이 있다 한다면 도를 끝까지 궁구한 것이 못 되고, 또 마음이 만약 없다고 한다면 도가 무엇을 의지하여 있겠습니까?
둘 다 허망한 것이어서 모두 거짓 이름일 뿐입니다.”
“현재 있는 몸과 마음이 도가 아니겠습니까?”
“소승의 몸과 마음은 본래 도입니다.”
“아까는 무심無心이 바로 도라 하고, 지금은 몸과 마음이 본래 도라고 하니,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무심無心이 바로 도道이니, 마음이 없어지면 도道도 없어집니다. 마음과 도道는 하나이므로 무심이 바로 도道라 하였습니다. 몸과 마음이 바로 도道라는 것은 도道 또한 본래 이 몸과 마음인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원래 공허하니, 도道 또한 근원이 없습니다.”
원공遠公이 말했다.
“아둔하고 모자란 산승도 이러한 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대덕께서는 다만 산승의 상相만 보고 무상無相은 보지 못하니, 상으로 보는 것은 대덕의 소견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르되 ‘무릇 있는 상은 다 허망한 것이다.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닌 줄로 보면 곧 그 도를 깨달으리라.’ 했으니, 만약 상을 실實로 삼는다면 겁이 다하여도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다시 물었다.
“지금 산승의 상相만 보고 산승의 무상無相은 보지 못한다 하오니, 청하옵건대 상相 중에서 무상無相의 이치를 말씀하여 주옵소서.”
“정명淨名이 말하되,
‘4대大는 주인이 없고 몸 또한 나라 할 것이 없다’고 했으니,
이는 무아소견無我所見이 도道와 더불어 상응相應함입니다.
대덕이시여, 만약 4대大에게 주인이 있다면 그 주인이 곧 나일 것이고,
만약 나라는 견해가 있다면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겁 중에도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날 성상은 크게 기뻐하였고, 조정의 선비들도 모두 기뻐하였다.
선사가 이에 사대무주게四大無主偈를 읊었다.
4대大 무심하기가 저 물과 같아서
굽어진 곳에 이르든 곧은 곳에 이르든 이것이다 저것이다 함 이 없다.
깨끗하고 더러운 두 곳에 마음 내지 않으니
막히고 뚫림에 언제 두 뜻이 있은 적이 있으리오.
경계에 닿으매 다만 물같이 무심하면
세상에서 종횡縱橫한들 무슨 일이 있으리오.
또 향산의 스님 혜명慧明이 물었다.
“무심이 바로 도라고 한다면 자갈돌도 무심하니 이 또한 도라고 해야 마땅하며, 몸과 마음이 바로 도라고 한다면 사생육류四生六類가 다 몸과 마음이 있으니 모두 도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이에 관해 견해가 있으시거든 성상 앞에서 말씀해 주십시오.”
선사가 말했다.
“대덕이시여, 만약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 따위를 짓는 사람이라면 도를 구하는 사람이 아니니,도와는 전혀 상응相應하지 못할 것입니다.
경에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이 없다’ 했으니, 눈과 귀조차 없거늘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무엇을 의지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근본을 추궁하여도 있지 않거늘 어느 곳에 마음이 있으리오. 만약 무심을 안다 할 것 같으면 초목草木과 다를 것입니다.”
혜명慧明이 대답이 없었다.
선사가 이어서 견문각지게見聞覺知偈를 읊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 걸릴 데 없고
소리, 냄새, 맛, 닿음 늘 삼매라네.
새가 공중에서 다만 힘써 나는 것과 같이
가질 것도 버릴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사랑할 것도 없어라.
만약 처소에 따라 본래 무심함을 알면,
바야흐로 관자재觀自在라 이름할 수 있으리라.
또 백마사白馬寺의 혜진惠眞이 물었다.
“선사께서 무심이 바로 도라고 말씀하셨지요?”
선사가 대답했다.
“그러합니다.”
“도가 무심이라면 부처는 유심입니까?
부처는 도와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심은 유심인 까닭이요, 도가 사람을 제도하지 못함은 무심인 까닭입니다. 하나는 제도하고 하나는 제도하지 못하니, 둘입니까, 둘이 아닙니까?”
“이는 대덕께서 망령되이 둘이란 견해를 내는 것입니다. 산승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째서인가? 부처란 헛된 이름뿐이요, 도라는 것 또한 망령되이 세움이라, 둘 다 진실하지 않은, 도무지 거짓 이름뿐이거늘 한결같은 거짓 가운데에 어찌 둘을 세우십니까?”
다시 물었다.
“부처와 도가 비록 거짓 이름이라고 하나 이름을 세웠을 때에는 누가 세웠으며,
만약 세운 자가 있다면 어찌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와 도는 마음으로 인하여 세워졌으나 마음의 근원을 추궁해 보면 마음 또한 없습니다.
둘이 다 허망한 것이 마치 허공꽃과 같아서 본래 비어 있는 곳에 억지로 부처와 도를 세웠음을 알게 됩니다.”
이에 혜진이 찬탄하여 말했다.
“사법事法에 있어서는 다하지 못함이 없고, 이법理法에 있어서는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는 진문眞門을 문득 보아서 마음이 바로 부처라 함이니, 가히 후세 중생에게 모범이 되어 줌이라.”
그러자 선사가 무수게無修偈를 읊었다.
도를 보아야 도를 닦을 수 있는 것
도를 보지 못하고 어찌 닦으리.
도의 성품은 저 허공과 같거늘
허공 어느 곳을 닦는다 하겠는가?
도 닦는 사람들을 두루 보니
불을 쑤셔서 뜬 거품을 찾는도다.
다만 꼭두각시 놀리는 것을 보라.
줄이 끊어지면 한꺼번에 쉬는도다.
법공法空 선사가 물었다.
“부처와 도가 다 거짓 이름을 허망하게 세운 것이라면 12부部의 경도 또한 실답지 않아야 마땅하며, 예부터 존숙尊宿들께서 대대로 이어오면서 다 말하기를 도를 닦는다 하는데, 그런 것들이 다 망령된 것이지 않겠습니까?”
선사가 말했다.
“그러나 12부의 교敎가 다 도에 부합符合합니다. 선사께서 잘못 알아 도를 등지고 교를 따라갑니다. 도란 본래 닦을 것 없는데 선사께서 억지로 닦으며, 도란 본래 지음이 없는데 선사께서 억지로 지으며, 도란 일이 없는데 억지로 많은 일을 내며, 도란 본래 함이 없거늘 그 가운데서 억지로 하며, 도란 본래 앎이 아니거늘 그 가운데서 억지로 알려 하나니, 이와 같은 견해는 본래 알지 못해 그런 것이니, 모름지기 스스로 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선사가 배도축교게背道逐敎偈를 읊었다.
도의 체는 본래 닦음 없으니
닦지 않아도 절로 도에 부합하도다.
만약 도 닦을 마음을 일으키면
이 사람은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의 참 성품을 버려 버리고
도리어 끝없이 시끄러움 속에 들어서
홀연히 도 닦는 사람 만나면
절대 도를 향하지 말라.
또 복선사福先寺의안安 선사가 물었다.
“도가 거짓 이름이라 한다면 부처님 또한 망령되이 12부의 교로 중생을 제접하는 방편을 세우신 것입니다.
일체가 모두 망忘이라 한다면 무엇을 참이라 하겠습니까?”
선사가 말했다.
“망이 있는 까닭으로 참으로 망에 상대하게 되는데, 망의 성품을 추궁하여 보면 본래 공적한 것입니다.
참 또한 그러할진대 어찌 실체가 더 있다 하겠습니까?
따라서 진과 망이 모두 거짓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문득 깨달았다.
또 물었다.
“일체가 다 망이라 한다면 망 또한 진과 같을 것이니, 진과 망이 다름이 없다면 다시 무엇이겠습니까?”
선사가 말했다.
“만약에 무엇인지를 말한다면 이 또한 망입니다. 도는 비슷한 것 없고, 도는 견줄 것 없으며, 도와 비유할 것도 없고, 도는 대치對治할 것도 없으니, 도라고 함은 말로써 이치를 설명한 것이므로, 이치를 얻어서 말을 잊으면 말의 성품이 비어 있는 줄 알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도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경에서 말하기를,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쓸 곳도 멸한 것’이라 했습니다.”
선사가 진망게眞妄偈를 읊었다.
진을 궁구해 보니 진은 모양 없고
망을 궁구해 보아도 망 또한 모양이 없네.
돌이켜 미루어서 마음을 궁구해 보니
그 마음 또한 거짓 이름인 줄을 알겠네.
도 알기를 이와 같이 알기만 하면
마침내 그저 조용하리라.
조성사照成寺의 달성達性 선사가 찬탄하고 물었다.
“그 이치가 심히 미묘하여 진과 망을 쌍으로 민멸泯滅시켜 부처와 도道 둘 다를 없앱니다. 수행하는 성품이 비어 있고 이름과 모양이 실답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이해하는 때에는 저 중생들의 선악 두 뿌리[二根]를 끊을 수 없는 것을 보리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선사가 말했다.
“선악의 두 뿌리는 마음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라, 마음을 궁구하여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근根 또한 없지 않으리니, 미루어 생각해 보건대 마음이 비어 있다면 근은 무엇을 인하여 서겠습니까?
경에서 말하기를,
‘선과 불선不善은 마음을 따라 변하여 난다’ 했으니,
선업과 악업의 연緣이란 본래 실다움이 없는 것입니다. 비록 실답지 않으나 불공심不共心과는 함께합니다.”
선사가 선악이근불실게善惡二根不實偈를 읊었다.
선이 마음을 따라서 생긴 것이라면
악인들 어찌 마음을 떠나서 있다 하리오.
선악이라는 것은 밖의 연緣이라
마음에는 실로 있지 않네.
악을 버려 어디로 보내며
선을 가진다면 누구로 하여금 지키게 하리오.
슬프다, 선과 악을 보는 이여,
연緣에 끌려 양쪽으로 달음질치누나.
홀연히 무생의 근본을 깨달으면
비로소 전부터의 허물을 알게 되리라.
또 선비인 손체허孫體虛가 물었다.
“이 몸은 어디서 나왔으며, 죽은 뒤에는 다시 어느 곳으로 돌아갑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잠이 들어 홀연히 꿈을 꾸는데, 꿈은 어디서 나왔으며 잠을 깬 뒤에 어디로 갑니까?”
“꿈꿀 때는 없다고 말할 수 없으나 홀연히 깨어난 뒤에는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록 왕래함이 있으나 왕래한 곳이 없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빈도貧道의 몸 또한 그 꿈의 체가 허한 것과 같아서, 이 몸이 실로 꿈과 같은 줄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선사가 내왕여몽게來往如夢偈를 읊었다.
마치 꿈속에 있는 것과 같음을 역시 아나니
잠 속은 실로 시끄러운데
홀연히 깨달아 만사를 쉼이
잠자다가 깨어난 것과 같음이다.
지혜 있는 자는 꿈임을 깨달아 알지만
미혹한 사람은 꿈속의 시끄러움을 믿네.
꿈인 줄 알면 둘로 나뉨이 없고
한번 깨달으면 따로 깨달을 일 없도다.
부귀와 빈천,
다시 또 다른 이치가 아니로다.
선사가 상원上元 3년 5월 5일에 입적하였으니, 춘추가 95세였다. 왕이 시호를 내려 대효大曉 선사라 하였다.
[일숙각 화상] 一宿覺
6조의 법을 이었고, 온주溫州에서 살았다. 선사의 휘諱는 현각玄覺이요, 자는 도명道明이며, 속성은 대戴씨이며, 온주溫州의 영가현永嘉縣 사람이다. 내외의 경전을 널리 통달하고, 밭 갈지 않고 먹으며 누에를 치지 않고 입으니, 그의 평생의 공업功業은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일찍이 온주의 개원사開元寺에 있으면서 편모에게 효순하고, 더하여 누이까지 있어 두 사람을 시봉하니, 온 절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방하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별세하여 상복을 입고서도 누이를 버리지 못하니, 더욱 사람들의 비방을 받았으나 그는 전혀 그러한 눈치를 채지 못했다.
어느 날 복도에 신책神策이라는 선사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나이는 60여 세였다. 이들 오누이가 발[簾] 밖으로 그 노숙老宿을 보자 누이가 말했다.
“저 노숙을 방으로 청해서 차를 대접하면 좋겠다.”
동생이 얼른 나가서 노숙老宿을 청했더니, 노숙은 들어오지 않으려다가 그 스님의 간절한 청에 못 이겨 허락하였다.
노숙이 방으로 들어오자, 여인이 나와 맞으면서 말했다.
“제 동생이 노스님을 모시는 예의가 경솔한 것 같으나 허물하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노숙과 함께 자리를 마주하여 앉고, 동생도 앉으라 하여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노숙은 그 스님의 기상이 다른 사람들과 다름을 느끼고, 또 그 누이도 대장부의 기개가 있음을 느껴 그 스님에게 권했다.
“부모와 형제에 효순하는 일도 한 가지 길이며, 불법의 이치를 밝히기는 했으나 스승의 인가를 얻지 못했구나. 과거의 부처님들도 성인과 성인이 서로 전하시고 부처와 부처가 서로 인가하였으니, 석가여래께서도 연등불의 수기授記를 받으셨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연히 퇴전한다. 남방에 큰 스승이 있으시니, 혜능慧能 선사이시다. 그리로 가서 예배하고 스승으로 섬겨라.”
스님(영가)이 대답했다.
“엊그제 어머니께서 별세하시고 홀로 있는 누이 하나뿐이어서 아무도 보살필 이가 없거늘 어찌 버리고 떠나겠습니까?”
이때 누이가 아우에게 말했다.
“동생, 내 걱정은 말고 혼자 떠나시오. 나는 혼자 몸이지만 의지해 머무를 곳이 있을 터이니, 그저 떠나기만 하소.”
동생 스님이 이로부터 짐을 꾸려 놓고, 주지에게 가서 앞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니, 주지가 말했다.
“사형에게 그러한 선심이 있으시면 나도 몸소 가지는 못하지만 좋은 인연만은 함께 지읍시다. 사형은 마음 놓고 떠나기만 하시고 누님은 걱정을 마시오. 나도 성격이 효순합니다. 그저 여기까지 불러다 주기나 하시오.”
그 스님이 주지의 분부대로 낱낱이 처리하고, 누이를 불러 주지의 방으로 데려다 주어 안배를 마치고는 떠났다.
그때 그 스님의 나이는 31세였다. 걷고 걸어 시흥현始興縣 조계산曹溪山에 이르니, 때마침 대사가 상당上堂하여 있었다.
석장을 들고 올라가 선상을 세 번 돌고는 우뚝 서 있으니,
6조가 물었다.
“무릇 사문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추어서 행과 행이 이지러짐이 없어야 사문이라 하는데, 대덕은 어디서 왔기에 도도히 아만我慢을 부리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나고 죽음의 일이 크고, 무상함이 너무나 빠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남[生]이 없음을 체득해 본디 빠르지 않은 도리를 터득하지 않는가?”
“체득에는 본래 남이 없고, 터득함에는 빠름이 없습니다.”
“그대는 남이 없는 뜻을 매우 잘 알고 있도다.”
“남이 없음에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
“뜻이 없다면 누가 분별할 수 있겠는가?”
“분별하는 것, 역시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 옳은 말이다.”
이때 천여 명의 대중이 모두 깜짝 놀랐다. 선사(영가)는 다시 동랑東廊으로 가서 석장을 걸어 놓고 위의를 갖추어 상당하여 정중히 절하고 잠자코 눈을 들어 두 눈이 마주치게 하고는 바로 나가, 곧장 승당僧堂으로 가서 대중을 찾아뵙고는 다시 올라와서 조사께 하직을 고하니,
조사가 말했다.
“대덕은 어디서 왔기에 서둘러 돌아가는가?”
선사가 대답했다.
“본래 움직이지 않았거늘, 어찌 빠름이 있겠습니까?”
“움직임이 아닌 줄을 누가 아느냐?”
“스님 스스로가 분별을 냅니다.”
조사가 한 번에 뛰어내려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장하다, 옳은 말이다. 손에 무기[武]를 들었구나. 하룻밤만 묵어가라.”
이튿날 조사에게 하직을 고하니, 조사가 대중을 거느리고 그를 전송하는데, 그가 열 걸음쯤 걸어 나와 석장을 세 차례 구르고 말했다.
“조계를 한 차례 만난 뒤로는 생사와는 전혀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노라.”선사가 본고장으로 돌아오니, 그의 소문은 먼저 와서 퍼져 있었으니, 부사의한 사람이라 하였다. 그에게 다녀간 이가 무수하며, 공양한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로부터 있었던 그의 모든 노래와 게송은 모두가 그의 누이가 수집한 것이었다.
선사는 선천先天 2년 10월 17일에 입적하였으니, 춘추는 39세였다. 시호는 무상無相 대사라 하사되었고, 탑호塔號는 정광淨光이라 하였다.
[회양 화상] 懷讓
6조의 법을 이었고, 남악에서 살았다. 속성은 두杜씨이며, 금주金州 사람이다. 처음 태어날 때, 여섯 가닥의 흰 서기가 하늘로 뻗치더니, 의봉儀鳳 2년 4월 초파일에 탄생하였다.
이러한 상서祥瑞를 본 자사刺使 섬견贍見이 왕에게 고하니,
고종高宗 황제가 물었다.
“이 서기瑞氣는 어떤 상서로움인가?”
태사가 대답했다.
“나라의 법보가 속세에 있지 않고, 귀한 사람이 안강安康의 금주金州 지방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금주 태수 한해韓偕가 자세히 기록해서 보고하니, 황제가 분부하였다.
“승가의 상서이니, 더욱 경사로운 일이다.”
한해에게 칙령을 내려 직접 가서 양육하는 것을 살펴보고 후하게 상을 내려 위로하게 하였다.
이때 성은 두杜씨요 이름은 광기光奇라는 이의 집안에 세 아들이 있었는데, 세 아들 중 이 상서祥瑞에 응해 태어난 아들이 다섯 살이 되자, 생김새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고 마음에는 은혜와 겸양을 갖추어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으므로 그의 부모는 그를 양讓이라 이름 지었다.
그가 10세가 되기까지 오직 불경佛經만을 좋아하였는데, 때마침 지나가던 삼장 현정玄靜이 설법을 하고, 이어 그 부모에게 일렀다.
“이 아이는 출가하여 최상승의 법을 얻어 지극히 미묘한 경지에 이를 것이며, 불법의 이치를 터득할 것입니다.”
수공垂拱 4년에 15세가 되자, 문득 부모를 하직하고 형주荊州의 옥천사玉泉寺로 가서 홍경弘景 율사를 섬기어 8년이 지나자, 회양懷讓이라 이름하였다. 지통至通 원년 4월 12일에 그 절에서 구족계를 받고,구시久視 원년 7월 18일에 이르러 스스로 탄식했다.
“내가 지금 계를 받은 지 다섯 해를 지나는 동안 위의를 널리 배워 겉모양은 점잖게 되었지만, 진리는 배우려 해도 깨달을 길이 없구나.”
또 말했다.
“출가라는 것은 무위법을 위해서이니, 천상과 인세에 이보다 나은 일이 없으리라.”
이때 탄연坦然이라는 선사가 있다가 선사가 한탄하는 것을 보고, 함께 행각行脚을 떠나 여러 선지식을 찾아뵙자고 하여 숭산嵩山 안安 화상에게로 갔다.
탄연은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물어 깨닫고 이어 안 화상을 섬기었으나, 선사는 바로 조계로 가서 6조에게 의지했다.
6조가 물었다.
“그대는 지금 어디에서 오는 길인가?”
선사가 대답했다.
“숭산嵩山에서 일부러 화상께 예배하러 왔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한 물건이라고 말해도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6조의 곁에서 12년 동안을 모시고 경운景雲 2년에 조사에게 절하고 하직을 고하니,
조사가 물었다.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다 했는데, 그것을 닦아 증득할 수 있겠는가?”
“닦아 증득하는 것이야 없지 않으나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그 더럽힐 수 없는 것이 부처님들께서 보호하시는 바이니, 그대도 그렇고 나도 그러하니라. 서천西天의 27조 반야다라般若多羅께서 그대에 관해 예언하셨는데, 불법이 그대로부터 융성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뒤에는 망아지(마조를 가리키는 말)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이리니, 그대는 이 법을 너무 일찍 말해 주지 말라. 병폐가 그대에게 있게 되리라.”
마馬 화상이 한쪽에 앉았는데, 선사가 벽돌을 가지고 그 앞으로 가서 돌에다 갈았다.
이를 본 마 화상이 물었다.
“무엇을 하십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 하오.”
“벽돌을 갈아서 어찌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 수 없다면 좌선하여 어찌 부처를 이루리오?”
“그러면 어찌하여야 옳습니까?”
“사람이 수레를 몰고 가는 것과 같소.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때려야 되겠는가, 소를 때려야 되겠는가?”
그리고는 다시 말했다.
“그대는 좌선坐禪을 배우려는가, 좌불坐佛을 배우려는가? 만일 좌선을 배우려 한다면 선은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니요, 좌불을 배우려 한다면 부처는 일정한 모습이 아니어서 법에 머묾도 없고 취할 수도 없거늘 어찌해야 하는가? 그대가 만일 앉는 것이 부처라 한다면 부처를 죽이는 것이요, 앉는 모습에 집착한다면 해탈의 이치가 아니니라.”
마 화상이 선사의 설법을 듣자, 곧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고 물었다.
“어떻게 마음을 써야 선정의 무상삼매無相三昧에 부합되겠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그대가 심지법문心地法門을 배우는 것은 마치 종자를 뿌리는 것 같고, 내가 법요法要를 말해 주는 것은 단비와 같다. 그대는 인연이 계합하는 까닭에 도를 보게 될 것이니라.”
또 물었다.
“화상께서 도를 본다 하시는데, 어떤 도를 봅니까?
도는 색色이 아니거늘 어떻게 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심지를 보는 법안法眼으로 도를 볼 수 있나니, 무상삼매도 역시 그러하니라.”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있겠습니까?”
“만일 도에 계합하면 시작도 끝도 없고, 이룸도 무너짐도 없으며, 모아짐도 흩어짐도 없고, 길지도 짧지도 않으며, 고요하지도 않고 어지럽지도 않으며,급하지도 않고 느슨하지도 않느니라. 이렇게 알면 바야흐로 도라 이름하니, 그대는 나의 가르침을 받아 나의 게송을 들어라.”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마음 땅에 여러 종자를 머금었으니
비를 만나면 모두가 싹이 튼다.
삼매의 꽃은 형상이 없거늘
어찌 무너짐과 이루어짐이 있으랴?
어떤 대덕이 물었다.
“거울로 형상을 주조하여 형상이 만들어지면 거울의 밝음은 어디로 갑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마치 대덕이 출가하기 전의 모습과 같으니, 그 모습이 어디로 갔는가?”
“형상이 이루어진 뒤에는 어찌하여 비추지 못합니까?”
“비추지는 않으나 조금도 속일 수는 없느니라.”
선사가 천보天寶 3년 8월 12일에 입적하니, 시호는 대혜大慧 선사라 하사하였고, 탑호塔號는 최승륜最勝輪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