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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비담심론 제3권
4. 업품(業品)[4], 업의 종류
[업의 종류]
이와 같은 업을 세존께서는 여러 종류로 나누어 구별하셨다.
지금 그것을 설명하겠다.
만약 업이 고과(苦果)를 준다면
이는 악행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뜻의 악행이 있으니
탐냄[貪]과 성냄[瞋]과 사견(邪見)이 그것이다.
‘만약 업이 고과(苦果)를 준다면 이는 악행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신(身)ㆍ구(口)의 업 및 생각[思]에는 사랑스럽지 못한 과보가 생하는 까닭에 이것이 악행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오직 이것만이 악행인가?
【답】‘뜻의 악행이 있으니 탐냄[貪]과 성냄[瞋] 및 사견(邪見)이 그것이다.’ 불선의 생각이 곧 뜻의 악행임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으며, [이밖에] 탐욕과 성냄과 사견도 있는 것이다.
이것과 상위하는 묘행(妙行)은
가장 뛰어난 분께서 설하신 바로
만약 그 가운데서 높이 불어나게 한다면
그것을 십업도(十業道)라 부른다.
‘이것과 상위하는 묘행(妙行)은 가장 뛰어난 분께서 설하신 바이다’고 한 것은, 악행과 상위하는 것은 모두가 묘행임을 말한 것이다.
가령 선한 신업(身業)은 모두 몸의 묘행이며, 선한 구업(口業)은 입의 묘행이다.
또한 선한 의업(意業)및 탐욕이 없고 노여워하는 마음 없고 바른 견해를 지니는 일은 모두가 뜻의 묘행이다.
은몰무기나 불은몰무기의 업은 과보가 없기 때문에 악행도 아니고 묘행도 아니다. 가령 불은몰무기의 경우 묘한 방편[巧便]이란 행할 바대로 행하고 말할 바대로 말하는 것이다. 이것과 상위하는 불은몰무기나 은몰무기는 묘함이 없는 방편이라 한다.
【문】일체의 선행과 악행이 모두 업도(業道)에 포섭되는 것인가?
【답】그 가운데서 높이 불어나게 한다면 그것을 십업도라고 한다.
즉 이 모든 선행과 악행 가운데서 높이 불어난 업이 뛰어난 것이 업도이다.
즉 묘행이 증가한 것을 선업도(善業道)라 말하고 악행이 증가한 것을 불선업도(不善業道)라 말한다.
혹 만약 “[그것은] 일정하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
근본업도는 많이 불어나기 때문이며, 극히 마음을 핍박하게 되기 때문이며, 지극히 공포스럽기 때문이며, 일의 구경(究竟)에 해당되기 때문에 불어난 것을 곧 근본업도라 말하게 되는 것이다.
[열 가지 악행[十惡行]]
【문】어떤 것이 업도에 해당되는가?
【답】살생에서 사견(邪見)에 이르기까지 열 가지 악행[十惡行]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살생에 관해서 지금 설명하겠다.
살생하고자 하는 마음과
중생과 생각과 살생이 있다.
이것을 살생이라 이름하나니
도적질과 사음도 이와 같다.
‘살생하고자 하는 마음과 중생과 생각과 살생이 있다’고 한 것은, 다른 중생을 죽이고자 하고는 정(定)ㆍ부정(不定)의 중생등에 대해 중생상을 일으켜 그 중생을 죽였다면, 이를 작(作)과 무작(無作)이라고 한다.
혹은 오로지 무작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신업으로서의 살생인 것이다. 그 밖의 나머지도 [살생이] 아닌 것은 아니다.56)
‘싫어하는 대상이라고 해서 자재를 갖춘 자[具自在者]가 언어로써 혹은 선인(仙人)이 뜻으로써 [생명을] 죽인다면 이것은 곧 구업(口業)과 의업(意業)의 자성이다’고 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57)
업의 자성이 다르기 때문이며, 일이 구경(究竟)에까지 이르지 않은 까닭이다.58)
만약 마음먹고 죽였건 무심코 죽였건 다른 중생을 죽였다면 모두 마땅히 살생의 죄를 얻어야 함을,
마치 불길에 닿아 죽거나 독을 먹고 죽거나 [죽은 것은 마찬가지라고] 말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
비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손에 칼을 잡고 있는 사람이건 손에서 칼을 버린 사람이건 그런 사람이 마음먹고 하든지 무심코 하든지 불을 건드렸다고 해서 불에 타 죽지는 않는다.
독을 푸는 주문을 외우거나 또는 [해독]약이 있다면 잡독을 복용한 자는 혹은 마음먹고 했건 혹은 무심코 했건 [관계없이] 죽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살생의 경우는 이와는 다르다. 때문에 적절한 비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가령 ‘불이나 독에 있어서는 타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인연을 얻지만, 살생에 있어서는 불살생의 인연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악하지 않은 마음을 얻기 때문이다. 저 칼이나 주문이나 여러 가지 약과 같은 것은 불에 타지 않고 죽지 않는 인연이 된다.
악하지 않은 마음이 불살생의 인연이 되는 것 역시 이와 같다.
악하지 않은 마음으로 생명을 죽이는 일은 살생이 아니니,
마치 칼을 잡고 불을 건드리면 불에 타지 않는 것과 같다.
【문】무심코 중생을 해친다면 [중생이] 죽지 않는가?
【답】죽는다. 그러나 비록 살생을 하였다 하더라도 살죄(殺罪)를 얻지는 않는다. 악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비록 다른 생명을 핍박하였지만 살죄를 얻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말이 안 된다고 한다면, 실은 그렇지 않다.
가령 다른 사람을 핍박하거나 거두어들이지 않고서도 죄와 복은 길이 길러지기 때문이다.
즉 선근을 끊은 경우[斷善根]와 자비스런 마음을 얻게 된 경우이다. 때문에 잘못된 주장이 아닌 것이다.
‘도둑질’이란 어떤 물건에 대해 다른 사람의 소유이고 다른 사람의 물건이라는 생각이 있으며, 또한 [내게] 주어지지 않은 것임을 알면서도 취하고자 하고, 취하고는 자기 소유라는 생각을 짓는 것이니, 이것을 작(作)과 무작(無作)이라고 한다.
혹은 오로지 무작이라고만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신업(身業)으로서의 도둑질이다.
‘사음’이란 부모 등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일으키면서도 정상적 혹은 비정상적인 행위를 한다든가, 보호자가 없는 자에 대해서나 혹은 부적절한 장소나 시기 등 이처럼 마땅히 행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행하는 것으로 이를 작ㆍ무작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이 신업으로서의 사음이다.
그의 생각과 달리 말하는 것과
무너지게 하는 것과 부드럽지 않은 말과
의미 없고 정성 없는 말을 하는 것
이것이 구업(口業)이다.
보고 듣는 일들에서 전도되거나, 전도되지는 않았지만 덮어두고 감춰두었던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작ㆍ무작이라고 표현한다. 혹은 오로지 무작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이 구업으로서의 망어(妄語)이다.
혹은 포살일에 몸을 흔들거나 혹은 묵연히 앉아 있는 일이 있으니, 이 역시 망어라고 한다. [이것을] 신업이나 의업의 성품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
이유는 업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며, 몸으로 드러내는 구업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몸으로 드러난다면, 가령 몸을 놓아 짓는 것도 또한 신업인 것과 같다.
비유하면 가령 일찍이 눈으로 접하다가 다시 뒤에 몸으로 접해 커지고 길러지는 경우와 같다.
다시 비유하면 계를 받을 때의 구작(口作)이 신업이 되는 것과 같으며,
또한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때 묵연히 앉아 있거나 무심하다면 이것 역시 신업이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무너지게 한다’고 한 것은, 무너뜨리거나 혹은 무너지지 않은 것을 무너뜨리려는 생각이 있거나 혹은 이미 무너진 것이 다시 화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이를 작ㆍ무작이라고 표현한다. 혹은 오로지 무작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이 구업으로서의 양설(兩舌)이다.
‘부드럽지 않은 말’이란, 괴롭히고 어지럽히는 마음으로 [상대를] 괴롭히거나 혹은 괴롭히지 않는 것이니, 이를 작ㆍ무작이라고 표현한다.
혹은 오로지 무작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이 구업으로서의 악구(惡口)이다.
‘의미 없고 정성 없는 말’이란, 선한 마음 없고 의미 없으며 시기가 아니고 법과 상응하지 않는 말이 그것이다. 따라서 일체의 구악행(口惡行)에 들어간다.
이는 무명이 번뇌를 따라다니고 음성이 문자를 따라다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중생의 서로 어긋나고 해치려는 마음
이것을 진애(瞋恚)라고 하고
남의 물건을 제 것으로 여기는 것은 탐욕이며
사견(邪見)이란 이른바 하견(何見)이다.
‘중생의 서로 어긋나고 해치려는 마음 이것을 진애(瞋恚)라고 한다’고 한 것은, 다른 중생에게 삿된 마음을 품고 죽이고자 하거나 때리고자 한다면 이는 자비심과는 서로 어긋나니 이것을 진애(瞋恚)라고 부른 것이다.
‘남의 물건을 제 것으로 여기는 것이 탐욕이다’고 한 것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애착하여 제 것으로 삼고자 하는 것을 탐욕이라 부른 것이다. 이것은 일체의 욕계에 존재하는 탐욕이다.
‘사견이란 이른바 하견(何見)59)이다’고 한 것은, 보시 등에 대해서 [그 과보가] 없다는 견해[無見]를 짓는 것을 사견(邪見)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문】어떤 업도가 어떤 구경(究竟)에 이르게 되는가?
【답】
살생과 악구(惡口)와
진애(瞋恚)의 업도는
모두 진애로부터 이루어지니
이는 중생의 처소에서 일어난다.
‘살생과 악구(惡口)와 진애(瞋恚)의 업도는 모두 진애로부터 이루어진다’고 한 것은, 살생과 악구와 진애는 모두 성내는 마음을 좇아 일어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단을 내릴] 구경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진애가 함께 하는 것이다.
【문】어떤 처소에서 생기는가?
【답】중생의 처소에서 일어난다. 이 세 가지 업도는 중생이 사는 곳에서 일어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몸으로 짓는 두 가지 업 및 탐욕은
탐욕이 궁극에 이른 바이니
모두가 탐욕으로 말미암아 이룩되고
여러 조건이 갖추어진 곳에서 일어난다.
‘몸으로 짓는 두 가지 업과 탐욕은 탐욕이 궁극에 이른 바이니, 모두가 탐욕으로 말미암아 이룩된다’고 한 것은, 도둑질과 사음 및 탐욕의 이 세 가지 업도는 탐욕으로 궁극에 이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이것은 다시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답】‘여러 조건이 갖추어진 곳에서 일어난다.’ 즉 이 세 가지 업도는 여러 조건들이 갖추어진 곳에서 일어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나머지 구업(口業)이 있으니
모두가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명처(名處)를 따라 일어남은
밝은 지혜 지닌 분의 말씀이다.
‘나머지 구업(口業)이 있으니 모두가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한 것은, 망어(妄語)ㆍ기어(綺語)ㆍ양설(兩舌)은 모두 탐욕과 진애와 우치를 따라 궁극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문】그것은 또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답】‘명처(名處)60)를 따라 일어남은 밝은 지혜를 지닌 분의 말씀이다.’이 세 가지 구업도(口業道)는 모두 명(名)을 좇아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견(邪見)은 명색(名色)에서 일어나고
또한 우치를 따라 이룩된다.
일체의 업도는
세 가지를 방편으로 삼는다.
‘사견은 명색에서 일어나고 또한 우치를 따라 이룩된다’고 한 것은, 사견이란 정신[名]과 물질[色]이 있는 곳에서 일어남을 말한 것이다.
【문】무엇이 궁극에 이르게 하는가?
【답】‘또한 우치를 따라 이룩된다.’
이 사견이란 우치를 따라 궁극에 이름을 알아야 한다.
【문】일체 업도의 방편은 근본[작용]과 같이 긍극에 이르게 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답】‘일체의 업도는 세 가지를 방편으로 삼는다.’
열 가지 불선업도는 모두 탐욕과 진에와 우치를 작(作)의 방편으로 삼는다.
탐욕에 의한 살생이란 가죽과 고기ㆍ힘줄ㆍ뼈 등을 탐내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니, 자신을 위해서나 혹은 친한 친구를 위해서이다.
진에에 의한 살생이란, 원수나 원수와 친한 이들을 죽이거나 그들로 하여금 근심하게 하고 괴로워하게 하는 것이다.
우치에 의한 살생이란, ‘모든 독충(毒蟲) 등을 죽이는 것은 인연[법]으로는 죄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을 해치기 때문이다. 모든 금수들을 죽이는 것도 인연[법]으로는 죄가 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사람의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고 하거나,
혹은 파사국[波私國]61)에서는 ‘만약에 부모가 늙거나 나쁜 병에 걸렸다면 응당히 죽여 마땅하다. [이는] 인연[법]으로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치의 살생이다].
탐욕에 의한 도둑질이란, 자기나 혹은 남을 위해서 필요한 물건을 훔치는 일이다.
성냄에 의한 도둑질이란, 원수의 물건을 훔치거나 그의 친척의 물건을 훔쳐서 그들로 하여금 근심하고 괴로워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어리석음에 의한 도둑질이란, 예를 들면 바라문이
“모든 땅에서 생산되는 물건은 모두 바라문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바라문은 세력이 미약하고 열등하기에 왕족이 이를 받아 사용한다.
이 때문에 바라문족은 말하기를,
“스스로 자기 물건을 취한 것이니 죄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물건을 취할 때는 남의 물건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도둑질이라고 하는 것이다.
탐냄에 의한 사음이란, 중생이 있는 곳에서 탐내는 마음을 방편삼아 [사음하는 것이다.] 곧, 다른 사람의 [여자나] 자기의 [여자]에 대해 [사음하거나] 혹은 돈을 벌고자 [사음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탐욕을 방편으로 하지 않는다면, 진애로부터 일어난다. 즉 원한 맺힌 집안의 여자나 원한 맺힌 사람의 친척의 [여자를 상대로 사음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우치에 의한 사음이란, 예를 들면 다리나 배, 들이나 밭, 꽃이나 과실, 도로와 같이 여자도 일체 중생이 모두 함께 받아들여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바라문에게는 네 사람의 아내가 있어야 하고, 찰리(刹利)에게는 셋이, 비사(‘舍)에게는 둘이, 수다라(首陀羅)에게는 오직 한 사람의 아내만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구업(口業)의 경우에는 만약에 탐냄이 일어난다면 탐욕의 [말]이 좇아 생겨나고, 성냄이 일어난다면 성내는 [말이] 좇아 생겨나고, 우치가 일어난다면 우치의 [말]이 좇아 일어남을 알아야만 한다.
탐욕의 경우, 만약에 탐욕이 차례로 일어난다면 이것은 곧 탐욕[심]을 좇아 생겨나는 것이며, 만약에 성냄이 [차례로] 일어난다면 이것은 성내는 [마음]을 좇아 일어나는 것이다.
진애ㆍ사견 역시 이와 같다.
【문】어떤 업도가 결정적으로 작이며 무작인가? 또 그렇지 않은 것인가?
【답】
근본업은 무작이지만,
혹은 작이라고 설하기도 한다.
방편과 끝은 다르니
탐ㆍ불탐의 등기(等起)이다.
‘근본업은 무작이지만, 혹은 작이라고 설하기도 한다’고 한 것은, 색을 자성으로 삼는 칠업도(七業道)는 결정적으로 무작이나 혹은 작이기도 함을 말한다.
사음은 결정적으로 작(作)이니, 스스로 최종에 이르기 때문이다. 나머지 업도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만약 스스로 지었다면 유작이며, 다른 사람을 시켜 짓게 했다면 오로지 무작이다.
【문】몸으로 짓지 않았음에도 살생이 되는 경우가 있는가?
【답】있다. 입으로 짓는 경우가 그것이다.
【문】입으로 짓지 않았음에도 거짓말이 되는 경우가 있는가?
【답】있다. 몸으로 짓는 경우가 그것이다.
【문】몸과 입으로 짓지 않았음에도 두 가지 죄에 해당되는 경우가 있는가?
【답】있다. 선인(仙人)이 악한 마음을 일으킬 때가 그것이다. 이른바 포살에서 [침묵을 지키는] 일이 그것이다.
가령 욕계의 색의 성질을 지닌 선업도(善業道)라면 이는 결정코 작 및 무작이다.
선(禪)ㆍ무루(無漏)의 율의에는 오직 무작만이 있으며 작은 없다. 마음에서 말미암기 때문이다.
방편은 유작이다. 만약 순박하고 청정한 마음이나 지극히 날카로운 마음의 속박으로 짓는 [업]에는 무작이 있다. 그러나 만약 순박하고 청정하지 아니한 마음이나 지극히 날카롭지 못한 마음의 속박으로 짓는 [업]에는 오직 작만이 있으며 무작은 없다.
‘끝이 다르다’고 한 것은, 업도의 끝은 오직 무작이어서 작업(作業)이 쉬기 때문이다.
【문】어떤 것이 업도와 방편에 해당되고 어떤 것이 끝이 되는가?
【답】살생의 방편이란 이른바 양(羊)을 도살하는 사람이 [양을] 잡아 오든지, 사든지 또는 끌고 와서 한 번 치든지 세 번 치든지 나아가 양의 목숨이 끊어지지 않을 때까지는 모두가 방편이라 부른다. 그러다가 양의 목숨이 끊어지는 찰나 사이에 작과 무작이 근본업도가 되는 것이다.
후에 이곳에서 불선의 몸으로 짓는 작ㆍ무작은 곧 살생의 끝이며, 내지 기어(綺語)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다.
이것을 끝[終]이라 표현한 것이다.
탐욕과 진애와 사견에는 방편이 없다. 현재 눈앞에 나타난다면 곧 근본[업]이 일어난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몸과 입의 업도는 일체의 십업을 방편삼고 끝으로 삼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말인가?
가령 어떤 중생을 죽일 작정으로 또 다른 중생을 죽여 그 원인으로 삼고, 그런 연후에 그 [목표로 한] 중생을 죽이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살생을 하기 위해 기도하고 청하고 힘을 빌려서 그를 죽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아서 살생의 자구로 삼거나, 혹은 상대의 사랑하는 이와 사음을 해 그로 하여금 상대를 죽이게 하는 경우이다.
혹은 상대의 친구에게 거짓말ㆍ욕ㆍ이간질ㆍ꾸밈말을 해 그들의 친구 사이를 이간시키거나 혹은 상대방의 재물을 탐내거나 혹은 상대방에게 성을 내거나 혹은 사견을 일으켜서 살생을 길이 기르는 경우이다.
그런 뒤에 상대방의 아들을 죽이거나 또는 그의 아내를 범하는 등, 차례차례로 십불선업도(十不善業道)가 있게 되니, 이것이 곧 끝[終]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해서 일체를 모두 알아야 하는 것이다.
‘탐ㆍ불탐의 등기(等起)이다’고 한 것은, 불선의 업도는 탐욕과 진애와 우치를 방편으로 삼고 또한 끝으로 삼으며, 선한 업도는 탐내지 않음과 성내지 않음과 어리석지 않음으로써 일어남을 말한다.
불선업도의 방편을 버리는 것이 곧 선업도의 방편이다. [악한] 근본을 버리는 것이 곧 [선한] 근본이 되며, 끝을 버리는 것이 곧 끝이 되는 것이다.
【문】그것은 어떤 일을 말하는 것인가?
【답】가령 구족계를 받는 사미(沙彌)가 계를 받는 장소에 들어가 주위를 돌며 승려들에게 절하며 화상(和上)을 구해 의발(衣鉢)을 받고는 백일갈마(白一羯磨) 내지는 백이갈마(白二羯磨)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 곧 방편이다.
세 번째 갈마를 아뢰는 찰나 사이에 작과 무작이 있으니, 이것이 근본업도에 해당된다.
그 다음에 네 가지 의지의 근거[四依]를 말해주니, 이와 같이 해서 이 곳에서의 몸과 입의 작ㆍ무작이 있으니, 이것을 끝[終]이라 하는 것이다.
【문】어디에 몇 가지 업도가 있는가?
【답】
지옥에 다섯 가지 업도가 있고
울단월에는 뒤편 네 가지가 있으며
다른 지방에는 온전히 열 가지 업도가 갖추어져 있고
그 밖에 악취에도 있고 하늘 세계에도 있다.
‘지옥에 다섯 가지 업도가 있다’고 한 것은, 지옥중생에게는 욕설ㆍ꾸밈말ㆍ탐욕ㆍ성냄ㆍ사견의 다섯 불선업도가 있음을 말한다.
[지옥에서는] 서로 죽이는 일은 없기에 살생의 업도가 없고 재물을 받을 일이 없기에 도둑질이 없으며, 여자를 취하고 받을 일이 없기에 사음도 없다.
다른 생각을 하면서 말하기 때문에 망어라고 하는데, 그 곳에서는 다른 생각이 없기에 망어가 없다.
항상 [서로] 떨어져 있기에 [이간질시키는] 두 가지 말[兩舌]이 없다.
그러나 괴로움으로 핍박 당하기 때문에 욕설[惡口]이 있으며,
적절하지 못한 때에 말하게 되기에 꾸밈말이 있다. 또 탐욕과 사견(邪見)은 성취되지만 행하지는 못하며, 노여움은 [성취와 행을] 함께 지닌다.
‘울단월에는 뒤편 네 가지가 있다’고 한 것은 뒤편에 속하는 네 가지 불선업도가 있다는 것이다. 즉 수명의 한계가 정해져 있기에 살생은 없으며, 재산을 받는 일이 없기에 도둑질이 없다. 여자를 취하고 받을 일이 없기에 사음도 없다.
욕망을 행하고자 할 때 상대방 여인을 데리고 나무 밑으로 가면 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구부려 그들 위를 덮어 준다. 그런 다음 욕망을 행하고 그 자리를 떠난 후에는 [나뭇가지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만약 나무가 덮어 주지 않으면 두 사람 모두가 부끄러워하며 헤어지게 된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이 없기에 망어가 없다. 항상 화합하기에 양설(兩舌)이 없다. 또 성격이 유연하기에 거친 말을 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노래하며 찬탄하기에 꾸밈말은 있다. 비록 뜻으로 짓는 업도62)는 성취된다 하더라도 행하지 못한다.
‘나머지 지방에서는 온전히 열 가지가 갖추어져 있다’고 한 것은, 울단월을 제외한 다른 세 지방에는 십업도가 존재함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혹은 불율의에 포섭되기도 하고 불율의를 벗어난 범주에 포섭되기도 한다.
‘그 밖에 악취에도 있고 하늘 세계에도 있다’고 한 것은, 축생과 아귀(餓鬼)와 욕계의 하늘에도 십업도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단지 불율의에서 벗어난다.63) 비록 천신은 다른 천신을 해치지 않지만, 다른 세계를 해치게 되는 것이다.
또는 말하기를,
‘천신은 손ㆍ발이 잘라져도 다시 생겨난다. [그러나] 목을 잘리거나 몸통이 잘리면 죽게 된다. [그리고] 전전하며 서로 빼앗는 등 십업도가 모두 존재한다. 색계천과 무색계천에는 불선업도가 없다.
【문】어느 곳에 몇 가지의 선업도가 있는가?
【답】
지옥과 울단월에는
세 가지 선업도가 있고
똑같이 무색계에도 나타나며
저 성인은 열 가지가 성취된다.
‘지옥과 울단월에는 세 가지 선업도가 있다’고 한 것은, 지옥은 탐욕과 성냄 없으며 바른 견해가 있음을 말한다.
울단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똑같이 무색계에도 나타난다’는 것은, 무색계에서는 곧 이 세 가지가 눈 앞에 나타나 행해진다는 것이다.
‘그 성인은 열 가지를 성취한다’고 한 것은, 무색계의 성인은 무루의 십선업도(十善業道)를 성취함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거나 또한 다른 경우가 있으니,
즉 색계는 율의(律儀)이다.
축생과 아귀도 다르고
나머지도 이처럼 역시 다르다.
‘이와 같거나 또한 다른 경우가 있으니, 즉 색계는 율의이다’고 한 것은, 색계의 선율의에 포섭되는 것은 십선업도를 갖추며, 또한 성취되고 눈앞에 나타나게 됨을 말한다. 성인이 그곳에 태어나게 되면 무루업도가 존재하게 된다.
‘축생과 아귀도 다르다’고 한 것은, 축생과 아귀의 세계에도 역시 십선업도가 존재함을 말한 것이다. [그 세계에서는] 율의를 벗어나며 또한 불율의도 벗어난다.
‘나머지도 이처럼 역시 다르다’고 했는데, 염부제(閻浮提)ㆍ불바제(弗婆提)ㆍ구다니(瞿陀尼) 및 욕계의 하늘을 ‘나머지’라 한 것이다. 거기에도 십선업도가 있는데, 이것은 율의에 속하거나 혹은 율의를 벗어난 경우도 있다.
욕계의 하늘에는 오직 선정과 무루의 율의만이 존재한다.
【문】몇 가지의 불선업도가 사(思)와 더불어 한 시기에 전개되는가?
【답】
악한 업도가 일어나면
하나가 사(思)와 함께 굴러가며
둘ㆍ셋 내지는 여덟 가지가
차례차례로 불어남을 알아야 한다.
이 몸을 자성으로 하는 세 가지 불선업도의 그 하나하나는 사(思)와 더불어 전개되니, 곧, 살생과 도둑질과 사음이 그것이다.
‘두 가지가 함께 전개된다’고 하는 것은, 다른 중생을 죽이면서 게다가 물건을 도둑질해 자기 것으로 취하는 것을 말한다.
‘세 가지가 함께 전개된다’고 하는 것은, 둘을 보내고 난 뒤 스스로 사음을 행하는 경우를 말한다.64) 이 행은 스스로 긍극을 이룬 것으로 다른 조건에 의해서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여러 가지 [악행이] 합쳐진다면 일체가 함께 궁극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구업도(口業道) 중에서 ‘한 가지가 함께 전개된다’고 하는 것은, 이른바 꾸밈말을 가리킨다.
‘두 가지가 함께 전개된다’고 하는 것은, 망어와 비시(非時)의 꾸밈말을 포함하고 [둘을] 갈라 놓으려는 말과 비시의 꾸밈말을 함을 포함하며, 거친말과 비시의 꾸밈말을 포함한다.
‘세 가지가 함께 전개된다’고 하는 것은, [둘을] 갈라 놓으려는 말과 망어와 비시의 꾸밈말을 포함하고, 거친말과 망어와 비시의 꾸밈말을 포함하며, 거친말과 [둘을] 갈라 놓으려는 말과 비시의 꾸밈말을 포함한다.
‘네 가지가 함께 전개된다’고 하는 것은, [둘을] 갈라 놓으려는 말과 망어와 거친 말과 비시의 꾸밈말을 포함한다.
의업도(意業道)는 하나하나가 [사(思)]와 함께 전개된다. 행(行)이 다른 까닭에 두 가지가 아니니, 이와 같이 해서 다섯ㆍ여섯ㆍ일곱ㆍ여덟 가지 [업이] 함께 전개된다.
이것은 마치 여섯 사람을 보낸 뒤 스스로는 사음을 하는 것과도 같다.65)
다른 조건에 말미암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 종종의 [업이] 화합한다면 곧 일시에 함께 궁극에 이르고, 아울러 탐욕도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여덟 가지의 불선업도가 사(思)와 함께 전개되는 것이다.
【문】몇 가지의 선업도(善業道)가 한꺼번에 사(思)와 함께 전개되는가?
【답】
이른바 선업도는
둘ㆍ셋 및 넷
여섯ㆍ일곱ㆍ아홉과 열 가지가
일시에 사(思)와 함께 전개된다.
욕계의 선한 오식신(五識身)이 눈앞에 나타날 때와 초선의 경지의 삼식 및 무색에 의한 누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 이러한 것들에는 두개의 선업도가 사(思)와 함께 전개된다. 이른바 탐욕 없고 노여움이 없는 [마음이] 그것이다.
욕계의 선한 의식(意識)이 눈앞에 나타날 때와 색계의 부정심(不定心) 및 무색계와 무색에 의한 무루의 정견에는 삼사(三事)66)가 사와 함께 전개된다.
우바새와 사미가 염오 및 무기심(無記心)이면서 율의를 받아들일 때에는 네 가지가 된다. 곧, 선한 오식(五識)의 머묾에는 여섯 가지이고, 선한 의식의 머묾과 비구의 염오ㆍ무기심과 비심(非心)에는 일곱 가지이다.
그리고 비구의 선(善)한 오식의 머묾이나 혹은 선정에 의한 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와 함께 하는 마음에는 아홉 가지이다.
그리고 비구의 선한 의식의 머묾 및 색계의 정심(定心)과 선정에 의한 무루의 정견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에는 십선업도(十善業道)가 사와 함께 전개한다.
【문】어떤 업도에 몇 가지 과보가 있는가?
【답】
하나하나마다 세 가지 과보 있다.
이른바 보과(報果)와
의과(依果)와 증상과(增上果)이니
이것을 업도의 과보라 한다.
하나하나의 업도에 모두 세 가지 과보가 있다. 즉 보과와 의과와 증상과이다.
그 업도를 거듭 수습해 지옥 가운데 태어난다면 이것이 ‘보과’이다.
지옥에서 나와서 인간 가운데 태어난다면 서로 닮은 과보를 받게 된다.
즉 살생을 저지른 자는 단명하고,
도둑질을 한 자는 재물을 잃고,
사음을 한 자는 자신의 처가 정숙하지 못하고,
망령된 말을 한 자는 나쁜 이름과 비난을 받게 되고,
이간질시키는 말을 한 자는 친구들과 사이가 뒤틀려 떠나가게 되고,
욕설을 한 자는 항상 나쁜 소리를 듣게 되고,
말을 꾸민 자는 언어가 바르지 못하게 되고,
탐욕을 부린 자는 탐욕이 불어나고,
성을 내던 자는 성냄이 불어나고,
사견을 지녔던 자는 어리석음이 불어난다.
이것이 ‘의과(依果)이다.
이 여러 업도 가운데 ‘증상과(增上果)’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곧,
모든 신체 조건[衆具]이 추악하고 초췌하며 피부에 광택이 없어진다.
서리와 우박을 만나고 더러운 먼지와 오물로 더러워지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맑지 못하다.
사는 곳은 험한 골짜기여서 가시 투성이고, 과실은 시들어 떨어지고, [열매를 맺는다 해도] 알이 적고 보잘 것 없으며 맛은 매우 쓰고 떫으니,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일이 없다.
【문】무슨 과보의 닮음인가?
【답】
남에게 고통을 주면 악도(惡道)에서 고통받고
다른 목숨 상하게 하면 수명이 짧아진다.
바깥 모습 광택 없음은
남의 광택을 허물었기 때문이다.
‘남에게 고통을 주면 악도에서 고통받는다’고 한 것은, 살생을 하여 남에게 고통을 받게 한다면 악도에서 고통을 얻게 됨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곧 [과보의] 닮음이다.
【문】살생이란 어떤 음(陰)을 죽이는 것인가? 색음(色陰)을 죽이는 것인가, 5음(陰)을 모두 죽이는 것인가?
【답】어떤 이는 말하기를,
‘색음이다. 색은 끊고 허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네 가지 음은 촉감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5음이다. 네 가지 음은 비록 촉감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도 색음에 근거하여 전개되니, 색음을 죽일 경우 그것도 역시 죽이게 되는 것이다.
마치 [우유가 든] 병을 깨면 우유도 잃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문】무기(無記)의 [몸]을 죽이는 것인가? 아니면 세 종류를 다 죽이는 것인가?
【답】어떤 이는 말하기를,
‘무기이다. 왜냐하면, 무기의 [몸]이 칼과 몽둥이의 세례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나머지 둘은 촉감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67)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세가지 모두이다’라고 한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문】어떤 음(陰)을 죽이는 것인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만약 과거의 음이라면 그것은 이미 소멸한 음이며,
만약 미래의 음이라면 얻을 수 없는 음이다.
또한 만약 현재의 음이라면 그것은 한 찰나 사이에도 머무는 일이 없다.
【답】어떤 이는 말하기를,
‘미래의 [음]이다. 현재세에 머물며 미래의 화합을 부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미래와 현재의 [음]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세계에서 받은 칼과 몽둥이의 세례를 받는다면, 상속되는 일 없이 그 음은 소멸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다른 목숨 상하게 하면 수명이 짧아진다’고 한 것은, 살생을 한 자는 상대방의 목숨을 끊은 까닭에 [그 업보로] 짧은 수명을 얻게 됨을 말한 것이다.
‘바깥 모습 광택 없음은 남의 광택을 허물었기 때문이다’고 한 것은, 살생을 한 자는 [남의] 광택을 허문 까닭에 그가 얻는 여러 가지 모습은 모두 광택이 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업도는 그 상응하는 바를 따름을 알아야 한다.
도둑질과 사음은 비록 상대방을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희망을 파괴하기 때문에 [죄업이] 된다.
또한 가령 [둘 사이를] 갈라 놓지는 않았다고 해도 이간질[兩舌]이라고 하며,
비록 상대방이 괴로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거친말[惡口]이라고 표현하는 경우와 같다.
이것으로 이미 업도 부분을 설명하였으니,
[업도의 차별]
지금부터 그 차별에 관해서 설명하겠다.
현법과업(現法果業)이 있고
다음으로 생과(生果)를 받는다.
후과(後果)도 역시 그러하니
몫은 각기 정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 가지 업이 있다. 즉 현수(現受)와 생수(生受)와 후수(後受)가 그것이다.
현법에서 받는 업이란, 가령 업을 이 생에서 지어 이 생에서 성숙되는 것을 현수(現受)라 부른다.
그러나 [그 업이] 만약 두 번째 생에서 성숙된다면 생수(生受)라 부른다.
두 번째 생 이후에 성숙된다면 후수(後受)라 부른다.
혹은 네 가지 업으로 규정하려 하는 사람도 있다. 즉 앞에서 말한 세 가지와 부정수(不定受)68)가 그것이다. 이 경우 앞의 세 가지 업은 전개되지 않지만, 부정업은 전개된다. 전개된다고 하는 것은 이른바 지계(持戒)등으로 보호받기 때문이다.69)
비유자(譬喩者)70)는 말하기를,
“일체의 업은 전개되며, 나아가 무간업(無間業)71)이 된다”고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만약 무간업이 전개되지 않는다면, 제일유(第一有)72)를 뛰어넘는 일이 없다. 만약 제일유를 뛰어넘는 자가 있다면, 그로 인해 무간업도 전변될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라고 한다.
또 그들은 말하기를,
“현재의 업이라 해서 반드시 현재에 성숙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성숙되었다면 그것은 현재의 업보를 받는 것이지 다른 세계의 업보는 아니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들은 여덟 가지 업을 설한다. 곧, 현법에서 받으면서 그 과보는 정해져 있거나 혹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나아가 부정수업(不定受業)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말하기를,
“시분(時分)은 정해져 있지만 [과보의] 성숙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한다.
[이에 관해서는] 마땅히 네 구(句)의 논리로 구별해야 한다.
곧, 시분은 정해져 있어도 그의 성숙[시기]는 정해져 있지 않은 경우,
혹은 성숙[시기]는 정해져 있지만 시분은 정해져 있지 않은 경우,
혹은 시분이 정해져 있고 성숙[시기]도 정해져 있는 경우,
혹은 시분도 정해진 것이 아니고 성숙[시기]도 정해져 있지 않은 경우이다.
【문】이 네 가지 업 가운데 몇 가지가 유정[身種類]의 씨인가?
【답】현재의 법에서 과보를 받는 업을 제외한 세 가지이다.
욕계에는 네 종류의 업의 씨앗이 있으며, 색계와 무색계도 또한 이와 같다.
지옥의 세계[地獄趣]에는 네 종류의 불선업의 씨앗이 있으며, 선[업의 씨앗]은 세 종류가 있다.
현재 과보를 받는 업은 제외된다. 다른 취(趣)에는 함께 네 가지 [업의] 씨앗이 있다.
욕계에 태어난 범부는 욕망과 애착이 다하지 않는다면 욕계에는 네 가지 [업의] 씨앗이 있게 된다.
그러나 만약 욕망과 애착이 다하여도 범천(梵天:色界)에의 애착은 다하지 않으며 물러서지 않는 종성법(種性法)의 사람이라면, 욕계에는 세 가지 [업의] 씨앗이 있게 된다. 여기에서는 생수업(生受業)을 제외한다.
범천에도 역시 세 종류의 [업의] 씨앗이 있는데, 여기서는 현수업(現受業)을 제외한다. 만약 물러서는 종성법의 사람이라면 범천(梵天)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으나, 욕계에는 네 가지 선한 업의 씨앗이 있게 된다.
이와 같이 그 뜻을 좇아서 모든 경지에 태어나는 범부ㆍ성인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이 설명된다.
이미 현수업 등을 설명하였으니,
[즐거움 받는 업[樂受業]등]
즐거움 받는 업[樂受業]등을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욕계 중의 선업과
색계의 세 경지를
즐거움 받는 업이라고 하니,
여기에는 정(定)과 부정(不定)이 있다.
‘욕계 중의 선업과 색계의 세 경지를 즐거움 받는 업이라고 한다’고 한 것은, 욕계에서의 선업은 즐거움을 받게 되고 또한 중구(衆具)73)의 과보를 받게 되고 색계 내지 제3선의 업은 모두가 즐거운 과보를 얻게 됨을 말한다.
【문】선(禪)의 중간 과정에서 짓는 업은 어떤 과보를 받게 되는가?
【답】어떤 이는 말하기를,
‘초선(初禪)의 즐거운 업보를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아비담(阿毘曇)에서 설명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문】혹은 업 가운데 마음으로 받으면서 몸으로 받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답】있다. 선하면서 거친 사유가 없는 업(無覺業)이 그것이다.
다시 설명한다면, 선(禪)의 중간 과정에서 짓는 업은 수(受)의 과보를 얻지 않고 오직 색 및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행[色心不相應行]의 [과보]만이 존재한다.
【문】이것의 시분(時分) 역시 정해진 것인가?
【답】여기에는 정(定)과 부정(不定)이 있다. 즉 정해져 있거나 혹은 정해져 있지 않다. 이 네 가지 경지74) 가운데 선한 업에는 모두 즐거운 과보가 있다.
불고불락(不苦不樂)을 얻으면
이것을 상선(上善)이라 하고
만약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되면
이를 불선업이라 한다.
‘불고불락(不苦不樂)을 얻으면 이것을 상선(上善)이라 한다’고 한 것은,
제4선의 경지에서의 선업(善業) 및 무색계의 경지에서의 선업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과보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 경지에서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과 그 모든 조건[衆具]을 갖추기 때문이다.
【문】낮은 경지에는 왜 불고불락의 과보가 없는가?
【답】어떤 이는 말하기를,
“낮은 경지는 거칠지만 그 느낌은 미세하기 때문이며, 낮은 경지는 적멸하고 고요한 경지가 아니면서 그 느낌은 적정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만약 낮은 경지에서 착한 업을 지었을 경우에는 모두가 즐거움을 받게 되기 때문에 불고불락의 느낌을 구하는 자도 없다.
또한 비록 괴로운 과보를 구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즐거움을 구하는 까닭에 악한 행동을 하게 된다. 때문에 비록 구하지는 않았지만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만약 괴로운 과보 받게 되면 이를 불선업이라고 한다’고 한 것은, 불선업에는 괴로운 과보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괴로운 느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단지 업으로만 과보를 받는 것은 아니다. 사음(四陰)ㆍ5음(陰)도 또한 과보를 받게 된다. 다만 업[으로 받는 과보가 다른 것에 비해] 강하기 때문에 업의 수보(受報)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도 또한 [과보를 받을 시분이] 정해진 것과 정해지지 않은 것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문】몇 가지의 수(受)가 있는가?
【답】
이른바 자성수(自性受)와
상응수(相應受)와 보수(報受)와
현전수(現前受)와 경계수(境界受)가 있으니
이를 다섯 종류의 수(受)라고 설한다.
다섯 종류의 수(受)란 이른바 자성수(自性受)와 상응수(相應受)와 보수(報受)와
현전수(現前受)와 경계수(境界受)이다.
‘자성수’란 수(受) 그 자체이다.
‘상응수’란 수와 상응하는 법이다.
‘보수’란 낙수(樂受) 등의 업이다.
‘현전수’란 현재의 수(受)이다. 『대인경(大因經)』에서‘만약에 즐거움의 느낌이 눈앞에 나타날 때는 다른 두 가지 느낌이 소멸한다’고 설한 것과 같다.
‘경계수’란 안촉(眼觸)이 각(覺)을 일으켜 색을 받아들이게 되니, 이것은 반연(攀緣)의 뜻이다.
이 다섯 종류의 수 가운데 보수를 말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문】세존께서는 ‘흑보(黑報)’ 등 네 가지 업보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어떻게 건립되는가?
【답】
색유(色有) 중의 선업(善業)
이것은 백업(白業)이며 백보가 있다.
흑백은 욕유 중에 있으며
함께 흑업(黑業)인 것을 부정(不淨)이라 말한다.
‘색유(色有) 중의 선업(善業), 이것은 백업(白業)이며 백보가 있다’고 한 것은, 색계의 선업은 오로지 성내는 마음[瞋恚]이 없기에 흑(黑)을 벗어나 있음을 말한다.
【문】무색계의 업은 뛰어나 색계에 비할 바가 아닌데 왜 [무색계의 업보는] 말하지 않는가?
【답】두 가지 과보 때문이다. 색계에서는 중음(中陰)과 생음(生陰)을 받고 무색계에는 오직 생음만이 있다. 이와 같이 색계와 무색계, 눈으로 볼 수 있고 볼 수 없으며, 상대가 있고 없음의 과보를 받게 된다.
또한 거기에는 삼업(三業)과 5음(陰)과 십선업도(十善業道)의 과보를 받는 일이 있기 때문에 [색계의 업보를] 설명한 것이다.
‘흑백은 욕유 중에 있다’라고 했는데, 욕계의 선업은 불선업과 섞여 있는 까닭에 흑백이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한 몸 가운데 두 업을 얻을 수 있고, 또한 두 가지 과보가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흑업이 아닌 것이 백업이니, 흑과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함께 흑업인 것을 부정이라 말한다’고 한 것은, 불선업을 흑업이라고 말한 것이다.
거기에는 검은 과보가 있다. 그 [업의] 원인이 오염되어 있다면, 그 염오 때문에 흑업이라 말한다.
아울러 비천하고 미워해야 할 업인 까닭에 검은 과보라고 한다.
오직 비천하기만 한 것은 오염된 흑업이 아니다. 그것은 오염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사(思)가 능히 무너지면
능히 그 여러 업은 남은 바가 없다.
이것을 막힘 없는 도라 하는데
이른바 이것이 네 번째 업이다.
만약 도가 세 가지 업을 능히 허물 수 있다면, 그 도와 상응하는 사(思)는 곧 네 번째 업이 된다. 이 업은 불염오(不染汚)이기 때문에 흑업이 아니고 즐길 수도 없는 까닭에 백업(白業)도 아니며, 계(界)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업보도 없다.
【문】어떤 업을 몇 가지의 사(思)가 끊는가?
【답】
열두 가지 사가 있어
흑보의 업을 끊고
네 가지 사는 능히 백업을 끊으며
한 가지 사는 둘 모두에서 벗어난다.
‘열두 가지 사가 있어 흑보의 업을 끊는다’고 한 것은, 흑업은 열두 가지 사로 끊음을 말한 것이다. 곧, 견도(見道)의 사법인(四法忍)과 상응하는 사 및 욕계의 욕망을 벗어나는 여덟 가지 무애도(無礙道)와 상응하는 사(思)를 말한다.
‘네 가지 사는 백업을 끊는다’고 한 것은, 네 가지 사(思)로 백업도 끊음을 말한 것이다. 곧, 초선의 경지에서 욕망을 벗어난 아홉 번째의 무애도(無礙道)와 상응하는 사와 제4선의 이욕(離慾) 또한 그러하다. 선한 유루법은 마지막 무애도로 끊기 때문이다.
‘한 가지 사는 둘 모두에서 벗어난다’고 한 것은, 욕계에서 욕망을 벗어난 아홉 번째의 무애도와 상응하는 사로써 흑업과 흑백업을 끊음을 말한 것이다.
【문】세존께서는 굽음[曲]과 오염[穢]과 탁(濁)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답】
굽음은 아첨에서 일어나고
오염은 성냄에서 생겨난다.
욕생(欲生)을 탁하다 함은
세존의 말씀이다.
‘굽음은 아첨에서 일어난다’고 한 것은, 아첨이란 굽히는 것을 말하며, 왜곡된 모습의 법에 대해 일으키는 업을 곡업(曲業)이라 부른다. 그 왜곡된 과(果) 때문이다.
아첨은 곧지 않은 까닭에 ‘굽었다[曲]’라고 표현한다. 아첨이 길을 장애하는 까닭에 생사를 벗어나기 어렵고 열반에 들기 어렵다.
비유하면 굽은 나무와도 같다.75)
‘오염은 성냄에서 생겨난다’라고 했는데, 두 종류의 오염이 있다. 왜냐하면, 자기 몸을 더럽히고 또한 다른 이의 몸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성내는 일을 ‘더럽다’라고 표현한다. 더러운 모습의 법에서 일으키는 업을 예업(穢業)이라 부른다. 그 [오염된] 과보가 있기 때문이다..
‘욕생(慾生)을 탁하다 함은 세존의 말씀이다’고 했는데, 욕망이란 본래 물드는 성품[染性]이기 때문에 이것을 ‘탁하다’라고 표현한다. 만약 업이 욕망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이것을 탁업(濁業)이라 부른다. 그 [탁한] 과보가 있기 때문이다.
과보가 원인과 닮아 있음을 가지고 설명한 것이다.
【문】몇 종류의 업이 등기(等起)76)하는가?
【답】
등기에 두 종류 있으니
인등기(因等起) 및 그것의 찰나등기(刹那等起)이다.
앞에서 회전한 바와 같이
이 역시 따라서 회전한다.
‘등기에 두 종류가 있으니 인등기(因等起)77) 및 그것의 찰나등기(刹那等起)78)이다’고 한 것은, 두 종류의 등기가 있음을 말한다.
인등기란 내가 마땅히 지을 바를 지어야겠다고 하는 것이며,
그것의 찰나등기란 가령 마음이 머물면서 그 업을 짓게 되는 것을 말한다.
【문】이 두 가지의 등기 가운데 어떤 것이 전개되는 것이며 어떤 것이 따라 전개되는 것인가?
【답】전개되는 것이란 가령 앞의 그것이 인등기라면 이것을 ‘전개되는 것[轉]’이라 부르고, 뒤의 것을 ‘따라 전개되는 것[隨轉]’이라고 말한다.
곧, 그 찰나등기를 ‘따라 전개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문】육식신(六識身)에서는 어떤 것이 전개되는 것이며, 어떤 것이 따라 전개되는 것인가?
【답】
만약 식(識)이 수도(修道)의 단계에서 끊어진다면
뜻[意]에는 두 종류가 있게 된다.
다섯 종류의 마음은 하나라고 말하고
나머지는 유루(有漏)라고 말한다.
‘만약 식이 수도의 단계에서 끊어진다면 뜻에는 두 종류가 있게 된다’고 한 것은, 수도의 단계에서 끊게 되는 의식은 전개되기도 하고 따라 전개되기도 함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모두 업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선ㆍ불선ㆍ무기의 [식]으로, 그 선한 것이 전개되면 곧 다른 선한 [식]이 따라 전개되게 된다.
불선의 식과 무기의 식도 또한 이와 같다.
여기서 무기란 위의와 공교이다. 위의의 마음이 전개되면 그 [무기심도] 따라 전개된다.
그러나 선한 마음이나 오염된 마음이 앞에 나타나서 사라진다고 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 [업이] 속히 일어나기 때문이니,
마치 빙빙 도는 불바퀴와 같은 것이다.
공교의 마음도 역시 이와 같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과보로 생긴 마음은 신구(身口)의 업을 일으키지 않는다.
‘다섯 종류의 마음은 하나라고 말한다’고 한 것은, 오식신(五識身)이 따라 전개하는 것임을 말한다. 스스로 지은 [업을] 받기 때문이다. 전개하는 것이 아니니 사유(思惟)가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곧 유루라고 말한다’고 한 것은, 견도(見道)에서 끊게 되는 마음을 ‘나머지’라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곧 전개하는 [마음]으로, 인등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 전개하는 마음은 아니다. 견도의 단계에서 끊는 마음을 가지고는 신ㆍ구업 등이 일어나지 않는다. 미세하기 때문이며 내부로 향하기 때문이다.
만약 또 견도의 단계에서 끊게 되는 마음으로 신업ㆍ구업을 등기시킬 경우,
그 업은 견도의 단계에서도 끊게 되는 것인가?
수도의 단계에서 끊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두 단계 모두에서 끊게 되는 것인가?
만약 견도의 단계에서 끊게 된다고 말한다면, 색에는 견도로 끊어지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명(明)ㆍ무명(無明)과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또 만약 수도의 단계에서 끊는다고 한다면, 수도의 단계에서 끊는 법이면서 견도의 단계에서 끊는 마음이 등기하는 것이니, 이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또한 만약 두 단계 모두에서 끊는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몫이 있어야 하는데, 이 역시 그렇지 않다.
“사견(邪見)을 지닌 사람의 신구업이 곧 견(見)이라고 말한다”고 경에서 설하는 바와 같으니, 이 역시 인등기를 설한 것이다.
【문】어떤 것이 청정한 업인가?
【답】
일체의 묘행은 청정하고
무학(無學)의 몸과 입은 적정하다.
이른바 뜻이 적정함은
곧 무학의 마음이다.
‘모든 묘행은 청정하다’고 한 것은, 만약 묘한 행을 지니고 있을 경우 그 일체를 청정[업]이라 말한 것이다. 가령 몸의 묘한 행일 경우 ‘몸의 청정한 업’이라 말한다. 이와 같이 다른 업도 설명하는 것이다.
【문】유루법은 때[垢]가 있거늘, 어떻게 그것을 청정하다고 하는가?
【답】번뇌와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며, 제일의정(第一義淨)79)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문】무엇이 적정한 경지[滿]80)인가?
【답】‘무학의 몸과 입은 적정하다.’ 신구의 묘행을 적정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뜻이 적정함은 곧 무학의 마음이다.’
무학의 마음을 의만(意滿)이라고 하니, 모니(牟尼)의 모습인 까닭이다.
【문】무슨 이유로 색음(色陰)과 식음(識陰)을 ‘적정[滿]’이라 하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가?
【답】거칠고 미세한 구별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최상의 내용을 지닌 적정이니, 신구의 업으로써 비교해 아는 것이다.
지식(止息)이 증광하기에, 번뇌의 열로 손상 당하지 않기에, 뜻과 말로 허물어지지 않기에 아라한만을 ‘적정’이라고 할 뿐, 다른 대상은 아닌 것이다.
【문】묘행과 청정함과 적정함[滿]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지은 바가 선하기 때문에 묘행이라 말하며, 그 행이 청정하기 때문에 청정[淨]이라 말하고 모니(牟尼)이기 때문에 적정이라고 말한다.
사랑할 만한 과보인 까닭에 묘행이라 말하고, 번뇌를 여의기 때문에 청정이라 말하며 우치를 여의기 때문에 적정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미 업에 관해 설명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