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법, 무상과 비아/무아]
연기법은 다음과 같은 네 개의 명제로 구성된다.
(잡아함경_335.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
(1) 연기법
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나.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라.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
잡아함경의 노경에서는 연기법을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비유하면 세 개의 갈대를 빈 땅에 세울 때, 서로서로 의지해야 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만일 그 하나를 빼어 버리면 둘도 서지 못하고, 만일 둘을 다 빼버리면 하나도 또한 서지 못하게 되니, 서로서로 의지해야 서게 되는 것입니다.”
보통 생각하기를,
일정하게 고정된 모양과 빛깔과 고유한 성질을 가진 이것과 저것이 본래부터 존재하며,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의존하여 어떤 관계를 형성하거나 형성하지 않으며,
또 이것과 저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기고 없어지며,
어떤 경우에는 이것과 저것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맺어진다고 생각한다.
언뜻 생각하면, 사실이 그러해 보인다.
우리는 어떤 사물들과 일들의 이름을 알고 있으며,
그 이름들로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그 이름들로 사물들과 일들을 구별하고 생각하고 말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잘 알 수는 없으나,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고, 그 때문에 그런 것에 익숙해져 있을 뿐이다.
(많은 언어철학자들이 이 사실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사실은 그런 사물들이나 일들은 애초에는 없었으며,
그것들은 본래는 무엇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다.
마치 강물의 흐름 속에 있는 물방울들과 같이,
서로 구별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는 어떤 것들일 뿐이다.
또 그것들은 작은 물들이 모여서 강과 바다가 되고,
강과 바다의 물이 다시 수증기가 되고 비가 되는 것과 같이,
그렇게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의 한 부분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의존하는 그것들을 구별하고, 그것들에 어떤 관계를 부여함으로써,
이것이니 저것이니 하는 것들이 비로소 생겨난 것이며,
우리는 그것들을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이름을 지어 부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어떤 관계를 형성하기 이전의 상태에서는,
곧 그것들이 서로 의존하지 않고 완전히 분리된 상태에서는,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
이것과 저것이 ‘있다, 없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
이곳과 저것이 ‘생겨난다, 없어진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연기법에 따르면, 모든 것이 본래는 ‘무상’[항상함이 없음]과 ‘비아[나가 아님]/무아[나가 없음]’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법은, 과거에서나 미래에서나 현재에서나, 어떤 공간의 세계에서나, 나아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부정과, 부정의 부정의 논리]
불경에 따르면 우리의 세계는 연기법으로 작용하기 때문데,
세계와 그 구성하는 것들의 존재와 생멸을 연기법으로 설명한다.
어떤 사물이나 일의 존재나 성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가능한 주장이 있다.
(어떤 사물이나 일을 일반화하여 ‘그것’이라 표현하기로 한다.)
(2) ‘그것’에 대한 가능한 주장들(가)
가. 그것은 A다. [A]
나. 그것은 B다. [B]
다. 그것은 A이기도 하고, B이기도 하다. [A & B]
라. 그것은 A도 아니고, B도 아니다. [非A 非B] (not A & not B)
그리고 B가 A의 부정이라면, (2)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3) ‘그것’에 대한 가능한 주장들(나)
가. 그것은 A다. [A]
나. 그것은 A가 아니다. [非A, not A]
다. 그것은 A이기도 하고, A가 아니기도 하다. [A & 非A], [A & not A]
라. 그것은 A도 아니고, A가 아닌 것도 아니다. [非A & 非非A], [[not A] & not [not A]]
(2)의 표현은, 예컨대, ‘동/서, 가다/오다, 주다/받다’ 등 방향이 반대되는 것에 대한 주장일 경우에 그러하다.
(3)의 표현은, 예컨대, ‘있다/없다; 생기다/없어지다, 늘어나다/줄어들다, 크다/작다, 깨끗하다/더럽다’ 등과 같은 어떤 성질이 서로 반대되는 것에 대한 주장일 경우에 그러하다.
그런데 (2)의 경우도, 조금 복잡해 지기는 하겠지만, (3)의 경우로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나아가 어떤 사물이나 일의 성질에 관한 주장도, 위와 동일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만일 (3)에서 ‘그것’이 ‘있음/없음’이거나 ‘상’이라면, (3)은 각각 다음과 같이 표시된다.
(4) ‘있음’에 대한 가능한 주장들
가. 그것은 있는 것이다. [있음]
나. 그것은 없는 것이다. [없음(이나 있지 않음)]
다. 그것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있음 & 없음(이나 있지 않음)]
라. 그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있음 (&) 없음(이나 있지 않음)이 아님]
(5) ‘상’에 대한 가능한 주장들
가. 그것은 상이다. [상]
나. 그것은 상이 아니다. [非상]
다. 그것은 상이기도 하고, 상이 아니기도 하다. [상 & 非상]
라. 그것은 상도 아니고, 상이 아닌 것도 아니다. [非상 (&) 非非상]
불경에서는 이 주장들 가운데, (2)-(5)에서 (가)-(라)의 모든 주장이 잘못된 견해이라고 말한다.
그 까닭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연기법의 논리와 언어]
우리가 보통 바라보는 세계는 이것과 저것이 이미 존재하는 ‘분별’의 세계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바라보는 세계는 연기법이 작동하는 세계이며,
이것과 저것이 생겨나기 이전의 ‘비분별’의 세계이다.
연기법의 세계에서는 이 세계의 어떤 사물이나 일의 성질을 무엇이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진실을 표현한 것이 될 수 없다.
어떤 사물이나 일의 성질에 대하여,
“그것은 무엇이다.”라고 하거나 “그것은 무엇이 아니다.”라고 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곧 분별의 세계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분별’의 지식을 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 (2)-(5)의 주장들에서 긍정의 (가)나 그것에 대한 부정인 (나)는 분별의 지식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표현들로는 비분별의 지식을 절대로 표현할 수 없다. (다)나 (라)로 표현해도 마찬가지이다.
[비상비비상처는 (라)로 표현한 것인데, (라)의 표현이 부처님께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조금이나마 가까운 표현일 것이다.
(2024. 01. 20,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