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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의보살경 제3권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 다함없다(2), 8방편, 지혜의 성품]
[여덟 가지 방편]
사리불이여, 무엇을 보살의 지혜가 있는 곳에서 여덟 가지 방편을 갖춘다고 하며,
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모든 쌓임[陰]의 방편과, 모든 경계의 방편과, 모든 입처[入:十二入]의 방편과, 모든 진리의 방편과, 모든 인연의 방편과, 삼세의 방편과, 모든 승(乘)의 방편과, 모든 법의 방편입니다.
[쌓임을 관찰하는 방편]
모든 쌓임의 방편이란 무엇인가?
모든 쌓임이란 말하자면 물거품 같고 물방울 같고 더울 때 생기는 아지랑이 같고 파초(芭蕉) 같고 허깨비 같고 꿈과 같고 부르는 소리의 메아리 같고 거울 속의 모습 같고 그림자와 같고 변화로 지어진 것과 같고 물거품의 성질과 같아서, ‘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고 수명도 아니고 남도 아니며 물질 또한 이와 같으니,
능히 이와 같이 아는 것을 보살이 물질을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또 느낌[受]은 마치 물거품과 같고, 생각[想]은 마치 아지랑이 같으며, 지어감[行]은 파초와 같고, 의식[識]은 허깨비와 같으니, 물거품 같고 아지랑이 같고 파초 같으며 허깨비 같은 성품에는 ‘나’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명도 없고 남도 없습니다.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도 다 그러하니,
능히 이와 같음을 안다면, 이것을 보살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모든 쌓임은 꿈과 같고 메아리 같고 거울에 비친 모양 같고 그림자 같고 변화로 된 것과 같으니, 변화로 된 것과 성품이 같다면 ‘나’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명도 없고 사람도 없습니다. 이 모든 쌓임 등이 다 그러하니,
능히 이와 같음을 안다면, 이것을 보살이 쌓임을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쌓임이라는 것은 곧 세간의 모양이며, 세간의 모양이라는 것은 무너질 수 있는 모양이며, 무너질 수 있는 모양이라면 곧 덧없는 성품이며 괴로움의 성품이며 ‘나’가 없는 성품이며 적멸의 성품이니,
이와 같이 알 수 있다면 이것을 보살이 쌓임을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경계를 아는 방편]
보살이 경계를 아는 방편이란 어떤 것인가?
법의 경계는 땅ㆍ물ㆍ불ㆍ바람의 경계인데 이 법의 경계에는 굳은 모양과 젖은[濕]모양과 더운[熱]모양과 움직이는 모양이 없으며,
법의 경계는 눈의 경계ㆍ귀의 경계ㆍ코와 혀와 몸과 뜻의 경계인데 이 법의 경계에는 보는 모양과 듣는 모양과 냄새 맡는 모양과 분별하는 모양과 알아차리는 모양과 아는 모양이 없습니다.
법의 경계는 빛깔의 경계와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법의 경계인데 이 법의 경계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양과 귀로 들을 수 있는 모양과 코로 냄새 맡을 수 있는 모양과 혀로 분별할 수 있는 모양과 몸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모양과 뜻으로 알 수 있는 모양이 없습니다.
법의 경계는 눈의 알음알이의 경계와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의 알음알이의 경계인데 이 법의 경계에는 눈의 알음알이로 아는 빛깔이 없고 나아가 뜻의 알음알이로 아는 법도 없습니다.
법의 경계는 물질의 경계이면서 법의 경계는 물질로 만들어진 모양이 아니며,
나아가 법의 경계가 또한 이와 같으므로 법의 경계와 나의 경계가 둘이 없고 분별도 없습니다.
또 법의 경계ㆍ욕심의 경계ㆍ물질의 경계ㆍ물질 없는 경계ㆍ나의 경계ㆍ생사의 경계ㆍ열반의 경계가 둘이 없고 분별도 없으며, 법의 경계와 허공의 경계ㆍ모든 법의 경계와 ‘나’의 경계와 ‘공(空)’의 경계가 모양도 없고 바람도 없고 지음도 없고 벗어나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으며 가진 바가 없는 것이 열반과 같으니, 허공과 열반과 모든 법들이 똑같아서 둘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함이 있는 법계가 함이 없는 법계에 들어가니, 이렇게 알고 또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을 보살이 경계를 아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들어감을 관찰하는 방편]
보살이 들어감[入]을 관찰하는 방편이란 어떤 것인가?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눈이 공하므로 ‘나’도 공하고 ‘나의 것’도 공하니,
왜 그런가?
이는 눈의 성품 가운데 ‘나’도 없고 ‘나의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의 공함도 또한 이와 같으므로, 이 들어감[入]을 관찰하는 자는 모든 법이 착하거나 착하지 않거나 간에 두 가지 모양이 없음을 보리니,
이것을 보살이 들어감을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눈에 들어감[眼入]과 빛깔에 들어감[色入]에 대하여 눈과 빛깔이 욕심을 여읨을 보되 욕심을 여의는 법을 증득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보살이 들어감을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귀에 들어감과 소리와 코와 냄새와 혀와 맛과 몸과 감촉과 뜻과 법에 들어감에 대하여 만약 욕심을 여읨을 보되 욕심을 여의는 법을 증득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보살이 들어감을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들어감[入]’이라는 것은 성현의 들어감과 성현의 들어감이 아닌 것이 있으니,
무엇을 성현의 들어감이라고 하는가?
도를 닦아 모으는 것이요,
무엇을 성현의 들어감이 아니라고 하는가?
도를 닦아 모으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보살이 도에 머물면서 도를 닦지 않는 자에게 대비심을 내어 그를 버리지 않고 도에 들어가게 한다면,
이것을 보살이 들어감을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진리를 관찰하는 방편]
보살이 진리[諦]를 관찰하는 방편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깊고 깊어 들어가기 어려운 것이니, 무엇이 들어가기 어려운 것인가?
예컨대 괴로움의 지혜ㆍ모임[集]의 지혜ㆍ사라짐의 지혜ㆍ도의 지혜 같은 것들 입니다.
괴로움의 지혜는 쌓임[陰]이 생겨남이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고,
모임의 지혜는 애욕의 원인이 끊어졌음을 관찰하는 것이고,
사라짐의 지혜는 무명 등의 모든 번뇌에는 화합이 있지 않음을 관찰하는 것이고,
도의 지혜는 평등하게 관찰할 수 있어서 모든 법에 의지하거나 집착함이 없는 것입니다.
보살이 만약 네 가지 성스런 진리[四聖諦]에 대해 이와 같이 관찰함을 짓되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증득을 얻지 않는다면, 이것을 보살이 진리를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또 세 가지 진리가 있으니,
세 가지는 무엇인가?
세속의 진리[俗諦]와 으뜸가는 진리[第一義諦]와 모양의 진리[相諦]입니다.
세속의 진리란 무엇인가?
세간에서 쓰는 언어와 문자와 가명(假名)의 법들이며,
으뜸가는 진리란 무엇인가?
어떠한 심행(心行)도 없는데 어찌 하물며 마땅히 언어나 문자가 있겠습니까?
모양의 진리란 무엇인가?
일체의 모양을 한 가지 모양과 같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한 가지 모양이란 바로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보살은 세속의 진리를 따르되 싫어하거나 게으름이 없고, 으뜸가는 진리를 관찰하되 증득함을 취하지 않고, 모든 모양의 진리가 한 가지 모양이요 모양이 없다고 관찰하니, 이것을 보살이 진리를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또 두 가지의 진리가 있으니,
그 두 가지란 세속의 진리와 으뜸가는 진리입니다.
세속의 진리라는 것은 괴로움과 모임과 도의 진리를 말하거나 세간의 언어와 문자와 가명의 법 등을 말하는 것이며,
으뜸가는 진리라는 것은 열반의 법에 대하여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니, 왜냐하면 법계와 더불어 그 성품이 항상 하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세속의 진리를 닦되 싫어하거나 게으르지 않으며, 으뜸가는 진리를 관찰하되 증득함을 취하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진리가 있으니,
그 한 가지란 무엇인가?
모든 법에 대하여 의지하거나 집착함이 없지만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집착하는 것이 있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살이 진리를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또 다섯 가지 쌓임의 괴로움이 있으니,
만약 다섯 가지 쌓임의 괴로움의 모양을 본다면 이것을 괴로움을 관찰한다고 하며,
괴로움이 바로 공(空)이니,
이것을 괴로움의 지혜로써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를 관찰한다고 합니다.
다섯 가지 쌓임의 모든 번뇌와 애욕의 원인과 소견[見]의 원인을 관찰한다면, 이것을 모임[集]이라고 하고,
애욕의 원인과 소견의 원인을 관찰하되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바라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다면,
이것을 모임의 지혜로써 성스런 진리를 관찰한다고 합니다.
다섯 가지 쌓임은 끝내 다하는 모양이어서 과거는 이미 사라졌고 미래는 아직 생기지 않았고 현재는 머물지 않으므로, 이것을 사라짐[滅]이라고 하니,
이와 같이 알 수 있다면,
이것을 사라짐의 지혜로써 사라짐의 성스런 진리를 관찰한다고 합니다.
만약 도(道)를 얻은 자가 사라짐의 지혜와 견주는 지혜[比智]를 증득하여 모아서 알고 나면, 이것을 도라고 하며,
만약 이 가운데서 모두 ‘공’한 성품임을 본다면, 이것을 도의 지혜로써 도의 성스런 진리를 관찰한다고 하니,
만약 이와 같이 네 가지 성스런 진리[四聖諦]를 관찰할 수 있다면,
이것을 보살이 진리를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모든 느낌[受]을 괴로움이라고 하고, 모든 느낌에 대하여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을 괴로움의 지혜로써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를 관찰한다고 하며,
느낌의 원인이 화합하는 이것을 모임[集]이라고 하고 느낌의 원인에 대하여 진실대로 아는 이것을 모임의 지혜로써 모임의 성스런 진리를 관찰한다고 합니다.
모든 느낌을 제거하여 느끼는 자와 느낌이 없으므로 느낌이 사라져 다함을 관찰하되 사라짐을 증득하지 않고 중생을 위해 교화한다면, 이것을 사라짐의 지혜로써 사라짐의 위대한 진리를 관찰한다고 하며,
느끼는 것이 있다면 이것을 도라고 하니, 비록 화합하기는 하지만 마치 뗏목의 비유에서와 같이 느끼는 바가 되지 않아서 도를 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도의 지혜[道智]로써 도의 성스런 진리를 관찰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알고서 네 가지 성스런 진리의 청정하고 평등함을 보니, 이것을 보살이 진리를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간략하게 말하면 태어남의 괴로움을 괴로움[苦]이라고 하니,
만약 태어나는 것에 대해 관찰한다면, 이것을 괴로움의 지혜로써 괴로움의 진리를 관찰한다고 하며,
인연 따라 생겨나는 것을 모임[集]이라고 하니,
만약에 존재가 존재 아님을 관찰한다면, 이것을 모임의 지혜로써 모임의 진리를 관찰한다고 합니다.
일체의 생겨남은 생겨남이 아니며, 이것은 곧 사라짐[滅]이 아니니,
만약 법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곧 사라짐도 없으므로 이것을 사라짐이라고 하며,
만약 이 사라짐을 관찰한다면 곧 이것은 사라짐의 지혜로 사라짐의 진리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따위를 미루어 구하고 헤아리고 생각하고 분별한다면, 이것을 도라고 하며,
이와 같이 구하고 헤아리는 것을 없애고서 법문에 든다면, 이것을 도의 지혜로 도의 진리를 관찰한다고 하니,
만약 지혜에 머물러 성스러운 진리를 증득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보살이 진리를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인연을 관찰하는 방편]
보살이 인연을 관찰하는 방편이란 어떤 것인가?
착하지 않은 생각을 모으기 때문에 무명이 모이고,
무명이 모이기 때문에 지어감이 모이고,
지어감이 모이기 때문에 의식이 모이고,
의식이 모이기 때문에 이름과 물질이 모이고,
이름과 물질이 모이기 때문에 여섯 감관이 모이고,
여섯 감관이 모이기 때문에 닿임이 모이고,
닿임이 모이기 때문에 느낌이 모이고,
느낌이 모이기 때문에 애욕이 모이고,
애욕이 모이기 때문에 취함이 모이고,
취함이 모이기 때문에 존재가 모이고,
존재가 모이기 때문에 태어남이 모이고,
태어남이 모이기 때문에 늙고 죽음이 모이고,
늙고 죽음이 모이기 때문에 근심과 괴로움이 모이니,
만약에 이러한 모든 괴로움이 무리져 모임을 안다면, 이것을 보살이 인연을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만약 이러한 모든 법의 무리져 모임에 머문다면, 더 기르지도 않고 짓는 것도 없고 싸움도 없고 주장함도 없고 속한 곳도 없고 얽매임도 없으니, 이른바 착한 법을 따르거나 착하지 않은 법을 따르거나 움직이지 않는 법을 따르거나 열반에 나아가는 법을 따르는 이와 같은 등의 법을 여실히 분별하는 것입니다.
만약 중생들의 근기의 양이 제한된 것이라면 이 여러 근기에 의지해서 지은 여러 가지 업에는 과보를 받는 것과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 원인을 잘 알고서 방편을 모아 쌓는다면, 이것을 보살이 인연을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착하지 않은 생각이 사라지면 무명이 사라지고,
무명이 사라지기 때문에 지어감이 사라지고,
지어감이 사라지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사라지고,
알음알이가 사라지기 때문에 이름과 물질이 사라지고,
이름과 물질이 사라지기 때문에 여섯 감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섯 감관이 사라지기 때문에 닿임이 사라지고,
닿임이 사라지기 때문에 느낌이 사라지고,
느낌이 사라지기 때문에 애욕이 사라지고,
애욕이 사라지기 때문에 취함이 사라지고,
취함이 사라지기 때문에 존재가 사라지고,
존재가 사라지기 때문에 태어남이 사라지고,
태어남이 사라지기 때문에 늙고 죽음이 사라지고,
늙고 죽음이 사라지기 때문에 근심과 고통과
모든 괴로움의 덩어리가 사라지니,
만약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덩어리가 사라짐을 안다면 이것을 보살이 인연을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일체의 모든 법은 인(因)에 속하고 연(緣)에 속하고 화합에 속하니,
만약 법이 인과 연과 화합에 속한다면 이 법은 곧 ‘나’와 남과 중생과 수명에 속하지 않으며,
만약 법이 ‘나’와 남과 중생과 수명에 속하지 않는다면 법수(法數)에 들어가지 않으니,
이와 같이 알 수 있다면, 이것을 보살이 인연을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닦는 모든 법이 보리를 돕고 보리에 편히 머물기 위해서라면 이러한 모든 인연이 다 사라짐을 보더라도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증득을 취하지 않으리니, 이것을 보살이 인연을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삼세(三世)를 관찰하는 방편]
삼세(三世)를 관찰하는 방편이란 어떤 것인가?
과거세의 자기 몸과 다른 사람의 몸과 착하고 착하지 않은 마음과 마음에 속한[心數] 법을 생각하되 착하지 않은 마음의 법은 꾸짖거나 헐뜯고 착한 마음에 속한 법은 다 위없는 보리에 회향한다면, 이것을 보살이 과거를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만약 미래세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에서 한결같이 보리의 도(道)를 생각하되 착한 마음의 바람[願]을 일으켜 다 위없는 보리에 회향하고, 가지고 있던 착하지 않은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마음에 들어오지 않도록 하여 이와 같이 발원한다면, 이것을 보살이 미래를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만약 현재세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에서 착한 생각 등의 지은 바 모든 업을 다 위없는 보리에 회향한다면, 이것을 보살이 현재를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방편을 쓴다면, 이것을 보살이 삼세를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또한 보살은 삼세가 공하여 아무 것도 없는 줄 잘 아니, 만일 이렇게 관찰한다면 삼세의 공함을 관찰하는 지혜의 힘 때문이며,
만약 삼세의 여러 부처님께 심은 한량없는 공덕을 다 위없는 보리에 회향한다면 이것은 방편의 힘 때문이니,
이러한 방편을 보살이 삼세를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또한 비록 과거는 이미 다한 법이라서 미래까지 이르지 않는다고 보더라도 항상 선을 닦아서 정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미래의 법은 비록 생겨남이 없다고 관찰하더라도 정진을 버리지 않아서 보리에 회향하기를 원하며,
현재의 법은 비록 생각 생각마다 사라진다고 관찰하더라도 그 마음은 보리에 나아가기를 잊지 않으니,
이러한 방편을 보살이 삼세를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과거는 이미 사라졌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는 머물지 않으니, 비록 이렇게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의 나고 사라지고 흩어져 무너짐을 관찰하더라도 언제나 선근 모으기를 버리지 않고서 보리법을 돕는다면, 이러한 방편을 보살이 삼세를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또한 모든 신통으로써 과거세에 지은 선근을 생각하되 생각하고 나서는 위없는 보리에 회향하며,
미래세에 아직 생기지 않은 선근을 생각하되 마음이 도모하는 일을 뜻대로 성취하기를 원하며,
현재세에 항상 선근을 낳되 위없는 보리의 도에 회향하기를 오로지 생각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방편을 보살이 삼세를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또한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 과거세에 지은 선근(善根)과 도를 도운 공덕을 생각하여 이른바 중생의 마음에 따라 제도할 수 있는 자는 그가 원하고 즐거워하는 대로 다 이미 교화하여 마쳤고, 미래세의 중생으로서 반드시 부처님과 여러 성인을 뵙고서야 제도될 자는 그 형태에 따라 맞추어서 다 제도되도록 하고, 현재세의 중생으로서 법을 듣거나 신통력을 보고서 제도될 자는 그 알맞은 것에 따라 다 교화하니, 곳에 따라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 나면 곧 삼세에 있어서 자기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성취하는데,
이와 같은 이익은 다 보리를 위해 걸림 없는 지혜를 갖추므로 이와 같은 방편을 보살이 삼세를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모든 승(乘)을 관찰하는 방편]
사리불이여, 보살이 모든 승(乘)을 관찰하는 방편이란 어떤 것인가?
세간에 세 가지 승(乘)이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성문승과 연각승과 대승입니다.
또 두 가지 승이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늘의 승과 사람의 승입니다.
보살이 성문승을 관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다면 성문승은 없었을 것이니, 왜냐하면 다른 이로부터 법을 듣고서 바른 소견을 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듣는다는 것은 계를 지니고 위의를 갖추는 것이니,
위의를 갖추기 때문에 계의 무더기를 원만히 갖추고,
계의 무더기를 원만히 갖추고 나면 선정의 무더기를 원만히 갖추고,
선정의 무더기를 원만히 갖추고 나면 지혜의 무더기를 원만히 갖추고,
지혜의 무더기를 원만히 갖추고 나면 해탈의 무더기를 원만히 갖추고,
해탈의 무더기를 원만히 갖추고 나면 해탈지견의 무더기를 원만히 갖추니,
이와 같은 방편을 보살이 성문승을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또한 성문승의 착하거나 착하지 않거나 움직이지 않는 행을 관찰하되 마음으로 항상 삼계(三界)를 헐뜯고 싫어하여 떠나버리며, 모든 행의 덧없고 괴롭고 ‘나’가 없고 고요한 열반임을 관찰하여 마침내 한 생각이라도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데 이르며, 언제나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마음으로 즐거움을 달게 여기지 않아서 다섯 가지 쌓임은 원수와 같고 열여덟 경계는 독사(毒蛇)와 같고 열두 가지 들어감[入]은 허공 덩어리와 같다고 관찰하여 모든 갈래에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으니, 만약 이와 같이 열어 보이고 분별할 수 있다면, 이것을 보살이 성문승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보살이 연각승을 관찰하는 방편이란 무엇인가?
연각이 세상에 출현할 때 그 행하는 바를 관찰하여 사실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연각이 행하는 바는 성문이 가지고 있는 공덕보다 뛰어나서, 정진하려고 하지 방일하지 않으며, 계를 지니되 들음이 적고, 여러 부처님을 공양하여 모시고 심부름하는 일이 많지 않으며, 중근(中根)이기 때문에 항상 싫증내는 마음이 있어서 해야 할 많은 일을 다 조금씩 밖에 하지 않으며, 시끄러움을 싫어하여 항상 멀리 떠나기를 좋아하고 홀로 고요한 데 머물러 위의가 질서 있고 출입이 정중하며 마음을 안정시켜 고요하고 사람들 간의 일을 간략하게 하되 중생을 위해 세간의 복 밭[田]을 나타냅니다.
그 마음은 12인연 관찰하기를 좋아하고, 항상 한 가지 법으로 세간에서 벗어난 열반을 생각하며, 자주 선정에 노닐어서 다른 이로부터 듣지 않고 자연히 조그마한 경계를 깨달아 알아 인연으로 도를 깨닫기 때문에 연각이라고 하는 것이니,
만약 이와 같이 열어 보이고 분별할 수 있다면, 이것을 보살이 연각승을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보살이 대승을 관찰하는 방편이란 무엇인가?
그 승(乘)은 한량이 없으니 이제 그 가운데에서 조금만 말하겠습니다.
이 승은 한량없이 모든 중생을 다 용납하여 받아들이니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며,
이 승은 모든 선근을 더욱더 자라나게 하니 한량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받아 쓸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며,
이 승은 모든 바라밀을 원만히 갖추니 중생의 심행(心行)에 따라 교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승은 도를 돕는 법[助道法]보다 뛰어나니 나아감이 걸림이 없어서 도량에 이르기 때문이며,
이 승은 평등하니 걸림 없는 광명이 모든 것을 비추어서 한량없는 중생이 다 받을 수 있기 때문이며,
이 승은 두려움 없으니 겁약(怯弱)한 도를 뛰어넘어 모든 부처님의 법을 다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며,
이 승이 모든 마구니와 외도와 삿된 무리를 파괴하니 12인연을 분명히 알고 보리의 깃발를 세워 돕기 때문입니다.
이 승은 모든 치우침과 있음과 없음과 상견과 단견과 모든 소견을 인연하여 일어나는 번뇌의 장애와 덮임과 의심과 희론을 제거할 수 있으니 부처님의 걸림 없는 참된 지혜를 얻기 때문이며,
이 승은 모든 진귀한 보배를 풍부히 갖추어 진실하고 헛되지 않아서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으니 대자비가 용맹스러워 본원을 성취하기 때문이며,
이 승은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열여덟 가지 함께 하지 않는 법을 원만히 갖추니 상호(相好)로써 몸과 입과 뜻을 장엄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방편을 보살이 대승을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모든 법을 관찰하는 방편]
보살이 모든 법을 관찰하는 방편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함이 있거나 함이 없거나 간에 보살은 그 가운데서 방편을 잘 아는 것입니다.
함이 있음을 잘 관찰하는 방편이라는 것은, 모든 몸의 착한 업ㆍ입의 착한 업ㆍ뜻의 착한 업을 위없는 보리에 회향하기를 원하는 것이니 이것을 함이 있는 방편이라고 하며,
만약 몸과 입과 뜻의 업을 보리의 모양과 같다고 관찰하여 보리에 회향한다면 이것을 보살이 함이 없음을 관찰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또한 함이 있는 방편이란 다섯 가지 바라밀을 능히 모으는 것이니, 이것을 함이 있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반야바라밀은 그 성품이 본래 함이 없음을 알면서도 무리져 모인 것에 대해 끝내 싫어하거나 천하게 여김이 없어서 모든 바라밀을 원만히 갖추려고 하며,
선근(善根)이 번뇌가 없는 보리와 같음을 깊이 알고도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하기를 원한다면, 이것을 보살의 함이 없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또한 함이 있는 방편이라는 것은 걸림 없이 평등한 마음에 머물러서 네 가지 거둬주는 법으로 중생을 거두는 것이니, 이것을 함이 있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함이 없는 방편이라는 것은 중생의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아무런 바랄 것도 없음을 잘 이해하며, 네 가지 거둬주는 법이 함이 없는 해탈과 같음을 알아서 일체종지에 회향하는 이것을 함이 없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또한 함이 있는 방편이란 모든 번뇌와 생사가 서로 연속됨을 끊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고, 가지고 있는 선근이 보리를 돕는 것을 끊어지지 않게 하여 마침내 조그마한 번뇌도 행하지 않는 데 이르니, 이것을 함이 있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함이 없는 방편이란 공(空)하고 모양 없고 바람이 없음을 관찰하더라도 이 세 가지 공함이 바로 도를 돕는 방편임을 알기 때문에 증득하지 않을 수 있으니, 이것을 함이 없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또한 함이 있는 방편이란 비록 삼계에 있더라도 삼계의 번뇌에 더럽혀지지 않으니 이것을 함이 있는 방편이라고 하며,
함이 없는 방편이란 무엇인가 하면 비록 삼계를 벗어나더라도 벗어남을 증득하지 않으니, 이것을 함이 없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부처님 말씀과 같이 모든 법의 방편을 알면 일체종지를 원만히 갖출 수 있으니, 왜냐하면 일체종지는 한량없고 그지없어 바른 생각과 지혜의 방편을 원만히 갖추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모든 법의 방편이라고 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지혜에 인연한 여덟 가지 방편이라고 하니,
사리불이여, 이 여덟 가지 방편은 보살의 다함없는 지혜를 거두어들일 수 있습니다.
[지혜의 성품]
사리불이여, 이 지혜는 이해할 수 있으니 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을 분명하게 관찰하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화살과 같으니 법을 딱 맞게 쓰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행할 수 있으니 성인의 법이 현존하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진실로 이해함이니 모든 소견과 번뇌의 장애와 덮개들을 끊어버리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바람을 결정하니 본래 구하던 것을 다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 지혜는 녹여서 사라지게 하니 모든 번뇌(煩惱)와 열뇌(熱惱)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니 법의 즐거움을 끊지 않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바르게 생각하니 인연한 이치를 통달하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편안히 머무르니 37조도법(助道法)을 갖추기 때문입니다.
또 이 지혜는 모양을 얻으니 행하는 승(乘)과 같이 모든 것을 원만히 갖출 수 있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모양을 이해하니 그 성품의 슬기로움이 비추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제도할 수 있으니 모든 번뇌의 흐름을 건너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정진할 수 있으니 바른 선정과 결정된 선정을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 지혜는 바르게 보니 모든 착한 법을 원만히 갖추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환희하니 번뇌를 따르는 자를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가장 훌륭하니 정수리의 법을 얻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미묘하니 자연스럽게 깨닫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돌아다니지 않으니 삼세를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중생들을 거두어주니 모든 방편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 지혜는 끊을 수 있으니 모든 생각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방일하지 않으니 어둡고 어리석음을 떠나버리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처음의 시작이니 모든 착한 법을 일으켜 행하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일으킬 수 있으니 모든 승(乘)을 갖추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비추어 밝히니 무명의 그물망을 제거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 지혜는 눈[眼]을 주니 모든 중생이 그들이 아는 바대로 밝음을 얻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의지하는 것이 없으니 눈과 빛깔을 벗어나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으뜸이 되는 이치이니 진실을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다툼이 없으니 잘 분별하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명료하니 지혜의 문에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또 이 지혜는 다함이 없으니 두루 행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거스르지 않으니 12인연을 보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풀어버리고 벗어나니 모든 얽매이고 묶인 것을 잘 끊기 때문이며,
이 지혜는 다른 것이 섞이지 않았으니 모든 장애되는 법을 여의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는 심행(心行)을 이와 같은 지혜로 다 비추어 통달할 수 있으며, 중생의 심행을 밝히는 것과 같이 모든 번뇌의 문을 슬기롭게 생각하여 아니, 이와 같은 지혜로 모두 다 분명하게 관찰하고 통달해서 성문과 연각과 보살과 여래가 가지고 있는 지혜까지도 이 보살은 다 두루 배울 수 있습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의 다함없는 지혜라고 하니, 이 다함이 없는 혜(慧)로 다함이 없는 지(智)를 갖추기 때문입니다.”
이 법을 연설할 때 3만 2천의 보살들이 선근(善根)이 무르익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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