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영락경 제3권
6. 식계품[2]
[위없는 선정]
또다시 여래에게는 위없는 정의 뜻이 있다.
어떤 것을 위없는 정의 뜻이라고 말하는가?
이른바 ‘위없는 정’이란 마음에는 위와 가운데와 아래가 있지만, 행하는 사람은 정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고 들고 길고 짧은 숨이 없다.
다만 찰토를 분별하면서 전심(專心)과 한뜻[一意]으로 지나간 세상ㆍ오는 세상ㆍ지금 세상을 관하는데, 왜냐하면 내가 화한 바이자 내가 화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다시 스스로 사유하기를
‘설사 내가 한가하고 고요한 곳에 있을지라도 중생을 분별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의당치 않다.
이제 마땅히 무수한 찰토에 가서 스스로 교화하고 남도 교화하여서 나의 소원을 이루겠다’고 하니,
이것을 최초의 정(定)은 훼손할 수 없다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엔, 행하는 사람이 처음으로 정의 뜻에 들어가서 속으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고통이 있고 즐거움이 있는 것은 모두 몸의 근본을 말미암으니,
이미 이 행을 지났다면 다시 마땅히 선전해서 저 중생으로 하여금 모조리 알게 하리라’고 하니,
이것을 정(定)에 들어서 두 행[二行]을 성취하였다고 말하느니라.
그 다음 마음의 법은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니다.
몸이 있다거나 몸이 없다는 상념으로는 신통을 얻어서 시방을 노닐며 교화하지 못하니, 뜻을 거두어 스스로 단속해서 그 종성(種姓)을 청정히 한다.
이것을 정의 뜻이 법식을 훼손하지 못한다고 말하느니라.
마음ㆍ뜻ㆍ식으로 지관(止觀)을 사유하면 아(我)가 바로 무아(無我)이니, 하물며 중생이 있겠는가?
먼저 공(空)을 스스로 알고서 문득 중생을 신족의 도(道)로써 관하면, 심신(心神)은 가서 교화하지만 몸은 거기에 가지 않느니라.
[허공의 지혜를 닦는 것 열 가지]
다시 시방의 여러 부처님 세계에서 이 정의 뜻으로 무수한 백천 중생을 제도하니, 거기에서 다시 열 가지 허공 지혜를 닦는다.
어떤 것들이 열 가지인가?
설한 법의 가르침으로 마군의 궁전을 꺾어 부수고, 도량에 나아가서 한량없는 깨달음을 이루고,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더하고 덜함도 없느니라.
족성자여, 이것을 허공의 지혜를 닦는다고 말하느니라.
다음에 족성자여, 처음에 외도와 다른 학파를 교화하여 그들의 삿된 업을 버리고 바른 소견을 세우게 함으로서 모두 귀의하게 하여 다시는 간탐하고 시기하는 일이 없게 하니,
이것을 허공의 지혜를 닦는 것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또 세존께서 중생의 무리를 교화하시되 그들의 원하는 바를 따라서 모두 갖추게 하시고, 비록 이 법문을 설하더라도 마음에 집착한 바가 없으니,
이것을 허공의 지혜를 닦는다고 말하느니라.
다시 걸림 없는 지혜의 신통의 도로써 한량없는 세계에 노닐어 온갖 법을 펴서 중생을 교화하되 중생을 보지 않으며 교화도 보지 않으시니,
이것을 허공의 지혜를 닦는다고 말하느니라.
다시 여래의 지혜가 있는데, 그 이름을 회공(懷空)이라고 부른다.
법계를 성취하여 근본성품을 헐지 않고, 마음을 허공처럼 지녀서 염오(染汚)를 내지 않으니,
이것을 허공을 닦는 지혜라고 말하느니라.
여래등정각은 한 몸으로 허공계에 노니시거나, 혹은 무수한 몸으로 노닐거나 다시 멸진열반을 나타내 보이시더라도 하나의 몸에 집착하지 않고, 약간의 상념도 일으키지 않으시며, 또한 다시 멸진열반에도 집착하시지 않으시니,
이것을 허공의 지혜를 닦는다고 말하느니라.
모든 부처님께서는 일흔두 가지의 걸림 없는 변재와 열네 가지 설상보(舌相報)로 중생을 교화하여서 지혜가 걸리거나 막히지 않으므로 중생들을 모두 지혜의 밝음[慧明]을 이루게 하시나니,
어떤 것들이 일흔두 가지 걸림 없는 변재인가?
족성자여, 여래께서 처음으로 공덕상(功德相)의 근본을 닦으시면서 큰 서원을 스스로 발하시기를
‘만일 내가 나중에 한량없는 등정각을 이루면,
태어난 국토의 중생들은 무명이나 음행ㆍ화냄ㆍ어리석음의 이름조차 듣지 않게 하여 나의 국토를 허공처럼 청정케 하고, 정거천(淨居天)처럼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알게 하며,
뜻은 도에 나아가되 중간에 걸림이 없게 할 것이며,
또한 다시 여덟 가지 한가함이 없는 곳에 태어나지 않게 하고,
부귀한 가운데서 살되 스스로 잘난 체하지 않게 하며,
낮고 천한 이를 더럽다 하지 않게 하며,
그 가운데서 뜻을 거두어서 보시의 복을 행하게 하리라.
즉 음료[漿]를 구하는 이에겐 음료를 주고, 밥을 구하는 이에겐 밥을 주며,
나라나 재물이나 아내나 자식도 다 보시해 주어서 마음의 보시가 걸림이 없고 어지러운 상념을 내지 않게 하리라.
다시 중생에게 완벽히 갖춰진 계를 지니게 하고,
정진의 일심(一心)으로 여섯 가지의 중한 법을 닦게 하리라.
만일 어떤 중생이 백천 가지의 괴로움을 만나면, 문득 나아가서 제도하여 추락으로 성현의 품류를 잃지 않게 하리라’라고 하니,
이것을 여덟 번째 법으로 허공의 지혜를 닦는다고 말하느니라.
여래등정각께서 법륜을 굴리고자 하면,
먼저 등정(等定)에 들어서 몸과 뜻을 스스로 거두어 잡으시고 때가 이른 줄 스스로 아나니,
‘나는 이제 마땅히 중생의 무리들과 함께 위없는 법륜을 굴려야 한다’라고 하여
마음이 6신통에 노닐면서 낱낱의 털구멍으로부터 온갖 광명을 놓으신 뒤에 이내 위없는 법륜을 굴리시는데, 일어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서 집착하는 법이 없고, 일상(一相)이 무상이라서 물들어 더럽히는 법도 없다.
설하신 바가 허공과 같아서 말의 자취가 나타나지 않고, 중생에게 더함이 있고 덜함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이것을 아홉 번째 법으로 허공의 지혜를 닦는다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여래께서는 무생(無生) 법계로부터 등정각을 이루어서 온갖 법을 허깨비 같고 화현(化現)같이 관해서,
도과를 성취한 이를 보지 않고 신통 지혜의 분별을 잃지 않고 여래의 10력에도 또한 염착하지 않으시니,
이것을 열 번째 법으로 허공의 지혜를 닦는다고 말하느니라.”
[공행의 집착 없는 법]
이때에 부처님께서 사부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각각 스스로 여래 앞에서 공혜(空慧)의 집착한 바 없는 법을 말하여라.”
그때 공행(空行)이라는 이름을 가진 보살이 있었다. 여기서부터 동남쪽으로 56항하 모래 수효의 불국토들이 있는데, 그 나라로부터 와서 이 땅에 이르렀다.
그 보살이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국토가 청정하여서 법설(法說)과 의설(義說)이 없고, 청정하고 청정하지 않음이 다 허공과 같음을 아나니,
이것을 공혜(空慧)의 집착 없는 법이라고 말하나이다.”
무아보살(無我菩薩)이 아뢰었다.
“봄[見]이 없음도 공이 아니고 봄도 또한 공이 아니며, 봄을 보지 않고 또한 봄 없음도 보지 않으니, 이것을 공혜의 집착 없는 법이라고 말하나이다.”
법주(法住)보살이 아뢰었다.
“행의 자취를 세우지 못하였으면 물들고 더러운 식을 내지만, 헤아릴 수없는 겁이 본래 식의 성품이 없나니,
이것을 허공의 집착 없는 법이라고 말하나이다.”
과행(過行)보살이 아뢰었다.
“몸ㆍ입ㆍ뜻에서 여러 가지 악을 짓지 않고, 정(定)으로 상념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것을 공행의 집착 없는 법이라고 말하나이다.”
무행(無行)보살이 아뢰었다.
“법신은 다함이 없어서 의지하여 집착함을 보지 않고, 정(定)의 마음은 한뜻일 뿐이오니,
이것을 공혜의 집착 없는 행이라고 말하나이다.”
보장(寶藏)보살이 아뢰었다.
“앞과 뒤의 법계의 처소를 보지 않고, 또한 다시 죄와 복, 악의 과보를 보지 않으니, 이것을 공혜의 집착 없는 행이라고 말하나이다.”
습고(習苦)보살이 아뢰었다.
“여러 부처님께서는 지나간 세상ㆍ오는 세상ㆍ지금 세상을 다 알아서 자재한 지혜에 들어가 망령된 견해를 일으키지 않으시나니,
이것을 공혜의 집착 없는 행이라고 말하나이다.”
자의(慈意)보살이 아뢰었다.
“나라는 것은 형상이 없으므로 전심(專心)으로 도만을 행하면, 다른 상념은 없고 의지함 없고 집착 없는 법만이 자연히 일어났다 멸하리니,
이것을 공혜의 집착 없는 행이라고 말하나이다.”
보계(寶計)보살이 아뢰었다.
“네 가지 무아행은 집착도 없고 물듦도 없으며, 몸이 있으면 괴로움이 있고 식상(識想)도 또한 괴로움이라고 이해해야 일어나거나 멸하지 않으니,
이것을 공혜의 집착 없는 행이라고 말하나이다.”
선산(善算)보살이 아뢰었다.
“온갖 법의 수 있음[有數]과 수 없음[無數]을 보지 않으니,
어떤 것이 온갖 법의 수 있음과 수 없음인가?
세속은 수가 있음이요 도(道)는 수가 없음이며, 유위는 수가 있음이고 무위는 수가 없음이니,
수와 수 없음을 보지 않는 것을 공혜의 집착 없는 행이라고 말하나이다.”
진생(盡生)보살이 아뢰었다.
“온갖 법은 본래 생겨남이 없어서 또한 생겨나는 것을 보지 않으며,
청정해도 청정한 상념이 없고, 생사도 이미 다해서 영영 멸하여 일어나지 않으니,
이것을 공혜의 집착 없는 행이라고 말하나이다.”
범행(梵行)보살이 아뢰었다.
“세 가지 삼매를 익혀서 받을 몸을 염(念)하지 않고,
공을 염하여서 공을 여의지 않으며,
상 없음[無相]을 염해서 상 없음을 여의지 않으며,
원함 없음[無願]을 염해서 원함 없음을 여의지 않으며,
또한 다시 청정한 복 받음을 염하지 않으니,
이것을 공혜의 집착 없는 행이라고 말하나이다.”
광상(光相)보살이 아뢰었다.
“3독(毒)이 어둠의 법이 된다고 분별하고, 세 가지 통달이 청정한 법이 된다고 보지 않으니,
이것을 공혜의 집착 없는 행이라고 말하나이다.”
소작(所作)보살이 아뢰었다.
“일상(一相)을 보지 않고 무상을 분별하며, 고(苦)도 보지 않고 고를 여읨도 보지 않으며, 고와 고 아닌 것도 없고 또한 짓는 바도 없음이니,
이것을 공혜의 집착 없는 행이라 말하나이다.”
불수형(不受形)보살이 아뢰었다.
“4대(大)의 근원이 없으므로 또한 경계의 소재를 보지 못하고, 한결같이 무위를 향하면서 세 가지 뜻을 내지 않으니,
이것을 공혜의 집착 없는 행이라 말하나이다.”
무등(無等)보살이 아뢰었다.
“세상의 고통과 즐거움을 떠나서 여덟 가지 법에 집착하지 않고,
칭찬하고 기림을 보더라도 기쁨으로 여기지 않으며,
설사 헐고 비방함을 보더라도 근심걱정을 품지 않아서 참는 마음이 땅과 같으니,
이것을 공혜의 집착 없는 행이라고 말하나이다.”
무구(無垢)보살이 아뢰었다.
“안의 6정(情)이 밖의 6진(塵)을 짓는 것을 보지 않고,
여섯 티끌과 여섯 정이 상대가 됨을 보지 않으니,
이것을 공혜의 집착 없는 행이라고 말하나이다.”
중관(重觀)보살이 아뢰었다.
“바깥의 색(色)이 안의 식(識)을 일으키지 않고, 식 또한 바깥의 색에 집착하지 않으며,
식은 내가 색이 됨을 알지 못하고, 색은 내가 식이 됨을 알지 못하며,
소리ㆍ향기ㆍ맛과 세활[細滑:觸覺]과 법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법은 내가 식이 됨을 알지 못하고 식은 내가 법이 됨을 알지 못하며,
일체의 모든 법도 각각 서로 알지 못함이니,
이것을 공혜의 집착 없는 행이라고 말하나이다.”
원리(遠離)보살이 아뢰었다.
“5온(薀)에 물듦이 있고 집착함이 있음을 보지 않으니,
까닭인즉 5온의 성품과 여러 가지 법의 성품은 항상 머물러서 변하여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공혜의 집착 없는 행이라고 말하나이다.”
현호(賢護)보살이 아뢰었다.
“온갖 법의 총지(總持)로 바람[望] 있음과 바람 없음을 보지 않고,
설할 수 있는 법과 설할 수 없는 법을 보지 않으며,
중생을 거느려서 옹호하되 불퇴전(不退轉)을 세우니,
이것을 공혜의 집착 없는 행이라고 말하나이다.”
보래(寶來)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법은 항상 정(定)이라서 약간(若干)의 분별도 없으며,
또한 부처님 법을 분별하지 않아서 보살의 법ㆍ세속의 법과 도의 법ㆍ형상이 있는 법과 형상이 없는 법ㆍ옹호하여 지닐 수 있는 법ㆍ옹호하여 지니지 못할 법도 또한 분별함이 없으니,
이것을 공혜의 집착 없는 행이라고 말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