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보요의론 제5권
[6바라밀을 닦는다]
『아사세왕경(阿闍世王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시여, 일체지(一切智)의 마음은 근본이 끊어지지 않으며 이와 같은 근본은 반드시 정진(精進)을 일으키니, 부지런히 가르쳐 보이고자 생각합니다.
보시(布施)는 만족하여 싫어함이 없으니 일체지의 지혜에 회향하기 때문입니다.
지계(持戒)는 만족하여 싫어함이 없으니 일체 유정들에게 회향하기 때문입니다.
인욕(忍辱)은 만족하여 싫어함이 없으니 부처님의 모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정진(精進)은 만족하여 싫어함이 없으니 모든 선근을 부지런히 닦아 모으기 때문입니다.
선정(禪定)은 만족하여 싫어함이 없으니 대상과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지혜(智慧)는 만족하여 싫어함이 없으니 일체의 것을 잘 생각하여 구별하고, 법의 이익을 위하는 까닭에 일체처(一切處)에서 수명(壽命)을 풍부하게 즐기되, 일체의 것에 대해 한결같이 잘못하여 잃음이 없습니다.’”
[평등한 마음을 일으킨다]
아울러 또한 정행(正行)을 닦는 사람은 반드시 일체의 유정들에 대해 평등한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동자야,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한 법을 두루 갖추니 만약 이러한 공덕을 이루는 사람은 즉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속히 깨달아 얻는다.
무엇을 한 법이라고 하는가?
동자야, 이른바 보살마하살은 일체 유정들에 대해 평등한 마음과 이익되는 마음과 가로막음이 없는 마음과 독이 없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한 법이라고 한다.’”
[이익을 남기는 일 등을 버린다]
만약 정법(正法)의 행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이익을 남기는 일 등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
『개발내심경(開發內心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익을 남기는 모든 일을 반드시 엿보아 살펴야 한다. 그 집착하는 바로써 정념(正念)을 잃기 때문이다.
만약 어리석음이 일어날 때는 자신의 이익을 애써 이루기 때문이며,
만약 아첨이 일어날 때는 모든 부처님들께서 가르쳐 타이르는 것을 능히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만약 교만함과 아만심이 일어날 때는 오로지 험악한 근본 바탕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든 선근을 무너뜨려 없애는 까닭에 지혜로운 사람은 반드시 이익을 남기는 일을 엿보아 살펴야 한다.
비록 당장은 받아서 얻는 바가 있으나 그 뒤의 세상에서는 거두는 이익이 전혀 없다.
한량없는 선정(禪定)을 한결같이 멀리 여의고 반드시 지옥과 아귀와 축생 가운데에 떨어지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반드시 이익을 남기는 일을 거듭 엿보고 살피되, 마치 물이 흘러가면서 끊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할 일이며 일찌감치 엿보아 살펴서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 적게 바라고 만족할 줄 알라.”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비유하자면, 한 무리의 벙어리 양떼가 저 니구율타(尼拘律陀) 나무를 맴도는 것과 같다.
그 가운데 벙어리 양 한 마리가 홀로 사슴 떼가 있는 곳으로 가서 바위 사이의 사슴 목동의 자리나 혹은 저 사슴 무리의 앞에까지 이르러 그 머리를 굽신거리며 무릎을 꿇고 앉아 그들의 음식을 구걸하면서 아울러 보호를 청하고는 돌아오니, 다른 벙어리 양들은 한결같이 가벼이 여기고 업신여기나 어떤 한 무리는 칭찬한다.
이익을 남기고 거드름 피우는 비구도 역시 이와 같다.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을 일으켜 대중을 벗어나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하여 혼자 성(城) 안의 마을로 들어간다.
돌아가면서 음식을 빌고 다시 목숨을 구해 주기를 구하고는 저 최상의 청정한 음식을 얻어 자신의 몫은 이미 먹고 구걸한 음식을 가지고 승원(僧園) 안의 비구들 자리로 돌아와서 비구들에게 말한다.
‘모든 존자(尊者)들이여, 내가 오늘 재가신자의 집 안에서 목숨을 구해 받고 저 최상의 청정한 음식을 받았습니다. 나는 지금 그 구걸한 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장로(長老)들의 식사법이고 나를 버리는 법이니, 그대 모든 존자들께서는 만약 먹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와 같이 말하고 나면 그 가운데 나이 적은 비구들이 있어서 한결같이 가벼이 여기고 업신여긴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만약 이와 같이 추악한 말을 내는 사람은 한결같이 이익을 남기는 등의 일을 하는 것이니, 경에서 널리 설하는 바와 같다.
여기에서 아첨과 속임수의 두 가지 법을 멀리 여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무열뇌경(無熱惱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두 가지의 법이 일체지의 마음에 대해 장애가 된다.
말하건대, 첫째는 아첨이고, 둘째는 속임수이다.
두 가지의 법이 장애가 없다.
첫째는 정직(正直)이고, 둘째는 아첨 없음이다.
[선지식을 가까이한다]
만약 모든 정행을 갖추어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반드시 선지식을 친하고 가까이해야 한다.
선지식을 원인으로 하는 까닭에 모든 정행을 이룬다.”
어떤 경전 가운데에서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가?
『승생승만해탈경(勝生勝鬘解脫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선지식을 원인으로 하는 까닭에 일체의 보살행과 법을 유출(流出)한다.
선지식인 사람은 큰 위력이 있어서 능히 모든 보살을 원만히 이루기 때문이다.
선지식인 사람은 능히 일체 보살의 선근을 낳기 때문이다.
선지식인 사람은 능히 일체 보살이 닦고 배우며 행한 바를 널리 얽어 모으기 때문이다.
선지식인 사람을 근본으로 삼아 능히 일체 보살의 깊은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선지식인 사람은 능히 지키고 보호하여 일체의 복덩어리를 불리어 늘리기 때문이다.
선지식인 사람은 사랑스럽고 즐거운 바로서 일체 부처님들의 보리(菩提)를 얻기 때문이다.
선지식인 사람은 능히 거두어 가져서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악업으로써 나아갈 곳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며, 대승에서 물러나 되돌아가지 않도록 하며, 보살이 배울 것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여 어리석은 사람들과 평범한 사람들의 지위를 넘어서게 하되, 또한 성문과 연각의 법도 버리지 않고 다시 보호한다.
선지식인 사람은 도(道)를 잃은 모든 사람들을 다시 정도(正道)로 돌아가도록 하며 정법을 듣는 사람을 이끌어 일체 불법에 들어가 알도록 한다.
선지식은 어머니와 같아서 능히 일체 중생을 한결같이 불법을 믿는 집안에 태어나도록 한다.
선지식은 아버지와 같이 널리 유정들을 도와서 길러 주고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다.
선지식은 유모(乳母)와 같이 모든 것을 잘 보호하여 죄업을 여의도록 하기 때문이다.
선지식은 일꾼이 열심히 일하는 것과 같이 능히 삶과 죽음의 커다란 고통의 바다로 들어가 구하여 건져 주기 때문이다.
선지식은 뱃사공과 같이 유정들을 싣고 일체지(一切智)의 지혜라는 크고 보배로운 섬으로 실어다주기 때문이다.
정행(正行)을 닦는 모든 사람들이 만약 선지식 자리에 찾아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와 같이 마음을 먹어야 한다.
그 육신과 마음을 청정히 하고 부지런하고 용맹히 하며, 그 마음이 땅과 같아야 하니 한결같이 능히 모든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며,
마음이 일꾼과 같아야 하니 가르쳐 주고자 하는 바를 따라 한결같이 행해야 하기 때문이며,
그 마음이 개와 같아야 하니 언제나 경계하며 짖어대어 지켜 주고 막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자신을 관찰하되 병에 걸린 사람인 듯 생각하고 선지식은 의사인 듯 생각하며,
가르쳐 보여 주는 법은 약인 듯 생각하고 가르침에 의지하여 행하는 것은 병이 나은 것으로 생각하라.
무릇 이와 같은 것들은 선지식으로 인하는 까닭에 깊이 마음의 청정함을 얻어서 스스로 모든 선지식이 가르치고 시키는 법을 잘 닦고 행하면 바로 일체의 선근을 능히 불려 주고 길러 준다.
마치 설산왕(雪山王)이 일체의 약이 되는 풀과 나무에 한결같이 의지하는 것과 같다.
선지식에 의지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능히 일체의 불법(佛法)의 큰 그릇을 이루어 준다.
또한 큰 바다가 여러 물줄기의 돌아가는 곳인 것과 같으니 보살은 선지식으로 인하여 그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이며, 바로 일체 보살의 행법과 불법을 원만히 이루어 얻기 때문이다.”
『보적경(寶積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섭이여, 마치 사람들이 배를 타고 큰 바다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해류(海流) 가운데에서 갑자기 배가 깨져 그 가운데에서 혹은 넓은 판자 하나를 의지하거나 혹은 서까래를 의지하여, 의지하는 바를 따라 무사히 바닷가에 닿는다.
가섭이여, 보살이 일체지의 마음이라는 배를 타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갑자기 흐름 가운데에서 보살승(菩薩乘)의 법이 깨어져 잃더라도 만약 선지식을 만나 의지하면 그는 즉시 일체지의 마음을 다시 얻어 모든 바라밀다법(波羅蜜多法)을 타고 실려 가서 법계(法界)의 섬에 가닿는다.
가섭이여, 있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은 한결같이 선지식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모든 선지식을 공양하고 받들어 모시는 바를 최상으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