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 중권
[작은 먼지가 더럽히는 것의 비유]
작은 먼지가 더럽히는 것에 비유한 것은 무엇을 비유하기 위한 것이며, 무슨 일을 밝히려고 한 것인가?
답하였다.
저 화신은 법계의 처소에서
한결같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것은 여래께서는 법계의 처소에서 한곳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각기 다른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닌 성품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밝히기 위하여 일부러 그런 비유를 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작은 먼지로 장차 먹[墨]을 만든다는 말은
비유로 법계를 나타낸 것이다.
[세계가 검게 된다고 한 것의 비유]
또 세계가 검게 된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을 밝히기 위한 비유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여기에서 먹을 만드는 일을 논한 것은
번뇌의 멸진(滅盡)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무리[聚]의 성품도 아니고 모이는[集] 성품도 아니라는 것은
이것이 동일한 성품이 아님을 밝힌 것이며
저것이 다 합집(合集)된 성품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각기 다른 성품도 아님을 밝힌 것이다.
검게 된다는 것에 비유한 것은 존재하는 먼지[塵埃]가 너무도 많고 지극히 미세한 성품이어서 한 장소의 것이라고만 할 수 없고,
그 덩어리는 모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물건이어서 한 가지의 일만도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다른 성품도 아니니,
다 합집(合集)된 것이므로 이것은 따로따로 끊어져 분할될 이치가 없다.
이와 같아서 모든 불세존께서는 이 법계에서 번뇌의 장애[煩惱障]가 다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만 할 것이다.
‘한 곳에 머무는 성품도 아니요 또한 각기 다른 곳에 흩어져 있는 성품도 아니다’라는 것은 곧 삼천대천세계를 겸술(兼述)한 것이다.
덩어리의 성품이 아니라느니, 덩어리의 성품이라느니 하는 비유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래께서 설하신 것은 덩어리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지극히 미세한 먼지의 모임이라고 한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을 나타낸 것인가?
만약 그것이 한 덩어리의 물질이어서 이것이 곧 하나라고 한다면 마땅히 지극히 미세한 것이 모여서 된 덩어리라고 이름 해서는 안 될 것이며,
또한 만약 이것이 한 세계라면 마땅히 삼천대천세계라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것은 아마도 덩어리일 것이라고 하여 집착한다.
그래서 여래께서 집착할 일이 아니라고 설하셨다.
“덩어리라고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닌데 부질없이 집착하는 까닭에 이것을 덩어리라고 하여 집착하는구나”라고 설하셨으니,
이것은 곧 이 밖에 또 다른 무상정지(無上正智)가 없음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또한 ‘무슨 까닭에 모든 어리석은 범부의 무리들은 실제로 덩어리가 없는데 덩어리라고 집착하는가?’ 하는 의혹이 생길 것이므로
이러한 의혹을 없애게 하기 위하여
“그것을 덩어리라고 집착하는 사람은 다만 속된 논설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것 등은 무엇을 밝히려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다만 속된 말인 줄 알지 못하여
여러 어리석은 이들이 부질없이 집착한다.
[아견 등은 실체가 없다]
“묘생아, 모든 사람은 말하기를
‘여래께서 아견(我見) 등을 선설하셨다’라고 하였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을 밝히려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아집(我執)과 법집(法執) 이 두 가지를 끊었다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지가 본래 없는 것임을 깨달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네.
아집과 법집 두 가지를 말하지만 이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 두 가지를 끊었다고 말하더라도 또한 보리를 증득할 수는 없다고 하니,
이것은 과연 누가 끊으며 누가 얻는다는 것인가?
답하기를,
저 두 가지 소견을 끊음으로 말미암아 이 두 가지 견해도 곧 제거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이런 까닭에 견(見)이니 견이 아니니 하면서
아무 경계도 없는 것에 허망하게 집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나라고 하는 실체란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나라는 것이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으므로 여래께서 잘못된 견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경계란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나라고 집착하는 경계는 원래 없는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그런 까닭에 아견(我見)이라고 이름한다”고 한 것은 허망한 분별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와 같이 나라는 것이 없는 이치에서 견성(見性)이 없음을 나타내 보였을 뿐이며, 또한 저 법견(法見)에서도 견성이 없음을 밝히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 이르기를
“일체법에 대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는 등의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저 법이라는 생각에 있어서도 모양이나 성품이 없는 것은 마치 나라는 견해에서의 입장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견과 법견의 견성이 없다]
또 무슨 뜻으로 이 아견(我見)과 법견(法見)의 두 소견에 견성(見性)이 없다고 말하는가?
답하였다.
이런 미세한 장애로 말미암아
이와 같이 아는 것이기 때문에 끊어 없애야 한다.
여기에서 밝힌 뜻은 이 아(我)ㆍ법(法)의 두 가지 견해는 곧 견취(見取)이므로 이것을 미세한 장애라고 말했다.
이 두 가지 일에 대하여 이와 같이 견성이 아니라는 것을 바르게 알기 때문에 마침내 이런 의심을 끊어 없앨 수 있다.
그래서 경에 이르기를
“마땅히 이와 같이 알고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하며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 글에 대하여 게송으로 말하리라.
이 두 가지 지혜[二種智]와
선정을 얻음으로써 비로소 저것이 제거된다.
세속지[覆俗智] 및 승의지(勝義智)와 이 두 가지가 의지하고 있는 선정으로써 마침내 저 장애가 제거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또 논하건대 그렇다면 차별이 있는 복은 어느 곳에서 나타나는가?
게송으로 답하리라.
복을 펼쳐서 화신(化身)을 밝히니
무진(無盡)한 복 없는 것이 아니네.
여래가 비록 다시 임의대로 운용하여 널리 화신으로 작용한다 하더라도, 그러나 저 화신이 선설(宣說)한 바른 법은 곧 무루(無漏)의 복이라서 문득 다함이 없는 기약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