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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보살소문경론 제4권
3.2. 행의 마음을 성취함(2)
[온갖 종류의 깨끗함을 수행함]
또 수행을 성취한다 함은 온갖 종류의 깨끗함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모든 보살은 온갖 종류에 깨끗한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일으키나니, 이를 보살로서 수행(修行)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십지수다라(十地修多羅)』에서의 말씀과 같다.
“이 보살은 다시 깊이 생각하기를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을 행하여 인연을 모으기 때문에 곧 지옥과 축생이며 아귀에 떨어진다.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행하여 인연을 모으기 때문에 곧 사람 중에 태어나고 나아가 유정천(有頂天)에 나게 된다.
또 이보다 위의 열 가지 선한 업의 길과 지혜로 자세히 살피며 화합하여 수행하지만 그 마음이 좁고 열등하고, 마음에 삼계를 두려워하고 크게 가엾이 여김을 멀리 여의고, 다른 이로부터 소리를 듣고서 통달하기 때문에 소리를 듣고 뜻이 풀리므로 성문승을 이룬다.
또 이보다 위의 열 가지 착하고 깨끗한 업의 길을 다른 이로부터 듣지 않으며, 스스로 바르게 깨달으며, 크게 가엾이 여김과 방편을 두루 갖추지 못했으나 깊은 인연의 법을 통달할 수 있어서 벽지불승을 이룬다.
또 이보다 더 으뜸가는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깨끗하게 두루 갖추어 그 마음이 넓고 커서 한량없으며,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며, 방편으로 껴잡으며, 큰 서원을 잘 일으키며,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부처님의 지혜가 넓고 큼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에, 보살의 자리가 깨끗하며 바라밀이 깨끗하여 깊고 넓은 행에 들어가서 이루게 된다.
또 이보다 맨 위의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은 온갖 것이 깨끗한 열 가지 힘[十力] 때문이며, 모든 부처님 법을 모아서 성취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나는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똑같이 행하리라.’”
이와 같이 온갖 것을 수행하며 깨끗함이 두루 갖추어지게 하기 때문이니, 이를 보살로서 수행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또 수행을 성취한다 함은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닦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모든 보살은 자신의 안락에 집착하지 않으며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수행하되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나는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다’고 보고서,
자비심으로써 곧장 자기만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이롭게 한 뒤에는 다시 다른 이들에게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에 머무르게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수행을 성취한다.
이런 이치 때문에,『십지수다라』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나는 먼저 선법에 머무르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법에 머무르게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수행을 성취하게 된다.
또『십지수다라』에서의 말씀과 같다.
“이 보살은 다시 일체 중생들 안에서 안온한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이롭게 하려는 마음과 수호하는 마음과 나[我]라는 마음과 평등한 마음과 스승이라는 마음과 세존이라는 마음을 내느니라.
또 보살은 다시 생각하기를
‘이 모든 중생들은 삿된 소견에 떨어지고 나쁜 뜻과 나쁜 마음으로 나쁜 길의 빽빽한 숲을 가므로, 나는 으레 그 중생들에게 진실한 길을 가고 바른 소견의 길과 사실대로의 법 중에 머무르게 하리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은 것 등이니, 그러므로 수행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또 수행을 성취한다 함은 선한 업의 길을 수행하되 마침내 그지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모든 보살은 3보를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수행이 끊어지지 않으며 언제나 선한 업의 길을 수행함이 그지없다.
그러므로 수행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무진의(無盡意)수다라』에서의 말씀과 같다.
“대덕 사리불이여, 모든 보살마하살의 시라(尸羅)바라밀은 그지없나니, 언제나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범부의 계율은 곳곳에 태어나나니 그 때문에 끝남이 있으며, 인간 중의 열 가지 착함도 다하기 때문에 끝남이 있으며,
욕심세계의 여러 하늘의 복이 과보와 공덕도 다하기 때문에 끝남이 있으며, 형상세계의 여러 하늘도 선정의 한량없음이 다하기 때문에 끝남이 있으며, 무형세계의 하늘도 취득하여 들어간 모든 선정이 다하기 때문에 끝남이 있으며,
외도와 신선[仙人]의 모든 계율도 잃어져서 신통이 다하기 때문에 끝남이 있으며, 벽지불의 계율에도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없어서 다하기 때문에 끝남이 있습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의 깨끗한 계율은 모두가 그지없습니다.
왜 그러한가?
이 계율 중에서 온갖 계율이 나옴이 마치 종자가 그지없어서 열매 또한 그지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보리의 종자는 끝날 수가 없기 때문에 여래의 계율 또한 그지없습니다.”
또 수행을 성취한다 함은 몸에 대한 소견[身見]의 번뇌 때[垢]를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모든 보살은 열 가지 선한 업의 길로써 나[我]라는 소견 따위의 때를 여의므로, 그때[時]를 깨끗한 업의 길이라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수행을 성취한다.
저 수다라에서 말씀하시기를
“깨끗한 계율이라 함은, 이른바 나라는 고집의 쓸모없는 이론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라”고 한, 이와 같은 것 등이다.
그러므로 수행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또 수행을 성취한다 함은 온갖 것을 성취하여 깨끗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모든 보살은 선한 업의 길을 수행하여 온갖 것과 모든 권속이 깨끗해지나니, 그때의 보살을 선한 업의 길로써 수행을 성취하였다고 하는 줄 알아야 한다.
저 수다라에서의 말씀과 같나니,
무진의는 말하기를
“오직 사리불만이 보살의 계율들에서 예순여섯 가지 일이 깨끗하며, 닦고 다스리는 것 또한 끝이 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무엇을 예순여섯 가지의 일이라 하는가?
첫째 다른 중생을 괴롭게 하지 않음이며,
둘째 남의 재물을 훔치지 않음이며,
셋째 남의 부녀를 끝내 삿되게 보지 않음이며,
넷째 중생들에게 속이는 일이 없음이며,
다섯째 처음부터 이간질을 안 하며 자기의 권속에게 그치고 만족한 줄을 아는 일이며,
여섯째 나쁜 말이 없으며 거칠고 사나움을 참는 일이며,
일곱째 꾸밈말이 없으며 언제나 착하게 말하는 일이며,
여덟째 다른 이가 즐기는 일에 탐내거나 시샘하지 않는 일이며,
아홉째 처음부터 성냄이 없으며 나쁜 말을 참는 일이며,
열째 바른 소견으로 딴 도(道)를 삿되다고 하거나 천하게 여기지 않는 일이다.
열한째 부처님을 깊이 믿으며 마음이 흐리지 않는 일이며,
열둘째 법을 믿고 따르며 선법을 법으로 여기는 일이며,
열셋째 승가를 믿고 공경하며 성인들을 존중하는 일이며,
열넷째 온몸을 땅에 던져 부처님을 생각하는 일이며,
열다섯째 온몸을 땅에 던져 가르침을 생각하는 일이며,
열여섯째 온 몸을 땅에 던져 승가를 공경하는 일이며,
열일곱째 금지된 계율을 굳게 지녀서 모두 범함이 없으며 조그마한 계율에 이르기까지 놓아버리지 않는 일이며,
열여덟째 결함 없는 계율을 지니며 다른 법[乘]에 의지하지 않는 일이며,
열아홉째 뚫리지 않는 계율을 지녀 나쁜 곳에 태어남을 여의는 일이며,
스무째 거칠지 않은 계율을 지니며 모든 번뇌에 섞이지 않는 일이다.
스물한째, 더럽지 않은 계율을 지녀서 오로지 흰 법을 자라게 하는 일이며,
스물둘째 이 깊은 계율을 지녀서 뜻을 따라 회향하며 자재함을 얻는 일이며,
스물셋째 찬탄할 계율을 지녀서 지혜로운 이가 꾸짖지 않는 일이며,
스물넷째 순수하고 선한 계율을 지녀서 바른 생각으로 아는 일이며,
스물다섯째 꾸짖지 않을 계율을 지녀서 온갖 계율이 흩어지지 않는 일이며,
스물여섯째 착하고 굳은 계율을 지녀서 모든 감관을 막고 보호하는 일이며,
스물일곱째 이름이 들리는 계율을 지녀서 모든 부처님께서 생각하여 주시는 일이며,
스물여덟째 만족할 줄 아는 계율을 지녀서 만족하지 아니함이 없는 일이며,
스물아홉째 욕심을 적게 하는 계율을 지녀서 탐욕과 인색함을 끊는 일이며,
서른째, 성품이 깨끗한 계율을 지녀서 몸과 마음이 적멸하는 일이다.
서른한째, 아란야의 계율을 지녀서 시끄러움을 여의는 일이며,
서른둘째 성인 종자의 계율을 지녀서 다른 뜻을 구하지 않는 일이며,
서른셋째 점잖은 거동의 계율을 지녀서 온갖 선한 뿌리가 자재함을 얻는 일이며,
서른넷째 말씀대로의 계율을 지녀서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음이 없는 일이며,
서른다섯째 인자한 마음의 계율을 지녀서 중생을 보호하는 일이며,
서른여섯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의 계율을 지녀서 모든 고통을 능히 참는 일이며,
서른일곱째 기쁜 마음의 계율을 지녀서 게으르지 않는 일이며,
서른여덟째 버리는 마음의 계율을 지녀서 사랑함과 성냄을 여의는 일이며,
서른아홉째 스스로 살피는 계율을 지녀서 마음에 잘 분별하는 일이며,
마흔째, 단점과 결함을 구하지 않는 계율을 지녀서 다른 이의 마음을 보호하는 일이다.
마흔한째, 잘 껴잡는 계율을 지녀서 잘 수호하는 일이며,
마흔두째 슬기로 보시하는 계율을 지녀서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며,
마흔셋째 인욕의 계율을 지녀서 마음에 성을 내는 장애가 없는 일이며,
마흔넷째 정진의 계율을 지녀서 물러나 돌아가지 않는 일이며,
마흔다섯째 선정의 계율을 지녀서 모든 선정의 갈래를 자라게 하는 일이며,
마흔여섯째 지혜의 계율을 지녀서 많이 들음의 선한 뿌리에 만족할 줄 모르는 일이며,
마흔일곱째 많이 들음의 계율을 지녀서 널리 배움에 견고한 일이며,
마흔여덟째 선지식을 친근히 하는 계율을 지녀서 보리를 돕고 이루는 일이며,
마흔아홉째 나쁜 벗을 멀리 여의는 계율을 지녀서 나쁜 길을 버리고 멀리 여의는 일이며,
쉰째 몸을 아끼지 않는 계율을 지녀서 무상함의 형상을 자세히 살피는 일이다.
쉰한째, 목숨을 아끼지 않는 계율을 지녀서 부지런히 선한 뿌리를 행하는 일이며,
쉰두째, 뉘우치지 않는 계율을 지녀서 마음이 깨끗한 일이며,
쉰셋째 삿된 생활을 하지 않는 계율을 지녀서 마음에 깨끗함을 행하는 일이며,
쉰넷째 그을지 않는 계율을 지녀서 마침내 깨끗한 일이며,
쉰다섯째 타지 않는 계율을 지녀서 선한 행의 업을 닦는 일이며,
쉰여섯째 오만 함이 없는 계율을 지녀서 마음이 낮추어지며 교만하지 않는 일이며,
쉰일곱째 들뜨지 않는 계율을 지녀서 모든 욕심을 멀리 여의는 일이며,
쉰여덟째 높은 체하지 않는 계율을 지녀서 마음이 공평하고 정직한 일이며,
쉰아홉째 부드럽고 온화한 계율을 지녀서 마음에 곧장 돌진함이 없는 일이며,
예순째, 조복하는 계율을 지녀서 괴롭히고 해침이 없는 일이다.
예순한째, 적멸한 계율을 지녀서 마음에 때와 더러움이 없는 일이며,
예순두째, 말에 수순하는 계율을 지녀서 말씀대로 행하는 일이며,
예순셋째 중생을 교화하는 계율을 지녀서 거두어 줌의 법을 여의지 않는 일이며,
예순넷째 바른 법을 보호하는 계율을 지녀서 어기지 않고 사실대로 하는 일이며,
예순다섯째 성취함을 칭송하듯 하는 계율을 지녀서 모든 중생들에게 마음을 평등하게 하는 일이며,
예순여섯째 부처님을 친근히 하는 계율을 지녀서 부처님의 삼매에 들어가 온갖 부처님 법을 완전히 갖추는 일이다.
그러므로 수행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또 수행을 성취한다 함은 특수한 결과를 이룩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모든 보살은 수행을 성취하는 열 가지 선한 업의 길로써 보리심을 껴잡나니, 이런 이치 때문에 보리를 얻을 때에 특수한 결과를 이룩한다. 그러므로 수행을 성취하였다고 하는 줄 알아야 한다.
거룩한『사가라용왕경(娑伽羅龍王經)』에서의 말씀과 같다.
“용왕아, 살생을 여읜 사람은 열 가지 깨끗한 법을 얻으며 살생을 멀리 여읜 온갖 선한 뿌리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그 사람은 보리를 얻는 때에 마음이 자재하기 때문에 수명이 한량없느니라”고 하신,
이와 같은 것 등이다.
[업의 길]
[문] 업의 길[業道]의 뜻을 말해야 하리라.
무엇을 업의 길이라 하는가?
[답] 다음에 말하리라. 무슨 말인가?
지어서 만들기 때문에 업(業)의 형상이라 하며, 곧 업은 길[道]이라 한다.
능히 지옥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업의 길[業道]라 한다.
또, 몸과 입의 일곱 가지 업은 곧 그 자체의 모습을 업의 길이라 하며 나머지 세 가지는 뜻과 서로 응하는 마음이다.
또, 곧 그 업은 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업의 길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설명하는 것인가?
오직 마음만이 업이며 그 마음이 일곱 가지 업과 함께 일어나면 길이라고 하며, 나머지 세 가지는 함께 서로가 응하므로 업의 길이라 한다.
[문] 만약 곧 업을 길이라 하여 모두 다 지옥 등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나머지 세 가지는 바로 업의 길이 아닌가?
[답] 저 일곱 가지의 업과 같이 이 세 가지는 그 근본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며 서로가 응하기 때문이다. 그 업과는 같을 수는 없기 때문에 업의 길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문] 온갖 맛이 좋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주먹으로 후려갈기며 모두 희롱하면서 웃고 하는 이와 같은 것 등은 나쁜 행이며, 온갖 예배하고 공양하고 공경하며 술을 멀리 여의는 것 따위의 이와 같은 것 등은 선한 행이거늘 무엇 때문에 업의 길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답] 술을 멀리 여의는 것 따위는 오직 이는 마음만의 업이어서 일곱 가지의 업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몸과 입의 업은 아니다. 그러므로 업의 길은 아니며, 만약 지음이 마음과 함께 서로 응하면 역시 업의 길이다.
[문] 만약 곧 그 업이 길을 만들 수 있어서 업의 길이라 하며, 이와 같이 업의 길을 서로 이해하게 된다면 온갖 법은 마음에서 모두가 업의 길이라 하여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열 가지 업의 길만을 말하고 한량없는 업의 길은 말하지 않는가?
[답] 보다 무겁기[重]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모든 나쁜 행과 선한 행 중에서 열 가지 업의 길이 무겁지만 나머지는 무겁지 않기 때문에 한량없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문] 이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업은 정하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설명하는 것인가?
혹은 가깝거나 먼 방편이 무겁기도 하고 바른 업[正業]은 가볍기[輕]도 하나니, 그러므로 열 가지 업만을 업의 길이라 말하고 한량없는 것을 말하지 않음은 마땅하지 않다.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열 가지 업은 다분히 무겁고 가깝거나 먼 방편은 다분히 가볍기 때문이다.
또 세간의 중생들은 열 가지 업을 다분히 두려워하고 가깝거나 먼 방편은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 열 가지 업의 길은 깊고 무겁게 괴롭히지만 그 밖의 것은 그럴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업은 정하여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 뜻은 이미 대답하였다.
또 그대는 아까 말하기를
‘온갖 법을 마음에서 모두 업의 길이라 하여야 한다’고 하였지만, 이 이치도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일곱 가지의 업은 한결같이 극히 무겁지만 뜻의 세 가지는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며, 술을 마시는 것 따위도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 때문에, 저 열 가지만을 업의 길이라 말하고 나머지 것은 업의 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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