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식보생론 제2권
2.3. 유식이십론[3], 옥졸 등이 핍박하고 해치는 일을 한다고 보는 것과 같다
[3] 모든 것은 지옥에서 다 같이 옥졸 등이 능히 핍박하고 해치는 일을 한다고 보는 것과 같도다. 따라서 네 가지 뜻이 모두 성립된다네. |
이제 다시 또 나락가(捺洛迦: 곧 地獄世上)의 비유를 들어, 저들의 모든 논란을 답한다면, 그 사실이 훌륭하게 성립하리라.
극악한 유정(有情)과 극악한 옥졸(獄卒) 등에 결정된 장소와 시간이 있으나, 모두가 결정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다 식을 떠나지 아니하고 유별난 형상이 있는 것이다.
아울러 개ㆍ까마귀 등에서 생긴 참혹한 해침과 모질게 도려내는 괴로움이, 때리고 고문하는 일을 따라서 죗값을 다 받아야만 끝난다.
이 비유를 가지고 말을 따라서 따질 만하다.
평범하게 풀어나가는 모든 답은 위와 같이 생각해야 하리라.24)
또 이치로는 실로 극악한 옥졸 등은 있지 않으리라.
말한 사실대로라면, 결정과 불결정(不決定)이 있으니, 무엇을 원인으로 생길 수 있는가?
그러나 또한 저기에서도 작용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이 생기는 원인이 당시에 작용이 있어서 태어남을 얻기 때문이다.
곧 이들의 보는 대상은, 대다수가 서로 다르다. 공능(功能)을 빌려서, 아울러 내부의 마음의 상속이 업력의 차별을 따라 구르면서 직접적인 원인[正因]이 되기 때문이다.
또다시 취(取)25) 등의 순연(順緣)26)을 빌려서 함께 서로 돕기 때문에, 일을 따라 일어난다.
이에 보는 것 등이 구르면서 이뤄지니, 이숙(異熟) 등의 결과가 모두 다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실제로 존재한 옥졸이 없을지라도, 그러나 저 가운데서 반드시 서로 유사한 자신이 지은 악업(惡業)의 더욱 불어난 힘을 빌려야 하기 때문이다.
함께 이 가운데서 장소의 결정 등을 보고, 역시 또 거기에서 작용하는 마음을 일으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저 색(色) 등에서 실제의 존재를 떠나 있지 않지만, 식으로부터 생겼음을 밝혔으며, 이 뜻을 명확히 하려고 이를 지어 성립시킨 것이다.
그리고 식이 떠난 경계를 기다리지 않 고루 미치는 주체이기 때문에, 서로 어기는 잘못을 벗어난다.
만일 접촉 등의 경계를 색 자체의 성질이라고 한다면, 곧 세워야 할 대상이요,
만일 단지 실제의 일을 결정으로 고집하여 세운 것이 이미 성립되었음을 설명할 뿐이라고 말한다면,
저 과실(過失)을 벗어나는 말을 가지고 구실[方便]을 삼기 때문이다.
마땅히 이미 자기 종이 성립시킨 상(相)에 대해 밝혔음을 알아야 한다.
그 가운데 세워야 할 대상은 ‘따라 순응하는 원인’이니, 꿈 등의 식을 가지고 그 비유를 삼았기 때문이다.
곧 이것을 집착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은 뜻을 밝혀서 장소와 시간의 소유한 일의 체를 결정한다면, 그 감각이 온갖 모양을 나타낸 것으로서 마치 꿈속에서, 그 마음이 온통 어두워짐과 같다.
이미 꿈에서 깨어난 뒤에 분명한 생각으로 색 등을 볼 때에도, 참으로 또한 식이 아닌 색을 인연하지 않는다. 반드시 색 등의 경계가 나타나기를 바랄 필요도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똑같은 업[同業]의 이숙(異熟)이 받아들였으므로, 함께 수용(受用)할 때, 자체의 상속(相續)에서, 결정이 하나에 예속되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주리고 목마른 모든 아귀의 무리가 똑같은 나쁜 업이 있어서 고름의 강등을 보는 것과 같고, 혹은 또 지극히 험악한 곳에서 모두가 사나운 옥졸을 보는 것과 같다.
여기에 적당하게 알맞은 둘을 다 성립시킴은 현재 보는 경계에 그 작용이 있는 것과 같이,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꿈에서처럼 단지 오직 식의 모양[唯識相]만으로, 여자와 더불어 성교 맺는 일을 보기도 하고, 옥졸 등과 같이 모두 함께 그 괴롭히며 해치는 일을 보기도 하니, 아울러 이를 서술하였다.
어찌 반드시 극악한 옥졸 등이 존재하지 않음이 성립되고 나서야 비로소 이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세울 일을 바라지 않겠는가?
이것이 이미 성립되지 않았으니 곧바로 존재하지 않음이 성립하고, 똑같은 비유의 허물도 참으로 이렇게 문득 성립하는 실수가 없다.
이러한 무리[物]이기 때문에, 역시 또 유정(有情)으로 여기려 하나, 오히려 설할 방법이 없는 것과 같다. 경계에 집착한 감각의 받아들임[執受]을 떠났으니,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일[受事]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또한 경계에 집착한 감각으로 받아들인 일[執受事]이 아니니, 기와나 나무와 같고 또한 개미의 집과 같다. 그로 말미암아 유정(有情)의 수(數)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뜻이 있기에, 옥졸(獄卒) 및 개, 까마귀 등을 유정의 수로 인정하지 아니하는가?
이들은 똑같이 유정의 형세를 보이기도 하고, 움직임도 있으며, 또한 바깥 인연의 힘을 빌리지도 않기 때문에 그 외 다른 유정과 마찬가지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이에 온갖 원인이 성립되지 않으니, 이 논란은 이치에 맞지 않다. 모든 나락가(那落迦)27)가 소유한 동작은 바깥 인연을 기다리지 않는다.
저 나락가(那落迦)는 이전에 지은 죄악의 업에 맡겨진 것이니, 마치 나무 그림자가 춤추는 것처럼 똑같은 중생의 모양이다.
또 저들이 결코 유정이 아니니, 다섯 세상[五趣]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히려 나무나 돌과 다르지 않다.
이를 근거로 분명히 알라. 저들은 결코 마땅히 악한 업으로 태어난 무리와 똑같지 않아야 한다.
그 외 다른 악한 업의 중생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태어났으니, 여기서 겪는 공동의 고통을 똑같이 받아야 하리라.
그러나 저들은 이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저 지옥유정이 겪는 공동의 고통을 받지 않음으로, 마치 지만(指鬘)28) 등이 나락가(那落迦)가 아닌 것과 같다.
그러나 온갖 나쁜 업의 중생이 똑같이 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저 공동의 업으로 함께 이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다르다면 지옥에 태어나기도 어려울진대, 더욱이 해침을 당하겠는가?
비록 이런 이치가 있을지라도, 그 옥졸 등이 저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이, 공동의 성립이 아니라면, 이것은 바른 설명이 아니니, 저 생명의 무리는 해치는 괴로움을 똑같이 받지 않기 때문이다.
해치는 입장이 아니라는데 근거한다면, 되려 저들은 중생을 해치며, 한가지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똑같이 고통을 받으리라.
만일 또 좀더 깊이 생각해서 말한다면, 서로 번갈아 가며 함께 마주 해치고 괴롭히기 때문에, 저 생명의 무리는 어떤 때는 고통을 받는다고 인정하리라.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 상대를 번갈아 서로 해칠 때에는, 이것은 나락가(那落迦: 地獄有情), 저것은 파라(波羅: 獄卒)라는 위치가 곧 없어져 버린다. 해치는 능력이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옥졸이라고 말한다.
만일 하나가 이미 그러니, 그 외 나머지도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면, 이거야말로 둘 다 옥졸의 성질이 성립되고 만다.
그러면 나락가(那落迦)는 자체의 성질이 분리되지 않아서, 결국 어긋난 실수를 범한다.
이에 따르면, 옥졸의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33천(天)과 같다. 뜻은 그 나락가(那落迦)를 설하여 피해자가 아님을 밝히려고 하였다.
만일 서로 번갈아 해치는 이치가 둘 다 같다고 인정한다면. 저들과 이들은 서로 능멸하리라.
자기에게 힘이 있음을 알고 형체의 크기나 장대함도 차이가 없으니, 번갈아 서로 속이면서 마땅히 두려운 마음을 내지 않으리라.
가령 저 아주 큰 몸의 모습을 본다 하더라도, 자기의 날랜 용기를 믿고 곧바로 그들보다 낫다는 생각이 생길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를 인식한다면, 어찌 두려움을 용납하겠으며, 어찌 나락가(那落迦: 地獄有情)가 옥졸 등을 보는 것과 같다 하리요.
더욱이 형체의 크기와 기운의 능력도 다르지 않으니, 어찌 저들을 볼 때에 두려운 생각을 일으키겠는가?
또다시 함께 지옥의 담당자가 되어, 형체의 크기가 똑같고, 몸의 힘이 이미 차이가 없다면, 여기에는 강함과 약함이 없으리라.
이치로는 마땅히 별도로 형상의 크기가 고르지 않고, 건장함과 용맹함과 냉혹함이 있어서, 보기만 해도 곧 두려움이 생겨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나락가(那落迦)의 무리가 당장 고통을 받는 중이라도, 저 옥졸이 오는 것을 보면, 곧바로 큰 두려움이 생기고, 근심의 불이 안으로 일어나서 온 가슴을 다 태우리라.
고통은 끊임없이 연달아 생기고, 형체와 뼈는 떨리면서 떨어져 나간다. 악한 업으로 태어난 무리는 이러한 고뇌를 받는다.
가령 뛰어난 기교와 밝은 지혜의 무리일지라도, 역시 또 그 일을 다 알 수 없다. 이 순서의 자리[階位]는 참으로 이치가 서로 틀리긴 하나, 세상에서도 또한 이런 일을 보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나쁜 생각을 일으켜서 상대를 죽일 독한 마음(鴆毒心)29)을 품었다면, 남을 해치려고 겁을 주어 두려운 마음이 생기게 한다.
비록 지극히 엄중하고 두려움으로 가득 찬 곳에 있을지라도, 갑자기 묶임을 당할 때 겁을 내는 자가 그 두려움을 일으킴이 똑같지 않다. 그리고 저 무리가 품고 있는 단단하고 굳센 마음은 흔히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 나락가(那落迦)에서 고통을 받는 무리는 대부분 공포를 품고 있으며, 몸은 녹아내린 쇳물과 같다. 때문에 이 나락가(那落迦)가 해치는 입장이 아니라고 함은, 마치 도살장의 기둥에 묶여 있는 짐승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저 옥졸들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원인이므로, 저들이 당하는 고통을 받지 않는다.
24)
여기서부터 『이십론』의
“모든 것은 지옥에서 옥졸 등이 핍박하며 해치는 일을 똑같이 보는 것과 같다. 때문에 네 가지 뜻이 다 성립한다”에 대한 해석이 시작된다.
[一切如地獄 同見獄卒等 能爲逼害事 故四義皆成]
25)
12인연(因緣)의 하나. 애(愛)에 따라 일어나는 집착을 말한다.
26)
연(緣)의 성질이 과(果)의 성질과 똑같으면, 이 연을 순연(順緣)이라고 한다.
27)
지옥(地獄) 또는 지옥 유정(地獄有情)을 말한다.
28)
사천왕이 거느리는 천중(天衆)의 하나. 묘고산(妙高山)의 4층(層) 가운데 둘째 층에 거주하는 지만천중(指鬘天衆)을 말한다.
29)
짐독(鴆毒)은 짐새의 깃을 술에 담가서 우려낸 독, 그 술을 마시게 하여 죽이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