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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6권
변본사품 ⑥
5.13. 견(見)ㆍ비견(非見) 분별
이와 같이 견소단 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18계 중의 몇 가지가 견(見, dṛṣṭi)이며, 몇 가지가 비견(非見, adṛṣṭi)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계와 법계의 일부인
여덟 가지를 설하여 ‘견(見)’이라 이름하며
5식과 함께 생기하는 혜(慧)는
비견(非見)이니, 판단[度]하지 않기 때문이다.
색을 보는 것은 동분의 안근으로
그것의 능의(能依)인 식(識)이 아니니
전설(傳說)에 의하면, 은폐된 온갖 색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안근은 모두가 바로 ‘견(見)’이며, 법계의 일부인 여덟 가지 종류도 ‘견’이다. 그리고 그 밖의 것은 모두 비견(非見)이다.
어떠한 것이 여덟 가지인가?
이를테면 유신견(有身見) 등의 다섯 가지 염오견(染汚見)과 세간의 정견(正見)과 유학(有學:무루지를 성취한 성자)의 정견과 무학(無學:성도를 모두 성취한 성자, 즉 아라한)의 정견을 말하니, 법계 가운데 바로 이러한 여덟 가지가 ‘견’이며, 그 밖의 법계와 나머지 16계는 모두 비견이다.
일체법 가운데 오로지 이 두 가지 법만이 바로 ‘견’ 그 자체이다. 즉 유색법(有色法) 중에서는 오로지 안근만이 바로 ‘견’이며, 무색법 중에서는 그 행상(行相)이 밝고 예리[明利]하며, 경계 대상을 헤아려 판단[推度]하며, 내면에서 일어나는 혜(慧)가 바로 ‘견’이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것은 ‘견’이 아니다.
여기서 안근의 상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한 바와 같지만,49) 세간에서 다 같이 [보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색을 관조하는 것이기 때문에,50) 어두움[闇]과 서로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작용이 밝고 예리하기 때문에 안근을 설하여 ‘견’이라고 이름하였다.
다섯 가지 염오견에 대해서는 마땅히 「수면품(隨眠品)」 중에서 분별하게 될 것이다.51) 그리고 세간의 정견이란 의식과 상응하는 선한 유루의 뛰어난 혜(慧)를 말한다. 유학의 정견이란, 유학의 소의신 중에 존재하는 일체의 무루혜를 말한다. 무학의 정견이란, 무학의 소의신 중에 존재하는 결정(決定, 혹은 決度)적인 무루혜를 말한다.
즉 ‘정견’이라고 하는 하나의 말에는 이미 이상의 세 가지 뜻이 모두 포함되어 있지만, 이를 각기 별도의 세 가지로 나열한 까닭은 이생과 유학과 무학의 세 단계에서의 ‘견’이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또한 점진적인 수습(修習)을 통하여 낳아지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비유하자면 달빛 따위도 없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어두컴컴한 날 한밤중에 험난한 곳을 지나면 보이는 색상(色像)은 전도되지 않은 것이 없듯이 다섯 가지 염오견으로 법을 관찰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비유컨대 달빛 따위가 있어 어두움이 사라진 날 한밤중에 험난한 곳을 지나면 색상이 조금은 밝고 분명하게 보이듯이 세간의 정견으로 법을 관찰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비유컨대 구름이 상승하여 태양을 가린 날 낮에 평탄한 곳을 지나면 색상은 더욱더 밝고 분명하게 보이듯이 유학의 정견으로 법을 관찰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비유컨대 작렬하는 햇볕이 펼쳐지고 구름이나 안개도 맑게 걷힌 날 낮에 평탄한 곳을 지나면 색상은 지극히 밝고 분명하듯이 무학의 정견으로 법을 관찰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여여(如如)한 행자가 점진적으로 수습하매 혜가 생겨나 자신의 마음속의 어리석음과 어두움을 제거해 나가는 차별도 이와 같다. 이처럼 온갖 소연(대상)에 대한 정견에 밝고 분명함이 점차로 증가하는 데 차이가 있는 것은, 소연이 되는 경계 대상 자체에 분명함과 분명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각혜(覺慧)에 번뇌의 장애가 있고 없음에 의한 것으로, 이에 따라 소연에 분명함과 분명하지 않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온갖 ‘견’에는 전체적으로 다섯 가지 유형이 있으니, 첫째는 무기의 종류이며, 둘째는 염오의 종류이며, 셋째는 선한 유루의 종류이며, 넷째는 유학의 종류이며, 다섯째는 무학의 종류이다.
즉 무기의 존재 중에서 안근은 바로 ‘견’이지만, 이근 등의 온갖 근과 일체의 무부무기(無覆無記) 혜 따위는 모두 ‘견’이 아니다. 염오의 존재 중에서 5견은 바로 ‘견’이지만, 그 밖의 염오혜는 모두 ‘견’이 아니다. 이를테면 탐ㆍ진ㆍ만ㆍ불공무명(不共無明:다른 불선법과 상응하지 않고 단독으로 생겨나는 무명)ㆍ의(疑)와 함께 일어나는 혜, 그리고 그 밖의 염오법은 모두 ‘견’이 아닌 것이다. 유학의 존재 중에서는 ‘혜’이면서 ‘견’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다만 그 밖의 것은 ‘견’이 아니다. 무학의 존재 중에서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와 그 밖의 법은 ‘견’이 아니지만,52) 그 밖의 무학의 혜는 모두 ‘견’이다. 선한 유루의 존재 중에서는 오로지 의식과 상응하는 선한 혜만이 ‘견’이며, 그 밖의 것은 모두 ‘견’이 아니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의식과 상응하는 선한 유루의 혜 역시 ‘견’이 아닌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5식신에 의해 낳아진 혜와 유표업(有表業)을 일으키는 혜와 목숨을 마칠 때의 혜가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선한 유루의 존재 가운데 5식과 구생(俱生)하는 혜도 역시 ‘견’이 아니다.53)
어떠한 이유에서 이와 같은 온갖 혜는 모두 ‘견’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인가?
결탁(決度,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앞에서 설한 ‘혜’만이 이러한 특성을 갖는 것으로, 이는 바로 ‘견’ 그 자체인 것이다. 즉 [앞에서] “무색법 중에서는 그 행상(行相)이 밝고 예리하며, 경계 대상을 헤아려 판단[推度]하며, 내면에서 일어나는 혜가 바로 ‘견’이며, 그 밖의 것은 ‘견’이 아니다”고 하였는데, 오로지 이러한 특성의 혜만이 결탁의 공능을 갖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 혜는] 소연이 되는 대상에 대해 심려(審慮, 심사숙고)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비견(非見)으로] 부정된 혜는 소연에 대해 능히 심려하고 결탁하는 것이 아니니, 그렇기 때문에 ‘견’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결탁(決度)’이라고 하는 말은, 말하자면 경계 대상에 대해 먼저 심려(심사숙고)하고서 마침내 결택(決擇, 결정 판단)한다는 뜻이다.
(1) 식견설(識見說) 비판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안근에도 이러한 결탁의 특성이 없으니, 마땅히 ‘견’이라고 이름해서는 안 될 것이다.(識見家의 물음)54)
어찌 앞에서 설하지 않았던가? ‘세간에서 다 같이 [보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색을 관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두움과 서로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작용이 밝고 예리하기 때문에 안근도 역시 ‘견’이라 이름한다’고. 계경에서도 역시 말하기를, “눈이 온갖 색을 본다”고 하였다.(根見家, 즉 유부 毘婆沙師의 답)
만약 안근이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 [다른 식과] 동시에 일체의 대상을 획득하지 못하겠는가?55)
그 같은 허물은 없으니, 일부의 눈만이 능히 색을 본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일부의 눈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동분(同分)의 안근을 말한다. 동분안(同分眼)의 상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56) 즉 식에 의해 주지(住持)될 때 바야흐로 동분을 성취하는 것이지만, 일체의 근이 동시에 자신의 식에 주지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같은 허물은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그것(안근)의 능의(能依)가 되는 식이 바로 ‘보는 것[見]’이지, 눈이 ‘보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그것은 안식이 생겨나야 비로소 능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안식의 힘에 의해 주지될 때 [안근의] 뛰어난 작용이 생겨나기 때문이니, 마치 땔감의 힘에 의해 뛰어난 작용을 지닌 불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 만약 색을 보는 작용이 바로 식에 의해 낳아진 법이라고 한다면, 이 같은 색을 보는 작용은 눈을 떠나서도 마땅히 생겨나야 한다. 그러나 식에 의해 장익(長益)된 구생(俱生)의 대종이 뛰어난 작용의 근을 일으키고, 이것(뛰어난 작용의 근)이 능히 온갖 색을 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능의(能依)인 식이 보는 것이다’고 설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지자(智者)가 있어 이같이 말할 것인가? “인연(因緣, 즉 소의와 소연)을 갖는 모든 것(즉 식)은 능히 요별을 낳으며, 이와 같은 요별은 바로 그것(즉 見)의 인연이 된다”고. 즉 식은 바로 ‘견’의 근거[因]일 뿐이며, 따라서 ‘견’ 자체는 아닌 것이다.
어떠한 근거에서 안식이 ‘견’이 아님을 결정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인가?
[안식이 바로 보는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증(理證, 이론적 근거)도 교증(敎證, 경설상의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증이 없다’고 함은, [안식은] 이식(耳識) 등과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안식과 그러한 이식 등의 온갖 식에 어떠한 차별이 있기에 유독 안식만을 ‘보는 것[見]’이라고 이름하겠는가? 따라서 마땅히 식이 ‘견’의 본질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소의가 되는 근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안식은] 그 밖의 식과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이치는 마땅히 그렇지 않다. 즉 식의 차별은 소의상의 차별일 뿐이기 때문에 안식이라는 명칭은 다만 관념[想]상으로만 획득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식은 소의에 따라 차별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존재 본성[法性]이 바뀌어 ‘견’의 주체가 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는 마치 초목이나 소똥 쌀겨에 따라 불의 명칭은 바뀔지라도 따뜻함의 자성은 동일한 것과 같다.57)
모든 식을 서로 비교해 보면 존재 자체[性類]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음에도 ‘오로지 안식에 의해 보는 것이지 다른 것에 의해 보는 것이 아니다’고 말할 경우, 이러한 주장은 다만 정의(情意)에 따른 것일 뿐 올바른 이치[正理]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만약 이것(안식)이 색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견’을 성취하는 것이라면, 색을 소연으로 삼는 의식 역시 ‘견’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오로지 현재 색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견’을 성취한다고 하면,58)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달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즉 3세의 경계 대상을 소연으로 삼는 혜(慧)도 ‘견’이라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極成]인 것이다. [또한 식이 색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견’을 성취하는 것이라면] 과거ㆍ미래의 색을 소연으로 삼는 식(의식) 역시 마땅히 ‘견’을 성취해야 할 것이며, 과거ㆍ미래의 식이 현재의 색경(色境)을 소연으로 삼는다고 할 경우 마땅히 여러 맹인들도 현재 색에 대한 ‘견’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의식은 그 자체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안식 역시 그 자체 ‘보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할 것으로, 동일한 어떤 존재에 있어 일부가 ‘견’을 본질로 한다면 다른 일부도 ‘비견’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어야 이치상 서로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동일한 어떤 존재를 놓고서 일부는 선하고 일부는 선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안식과 의식)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마땅히 [선ㆍ불선을 견ㆍ비견의] 예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니, 존재 자체[體類]와 드러난 뜻[義類]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안식 등의 모든 식은 존재자체는 비록 동일할지라도 선(善) 등의 의미에는 차별이 있으니, 이를테면 불 자체와 드러난 뜻에 차별이 있는 것과 같다. 즉 경계 대상의 상을 요별하는 식(識) 자체는 [동일하지만] 거기에는 선ㆍ불선으로 일컬어지는 분명함[淨]과 분명하지 않음[不淨]의 뜻의 차별이 있다. 그렇다고 드러난 뜻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존재 자체에도 역시 차별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를테면 불에는 비록 맹렬히 타오르는 불도 있고 미약한 불도 있으며, 연기를 갖는 불도 있고 연기를 갖지 않는 불도 있어 그것이 상대하는 인연(즉 땔감)에 따라 동일하지 않으며 의미상의 차별이 있을지라도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차별도 없으며 다 같이 따뜻함을 자성으로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식은, 경계 대상의 상을 요별하는 존재 자체로서는 비록 동일할지라도 선 등의 의미상으로는 차별이 있다. 따라서 앞서 인용한 예증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식이 존재 자체로서는 비록 동일하다고 할지라도 ‘견’ 등의 의미상으로는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즉 안식과 내지 의식은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작용상에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이치도 옳지 않으니, 현견(現見)하건대 제법은 존재 자체[體類]로서 차별되는 것이지 드러난 현상[義類]으로서 차별되는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즉 선 따위가 그러하듯이 [드러난 현상이] 식 등 일체의 법에 두루 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59)
이와 같이하여 바야흐로 안식이 ‘견’을 성취한다는 주장에 어떠한 근거[因緣]도 없음을 논설하였으니, 이로써 ‘이증(이론적 근거)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분별하였다.
‘교증(敎證)이 없다’고 함은, 지교(至敎)에서 ‘안식이 본다’는 사실을 설한 일도 없으며, 듣고서 그 같은 이해를 낳을 만한 것도 설한 일이 없음을 말한다. 곧 여러 경 중에서 ‘안근과 혜를 설하여 견(見)이라 이름한다’는 내용만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안식이 바로 ‘보는 것’으로, 안근은 그렇지 않다고 설할 경우, 세간의 상식과도 어긋나게 될 것이니, 세간에서는 다만 눈이 없는 이를 맹인이라고 이름할 뿐 안식이 없는 이를 맹인이라고 말하지는 않는 것이다. 즉 맹인이란 다만 안근을 성취하지 못한 이를 말하는 것일 뿐 안식의 성취ㆍ불성취와는 관계없다. 예컨대 제2정려 이상에 태어나는 경우 그에게 안식이 현전하지 않을 때라도 안근은 존재하니, 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맹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안식이 ‘보는 것’이라면] 안근을 결여한 모든 맹인들도 안식을 성취하는 경우 마땅히 맹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며, 또한 역시 ‘볼 수 없는 이[無見者]’라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경우는] 견(見)과 식(識)이 현전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비록 다시 성취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이를 설하여 맹인이라 한다’고 한다면, 세간에 눈을 갖은 모든 이도 안식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는 역시 마땅히 맹인이라 이름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안식은 능히 [다른 식과] 차별되는 상[能別相]을 가지니, 다른 식과 차별되게 하는 그것을 ‘보는 것[見]’이라 이름할 수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이러한 능히 차별되는 상(즉 소의)을 ‘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안식은 다른 식과 차별되게 하는 [자신의] 차별상을 갖지 않지만, 그럴지라도 안식이 바로 ‘보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면, 이는 마치 포악한 왕이 반포한 교령(敎令)과 같은 것이다.60)
어찌 혜와 마찬가지로 이(안식) 역시 그렇다고 하지 않겠는가? 비유하자면 모든 혜가 법의 간택[擇法]을 특성[相]으로 하는 것과 같다. 즉 어떤 때에는 ‘보는 것’이면서 역시 간택하는 것이며, 어떤 때는 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간택하는 것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식도 경계 대상에 대한 요별을 특성으로 하는 것이지만, 어느 때에는 ‘보는 것’이면서 역시 요별하는 것이며, 어떤 때는 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요별하는 것일 뿐이다.61)
이에 따라 그의 힐난의 말에 대해 해석해 보기로 하겠다. 만약 식이 능히 ‘보는 것’이라면, 무엇이 요별하는 것인가? [식견가는] ‘견’과 ‘식’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예를 인용하는 것은 이치에 극히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혜의 경우, 능히 차별되는 상에 따라 ‘견’이라 이름한 것이니, 이것의 능히 차별되는 상은 바로 ‘능히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의 경우, 능히 차별되는 상으로 말미암아 ‘견’이라 이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안근)의 능히 차별되는 상이 바로 ‘능히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안식의] 능히 차별되는 상이 바로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소의인 안근이 능히 보는 것이라는 사실이 성립되니, [6]식은 다만 소의에 따라 명칭상으로만 차별되기 때문이다. 혹은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의 소의가 되는 안근을 배제하고서 능히 [다른 식과는] 차별되는 결정적인 특성에 다시금 어떤 것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럴 경우 [식에는] 오로지 안식만이 존재할 뿐 이식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가 말한 “‘견’과 ‘혜’의 경우처럼 ‘견’과 ‘식’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양자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경우, 역시 또한 ‘식’ 자체가 바로 ‘혜’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니, 양자 모두에 상응하는 것으로 인정한 ‘견’의 본질은 바로 ‘혜’이기 때문이다.62) 또한 만약 ‘견’과 ‘식’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한다면 모든 식은 마땅히 ‘보는 것’이 되어야 하며, ‘보는 것’은 마땅히 모든 식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온갖 식을 갖는] 맹인이나 잠잘 적에는 어떠한 이유에서 보지 못하는 것인가?
만약 그 때 안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 역시 옳지 않으니, [모든 식은] 존재 자체[體類]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이것과 그 밖의 다른 식의 존재 자체에 어떤 차이가 있기에 다른 식은 능히 보지 못하는 것인데, 이것만이 유독 ‘능히 보는 것’이라 하는 것인가? 이와 같은 따위의 해명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널리 비판하였었다.
혹은 또한 [식은 어느 때 ‘보는 것’이면서 역시 요별하는 것이라면], 하나의 존재가 마땅히 두 가지 본질을 지녀야 할 것이니, 하나는 ‘능히 인식(요별)하는 것’이며, 하나는 ‘능히 보는 것’이다. 만약 ‘견’을 본질로 하는 것(즉 안근)이 바로 ‘능히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대의 종의는 크나큰 허물을 갖게 되는 것이다.63) 만약 “혜의 경우도 ‘능히 보는 것’이면서 ‘능히 간택하는 것’이지만 이치상 서로 어긋나지 않듯이 이 역시 그러하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으니, ‘견’과 ‘혜’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찌 ‘견’과 ‘식’의 경우 또한 차별이 없다고 하겠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안식이 보는 것이라면) 눈을 가졌더라도 마땅히 맹인과 다르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데, 어떠한 이유에서 눈을 갖지 않았으면 안식을 성취하더라도 맹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눈을 가졌으면 그 밖의 다른 식이 현전하더라도 맹인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64) 이와 같은 등의 허물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널리 논의하였다.65) 그렇기 때문에 안식은 ‘견’이 아님을 결정코 알아야 하는 것이다.
(2) 근견ㆍ식견에 대한 세친의 비평 비판
그런데 다시 유여사(有餘師)는 또 다른 이치로써 안식은 결정코 ‘견’이 아님을 논증하였는데, 그것은 이를테면 ‘은폐된 색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경주(經主)의 뜻은 그 같은 논거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송(本頌) 중에서 ‘전설(傳說)’이라는 말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즉 “그들이 전(傳)하여 설(說)하는 바에 따르면, 지금 바로 보건대 벽 등에 의해 은폐된 온갖 색을 능히 볼 수 없으니, 만약 식이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식은 무대(無對)이기 때문에 벽 등에 의해 장애 받지 않으므로 마땅히 감추어진 색도 보아야 하는 것이다.”66)
그리고 힐난하여 말하기를,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은 발생하지 않는다. 식이 이미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땅히 볼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하였다.67) 그러나 이러한 힐난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설혹 그것에 대한 안식이 생겨날 수 있다고 인정할지라도 역시 능히 볼 수 없을 것이니, 앞서 다른 식과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68)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말한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은 발생하지 않는다. 식이 이미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땅히 볼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진술은 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설해서도 안될 것이니,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힐난한 뜻으로 말해 보면 이와 같다. 만약 안식에 색을 보는 작용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식은 무대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색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생겨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만약 색을 요별하는 식의 작용은 그러한 감추어진 색에 대해 생겨날 수 없다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이는 곧 안식과 유대(有對)의 안근이 동일한 경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69) 나아가 만약 우리의 학설 역시 이와 동일하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마땅히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들은] 안근이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색이 안근의 경계가 된다는 이치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무슨 이유에서 “식이 이미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땅히 볼 수 있을 것인가?”라고 설한 것인가? [식이] 생겨나는 것은 바로 ‘보는 것’이며, ‘보는 것’은 바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식이 이미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땅히 볼 수 있을 것인가?”라고 설하였다면, 이는 즉 ‘식이 이미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땅히 생겨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설한 것, 혹은 ‘식이 이미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땅히 볼 수 있을 것인가?’라고 설한 것이 된다. 그러니 어찌 이에 대해 전체적 입장에서 힐난하여 말하지 않겠는가? ‘[식은] 어째서 생겨나지 않은 것이며, 어째서 보지 못하는 것인가?’라고.
또한 어떤 이가 “[견(見)의] 일체의 인연은 모두 오로지 전 찰나에 생겨나며 구기(俱起)하는 일이 없다”고 주장하였다면, 식이 생겨나든 생겨나지 않든 능히 보지 못할 것이니,70) 그가 종의로 삼는 바에 의하면 이 역시 답이 아니다.
또한 유리나 운모(雲母) 등에 감추어진 것에 대해 안식은 역시 생겨나는데, 어떠한 까닭에서 감추어진 색에 대해서는 안식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인가? 만약 그 사이로 광명이 차단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날 수 있다고 한다면, 바야흐로 안식은 감추어진 색에 대해서도 생겨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그대가 앞서 한 말에 위배됨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
또한 세간을 현견하건대 비록 광명을 여의었더라도 안식은 일어나니, 이를테면 사람들은 능히 온갖 캄캄한 어둠의 색을 보며, 야행성의 짐승 역시 캄캄한 어둠 속에 감추어진 온갖 색을 보는 것이다.71) 곧 어둠을 보고자 하여 광명을 기다리지는 않기 때문에 [광명을 여의었더라도 안식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경계 대상이 되는 존재는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광명을 여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야행성의 짐승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둠에 감추어진 것에 대한 식이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동일한 어둠의 색이 사람과 짐승에 대해 각기 그 성질이 변이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온갖 취(趣, 지옥 내지 천의 6취) 중의 어떤 존재는 마땅히 그러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다시 말해 야행성의 짐승은 인간과 달리 원래부터 광명이 차단된 색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렇지 않으니, 모든 취는 바로 이숙과이기 때문이다. 즉 고양이나 이리, 개 등은 어둠 속에서도 염오심을 일으켜 온갖 색을 취하기 때문에, 오로지 이숙과인 안근은 취 자체에 포섭되기 때문에 여기서 이같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숙과가 그러하기에[法爾] 온갖 취 중에서 혹 어떤 존재는 어둠에 감추어진 색도 능히 취할 수 있다’고.
만약 야행성의 짐승들의 눈은 항상 광명을 띠기 때문에 [어둠 속에 감추어진 색도] 능히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그 같은 사실은] 인식될 수 없기[不可得] 때문이다. 만약 [광명이] 적기 때문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멀리 있는 대상의 색에 대해서는 관조(觀照)의 작용도 없어야 할 것이며, 그것에 대해 안식도 마땅히 일어날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설한 “감추어진 색에 대해 안식은 발생하지 않는다. 식이 이미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땅히 볼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진술은 참다운 답이 아니며, 오로지 [이치에] 밝지 못한 이들이 좋아하고 즐기는 논의일 뿐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안근이 능히 본다’고 주장하는 이[眼根能見論者]들은 어떠한 이유에서 감추어진 온갖 색을 취하지 못하는 것인가?
안근은 유대(有對)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색에 대해 보는 공능이 없으며, 식은 소의와 동일한 대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안식] 역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다시 힐난하여 말하기를, “안근이 어찌 신근(피부)처럼 대상과 직접 접촉[合]할 때 비로소 그것을 취하는 것이라 하겠으며, 유대이기 때문에 그러한 감추어진 색을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하였다.72) 그러나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우리가] 설한 유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73)
어째서 그러한가?
이는 오로지 ‘안근은 장애유대(障礙有對)의 법이기 때문에 오로지 직접 접촉한 경계 대상만을 취하고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은 취하지 않으며, 그래서 감추어진 온갖 색을 능히 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역시 경계유대(境界有對)의 뜻에도 근거하여 설한 것이니, 만약 [안근이] 이러한 경계에 구애(拘礙)되는 경우 그것은 그 밖의 다른 경계에 대해서는 설혹 장애가 없을지라도 역시 작용을 일으키지 않거늘 하물며 장애가 있는 것에 대해 작용을 일으킬 것인가?74) 경계 대상을 갖는 일체의 법은 마땅히 이와 같이 모든 경계를 능히 동시에 취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안식도 역시 유대라고 해야 할 것이며, 단지 ‘안근은 유대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색에 대해 보는 공능이 없다’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다. 또한 마땅히 ‘식은 소의와 동일한 대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감추어진 색)에 대한 안식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해서도 안 될 것이니, 경계 대상을 갖는 일체의 법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모든 경계를 능히 동시에 취할 수 없다)고 스스로 말하였기 때문이다.75)
이러한 예는 옳지 않으니, 뜻이 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뜻을 설해 보면 이와 같다. 안근은 또한 역시 경계유대성이기 때문에, 색은 바로 장애유대성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색에 대한 안근의 작용은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의근과 의식의 경우, 비록 소의와 능의로서 결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동일한 경계에 대한 작용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 두 가지는 동시에 동일한 경계 대상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76) 그렇지만 소의인 안근이 취하는 경계는 바로 능의인 안식이 취하는 경계이며, 또한 반드시 동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감추어진 경계에 대해 안근의 작용이 차단되면 안식의 작용도 역시 그러하다. 이에 따라 ‘식은 소의와 동일한 대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안식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고 설한 것이다. 그러나 식견(識見)을 인정할 경우, 어떠한 이유에서 [감추어진 색에 대해서는 안식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어찌 안근이 바로 경계유대가 아니라 하겠는가? 그러나 유리 등의 경계에 구애될 때에는 그것에 의해 감추어진 것에 대해서도 역시 능히 작용을 일으키는데, 어떠한 까닭에서 ‘만약 [안근이] 이러한 경계에 구애되는 경우 그것은 그 밖의 다른 경계에 대해서는 설혹 장애가 없을지라도 역시 작용을 일으키지 않거늘 하물며 장애가 있는 것에 대해 작용을 일으킬 것인가?’라고 설하는 것인가?(식견가의 힐난)
어찌 앞에서 구시(俱時, 동시)에 취하지 않는다고 설하지 않았던가? 유리를 취할 때 그것에 감추어진 것은 취하지 않으며, 유리에 감추어진 것을 취할 때 유리는 취하지 않는다. 양자를 동시에 취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는 허물은 없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안근은 벽 등에 감추어진 색을 능히 취하지 못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대들이 말한 것처럼 그 사이에 광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세간을 현견하건대 비록 광명을 여읜 것일지라도 능히 취할 수 있기 때문에 [그대들이 말한 것과] 같지 않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취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적취된 모든 색은 장애성(障礙性)을 지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밝음[明]과 어둠[暗]은 [모두 장애성을 갖지만] 장애가 되는 것이 동일하지 않은 것과 같다. 예컨대 어둠과 밝음이 비록 동일한 색처일지라도 사람은 어둠에 의해 장애된 것은 능히 취하지 못하지만 밝음에 의해 장애된 것은 능히 취할 수 있듯이 야행성의 동물은 비록 어둠에 의해 장애된 색은 능히 취할 수 있을지라도 벽 등에 의해 장애된 것은 능히 취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리 등에 의해 장애된 온갖 색은 능히 취할 수 있을지라도 벽 등에 의해 장애된 것은 능히 취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안근은 오로지 벽 등을 볼 뿐이며, 벽 등에 의해 장애된 온갖 색은 보지 못하니, 적취된 색은 장애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치[法]는 마땅히 이와 같다고 해야 할 것으로, 추론하여 따지지 말아야 한다. 어떤 근은 장애성이 적기 때문에 능히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不合境]만을 취할지라도 그 밖의 다른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은 능히 취하지 못하며, 어떤 근은 비록 능히 직접 접촉한 대상[合境]만을 취할지라도 직접 접촉한 대상을 능히 취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77) 따라서 경주(經主)가 말한 “안근이 어찌 신근처럼 대상과 직접 접촉할 때 비로소 그것을 취하는 것이라 하겠으며, 유대이기 때문에 그러한 감추어진 색을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힐난은 마땅히 꾸짖어 말해야 한다. 만약 [어떤] 근이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만을 능히 취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직접 접촉하지 않은 일체의 대상을 능히 취해야 할 것이며, 만약 직접 결합한 대상만을 능히 취하는 것이라면 직접 접촉한 일체의 대상을 모두 능히 취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의 말은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설한 대로 “안근은 유대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색에 대해 보는 공능이 없으며, 식은 소의와 동일한 대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 같이 감추어진 색에 대한 안식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식견(識見)을 인정하는 경우, 어떠한 이유에서 [안식이]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이와 같은 주장과 논파는 이치상 지극히 잘 성취된 것이다.
아비달마순정리론 제7권
변본사품 ⑦
(2) 근견ㆍ식견에 대한 세친의 비평 비판(續)
만약 안근이 바로 ‘보는 것[見]’이라면 어째서 세존께서는 그것을 설하여 문(門)이라고만 하셨을 뿐 ‘능히 보는 것’이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은 것인가? 즉 계경에서 설하시기를, “범지(梵志)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안(眼)을 문으로 삼아 오로지 색을 볼 따름이다”고 하셨던 것이다.1) 곧 이치상으로 볼 때 ‘보는 것’을 바로 문이라고 설해서는 안 될 것이니, 단지 문에 근거하여 볼 수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2)
이 계경은 결정코 ‘안식이 바로 보는 것이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니, ‘안식은 안근을 문으로 삼아 오로지 색을 볼 따름이다’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유여사는 “안근을 문으로 삼아 혜(慧)가 색을 본다”고 주장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이제 마땅히 자신의 완고한 주장을 버리고 다같이 이 경의 취의에 대해 살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종의에 따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어리석은 범부들은 무명에 눈멀고 참된 스승을 만나지 못하여 혹 어떤 이는 자성(自性)이나 극미(極微) 등을 [세계의] 원인이라 주장하고, 혹 어떤 이는 제행(諸行)은 그 같은 원인 없이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혹 어떤 이는 ‘제행이 만약 찰나에 소멸한다면 일체의 세간은 마땅히 다 같이 허물어지고 단멸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에 따라 ‘제행은 잠시 지속한다[暫時住]’거나 혹은 ‘궁극적으로 영원하다[畢竟常]’고 그릇되게 생각하고는 헤아려 판단한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제행은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인과(因果)로서 전전(展轉) 상속하여 비록 찰나에 소멸할지라도 허물어지거나 단절되지 않으며, 또한 일체의 결과는 단일한 원인으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원인 없이 제행이 생겨나는 것도 아님을 밝히기 위해 은밀한 뜻에서 이와 같은 계경을 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안(眼)을 문으로 삼아 오로지 색을 볼 따름이며……(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의(意)를 문으로 삼아 오로지 법을 요별할 따름이다.”
여기서 ‘문’은 바로 연(緣), 즉 조건의 뜻이다. 연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종류가 동일한 연[種類同緣]과 종류가 다른 연[種類異緣]이 바로 그것으로, 여기서는 바야흐로 종류가 동일한 연에 대해 설하고 있다. 즉 “안을 문으로 삼아 색을 본다”에서 [‘안을 문으로 삼는다’고] 함은, 이를테면 후 찰나의 안근이 일어나는 것은 전 찰나의 안근을 연으로 삼는다는 말이며, ‘색을 본다’는 말은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나타낸다. 나아가 의처(意處)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 계경에서는 안근 등에 각기 두 가지 작용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으니, 첫째는 능히 문이 되는 것[能爲門]이며, 둘째는 능히 경계를 취하는 것[能取境]이다. ‘능히 문이 되는 것’이란, 이를테면 안근이 능히 소의가 되어 심ㆍ심소로 하여금 경계 대상에 대해 각기 개별적인 행상(行相)을 일으키게 하는 것을 말하며, ‘능히 경계를 취하는 것’이란, 이를테면 안근이 오로지 색을 보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식이 보는 것이라면) ‘오로지’라는 뜻에 어긋나게 될 것이니, 모든 심ㆍ심소는 ‘오로지 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심ㆍ심소는 모두 안근을 문으로 삼는 것으로, 그대도 ‘견’의 주체는 오로지 마음(즉 識)일 뿐 심소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수(受)ㆍ상(想) 등의 모든 심소법은 영납(領納)ㆍ취상(取像)ㆍ조작(造作) 등으로 그 작용이 각기 동일하지 않으므로 ‘오로지 보는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이미 [계경에서] ‘오로지 볼 따름이다’고 말하였으므로 그것은 바로 안근을 가리키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으니, 이러한 안근은 [다른 작용 없이] ‘오로지 능히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안근의 작용에는 대략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능히 문이 되는 것[能爲門]’이며, 둘째는 ‘능히 색을 보는 것[能見色]’이다. 나아가 의처의 경우도 참답게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종의에 경설과 모순되는 과실은 없는 것이다.
또한 이 계경에는 별도의 다른 뜻이 있으니, 이를테면 ‘견’의 방편을 일시 설하여 ‘문’이라 하였다. 즉 세간에서도 방편을 설하여 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간에서 “나는 이러한 문에 의해 당래 반드시 여의(如意)의 재물과 보배를 얻게 될 것이다”고 설하는 것과 같으니, 이는 즉 ‘나는 이러한 방편에 의해……’라고 하는 뜻이다. 세존께서도 역시 수거사(手居士)에게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이러한 문에 의해 여법하게 대중들을 포섭하라”고 하셨으니, 이는 말하자면 ‘4섭사(攝事)에 포섭되는 방편에 의해……’라고 하는 뜻이다.3)
즉 이 경에서는 안식을 설하여 ‘견’의 방편이라 하였으니, 안근은 식에 의지하여 능히 색을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식은 바로 안근의 견(見) 방편이기 때문에, ‘견’의 의지(依止)이기 때문에 일시 설하여 ‘안’이라 한 것이다. 이 같은 뜻으로 [앞의 계경을] 설하면, ‘식을 방편으로 삼아 안근이 능히 색을 본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예컨대 다른 경에서, 색을 요별하는 상태에서 안근은 식의 소의가 되기 때문에, 직접적인 조건[隣近緣]이 되기 때문에 안근 자체를 ‘식’이라는 말로 일시 설한 것과 같다. 그래서 계경에서는 “눈에 의해 알려진 색[眼所識色]”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그러하여 색을 관조(觀照)하는 상태에서 식은 바로 안근의 직접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에, 의지(依止)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안식 자체를 ‘안’이라는 말로 일시 설한 것이니, 경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다. 곧 자아가 근을 임지(任持)하여 능히 대상을 취하게 한다는 외도(外道)들의 전도된 주장을 버리게 하기 위해 이같이 가설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범지로 하여금 식이 근을 임지하여 능히 자신의 경계를 취하게 하는 것이지 자아가 임지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안식을 문으로 삼아 오로지 색을 볼 따름이다”고 설했어야 할 것으로, 마땅히 식을 설하여 저 외도로 하여금 ‘자아가 능히 본다’고 주장하지 않게 했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 외도가 주장하는 자아를 식(즉 마음)이라는 말로 설했어야 하니, 세간에서는 대개 식을 자아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만약 [보는 것이] 눈[眼]이라고만 설하면 안식은 눈을 소의로 삼는 것임을 바로 알게 되니, [보는 것은] 결코 ‘내[我]’가 아니다. 자아 자체는 상주하는 것으로, 어떠한 소의도 갖지 않으므로 ‘소의를 갖는다’는 말만 들으면 자아관념[我想]은 바로 종식되는 것이다.
또한 그 밖의 다른 허물을 피하기 위해 마땅히 ‘식[이 보는 것]’이라고 설해서도 안 될 것이다.5) 이를테면 경에서는 마땅히 “의(意)를 문으로 삼아 오로지 법을 요별한다”고 설하고 있는데, 만약 ‘식[이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정코 마땅히 “의식을 문으로 삼아……”라고 설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같이 설하였다면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니, 의식은 능히 제법을 요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곧 [의식과는] 다른 의근이 식을 방편(즉 문)으로 삼아 요별하는 것이 아닌데, 어찌 ‘의[를 문으로 삼아……]’라고 설하지 않겠는가?6)
[그럴 경우] 역시 그 같은 허물이 있을 것이니, 이를테면 “안을 문으로 삼아……”라고 말하면 바로 안식이 ‘견’의 방편이 됨을 아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의를 문으로 삼아……”라고 설하면 역시 바로 의식이 ‘요별’의 방편이 됨을 알게 되는 것이다.
비록 ‘의[를 문으로 삼아……]’라고 설하였을지라도 그 같은 허물은 없으니, ‘의’라는 말을 들으면 오로지 ‘의(즉 의근)’라고 이해하지 의식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안근에는 식(안식)과 구생(俱生)하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안식은 안근에 대해 견(見)의 방편이 된다. 그래서 이 같은 식을 ‘안’이라는 말(즉 안식)로 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근에는 [식(의식)과 구생하는] 작용이 없으니, 과거법이기 때문이다.7) 즉 의식은 의근에 대해 [요별의] 방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의식을 설하여 ‘의’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식이 법을 요별하는 데 방편이 되는 것은 ‘의’(즉 의근)이니, 요컨대 [의식은] 의근에 근거하여 능히 법을 요별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만약 “안(眼)을 문으로 삼아……”라고 설하면, 지자(智者)는 마땅히 자아관념을 버리게 하기 위해 식을 ‘안’이라고 설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만약 여섯 번째에 이르러 “의(意)를 문으로 삼아……”라고 설하였다면, 지자는 마땅히 “여기서 ‘의’는 바로 의근이니, 요별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고 알아야 한다. 즉 의근을 방편으로 삼아 의식이 능히 요별하는 것이다.
또한 이 경에서는 두 종류의 안근이 있음을 설한 것이니, 이를테면 피동분(彼同分)과 동분(同分)의 안근이 바로 그것이다. 피동분의 안근은 비록 색을 능히 보지는 못할지라도 능히 문(방편)이 되어 동분의 안근을 인기(引起)하여 색을 보는 작용을 낳게 하니, 어떤 하나의 법이 생겨나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피동분의 안근을 획득하고 그런 연후에 동분의 안근을 인기하기 때문이다. 안근과 마찬가지로 나아가 신근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의(意)의 경우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작용을 갖지 않은 것[無用]이며, 둘째는 작용을 갖는 것[有用]이다. 작용을 갖지 않은 ‘의’는 비록 법을 능히 요별하지는 못할지라도 능히 문이 되어 작용을 갖는 ‘의’를 인기하여 법을 요별하게 한다. 곧 의식이 바로 ‘의’이기 때문에, ‘의’가 바로 의식이기 때문에 [경에서] “의가 능히 요별한다”고 설하여도 아무런 과실이 없는 것이다.8)
이상과 같은 따위 의미로써 이 경설을 분별 해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보는 것[見]’은 바로 눈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보는 것’은 바로 식이라는 사실을 성취하기 위해 이 경문을 결정적인 논거로 인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경주(經主)는 말하기를, “그런데 경에서 ‘안(眼)이 능히 색을 본다’고 설한 것은 그것이 바로 견(見)의 소의이기 때문에 ‘능히 본다’고 설한 것이다”고 하였다.9)
어떠한 이유에서 경주는 이같이 주장하게 되었던 것인가?
[경주는] “그 경에서 ‘의(意)가 능히 법을 인식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의근이 능히 인식하는 것은 아니니, 그것은 과거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의근은 바로 의식의 소의가 되기 때문에 ‘능히 인식한다’고 설한 것이니, 안근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10)
그러나 이는 불확정적인 논거[不成證]이니, 의근과 의식은 그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식의 상(相)이 바로 의근이기 때문에 ‘의가 능히 인식한다’고 설하여도 그 상에 어긋남이 없는 것이다. 예컨대 계경에서도 말하기를, “마음[意]의 포악함에 의해 지어지고 발설된 것(즉 신업과 어업)치고 불선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다. 곧 과거의 마음이 능히 이와 같은 신업과 어업의 두 업을 일으킨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는 현재 마음의 포악함으로 말미암아 불선인 신ㆍ어의 두 업을 일으키게 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계경에서 말하였다.
욕계 생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음은
마음이 탁함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탁함에 물들지 않은 마음[意]이 결정코 능히 탁함에 물들지 않은 의식(意識)을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마땅히 ‘[의근은 바로 의식의] 소의가 되기 때문에’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마음은 세간을 이끈다”고 설하고 있지만, 이 어찌 마음을 심소의 원인[事]으로 설한 것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 같은 계경의 설을 인용하여 “여기서 ‘눈이 본다[眼見]’는 말은 ‘능히 그것을 소의로 삼는 식이 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 경에서 설하고 있는 “안(眼)이 색을 본다”는 말을 ‘안식이 능히 색을 본다’는 뜻이라고 주장할 수 없으니, 어떠한 곳에서도 결정적으로 ‘식이 능히 본다’고 설한 일이 없기 때문이며, 곳곳에서 ‘눈이 능히 본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며, 앞에서 언급한 유여사는 ‘혜가 본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경에서 설하고 있는 “의(意)가 법을 인식한다”는 말의 경우, 소의에 대해 식을 설한 것이라 해도 허물이 없을 것이니, [계경] 곳곳에서 “식이 능히 인식한다”고 결정적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며, 결정적으로 “의(意)가 능히 인식한다”고 설한 곳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며, 이러한 뜻 중에는 다른 주장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11)
또한 경주(經主)는 설하기를, “혹은 소의(所依, 안근)에 근거하여 능의(能依, 안식)의 업(즉 작용)을 설한 것이니, 세간에서 ‘평상이나 의자의 소리’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12) 경주는 무슨 근거에서 결정코 이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도 다른 해석도 가능하지 않으니,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소의인 안근의 힘에 의해 식이 색을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불확정적인 논거[不成因]이니, ‘식이 색을 본다’는 논거는 상식적인 사실[極成]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종의에서는 ‘식은 능히 소의인 안근을 주지(住持)하여 능히 색을 보게 한다’고 설한다. 그래서 ‘식이 본다’는 논거는 상식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다른 어떤 경에서도 ‘식이 본다’고 결정적으로 설한 일은 없지만, 어찌 ‘평상이나 의자의 소리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설은 그럴 수 있으니, 세간 상식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즉 소리가 평상이나 의자의 것이라는 사실은 다른 곳에서도 상식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이러한 말(‘평상이나 의자의 소리’라는 말)을 듣고서 능의의 업을 소의에 근거하여 설하였음을 알 수 있다.13) 이처럼 진실의 논의[實論]는 세상이 모두 함께 인정하지만, 그 밖의 가설(假說)로서 ‘식이 본다’는 것은 그렇지 않으니, 이는 피차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極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이와 같이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눈이 본다’는 것도 역시 상식적인 사실이 아닌데, 어떠한 까닭에서 다만 ‘식에 의지하여 눈이 본다’고만 말할 뿐 ‘눈에 의지하여 식이 색을 본다’고는 설하지 않는 것인가?
‘눈이 본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니,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기 때문이며, 안ㆍ이 등의 식은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며, 안ㆍ이 등의 근은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용을 갖는 안근(즉 동분안)은 식을 떠나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안근이 식에 의지하여 능히 본다’고 설한 것이다. 그리고 ‘식이 본다’는 사실에 허물이 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모두 논설하였다. 그래서 마땅히 ‘눈에 의지하여 식이 본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계경에서 “눈에 의해 인식된 색[眼所識色]”이라고 설한 것은 소의(안근)에 근거하여 능의(안식)의 업(즉 작용)을 설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눈(안근)과 식(안식)이 다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제 식의 작용(즉 ‘견’)이 안근에 있다는 사실을 들었고, 소의에 근거하여 능의의 업을 설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따라 또 다른 계경에서 설한 “눈에 의해 흔모(欣慕, 기뻐하여 추구하는 것)된……”이라는 말을 해석하리라. 유여사는 설하기를 “안식이나 안근이 흔모한다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으니, 무분별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요컨대 유분별이어야 흔모는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14) 즉 이 계경에서는 안식에 의해 인기된 분별의 의식을 일시 설하여 ‘눈’이라 이름하였으니, 눈에 의해 전생(傳生)하였기 때문으로, 마치 의근행(意近行)과 같다.15) 그리고 그 같은 의식은 유분별이기에 흔모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의(안근)에 근거하여 능의(안식)의 업(즉 작용)을 설하였다’는 말을 인용하여 ‘안근은 보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논증할 수 없다. ‘눈이 능히 색을 본다’는 사실은 이치[理證]와 교설[敎證]을 모두 충족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바야흐로 식견론(識見論)의 주장이 올바른 이치[正理]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분별하였다. 이에 따라 혜견론(慧見論)의 주장에 대해서도 역시 비판한 셈이니,16) 그 허물이 [식견론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또한 안식과 상응하는 혜가 ‘보는 것’이라면 그 밖의 다른 식과 상응하는 혜도 역시 마땅히 ‘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17) 그럴 경우 일체의 경계 대상은 ‘보여지는 것’이 되어야 하고, 또한 일체의 근은 모두 견(見)의 소의이기 때문에 마땅히 ‘눈’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어떠한 근거에서 오로지 안식과 상응하는 혜만이 ‘보는 것’이고, 그 밖의 식과 상응하는 혜는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또한 앞(제6권)에서 맹인과 맹인 아닌 이 등에 대해 설하면서 그 밖의 온갖 허물과 난점을 분별하였는데, 혜견론의 경우에도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널리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식견론과 혜견론이 이미 다 같이 성립하지 않으니, 이에 따라 ‘안근이 능히 본다’는 사실이 성취되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는 견(見)ㆍ문(聞)ㆍ각(覺)ㆍ지(知)의 4상(相)이 각기 다르다고 설하고 있는데, 잡란(雜亂)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식 등이 능히 ‘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미 앞에서 설한 것처럼 [6식은]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에 견ㆍ문ㆍ각ㆍ지는 마땅히 잡란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종의[此宗]에서는 안식은 근을 임지(任持)하여 ‘견’의 작용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곧 안식이 ‘보는 것’이 아니며, ‘듣는 것[聞]’ 등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또한 ‘눈(안근)이 바로 보는 것’이며, 안식 등은 보는 것이 아니니, 경(經)에서도, 논(論)에서도, 세간에서도, 이치상으로도 그 증거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경’이란 계경(契經, sūtra)을 말하니, [계경] 곳곳에서 모두 ‘눈이 색을 본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다(伽多, gāthā, 게송 즉 詩句)에서도 말하기를 “두 눈과 두 귀가 많이 보고 듣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또한 계경에서는 “나의 모든 제자는 세간의 눈과 같아 세간을 인도하니, 정법에 머무르기 때문이다”고 설하고 있는데, 눈이 만약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세존의 제자들은 마땅히 세간을 인도한다거나 세간의 눈과 같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안 등의 5근은 그 작용이 각기 다르며, 그 경계가 각기 다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설하는 바가 지극히 분명하기 때문이다.
‘논’이란 근본아비달마(根本阿毘達磨)와 비바사(毘婆沙)를 말한다.18) 『발지론(發智論)』에서 말하기를, “두 눈이 색을 본다”고 하였으며,19) 『품류족론(品類足論)』에서도 역시 “[안계란] 눈이 이미 보았고, 지금 보며, 당래 보는 것을 말한다”고 설하고 있다.20) 이와 같은 등의 논설은 다양하게 설해지고 있다. 『비바사』 중에서도 역시 “눈에 의해 획득된 것을 ‘보여진 것’이라 이름하니, 동분의 안근은 ‘견’의 공능을 갖는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그같이 말하였다]”고 설하고 있으며, 그래서 또한 다시 설하기를, “안식에 의해 향수(享受)된 것이란, 바로 안식이 안근을 임지(任持)하여 획득하게 한 것으로, 이를 설하여 ‘견’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세간이라 함은, 세간에서 ‘눈이 본다’는 사실을 다 같이 인정하고 있음을 말하니, 안근이 결여된 자를 ‘맹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치라고 함은, 이를테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는 등의 작용은 각기 다르기 때문에 [그 작용이 동일한] 식 등과는 같지 않음을 말한다.
이렇듯 경에서도, 논에서도, 세간에서도, 이치상으로도 분명하니, 오로지 안근만이 결정적으로 능히 ‘보는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유부(譬喩部)의 논사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따라 이 같은 사실에 대해 거짓되게 탄핵하고 배척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찌하여 함께 모여 [실재하지도 않는] 허공을 서로 움켜쥐려고 맞붙어 싸우는 것인가? 안근과 색경 등을 조건으로 하여 안식이 생겨나는 것인데, 이러한 것들 중 어느 것을 ‘견(見)’에 대한 주체[能]라 하고 객체[所]라 하겠는가? 그것은 오직 법(法)으로서 인과(因果) 관계일 뿐, 그것들 사이에는 실로 어떠한 작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세간의 관습[世情]에 따르기 위해 일시 언설을 일으켜 눈(안근)을 ‘능히 보는 것’이라 일컫고, 식(안식)을 ‘능히 요별하는 것’이라 일컬은 것일 뿐이니, 세존께서도 ‘지역에 따른 언어적 습관[方域言詞]에 대해 견고히 집착해서도 안 되며, 세속의 언어적 개념[世俗名想]에 대해 견고히 추구해서도 안 된다’고 설하셨던 것이다.”21)
그러나 이러한 말은 성교(聖敎)의 올바른 이치에 따른 것이 아니며, 안근이 ‘보는 것[見性]’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역시 능히 비판하지 못하였다. 비록 유위가 모두 연(緣)에 따라 일어난 것[緣起]이라 할지라도 [성교에서는] 제법(諸法)의 개별적인 자상과 작용[相用]에 대해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위법이 비록 다 같이 연에 의해 생겨난 것[緣生]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결정적인 자상과 작용을 상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존께서도 말하기를, “법은 연에 따라 생겨난 것이지만 역시 지(地) 등은 개별적인 자상과 작용을 갖는다고 설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지계(地界) 따위는 비록 연에 따라 생겨난 것이지만 앞(제2권)에서 설한 것처럼 견고성 등의 자상을 지니며, 또한 역시 보지(保持) 등의 결정적인 작용[作業]을 갖는 것이다.22)
이와 마찬가지로 안(眼)과 색(色)과 안식(眼識) 등은 비록 연에 따라 생겨난 것일지라도 필시 갖가지 차별적이고도 결정적인 자상과 작용을 갖으니, 이러한 차별적이고도 결정적인 자상과 작용으로 말미암아 안근은 오로지 안근으로만 불릴 뿐 색이 아니고 식이 아니며, 색은 오로지 색으로만 불릴 뿐 식이 아니고 안근이 아니며, 식은 오로지 식으로만 불릴 뿐 안근이 아니고 색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 비록 총실(總實)의 자상과 작용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그것들을 각기] 능히 보는 것[能見], 보여지는 것[所見], 능히 요별하는 것[能了]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23)
이와 같이 어떠한 경우라도 총실의 자상과 작용이 존재하지 않지만 ‘안근과 색 등을 연으로 하여 안식을 낳는다’고 설할 수 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색과 식 등을 연으로 하여 안근의 견(見)을 낳는다’고 역시 설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법 등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총실의 자상과 작용이 존재하지 않지만, 세간의 관습[世情]에 따라 여기에 마치 총실의 자상과 작용이 존재하는 것처럼 나타나니, 세존께서는 바로 이 같은 총실의 자상과 작용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도록 하기 위해 지혜 있는 자에게 “지역에 따른 언어적 습관에 대해 견고히 집착해서도 안 되며, 세속의 언어적 개념에 대해 견고히 추구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즉 세간에서 ‘총실(즉 자아)로서의 능히 보는 자[能見體相]가 존재한다’고 집착하여 일으키는 언사에 대해 견고히 집착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러한 총실의 자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24) 아울러 세간에서 ‘총실로서의 능히 보는 작용[能見作用]이 존재한다’고 집착하여 일으키는 언어적 개념에 대해서도 견고히 추구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러한 총실의 작용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견’의 자상과 작용과 마찬가지로 그 밖의 존재에 대해서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총실의 자상과 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세속에서 일시 설정된 언어적 개념[假立名言]마저 초월하여서도 안 되지만, 한결같이 승의(勝義)에 따라 머물면서 역시 또한 개별적인 실체의 작용[別實用]마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정코 승의를 어기지 않으면서 세속에서 일시 설정된 언어적 개념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세존께서는] 바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다만 세간에서 일으킨 총실의 자상과 작용에 대해 견고히 집착하고 추구하는 것을 비판하였던 것이지 승의 제법의 각기 개별적인 자상과 작용에 대해 견고히 집착하고 추구하는 것 역시 비판하여 그렇게 말하였던 것은 아니다. 일체법이 연기(緣起)하는 자상과 작용은 각기 실유이기 때문으로, 일체(즉 총실)를 인연으로 하여 일체의 결과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종의에서는 2제(諦) 모두에 의거하여 ‘눈은 능히 보는 것’이라고 설하니, 양자 모두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다.25) 세존께서도 역시 작자와 작용을 인정하였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필추(苾芻)들은 [식이] 능히 요별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능히 요별하기 때문에 식이라 이름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파륵구나계경(頗勒具那契經)」에서 “나는 끝내 능히 요별하는 자가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는다”고 설하였을지라도 작자와 작용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니, 부정하는 것은 일부이기 때문에 이같이 설한 것이다.26) 이에 대해서는 「변연기품(辯緣起品)」 중에서 마땅히 다시 분별하게 될 것이다.27)
이와 같이 성교(聖敎)와 올바른 이치[正理]에 안주하면서 사유하고 탐구하여 ‘눈이 보는 것이지 다른 것이 보는 것이 아니다’고 결택해야 함에도 그(비유부 논사)들은 이에 대해 거짓되게 탄핵하고 배척하여 세속의 이치를 부정하고 승의의 종의를 멸시하였다. 허공을 서로 움켜쥐려고 맞붙어 싸우려는 것은 오로지 그들 자신에게 해당될 따름이다. 또한 인용한 교설로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그들이] 말한 ‘눈은 견(見)의 주체가 아니다’, ‘눈이 본다고 설한 것이 아니다’고 함이 어찌 제법에 총실(즉 자아)의 자상과 작용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외도들의 주장과 같다고 하지 않겠는가?28) 또한 그들이 설한 인과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니, 제법의 개별적인 자상과 작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제법 각각에 개별적인 자상과 작용이 존재해야만 비로소 인과의 차별이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제법에 개별적인 자상과 작용이 존재한다고 인정할 경우, 그와 같은 비방과 훼손은 바로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나아가 총실(總實, 전체자)로서의 작용이든 별실(別實, 개별자)로서의 작용이든 그 어떠한 작용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세속제와 승의제의 이치를 어기게 된다. 그러나 이미 인과와 2제(諦)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였으므로 마땅히 제법에는 가유(假有)와 실유(實有)의 작용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근 등이 대상을 취한다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으니, 말하자면 [안근이] 능히 보고, 듣고, 냄새맡으며, 맛을 보고, 느끼며, 요별하는 것이다.
1) 일안견(一眼見)과 이안견(二眼見)
이와 같이 ‘견(見)’이라고 하는 작용의 전체적 특성[總相]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다시 ‘견’이라는 작용의 개별적인 특성[別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29) 보여지는 색을 ‘하나의 눈이 본다[一眼見]’고 해야 할 것인가, ‘두 눈이 본다[二眼見]’고 해야 할 것인가?
어떠한 까닭에서 이에 대해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인가? 이 어찌 상식적인 사실이 아니겠는가? 한 눈을 감더라도 다른 한 눈으로 능히 볼 수 있으니, 이는 바로 두 눈이 함께 능히 색을 보는 것으로, 그 뜻이 이미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뜻이 성취되었다고 할지라도 아직 두 눈이 색을 본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두 눈으로 색을 본다고 할 때 각기] 전후로 보는 것인가, 동시[俱時]에 보는 것인가를 자세히 알기 위해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이다. 두 눈 중 어느 한 눈을 막거나 혹은 한 눈이 손상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다른 한 눈의 보는 공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따라서 한 눈으로도 역시 능히 색을 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의 두 눈이 손상되지 않아 함께 뜨게 되면 두 개의 안근이 동시에 색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눈이 색을 본다’는 사실의 의미는 쉽게 이해될 수 있지만 ‘두 눈이 함께 본다’고 하는 사실은 이해되기 어렵기 때문에 마땅히 분별하고 해석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혹 두 눈[二眼]으로 동시에 볼 경우
색을 보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혹 어떤 때에는 두 눈이 동시에 능히 색을 본다.30)
어떠한 근거에서 이같이 결정적으로 아는 것인가?
보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한 눈을 감으면 색의 상속에 대한 ‘견’은 분명하지 않지만, 두 눈을 뜰 때 이러한 색에 대한 ‘견’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두 개의 안근이 전후로서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비록 두 눈을 떴을지라도 그것은 다만 한 눈의 ‘견’일 따름이다. 그럴 경우 한 눈을 감으면 색을 보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고 하지만, 두 눈을 떴을 때에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또는 두 눈을 뜨면 색을 보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지만, 한 눈을 감을 때에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31)
그러나 이미 이와 같다고는 하지 않았으니, 혹 어느 때 ‘두 눈이 동시에 본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아는 것이다. 즉 그것(두 눈)은 [안식의] 소의로서 동일하기 때문으로,32) 눈이 설혹 백천 개라 할지라도 하나의 식을 낳을 것인데 하물며 오로지 두 개만이 존재하는데 말해 무엇할 것인가?
1-1) 일안견설(一眼見說) 비판
그런데 어떤 부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위치하는 장소가 떨어져 있기 때문에 눈이 색을 볼 때 오로지 한 눈으로 보는 것이지 두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한 눈으로 화살 등을 관찰할 때 굽었거나 곧은 형태를 능히 살펴 결정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두 눈의 작용이]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증상만(增上慢)의 마음이 ‘나는 동시에 두 눈으로 능히 본다’고 말할 따름이다.”33)
그러나 이러한 설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온몸이 찬물이나 따뜻한 물 속에 들어가 있을 때 사지나 몸의 신근이 동시에 그 감촉을 느끼는 것을 어찌 경험해 보지 않았을 것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두 눈이 위치하는 장소는 비록 떨어져 있을지라도 동시에 색을 본다는 이치 또한 어긋남이 없는 것이다. 비록 두 안근이 위치하는 장소는 각기 다를지라도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의 근에 포섭되며, 이러한 두 눈에 근거하여 오로지 하나의 안식만이 생겨날 뿐이기 때문에 [두 눈이] 동시에 함께 본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어떠한 허물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화살 등이 굽고 곧은 것은 다만 한 눈으로 살펴야 능히 알 수 있으니, 이는 별도의 다른 원인 때문이다. 여기서 별도의 다른 원인이란, 안근의 극미는 향릉화(香菱花)처럼 횡으로 퍼져 머물기 때문에 바로 앞에 나타난 것은 보는 것이 분명하지만, 바로 앞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보는 것이 명료하지 않다. 즉 화살 등의 굽고 곧은 형태를 관찰할 때 두 눈 중간에 화살 등을 둘 경우, 두 눈은 다 같이 바로 앞에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게 되매 서로를 어지럽혀 자세히 살펴보지 못하는 것이다. 설혹 한쪽 눈앞에 화살 등을 갖다 댈 때라도 다른 한 눈은 옆에서 보게 되매 역시 자세히 알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한쪽 눈을 감고 화살 등의 물건을 다른 한쪽 눈앞에 갖다 댈 때, 한쪽 눈은 서로 어지럽히는 일이 없어 굽거나 곧음을 쉽게 살펴 바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두 눈이 위치하는 장소가 떨어져 있기 때문에 동시에 보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이 역시 그렇지가 않다. 예컨대 사람의 두 손은 차가움이나 따뜻함을 동시에 느끼니, 위치하는 장소가 비록 떨어져 있을지라도 동시에 식을 낳기 때문이다. 눈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니, 어찌 동시에 보지 않을 것인가? 또한 한쪽 눈 중에 먼지 티끌이 들어가 가려지는 경우, 마땅히 동시에 함께 하나의 식을 낳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다만 두 눈의 작용이]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증상만을 일으켜 ‘나는 동시에 두 눈으로 본다’고 말한다”고 하였지만, 이는 진실로 능히 본 것이지 증상만이 아니다. 비록 두 눈의 보는 작용이 빠를지라도 만약 한 순간에 하나의 눈만이 식을 낳고 다른 눈은 능히 식을 도와 낳게 할 수 없다고 한다면, 두 눈을 뜨든 혹은 한쪽 눈을 감든 색을 보는 데 밝고 어두운 차별이 없어야 할 것이니, 한쪽 눈에 따라 일어나는 식은 결정코 공(空, 비존재)이기 때문이다.34)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상좌(上座)가 논설한 바에 대해서도 역시 비판할 수 있으니, 그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두 눈이 경계 대상에 대해 전후로 작용을 일으키면 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혹 한쪽 눈을 감거나 손상을 입었을 때 다른 한쪽 눈을 비록 뜨고 있을지라도 서로 대체될 것이 없으며, 그것에 의해 생겨나는 식은 오로지 한쪽 눈에만 근거하여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보는 것이 명료하지 않다.”
이러한 설 역시 옳지 않다. 즉 그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두 눈이 찰나에 전전(展轉)하여 서로 대체될 때 한쪽 눈은 항상 공(空)이어서 능히 색을 보지 못하며, 항상 다른 한쪽 눈만이 능히 색을 보기 때문에 한 눈으로 색을 보는 한 밝고 어두운 차별은 마땅히 없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말한 바는 능히 기뻐할 만한 것이 아니다.
또한 만약 ‘한쪽 눈을 감거나 손상을 입었을 때 안식은 항상 다른 한쪽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보여진 색이 명료하지 않다’고 한다면, 두 눈이 손상되지 않고 모두 뜨고 있을 때 하나의 안식은 두 눈에 의지하여 일어나므로 이에 따라 보여진 색은 명료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두 눈이 손상되지 않고 모두 뜨고 있을 때조차도 안식이 한쪽 눈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바로 앞에서 설한 바(즉 한쪽 눈을 감거나 손상을 입었을 때의 안식)와 같다. 혹은 또한 “만약 한쪽 눈을 감거나 손상을 입었을 때 다른 한쪽 눈을 비록 뜨고 있을지라도 서로 대체될 것이 없으며, 그것에 의해 생겨나는 식은 오로지 한쪽 눈에만 근거하여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보는 것이 명료하지 않다”고 하는 말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될 것이며, ‘대체될 것이 없다’는 말 역시 이치에 부합하지 않으니, [하나의 눈이] 찰나에 전후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다고 할 경우] 첫 찰나의 식은 마땅히 명료해야 할 것이며, 또한 마땅히 의식은 항상 어두워야 한다.35)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에는 결정코 색을 보는 데 밝고 어두움을 차별할 만한 어떠한 근거[因緣]도 없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마땅히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니, 안식이 생겨날 때 좌우 두 눈의 중연(衆椽)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데, 어째서 동시에 함께 능히 식을 낳지 못하는 것인가? 두 눈이 전후로서 식을 낳는다고 논의한다면, 중연이 갖추어진 때라도 어떠한 이유도 없이 식을 낳게 하는 작용이 첫 찰나에 왼쪽 눈의 것이면 오른쪽 눈의 것이 아니어야 하거나 혹은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저 상좌가 논의하는 종의에서는 온 몸이 찬물이나 따뜻한 물 속에 들어가 있을 때 신근의 극미가 두루 식을 낳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혹 신체 표면의 신근이 손상되었을 때 비록 신식을 낳을지라도 명료하지 않다. 따라서 신식이 명료하게 생겨날 때에는, 결정코 소의가 몇 백 유선나(踰繕那)에 걸친 신근의 경계를 두루 널리 일으켜 위아래의 몸이 동시에 하나의 식을 낳아 두루 나타나게 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36) 그런데 어떠한 이유에서 두 눈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고 함께하는 공동의 대상이 나타났는데 동시에 함께 하나의 식을 낳는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여기서 그의 뜻을 관찰해 보건대 별도의 이유가 없으며, 다만 아비달마의 위대한 논사들이 설한 종의를 고의로 어기고서 어리석은 대중들에 대해 자신의 총명함을 드러내려고 한 것일 뿐이다.
대법자(對法者)는 설하였다.
“신근의 극미는 이치상 결정코 일체가 모두 동분이 되는 일이 없으니, 열 세 가지의 화취(火聚)가 온몸을 휘감아 핍박할 때라도 여전히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신근의 극미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바로 피동분(彼同分)이어서 신식을 낳지 않는다. 만약 두루 신식을 낳는다면 몸은 마땅히 산괴(散壞)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37)
[이에 대해] 저 상좌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마땅히 따져 힐난해 보아야 할 것이니, 그의 몸이 산괴되지 않는 것은 신식이 두루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숙업(宿業)의 힘에 의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또한 그의 신체형태상의 해손(害損)은 신식에 의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불에 태워졌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또한 그의 신체 중에 맹렬한 불길이 두루 핍박하였는데, 어떠한 이유에서 신식이 두루 일어나지 않은 것인가? 또한 신식을 일으킨 부위의 몸은 마땅히 산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힐난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으니, 업은 요컨대 연(緣)에 근거[待]하여 능히 몸을 임지(任持)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의 몸 중의 신근극미는 업력에 의해 두루 식을 낳지 않게 된 것이다. 두루 식을 낳아 몸이 바로 산괴되는 일이 없는 것인데, 그(상좌)는 어찌 이와 같은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인가? 또한 이에 따라 업력에 수승하고 저열한 차별의 뜻도 이루어지니, 저 유정이 받는 고통의 경중(輕重)은 업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피동분의 신근극미가 적으면 맹렬하고 날카로운 고수(苦受)가 생겨날 것이지만, 만약 피동분의 신근극미가 많다면 미열한 고수만을 낳을 뿐이다.
만약 ‘업력이 수승하거나 저열한 이숙의 고통을 초래하는 것은 원래 그러한 것[法爾]인데, 어찌 그것(동분과 피동분)에 의한 것이라 하겠는가?’라고 한다면, 이러한 책망은 옳지 않으니, 동일한 신체가 전후로 수승하고 저열한 고통을 받는 것은 마땅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업력이 동일한 신체 중에서 고수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며, 전후에 걸친 수승하거나 저열한 만업(滿業)이 다수이기 때문에 그 같은 허물은 없다’고 한다면, 이치 또한 그렇지 않으니, 다수의 업의 이숙이 전후로 생기한다는 사실에는 결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38)
그러나 만약 ‘연과 화합할 때 [이숙과가] 생겨난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업력은 연에 근거한다’는 뜻이 성취되니, 업이 비록 이숙의 고과(苦果)를 초래할지라도 요컨대 신(身)과 촉(觸)을 연으로 삼을 때 비로소 신식(身識)이 낳아지며, 신식과 동시에 고수(苦受)를 낳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업력은 반드시 연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비정법(非情法) 역시 능히 연이 되어 고수를 낳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이 이숙과는 아니다. 만약 ‘그러한 연 또한 업력의 증상과(增上果)이다’고 한다면, 증상과는 이미 이숙과가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상속하는 것도 아니며, 그것의 수승하고 저열함도 정해진 바가 없다. 그런즉 어떠한 업도 연에 근거하지 않고서 이루어지는 것은 없으니, 이러한 이치는 어기기 어렵다. (다시 말해 결정적인 것이다.) 따라서 내가 말한 “그의 몸 중의 신근극미는 업력에 의해 두루 식을 낳지 않게 된 것으로, 두루 식을 낳아 몸이 바로 산괴되는 일은 없다”고 한 것은, 그 이치가 지극히 잘 성립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신체 형태상의 해손은 신식에 의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불에 태워졌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결정코 신식에 의해 해손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니, 만약 식이 외계의 불을 요별하는 일이 없었다면 열의(悅意)의 경계가 현전한 것도 볼 수 없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낙수가 생겨나지 않았다면 어찌 몸에 이익됨이 있을 것인가? 총명한 모든 이는 다 이와 같이 말한다.
‘외적 조건[外緣]을 만나 내적 경계[內境]를 각발(覺發)하여 심ㆍ심소를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자신에게 손해가 되기도 하고 이익이 되기도 한다.’
만약 고수(苦受)가 식과 함께 생겨나는 일이 없었다면 무엇이 그의 몸에 대해 능히 손해를 끼치게 될 것인가? 그러므로 그의 주장은 이치상 결정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또한 “그의 신체 중에 맹렬한 불길이 핍박하였는데, 어떠한 이유에서 신식이 두루 일어나지 않은 것인가?”라고 말하였으니, 상좌 또한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해 마땅히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두 눈의 경계 대상이 모두 현전하였는데, 오로지 하나의 안근만이 식을 낳을 뿐 두 안근이 모두 식을 낳지 않는 것인가?”
또한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앞에서 무엇을 설하였던가?
이를테면 “그의 몸 중의 신근극미는 업력에 의해 두루 식을 낳지 않게 된 것으로, 두루 식을 낳아 몸이 바로 산괴되는 일은 없다”고 하였다.
[또한 상좌는] “신식을 일으킨 부위의 몸은 마땅히 산괴되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어떠한 근거에서 그의 몸이 산괴되지 않음을 결정적으로 아는 것인가?
예컨대 등활나락가(等活那落迦) 중에서는 식을 일으킨 부위에 따라 몸은 부분적으로 허물어지지 완전히 허물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39) 만약 몸이 완전히 허물어진다면 그는 마땅히 자꾸자꾸 목숨을 마치고 생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모든 신체의 부분은 대개 동시에 하나의 식을 낳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안근에는 비록 두 곳이 있을지라도 역시 동시에 함께 하나의 식을 낳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의 안식이 두 안근에 의해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식은 형색(形色)도 없으며, 주처(住處, 머무는 곳)도 갖지 않기 때문에,40) 두 눈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상(相)을 결정적으로 설하기는 어렵다.
[주처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식은 주처를 갖지 않으니, 하나의 식은 다수의 근에 두루 근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만약 안식이 주처를 갖는다고 한다면, 안근은 두 개이고, 안식은 오로지 하나이니, 식은 마땅히 다만 한 눈에 의지하여 일어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한 눈으로만 색을 볼 뿐 두 눈이 [동시에]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혹은 마땅히 한 찰나의 상속에 두 근에 근거하여 일어난 두 가지의 식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두 가지 사태는 모두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심ㆍ심소는 결코 주처를 갖지 않는 것이다.
만약 하나의 식이 일 찰나 중에 두 곳의 안처에 머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한 부분을 갖든지[有分] 서로 뒤섞이든지[相雜] 하나의 식이 아니어야[非一] 하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41)
즉 만약 하나의 식이 일 찰나 중에 두 눈에 머무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한 부분의 식만을 성취해야 할 것이니, 왼쪽 눈에 머무는 식은 오른쪽 눈에 머무는 것이 아니며, 오른쪽 눈에 머무는 식은 왼쪽 눈에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마땅히 서로 뒤섞여야 할 것이니, 두 눈 중간에 머무는 안식은 또한 역시 신근에 근거하여 머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신식도 역시 안식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하나의 식이 아니어야 할 것이니, 안식이 두 눈에도, 그 중간에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두 눈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의 식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다고 한다면 마땅히 하나의 안식은 동일한 시간에 각기 하나의 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안식은 일 찰나 중에 두 곳의 안처에 머무는 것이라고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안식이 안근 중에 머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마땅히 어떤 방식으로 머문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마치 기름이 마(麻)에 머물듯이 [두 가지] 본질이 서로 뒤섞여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과일이 그릇에 머물듯이 각기 별도로 서로에 의존하며 머문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두 주장은 다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약 앞의 경우와 같다고 한다면, 안근과 안식은 존재 자체가 각기 다름에도 마땅히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며, 뒤의 경우와 같다고 한다면, 공간적 부피[方分]를 갖지 않는 법(즉 안식)이 개별적인 실체로서 [안근과] 서로 화합한다는 이치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심ㆍ심소가 주처를 갖지 않는다고 한다면, [계경에서] 어떻게 ‘안근에 의지(依止)하여 온갖 색을 요별하기 때문에 안식이라 이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만약 안식이 안근 중에 머물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안근이 [안식의] 소의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책망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안근은 안식과 공통되지 않는 것으로서 생기의 직접적인 연[隣近緣]이 되기 때문에 의지(依止)가 되고 소의가 된다고 하였다. 곧 ‘그것에 근거[依]한다’는 말을 ‘그 가운데 머무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니, 역시 또한 ‘신하가 왕에 의지한다’거나 ‘사람들은 재물이나 먹을 것에 의지한다’고도 말하기 때문이다.
만약 안식은 소의인 근에 따라 손상되기도 하고 이익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안근 중에 머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치 또한 그렇지 않으니, 그림자나 빛, 거울에 맺힌 상(像) 등의 경우를 보건대 그 근거에 따라 손상되기도 하고 이익이 되기도 하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림자 등은 나무 등에 머물지 않으면서도 나무 등에 손상이나 이익이 있을 때 그림자 등도 그 근거에 따라 역시 손상되고 이익되는 경우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대해(大海)를 보건대 달이 이지러지고 참에 따라 물[에 비친 그것]에도 역시 증감이 있지만 대해의 물은 달 중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그대가] 내세운 논거는 진위부정의 오류[不定失]를 범하는 것이다.42)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안식은 안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안식은 어째서 눈의 근거인 살덩이나 안약, 안주(眼籌, 안약을 바르는 도구), 눈꺼풀 위의 티끌 따위를 능히 취하지 못하는 것인가?
설혹 안식이 안근 중에 머무는 것이라고 인정할지라도 지극히 서로를 핍박하기 때문에 능히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안식이 경계 대상에 머물지 않듯이 근에도 역시 머물지 않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찌 색과 마찬가지로 안근의 살덩이 따위도 역시 마땅히 능히 취할 수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 역시 그렇지 않으니, 능의인 식과 소의인 근이 동일한 대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지극히 멀리 있는 색은 식이 머무는 곳(즉 근)과 비록 서로 인접해 있지 않을지라도 능히 취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살덩이 따위는 [식이] 머무는 근과 지극히 인접하여 서로를 핍박하기 때문에 식이 취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존재하는 모든 색으로서 [식이] 머무는 근과 서로 인접하여 핍박하지 않는 것은 모두 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이 경계 대상을 취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法爾]으로, 만약 취해지는 경계 대상이 소의가 되는 근과 지극히 가까이 있거나 지극히 멀리 있을 경우 능히 취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안식은 마땅히 주처를 갖는다고 해야 할 것이니, 머무는 곳이 없다면 이러한 식과 취해지는 색 사이가 지극히 가깝다거나 지극히 멀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43)
이 또한 그렇지 않으니, 가깝고 멀다는 말은 소의인 근에 대해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직접적인[隣近] 생기의 원인[生因]에 대해 그같이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안근은 바로 안식의 직접적인 생기의 원인으로, 식은 안근을 자아로 집착하기 때문에 이러한 원인에 근거하여 [취해지는 색이] 가까이 있다거나 멀리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안식은 소의신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몸에 근거하여 가까이 있다거나 멀리 있는 것이라고 말하여도 아무런 허물이 없을 것이니, 이 같은 이유에서 몸을 유식신(有識身)이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즉 식은 몸(소의신)을 자신의 내적 존재[內有]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안식은 소의신 중에 존재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심ㆍ심소법은 결정코 주처를 가지니, 모든 결과를 현견(現見)하건대 원인[因處]에 머물기 때문이다. 즉 세간에 생겨난 모든 결과를 보건대 능히 그것을 낳은 원인에 머물고 있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이를테면 갈랄람(羯剌藍, kalalaṁ,잉태 후 첫 7일 간의 상태)은 [부모의] 정혈(精血)에 머물며, 싹 등도 역시 종자 등의 원인에 머무는 것과 같다. 안근은 바로 안식을 낳는 원인이니, 안식은 결정코 안근의 처소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만약 ‘소리와 같은 것은 본체[本, 소리를 낳게 한 원인]를 떠나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구난(救難)은 옳지 않으니, 소리는 필시 소의인 본체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거름[糞土] 등의 상속이 [종자 등의 상속과는] 다른 것이듯이 종자 등의 상속도 [거름 등의 상속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근과 안식은 존재 자체가 다르므로 상속도 다르다. 이를테면 거름 등이 비록 싹 등의 원인일지라도 존재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주처도 각기 다르다. 안식도 역시 그러하여 안처에 머물지 않는다. [나아가] 싹 등과 같은 것은 종자 등의 원인과 그 상속이 다르지 않다고 해서 그것에 머문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식은 색 등의 처소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색, 밝음, 공간, 그리고 작의(作意) 등이 능히 원인이 되어 안식을 발생시킨다고 할지라도 식이 생겨날 때 그러한 곳에 머물지 않듯이, 안근 역시 마땅히 그러하여 비록 식의 원인이라 할지라도 식이 생겨날 때 그곳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안근이 비록 색 등과 더불어 식의 원인이 될지라도 안식이 생겨날 때 오로지 안근에만 의지하고 색 등에는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안근이 비록 색 등과 더불어 식의 원인이 될지라도 안식이 생겨날 때 오로지 안근에만 머물고 색 등에는 머물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어찌 같다고 하지 하겠는가?
그대는 여기서 어떠한 이유에서 이 같은 뜻을 취하지 않는 것인가?
‘안근이 비록 색 등과 더불어 생겨날 식에 대해 소의가 되고 소의가 되지 않는 차이는 있을지라도 안식에 대해 다 같이 다른 존재로서 상속하는 원인[異類相續因]이 되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안근은 비록 색 등과 더불어 생겨날 식에 대해 소의가 되고 소의가 되지 않는 차이는 있을지라도 다 같이 식이 머물지 않는 원인[識非所住因]이 된다.’
이에 따라 알아야 할 것이니, 심ㆍ심소법은 결정코 주처를 갖지 않으며, 그 이치는 지극히 잘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앞서 말한 “식은 형색(形色)도 없으며, 주처도 갖지 않기 때문에 두 눈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상(相)을 결정적으로 설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은 이치상 필시 마땅히 그러한 것이다.44)
2) 근(根)과 경(境)의 접촉ㆍ불접촉의 문제
이상에서 설한 바와 같은 안근 등의 온갖 근은 자신의 대상을 취할 때 직접 접촉[至]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不至]고 해야 할 것인가?
어째서 이 같은 문제에 대해 다시 의심을 낳게 되었던 것인가?
계경 중에 두 가지의 설이 있음을 바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존께서 설하시기를, “유정의 안근은 좋거나[愛] 좋지 않은[非愛] 색에 구애(拘礙)된다”고 하셨으니, 서로 접촉하지 않고서 구애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세존께서 설하시기를, “그는 천안으로써 모든 유정을 관찰함에……(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어떤 이는 멀리 있고 어떤 이는 가까이 있다”고 하였으니, 직접 접촉한 대상에 대해서는 원근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두 가지 교설로 말미암아 다시 의심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근(根, 감관)과 경(境, 대상)이 서로 접촉한다고 할 때 그 뜻은 일정하지 않다. 만약 공능(功能, 작용)의 관점에서 본다면 대상에 도달하는 것을 ‘접촉’이라 이름하며, 그럴 경우 일체의 근은 오로지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만을 취할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근의 본질적 특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근과 경 사이의 어떠한 간격도 없는] 무간(無間)을 ‘접촉’이라 이름한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근ㆍ이근ㆍ의근과 그 대상은
접촉하지 않으며, 나머지 세 가지는 이 반대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안근은 오로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다시 말해 그것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대상[非至境]만을 취하니, 멀고 가까운 두 대상을 동시에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근이 만약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을 취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행동(行動, 작용)이 있어야 하는데, 천수(天授) 등에게 행동할 만한 법이 있더라도 멀고 가까운 두 곳에 일시에 함께 이르지는 않는다.45) 그렇기 때문에 안근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을 취하는 것이다.
만약 ‘등불처럼 멀고 가까운 경계에 일시에 함께 이르니, 이는 바로 그것(안근)의 본성이기 때문이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으니, 그 논거가 확정적이지 않기[不成]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이는 설하기를, “비유하자면 밝은 등불이 멀고 가까운 두 곳에 함께 이르러 비추는 것처럼 안근도 역시 그러하여 멀고 가까운 두 경계에 함께 이르러 취하니, 저 밝은 등불처럼 밝음[明]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46)
그러나 이러한 논거는 확정적이지 않으니, 안근이 화대(火大)의 밝음[火明]을 본성으로 한다는 것은 상식적 사실[極成]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안근은 마땅히 화대의 밝음을 본성으로 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어둠 속에서는 광명을 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등불이 항아리나 옷 등을 비추고자 할 때에는 별도의 광명을 구하여 그것의 도움으로 비로소 능히 비추는 것이 아니다. 만약 안근 중에는 화대의 밝음이 적기 때문에 보다 큰 광명의 도움을 받아야 비로소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적은 밝음은 큰 밝음에 의해 은폐된다는 것은 지금 바로 경험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안근은 필경 능히 색을 볼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등불[明燈]의 비유와 안근의 경우는 동일하지 않으니, [안근의 경우 대상과] 지극히 인접하여 무간(無間)이 되면 비추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등불의 경우 기름이나 심지 등 지극히 인접한 사물도 능히 태우면서 능히 비출 수 있지만, 안근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 안약 등 지극히 인접한 경계 대상은 능히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등불은 비춰지는 온갖 사물을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 무간에 두루 비추지만, 안근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 혹 중간의 숲 등의 색을 뛰어넘어 바로 산 등을 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등불의 비유와 안근의 경우는 동일하지 않다고 한 것이다. 곧 앞서 내세웠던 논거인 ‘멀고 가까운 두 대상을 동시에 취하기 때문에’는 ‘안근은 오로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만을 취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이치상 어떠한 어긋남[傾動]도 없는 것이다.
또한 안근은 마땅히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이라야 비로소 취할 수 있으니, 바로 인접하여 핍박하는 대상(예컨대 안약)은 능히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파지가(頗胝迦, sphaṭika, 수정을 말함) 등에 감추어진 색도 능히 취할 수 있기 때문이며, 또한 보여지는 것에 대해 의혹[猶豫]을 갖기 때문이다. 만약 직접 접촉한 대상을 취하는 것이라면 어찌 의혹이 있을 것인가? 직접 접촉한 것에 대해 의혹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47) 또한 [직접 접촉한 대상만을 취한다고 할 경우] 사람과 나무 그루터기의 차이를 살펴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니, 이미 직접 접촉한 대상만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으므로 그는 [나무 그루터기의] 견고한 상을 살펴 알았을지라도 [사람과의] 차별은 살피지 못할 것인데, 여기(안근은 직접 접촉한 대상을 취한다는 사실)에 무슨 근거가 있을 것인가?
또한 안근이 멀리 있는 대상과 직접 접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니, 여기(지상)에 존재하는 눈이 수천 유선나(踰繕那) 떨어진 달에 이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만약 ‘안근에는 밝음[明], 즉 광명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같은 허물이 없다’고 한다면, 이치는 역시 그렇지 않으니, 안근에 화대(火大)의 밝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안근의 자성은 화대가 아닌데, 어찌 화대의 밝음이 존재할 것인가?
이근(耳根)도 역시 오로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만을 취하니, [4]방(方) [8]유(維)의 멀고 가까운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맛[味] 등과 마찬가지로 소리가 이근에 이를 때 비로소 들을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도 이 같은 남북 등 [4]방 [8]유의 멀고 가까운 온갖 차별의 음성을 알아듣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니, [그럴 경우] 어찌 비근(鼻根) 또한 [4]방 [8]유의 멀고 가까운 향의 차별을 능히 알아보지 못할 것인가?48) 비록 알아볼 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다만 방처(냄새나는 장소)에 따라 돌아다니면서 향을 취하여 명료하게 그 차별을 추리하여 아는 것일 따름이다.49) 그러나 안근과 이근이 [4]방 [8]유의 멀고 가까운 대상을 보고 듣는 것은 일시 돌아다니지 않고서도 능히 알 수 있기 때문에 비근이 대상을 취하는 것과는 유사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멀고 가까운 소리를 취함에 있어 명료하고 명료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직접 접촉한 대상만을 취하는 것이라면 들은 소리는 모두 명료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멀고 가까운 소리를 취함에 있어 결정적이라거나 의심스럽다고 하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직접 접촉한 대상만을 취하는 것이라면 직접 접촉하여 들려진 소리에는 [결정적이라거나 의심스럽다고 하는] 어떠한 차별도 없어야 하기 때문에 가까이서 나는 소리를 결정적으로 아는 것처럼 멀리서 나는 온갖 소리에 대해서도 어떠한 의심이 없어야 할 것이다. 혹은 멀리서 나는 소리에 대해 의심하는 것처럼 가까이서 나는 온갖 소리에 대해서도 결정적으로 아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이근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소리만을 능히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의근(意根)도 역시 오로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만을 취하니, [동일 찰나에 존재하는] 구유법(俱有法)과 상응법(相應法)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비근이 비록 자신의 향과 구생(俱生)의 향을 능히 취하지 않을지라도 직접 접촉한 대상을 취하듯이 의근도 역시 그러하다’고 한다면, 이치상 필시 그렇지 않으니, 비근은 외적 지각[外覺]이 일어남에 따라 내적으로 구생한 향을 비로소 능히 취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50) 이(비근의 예)는 마치 ‘오로지 내적으로 먹어야 능히 식사하는 것이다’고 설하는 것과 같지만, [밖에서] 취하지 않을 때는 능히 식사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무색법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공간적 方處를 갖지 않기 때문에) 능히 직접 접촉한 대상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근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을 취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힐난하여 말하고 있다.
“‘세 근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만을 능히 취한다’고 함은 이치상 필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니, 언제 어디서든 [세 근이] 능히 취하는 것은 모두 다 직접 접촉하지 않은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세 근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을 취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천상의 것이든 지하의 것이든, 지극히 먼 곳에 있는 것이든, 장애물에 막혀 있는 것이든, 이미 소멸한 것이든,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든 직접 접촉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에 직접 접촉하지 않은 모든 사물을 [능히 취할 수 있어야 함에도] 어찌 능히 취하지 못하는 것인가? 또한 그러한 세 근으로서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과 이미 소멸한 것은 어찌 능히 취하지 못하는 것인가? 또한 [이들 세 근이]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을 때에는 어째서 또 다른 방향의 경계 대상을 능히 보지 못하는 것인가?51)
이러한 힐난은 옳지 못하니, 비유하자면 자석이 능히 철(鐵)을 끌어당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즉 자석이 비록 직접 접촉하지 않은 모든 철을 끌어당길 수 있다 할지라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먼 백천 유선나 정도 떨어져 있는 철은 능히 끌어당길 수 없고, 또한 직접 접촉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미 소멸한 것이나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 마주하고 있지 않은 모든 철도 능히 끌어당길 수 없으며, 또한 아직 생기하지 않았거나 이미 소멸한 자석 역시 능히 끌어당길 수 없는 것과 같다. 또한 [비유하자면] 거울 등에 영상이 생겨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즉 거울 등이 비록 직접 접촉하지 않은 사물의 영상을 능히 낳을 수 있다 할지라도 지극히 멀리 있거나 장애물에 은폐되어 있는 것이거나 이미 소멸하였거나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 그리고 마주하고 있지 않은 일체의 모든 사물의 영상을 능히 낳을 수 없으며, 또한 아직 생기하지 않았거나 이미 소멸한 거울 역시 능히 영상을 낳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안근 등도 역시 그러하여 그같이 힐난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힐난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만을 능히 취하는 세 근의 작용을 물리치게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근은 능히 직접 접촉한 대상을 취하니, 소리가 상속 전전(展轉)하여 귀에 들어오기 때문이며, 또한 스스로 능히 귓속의 소리(즉 耳鳴)를 듣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설 또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손으로 잠시 요령을 잡으면 소리가 단박에 그치기 때문이다. 만약 소리가 상속하여 귓속에 들어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손으로 요령을 잡을 때 [지금] 요령에 근거하여 울리는 소리는 그치지만 [이미] 그것으로부터 전생(傳生)한 중간의 소리는 바탕[質, 즉 요령]을 떠나 상속하여 그치지 않으니, 이 소리는 마땅히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요령을 잡을 때 일체의 요령의 소리는 단박에 그쳐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경험상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또 다른 소리(이미 일어나 상속 중인 소리)를 그치게 할 수는 없지만, [손으로 잠시 요령을 잡으면] 또 다른 소리 역시 따라 그치니, 다른 소리(지금 일어나는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또 다른 소리(이미 일어난 소리) 역시 듣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52)
그러나 만약 ‘등불이 꺼질 때 가깝거나 먼 곳의 밝음도 모두 소멸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으니, 양자(등불의 밝음과 요령의 소리)는 동시에 함께 일어나고 동시에 함께 일어나지 않은 차별이 있기 때문이며, 동일하지 않은 상속과 동일한 상속이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즉 등불과 밝음은 지금 바로 보더라도 동시에 함께 일어나니, 등의 불꽃이 꺼지면 더 이상 밝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소리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 그(앞서 이근은 직접 접촉한 대상을 취한다고 주장한 이)는 바탕(즉 요령)을 떠나 전전 상속하며 귀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그는 결정코 [이근과] 직접 접촉한 소리를 들을 때, 바탕에 근거하여 처음에 일어난 소리는 이미 과거로 낙사(落謝)하여 소멸하였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53)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처음에 일어난 소리는 그것이 들려지는 단계에서도 존재하게 되어 찰나성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소리와 그 같은 등불의 밝음은 동일한 경우가 아닌 것이다.
또한 등불과 밝음은 그 상속이 각기 다르다. 이를테면 심ㆍ심소의 경우처럼 공동의 연(緣)에서 생겨난 것이어서 그 연이 손상될 때 양자 함께 멈추게 된다.54) 그러나 소리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 [연이 손상될 때라도] 다름없이 상속한다. 이를테면 식(識)이 상속하는 것처럼 공동되지 않은 연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즉 소리가 상속하는 중에 전 찰나의 소리가 비록 소멸할지라도 후 찰나의 소리는 일어나는 것인데, 어찌 들리지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근과 직접 접촉한 음성이 아니라] 바탕[質, 예컨대 요령]에 근거하여 낳아진 음성이 능히 이식(耳識)을 낳는 연이 되는 것이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소리가 [이근에] 이를 때 비로소 듣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멀고 가까운 소리를 이해함에 있어 어떠한 차별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능히 귓속의 소리를 듣는다’고 하는 것도 향 등이 비근 등과 인접(접촉)하는 경우와는 같지 않다.55) 즉 [소리가] 비록 귓속에 존재할지라도 직접 접촉하는 대상이 아니니, 말소리[語, 예컨대 耳鳴]가 귀를 핍박함으로 말미암아 그 의미[字句, 글자나 문장의 의미]는 알기 어렵지만 자세히 살펴 듣고자 한다면 그러한 고통스러운 핍박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근은 오로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만을 능히 취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이유에서 눈은 어둠 속에서 항아리나 옷 등의 색을 능히 취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취하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안근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취하기 위한 보조적 원인이 없기 때문에, 취하고자 하는 것을 가로막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 취하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바야흐로 어둠 속의 색은 그 자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취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니, 천안(天眼)을 갖은 자는 능히 바로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둠 속의 색은 [안근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취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그것의 원인인 대종(大種)은 바로 취할 수 있기 때문이며, [안근의 대상이 아니라고 할 경우] 설혹 광명을 비출지라도 마땅히 취하지 못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밝은 곳에 존재하는 극미 등의 색이나 그 밖의 색은 [안근의] 대상이 아니어서 안근이 능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어떤 이가 “이러한 어둠 속의 색은 중유(中有)의 색처럼 이미 색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밝더라도 취할 수 없다”고 설하였을지라도 이는 이치에 맞는 말이 아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56)
마땅히 그것(어둠 속의 색)과 함께 작용[俱行]하는 촉(觸)을 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광명을 비출 때 [어둠 속의 색과는] 다른 색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마땅히 어둠과 밝음이 소멸과 생기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며,57) [다르다고 할 경우] 형태[形] 또한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경험상으로 볼 때 일찍이 그러한 종류를 향수한 자는 어둠 속에서 그것과 접촉할 때 [일찍이 향수하였던] 바로 그것임을 알기 때문이며, 또한 어둠 속에서 붉은 옷 등의 색은 밝은 곳에 이르러서도 다른 색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어둠 속의 색은] 다른 종류의 색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둠 속의 색은 어떠한 이유에서 취하지 못하는 것인가?
비유논사(譬喩論師)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그것을 취하기 위한 보조적 원인인 광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광명은 어떠한 작용을 갖는 것인가?(논주 중현의 자문)
이를테면 [대상을] 능히 취하는 근을 포섭하여 증익(增益)시키는 작용을 가지니, [근이 증익되지 않으면] 마치 마른 찐 보릿가루를 먹어도 맛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며, 또한 [계경에서] “색은 볼 수 있는 곳[可見處]에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비유논사의 답)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광명은 오로지 대상에 대해서만 능히 포섭하여 증익하게 하는 것일 뿐 근을 포섭하여 증익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몸이 어둠 속에 있을지라도 밝은 곳의 색을 볼 수 있기 때문이며, 또한 앞서 설정한 마른 찐 보릿가루의 예가 그러하기 때문이며, 또한 인용한 『아급마(阿笈摩)』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또한 ‘색은 볼 수 있는 곳에 존재한다’는 말의 뜻은 ‘색이 광명 중에 존재함’을 설한 것이 아니라 다만 ‘대상은 근의 힘이 미치는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한 것일 뿐이니, 그 경에서는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법은 알 수 있는 곳[可知處]에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어둠 속의 항아리나 옷 등의 색 자체가 일찍이 존재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취하기 위한 보조적 원인(즉 광명)을 결여하였기 때문에 능히 취하지 못하였지만, 그 후 광명 등과 같은 그것을 취하기 위한 보조적 원인을 만날 때 그 같은 색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능히 취할 수 있다’고 한다면, 공중에 일찍이 바람 자체가 존재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취하기 위한 보조적 원인(즉 부채)을 결여하였기 때문에 능히 취할 수 없었지만, 그 후 부채 따위와 같은 그것을 취하기 위한 보조적 원인을 만날 때 그러한 바람을 분명히 알며, 그런 연후에 능히 그것을 취한다는 사실도 마땅히 인정해야만 한다. 또한 역시 두 개의 나무가 서로 마찰하는 것이 바로 불을 취하는 [보조적] 원인으로, 별도의 다른 원인에 의해 불을 낳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마땅히 그 같은 사실을 인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58)
자아를 주장하는 이[執我論者]들 역시 이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아 자체는 일찍이 존재하고 있더라도 능히 그것을 취하는 근을 결여하였기 때문에 능히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둠 속의 색은 그것을 취하기 위한 보조적 원인인 광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안근이 능히 취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취하지 못하는 것인가?
취하고자 하는 것을 가로막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러한 것인가?
이를테면 암흑이나 구름, 연기, 먼지 등에 의해 가로막힌 온갖 색을 눈은 능히 취할 수 없으니, 이러한 예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곧 광명은 취하고자 하는 것을 가로막는 이러한 원인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같은 광명에 근거하여 비로소 능히 색을 취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식(識)을 낳는 원인이 된다고 역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유리와 그러한 벽 등은 능히 취하는 자에 대해 장애되는 정도가 동일하지 않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어둠과 밝음의 종류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장애성과 비장애성이라는 존재 자체의 차별이 있는 것으로,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다.
이 역시 어찌 ‘보조적인 원인이 없기 때문에 능히 취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근의 공능에는 작의(作意, 주의ㆍ경각의 작용)가 없기 때문에 비록 실유의 대상이 존재할지라도 지(智)는 생겨나지 않는다.
비록 그럴 수 있다 할지라도 의심이 생겨날 수 있으니, 이를테면 어둠 속에서 색을 취하지 못하는 것처럼 광명 중에서도 역시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직 알지 못하겠으니,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에 취하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광명이 없기 때문에 취하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구름 등이 색을 가로막아서 보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사실이다. 또한 암흑의 장애는 지금 바로 관찰할 수 있는 바이다. 따라서 어둠 속의 색은 암흑에 가로막힘으로 말미암아 눈이 능히 그것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니, 여기에는 어떠한 의심도 있을 수 없다. 이는 곧 어떤 이가 “지극히 멀리 있는 모든 색은 원격성을 갖기[有遠] 때문에 능히 취하지 못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59) 그런데 다시 어떤 이는 설하기를, “지극히 멀리 있는 모든 색은 근접성을 갖지 않기[無近] 때문에 능히 취하지 못한다”고 하였지만, 이러한 두 가지 설 중 앞의 설이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실체성을 갖기 때문이며, 의심을 낳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어둠 속의 색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둠에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며, 광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둠 속에 존재하는 모든 색은 결정코 어둠에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능히 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광명은 이러한 취하고자 하는 것을 가로막는 원인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같은 광명에 근거하여 안근은 능히 색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설한 내용은 이치상 필시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아비달마순정리론 제8권
변본사품 ⑧
2) 근(根)과 경(境)의 접촉ㆍ불접촉의 문제(續)
세 근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을 취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 밖의 비근(鼻根) 등의 세 근은 앞의 것과 서로 반대되는 것이니, 이를테면 비ㆍ설ㆍ신근은 오로지 직접 접촉한 대상만을 취한다.
어떻게 비근이 오로지 직접 접촉한 향만을 취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인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숨을 멈출 때 냄새를 맡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1) 그러나 이러한 이유는 그 의미상 완전한 논거가 되지 못하니, 설혹 숨쉬고 있을 때만 능히 향기를 맡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비근은 오로지 직접 접촉한 향[至香]만을 취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왜냐하면 모든 극미는 서로 접촉[相觸]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서로 접촉하지 않는 것인가?
만약 제 극미가 전체적[遍體]으로 서로 접촉하는 것이라면, 실유[實物]의 극미 자체가 서로 뒤섞이고 마는 허물이 있게 된다. 또한 만약 부분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라면, 극미가 부분을 갖는다는 오류를 낳게 된다.2) 그렇기 때문에 [‘숨을 멈출 때 냄새를 맡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러한 이유는 ‘비근은 오로지 직접 접촉한 향만을 취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숨을 쉴 때 능히 향기를 취함에도 [비근과 향이] 서로 접촉[相觸]하지 않는다면 ‘직접 접촉한다[至]’는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3)
그의 힐난이 이미 이러하니, 그 이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접촉[至]’이라는 뜻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한다. 대상이 근(감관)에 근접[隣近]하여 생겨날 때 비로소 능히 취할 수 있기 때문에 그같이 말한 것으로, 이러한 이치에 따라 ‘비ㆍ설ㆍ신근은 오로지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만을 취한다’고 설한 것이다. 또한 예컨대 눈꺼풀이나 눈에 넣은 약 등과 같이 [눈과] 직접 접촉한 색을 눈은 능히 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눈꺼풀 등이 요컨대 안근과 실제적으로 접촉[觸]하였기에 바야흐로 ‘접촉[至]하였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다만 눈꺼풀 등이 근에 근접하여 생겨나는 것을 일컬어 ‘접촉’이라고 하였을 뿐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 직접 접촉한 색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에 안근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非至境]을 취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안근 등은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을 취하지만 지극히 멀리 있는 경계 대상을 능히 취하지 못하듯이 비근 등도 역시 그러하여 비록 직접 접촉한 대상을 취할지라도 지극히 가까이 있는 경계 대상(이를테면 코 자체의 냄새)은 능히 취할 수 없다. 다만 향 등으로서 근에 근접하여 생겨난 것만을 취하기 때문에 ‘세 근(비ㆍ설ㆍ신근)은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만을 취한다’고 설하여도 아무런 허물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근과 향 등의 감관과 대상의 극미는 전전(展轉)하며 실제적으로 서로 접촉하는 것도 아니며, 접촉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들은 장애유대성(障礙有對性)이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접촉한다면 과실을 갖게 되니, 이 같은 뜻을 밝히기 위해 마땅히 다시 논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설혹 어떤 이가 “만약 제 극미가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두드리고 쳐서 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라고 힐난하여 말하였다면, 이는 요컨대 ‘속성[德]과 결합[合]함으로써 비로소 소리를 낳게 된다’는 휴류자(鵂鶹子) 등의 주장과 동일한 것인데, 어찌 이같이 힐난할 수 있겠는가?4) 그렇지만 사물이 결합한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마땅히 ‘속성과 결합하기 때문에 소리를 낳게 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소리가 낳아질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진실된 성교(聖敎)의 이치 중에서는 서로가 결합하여 부딪치기[合擊] 때문이라는 설명을 배제하고 오로지 대종에 의거하여 설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수승한 두 가지의 4대종이 결합하지 않고서 생겨날 때에도 그러한 명칭을 획득하기 때문에 이러한 상태 중의 대종은 바로 소리가 생겨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5) 그리고 이와 동시생기[俱生]한 소리는 바로 이근의 대상이 되니,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그(휴류자)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겠지만 나(제 극미가 서로 접촉하지 않으면 어떻게 소리가 날 수 있겠는가 라고 물은 이설자)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니, 역시 이유가 있다. 이를테면 제 극미는 이미 실제적으로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대종과 이러한 대종이 결합한다는 뜻이 어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서로 근접하여 생겨날 때[隣近生]를 일컬어 ‘결합’이라 하는 것이니, 어찌 서로간에 실제적으로 접촉할 때 비로소 ‘결합’이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그대는 이러한 뜻에 대해 마땅히 주저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러저러한 대종은 결정코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러한 대종은 바로 ‘접촉되는 것[所觸]’이기 때문이며, ‘능히 접촉하는 것[能觸]’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온갖 색온 중 오로지 촉계를 갖는 것을 일컬어 ‘접촉되는 것’이라 하고,6) 다만 신근을 갖는 것을 일컬어 ‘능히 접촉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밖에 접촉의 뜻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약 ‘접촉되는 것’도 역시 ‘능히 접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신근도 역시 바로 ‘접촉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대상과 대상을 갖는 법은 마땅히 뒤섞여 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대상과 대상을 갖는 법을 설정함에 있어서는 뒤섞임이 없어야 한다. 만약 ‘이러한 두 가지(소촉과 능촉)에는 뒤섞임의 과실이 없으니, 신식(身識)의 소연과 소의로서 구별되기 때문이다’고 한다면, 어찌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뒤섞임이 성취되지 않을 것인가? 즉 신근 역시 ‘접촉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 신식의 소연이 되지 않을 것이며, 촉계 역시 ‘능히 접촉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어찌 신식의 소의가 되지 않을 것인가?
만약 제 극미가 결정코 서로 접촉하지 않는 것이라면,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서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어야 한다.7)
“‘접촉되지 않은 것[非觸, 즉 극미]’을 원인으로 하여 ‘이러한 접촉된 것[是觸,즉 극미 화합물]’을 낳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이산(離散)되어 있던 것이 바로 화합할 때가 그러하다. ‘이러한 접촉된 것’을 원인으로 하여 ‘접촉되지 않은 것’을 낳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화합물이 이산할 때가 그러하다. ‘이러한 접촉된 것’을 원인으로 하여 ‘이러한 접촉된 것’을 낳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화합물이 다시 화합할 때가 그러하다. ‘접촉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하여 ‘접촉되지 않은 것’을 낳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향유진(向遊塵)이 동류로 상속하는 때가 그러하다.”8)
비바사종(毘婆沙宗)에서는 결정코 극미가 전전(展轉)하며 서로 접촉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니, 거기서의 말에는 별도의 다른 뜻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향유진은 다수의 극미가 집합한 것이지만 그 논에서는 ‘접촉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하여 ‘접촉되지 않은 것’을 낳는 경우로 설하고 있다. 따라서 거기서의 말은 결정코 다른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화합물에 대해 ‘이러한 접촉된 것[是觸]’이라는 말을 설한 것으로, 비바사사(毘婆沙師)들은 모두 다 이같이 설하고 있다.
“다만 풍계(風界)의 힘에 의해 포섭되고 유지됨에 따라 제 극미의 화합물은 흩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9)
곧 [취색(聚色)은] 중연(衆緣)이 결합한 것이기 때문에 취색이 생겨날 때를 “‘접촉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하여 ‘이러한 접촉된 것’을 낳는다”고 설한 것이니, 이는 곧 이산(離散, 극미)을 원인으로 하여 취집(聚集, 취색)을 낳는다는 뜻이다.
어찌 취집하지 않은 극미가 인연에 따라 비로소 취집하는 일이 있다고 하겠는가? 즉 일체는 ‘이러한 접촉된 것’을 원인으로 하여 ‘이러한 접촉된 것’을 낳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10)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극미로서 취집하지 않은 것(단일한 극미)도 역시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과실은 없다”고 하였다. 또 어떤 이는 “거친 화합색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에 미세한 화합색을 ‘접촉되지 않은 것’이란 말로 설정하였다”고 설하였다.11) 따라서 “‘접촉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하여 ‘이러한 접촉된 것’을 낳았다”고 함은 미세한 취(聚)를 원인으로 하여 거친 취를 낳았다는 뜻이기 때문에 거기(『대비바사론』)서 말한 바에는 의미상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또한 [취색(聚色)은] 중연(衆緣)이 결합한 것이기 때문에 취색을 포섭하고 유지하는 풍계가 멸할 때 이와 상반되는 이산(離散)의 색이 일어난다. 바로 이러한 상태를 “‘이러한 접촉된 것’을 원인으로 하여 ‘접촉되지 않은 것’을 낳는다”고 설한 것이니, 이는 바로 거친 취를 원인으로 하여 미세한 취를 낳는다는 뜻이다.
또한 [취색은] 중연(衆緣)이 결합한 것이기 때문에 취색을 포섭하고 유지하는 풍계가 멸하지 않으면 온갖 거친 색취는 혹 어떤 경우 자신과 같은 종류의 색취를 낳기도 하고, 혹은 전변하여 거친 색취를 낳기도 한다. 이를 “‘이러한 접촉된 것’을 원인으로 하여 ‘이러한 접촉된 것’을 낳는다”고 설한 것이니, 이는 바로 거친 취를 원인으로 하여 거친 취를 낳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같은 도리에 의해 모든 향유진은 능히 거친 취색을 포섭하고 유지하지만 풍계가 일어나지 않으면 미세한 취로 상속할 뿐 전변하여 거친 취를 성취하지 못한다. 이를 “‘접촉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하여 ‘접촉되지 않은 것’을 낳는다”고 말한 것이니, 이는 바로 미세한 취를 원인으로 하여 미세한 취를 낳는다는 뜻이다.
이상이 바로 거기(『대비바사론』)서 한 말에 담겨 있는 별도의 다른 뜻이다.
또한 비색(非色)에 대해서도 역시 ‘접촉’이라는 말을 설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멸진정(滅盡定)에서 출정(出定)할 때 마땅히 몇 가지 촉과 접촉하는 것인가? 마땅히 세 가지 촉과 접촉하니, 부동촉(不動觸)과 무소유촉(無所有觸)과 그리고 무상촉(無相觸)이 바로 그것이다”고 설한 바와 같다. 그렇지만 여기에 상호간에 접촉한다는 뜻이 실제로 존재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이러저러한 대종은 결정코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치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極成]이다.
만약 [극미] 상호간의 접촉을 인정한다면 어떤 허물이 있게 되는 것인가?
어찌 앞에서 설하지 않았던가? 만약 제 극미가 전체적으로 서로 접촉하는 것이라면, 실유의 극미 자체가 서로 뒤섞이고 마는 허물이 있게 되며, 만약 부분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라면, 극미가 부분을 갖는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런데 저 상좌(上座)는 이에 대해 다시 이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극미 자체는 바로 유방분(有方分, 부피를 갖는 것)으로, 어떻게 그 자체의 존재를 갖는 것[有自體]을 무방분(無方分)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 말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만약 극미는 더 이상 세분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자체의 존재를 갖기 때문에 유방분이라고 한다면, 모든 무색법도 이미 그 자체의 존재를 갖는다는 점에서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에 마땅히 유방분이라야 하는 것이다. 만약 ‘무색에는 화합의 뜻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유방분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어떤 곳에서는 온갖 무색법에 대해서도 역시 화합한 것이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12)
또한 그가 종의로 삼는 ‘색은 화합된 것’이라는 사실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가 주장하는 복합극미는] 마땅히 단일한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으로, 단일한 존재 자체를 화합된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13)
또한 상좌는 설하기를, “[서로 접촉하는] 두 종류의 극미는 다 같이 부분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머무는 공간[住處]에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지만,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즉 그 논(論)에서 [비바사사는] 스스로 말하고 있다.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극미는 그것이 머무는 공간[處]을 서로 장애하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이러한 종의에는 허물이 있으니, 성교(聖敎) 중에서 유대(有對)라고 하였던 말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두 종류의 극미는 다 같이 부분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머무는 공간에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다시 설하고 있는 것인가?
또한 그가 말한 바는, 이러한 사실에 따라 [두 종류의 극미는] 동일한 공간에 의지하여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부분을 갖지 않는] 극소(極小)로서 다섯 극미를 인정하는 경우, 다 같이 동일한 공간에 존재하여 서로를 방해하거나 장애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14)
그러나 이는 모두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만약 다섯 극미가 다 같이 동일한 공간에 포용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장애하여 백천 구지(俱胝, koṭi, 10의 6승)의 극미가 동일한 공간에 존재한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만약 이와 같다고 한다면 마땅히 하나의 극미가 머무는 공간에 존재하는 일체의 극미가 포용되어야 할 것이며, 그런즉 전체 세간은 하나의 극미 크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혹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극소인 다섯 극미가 동일한 공간에 함께 존재하며, 서로를 방해하거나 장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다수의 극미가 취집하면 그 공간은 넓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극미는 부분을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든지, 혹은 제 극미는 서로 접촉하지도 않으며[不相觸], 서로를 배제하지도 않는다[不相離]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어떠한 극미도 현재 홀로 머무는 것이면서 취집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해야 하니,15) 이미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일체의 화합취(和合聚) 중에는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두 일체의 [극미]가 존재한다. 즉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말을 설한 것이지, 머무는 공간이 동일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부분을 갖지 않기 때문에 서로 접촉한다는 뜻은 성립하지 않는다.16)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신근과 촉계는 어떻게 ‘능히 접촉하는 것[能觸]’과 ‘접촉되는 것[所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극미가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성립하였으니, 이제 여기서 마땅히 ‘능히 접촉하는 것’과 ‘접촉되는 것’의 뜻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즉 상좌)의 종의에서는 ‘능히 접촉하는 것’과 ‘접촉되는 것’이 서로 접촉한다는 사실을 이미 인정하였는데 무엇을 다시 생각할 것인가? 오로지 그대(즉 논주 중현) 스스로 이러한 뜻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고 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접촉을 인정하는 논종(論宗)에서도 이러한 뜻에 대해 마땅히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만약 비근과 설근도 자신의 경계 대상(香ㆍ味)이 되는 극미와 역시 서로 접촉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이유에서 이 같은 근과 경은 ‘능히 접촉하는 것’과 ‘접촉되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만약 이 두 가지의 경우에는 자신의 경계 대상이 되는 극미와 접촉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신근처럼 ‘직접 접촉하는 대상[至境]’을 취하는 것만이 그와 같은 이치(능촉과 소촉)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이(비ㆍ설근) 역시 마찬가지로 그러해야 한다. 혹은 색법이 아닌 것 중에도 마땅히 서로 접촉하는 것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니, 앞서 인용한 것처럼 세 가지 촉과 접촉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17)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마땅히 계경에서 설하고 있는 접촉[觸]의 의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현)는 앞(본권 첫머리)에서 “대상이 근(감관)에 근접[隣近]하여 생겨날 때 비로소 능히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설하였다. 지금 여기서의 ‘능히 접촉하는 것[能觸]’과 ‘접촉되는 것[所觸]’도 그에 준하여 마땅히 지극히 근접함을 성취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체의 비ㆍ설ㆍ신근은 모두 ‘직접 접촉하는 대상’을 취함에 있어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에 마땅히 ‘능히 접촉하는 것’은 비근ㆍ설근과도 통하고, ‘접촉되는 것’ 역시 향(香)ㆍ미(味)와도 아울러 통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근접함은 비록 동일할지라도 거기에는 품류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눈꺼풀 등은 비록 ‘[눈과] 접촉하는 것[至]’이라는 말은 동일할지라도 거기에 품류의 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눈꺼풀 등은 다 같이 ‘[눈과] 접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모든 것이 접촉하는 방식에 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니, 눈꺼풀이나 약을 넣는 산가지, 안약, 눈에 낀 백태는 안근에 점차로 근접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품류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안근 등이 ‘직접 접촉하지 않는 대상’을 취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직접 접촉하지 않은 대상’ 중에 품류의 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듯이, 비근 등도 역시 그러하여 ‘직접 접촉한 대상’을 취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직접 접촉한 대상’ 중에도 마땅히 품류의 차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18) 그러나 또한 미끄러움과 껄끄러움 등에 대해 세간에서는 다 같이 ‘접촉되는 것’이라는 언어적 관념[想名]을 일으키고,19) 그것에 대한 신근을 ‘능히 접촉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신근과 촉을 ‘능히 접촉하는 것’, ‘접촉되는 것이라고 한다는 사실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진실로 ‘능히 접촉하는 것’도, ‘접촉되는 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양자는] 유사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접촉’이라는 말을 일시 설정한 것이다”고 하였다.20)
혹은 여기서 그 밖의 다른 이치에 대해 다시 논구해 보아야 한다. 바야흐로 대상(촉경)과 신근은 실로 더 이상 서로 접촉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럴 경우] 이미 앞에서 설한 것처럼 대상과 대상을 갖는 법은 마땅히 뒤섞여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21)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마땅히 정의(正義)에 수순하는 이치[順正理]에 따라 ‘능히 접촉하는 것’과 ‘접촉되는 것’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인연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이 같이 설하고 있다.
“제 극미는 비록 서로 접촉하지 않을지라도 화합색(和合色)이 서로 접촉한다는 것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으니, 이러한 화합색이 두드려지고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소리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제 극미는 비록 변애(變礙, 색의 일반적 특성)하지 않을지라도 화합색은 변애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22)
그러나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극미를 떠나 화합색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만약 화합색이 접촉하는 것이라면 극미도 마땅히 접촉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그는 마땅히 극미의 상호 접촉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내가] 논설한 바가 이치상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상좌(上座)는 이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이 만약 저것과 접촉하는 것이라면 저것도 결정코 이것과 접촉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미 ‘접촉되는 것’이라면 그밖에 다른 ‘접촉하는 것’도 ‘접촉되는 것’이 되어야 이치상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극미는 전전하며 서로 포섭하여 유지되는 일[攝持]이 없을 것이며, 마땅히 화합하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포섭하고 유지하는 것은 바로 풍계(風界)의 힘이라고 한다면,23) 풍계가 어찌 손으로 떠받쳐 유지하는 것처럼 온갖 극미를 포섭하고 유지하여 흩어지고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라 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힐난도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이를테면 수륜(水輪)은 풍륜(風輪)에 의해 포섭되고 유지되어 흩어지거나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인데, 풍륜이 어찌 손으로 떠받쳐 유지하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24) 그것(풍륜)이 [수륜을] 포섭하고 유지하는 것처럼 이(풍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나는 극미의 상호 접촉을 인정하니, 상호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서로를 포섭하여 유지한다”고 말한다면, ‘손으로 떠받쳐 유지하는 것처럼’이라는 힐난도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대가 “극미는 서로 접촉하며, 차례대로 배열되어[次第安立] 능히 서로를 포섭하여 유지[攝持]한다”고 말한 것처럼 나 또한 “[서로 접촉하지 않지만] 풍계의 힘으로 말미암아 근접 배열[隣近安立]되어 능히 서로를 포섭하여 유지한다”고 말하니, 따라서 마땅히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극미는 전전(展轉)하며 서로 포섭하여 유지되는 일이 없을 것이며, 마땅히 화합하지도 않을 것이다”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말한 바와는 달리 극미는 [서로 접촉하지 않지만] 전전하면서 서로를 포섭 유지하며 화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접촉하지 않을지라도 역시 또한 능히 포섭하여 유지할 수 있으니, 비유하자면 신근은 신식과 접촉하지 않지만 능히 식을 포섭하고 유지시켜 바로 일어나게 하는 것과 같다.
또한 그가 말한 “이것이 만약 저것과 접촉하는 것이라면 저것도 결정코 이것과 접촉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미 ‘접촉되는 것’이라면 그밖에 다른 ‘접촉하는 것’도 ‘접촉되는 것’이 되어야 이치에 어긋남이 없다”고 한 것도 살펴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같이 설한 것일 뿐이다. 즉 앞에서 이미 논설한 것처럼, 대상(촉경)과 신근은 실로 서로 접촉하지 않으니, [그럴 경우] 대상과 대상을 갖는 법은 마땅히 뒤섞여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며, 전체적[遍體]으로 접촉하든 부분적으로 접촉하든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이며,25) 모든 유대법(有對法)은 그 자체 장애유대(障礙有對)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제 극미는] 어떤 처소에서 전전하면서 서로를 포용하지 않으며, 마땅히 서로 접촉해서도 안 될 것이니, 더 이상 세분할 수 없기 때문이며, 부분적으로 접촉하지도 않을 것이니, 각기 [부분을 갖지 않는] 개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며, 전체적으로 접촉하지도 않을 것이니, 그럴 경우 앞서 논설한 것처럼 동일한 공간에 다수의 극미가 존재해야 하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이것이 만약 저것과 접촉하는 것이라면 저것도 결정코 이것과 접촉하는 것이니……(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이 같은 설에 준하여 역시 마땅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만약 저것을 본다면 저것도 결정코 이것을 보는 것이니, 이것이 이미 ‘보여진 것’이라면 그 밖의 다른 ‘보는 것’도 ‘보여진 것’이 되어야 이치상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또한 “이것이 만약 저것을 듣는다면 저것도 결정코 이것을 듣는 것이니, 이것이 이미 ‘들려진 것’이라면 그 밖의 다른 ‘듣는 것’도 ‘들려진 것’이 되어야 이치상 어긋남이 없다”고. 그러나 이 경우는 이미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저 경우(접촉하고 접촉되는 것)는 어떻게 그러할 것인가?
그러나 만약 ‘접촉되는 것’도 역시 서로 접촉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대종이 전전(展轉)하면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이익이 되기도 하고 혹은 손해(損害)가 되기도 하는 것인가?26)
어찌 서로 [실제적으로] 접촉해야 비로소 능히 손해가 되고 이익이 된다고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어째서 그러한가? (다시 말해 접촉할 때 비로소 손해가 되고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여 손해가 되고 이익이 되는 것인가?)
만약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면, (다시 말해 반드시 실제적으로 접촉해야 하는 것이라면) 눈[雪]이나 태양을 보는 눈은 어째서 손상되며, 달 등을 보는 눈은 어째서 이익이 되는 것인가? 눈은 마땅히 태양 등의 대종과 직접 접촉[至]해서는 안 된다. 그대 또한 그것의 광명과 함께 작용하는 대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니, 그대는 광명은 태양이나 달의 대종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27)
그런데 저 상좌는 스스로 말하기를, “대종과 소조색은 대개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지만, 일부는 서로 관계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이를테면 태양이나 달, 등불, 보주(寶珠)의 광명과 온갖 꽃에서 떨어져 나와 따로이 풍기는 향 등이 그러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안근의 경우는] 논의에 의해 낳아진 논의일 뿐으로, 신근은 오로지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만을 취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며, 햇빛 가운데 뜨거움[熱]은 신근이 바로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가까이 근접한 신근 대종에 의지하지 않고서 어떻게 햇빛이 다만 태양의 대종에 근거한 것임을 알게 된 것인가?
만약 어떤 곳에서 신근이 태양의 뜨거움을 느꼈다면, 그러한 곳 가까이에서 안근이 햇빛을 보게 된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빛은 대종을 떠난 것(관계없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오로지 근접한 대종을 연으로 삼아 [신근은] 능히 손상되기도 하고 능히 이익되기도 하는 것이다. 가까이 근접한 대종은 그것(신근)과 지극히 먼 것도 아니며, 또한 역시 서로 접촉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뜻이 이미 성립하였으니, 바야흐로 ‘접촉되는 것’은 신근과 접촉하지 않지만 능히 원인이 되어 몸을 손상시키기도 하고 이익되게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접촉되는 것’(이를테면 눈이나 태양)이 신근의 소의인 대종과 직접 접촉[觸著]하여 손상시키기도 하고 이익 되게도 하는 것이라면, [눈과 직접 접촉하지 않는 대상인] 눈[雪]이나 태양의 빛 등은 눈에 대해 어떻게 손상시키고 이익되게 할 것인가? 설혹 ‘접촉되는 것’이 신근의 소의인 대종과 직접 접촉하여 능히 손상과 이익을 미치는 것이라고 인정할지라도 신근의 소의인 대종이 능히 신근과 접촉하여 손상과 이익을 미친다고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종이 전전하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 비록 서로 접촉하지 않을지라도 서로 근접하여 능히 [손익(損益)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어찌 손해와 이익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따라서 “만약 ‘접촉되는 것’도 역시 서로 접촉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대종이 전전하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이익이 되기도 하고 혹은 손해가 되기도 하는 것인가?”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덕(大德)은 설하기를, “일체의 극미는 실로 서로 접촉하지 않으며, 다만 [그 사이가] 무간(無間)이기 때문에 일시 ‘접촉’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고 하였다.28) 이에 대해 경주(經主)는 그의 뛰어난 덕을 나타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대덕의 뜻은 참으로 애락(愛樂)할 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할 것 같으면 이러한 제 극미는 마땅히 간극(間隙, 틈)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중간이 이미 비었다면 무엇이 그 사이[行]를 장애하여 유대(有對)로 인정할 것인가?”29)
그러나 여기서 설한 이와 같은 대덕의 뜻은 긍정할 만한 것[樂]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정할 만한 것[惡]도 아니다. 다만 마땅히 살펴 탐구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떻게 무간이면서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이러한 이치가 아직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뜻을 알기 어렵다. 만약 제 극미 사이에는 전혀 간극이 없지만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마땅히 부분을 지녀야 할 것이고, [극미가 머무는] 공간이 동일하다고 인정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또한 간극이 없다 하여 이미 무간을 인정하였으니, 어찌 서로 접촉하지 않겠는가?30)
따라서 여기서 ‘다만 [그 사이가] 무간이기 때문에[但間]’라고 하는 말은31) 결정적으로 ‘가까이 근접[隣近]한 것’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즉 여기서 ‘다만’이라고 하는 말은 ‘결정적’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 극미 사이에는] 결정코 간극이 있기 때문에 ‘정간(定間)’이라고도 이름하니, 결정코 열이 있기 때문에 ‘정열(定熱)’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이러한 제 극미에는] 결정코 간극이 있다고 해야 이치상 그 뜻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혹은 ‘없다’는 뜻을 나타내니, 이를테면 그 사이에는 색과의 접촉이 일어날 만한 극미 크기의 간극도 없기 때문에 ‘무간’이라 이름하였다.32) 곧 대종극미가 이와 같은 무간(無間)으로 가까이 근접하여 생겨날 때를 일시 설하여 ‘접촉’이라 하였던 것이다.
만약 이같이 해석한다면 “일체의 극미는 실로 서로 접촉하지 않으며, 다만 [그 사이가] 무간이기 때문에 일시 ‘접촉’이라는 명칭을 설정하였다”는 대덕의 설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장애유대의 세력에 의해 능히 서로를 장애하기 때문에 ‘유대’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주처(住處)에서 전전(展轉)하며 서로 포용하는 것을 설하여 장애유대라고 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니 어찌 [극미가 머무는] 공간이 동일하게 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여 무간으로 머문다는 사실을 부정할 것인가? 간극은 있지만 그 사이의 접촉의 작용[趣行]은 없다고 인정하므로 [무간일 경우 극미가 머무는 공간이 동일하게 된다는 사실에] 두려워할 바 없으니, 법성(法性)은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유대는 필시 그것들이 머무는 공간이 동일하지 않으므로 그것(극미)의 공간도 동일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
혹 부분을 갖기 때문에 무간으로 머무는 것이라면, 이치는 필시 그렇지 않으니, 비록 중간에 지극히 적은 빈틈이 있다고 할지라도 유대의 힘이 그 사이를 막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극(間隙)이란 무엇인가?
유여사는 설하기를, “바로 접촉함이 없는 색[無觸色]이다”고 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그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경주는 다시 설하기를, “또한 극미가 만약 방분(方分, 부피)을 지닌다고 인정할 것 같으면, 접촉하거나 접촉하지 않거나 간에 그것들은 모두 마땅히 유분(有分), 즉 부분을 가져야 할 것이며, 만약 방분을 지니지 않는다고 한다면 설혹 상호 접촉을 인정하더라도 역시 그러한 과실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33)
그러나 이러한 설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유분(有分, 부분을 갖는 것)과 방분은 말은 달라도 그 뜻은 동일하여 무분(無分, 부분을 갖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설정하는 것은 이미 방분을 부정한 것인데, 어떻게 여기서 이를테면 ‘극미가 만약 방분을 지닌다고 인정할 것 같으면’이라 하여 다시 의심을 낳는 것인가? 이미 방분을 지니지 않는데, 어떻게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인가? 또한 전체적으로 접촉하든 부분적으로 접촉하든 두 가지 모두에 허물이 있다고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는데,34) 어떻게 다시 ‘만약 방분을 지니지 않는다고 한다면 설혹 상호 접촉을 인정하더라도 역시 그러한 과실이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이러한 극미 사이에] 색과의 접촉이 일어날 만한 극미 크기의 간격도 없기 때문에 ‘무간’이라 이름하였다. 곧 대종극미가 이와 같은 무간으로 가까이 근접하여 생겨날 때를 일시 설하여 ‘접촉’이라 한다”는 뜻이 성취될 수 있으며, [그럴 때 극미는] 머무는 공간[住處]이 동일하지 않지만, 혹은 무간으로 머무는 것이지만 가히 유대(有對)이며, 부분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 성립한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3) 근과 경의 양적 관계
이제 마땅히 관찰해 보아야 할 것이니, 안 등의 제근(諸根)은 자신의 대상에 대해 오로지 같은 양[等量]만을 취하지만, 마치 횃불을 빨리 회전시키면 불바퀴[旋火輪]처럼 보이듯이 너무나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큰 산 따위를 보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대상에 대해 같은 양이든 같지 않은 양[不等量]이든 모두를 취하는 것인가?35)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비근 등의 세 근은
오로지 같은 양[等量]의 대상만을 취한다는 것을.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을 취하는 것은 비(鼻) 등의 세 가지 근이라고 설한 바 있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들은 오로지 능히 같은 양의 대상만을 취한다. 즉 비ㆍ설ㆍ신근의 극미의 양과 마찬가지로 향ㆍ미ㆍ촉경의 극미의 양도 역시 그러하니, 서로 대칭적으로 결합하여 ‘비’ 등의 식(識)을 낳기 때문이다.
비근 등 세 근의 극미는 어느 때 향 등의 대상을 능히 두루 취할 수 없는 것이 아님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같은 양의 대상만을 취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비근 등 세 근의 극미는 자신의 양을 초과하는 향 등의 극미를 능히 취할 수 없기 때문에 ‘오로지 같은 양의 대상만을 취한다’고 설한 것이다. 즉 세 근의 일부분의 극미는 역시 또한 능히 세 대상의 일부만을 취하니, 얼마간의 대상의 극미가 근에 이름[至]에 따라 얼마간의 근의 극미가 능히 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근과 이근의 경우는 일정하지 않다. 즉 안근은 색에 대해 어떤 때에는 보다 적은 것을 취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털끝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또 어떤 때에는 보다 큰 것을 취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잠시 동안 눈을 떠 큰 산 등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또한 어떤 때에는 동등한 양을 취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포도나 대추 등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근도 역시 그러하여 모기나 천둥, 거문고 소리 등 보다 적거나 크거나 동등한 양의 소리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근의 경우는 질애(質礙, 공간적 점유성)를 갖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취하는 형태와 양(크기)의 차별을 분별할 수 없다.
그리고 본송 중에서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아울러 이러한 뜻을 알기를 권고하기 위한 것이니, 이제 이러한 뜻에 의거하여 다시 마땅히 관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4) 5근의 극미 배열의 문제
안(眼) 등 제근의 극미는 어떻게 안포(安布, 분포 배열의 뜻)되어 차별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뭐라 규정하기가 어렵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유대(有對)이기 때문에, 방처(方處, 공간)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화집(和集)하여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것의 안포 차별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안근의 극미는 눈동자[眼星] 위에서 자신의 대상을 향해 횡으로 배열되어 머물고 있으니, 마치 향직화(香菱花, 미나리과 식물로, 꽃이 한 방면으로 향하고 있음)와도 같다. 또한 맑고 투명한 막에 덮여 있어 분산되는 일이 없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겹겹이 쌓인 둥근 알[丸]과 같은 모양으로 머물며, 그 자체 맑고 투명하기 때문에 마치 가을의 샘이나 연못과도 같아 서로 장애하지 않는다”고 하였다.36)
이근의 극미는 귓구멍 안에 있으면서 나선형으로 머무니, 마치 돌돌 말린 자작나무 껍질[樺皮]과도 같다.
비근의 극미는 콧등 안에 있으면서 뒤쪽[背]을 위로하고 안쪽[面]을 아래로 하고 있으니, [그 형태는] 마치 손톱을 쌍으로 나란히 한 것과 같다. 그리고 이상의 앞의 세 가지 근은 횡으로 행도(行度)를 짓고 있기 때문에(배열되어 있기 때문에) 높고 낮음이 없으니, 마치 화만(花鬘)을 쓴 것과 같다.
설근의 극미는 혀 위에 퍼져 있으며, 그 형태는 마치 반달과도 같다. 그리고 혀 중앙에 털끝 크기만한 곳이 [따로] 있어 설근의 극미가 혀 전체에 두루 퍼져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37)
신근의 극미는 몸의 부분 부분에 두루 머물며, 신체 형태[身形]의 분량과 같다. 그리고 여근(女根)의 극미는 그 형태가 북과 같고, 남근(男根)의 극미는 그 형태가 골무를 낀 손가락과 같다.
또한 안근의 극미는 어떤 때에는 모두가 다 동분(同分)이며, 어떤 때에는 모두가 다 피동분(彼同分)이며, 또 어떤 때에는 일부는 피동분이고 그 나머지는 바로 동분이다. 내지 설근의 극미도 역시 그러하다.
신근의 극미로서 모두가 다 동분이 되는 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내지 극열날락가(極熱捺落迦, 즉 극열지옥) 중에서 맹렬한 불길이 몸을 휘감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신근의 극미가 존재하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피동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같이 설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신근의 극미가 [동분이 되어] 두루 신식을 낳는다면, [그곳에 떨어진] 몸은 마땅히 산괴(散壞)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38) 그렇지만 신근과 촉경은 각기 하나의 극미를 소의와 소연으로 삼아 능히 신식을 낳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5식은 결정적으로 적집된 다수의 극미만을 비로소 소의와 소연의 존재로 성취하기 때문이다.
5) 6식과 6근의 시간적 관계
6식의 소의(所依)는 어떻게 설정되는 것인가? 5식이 오로지 현재의 법만을 소연(所緣)으로 삼고, 의식은 3세의 법과 3세가 아닌 법[非世, 즉 무위법] 모두를 소연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온갖 식의 소의도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째서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뒤의 것(의식)의 소의(즉 의근)는 오로지 과거이며
앞의 5식의 소의는 혹은 두 가지 모두[俱]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6식신(識身)이 무간(無間)에 멸함에 따라 그것을 모두 ‘의(意)’라고 이름하니, 이것은 의식에 대해 소의의 근(根)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은 오로지 과거의 6식(즉 의근)에 근거할 뿐이다.
그러나 안(眼) 등 5식의 소의는 혹은 두 가지 모두이다. 여기서 ‘혹은’이라고 하는 말은, 이것 역시 과거[의 의근]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안 등의 5근은 이러한 안식과 구생(俱生)하는 [현재의] 소의이며, 과거의 소의는 바로 의계이다. 이처럼 5식의 소의는 각기 두 가지이지만 제6 의식의 소의는 오로지 한 가지로서, 본송 중에서는 소의의 뜻에 차별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혹은’이라고 말한 것이다].39)
다시 마땅히 물어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바로 안식의 소의가 되는 것이면, 이것은 바로 안식의 등무간연(等無間緣)이 되는 것인가?40) 만약 바로 안식의 등무간연이 되는 것이면, 이것은 또한 바로 안식의 소의가 되는 것인가?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1구는 말하자면 구생(俱生)의 안근이며, 제2구는 말하자면 무간에 멸한 심소의 법계이며, 제3구는 말하자면 과거의 의근이며, 제4구는 말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법을 제외한 것이다.41) 내지 신식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4구 각각에다 마땅히 자신의 근을 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식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땅히 앞의 구(句)에 따라 답해야 할 것이다. 즉 이러한 의식의 소의가 되는 것은 결정적으로 이러한 의식의 등무간연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의 등무간연이 되는 것이면서도 의식의 소의가 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무간에 멸한 심소의 법계이다.
또한 5식계가 그 소의로서 결정코 과거와 현재의 근을 갖듯이 그것의 소연이 되는 대상도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와는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인가?
결정코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니, 이미 멸한 것과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은 5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5식은] 소의와 더불어 동일한 대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현행하지 않은 대상에 근거하여서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5식의 대상은 오로지 과거이다”고 주장하였다.42) 이제 마땅히 그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그와 같다고 한다면 단지 이전에 생겨난 것[前生]만을 연(緣)으로 삼는다면 식과 함께 생겨나는 것은 모두 연이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이미 멸한 색에 대해 그는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분별의 마음이 경계로 취하여 일으킨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43) 또한 [5식의 대상은 오로지 과거라고 주장할 경우] 결정코 마땅히 그것의 소의가 되는 근 역시 과거에 존재하면서 능히 현재의 식을 낳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듯 그의 말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소의와 그 밖의 식의 경계 대상에 대해서는 일단 그만두더라도 안식의 대상이 오로지 과거라면, 어찌 일체의 과거의 색을 반연하지 않을 것인가? 무간에 멸한 색과 백 년 전에 멸한 색은 [과거라는 점에서] 어떠한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생기] 원인이 되는 대상만을 취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무간에 멸한 색은 바로 현행(現行) 식의 원인이고, 백 년 전에 멸한 색은 [현행 식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과실도 없다’고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식의 [생기] 원인으로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기 때문으로, 오로지 무간에 멸한 색만이 현행 식의 원인이 되고 백 년 전에 멸한 색은 현행 식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떠한 논거로써 증명할 것인가? 즉 그러한 백 년 전에 이미 멸한 온갖 색이 현행 식과 어떠한 관계도 없다고 한다면, 무간에 멸한 색 또한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양자 사이에 이미 어떠한 차별도 없거늘 그 같은 이유가 어찌 유독 한쪽에만 적용될 것인가?
이러한 색(무간에 멸한 색)을 백 년 전에 멸한 색과 비교하면 역시 차별이 있으니, 안식이 장차 생겨나려고 할 때 이러한 색은 연(緣)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안식의 대상은 마땅히 과거가 아니어야 할 것이니, 식이 미래에 있으면서 현재의 대상을 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식이] 시간을 달리하는 것을 연으로 삼고 시간을 달리하는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고는 역시 설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무간에 멸한 색)에 안식에 대한 경계 대상으로서의 작용을 배제하고서 다시 무엇의 연이 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안식이 생겨날 때 오래전에 이미 멸한 색은 얼마 전에 멸한 색과 [과거라는 점에서] 어떠한 차이도 없는데, 어찌 연이 되지 않는 것인가? 그대(5식의 대상은 오로지 과거라고 주장하는 이설자)는, 오래전에 멸한 색과 얼마 전에 멸한 색은 모두 실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오래전에 멸한 색이든 얼마 전에 멸한 색이든 능히 [안식의] 소연으로서 작용한다는 이치는 모두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니, 현행하지 않는 경계 대상은 상속이 각기 다르고 동일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에서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대는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비ㆍ설ㆍ신의 세 근을 어떠한 까닭에서 가까이 근접한 대상[至境]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게 된 것인가?
과거와 미래를 설하여 ‘멀리 있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5식이 오로지 과거의 대상만을 반연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에 대한 현량(現量)의 지각[覺]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44)
자신의 수(受)에 대해 현량의 지각이 있는 것으로, 이를테면 ‘나는 일찍이 이와 같은 고락(苦樂)을 영납(領納)하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45)
이러한 해명은 옳지 않으니, 자신의 ‘수’에 대한 영납(領納, 즉 감수)과 지각[覺了]은 시간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일찍이 생겨난 ‘수’를 어느 때 영납하고, 어느 때 지각하는 것으로, 영납의 순간이란, 이를테면 손해와 이익(즉 고락)을 느끼는 때를 말하니, 이때 ‘수’는 아직은 지각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즉 그 밖의 다른 대상을 지각(요별)하는 식과 구생(俱生)하는 ‘수’가 현전할 때 능히 손해와 이익을 느끼게 되니, 이같이 손해와 이익을 느끼는 단계를 ‘영납의 순간’이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성수(自性受)로서, 영납은 촉(觸)에 수반되어 그 자체로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 등은 그 같은 손해와 이익의 행상(行相)을 영납하여 그 자체로서 생겨나기 때문에 이것(영납)이 멸하여 과거가 된 것을 비로소 능히 대상으로 삼아 현재의 기억[憶念]을 낳으니, 이러한 기억의 단계를 ‘지각의 순간’이라 한다. 이 같은 이치로 볼 때 오로지 현량에 의해 일찍이 감수한 대상[所受事]에 대해서만 현량의 지각이 있을 수 있으며, 그럴 때 ‘현량의 지각은 자신의 수(受)에 대해서만 존재한다’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다. 곧 현량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근에 의지하여 영납하고 인식하는 현량 자체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색 등은 현량에 의해 감수[受, 즉 영납]되지 않는다고 이미 인정하였는데, 어떻게 ‘자신의 수(受)에 대해 현량의 지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테면 다른 이의 수를 자신이 영납하지 못하는 것이다.46) 현량에 의해 감수된 것이 바로 현량의 지각은 아니다. 곧 ‘나는 일찍이 이와 같은 고락을 감수하였다’고 말한 것은, 그러한 ‘수’에 근거[緣]한 지식이지 현량의 지각이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색 등도 자신의 근에 의지하여 현량에 의해 감수된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이에 대한] 현량의 지각이 없어야 한다. 이를테면 ‘나는 일찍이 이와 같은 색 등을 감수하였다’고 함은 다만 그러한 경계 대상에 근거한 지식일 뿐 현량의 지각은 아닌 것이다.
또한 만약 현재 색 등의 5경이 현량에 의해 획득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미래의 ‘수’를 근거[緣]로 하여 일어난 지식처럼 일찍이 현량에 의해 획득된 바를 영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필시 ‘나는 일찍이 이와 같은 고락을 영납 감수하였다’고 스스로 말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예컨대 과거의 색 등을 근거로 하여 일어난 지식은, 일찍이 근에 의지하여 현량에 의해 획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나는 일찍이 이와 같은 색 등을 영납 감수하였다’고 말하는 일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고수(苦受) 등과 같은 현량의 수(受)를 영납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현량의 수)에 근거하여 현량의 지각이 생겨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색 등은 반드시 근에 의지하여 현량의 수를 영납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근거로 하여 현량의 지각이 생겨나니, [색 등은] 현재 핍박하는 바이기 때문으로, [이 같은 사실은] 결정코 신수(信受)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수(受)를 영납할 때에는 수를 소연의 경계로 삼지 않으며, 수를 소연의 경계로 삼을 때에는 수를 영납하는 것이 아니다’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무슨 까닭에서 “낙수를 감수할 때 낙수를 감수하는 것을 참답게 알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하였을 것인가?
여기에는 어떠한 모순도 과실도 없으니, 이와 같이 설한 것은 바로 관찰하는 때에 [근거한 것이지] 영납하는 때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즉 관행자(觀行者)가 일찍이 현량에 의해 획득된 것을 영납할 때 낙수 등에 대해 미혹함과 그릇됨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 이와 같이 설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일찍이 감수하지 않은 온갖 현량의 경계 대상에 대해 현량의 지각이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5식은 오로지 현재의 대상만을 근거[緣]로 하는 것이니, 반드시 구생(俱生, 동시생기)한 것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말하기를, “안과 색을 근거로 하여 안식이 생겨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던 것이다.
6) 근만이 식의 소의가 되는 이유
식(識)은 동시에 두 가지의 연(緣, 즉 根과 境)에 의탁하여 생기하는 것임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소의(所依)라는 명칭은 근에만 해당되고, 경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근(根)의 전변에 따라 식(識)도 변이하니
그래서 안(眼) 등의 근을 소의라고 이름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안(眼) 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안 등의 6계(界)를 말하는 것으로, 안 등의 근에 전변(轉變)이 있기 때문에 온갖 식도 변이한다. 곧 근이 증익(增益)되고 감손(減損)됨에 따라 식에도 밝고 어두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색 등이 변화하더라도 식이 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니니, 식은 바로 근(감관)에 따르지 경(대상)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의’라고 하는 명칭은 오로지 안 등의 근에 해당하는 것일 뿐 다른 것(즉 경)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의식 또한 신근에 따라 전변하니, 이를테면 풍병(風病) 등이 신체를 손상시키고 어지럽힐 때 의식도 산란되며, 신체가 청결하고 편안할 때에는 의식도 안정되고 고요해진다. 그럼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그러한 의식은 신근을 소의로 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의식은 다만] 자신의 소의에 따를 뿐이기 때문에 이러한 과실은 없다. 즉 풍병 등이 신체를 손상시키고 어지럽힐 때, 고수(苦受)와 상응하는 식신이 발생하니, 이와 같은 식신을 산란된 의계(意界)라고 이름한다. 곧 이것과 고수가 함께 [과거로] 낙사(落謝)할 때 능히 의근이 되어 산란된 의식을 낳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경우가 바로 의식이 안정된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은 자신의 소의에 따르는 것일 뿐이다.
어찌 유루의 의계가 무간에 무루의 식을 낳는다고 하지 않겠는가?47) 이와 같은 등의 다름이 있는데, 어떻게 의식이 자신의 소의에 따르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유루와 무루 등 종류(種類)에 근거하여 ‘자신의 소의에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근의] 증익 감손에 따른 [식의] 밝고 어두움의 차별에 근거하여 [그같이 말한 것이다]. 예컨대 무부무기(無覆無記)인 안근으로부터 선과 불선과 유부무기(有覆無記)의 안식이 낳아지는 경우에도 안식은 자신의 소의에 따른다고 말하니, 이 경우(유루의 의계에서 무루의 의식이 낳아지는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능의(能依, 즉 식)는 일체 소의의 법성(法性)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식이 오로지 근의 성질에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능의는 소의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7) 식의 명칭이 근에 따라 설정된 이유
알려지는 것[所識]은 바로 경(境)으로 근(根)이 아님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식의 명칭은 근에 따라 설정하고 경에 따라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48)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것과 아울러 불공인(不共因)이기 때문에
근(根)에 따라 식(識)을 설하게 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그것’이라 함은, 이를테면 앞에서 설한 ‘안 등을 소의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래서 (다시 말해 안 등의 소의이기 때문에) 식의 명칭을 근에 따라 설정하고 경에 따라 설정하지 않는 것이니, ‘의지처[依]’란 바로 수승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불공(不共)’이라 함은, 안근은 오로지 자신의 안식에만 소의가 되는 것(즉 不共法)임을 말한다. 그러나 색은 다른 이의 안식에도 역시 통하고, 아울러 자신과 다른 이의 의식에도 모두 수용되는 것(즉 共法)이며, 나아가 신(身)과 촉(觸)의 관계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의 대상(즉 法界)도 불공법이기 때문에 마땅히 법식(法識)이라고 이름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힐난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보편적인 법[通法]과 개별적인 법[別法]이 다 같이 [불공법에] 두루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며,49) 법경은 앞의 두 가지 조건(즉 소의와 불공법)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보편적인 의미[通名]로서의 법은 오로지 불공만이 아니며, 개별적인 의미[別名]로서의 법계는 식만을 두루 포섭하는 것이 아니다.50) 또한 개별적인 법계는 비록 다른 이와 공통되지 않는 것(즉 不共法)이라 할지라도 의식의 소의인 근(根)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어떤 법이 식의 소의이고, 아울러 불공의 법이라면, 그것에 따라 식의 명칭을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색 등의 경우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에 따라 색식(色識) 등이라고 설하지 않았으니, 이는 마치 ‘북소리’라고 하거나 ‘보리의 싹’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51)
또한 이 송문(頌文)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즉 ‘그것’이라 함은 ‘안 등의 식이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를 말한 것이며, ‘아울러 불공’이라 함은 ‘아울러 안 등은 바로 불공법이기 때문에’를 말한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생의 색은 4생(生, 胎ㆍ卵ㆍ濕ㆍ化生)의 안식을 낳는 일이 있지만, 어떠한 생의 안근도 2생의 안식을 낳는 일이 없는데 하물며 4생의 식을 능히 낳을 수 있을 것인가?52) 이처럼 [3]계(界)ㆍ[6]취(趣)ㆍ[4]족(族)의 소의신의 안근은 각기 별도의 식을 낳으니, 그래서 불공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나아가 신근도 역시 이와 같다.
어찌 어떤 생의 의근도 역시 또 다른 어떤 생의 의식을 낳는다고 하지 않겠는가?53)
완전히 낳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다만 동시[俱時]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즉 어떠한 생의 의근도 일시에 2생의 의식을 함께 낳는 일이 없으니, 어찌 색 등과 같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2생의 식도 낳는 일이 없는데 하물며 4생의 식을 낳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이처럼 안근 등은 식에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4]생ㆍ[3]계ㆍ[6]취 등에서 각기 별도의 식을 낳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가지 이유에서 근(根)에 따라 식의 명칭을 설정하고 경(境)에 따라 식의 명칭을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근과 식은 다 같이 내적 존재이며, 경은 오로지 외적 존재이기 때문에 근에 따라 [그 명칭을] 설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어떤 이는 “근과 식은 다 같이 유정수(有情數)이며, 색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근에 따라 [그 명칭을] 설하였다”고 하였다.
중연(衆緣)이 화합할 때 안식은 비로소 낳아지는 것인데, 어떠한 이유에서 계경에서는 오로지 안(眼)과 색(色)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인가?
안식의 소의와 소연이 되기 때문으로, 그 밖의 존재(예컨대 의지나 밝음 등)는 비록 안식이 낳아지는 연은 될지라도 소의와 소연은 아닌 것이다. 또한 이(안과 색)는 바로 안식의 직접적인 연[隣近緣]이기 때문이다.
어찌 능히 작의(作意, 주의 경각)를 낳는 허공이나 밝음 역시 안식의 직접적인 연이 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안’과 ‘색’의 두 연은 안식을 낳는데 극히 [필수적인] 직접적인 근거이기 때문에 허공이나 밝음 등과는 다르다. 또한 안식이 생겨나는 데에는 반드시 소의와 소연의 힘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며, 아울러 불공(不共)이기 때문이다. 즉 안식이 생겨날 때에는 반드시 ‘안’과 ‘색’에 의존하여 그것을 소의와 소연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법은 일정하지 않으니, 이를테면 밤에 나다니는 종류(부엉이 등)의 식은 밝음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낳아지며, 물에 사는 종류(물고기 등)의 식은 허공에 근거하지 않고서도 낳아진다. 사람의 경우도 유리나 파지가(頗胝迦, 수정) 등이 장애하는 색에 대해 역시 그러하며, 천안(天眼)이 식을 낳는 데에는 허공도 밝음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안식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밝음에 의존해야 하니, 눈에 가까이[近眼]하든지 색에 가까이[近色]하든지 주체의 밝음[主明]이든 객체의 밝음[客明]이든 결정코 한 가지를 연으로 삼아야 비로소 색을 보기 때문이다. 또한 안식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허공에 의존해야 하니, 허공은 모든 곳에 편만(遍滿)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한다면, 이는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다. 즉 ‘눈이 밝음에 의존한다’고 함은 요컨대 크나큰 밝음이 색을 비춤에 따라 비로소 본다는 것이지만, 고양이나 이리 등의 눈에는 크나큰 밝음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사람들의 눈에 비록 밝음은 없을지라도 한밤에도 색을 보는 경우가 있으니, 그대의 뜻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도 능히 색을 보는 경우가 있으니, [안식을 낳기 위해] 반드시 광명에 근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만약 허공이 모든 곳에 편만하는 것이라면, [허공에는] 장애가 없기 때문에 역시 마땅히 벽 등이 장애하는 색도 능히 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54)
그리고 능생(能生)의 작의(作意)는 6식 모두에 공통되는 생연(生緣)이 되지만, ‘안’과 ‘색’은 공통되는 생연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경에서는 [안식의 생연으로서] 오로지 ‘안’과 ‘색’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혹은 교화되는 이의 듣는 정도에 따라 설하기도 하였으니, 「상적유경(象跡喩經)」 등의 계경 중에서는 작의 등의 연도 모두 함께 설하였기 때문이다.55)
8) 3계 9지(地)에 따른 근ㆍ경ㆍ식과 소의신의 관계
소의신이 머무는 바에 따라서 ‘안근이 색을 본다’고 할 때, 소의신과 안근과 색경과 안식의 지(地)는 같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56)
마땅히 이러한 네 가지는 어떤 경우에는 다르고, 어떤 경우에는 같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같다고 함이란, 이를테면 욕계에 태어나 자지(自地)의 안근으로써 자지의 색을 보는 경우, 네 가지는 모두 같은 지(즉 욕계)에 속한 것을 말한다. 혹은 초정려에 태어나 자지의 안근으로써 자지의 색을 보는 경우에도 역시 모두 같은 지에 속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다른 지에 태어날 경우, 네 가지의 지는 동일하지 않다. 곧 다르다고 함이란, 이를테면 욕계에 태어나 만약 초정려의 안근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과 색은 욕계에 속하지만 안근과 안식은 초정려에 속하는 것을 말한다. 혹은 초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은 욕계에 속하지만 그 밖의 세 가지는 초정려에 속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만약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욕계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과 색은 욕계에 속하지만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하고, 안식은 초정려에 속한다. 또한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초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은 욕계에 속하지만, 안근은 제2정려에 속하고, 색과 안식은 초정려에 속한다. 또한 제2정려의 색을 보는 경우, 소의신은 욕계에 속하고, 안근과 색은 제2정려에 속하며, 안식은 초정려에 속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제3, 제4 정려지의 안근으로써 하지(下地)의 색이나 혹은 자지의 색을 보는 경우에 대해서도 마땅히 참답게 알아야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아가] 제4정려지에 태어나는 경우에도 네 가지에 다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안근 등을 제외한] 그 밖의 계(界)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마땅히 이러한 제법의 결정적인 상(相)에 대해 간략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근은 소의신보다 하지(下地)가 아니며
색과 안식은 안근보다 상지(上地)가 아니다.
색은 안식의 일체 지와 통하며
소의신에 대한 두 가지(색ㆍ안식)도 역시 그러하다.
안근과 마찬가지로 이근도 역시 그러하며
다음의 세 가지는 모두 자지(自地)이다.
그리고 신식은 자지이거나 하지이며
의근은 결정되어 있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소의신과 안근과 색의 세 가지는 모두 다섯 지(地)와 통하니, 이를테면 그것들은 욕계와 4정려 중에 존재한다. 그리고 안식은 오로지 욕계와 초정려에만 존재한다. 여기서 안근을 소의신이 생겨난 지(地)와 비교해 본다면, 혹 어떤 경우 등지(等地)이기도 하고,57) 혹 어떤 경우 상지(上地)이기도 하지만,58) 소의신보다 하지에는 끝내 존재하지 않는다. 색과 안식을 안근과 비교해 본다면, 등지나 하지에는 존재하지만 그 상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59) 즉 하지의 안근은 거친 색[麤色]을 보는 데 익숙하여 상지의 미세한 색[細色]에 대해서는 ‘견(見)’의 공능이 없으며, 또한 하지의 안근은 뛰어난 작용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상지는 자신의 수승한 안근을 갖으며, 하지 중에 자신의 안식을 갖는다. 그래서 하지의 안근은 상지의 식에 소의가 되지 않는 것이다.
색을 안식과 비교해 보면, 등지ㆍ상지ㆍ하지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할 수 있다.60) 그리고 색과 안식을 소의신과 비교해 보면, 색을 안식에 비교하는 경우와 같으니, 이를테면 자지, 혹은 상지, 혹은 하지와도 통하는 것이다. 즉 안식을 소의신과 비교하여 ‘자지와 통한다’고 함은 오로지 욕계와 초정려에 태어나는 경우가 그러하며, 혹은 ‘상지와 통한다’고 함은 오로지 욕계에 태어나는 경우가 그러하며, 혹은 ‘하지와 통한다’고 함은 오로지 제2ㆍ제3ㆍ제4 정려지에 태어나는 경우가 그러하다. 또한 색을 소의신과 비교하여 ‘자지와 하지와 통한다’고 함은 자지와 상지의 안근이 보는 경우가 그러하며, 만약 ‘상지와 통하는 경우’라면 오로지 상지의 안근이 보는 경우이거나 또는 자지의 안근으로써 오로지 자지와 하지의 색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혹은 상지의 안근으로써 자지와 상지와 하지의 색을 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계(耳界)에 대해 널리 설하자면 이 또한 안계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근은 소의신보다 하지에 존재하지 않으며, 성(聲)과 이식은 이근보다 상지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성은 이식에 대해 일체의 지(즉 상ㆍ등ㆍ하지) 어느 곳에도 존재할 수 있으며, 두 가지(즉 성과 이식)를 소의신과 비교하는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니,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안근과 마찬가지로 널리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비근과 설근과 신근의 세 가지 경우에는 모두 다 자지(自地)에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대개 ‘분(分, 작용)’이 동일하기 때문이며, 향ㆍ미에 대한 두 가지의 식(즉 비식과 설식)은 오로지 욕계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며, 비근과 설근은 오로지 직접 접촉한 대상[至境]만을 취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른 점은, 신근은 직접 접촉한 대상만을 취하기 때문에 촉경과 그 지(地)가 반드시 동일하지만, 신식을 촉과 신근에 비교해 보면 혹 어떤 경우에는 자지에 존재하고, 어떤 경우에는 하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자지란 말하자면 욕계나 초정려에 태어나는 경우이며, 위의 세 가지 정려에 태어나는 그것을 일러 하지라고 하였다.61)
그리고 의계(意界)의 네 가지는 일정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의근은 어떤 때에는 소의신과 의식과 법과 더불어 다 같이 동일한 지(地)에 존재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 어떤 때에는 상지와 하지에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소의신은 오로지 5지(地, 욕계와 4정려)에만 존재하며, 나머지 세 가지(의근ㆍ법ㆍ의식)는 일체지(무색계를 포함하는 3계 9지)에 모두 존재한다.
즉 오로지 5지에 태어나 자지의 의근과 자지의 의식이 자지의 법을 소연으로 삼는 것만을 일컬어 ‘의근이 세 가지(소의신ㆍ의식ㆍ법)와 더불어 다 같이 동일한 지에 존재한다’고 하였으며, ‘의계는 어떤 때 상지에 존재한다’고 한 것은, 이를테면 정(定)에 노닐 때가 그러하다. 즉 만약 욕계에 태어나 초정려로부터 무간에 욕계의 의식을 일으켜 욕계의 법을 요별하는 경우, 의근은 상지에 속하고, 다른 세 가지는 하지에 속하는 것이다. 혹은 제2ㆍ제3ㆍ제4 정려 등으로부터 무간에 초정려와 제2ㆍ제3 정려지 등의 의식을 일으켜 초정려와 제2ㆍ제3 정려지 등의 법을 요별하는 경우, 의근은 상지에 속하고, 다른 세 가지는 하지에 속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초정려 등에 태어나 상지로부터 하지의 의식을 일으키는 경우에 대해서도 마땅히 참답게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생을 받을[受生] 때에는 상지의 의근이 하지의 소의신에 의지하는 일이 없으니, 필시 하지의 소의신이 멸하지 않고서 상지의 생을 받는 일은 없기 때문이며, 또한 결정코 어떤 경우에도 다른 지의 마음으로 머물면서 목숨을 마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하지의 의근이 상지의 소의신에 의지하거나 상지의 의근에 의지하여 하지의 소의신을 받는 일이 없다고 해야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상지의 의계로부터 무간에 욕계나 색계에 최초로 결생(結生)할 때, 의근은 상지에 속하고, 소의신과 의식은 하지에, 그것에 의해 요별된 법은 혹은 자지에, 혹은 상지에 속하며, 혹은 어디에도 계속(繫屬)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하지의 의근에 의지하여 상지의 소의신을 받는다고 해도 역시 이치에 어긋나지 않으며, 정에 노닐 때에 하지의 의근이 상지의 소의신에 의지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여도 역시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상지에 태어나 먼저 하지의 의식과 소의신과 변화심[化心]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식과 법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널리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욕계의 안근으로 욕계의 색을 보거나 혹은 색계의 안근으로 2계의 색을 보는 경우, 그 때 그러한 색은 몇 가지 종류의 안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나아가 여기서는 다시 몇 가지 종류의 분별을 일으키는 것인가?
[유부] 종의에 미혹하여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해 먼저 전체적으로 분별한 다음에 마땅히 개별적으로 해석해 보리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여기서 바야흐로 계탁분별(計度分別)과 부정(不定, 즉 선정의 상태가 아닌 산란된 의식)의 수념분별(隨念分別)에 대해 분별하리라. 즉 모든 지(地)에 두루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두 종류에 근거하여 분별하는 것이다.
일체의 안식은 모두 무분별(즉 自性分別)이다. 또한 선(善)의 분별은 능히 일체의 자지와 상지와 하지를 소연으로 한다. 염오의 분별은 자지와 상지를 소연으로 한다. 무기의 분별은 자지와 하지를 소연으로 한다. 그리고 태어나는 지에 따라 아직 그곳의 탐(貪)을 떠나지 않았으면 이러한 지에는 세 종류의 분별(즉 선ㆍ염오ㆍ무기의 분별)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러나 만약 태어나는 지의 탐을 떠났으면 이러한 지에는 오로지 두 종류의 분별만이 있을 뿐이니, 이를테면 염오의 분별을 제외한 그것이다. 그리고 다른 지에 태어나는 경우에는 초정려의 선한 안식이 현재전하는 일은 없으니, 이는 반드시 태어나는 지에 계속(繫屬)되기 때문이다. 초정려에 태어날 경우에도 역시 그 밖의 다른 지의 안근에 의해 선한 안식을 일으킬 수 없으며, 그 밖의 다른 지에 태어나서도 능히 그 밖의 또 다른 지의 무부무기의 분별을 일으켜 현전하는 일이 없으니, 이 역시 반드시 태어나는 지에 계속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근은 오로지 어떤 한 생에 의해 일어난 분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한 생에 의해 일어난 분별만을 말하는 것이라면, 상지에 태어나는 경우 마땅히 하지의 분별은 결정코 존재하지 않아야 하며, 그럴 경우 이러한 생 중에서 그러한 세 가지 분별이 현재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지의 분별은 오로지 선으로 무기가 아니어야 할 것이니, 앞서 이미 그 이유를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 밖의 생에 대해 전체적으로 설하는 경우에도 모두 이렇게 갖추어 설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전체적으로 분별하여 보았으니,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개별적으로 해석해 보리라.
선근이 끊어진 자[斷善根者]가 안근으로 색을 볼 경우, 이러한 색은 염오와 무부무기로서, 안식에 의해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다시 세 종류의 분별을 일으키니, 이를테면 선과 염오와 무부무기가 바로 그것이다.
선근이 끊어지지 않았지만 아직 탐을 떠나지 않은 자가 안근으로 색을 볼 경우, 이러한 색은 세 종류로서 안식에 의해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다시 세 종류의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만약 온갖 이생으로서 욕계에 태어나 있으면서 이미 욕계의 탐을 떠났더라도 아직 초정려의 탐을 떠나지 않은 자가 욕계의 안근으로써 온갖 색을 볼 경우, 이러한 색은 바로 선과 무부무기로서 안식에 의해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다시 욕계의 분별을 일으키게 되는데, 만약 이러한 법에서 물러난 자[退法者]라면 세 종류를 모두 갖추게 되지만, 이러한 법에서 물러나지 않은 자라면 오로지 두 종류만을 갖출 뿐이니, 염오를 제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초정려의 안근으로써 욕계의 색을 볼 경우, 이러한 색은 오로지 무부무기일 뿐으로 안식에 의해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다시 욕계의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여기에서는 다시 초정려지의 두 종류의 분별을 일으키게 되니, 이를테면 염오를 제외한 그것이다. 초정려의 안근으로써 그곳의 색을 볼 경우, 이러한 색은 오로지 무부무기일 뿐으로 안식에 의해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다시 욕계의 분별을 일으키게 되는데, 만약 이러한 법에서 물러난 자라면 무기를 제외한 두 종류를 갖지만, 이러한 법에서 물러나지 않은 자라면 오로지 선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는 다시 초정려지의 세 종류의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이미 초정려의 탐을 떠났더라도 아직 제2정려의 탐을 떠나지 않은 자가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욕계의 색을 볼 경우, 이러한 색은 바로 오로지 무부무기일 뿐으로 안식에 의해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다시 욕계의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법에서 물러난 자라면 세 종류를 모두 갖추지만, 이러한 법에서 물러나지 않은 자라면 오로지 염오를 제외한 두 종류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는 다시 초정려의 분별을 일으키게 되는데, 만약 이러한 법에서 물러난 자라면 염오를 제외한 두 종류를 갖지만, 이러한 법에서 물러나지 않은 자라면 오로지 선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는 다시 제2정려지의 두 종류의 분별을 일으키게 되니, 이를테면 염오를 제외한 그것이다.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초정려의 색을 볼 경우, 이러한 색은 오로지 무부무기일 뿐으로 안식에 의해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다시 욕계의 분별을 일으키게 되는데, 만약 이러한 법에서 물러난 자라면 [무부]무기를 제외한 두 종류를 갖지만, 이러한 법에서 물러나지 않은 자라면 오로지 선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여기에서는 다시 초정려의 분별을 일으키게 되는데, 만약 이러한 법에서 물러난 자라면 세 종류를 모두 갖추고 있지만, 이러한 법에서 물러나지 않은 자라면 오로지 선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는 다시 제2정려지의 두 종류의 분별을 일으키니, 이를테면 염오를 제외한 그것이다.
제2정려의 안근으로써 제2정려의 색을 볼 경우, 이러한 색은 바로 오로지 무부무기로서 안식에 의해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다시 욕계의 분별을 일으키게 되는데, 만약 이러한 법에서 물러난 자라면 [무부]무기를 제외한 두 종류를 갖지만, 이러한 법에서 물러나지 않은 자라면 오로지 선만이 있을 뿐이다. 초정려지에서 일으키는 분별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는 다시 제2정려지의 세 종류의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이같이 설하는 바에 따른 이치를 개별적으로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리라.
이미 제2정려의 탐을 떠났을지라도 아직 제3정려의 탐을 떠나지 않았거나, 이미 제3정려의 탐을 떠났을지라도 아직 제4정려의 탐을 떠나지 않았거나, 혹은 이미 제4정려의 탐을 떠난 자의 경우에 대해서도 모두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이생으로서 욕계에 태어나 존재하는 자이든, 이와 같이 제4정려 중에 태어나 존재하는 자이든, 나아가 온갖 성자로서 5지(地)에 태어나 존재하는 자이든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마땅히 널리 논설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차별이 있다. 즉 온갖 성자로서 물러난 자이거나 물러나지 않은 자이거나 모두 상지의 염오를 소연으로 하여 분별하는 일이 없으니, 다른 지의 변행(遍行)이 모두 이미 끊어졌기 때문이며, 견도(見道)의 공덕은 필시 물러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적인 사례에 따라 ‘귀[耳根]가 소리[聲]를 듣는다’고 할 때의 식(識)과 분별에 대해서도 마땅히 추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5.14. 능식(能識)ㆍ소식(所識), 상(常)ㆍ무상(無常), 근(根)ㆍ비근(非根) 분별
‘견(見)’에 부수된 방론(傍論)을 이미 다 마쳤으니, 이제 마땅히 정론(正論)에 대해 분별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18계는 오로지 6식 중의 몇 가지 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인가?
[18계 중의] 몇 가지가 영원한 것[常]이며, 몇 가지가 무상(無常)한 것인가?
[18계 중의] 몇 가지가 근(根)이며, 몇 가지가 비근(非根)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다섯 가지 외계는 두 식(識)에 의해 인식되며
영원한 것은 법계인 무위이며
법계의 일부는 바로 근(根)이며
아울러 내계의 열두 가지도 역시 그러하다.
논하여 말하겠다.
18계 중의 색(色) 등의 5계는 그 순서대로 안(眼) 등의 5식에 의해 각기 하나씩 인식되며, 또한 이것들은 모두 의식에 의해 인식된다. 이처럼 5계는 각기 6식 중의 두 가지 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에 준하여 볼 때, 그 밖의 나머지 13계는 모두 의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임을 알 수 있으니, 그것들은 5식신의 소연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18계 가운데 어떠한 계도 그 전부가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로지 법계의 일부인 무위법만이 영원하다. 그리고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본다면, 무상한 것은 무위법을 제외한 그 밖의 법계와 다른 여타의 [17]계이다.
18계 가운데 법계의 일부와 내적인 열두 가지 계(즉 6근과 6식)는 바로 근(根)이며, 그 밖의 나머지는 근이 아니다. 즉 5수근(受根)과 신(信) 등의 5근과 명근(命根)의 전부와, 3무루근 중의 일부는 법계에 포섭된다.62) 또한 안 등의 5근은 자신의 명칭과 같은 계에 포섭되고, 여근과 남근은 바로 신계(身界)의 일부에 포섭되니, 뒤(본론 제9권)에서 마땅히 분별하는 바와 같다. 그리고 의근은 7심계에 모두 포섭되며, 뒤의 세 가지(즉 3무루근을 말함)의 일부는 의계와 의식계에 포섭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뜻에 준하여 본다면, 그 밖의 나머지 색 등의 5계와 법계의 일부는 모두 그 자체 근이 아니다.
이 같은 22근(根)은 계경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이를테면 안근ㆍ이근ㆍ비근ㆍ설근ㆍ신근ㆍ의근ㆍ여근(女根)ㆍ남근(男根)ㆍ명근(命根)ㆍ낙근(樂根)ㆍ고근(苦根)ㆍ희근(喜根)ㆍ우근(憂根)ㆍ사근(捨根)ㆍ신근(信根)ㆍ근근(勤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ㆍ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ㆍ이지근(已知根)ㆍ구지근(具知根)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계경에서는 이를 6처의 순서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신근 뒤에 의근을 설하고 있지만, 아비달마의 여러 대논사들은 이러한 의근을 명근 다음에 설하고 있다. 왜냐하면 무소연(無所緣)과 유소연의 순서에 따라 설하였기 때문이며, 그럴 경우 온갖 갈래[諸門]의 분별을 보다 쉽게 드러내어 알 수 있기 때문이다.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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