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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순진리회 창설 오늘날에는 우리의 기업이 해외로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멕시코 등지에 전자 산업과 자동차 산업이 진출해 있으며 건설회사는 동남아시아를 비롯하여 중동, 아프리카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 전경 교운 2장 31절
│한시풀이│
경(庚)은 변경(變更)의 시작이고, 신(申)은 신명이 마땅히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늘이 새롭게 바뀌고, 땅이 새롭게 바뀌도다. 만물이 마침내 새롭게 바뀌니, 나도 역시 이와 같이 새롭게 바뀌어야 하리라.
도주 조정산께서 갑자년(1924년)에 말씀하신 이 구절대로 경신년(1980년)에는 또 새로운 변화가 있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또한 상제께서 말씀하신 ‘삼초(三哨) 끝에 대인이 나오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된 것이다. 이 시기에 한국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며 이때부터 바뀌어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게 되었고, 올림픽을 유치하기에 이른 것이다. 경신년부터 불기 시작한 새 시대, 새 환경, 새 질서의 기운은 결국 88올림픽에서 그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서울 올림픽은 역대의 올림픽과는 다른 발전적인 면모를 보였으니 바로 동서진영의 모든 나라가 참가하여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지구촌의 축제로 화하였다는 점이다. 1988년 서울특별시에서 개최된 제24회 올림픽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본래 올림픽 경기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제우스신에게 바치는 제전경기(祭典競技)의 하나로, 종교·예술·군사훈련 등이 일체를 이룬 헬레니즘 문화의 화려하고도 찬란한 결정체였다. 여러 신을 섬기던 각 도시국가의 시민들은 올림픽 대회가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면 올림피아로 몰려들어 신전에 참배하며 제례를 지냈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올림픽 경기가 훈련의 성격을 띠었다는 데 있다.
이러한 고대올림픽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고증되지 않았지만, 기원전 776년 앨리스 출신의 코로 에부스가 스타디온 달리기에서 우승했다는 문헌상의 기록을 근거로 통상 이때를 올림피아의 원년으로 본다. 이후 1,200여 년 동안 계속되다가 그리스가 로마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정한 테오도시우스황제는 올림픽 제전을 이교도들의 종교행사로 규정, AD 394년 폐지를 명령하는 칙령을 선포함으로써 바로 AD 393년에 열린 제293회를 마지막으로 고대올림픽의 역사는 막을 내렸던 것이다.
그 후 약 1,500년 동안 중단되었던 고대올림픽 경기는 프랑스의 피에르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on)의 노력으로, 1894년 6월 23일 파리의 소르본 대학(파리대학교)에서 열린 국제스포츠대회에서 유럽 각국의 대표들로부터 만장일치로 찬성을 얻어 근대올림픽이 시작되었다.
당초 그의 의도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 패하여 사기가 저하된 프랑스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의욕을 북돋아주고, 아울러 올림픽이라는 스포츠 제전을 통하여 세계 각국 청소년들의 상호이해와 우정을 다지고 세계평화를 이룩하려는 데 있었다.
1896년 유서(由緖) 깊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개최된 제1회 대회에 참가한 선수는 13개국 311명으로 ‘인류평화의 제전’이라는 거창한 구호에 걸맞지 않은 작은 규모였다. 올림픽이 국제대회로서 면모를 갖춘 것은 1908년 제4회 런던대회 때부터였다. 이 대회에는 22개국 1,999명이 20개 종목에 참가함으로써 대회규모가 획기적으로 확대되었는데, 각국이 처음으로 국기를 앞세우고 참가하였으며 경기규칙 제정, 본격적인 여자경기종목 채택, 마라톤 코스의 확정 등 조직과 관리면에서 체계가 갖추어졌다. 근대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은 이 사업의 실현을 위해서 단지 산파역할을 하였지만, 그의 한결같은 염원은 이 대회가 영원한 성공을 거두어서 아름다운 스포츠정신이 세계 어느 곳에나 보급되어 온 세계의 청년들이 진실로 평화를 사랑하며 인생에 대한 존엄성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척도는 그 사람이 승리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느 정도 노력하였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승리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정당당히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올림픽 운동은 세계에 하나의 이상을 심어주는 일이며, 그 이상은 바로 현실생활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육체의 기쁨, 미와 교양, 가정과 사회에 봉사하기 위한 근로, 이상 3가지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쿠베르탱은 올림픽 경기의 이상을 인간의 완성은 물론 세계의 평화에 두었다. 즉 스포츠에 의한 인간의 완성과 교류를 통한 국제평화의 증진을 그 이상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를 거듭함에 따라 올림픽 경기의 숭고한 정신은 점차 퇴색하여 그동안 제1·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3번이나 중단되었고,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되어 테러가 일어나는가 하면 대회를 보이콧하는 사례까지 빚어졌다. 제22회 모스크바 대회 때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여 자유진영 국가들이 불참하는 사태를 빚었으며, 제23회 로스앤젤레스 대회 때는 그 반작용으로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불참사태를 가져왔다. 이것은 냉전체제의 극단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며, 오선위기 도수에서 마지막 승부겨루기에 다다른 극한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서 냉전으로 인한 분단의 현장인 한국에서 열린 88서울 올림픽 때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북한과 쿠바 등 몇 나라를 제외한 동·서가 한자리에 모이는 대축전이 되었으며,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를 대순의 변화과정에서 본다면 한여름 동안 왕성하게 뻗어나가던 콩줄기에서 꽃이 피어날 시기였다. 그 꽃이 현실적으로 드러난 것이 88서울 올림픽이었던 것이다.
1988년 즈음은 박우당 도전께서 창설하신 대순진리회의 도세(道勢)가 한창 뻗어나가던 시기이며, 경기도 여주에 도장을 새로이 조성하고 있던 때이다. 그리고 이때, 즉 1988년 11월 도전 박우당께서는 대순진리회 창설 역사 이래 처음으로 전체 임원들이 모인 공식석상에서 박성구(朴成九) 현(現) 도전(都典)에게 ‘상도(上嶋)’라는 도호(道號)를 내리시고, 그날에 “도주님도 납향치성을 한번 받으시고 화천하셨다” 하시면서 납향치성을 발표하시고 지방 각 방면 회관·회실에서 치성을 올리도록 명하였다.
이것은 전경 예시 89절 ‘후인산조개유보 권군범사막원천(後人山鳥皆有報 勸君凡事莫怨天)’ 즉 “다음 사람은 산조(山鳥)라고 모두에게 알리노니 제군들이여, 범사에 하늘을 원망치 말라“ 고 하는 구절처럼 당신의 뒤를 이을 후인(後人)을 찾아 발표하신 것이고, 당신께서는 일을 마치고 화천(化天)하실 것임을 예고하신 것이다.
바로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상극으로 치닫던 전 세계의 냉전체제가 눈 녹듯 녹아내리기 시작하였으니 그것이 88서울올림픽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대립하던 동·서의 냉전체제였다. 그러나 88서울올림픽을 통하여 동·서의 거의 모든 국가가 한자리에 모이면서 대립에서 화해로, 긴장에서 타협으로, 냉전에서 탈냉전으로 화하는 장이 연출되었으니, 이것은 장차 지상에 신선을 실현시키고, 지상천국을 건설하여 후천 도화세상(道化世上)을 이끌어갈 1만 2천 도통군자들의 대두목이 정하여진 것을 축하하는 대축전이었던 것이다.
냉전(冷戰)의 종식(終熄)
도전 박우당께서 실현하시는 상생의 법리는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가져왔으니 그것은 지난 수십 년 세월 동안 진행되던 냉전체제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오선위기의 바둑이 끝나고 바둑판과 바둑돌이 주인에게 되돌려 지는 도수가 오는 것이니 바둑판을 운전할 주인 신선인 대두목과 1만 2천 도통군자가 출현하는 시점인 것이다.
상도 박성구 선감은 1990년 11월 22일(양력 1991년 1월 7일) 도전님의 존영(尊影)을 모셔 올리고, 동지로부터 셋째 미일(未日)인 1990년 12월 10일(양력 1991년 1월 25일)에 “영대(靈臺)의 서가여래 자리는 도전님 자리이다.”라고 박우당 도전께 4배(四拜)를 올리며 납향치성을 올렸다. 그러나 전 임원들이 ‘태극도에서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하며 감사원에 회부하여 제명해야 한다고 야단법석이었다.
하지만 박우당 도전께서는 1990년 12월 28일(양력 1991년 2월 12일) 훈시에서, “자고이래로 산 사람이 제사 받은 적 없다.” 하시며 구천상제이신 강증산 성사와 도주 조정산께서 산제사를 받으셨던 일을 역설적으로 말씀하시고, “여러분과 나와의 차이가 있다면 도전이라는 것이 다르다. 알려면 똑바로 알아야 해. 밖에서도 어떤 단체가 있다면 그것을 이끌어 나가는 책임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되거든. 통솔해 나가고 많은 도인을 영도해 가는 책임이 있다. 딴 게 아니다. 내 책임이란 그것이다. 이것은 도주님께서 전해 주신 것이다. 옥황상제님께서 그런 책임을 나한테 주셨다. 설령 아니라 그래도 내 말이라면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맡을 도(都)字, 옥편에도 그런 도(都)자가 없더라고 박성구가 말한다. 그럼 내가 그걸 말하려고 일부러 만들었단 말인가? 내가 확인해봤어. 시봉시켜서 옥편 들여다봤는데 거기에 총(總)자로 나와 있다. 거느릴 총(總), 총지휘, 총재. 모두 도(都), 맡을 도(都)자지. 거느릴 도(都). 총(總)이란 모두 도(都)자여! 전(典)이란 법전(法典)자 법이 되고 ‘주장 주(主)’, ‘주인 주(主)’다. 모든 걸 주장하는 사람이다!”
하고 전체 임원이 모인 가운데서 상도(上嶋) 박성구(朴成九)가 도전을 맡으라는 발표를 하셨다. 그리하여 도전 박우당으로부터 유업(遺業)을 이어 받아 종통(宗統)을 계승한 상도 박성구는 1995년 12월 4일 화천하신 도전 박우당 신위(神位)를 1995년 12월 15일 박성미륵세존으로 밝히고, 난법으로 남아있던 석가여래를 내리고 그 자리에 박성미륵세존(朴聖彌勒世尊)을 모심으로써 다음과 같이 진법을 정하였다.
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 下鑑之位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 하감지위
趙聖玉皇上帝 下鑑之位
조성옥황상제 하감지위
朴聖彌勒世尊 下鑑之位
박성미륵세존 하감지위
이로써 진법주 원위(元位) 세 분의 정체가 모두 밝혀져 진법(眞法)이 나오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세상에 완성된 도(道)가 출현하였으니 상제께서 “이 도(道)는 장차 금강산(金剛山) 1만2천 봉을 응기하여 1만2천의 도통군자(道通君子)로 창성(昌盛)하리라”고 하신 대로 전 세계 천하창생을 법리에 맞게 다스려 나갈 1만2천 도통군자가 나오는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과연 상제님께서 짜놓으신 오선위기의 도수대로 세계대세의 승부는 점차 뚜렷이 나타나게 되고 바둑판이 주인신선에게 되돌려지는 도수는 다가오고 있었으니 이에 따라 냉전은 종식되어가고 천하가 한 집안으로 묶여지는 흐름이 1990년대부터 가시화(可視化)되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중공의 개방(1981년), 동독과 서독의 통일(1990년), 소련의 붕괴(1991년) 등이 바로 그것이다. 공산주의 붕괴는 중국의 개방이 신호탄이었다.
중국의 개방
중공의 개방 경위를 알아보려면 1958년 시작된 ‘대약진운동’의 실패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이란 1958년 모택동에 의하여 제기된 일종의 경제성장을 위한 정책이다.
중공은 소련의 지원 아래 대약진 운동을 전개하면서, 강철생산량이 15년 내에 영국을 초과할 것이며, 농업생산량도 100% 이상 증가할 것을 표방하면서 모든 가정을 없애고 직업별로 군대식으로 인민을 조직화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천 년간 내려온 전통적인 농촌의 가치관이 파괴되어 그 충격은 농민들의 반항을 불러 일으켰다. 농민의 태업과 반항으로 농업생산은 대풍작이었던 1958년의 2억 2500만t과 비교하여 1960년에는 1억 8000만t으로 까지 떨어졌다. 또한 토법(土法)으로 수만 개의 제철소를 만들어 밥 짓는 솥까지 몰수해가며 생산한 철은 산성이 많아서 쓸모없는 것이 산적하게 되었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1959년부터 3년간이나 자연재해가 겹쳤고 중·소의 분쟁으로 경제지원을 해주던 소련의 원조가 끊겨 중국의 대약진운동은 참담한 실패를 떠안고 끝났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을 추진하여 1966년~1976년에 걸쳐 전 중국을 피바람 속으로 몰아넣었다. 문화대혁명은 대약진운동이 실패하자 노선의 수정을 요구하는 등소평, 유소기 등을 숙청하면서 시작된 철저한 무산계급에 의한 강력한 계급투쟁이었다.
1966년 8월 천안문(天安門) 광장에서 열린 백만인 집회에 모인 홍위병(紅衛兵)* 들은 전국의 주요 도시에 진출하여 모택동 사상을 찬양하고 낡은 문화를 일소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학교를 폐쇄하고 모든 전통적인 유교의 가치와 부르주아적인 것을 공격하였으며, 당의 관료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전국 각지에서 실권파들이 장악한 권력을 무력으로 탈취하였다.
*홍위병(紅衛兵):모택동의 부인 강청의 사주에 의해 1966년에 본격화한 중국 문화 혁명의 한 추진력이 된 학생 조직.
『모택동 어록』을 한 손에 들고 모택동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실권파들이 완강히 저항하고 홍위병에 내분이 발생하자 1967년 1월 모택동은 임표(林彪) 휘하의 인민해방군이 문화대혁명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것을 지시하였다. 인민해방군은 각지의 학교 ·공장 ·정부기관을 접수하였을 뿐 아니라 초기에 문화대혁명을 주도하였던 수백만 명의 홍위병들을 깊숙한 산골로 추방하였다. 혼미를 거듭하던 정국은 1968년 9월 전국 각지에 인민군 대표, 홍위군 대표, 당간부의 3자 결합으로 ‘혁명위원회’가 수립됨으로써 진정국면으로 들어섰다. 문화대혁명은 1969년 4월 제9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모택동의 절대적 권위가 확립되고, 국방장관 임표가 후계자로 옹립됨으로써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1971년 임표가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를 당하고 모택동에게 충성을 바쳤던 군부 지도자들이 대거 숙청되자 많은 사람들은 문화대혁명이 모택동의 개인적 권력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그런데 1973년 주은래(周恩來)의 추천으로 등소평이 권력에 복귀한 후부터 문화대혁명의 정신은 여러 측면에서 공격받기 시작하였다. 모택동을 지지하는 세력은 이데올로기·계급투쟁·평등주의·배외주의를 강조한 반면, 주은래와 등소평의 지지 세력은 경제성장·교육개혁·실용주의 외교노선을 주장하였다. 말년에 모택동은 두 노선을 절충한 후계자를 물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문화대혁명은 1976년 9월 모택동이 사망하고, 화국봉(華國鋒)에 의해 모택동의 추종자인 4인방(四人幇)* 세력이 축출됨으로써 실질적으로 종결되었다.
*4인방(四人幇):모택동의 측근이자 추종자. 네 명으로 구성되어 있어 사인방이라 하였다. 왕홍문(王洪文), 장춘교(張春橋), 강청(江靑), 요문원(姚文元)
문화혁명은 중국의 경제를 20년 전으로 후퇴시킨 사건이었으며 그 폐해(弊害)가 너무 컸다. 이 운동으로 약 300만 명의 당원이 숙청되었고, 경제는 피폐해지고 혼란과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마침내 1981년 6월 중국공산당은 ‘건국 이래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은 당·국가·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모택동의 오류이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하였다.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하자 등소평이 복권되었고 중국의 실권은 등소평에게로 넘어갔다. 강청 등 4인방은 처형당했으며 실용주의적 지도자들이 대거 복귀했다. 등소평은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내세우며 중국의 개방을 선언하고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즉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말인데 낙후된 중국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서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가리지 않겠다는 등소평의 소신을 함축한 말이다.
독일의 통일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현대사(現代史)에 한 굵은 획을 그은 것은 1990년에 달성된 동·서독의 통일일 것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독일은 소련군이 진주한 동독과 서방 연합군이 진주한 서독으로 나뉘어 분할 통치되었다. 그러다가 냉전체제가 굳어지면서 1949년부터는 동서 양쪽에 독립된 정부가 들어서 분단이 공식화하였다. 1950년대 초에는 한때 중립 통일안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무산되었고, 60년대부터는 국제적 냉전 기류에 편승한 서독의 이른바 할슈타인원칙에 따라 대결 국면이 조성되어 동독은 베를린에 장벽을 둘러싸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결 국면이 전환기를 맞은 것은 1969년 W.브란트(Willy Brandt) 총리가 동방정책(Ostpolitik)을 추진하여 할슈타인원칙을 포기하면서부터이다. 이후 1972년부터 1987년까지 약 15년간 34차례의 협상을 통해 과학 기술, 문화, 환경 등에 관한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동서독간 민간인의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1982년 H.슈미트(Helmut Schmidt) 서독 총리의 동독 방문에 이어 1987년에는 E.호네커(Erich Honecker) 동독 공산당서기장이 서독을 방문함으로써 통일에 일대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도 동독측은 1민족 2국가라는 통일 이념을 자본주의적 민족과 사회주의적 민족이라는 2민족론으로 바꾸어 통일에 소극적이었던 반면, 서독은 1국가 2체제론을 내세워 독일 민족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독일의 통일에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은 M.고르바초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yov)에 의해 추진된 소련의 개방과 개혁정책(Perestroyka)이다. 그 영향으로 동구권 국가들이 소련의 눈치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추진하게 되었고, 동독도 같은 행보를 걷게 되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첫 자유선거가 실시되어 L.데 메지에르 정권이 탄생하는 등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이를 틈타 서독이 막강한 경제력을 내세워 소련에 경제협력을 약속하고 주변 국가에 외교 공세를 펴면서 1990년 초부터 독일 통일의 외부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동서 양 당사국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이른바 2+4회담이 열려, 8월 말 통일조약이 체결되고, 9월에는 2+4 회담의 승인을 얻어 10월 3일 마침내 민족통일을 이끌어 내게 되었다. 통일 후 1990년 12월 2일 전 독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H.콜(Helmut Kohl) 총리가 이끄는 통일정부 구성을 끝냈다.
소련의 해체
한편 1917년 11월 7일의 혁명으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된 소련은 1918년부터 1922년까지의 내정에 간섭하려는 외국과 전쟁을 치르는 한편, 국내 적대 세력의 내란을 진압하고, 1922년 12월 소비에트 연방을 결성하였다. 그 뒤 새 공화국의 가입으로 15개의 공화국이 공산당 일당독재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의 연방을 이루었다.
1924년에 레닌이 죽자 스탈린이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192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세 차례의 5개년 계획을 실시하여 국민경제의 사회주의화와 공업화가 병행되었으며, 농업은 집단화되었다. 소련이 가진 강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은 이 때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강철의 사나이 스탈린이 집권하자 1934년 말부터 1938년까지의 대숙청을 통하여 스탈린 독재정권을 확립하여 종신토록 서기장직에 있으면서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발언을 봉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소련 또한 막대한 손해를 입었으나, 대전이 끝난 뒤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생겨남에 따라 소련은 그 지도국이 되었다.
1953년 6·25전쟁이 끝나고 스탈린이 사망하자 냉전이 완화될 조짐이 보였으나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985년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함께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및 그라스노스트(개방)를 기초로 한 일련의 개혁정책의 여파로 자유화물결이 일어나고, 1990년 동·서독이 통일되는 등 공산주의 국가들이 시장경제를 지향하게 되면서, 보다 급진적으로 개혁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그런 중에 1991년 보수파의 쿠데타가 발생하였으나 이를 무력화시킨 옐친이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게 되었고, 1991년 공산주의 포기와 공산당 해체를 계기로 각 공화국이 독립을 강행함으로써 소련은 급속히 붕괴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yka)란 1985년 4월에 선언된 소련의 사회주의 개혁 이데올로기로서 스탈린주의의 병폐를 극복하려는 데서 시작되었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는 모든 경제 목표의 설정과 집행이 중앙에서 행해져 지역이나 기업의 특성과 자주성은 무시되었고, 양적 목표 달성의 중시는 질적 개선을 억제하였다. 또한 중공업 위주의 불균형 성장전략은 소비재 공업과 농업의 낙후를 가져와 소비재 물자의 질적 저하와 만성적 부족을 구조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가장 중요한 부정적 현상으로 개인의 창의성과 작업에 대한 열의를 약화시켰으며 국가에 의한 직업, 의료, 주택 등의 보장은 개인의 창의성의 결여와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제고시켰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이러한 스탈린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작되었으나 사회주의의 개혁이 아니라 붕괴를 촉발시킨 원인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1991년 8월 공산당 강경파의 쿠데타가 실패하자 소련공산당은 해산되었고 소련 치하에 있던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현재는 12개의 공화국이 성립하였다. 불과 5~6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이리하여 한반도를 감싸고 있던 냉전기류가 끝나고 굳게 닫혀 있던 동·서가 화합과 타협의 장으로 세계의 모습이 변모하게 된 것이다. 또한 빗장이 굳게 걸려있던 남북관계에서도 변화와 발전의 조짐이 보이면서 점차 남북한 통일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가고 있다. 구천상제께서 공사를 보신 대로 오선위기가 끝나고 바둑판과 바둑돌은 주인차지가 되는 차례가 된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이 땅에 일만 이천의 도통군자가 창성하여 후천 세계를 이끌어가는 일만 남은 것이다. 바로 이것이 좌상에서 득천하(得天下)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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