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희 작가의 책가방
염소 시즈카와 나호코가 함께 쓴 그림일기
『염소 시즈카』(다시마 세이조 지음, 고향옥 옮김, 보림 펴냄, 2010)
사랑하는 그림책이 너무도 많은 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은 것보다는 다행이겠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을 말하라는 주문에 시달리던 어린 시절이 지나 이제는 누구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 이즈음에는 단 한 권의 그림책에 대해 얘기하는 이런 일이 가장 난감하고 가혹하게 여겨집니다.
이 글도 적잖이 힘든 과정을 거치고서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분주한 일정 틈틈이 그림책 서가를 헤매던 끝에 주말 산골짜기 집 뜰을 거닐다가 문득 이 그림책을 결정하게 되었지요. 오동나무 아래 자기 집을 두 채나 지닌 우리 돌돌이가 놀아 달라고 컹컹대는 참에 함께 겅중거리다가 시즈카와 나호코를 떠올린 거예요. 전원생활의 가장 큰 기쁨은 자연 속을 뛰어노는 동물들과 함께 지내는 것인데, 시즈카만큼이나 돌돌이도 우리 가족과 잊지 못할 사연을 쌓아 나가고 있지요. ‘가축을 길러 보면 가축의 행동 하나하나가 무척 감동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그림책 말미 ‘작가의 말’에 나오는 얘기 그대로입니다.
우리 가족 저마다의 휴대전화 사진첩에는 돌돌이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종이상자에 오도카니 앉은 채 쌍거풀 눈 그득히 엄마를 그리워하는 사진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처럼 덩치가 커다래진 채 천방지축 날뛰고 짖어댈 줄은 까맣게 몰랐던 때였지요. ‘나호코네 집에 / 아기 염소가 왔어요. / 몸은 새하얗고 / 눈이랑 입이랑 코 둘레, / 귓속만 분홍색인 / 귀여운 아기 염소예요.’ 아마도 서른 번은 넘게 읽었지 싶은 <염소 시즈카>의 첫 문장을 다시 읽으며 새삼 그때를 돌이키게 됩니다.
아기 염소는 시골에 사는 나호코의 친구가 되어 염소답게 날뛰고 달리며 온갖 일을 벌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나호코와 함께 놀던 아기 염소가 갑자기 개울 건넛집으로 내달려 노인 내외가 마주한 찻상 위에 엉덩이를 대고 동글동글한 것을 쏟는 바람에 할머니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고 뒤쫓던 나호코가 어쩔 줄 몰라 울음을 터뜨린 사건이었지요. 그 일로 염소는 꽁꽁 묶여 지내게 되고, 풀어달라고 울어대는 소리가 요란해서 온 가족이 ‘시즈카(조용히!) 시즈카!’ 소리치던 끝에 ‘시즈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우리 집 돌돌이 또한 몇 차례 이웃집 닭들을 괴롭힌 전과에 의해 목줄을 두르게 되었고, 반갑다며 덤벼드는 대로 껴안았다가 엉덩방아 찧으며 나가떨어진 이후로는 물리적인 거리를 두고 사랑하게 되었지요.
시즈카도 ‘풀이 자라는 것보다’ 더 쑥쑥 자라서 나호코가 돌보기 힘들어질 정도가 됩니다. 어느 날 밤에는 잠도 안 자고 하염없이 울고 또 울어요. 다음 날 아침 아빠는 나호코와 함께 시즈카를 싣고 나가서 (아마도 미리 알아둔) 숫염소 우리에 넣어줍니다. ‘숫염소가/ 다정하게 속삭이고,/시즈카는/ 실컷 응석을 부렸지요.’
그 뒤로 시즈카는 배가 점점 불러갑니다. 겨울인데도 계속 맛난 풀을 먹으려 들고 예민하게 굴며 짜증 내는x 이 어미 염소를 감당하느라 나호코는 물론 아빠엄마 모두 애를 씁니다. 심지어 풀을 갖다 주는 나호코를 들이받아 이 다정했던 두 친구 사이가 서먹해지지만, 시즈카가 아기 낳는 수고를 지켜보면서 나호코는 자기를 들이받은 염소 친구를 용서합니다. 시즈카가 아기 낳는 장면은, 앞서 시즈카가 숫염소와 한몸이 되는 장면하고 마찬가지로, 글 없이 그림만으로 얘기합니다. 얼핏 소박하고 투박하게 여겨지던 다시마 세이조 특유의 그림이야기 방식이 더없이 멋지고 세련되게 구현되는 순간이지요. ‘축하해, 시즈카’ 라고 속삭이며 나호코가 시즈카를 껴안은 채 둘의 눈가에 보일 듯 말 듯 눈물이 비치는 이 장면에서, 나는 매번 참을 수 없이 한두 방울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이제 시즈카는 여러모로 달라집니다. 나호코가 ‘뽀로’ 라고 이름 지은 자기 아기를 위해 어미 시즈카는 주위를 깨끗이 유지하느라 우리 바깥으로 엉덩이를 내민 채 볼일을 보고, 뽀로가 바깥으로 나가면 걱정스런 눈길로 지켜봅니다. 어느 날 밤 닭장을 습격한 동물이 아기를 해치려 들자 용감하게 싸워 지켜 내기도 하고요. 젖을 주로 먹던 뽀로가 풀을 먹게 되자 젖 뗄 기회라고 여겨 자기 곁에 얼씬 못하도록 내치기도 합니다. (이처럼 뽀로에게 냉정하게 홀로서기를 가르치던 시즈카를 회상하면서 작가는 자녀를 과잉보호하는 어머니들에게 시즈카의 까만 콩알이나 먹이고 싶다고 썼습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어미의 일을 척척 해나가는 시즈카! 어린 돌돌이가 뼈다귀(처럼 생긴 것)를 땅속 깊숙이 공들여 묻는 것을 지켜보던 때만큼이나 가슴 먹먹해지는 장면입니다.
아기 염소 뽀로는 홀로서기에 성공한 참에 나호코네 큰아버지네로 보내져요. 시즈카는 아기가 떠나자 커다랗게 울고 또 울다가, 이내 자기 일로 돌아가지요. 시즈카를 10년이나 키운 작가의 견해에 의하면, 염소는 느낌을 간직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합니다. 잠깐, 이에 대한 다시마 세이조 선생의 멋진 표현을 직접 전합니다.
‘시즈카의 머릿속에는 생각이 들어있는 게 아니라 순간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즈카는 숫염소가 그립다거나, 맛있는 풀을 실컷 먹은 뒤에 만족스럽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담아두는 게 아니라, 마치 수박씨를 내뱉는 것처럼 생각을 그때 그때 풋 풋 내뱉어버리지요. 염소가 뱉어 낸 생각들은, 낮에 염소가 앉아있는 초원에 띄엄띄엄 떠다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생각들은 밤이 되어도 초원을 떠돌아다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염소 시즈카』(보림, 2010) '작가의 말'에서
이 글을 처음 읽고, 나는 아주 간절히 염소를 키우고 싶었고, 염소치기가 되고 싶었습니다. 산골짜기 집과 돌돌이를 거의 홀로 건사하며 글 쓰느라 힘겨워하는 남편은 고개를 저으며 자기가 염소수염 기르고 매애 울어 주겠노라 합니다만, 이 그림책을 읽을 때마다 염소치기의 소망이 끓어올라 쩔쩔매게 됩니다. 최소한의 식사를 하면서 염소젖으로 건강을 지키느라 집 떠날 때면 주저 없이 염소와 동행했던 마하트마 간디처럼 염소하고 함께 다닐 수도 있을 텐데, 온갖 궁리에 빠지기도 하면서요.
시즈카는 아기염소를 떠나보내고, 먹일 아기가 없는 시즈카의 젖이 퉁퉁 불어 터질 듯해지자 나호코네 아빠가 해결해 보려 합니다. 당연히 시즈카는 난생 처음 겪는 무례한 일에 놀라 아빠를 호되게 걷어찹니다. 번번이 혼이 나면서도 시즈카를 이렇게 묶고 저렇게 묶어 젖을 짜려는 아빠가 나호코는 못마땅하고 밉습니다. 그러다가 모두에게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과연 시즈카가 좋아하는 밀기울을 먹는 동안 젖을 짤 수 있게 되지요. (정말 멋진 생각은 아이들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이제 나호코네는 시즈카 우유와 시즈카 치즈와 시즈카 요구르트와 시즈카 아이스크림을 먹게 됩니다.
그렇게 시즈카는 어미의 일을 마치고, 염소 친구로서 나호코네 가족과 함께 살아갑니다. 생각과 느낌을 ‘수박씨 뱉듯 풋 풋 뱉어’내면서요. 오직 ‘오늘은 무엇을 먹게 될 것인가’에 전념하는 우리 돌돌이가 시즈카와 지내게 되면 틀림없이 그 생각과 느낌이 어떤 맛인지 알아낼 거예요. 얼마 전 실수로 페이스북에 접속했다가 ‘알 수도 있는 사람’의 반가운 얼굴을 보고 엉겁결에 친구 신청을 해 버린 다시마 세이조 선생님께 이 얘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이 그림책 앞뒤 면지 그득히 시즈카를 그린 나호코에게도요.
이 장편 그림책은 시즈카 그림책 7권을 한데 묶은 것입니다. 번역 출간 당시 편집자로부터 전해 듣기로는 ‘낱권으로 읽어서는 시즈카 이야기의 감동을 제대로 누릴 수 없다’고 판단한 출판사 대표의 결단에 따라 이와 같은 형태로 나왔다고 합니다만, 선물할 때마다 망설이게 되니 낱권 출간이 필요한 거지요. 첫 번째 그림책을 선물하면, 틀림없이 시즈카와 나호코를 사랑하게 된 독자가 이 멋진 그림책을 한 권씩 한 권씩 구하지 않을까요.
이상희
시인, 그림책 작가, 그림책 번역가. 부산에서 태어나 198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 선되었다. 지금은 시와 그림책 글을 쓰고 번역하며 ‘패랭이꽃 그림책 버스’와 ‘이상희의 그림책 워크숍’을 운영하고 있다. 시집 『잘 가라 내 청춘』, 『벼락무늬』, 어른을 위한 동화 『깡통』, 글을 쓴 그림책 『고양이가 기다리는 계단』, 『선생님, 바보 의사 선생님』, 『엄마, 생일 축하해요』, 『도솔산 선운사』 등을 펴냈다. 또한 번역한 그림책 『대포알 심프』, 『바구니 달』, 『작은 기차』, 『엘리너 루즈 벨트』, 『마법 침대』, 번역한 동화 『사금파리 한 조각』, 『연날리기』, 그림책 이론서 『그림책 쓰기』,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공저) 등을 펴냈다.
첫댓글 글 잘 읽고 스크랩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