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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3일 Asan UBF 주일메시지
약한 것을 자랑하는 바울
말씀 / 고린도후서 11 : 16~12:10
요절 / 고린도후서 12 :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역사는 권리와 관련이 많습니다. 차별 당하지 않을 권리, 인간답게 살 권리, 역사는 권리를 보장받기 위하여 도전하고 응전하며 진행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가진 특별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고난 받을 수 있는 권리’입니다. 우리는 목자 선서에서 ‘자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하여 스스로 고난 받을 권리를 자랑하는 바울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드러내고자 스스로 약함을 나타내는 바울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스스로 고난 받을 권리를 나타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나타내기 위하여 스스로 약함도 드러낼 수 있는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Asan UBF
16~18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권위를 가졌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도 자신의 사도의 권위를 변론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하여 좀 유치한 방법을 사용하겠다고 합니다. 자기 자랑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짓입니다.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동안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자랑하려면 주 안에서 자랑하고 주님만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리석은 자랑, 자기가 자기를 자랑하는 일을 좀 하겠다고 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이런 자기 자랑은 주님이 시켜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 밝힙니다. 사람 앞에서 스스로 하는 자랑, 인간적인 자랑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육적인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자랑을 바울도 하겠다고 합니다. 분별력이 뛰어난 사도 바울이 왜 이런 자랑을 하려는 것입니까? 어리석은 자랑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Asan UBF
19,20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린도의 양들 때문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한 거룩한 성도들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리석은 거짓교사들을 분별없이 영접하였습니다. 그들이 초등 수준의 유대 율법주의로 옭아매고 영적으로 학대하고 착취하고 괴롭게 하는데도 그런 것은 시키는 대로 다 따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운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그런 뻔뻔한 일은 차마 할 수 없겠다고 합니다. 다만, 그런 어리석은 자랑을 양들 위해서 한 번 해보겠다고 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결코 따르거나 배울 사람들이 아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입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자랑 합니다. Asan UBF
첫째, 바울은 출신과 혈통에서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바울은 혈통적으로 베냐민 지파 사람입니다. 북이스라엘 아홉 지파는 앗시리아에게 멸망할 때, 대다수가 혼혈이 되었습니다. 소수가 남유다로 귀순하여 겨우 명맥이 이어졌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남유다에 속하여 순수 혈통을 이어왔습니다. 바울은 혈통적으로 정통 히브리인이며, 율법 교육을 제대로 받았습니다. 그는 바리새파 사람으로 율법학자로 당대 최고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바울의 가치관으로 볼 때, 출신과 혈연과 학연을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타나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이고 드러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런 인간적인 자랑을 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고린도의 양들이 유대에서 온 거짓교사들의 헛된 자랑을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악영향을 쉽게 받았습니다. 거짓교사들이 자랑하는 유대인 혈통, 율법지식, 격식, 절차, 허식, 허례에 마음이 넘어간 것이었습니다. 복음진리보다 그런 것에 귀 기울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자랑한 것들로 따지면 바울은 어떤 유대인보다 더 뛰어난 혈통을 가졌고 더 탁월한 출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출신과 혈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Asan UBF
둘째, 바울은 사명을 위하여 감당한 고난이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명을 감당하며 겪은 고난은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감옥에 갇혔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겪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39대의 매를 다섯 벗이나 맞았습니다. 세 번이나 몽둥이로 맞았고 한 번은 돌에 맞았습니다. 세 번 파산하였고 24시간 이상 바다에서 헤매기도 하였습니다.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들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신자들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밤에 잠을 못자기도 하였고 주리고 목마르고 수없이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기도 하였습니다. 양들 때문에 걱정하였고 양들이 죄 짓고 실족하면 심하게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바울이 받은 고난은 현실에서의 고난과 영적인 고난으로 나눌 수 있고, 사람으로 인한 고난과 자연 재해로 인한 고난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매 맞고 파산하고 강과 바다에서 위험을 겪은 것은 현실에서 육체적으로 겪은 고난입니다. 양들 때문에 근심하고 양들이 죄를 지으면 마음 아파한 것은 영적으로 겪은 고난입니다. 감옥에 갇히고 매 맞고 돌에 맞고 유대인들의 위험, 이방인들에게 당한 위험,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장관의 체포를 피하여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가야 했던 고난들은 사람에게 겪은 고난이며, 파산하고 바다를 떠돌고 강의 위험, 바다의 위험, 추위에 떨고 헐벗었던 것은 사명을 감당하여 겪은 자연환경에서 당한 고난입니다.
바울 보다 더 많은 고난을 받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고난 받은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죄 없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이만큼 고난 받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고난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라 자원하여 받은 것입니다. 이런 고난을 받으라고 누가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받은 고난은 그 아픔의 깊이가 깊었습니다. 바울이 받은 고난은 그 인내의 길이가 길었습니다. 바울이 받은 고난은 하나를 지나면 또 다른 것이 오고 그것이 지나면 또 다른 모양의 고난이 닥쳐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고난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자원하여 감당하였습니다. Asan UBF
셋째, 특별한 은혜와 영적인 체험에서도 자랑할 것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령한 은사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영적인 통찰력이 있고 구약성경에 정통하고 율법과 규례를 두루 섭렵하고 있었던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12장 1~5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와 환상을 받았습니다. 셋째 하늘이란 완전한 하늘,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완전한 곳을 의미합니다. 그곳에서 그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되는 계시의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근래 어떤 교회에서는 방언하는 분들이 방언 못하는 분들을 좀 낮추어 보는 일이 있었습니다. 방언은 은사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은사라고 하는데, 그에 비하면 바울은 얼마나 대단한 은사를 체험한 것입니까? 신비하고 수준 높은 영적 체험을 한 것도 사도 바울이 자랑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배운 바에 기초하여 사도 바울을 생각해보아도 사도 바울은 대단한 점이 많습니다. 바울이 성령의 감화 받아 기록한 로마서가 얼마나 복음 진리를 분명하게 하는 기독교 교리를 담고 있습니까? 그의 여러 서신들은 목회에 대하여 교회에서의 섬김과 헌신에 대하여 분명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의 선교 열정으로 이루어진 이동 거리는 얼마나 대단합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지중해 온 세계를 돌아다닐 때, 우리나라는 알에서 깨어난 석탈해가 신라의 왕으로 즉위하는 때였습니다. 대가야 금관가야가 건국되어서 낙동강가에서 신라와 열심히 싸우는 시대였습니다. Asan UBF
교통이 불편했을 때인데, 지금 다니기에도 먼 거리를 다니며 만방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제자를 양성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교회사에서 기초가 되었다면 사도 바울은 기둥과 지붕을 세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위대한 헌신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양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양들이 분별력을 갖게 하기 위하여 부득불 자랑하는 내용을 보면 그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의 고난은 자원하는 고난이었고 물러서지 않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는 고난 받는 것을 그리스도의 종의 특별한 권리로 알았습니다. 그는 이 권리를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더 고생하려는 의지, 더 많이 고난 받으려는 권리, 더 많이 수고하려는 자유를 행사하였습니다. 그의 고난은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순종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 받지 않기 위하여 삽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더 고생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고난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하여야 고생 없이 안락하게 사는지에 있습니다. ‘고난이여 오라’ ‘고생이여 와도 좋다’ 행여나 말이 씨가 되어 그런 것들이 찾아 올까봐 입에 담는 것도 부담스러워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을 가장 큰 보화로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서 주와 복음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이 최고라 여겼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배우고자 자진하여 고난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위대한 권리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Asan UBF
그가 고난 받았을 때, 그의 내면에는 주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새겨졌습니다. 고난 받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고난 중에 있을 때, 주님께서는 친히 위로하시고 사랑하시고 고난을 잘 감당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는 고난 중에서 예수님을 더 많이 느꼈고 고난 중에서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더 많이 받았습니다. 인간적인 사람들은 고난 받고 있지도 않으면서 고난 받을 까봐 불안에 떨며 근심 속에 살았지만, 그는 고난 중에서 오히려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는 고난의 사도였지만, 그는 기쁨의 사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하늘나라의 기쁨이 내면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는 확신 있게 양들에게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양들에게 전하는 자랑의 내용을 보면서, 우리도 기쁨이 충만하여야 함을 배웁니다. 그 기쁨이 우리의 삶이 나아가는 모든 길에 가득하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도 고난을 환영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자 하는 소원과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Asan UBF
현실적으로 보면,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지 않는다고 해서 평안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주를 위하여 고난 받지 않을 때, 죄가 주는 고난이 찾아옵니다. 이기적으로 사는 세상이 주는 고생, 이해관계로 인하여 사람이 주는 고난은 쓰라립니다. 우리의 삶은 절대로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 고난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고 또 밀려오기를 반복합니다. 고난 받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소용없습니다. 아름다운 고난, 기쁨을 주는 고난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와 함께 하려고 고난 받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12장 5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지금까지 한 자랑은 바울이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자랑은 거짓교사들에게 고린도 성도들이 하도 잘 넘어가기에 그런 기준으로는 바울이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알려준 것일 뿐입니다. 바울이 진정 양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울의 약한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7절에서 9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에게는 약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건강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라고 불렀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리고 그의 손수건을 갖다 얹기만 해도 병이 낫는데, 정작 자신은 병을 몸에 달고 다니니 참 안되었습니다. 힘에 지나도록 충성하고 수고하여야 하는데, 육체의 병이 있으니 충성할 수 없어서 괴로운 일입니다. 사람이 몸이 아프지 말아야지 몸이 아프면 가장 서럽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약점이 있음을 자랑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자랑이 된단 말입니까? Asan UBF
그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고도 밝힙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그는 이 약함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세 번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많은 외적 고난을 받았는데, 그 몸 안에 이런 고통스러운 병이 있으니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밖으로는 고생이요 안으로는 질병이요 이것을 없애달라고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였으니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만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외면한 사람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약점을 자랑하는 것입니까?
첫째, 사람들에게서 영광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사도 바울이 자기의 혈통과 출신과 업적을 자랑한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과장한 것이 없습니다.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자랑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람에게서 영광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사람들은 미담 듣기를 좋아합니다. 미담 듣고 눈물 짓고 인간 휴머니즘에 감동하며 사람을 찬양합니다. 사람들이 미담만큼이나 좋아하는 것이 영웅스토리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속성이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동일시 본능과 연결된 것일 수 있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이러 저러하게 하여서 오늘날 삼성이 세계 최고가 되었다’ ‘어느 금메달리스트가 내 초등학교 후배인데 사실은 걔가 이렇게 해서 이겼다더라’ 이런 얘기를 하면 말하는 사람은 쾌감이 있습니다. 이런 영웅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훌륭한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효과가 납니다. 또는 ‘그런 영웅스토리를 너희는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다’ 듣는 사람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고 말하는 자신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위대한 선생’으로 높이는 효과가 납니다. Asan UBF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의 영웅적인 업적은 좋은 소재입니다. 영웅담은 더해지고 부풀려져서 멀리 전파됩니다. 바울은 인간의 죄악된 속성을 잘 알았습니다. 사람을 높이고 사람을 영웅시하면서 사람들 중에서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을 잊으려 하는 인간의 본성을 잘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영광을 받지 않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냅니다. 더욱 널리 자랑합니다. ‘아니? 사도 바울이 그런 문제도 해결 못한 사람이었어?’ ‘아니 사도 바울이 그렇게 연약한 사람이었어?’ 확 깨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굳이 자기의 약점을 밝히고 이를 널리 알려 사람을 높이고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역사를 경계합니다.
둘째,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약한 것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는 예수님께 기도하게 합니다.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는 것을 많이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사실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무력함을 드러내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며 모든 열매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사실을 증언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강함과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최고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Asan UBF
사도 바울은 주와 복음을 위하여 고난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이 이룬 영웅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시고 세우시고 쓰신 이방인의 사도임을 분명하게 밝히지만 자신은 감추고 부르신 예수님을 높이기를 원하였습니다.
여러 형제자매님들과 목자님들이 그동안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수고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하여 일할 수 있도록 하신 분은 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애쓰고 힘쓴 것은 작은 기도였을 뿐, 실제로 일이 되게 하시고 성과를 얻게 하신 분은 오직 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골방에서 홀로 드리는 기도도 있고 주님께 드리는 작은 헌신의 모양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다 받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생명 살리는 선한 일을 다 이루시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만 드러내어 찬양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Asan UBF
Asan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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