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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의 교훈 (창11:1-9)
--------------------------------------------------------------------------------------- 바벨탑의 교훈, 창11;1-9 노아의 세 아들들로부터 사람들이 점점 더 번성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구음 곧 언어는 하나였습니다. 한 조상 노아에게서 나온 자손들이니 처음에는 동일한 언어를 사용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점점 더 동쪽으로 이동하여 가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에 모여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이 평지에 왔을 때 서로 말하기를, 성과 臺를 쌓아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들의 이름을 빛내고, 또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였습니다. 여기 성을 쌓는다는 것은 도시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하고, 대를 쌓는다는 것은 탑을 쌓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을 온 땅에 충만케 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 결국에는 인류의 마지막 축복인 언어의 통일성마저 상실하는 비극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그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우리 인간에게만 특별히 언어를 주셨습니다. 그 언어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하나의 말로써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범죄 후에 남아 있던 유일의 축복이다시피 했는데, 그 귀한 축복을 인간들의 헛된 욕심으로 인하여 상실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언어의 일치는 사상과 감정을 통일시켜 주는 지름길입니다. 통일된 하나의 언어는 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결합시켜 줍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타국에서 동족을 만나 같은 언어로 대화를 나눈다면 얼마나 기쁘고 반갑겠습니까? 그러므로 동족 간에 쓰여지는 하나의 언어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고 결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위에서는 하나의 언어라는 개념을 가질 수 없게 되었으며, 심지어 한 나라 안에서도 여러 종류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제주도 방언 : 폭삭 속았수다 -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와 같은 언어의 혼란과 무질서가 오게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그 까닭을 인간들이 쌓게 된 바벨탑 때문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게 된 동기와 목적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1. 불신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보지도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의견, 자기들의 생각대로만 성과 탑을 쌓았다고 했습니다. 3절을 보면 '서로 말하되' 라고 하였고, 4절에도 '또 말하되' 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서로 말하고 서로 의논하였다는 뜻입니다. 말이 같으니까 서로 말하고 서로 상의해서 바벨탑을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순전히 자기들의 뜻대로만 하는 것은 불신앙적인 악한 행동임을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 것 저 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신에서 나온 발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홍수 심판 후에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증표로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불신으로 가득찬 인간은 하나님께서 또 물로 심판하실 것을 대비해서, 큰 바벨탑을 쌓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불신의 죄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물로 심판한다 해도 이것을 인간의 힘으로 막아 보겠다는 교만의 죄이기도 합니다.
2. 온 땅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지면에 충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같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흩어짐을 면하자고 성과 탑을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흩어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니오' 한 셈입니다. 한국 교회는 모이기를 잘 합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러나 모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점은 모이기는 잘하는데, 흩어지는 면이 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이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흩어지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교회가 흩어지지 않으면, 누가 세상에게 축복을 전합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복음의 도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흩어져야 합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제자 훈련-'교회란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동시에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다' 보냄 받은 교회,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자각하지 못하면,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했던 제자들처럼, 교회 안에서 자기들의 은혜 생활에만 관심을 갖게 되고, 선교의 책임을 등한히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나 평양의 교회처럼 강제로 흩어버리실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 교회의 사활은 선교에 있는 줄 알아서 가든지 보내든지, 모든 신자들이 선교사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3. 자기들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4절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습니다. 자기의 이름만을 나타내려고 하는 사상을 공명주의라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들의 이름을 위하여 살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하여 살 자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름을 내기에 급급합니다. 인생들이 가장 명예롭게 사는 길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인데, 그 시대 사람들은 그것보다는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 내는 공명심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필로 라는 사람의 말을 빌리면, 당시 사람들은 벽돌 하나하나에 자기의 이름을 찍어서 벽돌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예측을 합니다. 높은 성과 대를 건축하여 그것을 누가 만들었는지 보고서 깜짝 놀라고, 그 탑을 쌓은 사람들을 후손들에게 알려주어, 대대로 존경받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 내는' 것을 인생의 주목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커다란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이루어진 명성을 흙속에 파묻어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역사 속에서도 바벨탑 건축자들의 이름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명예와 명성에 대한 애착은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적이고,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경우가 몹시 많습니다. 위대한 이름을 생의 목표로 삼는 자들은, 흔히 오히려 악명을 떨치고 끝나는 수가 많습니다.
거의 모든 민족을 정복하고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서 눈물을 흘렸다는 알렉산더 대왕은, 한 도시를 불태우고 탕아처럼 죽어 갔다고 합니다. 칼타고의 유명한 명장 한니발 장군은, 자신이 죽인 기사들로부터 탈취한 금반지만을 36리터나 소유했지만, 후일에 애통해 하는 사람이나 알아주는 이 없이, 이국 땅에서 독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800개의 도시를 정복하고, 적 100만 명의 피로 옷을 적셨던 시이저는, 위대한 승리를 기념했던 바로 그곳에서,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들에 의해 칼에 찔려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전 유럽을 전쟁의 재앙으로 몰고, 자신의 조국을 황폐케 한 나폴레옹은, 포로의 신세로 추방을 당하여 귀양살이를 하다가 비참하게 죽어 갔습니다.
이렇듯 세상적인 야망과 공명심만을 추구한 인간들의 종말은, 대부분 비참하게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명예욕은 인간의 3대 욕망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 식생활 문제가 해결된 사람들이 열심히 추구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명예입니다. 아마 우리 민족처럼 허장성세를 좋아하는 민족도 드물 것입니다.
일본에서 일했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동경 중심부에 한국 유학생과 제일 동포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를 짓고자, 돈 많은 실업인들을 초청해서 취지 설명을 했다고 합니다. 그 설명을 듣고는 모두가 대찬성을 하면서, 기쁨으로 그 일에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모인 20여명의 실업인들에게 1/20씩 기금을 헌납해 주도록 간청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두들 하는 말이 '내가 이 다음에 더 많은 돈을 번 다음 혼자 몽땅 지어 드리지요' 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기숙사는 10년이 지나도 짓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썩은 허영심, 썩은 공명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신자들의 공명심은 어떠할까요? 교계 분열의 많은 원인이 감투싸움 때문에서임은 우리 모두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명예욕은 남성들에게만 강한 것이 아닙니다. 여성들이 오히려 한술 더 뜨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망국적인 사치와 과소비 풍조는 바로 여성들의 헛된 허영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 조심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명예보다 티끌 같고 벌레 같은 자신의 이름 석자를 더 중요시하는 정신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적합한 큰 죄악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4.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게 된 동기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심사에서였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도 대를 하늘에까지 닿게 하여, 하나님과 같이 높아져 보겠다는 심사에서였습니다. 사탄도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다가 결국은 마귀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벨탑을 쌓던 시대에 만연했던 인간의 교만은, 현대인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서, 오늘 인간은 과학이라는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까지 창조할 수 있다는 교만, 무슨 시체를 냉동시켰다가 다시 살릴 수 있다는 교만 등등, 하나님의 주권과 영역까지 침범하려는 몹쓸 교만을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교만은 언젠가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인간들이 악하고 불순한 동기로 바벨탑을 쌓는 것을 감찰하신 하나님께서, 땅위에 강림하셨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은 정반대로 그 탑을 보시고 심판하시기 위해 높은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감찰을 받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모든 행위뿐만 아니라, 그 일의 동기까지를 다 살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거스르고, 헛된 공명심과, 하나님께 대한 도전적인 자세로 바벨탑을 쌓는 일을 그대로 묵과하시지 않고, 그 일에 대하여 심판을 단행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하나이던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므로, 탑을 쌓던 일은 그만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 버리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에 수많은 언어와 방언이 있게 된 이유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언어의 다양성으로 인해서 우리들이 겪고 있는 그 모든 불편과, 필요상 언어를 배워야 할 때 겪는 수고와 괴로움은, 바벨에서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께 반역한 죄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바벨탑 사건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을 살펴보았습니다.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은 행동은, 온 땅에 충만 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불순종이었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대신, 자기들의 이름을 내자는 공명심이었으며,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적이고 적대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인간들의 불순하고 악한 행동에 대하여 단호히 응징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바벨탑의 교훈을 오늘 우리들의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버러지 같은 자신의 이름 석자의 명예를 위주 하여 살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처럼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도록 사시기 바랍니다.
2) 헛된 공명심을 버리고 겸손한 삶을 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인격의 위대성은 겸손과 겸양으로부터 나옵니다. 부흥회를 통하여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만,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성장은 마음이 넓어지는 것이고, 그리고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닮아 가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바벨탑을 쌓는 일과 같은 헛된 일에 삶을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훈련으로 되는 제자' 라는 책의 저자는 '월터 A. 헨릭슨' 목사의 간증-공과 대학 재학 중에 네바다 산맥의 건설 공사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은 아주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힘든 일을 하는 동안에, 기사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별로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저 계산자나 만지작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자기도 기사가 되어 계산자나 손에 들고 슬슬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작업 지시나 내리는 사람이 되기를 결심했습니다. 토목 기사가 되어서 교량을 건설하고, 댐을 쌓고, 도로 공사를 하고자 하는 그의 목표는 확고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벧후 3:10에 있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는 말씀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읽는 순간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가 그때까지 건설하기로 했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오셔서 파괴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사르리라고 이미 말씀하신 것들을 만들기 위해서, 그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동안, 이 말씀도 읽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그림은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교량과 댐들을 건설합니다. 하나님이 그 뒤를 따라 다니시면서, 그것들을 불태워 버립니다. 그리고 그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는 역시 빈손으로 떠납니다. 얼마나 실망되는 장면입니까? 그래서 그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해서, 나의 삶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왜 내가 70평생을 죽도록 투자해 놓았다가, 후에 하나님께서 불사르실 것을 내 눈으로 봐야 하고, 끝내는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불사르지 않을 영원한 것들을 위해 180도 회심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열심히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혹 언젠가 하나님께서 헐어 버리실 바벨탑 같은 것을 쌓느라고 정신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예화-1. 고향 친구의 아버지 이야기. 2. 성공한 미국 교포의 참사 이야기) 이들 모두가 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입니다.
사실 인류의 문명이라는 것 자체가 바벨탑과 같은 운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에는 반드시 무너지고 종말이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건축을 어떻게 할 것인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산상보훈을 통해서 두 가지의 인생을 그림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입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는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과 똑같은 어리석은 인생들을 말합니다.
건축한 후에는 반드시 준공 검사가 있습니다. 성공적인 인생 건축은, 준공 검사에 합격을 해야 합니다. 어떤 인생 건축을 했는가에 따른 하나님의 준공 검사가 반드시 있습니다. 세운 공력 따라서 영영 상벌이 있습니다. 인생 건축은 반석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집은 돈 위에 세워져서도 안되고, 사업 위에 세워져서도 안되고, 자식 위에 세워져서도 안되고, 권력 위에 세워져서도 안되고, 건강 위에 세워져서도 안되고, 취미 위에 세워져서도 안되고, 오직 반석 위에 세워야 합니다. 이 반석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말씀 위에 세워지고, 믿음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을 따라 공력을 세운 사람은 반드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남들 잘 때 기도한 사람, 남들 놀러 다닐 때 봉사한 사람, 모두 자기만을 위해 살 때 주를 위해 헌신한 사람, 모두들 통장에 투자할 때 하늘 창고에 저금한 사람,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랑을 베푼 사람,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한 사람,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 맡은 직분을 충실히 감당하려고 힘을 쓴 사람, 성도들의 화목과 교회의 평안을 위해서 애를 쓴 사람, 잃은 영혼을 건지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전도하고 선교한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세운 공력을 따라서 반드시 상급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바벨탑과 같이 하나님께서 헐어 버리고 불태워 버리는 것이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바벨탑 사건이 주는 교훈(창세기 11:1-9) - 계강현 목사(주일 연합목장예배)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인류는 원래 한 언어로 말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당연히 그렇지 않겠나? 그런데 v9에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드셨다는 말씀이 나오고 온 지면에 흩으셨다는 말씀이 나온다. 왜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드시고 흩으셨을까? 이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가? 1.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기 탑을 쌓는 걸 기뻐하지 않으신다. 처음에 언어가 하나였을 때 사람들은 시날 평지에다 바벨탑을 쌓았다. 시날 평지는 오늘의 이라크 지역이라고 알려져 있다. vv3-4,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무슨 말인가? 탑을 건설하는데,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걸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거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성을 쌓고,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보다는 자기 인간의 탑을 쌓겠다는 거다. 꼭대기까지 올라가 자신이 하나님 같아지겠다는 불경한 생각이고, 하나님 노릇하겠다는 교만이다. 바벨탑 사건은 인간은 항상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생각이 가득하다. 불신자건 신자건 인간의 문제의 본질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려 하지 않는 것이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거부하는 모습이 마치 진흙이 도자공에게 불만을 터뜨리며 대적하는 꼴이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이 하나님 노릇하려는 인본주의의 탑을 쌓지 못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드셨다. 현대 돈의 바벨탑을 쌓고 있다. 세계 경제를 주름잡고 있는 미국의 영어를 중심으로 돈의 언어로 세계 언어가 통일되어 가고 있다. 사상도 이데올로기도 종교도 돈 앞에서 다 무너지고 있다. 돈이 라면 죄도 달게 짓는다. 지금도 계속해서 이 돈의 바벨탑이 세워지고 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돈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 돈 몇 푼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신앙과 양심을 팔아버린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주님 말씀하시지 않았나? 오눌의 시대의 흐름을 보면서 다시 바벨탑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정신 차리고 영적으로 깨어 야 한다. 돈에 미치지 말고 돈을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린다.
2. 인간들로 침묵을 배우게 하신다. 오늘 본문 말씀에 v3에,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v4에도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여기 보니까 말하고 또 말하고 그랬다. 이게 다 말이 서로 통하니까 말로 다 해결했다는 얘기다. 하도 말이 많고 말로다 죄만 지으니까 하나님이 말이 통하지 않게 혼잡하게 만드셨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면 처음에는 좋은 얘기하다가 조금 지나면 그냥 세상얘기, 별로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드라마나 스포츠 얘기들로 넘어간다. 나중엔 남의 사실과 정보를 얘기하다, 더 지나면 남 험담과 비난으로 진행된다.
가정교회 지역모임을 가면 영혼 구원, 제자 삼기에 대해서만 집중해서 얘기한다. 우리 목장 모임은 그런 의미에서 얼마나 좋은 모임인지 모른다. 모이면 주일설교 말씀 요약과 적용을 나누고, 한 주간동안 하나님께 감사한 것 한 가지, 기도제목 한 가지를 나눈다. 얼마나 좋은 영적모임인가?
그런데도 이 목장모임을 안 좋은 모임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모여서 세상 얘기하고, 목사님과 성도들 비난이나 하고 있다 보면 그렇게 된다. 기껏 모여가지고 “왜 매주 밥을 먹어야 하지?” 뭐 이런 얘기나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흩어버릴 모임이 되고 만다. 외국에 나가서 말을 못하면 입이 있어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인간들이 말이 안 통하면 침묵하게 된다. 서로 말이 안 통하니까 입을 다물게 되는 거다. 입을 다물게 되니까 사람이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게 되니까, 그 다음에는 번뇌가 생기고 고민이 생기고 곤고해지고 그러면 그 다음에는 기도하게 된다.
그런데 서로 말이 잘 통하고 만났다 하면 2~3시간씩 얘기하다 보면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새가 없다. 말하기도 바쁜데 어떻게 기도를 하냐? 말이 많아지니까 쓸데없는 말이 많이 들어가는 거다. 그러니까 침묵이 더 좋다는 얘기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들로 하여금 침묵하게 하시려고 언어를 혼잡하게 했다. 침묵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의미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많은 문제들이 있다. 우리가 당하는 많은 슬픔과 고난들이 있다. 거기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말을 많이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며 침묵하며 기도할 때 거기에서 해답이 나온다.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보면서 침묵하셨듯이, 우리도 침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거기에서부터 해답이 나온다.
한편 오늘날 도시나 시골이나 자동차가 있고 TV나 인터넷이 있다.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살아도 이제 도시 사람이나 시골 사람이나 너무 바빠서 하나님과 만날 시간이 없다. TV를 보거나 스마트폰으로 거의 날마다 몇 시간씩 게임을 해도 성경을 보거나 기도하는 데는 거의 시간을 내지 않는다. 침묵하지 않고 묵상하지 않는 크리스천은 깊이가 없는 크리스천이 되고 만다. 쓸 데 없는 말, TV나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같은 문명의 이기에 주님과의 시간을 놓쳐버리지 말라. 주님을 날마다 묵상하며 깊이 있게 살자.
3. 땅에 충만하도록 복음 전하라 하신다. v4의 말씀을 잘 살펴보자.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바벨탑을 쌓은 이유 중에 특히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의도가 무엇일까?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는데, 바벨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도전하여 ‘흩어짐을 면하자!’고 외쳤다. 왜 하나님이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을까? 그 이유는 죄로 관영하게 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을 충만하게 하여,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라는 얘기이다. 신약 성경적으로 얘기하면, 마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땅에 충만 하라는 뜻이다.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사건이다. 반면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를 하나로 모으신 사건이다. 오순절 날 보혜사 성령님이 강림하자, 모여 있던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고 각 나라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전 세계에 흩어진 나그네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절기를 지키러 올라왔다가 자기 지역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말하는 것을 들었다. 복음전도를 위해서 하나님이 온 세상의 언어를 하나로 통하게 하신 상징적인 사건이 오순절 날 방언의 의미이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서 교회가 시작되고, 복음전파가 시작되어 세계로 전파되게 된 것이다.
행 8장에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나서 사도 외에는 모든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허용하셨을까?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말씀하셨는데, 예루살렘 교인들은 예루살렘에서만 머물러 흩어지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모여서 먹고 마시고 재미있게 살았던 거다. 하나님이 강제로 흩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그게 바로 사도행전의 선교역사다. 목장에서 늘 자기들끼리 모여서 나눔 하면서 서로 좋게만 지내고, 그냥 3년이고 5년이고 VIP 한 명 구원하지 못하고 세월만 지나간다면 그거 하나님께서 흩으시는 거다. “안되겠다. 너희 모이는 목적이 뭐냐?”, “서로 떡을 떼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그런 수준에 머물지 말고 흩어져서 복음을 전해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핍박을 허락하셔서 흩어지게 하셨다. 오늘 우리 목장과 교회를 하나님이 보시면서 “안 되겠다! 흩어야 되겠다!” 이런 마음을 먹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모여서 남 험담이나 하고 있으면 절대 안 된다. 서로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길 뿐만 아니라, 영혼구원, 제자삼기에 동참하여 우리가 먼저 알아서 땅 끝까지 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부탁드린다. 이사벨라 목장의 청년들과 3년 전에 처음 목장을 시작하면서 꼭 지원하고 있는 필리핀 이사벨라로 단기선교를 가자고 약속하고 기도하며 준비했었다. 3년 만에 그 꿈이 현실이 되어 오늘 출발하게 된 거다. 바라기는, 각 목장이 후원하고 있는 선교지 선교사들에게 꼭 한 번 목원들이 함께 단기선교를 다녀오는 꿈을 꾸고 계속 기도하면 좋겠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꿈꾸며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이뤄주신다.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가 영혼구원, 제자삼기, 선교하기에 계속 도전하며 전진하기를 기대하신다. 아멘. ----------------------------------------------------------------------- 바벨탑 사건의 네 가지 의미 (창세기 11:1~9)
서론
창세기 11장에는 유명한 바벨탑 사건이 나옵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인류의 언어가 혼잡하게 되고 민족이 분산된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는 창세기 10장 2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창 10:25). 벨렉이 태어났을 때 세상이 나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벨렉이 태어났을 때 바벨탑 사건이 일어났고 언어의 혼잡이 와서 말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서 민족이 나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벨렉이라는 사람은 언제 태어났느냐?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아르박삿은 삼십오 세에 셀라를 낳았고 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셀라는 삼십 세에 에벨을 낳았고 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고” (창 11:10~16). 셈의 아들은 아르박삿이고 손자는 셀라고 증손자는 에벨이고 고손자가 벨렉입니다. 그리고 셈이 홍수 후 100세가 되었을 때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고 셀라는 30세에 에벨을 낳고 에벨은 34세에 벨렉을 낳았습니다. 이것을 계산해보면 홍수가 끝나고 101년 만에 벨렉이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홍수가 끝나고 100년 동안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인구가 불어나기 시작했지만 그들이 흩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언어도 하나였습니다.
그러면 바벨탑 사건 일어나기 전에는 어떤 언어를 사용했겠습니까? 중국말이겠습니까? 미국말이겠습니까? 노아가 쓰던 말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노아가 쓰던 말을 셈이 썼을 것 아닙니까? 셈의 아홉 번째 후손이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이 히브리어를 썼으므로 아마도 히브리어를 썼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어떤 언어인지 몰라도 노아가 썼던 언어임이 분명합니다. 노아가 사용하던 언어 한 가지로 다 소통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01년이 지나 벨렉이 태어났을 때 바벨탑 사건이 일어나고 언어의 혼잡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전 세계에 약 6000개 정도의 언어가 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영어를 배워도 막상 미국사람을 만나면 그냥 웃기만 하고 못 알아듣는데 6000개의 다른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언어끼리도 사투리를 쓰면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울 사람이 경상도에 가면 못 알아듣는 말이 있고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에 가도 못 알아듣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원래 우리 교회에 오기 전 부산으로 오라고 초청을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러 갔는데 제가 성도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언어도 다르게 사용되는데 언어가 완전히 달라지니까 민족이 분산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창세기 11장은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언어의 혼잡이 왔다는 역사적인 사실만을 말씀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네 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Ⅰ. 바벨탑은 하나님을 향한 반항이다
사람이 탑을 세우는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하나님이 탑을 세웠다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탑을 세운 것이 잘못이 아니라 탑을 세우려는 이유와 동기가 중요한 것입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 11:3~4). 노아와 그 후손들이 방주가 도착한 아라랏 산에서 동쪽으로 이주해 시날 땅 바벨이라는 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탑을 세우려는 동기 두 가지가 여기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첫째, 우리 이름을 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름이 아니라 우리 이름을 내자고 한 것입니다. 둘째,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세 아들들에게 흩어져서 온 땅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 9:1). 그런데 불과 홍수가 끝난 지 100년 만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흩어지라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활용했습니다. 시날 땅은 평지이기 때문에 돌이 없었습니다. 대신 흙을 뭉쳐서 불에 구워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벽돌을 그냥 쌓으면 고정이 안되니까 접착제로 역청을 사용했습니다. 역청은 바벨론 지역과 사해 지역에 많이 나는 것으로 오늘날로 하면 아스팔트입니다. 벽돌과 역청을 사용하여 소위 지구라트라고 불리우는 큰 탑을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악용하여 하나님께 반항하는데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권위에 불순종하고 반항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죄입니까? 사무엘상 15장 23절을 보면 사울 왕을 향해서 사무엘 선지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삼상 15:23).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은 박수무당의 죄와 같고 귀신을 숭배하는 죄와 같다는 것입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사울 왕은 결국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관해 말씀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사울 왕은 왕위에서 쫓겨났고 바벨탑 사건은 인류의 언어 혼잡을 가지고 왔고 결국 민족이 분산되어 민족끼리 싸우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Ⅱ. 바벨탑은 영적인 지도자에 대한 반항이다
바벨탑이 지어질 때 노아는 살아있었습니다.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지내었고” (창9:28). 노아가 600세에 홍수가 일어났고 홍수 후에 350년을 더 살았으니까 950세에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홍수가 끝나고 101년 째 벨렉이 태어났을 때 바벨탑 사건이 일어났으니까 당시 노아는 701세였던 것입니다. 250년은 더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셈은 몇 세였느냐?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11:10~11). 셈은 100세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을 낳은 후 5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고 했으니까 600세에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고손자인 벨렉을 낳을 때의 나이는 불과 200세밖에 안됩니다. 그러니까 바벨탑 사건이 일어날 때 노아도 살아있었고 셈도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더 이상 노아와 셈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1장 2~4절을 보면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이 더 이상 노아와 셈의 말을 듣거나 의견을 묻지 않습니다. 영적 지도자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말합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 11:3).
하지만 서로 말한다고 해도 언제나 주동자가 있는 법입니다. 유대 역사가인 유세비우스라는 사람은 바벨탑을 쌓도록 주동한 사람이 니므롯이었다고 했습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군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창 10:8~10). 니므롯은 바벨탑 사건이 일어날 때 사람들에게 영웅 취급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아와 셈의 말을 듣지 않고 니므롯의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반항해서 약 10억의 인구가 모두 물에 빠져죽는 것을 현장에서 직접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100여 년이 지나자 또 다시 자신의 후손들이 큰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향해 반항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노아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100년 만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10억의 인구가 죽는 심판을 내리셨다는 것을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1953년생입니다. 그러니까 6・25 전쟁이 끝나기 전에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공산당이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공산당이 얼마나 잔인하고 사악한 집단인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6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자녀들은 벌써 6・25 전쟁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6・25 전쟁이 남침이냐고 물어보면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합니다. 역사의 교훈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불과 100여 년 전의 실수를 노아의 후손들이 그대로 하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겠습니까? 바벨탑 사건은 이처럼 영적인 지도자의 말에 반항한 사건이었습니다.
Ⅲ. 바벨탑은 복음에 대한 반항이다
바벨탑을 쌓으려고 했던 가장 중요한 동기는 탑의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탑을 하늘에 닿게 해서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천국에 들어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 100층이 넘는 건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빌딩들도 하늘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벽돌을 쌓아서 하늘에 닿으려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어리석고 유치한 생각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제외한 인간의 모든 종교가 바벨탑의 사상과 똑같은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선을 행하고 도를 닦으면 그 영혼이 천국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헛된 생각입니다. 인간은 결코 자기 힘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강림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창 11:5).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 11:7).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복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시면서도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단수로도 쓰고 복수로도 쓰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 내려오신 사건입니다. 제2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내려오신 사건이 복음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로 올라가서 모셔올 수도 없고 음부로 내려가서 모시고 올라올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노력으로 천국에 오는 것은 어림도 없다. 그러므로 나를 믿으라. 나를 믿는 자는 아무리 죄가 많아도 용서해주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주겠다. 나를 믿는 자는 나와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고 영원히 산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성령을 선물로 받아 이 세상에서도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게 된다.” 세상에 강림하신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바벨탑의 종교는 이런 복음에 반항하는 종교입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탑을 쌓아 하늘에 오를 수 있다며 자신의 능력을 과신합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저 주시는 복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Ⅳ. 바벨탑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행복에 반항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는 에덴동산에서 평안하고 안전하게 모든 것을 공짜로 먹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하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기쁨도 잃어버리고 안전과 축복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땀을 흘려야 겨우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행복을 발로 차버리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대접받고 평안하게 살았지만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니까 배에서도 쫓겨나 삼일 내내 물고기 뱃속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탕자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할 때는 평안을 누리며 부요하게 지냈지만 아버지 집을 떠나보니 잠깐은 즐거웠지만 결국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지만 그것마저 주는 이가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항하면 가난과 비참이 오는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인간은 언어의 혼잡과 민족 간의 갈등이라는 엄청난 재앙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정성스럽게 쌓아올리던 바벨탑도 더 이상 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어가 혼잡하게 되니까 함께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벨탑은 결국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인생은 결국 헛수고요 폐허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결론을 맺으면서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이것은 제가 어느 장로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한 골프대회에서 박인비 선수가 1등을 하고 유소연 선수가 2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소연 선수가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이 속한 소속사의 회장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유소연 선수가 그 회사의 광고를 다 찍게 되었다고 합니다. “OOO 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한마디 때문에 골프대회 상금보다 광고로 돈을 더 많이 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개 기업 회장에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로 대박이 났는데 우리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사람은 얼마나 더 대박이 나겠습니까?
하나님께 반항하고 영적 지도자에게 반항하고 복음에 반항하는 것은 결국 자기 행복에 반항하는 것입니다. 불순종과 반항은 좋은 것을 빼앗아버리지만 순종과 믿음은 항상 좋은 것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면 우리는 대박 나는 것입니다.
제 아내가 가끔 아침마당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좋은 이야기가 있으면 소개해주는데 최근에 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하는 한 사람 이야기를 저에게 해줬습니다. 그 사람은 중학교를 다니면서 얼마나 가난했던지 학생복 바지 살 돈이 없어서 누나 바지를 줄여서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미국에 건너가 조그만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하다가 기업을 차렸는데 이게 대박이 난 것입니다. 그러다가 회사를 팔았는데 무려 3조원에 팔렸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좋은 집도 사고 호화스럽게 살았는데 아무리해도 즐겁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길로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들어와 강의도 하고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면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어릴 때 돈이 없어 학생복 바지도 사입지 못하던 사람이 3조원을 번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다 이렇게 대박 나는 인생 살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에 행복이 오고 부요가 오고 안전이 오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시 113:5~9).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켜주시고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대통령과 함께 앉게 해주시고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해주시는 이 대박의 복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또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